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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0. 2. 26) 1강 녹취록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2010. 2. 26)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2. 26) 4-1

에스겔 3장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먹으라”고 했고, 그 다음 7절에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이 여기 있는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라고 하시면서 에스겔에게 찾아왔습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은 말씀의 덩어리가 한꺼번에 다가오는 것이지요. 이것을 깔때기로 봅시다. 이 깔때기가 에스겔을 인자로 바꾸지요. 인자 되게 하는 겁니다. 인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이 에스겔을 인자 되게 하는데 깔때기가 있고 깔때기 위에 모든 말씀이 다 (부어져)들어가지요.

여기 부어지는 말씀의 덩어리는 에스겔이라는 몸체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됩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에스겔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만약에 신자라면 오늘날 신자도 전부 에스겔처럼 되어야겠지요. 깔때기를 통해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그 말씀이 바깥으로 전해지는데 이 말씀을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들을 때, 이것은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에스겔 영역과 바깥 영역은 점점 더 갈라집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오늘 공부할 것을 본격적으로 해 봅시다. 12절에 보면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라고 했는데,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은메달, 동메달을 딴 선수가 금메달을 딴 이승훈 선수를 번쩍 들어 올렸어요.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첫째시간은 이 대목을 깊이 있게 살펴볼 겁니다. ‘주의 처소’지요. 3장에 보면 에스겔이 있는 영역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영역이 구분되어 있고, 방금 제가 질문한 것은 에스겔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했고, ‘에스겔 당신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나는 선지자입니다.’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나 되기 위해서 나를 번쩍 들어 올리는데, 누가 올립니까? 성신이 나를 올리고, 그 성신은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하게 합니다.

자, 여기서부터 확대하겠습니다. 인자와 에스겔을 확대하게 되면, 에스겔의 이야기를 왜 못 알아들었는가 하면, 에스겔이 있는 이곳, 깔때기로 말씀 덩어리가 채워진 이곳이 주의 처소가 되었고, 주의 처소는 주변에 성신으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뭘 보여주는가 하면, 주님의 처소가 같이 움직이는 것이 되는데, 이 주의 처소에는 성신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도 같이 움직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뭐냐? 그 사람 내부가 주의 처소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남이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김연아가 아무리 연습해도 도저히 우리를 못 따라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 우리 안에 주님의 처소가 발생되는 것.

이런 주의 처소가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시상대를 만들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주여, 이제는 종을 편히 쉬게 하시는군요. 내가 이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지금까지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늘나라 애국가가 들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김연아가 금메달을 땄는데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사다마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연아가 또는 아사다마오가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인데, 그것이 있는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제가 성도를 말씀 덩어리로 보는 이유가 뭔가 하면, 교회 다니는 연습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도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서 에스겔이 전한 그 말씀 덩어리를 전하는 거예요. 그러면 바깥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나오는 장로나 집사들이 말씀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지요. 이것이 바로 에스겔 3장의 내용입니다.

‘에스겔아, 말씀을 먹어라.’ 그리고 그 먹은 말씀을 전하면 주변 사람들이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다? 도저히 못 알아듣지요.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은 김연아나 아사다마오처럼 ‘네가 하면 나도 한다.’라고 흉내를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흉내만 내지요. 흉내를 내는 것은 연습하면 가능합니다.

아무리 연습하고 흉내를 내도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은밀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외부사람들이 아무리 흉내를 내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에스겔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거룩한데, 이 거룩이란 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레위기에서 나옵니다. 레위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출애굽기에서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시내산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 원판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원판은 깨어지고 복제판을 만들지요. 복제판 만들 때 누가 개입하는가 하면, 인간의 손이 개입됩니다. 모세가 만들지요. 복제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이미 너희는 언약을 깨뜨린 자다.’ 언약을 새삼스럽게 지키는 자가 아니고, 이미 언약을 위배한 자를 품고 주께서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인도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위반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그 중앙에 이스라엘의 본질, 언약을 깨뜨린 자라는 그 본질이 담겨 있고, 레위기 3장에 보면 제단에 피를 뿌리게 되어 있어요. 이미 언약을 깨어진 상태입니다.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는 그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아사다마오가 기독교 신자 되려고 시도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냥 피겨 스케이트나 타라고 하세요. 하늘나라에서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본인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없고 깨뜨린 자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필요합니다. 그 외에는 필요 없어요. 세리, 창기가 필요한 거예요. 훌륭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이 거룩이란 것이 레위기에서 오는데, 그 전에 출애굽기를 이야기하겠는데, 출애굽기에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근접한 장소에서 만나게 됩니다. 만날 때 모세는 반석위에 그냥 서있고 하나님이 지나가지요. 그렇게 되면 반석위에 있는 모세가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하나님은 지나가면서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 입을 자에게 긍휼을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비와 긍휼이 모세로 하여금 항상 stop(정지)시키죠. stop 시키게 되면, 모세는 은혜를 받아야 살고 자비를 받아야 산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모세로 하여금 언약 위반자로서 정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자기가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언약 위반자가 아니야. 나는 잘만 하면 말씀 지킬 수 있어.’ 이렇게 나서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나 자비를 베푸는 입장이 아니고 지상에 있는 인간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만약에 인간이 나서고 설치게 되면 무슨 의식이 날아가는가 하면, 나는 언약을 안 깨뜨릴 수 있다는 의식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됩니다. ‘잘만 하면 하나님 말씀 지킬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언제까지나 죄인 취급받는 것은 싫어. 얼마든지 의인 될 수 있고,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데 왜 평생을 죄인 취급 받아야 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가만히 있어!’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그래서 내가 설치게 되면 하나님이 stop 돼요. 화살이 날아가면 화살의 색깔이 안보입니다. 이 안 보이는 것을 보기 위해서 잡습니다. 잡는 순간 stop 되지요. stop 되면, 날아가야 할 것이 정지되었지요. 이것은 동사에서 명사로 바뀐 거예요. 원래 화살은 날아가는 것인데 인간들이 이것을 어떻게 왜곡하는가 하면 ‘이것은 내 손에 잡혔으니까 stop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stop 된 것을 가지고 ‘동시성’이라고 합니다. ‘동시성’이 뭔가 하면, 앞과 뒤가 똑같다는 거지요. stop 되었으니까. 여러분, 날아가는 파랑새가 파랑새입니까, 손에 잡힌 파랑새가 파랑새입니까? 날아가야 새가 새답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날아가는 것은 정확하게 안 보이니까 내가 그 새를 잡아놓고 ‘빨리 그림 그려!’ 그러면 그 그림에 있는 새는 동사가 아니고 명사가 되지요.

우리는 항상 뭐든지 명사로 만들어서 해석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명사기 때문에, 내가 stop이기 때문에 너도 나와 같이 stop으로 잡아서 사태를 파악하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내 행함에 대해서 긍정하게 됩니다. ‘내가 왜 언약을 깨드려. 내가 왜 죄인이야? 하나님! 말씀 주옵소서.’ 말씀이 움직이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잡아요. 그래서 지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이며, 예수님을 죽었던 사고방식입니다.

사람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인자와 자비를, 말씀 덩어리가 결국은 인자와 자비인데, 인자와 자비를 망태기에다 담아버리면, 인자와 자비는 동사지요. 움직이는 겁니다.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인자와 자비가 넘쳐.’ 라고 하면, ‘2월 26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인자야?’ 라고 묻는다면 그 물음이 합당치 않지요. ‘아니, 우리 할머니는 늘 인자하셔.’ 이렇게 되거든요.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인자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할머니, 이쪽으로 와 보세요. 할머니 인자 내 놓으세요. 감사합니다. 우리 할머니는 인자하셔.’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날아가는 화살을, 날아가는 인자를 내가 붙잡아서 내 주머니에 넣고 하는 말이 “주여, 인자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어요. 그러다가 교통사고 나서 다치면 “하나님, 인자로우신 분이 왜 이런 일을 일으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인자가 나를 망태기에 담아서 인자가 변화됨에 따라서 같이 변화되는 거예요. 인자가 롤러코스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자(롤러코스트)를 잡아버리면 인자는 제일 싫어합니다. 우리는 인자의 망태기에 담기기 때문에 인자가 위로 올라가면 우리도 위로 올라가고, 우리가 차사고가 나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인자를 느끼고, 로또 복권 100억에 당첨되면 그곳에서 인자를 느끼고, 인자는 롤러코스트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우리도 같이 타면 인자가 없을 때가 없고 자비가 안 올 때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약 위반자였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가해자입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가해자로써 주를 따라 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어느 한쪽에 고정시켜놓고 인자를 고정된 지점에다 퍼 담으려 하니까 ‘내가 원하는 인자가 아니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처음에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서 계약했던 그 계약에 위반됩니다.

출애굽기 34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돌판을 처음 것과 같이 만들어서 올라오라고 하시고, 모세가 그 만든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6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하나님은 이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입니다. 이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경우이냐 하면, 9절에 보면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이것이 하나의 계약인데, 주님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하면, 우리는 목이 곧고 처음부터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할 경우에만 만남이 되지요. 우리는 천하의 죄인인데 이런 죄인도 주께서 용서하시니까 그보다 더 위대한 자비가 어디 있으며 긍휼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것은 간단하지요.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고, 죄가 많고, 악을 저지르는 자다.’ 이런 모습으로 인자의 자비에 끌려가서 롤러코스트를 타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의 코스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데,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것은 멸망의 과정을 통해서 인자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언약을 이야기할 때 상자(궤)로 이야기합니다. 노아 언약은 뭘로 이야기합니까? 처음에는 방주였고 나중에는 하늘의 무지개였지요. 그렇다면 이 모세 언약의 언약 상자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이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우리가 바로 하나님 언약을 깨뜨린 장본인입니다.’ 라는 증거가 들어 있어요. 그러면 이 언약 상자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면 뭐가 되겠습니까? 우리 안에 언약궤가 있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내가 말씀을 지켰다는 말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합니다.’ 이러면 된단 말이지요.

‘우리가 세리고 창기며 저주 받을 사람입니다.’ 이러면 된단 말입니다. 그 언약이 나중에 새언약으로 바뀌거든요. 새언약으로 바뀌면 거기에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는데, 우리는 가해자가 되고 예수님은 피해자가 되셔서 우리 안에 살과 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거룩이고 자비고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듯이 김연아가 열심히 노력하고 좋은 코치 만나서 잘 지도 받으면 금메달을 딸 수도 있지만 언약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방금 출애굽기를 이야기했는데, 레위기에 대해 살펴봅시다. 레위기는 어렵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위기는 ‘우리가 바로 제물이다.’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입니다. ‘목사님, 우리 아이가 고3인데 대학을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는데, 제 답변은 하나뿐입니다. ‘제물이 되세요.’

내가 있는데 내가 소나 양이나 염소로 바뀌면 돼요. 내가 혼자 있을 때는 내가 무릎 꿇을 사람도 없고 경배할 사람도 없고 섬길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소나 양이나 염소가 되면 나보다 더 거룩한 분이 내 앞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제 딸의 말에 의하면 지금 독일에서는 한국인 기독교 연합 집회가 있답니다. 자기도 가보고 싶데요. 그래서 제가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은혜 받기를 원해요(?). 은혜 받는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인간이다.’ 라고 하다가 인간에서 제물로 바뀌는 것이 은혜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면 나밖에 없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러나 제물이 되면 나는 누구에게 이며 바쳐진 제물, 바쳐진 존재가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너는 제물이다.’ 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산 제물이 되어 바쳐진 존재가 되었다.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제물 된 것처럼 너도 예수님과 같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 되어라.’ 제물이 되면 어떤 것이 좋으냐 하면, 첫 번째는 내가 내 인생을 책임 안 져도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래가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제물 자체가 인격 완성이라는 겁니다.

제물이 되면 내가 내 인생을 책임 질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안 받지요. 어차피 나는 이미 하나의 제물이니까. 카프카가 쓴 ‘벌레’라는 단편 소설이 있어요.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니까 처음에는 가족들이 안타까워하며 챙기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니까 무관심해 져요. 사람이 벌레가 되듯이 우리가 제물이 되면 내 인생을 내가 책임 안 져도 돼요. 그러니까 벌레 된 사람이 다시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애쓸 필요 없이 그냥 벌레로 살면 되는 거예요.

제물이 되면 좋은 점이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미래는 어떤 사람만 필요한가 하면 제물 된 사람만 필요해요. 제가 지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가 로마서 15장 16절을 읽어보세요.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께 제사장 직분을 받았는데, 제사장 직분은 구원 받을 이방인을 제물로 간주해서 성령 안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나의 직무다.’ 라고 했지요.

방금 읽은 로마서 15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이방인으로 하나의 제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물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하나님 나라에 바쳐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제물이 되면 우리를 누가 먹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먹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뱃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마치 우리가 예수를 먹어야 하듯이. 그런 관계에 들어가요.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레위기에 보면 화목제의 경우 제사장이 제물을 먹어요. 그런데 이 제물이 탈 때 냄새가 나는데 그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해요.

레위기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절차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서 그것을 태울 때, 그 때 나는 냄새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아, 참 냄새 좋다.’ 라고 하신단 말이지요. 이거 너무 엽기적이지 않습니까? 양과 소가 태워질 때 본인은 고통스러운데 그 냄새를 하나님이 맡으면서 기뻐하시는 것이 레위기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통닭구이 냄새를 맡으면서 ‘맛있겠다.’ 하는 것처럼.

왜 그 냄새가 맛있는가 하면, 그 제물이 어떤 제물인가 하면, 거룩한 제물이기 때문에 그 제물이 타면서 거룩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의 코에 들어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굉장히 흡족해 하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레위기는 아주 섬뜩하지요. 죽어가는 제물의 존엄성이나 가치, 인격성 그런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어요. 그저 향기로운 냄새만 피우면 하나님은 아주 흡족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물 되게 인생을 책임지시고 미래를 보장하시고 제물 자체가 미완료가 아니라 완료입니다. 제물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우리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인데 왜 이렇게 사는가?’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지요.

‘하나님의 제물인데 너는 왜 이렇게 사느냐?’ 그러면 그 기준이 뭔가 하면, 제물의 특징은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거기에서 뭐가 빠져나오는가 하면, 우리를 제물 되게 했던 거룩이 나오지요. 자, 봅시다. 인간이 있는데 여기에 거룩이 오게 되면 인간은 뭐로 변한다? 하나의 제물로 변한다. 그런데 이 제물은 뭘 품고 있다? 들어왔던 거룩이 하나의 요소로 품고 있다. 그런데 제물이 죽으면서 거룩이 나온다. 이 제물이 타면서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거룩을 주신 것은 제물을 통해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기 위한 하나의 식재료지요. 피조물이 그런 존재입니다. 제가 왜 레위기를 자꾸 거론하는가 하면, 신학자들이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레위기에 대한 위력을 회복하는 것. 그것을 에스겔의 주제로 잡고 있기 때문에 레위기를 제가 거론하는 겁니다.

인간을 제물로 바꾸는데 여기에 거룩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거룩이 임할 때 이 거룩은 어떤 식으로 임하는가 하면, 인간은 이미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인간이 거룩을 못 만들어냅니다. 거룩은 완제품으로 주어집니다. 완제품으로 주어지는데 두 가지로 주어집니다. 하나는 기름이고 하나는 피입니다. 그것이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은 기름과 피를 바르게 되어 있어요. 기름과 피를 발라서 거룩하신 분(하나님)께 보이게, 이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서 대표하게 되면 이 백성들도 거룩에 합세하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를 잠시 보겠습니다. 28장 42절에 보면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여기에 보면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제사장들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거룩이 있으면 살고 거룩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간, 이 공간이 거룩한 공간인데 이것이 이스라엘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공간이 있다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거룩한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았다는데 의의를 부여하라는 겁니다. 나같이 부족한 인간도 천국이란 거룩한 곳에 가더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제사장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만든 이 거룩은 뭐냐 하면, 기름과 피가 발려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하는 모든 율법은 다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기름(기름 부음)과 피(피 흘리심)에서 나왔던 율법과 말씀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은 이 자기 속에 있는 거룩을 보여주기 위해서 백성들이 갖고 나온 이 제물을 통해서 피를 내고 기름을 내어서 피와 기름을 제단에 바름으로 말미암아 이 제물을 바친 백성이나 이 제물을 잡았던 제사장이나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 안에서 같이 공유할 수 있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장치가 마련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제물을 중심으로 해서 백성과 하나님은 동행할 수가 있어요. 이게 바로 출애굽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레위기를 봅시다. 3장 2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라고 했는데, 피를 뿌립니다. 성경을 이렇게 보니까 쉽지요? 우리는 이미 언약을 깨뜨렸다. 깨뜨린 입장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받으면 거룩한 제물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날 위한 인생이 아니고 제물로 살아가는데, 그 거룩은 무슨 요소냐? 피를 뿌리면 그 피안에 모든 거룩이 다 담겨있어서 피를 받으면 우리는 산다.

그렇다면 모든 성경 말씀은 어디를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까? ‘피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것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우리는 언약을 못 지키는데, 언약을 못 지키는 우리를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피를 뿌렸고, 그 피 안에는 모든 말씀의 완성이 다 들어가 있는 거죠. 예수님은 바로 거룩한 피를 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제물로 섬기게 하기 위한 말씀의 완성을 예수님 홀로 다 지켜냈다는 겁니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하지요.

레위가 3장 5절에 보면,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어요. 그리고 16절에 보면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제물을 바치라고 했고, 제물을 바치면 이 제물의 피가 흐르고, 불에 타니까 하나님의 코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지요.

그렇다면 제물을 바치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지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지시하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그야말로 들러리죠. 들러리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대전 강의에서 했어요. 하나님 옆에 누가 있다고? 예수님 계시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이 아래로 축 처져서 다시 위로 올라가게 되면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 모세 언약 이렇게 축 처져서 다시 아브라함 언약으로 돌아간다고 했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시110:1)” 하나님이 하나님께 전달하는데, 이것을 사람(자기백성)을 통해서 우회해서 전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참 쉽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지시하고, 그 지시하신 것을 하나님이 완성했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들러리로 참여된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제물이 되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제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린양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거기에 참여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제물 되셨는데 우리가 제물 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귀하신 아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제물이 되었는데 늘 죄만 짓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 되어서 은혜를 받는데 그것도 못합니까?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은, 결국 ‘이 모든 하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나와는 절교하겠다. 나는 그 말씀에 대해 못들은 척하고,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듣기도 싫고 나는 나 홀로 존재하겠다.’는 것이죠.

우리교회 어떤 부인이 나오시는데, 그 남편에게 교회 가자고 하니까, 수메르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도 유대교의 신 중 하나다.” 이랬다고 해요. 이것이 뭐냐 하면, 자기 이성이 날아가는 신을 잡아서 ‘기독교 신이 어떤 신인가? 옛날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신 중 하나다.’ 수메르는 바빌로니아 남부에 위치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이 발상한 지역·민족, 또는 그 문명을 말하는데 --

결국 이것은 누가 누구를 판단해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판단해야 될 그 진리를 하나님도 아닌 내가 신을 판단한단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욥이 책망 받는 것과 똑같은 책망을 받아요. “욥아, 내가 별 만들 때 너는 어디 있었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참여 안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는데 왜 얘들이 끼어드나 말이지요.

욥기 내용이 뭡니까? 하나님과 누구와 내기를 했지요?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를 했어요. 그런데 욥이 왜 끼어듭니까? 어른들끼리 화투를 치고 있는데 꼬마 녀석이 와서 ‘아빠 나도 끼워줘.’ 이러면 안 돼요.

생명나무, 선악과는 누구만 알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끼리만 아는데 인간이 끼어들지요. 그렇게 되니까 인간 취급을 못 받는 겁니다. 모든 진리는 내가 잡는 순간 파랑새가 아니고 죽은 새가 됩니다. 이것은 원래 파랑새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내일 개혁주의신학회에서 제가 논문발제를 하는데, 그 논문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움직이는 동사를 명사로 잡으려고 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윤곽만 파악할 뿐이지 실재로 움직임 자체는 사람 손에 안 잡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를 몰라요.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고 했을 때 예수님은 답변을 안 했어요. 답변을 해주면 그것이 우리 안에 개념이 되지요. 개념이 들어오면 내가 알고 있는 경험속의 개념이 돼요.

사람이 죽는데, 그 죽음을 자신이 입회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의 마지막에 대해서 그리고 출생에 대해서 관여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우리가 처음과 끝은 제외하고 중간 부분만 끊어서 인생이 이렇고 저렇고 논하지만, 내가 왜 태어났으며 왜 죽는가를 모릅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엄마가 심장마비로 죽은 캐나다 선수가 있는데, 그 선수가 동메달을 땄어요. 제가 수요일에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엄마가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른 사람은 엄마가 있는데 왜 나는 엄마가 없는가?’ 라고 하지만,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데 왜 없는가?’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없어도 될 내가 왜 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해요.

그것은 바로 하나의 제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못 죽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됩니다. 죽으면 우리에게서 뭐가 나온다고 했어요? 거룩이 나오지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용서(“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가 나오잖아요.

죽어서 거룩이 나온다는 말은 살아 있어도 우리 안에 거룩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이 거룩은 제가 강의 초반에 설명하기를, 깔때기에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부어지는데, 이 말씀은 누가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그래서 에스겔의 이름을 ‘인자’라고 불러요. ‘에스겔아, 너는 들러리야. 장차 오실 분이 바로 너한테 역사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님께 하신 모든 말씀을 다 지킵니다. 에스겔은 못 지켜요. 못 지키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에스겔이 해야 될 일을 할 때, 그것은 에스겔이 지킨 것이 아니고 에스겔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지킨 겁니다. 이 상황은 오늘날 우리와 똑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단 한 구절도 못 지킵니다. 못 지키는데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가요. 이게 이상하지 않나요? 말씀은 못 지켰는데 천국은 간다. 그러면 천국 가게 된 이유는 우리 행함(율법 지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계신 분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갑니다. 이걸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나의 행함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내 안에 지켜서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농땡이를 부를 수도 없는 것이 날마다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 자꾸 말씀을 지켜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어기고 싶어도 우리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 없다고 했다가, 말씀을 지킨다고 했다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죄인 되게 하는 그 말씀을 주께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이제 됐지요. 우리가 절대로 못 지킨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그 말씀을 주께서 반드시 지켜내는 거예요. 그래서 면류관도 반납하고 ‘나의 구원은 예수님 십자가의 피로만 받지 내 행함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한다는 말이죠.

자, 이제 에스겔을 봅시다. 3장 27절에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그러면 듣는 사람은 패역한 족속입니까, 아닙니까? 패역한 족속입니다. 패역한 족속이라고 할 때 ‘아멘!’ 하면 그 사람은 구원 받고, ‘나는 패역한 족속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그냥 패역한 족속이고. 둘 다 패역한 족속인데 한쪽은 구원 받는 패역한 족속이고, 다른 한쪽은 구원이 안 되는 패역한 족속이고.

성도는 ‘네 힘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야.’ 라는 말이 기쁘게 들려야 합니다. 대전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의 즐거움이 뭔가 하면, ‘묵살당하는 즐거움. 기도 응답 안 되는 기쁨.’ 이런 것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기도 안했으면 응답 안 될 수가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기도한 것이 의미가 생겨버려요.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패역한 족속인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우리가 패역한 족속인 것이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점점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패역한 족속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는 항상 묵살당하고 거절당하는데, 거절당하는 것이 왜 즐거운가 하면, 우리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책임지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묵살당하는 가운데서 새삼스럽게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기도를 해야 묵살당하는 것도 알 것 아닙니까. 지금 이것이 말장난 같이 여겨지는데 아닙니다. ‘묵살당할 것을 왜 합니까?’ 라고 하면, 만약 기도를 안 하면 묵살당하는 경험을 못합니다. 묵살당하지 않으면 묵살당하는 즐거움이 없지요.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내가 중풍에 걸려 오른손을 못 씁니다. 그런데 침을 맞고 나았어요. 남편은 그게 너무 좋아서 아내의 팔을 사용하도록 장난을 치는데, 아내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의 채널을 확 바꿉니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이 쥐고 있는 리모컨을 빼앗으려고 팔을 붙잡고 야단을 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묵살하고 계시다는 그 즐거움. 내 뜻대로 안 되고 아버지 뜻대로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남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이미 너의 인생은 완성되었으며, 너는 패역한 자야.’ 그래서 우리를 죽여가면서 우리 안에 ‘너같이 악한 죄인도 천국 간다’는 것을,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간다는 것을 만방에 보여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0. 3. 15. 12:0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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