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19(2) 서울강의 녹취 빌립보서 13강
100219(2) 서울강의 녹취 빌립보서 13강
이름 : 김창길(IP:118.91.99.20)
서울100219빌2장9절b
100219(2) 서울강의 녹취 빌립보서 13강
2010-03-14 22:20:00 녹취 : 김창길
서울 2월19일 강의 빌2:9 “두 주체의 싸움”
여기 글씨를 써 놨죠. “주님은 보고 싶은 곳에 나타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들려주지 않는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를 우리가 찾아가서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를 따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 시켰지요. 너희가 선악과를 안 이상 “못 따먹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현재 선악과 따먹은 성질이 다른 성질의 인간이 되지 않는 이상은 생명나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질 자체가 완전히 딴 속성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딴 속성으로 바뀌어 져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라고 시작하는 이런 성질이 안 되는 이유는 나, 영어로 “I", “I” 안에 선악과 들어 있어요. 선악과가 들어 있는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준 원칙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그 원칙 바꾸면 안 됩니까?” “못 바꾸겠다.” “왜, 못 바꾸십니까?” “내 마음이다” 만약에 그것을 바꿔서 선악과 먹어도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다고 하면 무엇과 무엇이 섞이겠습니까? 선악과나무 하고 생명나무가 우리 내부에서 섞이겠지요? 섞이면 나무가 두 개의 나무로 분리될 필요가 없고 처음부터 나무가 2개 아니고 몇 개이어야 합니까? 종합 비타민 선악, 생명 다 들어 있는 나무 하나만 심어 놓으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장면에다 볶음밥 먹는 거나, 그냥 자장밥 먹는 거랑 같다 이 말입니다. 두 개 먹지 말고……. 그러면 자장면 볶음밥 분리한 취지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선악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는 것은 너희들이 만들어줬다고 해서 따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생명나무의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해서 선악과 앞에 배치한 겁니다. 선악과 무너지면 생명나무는 도망치고 마는 겁니다. 너하고 볼일 없다. 따로 분리해야 된다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놨다고 해서 우리 인간을 목표로 인간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좋으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우리의 모든 피조물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피조물은 그 피조물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만들어 진거예요. 그래서 생명나무를 따먹은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보이는데 현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그것을 그들은 거부하지요.
나, 나를 위하여, “그럼 당신은 왜 태어났는가?” “그거는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그것도 알고 싶지 않아” 지금 중요한 것은 처음도 중요하지 않고 끝도 중요하지 않고 딱 잘라서……. 경상도 말로 돔배기라고 합니다. 머리짤라내고 꼬리 잘라낸 돔배기 중간에 있는 나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엄마 죽이잖아요. 자기 귀찮다고……. 중요한 것은 왜, 나한테 잔소리 하느냐 그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금은 여러분들이 부러워하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기 시장바닥, 이 동네 있는 재개발 아파트부터 빌라 있는 사람까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저 눈에 보이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짐승보다 더 못해요. 멧돼지한테 이리 울음소리를 들려줬더니만 멧돼지가 “웃기고 있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다음에 늑대 울음소리 들려주니까 아무렇지 않아요. 하마울음 소리 들려주니까 역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 울음소리 들려주니까 멧돼지가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호랑이 울음소리 중에서 20hz이하는 사람 귀에는 안 들려요. 그런데 멧돼지의 귀에는 들리는 거예요. 그 20hz 이하의 저주파수의 음이 멧돼지의 힘줄과 뼛속에 들어가면 신체적으로 오금이 저려져 벌벌 떨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게 됩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무섭다고 봅니다. 그런데 멧돼지가 두려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20hz 이하의 소리를 인간은 인간의 한계가 있어서 호랑이의 중간 음만 들리지 멧돼지가 들을 수 있는 호랑이의 낮은 음은 우리 인간에게는 안 들려요.
우리가 보면 하마소리나 호랑이소리나 똑같은데 왜, 다른 소리는 가만히 있다가 호랑이 소리에만 왜 반응하느냐 인간들이 호랑이 흉내 낸다고 해도 멧돼지는 꼼작도 안합니다. 우리가 낼 수 없고,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그 다른 곳의 음이 멧돼지를 오금 저리게 하고 도망치게 만들었다면 지금 귀신들린 청년은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안 겁니다. “예수여,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우리를 멸망시키려 왔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공부한다고 배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오금이 저려요. 온 몸이 벌벌 떨려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눈으로 본 것, 경험한 것, 이 선에서만 계속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서 오금을 저리게 하는 우리의 호랑이의 소리는 무슨 소리이겠습니까? 바로 십자가 소리죠. 십자가를 보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을, 그 깊은 내면의 hz를, 내면의 소리를 보는 사람은 우리는 십자가 앞에 엎어져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할 것이고 그 hz, 그 십자가의 음을 못 본 사람은 “십자가, 우리 집에 그런 목걸이 있다. 그거 옛날 사람이잖아” 하고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예수님의 의미를 전혀 두지 않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4:4절에 보면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악마가 망하는 자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의 광채가 비취는 것을 먹구름을 쳐서, 안개를 쳐서 어떤 경우라도 복음이 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님 만나면 오금이 저린다는 것을 다 알았어요.
그리고 고린도후서 1장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가 되고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향내가 된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망한 자에게 다른 말씀 아닙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한사람은 오금이 절여서 “주여, 제가 죄인 맞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상한 심령이군요. 죄인이 여기 왔습니다.” 하는 반면 “또 한다 또 한다. 많이 들었다. 고만 해라.” 그렇게 들려오는 사람, 그것이 인력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악마가 복음의 광채를 한껏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악마를 가리게 하시는 배후에 작용하시는 분도 바로 우리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지옥 갈 자에게 지옥 보내기 위해서 복음이 들리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이 시시하게 들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복음보다도 돈 200억원이 더 오금 저리는 데요” 하지만 짧은 순간은 돈 200억이 좋은 것 같지만 돈 200억원 가져봐야 진짜 성도 같으면 “주여 200억이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군요.” 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느껴지면서 오금이 저려지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말씀을 안다 하지 마세요. 성경말씀은 늘 십자가를 품에 안고 우리에게 시시 때때로 우리 필요 적재적소에 우리를 오금 저리게 하는 자체적인 능력이 모든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 모든 말씀에는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가 선진 기지로 말씀들을 우리에게 던져져서 우리로 하여금 오금저리는 그야말로 멧돼지 앞에 호랑이 소리처럼 느껴지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찬송가 405장이 뭐지요?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이 살리신' 이지요. 이 찬송가 405장이 상당히 감동적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감동적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감동적이지 않아요. 심지어 같은 인간이라도 5년 전에 “이 노래 부르면서 내가 너무 가사에 은혜 받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 가사가 너무 좋아서 눈물 흘렸는데, 5년 뒤에 그 노래를 또 부르니까 그때 느낌이 없어요. 427장이 더 좋은 거예요. 전혀 그 때 그 느낌이 안 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구원 받는 주체가 내가 내 느낌을 유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에게 감동 감화를 주시는 그 살아있는 말씀의 역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저는 뭐라 하냐하면 주님은 나타날 때 ‘주님은 보고 싶은 곳에 나타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들려주지 않는다.’ 인간이 주님을 자기 힘으로 기도한다고 포착 될까요? 포착되지 않을까요? 절대로 포착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11장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 나타내시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타내라고 우리가 요구 했습니까? 아니죠! 그냥 일방적으로 숨기시고 일방적으로 나타내지요. 나타내고 숨기시는 것은 누구의 자유입니까? 우리 주님의 자유죠. 여기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이에게 나타 낸다니까 우리는 또 “주여, 저 어린애입니다.” 절대로 안 나타나시죠. 왜? 어린애인척 하는 슬기로운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나타내지 않았으면 저희는 주님을 모를 뻔 했습니다.” 라는 말을 고백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보고 싶은 곳에 나타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들려주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냥 우리에게 나타내고 싶은 대로 매일 같이 말씀으로 역사를 하는 겁니다. 네가 주님을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지금도 주님이 너를 쥐고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진짜 ‘주님은 주되십니다.’를 우리의 예상을 빗겨가며 우리에게 고백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상한대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상도 못한 사태를 일으켜서 ‘주님이 머리위에서 나를 쥐고 흔드시는군요.’라는 즐거운 비명, 정말 너무 좋아서 지르는 외침입니다.
나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있다는 그 감격,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향수병 다 날리면서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향수병 다 쏟아서 주님 발을 씻는 것처럼 너무 좋아서……. 세상에 나 혼자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행동의 주체가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이런 주체를 하게 하신 주님이 따로 계셔서 그분이 나로 하여금 이런 주님을 보고 싶은 곳에 나타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들려주지 아니하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을 우리가 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고백을 할 때, 그 순간이 우리가 뭐가 되느냐? 바로 어린아이가 되는 겁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립심이 없어요. 그리고 어린아이의 모든 일과는 부모가 주는 대로 받아야 되듯이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우리에게 더 이상 없습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누구에게 맡겨라? 내게 맡겨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해 줄게.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그냥 매일 얻어먹는 그런 식으로 천국을 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외마디 고백입니다.
멧돼지 때문에 농가에서 피해가 많았는데 멧돼지 퇴치하는 것을 tv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tv가 다 나쁜 게 아니고 보면 복음적인 것이 있어요. 호랑이 울음소리를 전파사에 맡겨 테이프 40개 만들어 이웃집에 돌려서 효과를 봤답니다. 여기 다시 보면 주님이 계시고 주님께서 여기 고무줄로 묶어서 여기에 자기 언약 사람을 보낸다고 했지요. 보낼 때 고무줄이 있어서 이 사람이 하는 행위는 장차 주님이 사람이 될 때 나오는 행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 되겠지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위에는 점선이 점점 덮어져서 역사와 묵시가 만나요. 역사는 가고 묵시는 만나고 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 예수님을 죽였던 사람이 무엇을 믿었던 사람인가요? 하나님 믿는 사람이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인 사람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 잡아 덮치고 죽인 사람 성경에? 사울이죠. 그 사울이 생각했던 하나님, 그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죽었잖아요. 사울이 하나님을 안 믿었으면 그런 짓을 하지 안했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헌신이라고 보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목사가 복음 아는 교인들을 죽이잖아요. 추방하고, 미워하고……. 복음을 모른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있는 이 교회 내가 세웠다든지 내가 기도해서 이 교회 이렇게 부흥 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마귀의 종들입니다. 역사에서 만들어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진짜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한테 맞아 죽었죠. 바로 이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하나님께서 언약사람에게 생기도록 하시는 겁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인에게 맞아 죽은 사람이 누구죠? 아벨이죠. 아벨과 가인과 비교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고 가인 배후에 있는 악마가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묻자 가인이 하는 말이 “하나님 제가 제 동생 지키는 자이니까” 라고 하죠. 그러니까 자기는 악마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변명하기 일쑤죠. 그런데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현재 악이, 죄가 너를 지배하고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행동하는 것이 무슨 목적으로 하는지 몰라요. 다만 시키는 대로 하는데 모든 인간은 죄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DNA, 유전자가 죄가 만들어 낸 작품이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죄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본능대로 평소 상식대로 살면 우리는 절대로 눈에 보이는 예수를 안 믿게 되어 있어요. 이점을 오늘 강조하고 싶네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의 공로라고 여기지 마세요. 이것은 별종이고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이에요. 외계인 이예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주 낮 설교가 무엇인가하면 교회라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해도 해 내지 못한 요소가 삽입되어 있는 사람, 그 집합을 교회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속죄 하에 표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내가 여기 앉았다는 것이 말도 안 돼 라고 느껴야 되요. 내가 여기 금요일 날 차량 많고 편히 쉬어야 될 시기에 지금 여기 돈을 줍니까? 중국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겁니다. 복음 전해도 소용없어요. 돈 더 주면 더 주는 곳으로 다 가요. 한국 교회가 선교를 다 망쳐 놨어요. 그런데 이 교회는 참석하는 30분에 일당 5만원 봉투에 넣어 줍니까? 아니잖아요. 이것은 예수를 차라리 주위에 예수 믿지 말라고 핍박이 차라리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것이 있으면 있을수록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아니면 내가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그냥 믿어 볼까 하는 식으로 내가 흉내 낼 수 있는 믿음인지 판가름 돼요. 여러분들이 판가름 안하더라도 주께서 흔들어 주십니다. 마구 흔들어 줍니다.
우리 아는 사람은 예수 잘 믿고 복음 잘 전하고 예배도 참석 하다가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우리교회에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복음적으로 살려고 하는데 고발당했어요. 하필이면 스카이 영어학원에 학파라치가 들어와 가지고 벌금 내게 되었어요. 하필이면……. 하필이면이라는 경험을 못해 본다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어요. 주께서 이렇게 흔들어 데는 겁니다.
고무줄이 왔다 갔다 흔들어 데는 겁니다. 이것을 유효한 주체, 파격적 주체라고 제가 표현하는데 2월 27일 날 방배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백석대학교 2층에서 논문을 발표할겁니다. 다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무줄을 흔들어 댈 때 언약 사람은 주변에 있는 세상적인 가짜 신, 악마가 지배하는 신과 하나님이 이야기 하는 계시 사이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예레미아 같은 교회는 “하나님 전 안 하렵니다. 저 못하겠습니다. 바른 소리해도 욕먹는데 하나님 일인데 제가 왜 합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이것과 요나가 “하나님 이렇게 나오면 저는 하기 싫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 버리세요. 하나님 저를 죽여 버리세요.” 이렇게 반항 한다든지 12제자가 분명히 하나님이 구원한다고 택해 놓고 결국 자기가 믿는 스승이 맥도 못 추고 그 적들에게 맥없이 팔려 가잖아요. 예수님이 팔려가니까 인간의 본색이 무엇인가 하면 죽는 것은 싫은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배반했을 까요? 죽기 싫어서예요. 살고 싶은 거예요.
베드로 자리에 저나 여러분이 들어가도 마찬가지예요. 베드로가 구원 되는 것이 믿음이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신앙심 좋은 것도 아니고 기도를 많이 해서도 아니고 순교를 해서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합니까? 철저하게 두 번 다시 예수 믿나 봐라 라는 단호한 결심, 나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저주한다는 것, 나는 예수한테 배신당했다는 배신당한 느낌이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주님의 은혜는 빛이 나겠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빛이 난다고 했지요. 은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자기관리를 해요. “주여, 저 믿음 좋습니다. 아멘, 성경 석장 봤습니다. 아멘, 오늘도 기도 했습니다. 아멘, 옆 사람 안하는데 저는 특별히 했습니다. 저 잘했죠?” 자기 관리 하다 보니까 점점 더 주의 은혜는 없고 자기가 신앙생활 잘한 그것만 자기의가 돼서 마일리지 쌓듯이 누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잘 믿는 자기 자신을 믿어서 그것을 가지고 어디에 써먹느냐 하면 “주님이여, 내가 그동안 이런 기도 한적 없지요. 이번만큼은 우리 애 서울대학 넣어줘요” 그동안 모아 놓은 마일리지 동원해서“주께서 내가 이렇게 충성한 것 아시나이다. 이것만 해주면 지난번 내가 참아가면서 남 교회 안 올 때 혼자 나와서 청소한 보람, 난 주께서 살아계심을 알겠습니다.” 하고 쭉 내밀죠. 주께서 대학에 또 떨어지게 만들어요. 그럴 때 나오는 말이 ‘하필이면 나에게’란 말이 나오죠. 바로 그 말이 뭐냐, 그 사람이 십자가에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하필이면 나에게라는 순간이 바로 십자가에 들어가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말로 옮기면‘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고백을 하기위해서 주께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 고백이 성도 입에서‘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고백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주라고 하는 것은 주님 옆구리에 여러분 창 자국 있습니다. 내 옆구리에는 대일밴드도 안 발려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과 나의 차이점은 창 자국이 주는 있고 나는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손에 주님은 못 자국이 있고 나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집에 가서 뚫지 말고요. 뚫어봐야 내 구원받으려고 한 것이고, 주님은 남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뚫린 것이고 아버지가 뚫은 것이고, 나는 내가 해 봐야 되지도 않는 슬기로운 것, 주께서 감추십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또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럼 저도 주를 버리겠습니다. 극단적인 것, 베드로처럼 두 번 다시 예수를 저주하면서 공개적으로 입으로 공개하고 시인하고 돌아설 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다시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야 고기 잡자” 다시 처음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하는 겁니다. 다시해 보니까 처음 만날 때부터 주님 시인할 때까지 모든 자국이 사실은 베드로 자기가 결심해서 이끌어온 인생이 아니라 내면에 주께서 이끌어 주신 인생이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만 그럴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기억한다, 주의 은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똑똑해서 성경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보면 지식만 늘어날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성경 구절이 가슴에 꽂힐 때는 내가 성경 봤을 때 말고 성경이 허락도 없이 꽂히면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예레미야 2:5절 내용이 뭔지 모르겠지만 일부러 적어봤습니다. 2장 5절이 내 속에 꽂히게 되면 우리 생각에는 2장 5절만 들어온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읽을 때는 2장 5절만 느껴져요. 오늘은 예레미야 2장 읽을 차례, 2장 읽었고, 3장 읽고 그때는 2장하고 3장만 들어와요. 하지만 주님께서 2장 5절을 드려 밀 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내용이 2장 5절의 칩을 통해서 전체 내용이 다 들어옵니다. 전체 내용이 다 들어오게 되면 2장 5절만 들어 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나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 하죠. 어떤 성경 구절을 하더라도 거기서 성경 구절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연결 되는가 연결 고리를 이야기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어떻게 이야기 할게 있어요. 본인이 경험을 해야지요. 주유를 하던지……. 어떻게 하던지 해야죠.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러 이러한 것을 통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느꼈어. 그런데 이런 죄인도 주께서 설교자로 이 쓰레기 같은 인간도 세워주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이 욕이 아니라 고전4:13에 보면 마지막 때에 주께서 사도를 무엇으로 세웠습니까? 만물의 찌꺼기로 사용하죠.
이번 논문의 마지막 끝이 이 내용입니다. 제가 논문을 한 20번 수정을 했어요. 담당자가 적용부분에서 내라 했을 때 그때 고친 것이 고전4:13절을 집어넣었어요.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에게 개혁주의라고 하면 항상 미완료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복음 전하는 사람은 완료적인 자세로 서 버리면 자기가 이미 복음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는 쓰레기 되도 상관없잖아요. 목사가 자꾸 복음을 가지고 기대 한다는 것은 자기가 쓰레기 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은 쓰레기 안 되려는 이유는 쓰레기 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겁니다. 나의 미래가 있다는 겁니다. 나의 미래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그 사람은 자기가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 미완료 된 상태로 남아 있잖아요. 미완료된 상태로 가봤자 역시 또 미완료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에게 ‘나 이 말씀 전하다 죽어도 좋습니다.’ 라는 태도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 전했으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자기 노선에다 교인들을 이용하죠.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복음을 가장해서 자기 먹고 살겠다는 겁니다. 고전4:13에 사도를 마지막에 쓰레기로 사용하시는 이유는 이미 너는 쓰레기 되도 괜찮은 신분이라는 겁니다. 이미 완료, ‘다 이루었다’가 너와 함께 있는 겁니다. 이 안에 들어올 때 목사가 여기 있으면 다 이루었다가 목사 입을 통해서 덮쳐서 나오는 겁니다. 이러기 위해서 언약이 있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쓰레기, 다시 말하면 희생자가 되는 겁니다. 희생자 되는 이 모습, 다윗 같은 경우 간음죄, 살인죄를 짓고 나서 좋아했어요. 왜 좋아 했냐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죄를 진거예요. 그 전 까지는 내가 사람에게 죄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너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음을 알게 하였고 다윗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을 알았어요.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어요? 못 지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비로소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겁니다.
다윗이 그것을 본 이후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리라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사오니’ ‘주께만 범죄 하였사오니’ 이것은 나는 날 때부터, 처음부터 죄인인 것을 나는 왜 진작 그 완료를 모르고 자꾸 조금만 잘 할 수 있는데, 반성하면 잘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나를 미완료로 몰고 가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큰 짐이 되고 짐이 된 정도가 아니라 내가 미완료로 기대하고 있는 그 자체가 누려지기 위해서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간음하고, 이것이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반성만 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인간인데……. 자꾸 자기 노선을 유지하는 거예요. 아, 오늘 이야기 하는데 표정들이 왜 그래요? 다들 구원 안 받은 사람들처럼 (하하) 왜 그래요?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임을 아는 순간, 그때부터 평생 받을 스트레스는 다 날아간 겁니다. 스트레스가 있을 수가 없어요. 왜요? 완료이기 때문에 어떤 완료?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난 이상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더 죄인 안 되고 덜 지어도 의인 안 되고 태어난 그대로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여기다 붙여 있으니 이것보다 속 편하고 시원한 경우가 어디 있어요?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주님은 언제 보이는 줄 아세요? 그러한 십자가 있을 때 주님이 보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주님이 안보여요. 다른데서는 내 미완료를 보충해줄 내 착함을 보충해줄 가짜 신만 보이지 진짜 십자가 죽었던 그 주님은 내가 십자가에 합류될 때 비로소 그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보여서 주님이 꺾으신 뼈가 나를 구원하여서 내가 죄를 아는 즐거움을 주께서 버리지 마옵소서.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죄인 됨을 아는 이 기쁨, 돈 10억, 2천억 가지고도 못 바꿉니다. 로또요, 어떤 영국 사람은 3천억 당첨 됐는데 그거 버리려면 애 먹습니다. 우리는 죄 버릴 필요도 없어요. 가만있으면 돼요. 죄 버려봐야 또 죄 짓습니다. 왜 그래요? 안 기쁜 사람처럼(하하) 우리 행복한 사람이잖아요.
정리 하면 사람이 선악적으로 착해 지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미련을 두게 되고 미련을 두게 되면 그 미련을 뒤에서 부추기는 악마가 있게 되고 우리는 그 악마의 놀림을 받아서 결국은 악마는 처음부터 다가올 때 선악과를 노리고 다가오잖아요. 악마는 항상 부추기는 것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매일 부추기는 게 그거예요. 생명, 영생, 이미 다 의롭다, 이미 구원받았다, 이미 의인이다, 이런 것은 악마가 이야기 안 해줘요. 그러나 주님은 반대로 너는 죄인이다, 너는 뭘 해도 죄인다, 네가 착한일 해도 그것이 너의 구원에 영향 없다, 네가 아무리 착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너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처럼 주여,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나 번제가 아니고 제사나 번제는 백날 해봐야 자기를 좋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이것을 알고 난 뒤에 다윗이 얼마나 좋아 했는지 몰라요. 주여, 주의 말씀으로 내가 즐겁게 하게 하옵소서.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쌓게 하옵소서. 바로 그 은혜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주체가,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에 의해서 우리아를 죽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14대 14대가 나오잖아요. 14대와 14대가 갈라져 있어요. 올라갈 때 14대 1대가 빠집니다. 내려갈 때 솔로몬으로 부터해서 14대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1장 족보에서는 솔로몬부터가 아니고 다윗부터해서 망할 때 까지 14대입니다. 다윗은 구멍으로 빠져 버리고 솔로몬으로부터 14대입니다. 그리고 다시 여기서부터 내려가서 멸망에서부터 14대로 다시 올라갑니다. 이 지점 방향틀어서 14대 까지 역사에서 묵시, 주님을 만나는 기점이 14대이고 그들이 육적인 것이 멸망해서 혈통적인 다윗의 내부는 나 같은 죄인은 망해야 된다고 보여주는 것이 14대입니다. 여기 앞에 있는 14대는 무엇인가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같은 인간을 통해서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14대입니다. 같은 다윗이 망해야 되는 다윗과 구원시키는 다윗, 양쪽을 보여주기 위해서 14대를 깔아놓고 원래는 18대인데 4대는 빠진 겁니다. 14대 14대 맞추기 위해서 왕 4명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메시아가 나시니라. 주체가 그리스도가 알아서 자기가 낳은 겁니다. 이 구조를 맞추기 위해서 그래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겁니다. 이 모습, 같은 다윗이 구원된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있을 때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이라고 할 때 우리가 어느 자리로 가야합니까? 우리가 죽어야 될 자리가 십자가이거든요. 십자가에 섰을 때 비로소 주님 앞에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죄인 될 때 죄인을 구원하시는 조명발, 주님이 그 위에 찬란하게 피를 흘리고 있죠. 그 피와 살이 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를 하얗게 씻어주는 구원의 피 입니다. 속죄의 피, 그 속죄의 피가 묻어 있는 사람, 표시가 있는 사람을 교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딴소리하지 말아요. 속죄의 피를 이야기 하므로 말미암아 ‘속죄의 피가 없는 사람은 안 오셔도 됩니다.’ 라고 말 할 수밖에 없어요. 속죄의 피가 있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표시가 있고 어떤 사람의 이마에는 짐승의 표시가 있고, 이도 저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고 짐승의 인을 받던지 예수님, 어린양의 문신을 받던지 둘 중 하나이지 문신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짐승 아니면 어린양, 어린양 아니면 짐승, 하나님은 따로따로 자기 괘도를 가지고 가시지요. 목자는 양을 가지고 가고 악마는 염소를 가지고 가요. 그것이 바로 모든 역사가 주님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주가 되었기 때문에 그 경로를 따라서 우리도 십자가 옆에 있을 때 비로소 주님이 보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병고치기위해서 주여 하고, 어떤 사람은 돈 벌기 위해서 주여, 이렇게 하는데 이 주님은 가짜 주님, 허구적인 주님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경로해서 주님이 되었기 때문에 병고치기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주여 하면 안 되고 이 주체가 십자가로 가야 되죠. 십자가에 가서 돈 달라고 못하죠. 왜냐, 십자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죽이고 주님이 필요한 것을 주시는 그 자리이기 때문에 주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사람, 그럴 때 자기자랑 안하고 “나는 주님께 이런 거 받았어.” 하고 자랑 하죠. “뭐 받았어?” “주님의 피 받았어.” “완전히 흡혈귀구나, 이 드라큘라야 그걸 받았다고 자랑하나” 남들은 놀리죠. 왜? 남들은 자기가 주체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주의 사람으로 다루어지는 사람입니다.
빌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 영광이 왜 거짓말이냐? 왜 우상숭배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경우에만 영광이 됩니다. 이거 제가 장담합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영광 안 됩니다. ‘예수님은 계셨다.’ 영광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죽었다 살았다.’ 영광 안 됩니다. 예수님을 주라 할 때 우리의 주체가 어디 있어야 합니까? 주님 앞에 날 때부터 우리가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 십자가 자리에 있을 때, 그 때 ‘주’라고 부를 때 하나님이 영광이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받은 세례가 3가지인데 요한일서에 보면 예수님이 증거가 되는 것이 물과 피와 성령, 여기에 세례를 붙이면 물세례, 피세례, 성령세례……. 피세례를 마태복음에서는 불세례라고 했죠. 불세례라는 것은 저주의 불을 받는 겁니다. 십자가 죽으심……. 세례요한 때 회개하고 세례 받지요. 세례 받으면 물속에 때 구정물이 있겠지요. 그런데 주님이 이 안에 세례를 받으러 온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말린 겁니다. 주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저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제가 주님께 세례를 마땅합니다. 하고 말리니까 말리지 마라 죄 없는 내가 이 때 구정물에 죄인들이 흘려놓은 죄 속에 내가 들어가서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먼저 죄 속에 다가올 때 비로소 예수님의 물세례가 시작 되는 겁니다. 시작되어서 죄인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었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저주받는 십자가에서 불세례를 받으면 결국은 예수님이 백성들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잖아요. 그 다음에 이렇게 되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는데 성령을 통해서 보내지면 예수님이 했던 이 모든 효과가 같이 참여했던 사람에게 전달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내가 붙들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내 죄 지은 그 현장까지 주님께서 이미 아시고 왜, 날 때부터 죄인이니까 우리에게 들어와서 그 못난 죄인을 건사해서 그것을 거둬서 주께서 십자가 통과해서 성령까지 주셔서 너는 사나 죽으나 나와 한 통속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합해서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내가 죽었을 때 너도 죽었고 내가 살아났기에 너도 살았다. 내가 죽었으면 너도 이유도 없이 죽은 자이고 내가 살았으면 누가 옆에서 뭐라 해도 너는 내 안에서 산자가 되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우리가 어느 자리 갔을 때 이야기 입니까? 우리가 날 때부터 주 앞에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아는 그 십자가 자리에 갔을 때 비로소 주님이 주님답게 우리에게 고마워 지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죄인의 자리에 섰을 때 주님의 통과 점에 섰을 때 우리가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아까 이야기 했지요. 병 고침, 돈 벌어 달라, 교회 부흥하게 해 달라……. 이 모든 것이 다 날 때부터 죄인일수밖에 없는 죄에 해당되지요. 이것을 주여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돈 벌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시고 교회 부흥하게 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 잘 하게 해 주신다면 이것은 우리의 행위로 한 것입니까? 주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까? 주님의 은혜로 받은 거지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 땄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될까요? 아니면 1000m에서 23등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일까요? 오늘 제대로 알았는지 문제 냅니다. 이것도 영광이 아니고 저것도 영광이 아니고 이상화 선수가 스케이트 하면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할 때, 그 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 스케이트 탄다고 영광이 아니고 안타도 중간에 포기해도 하늘나라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 덕분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참석하지 못한 분들도 주님 덕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구원하는 것은 주님 앞에 달렸사오니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 죄를 위하여 이미 완료 적으로 다 이루었다 해주신 그 이루심이 우리에게 넘쳐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공로,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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