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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누가복음 4장16-21절 제목 : 성령과 이사야 예언설교이사야

눅 4:16-21 (성령과 이사야 예언)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7)

본문 : 누가복음 4장16-21절
제목 : 성령과 이사야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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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3-14 13:38

성령과 이사야 예언

2010년 3월 14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4;16-21

(눅 4:16, 개정)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정)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정)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개정)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정)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정)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오늘날 말씀이 응했다’고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에게 따집니다. “뭘 주었는데? 우리가 도대체 뭘 얻었단 말인가?” 예수님은 주셨다고 하시는데 인간들은 받은 게 없다고 하니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유를 주었다고 하시며, 눈을 뜨게 했다고 하시며, 또한 은혜를 주셨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주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자신은 갇힌 처지가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에, 자신은 항상 눈을 뜨고 산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요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 힘을 비축해서 그 비축된 힘을 빼먹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주장은 말씀하고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 신체를 보존하는 것을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다시 해봅니다. 악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은 떡으로 산다”. 여기서 ‘산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도대체 악마는 뭘 가지고 ‘산다’, 혹은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악마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현 인간의 신체로서는 진정한 ‘삶’과 진정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죽는 것을 무척 무서워하는데, 실상은 이러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해도 안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봤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산 채로 불러나옵니다. 결코 사람이란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자기 신체 보존만을 가지고 ‘산다’고 우기면 만약 힘든 일이 들이닥치면, “죽으면 이 고통도 소멸될 것이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모세도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민수기 11: 15에 보면,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죽음과 삶이란 인간의 현 신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죽음이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에 대한 저주 퍼부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도 이런 저주를 온전히 받아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진정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이처럼 죽음과 영생이란 현 우리 신체를 가지고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이런 죽음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신체와 신체들만 눈에 들어오는 세상에 살다보니 참된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저 신체 보존만이 살 길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이 있는 한, 인간은 신체가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엄포를 놓은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산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현재 인간들이 기거하고 있는 이 세계는 전에 뱀이 인간을 속이던 그 속임수가 지속되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속임수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의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즉 모든 변화가 다 ‘예수님만이 말씀의 성취자이다’를 말해주는 변화라는 겁니다. 원래 사람들이 말씀의 들러리였습니다. 지옥이라는 것도 원래 악마를 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악마의 도장에 이마에 박힌 자들도 합세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결코 인간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위한 나리인데 그 어린양의 도장을 이마에 박힌 자들만 그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에 준해서 진행됩니다. 오늘 본문에 이사야 말씀이 나와있습니다. 이사야 61:1-2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뒤 3절의 말씀을 보면, 누가 이런 혜택을 입게 되는지가 나와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갑니다. 이사야서에서 ‘시온’이란 그냥 이스라엘 나라 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에 속한 자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혜택을 늘 받고 사는 자라는 인식이 퍼져있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을 주어서 그들을 뿌리채 잘라버리게 하라”입니다. 10%가 남아도 그것마저 잘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을 하나의 ‘점’으로 응축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점이라는 것은 크기나 면적이나 공간이라고 할 것이 따로 마련되지 못하는 개념입니다.

즉 점이라면 같은 점끼리, 크기나 면적이나 영역 확장을 가지고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이런 식의 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따로 자기만의 영역이나 공간은 없었습니다. 말씀이 이끄시는대로 움직이는 점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말씀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움직이고 하시는 모든 일이 말씀 그대로가 내용으로 담기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 오늘날 우리들은 나름대로 영역과 공간을 사적으로 갖추기를 원합니다. 마치 가인의 후예들 같습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점이 아니라 크기와 면적을 따로 장만해서 그 안에서 자신이 보호받고 생존하기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이런 모습은 자유도 아니요, 눈 뜬 상태도 아니요, 은혜로 사는 삶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신체를 가진 모든 인간들은 이런 형태에서 자아를 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소리마저 자신의 신체의 허약성에 지배를 받아서 자유를 상실한 자아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바치는 모든 행위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진짜 죽음을 맛보게 합니다. 곧 저주를 맛보게 하십니다. 무엇이 가난이며 무엇이 포로된 것이 무엇이 은혜가 아님을 혹독하게 느끼게 하십니다. 바로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될 때, 인간은 벌려놓은 자기 세계를 와해되면서 하나의 질점으로 응축되어 말씀이 가득들어 있는 말씀이 필기도구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인 것을 알고 오로지 말씀으로 주어진 진짜 저주와 축복이 뭔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03-15 13:58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19강-눅4장16-21(성령과이사야예언)-luk100314.hwp

우리교회

10-03-16 18:29

019-눅4장16-21(성령과 이사야의 예언)-luk100314-(이 근호목사)

2010-03-16 18:04:52 녹취 : 오용익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4장 16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4:16-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 그대로 너희에게 성취되었다.’ 그 말입니다. 성취되었으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하신말씀이 ‘이 말씀대로 다 성취되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뭐냐?’라고 반문하지요. 우리는 예수님에게 묻는 겁니다. ‘그래서요? 예수님이 그렇게 완성했는데 직접 우리에게 주어진 무엇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우리는 예수님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 겁니다. 묻게 되면 이렇게 답변이 나오지요. “너희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묻지요. “그래서 내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된다. 눈먼 자가 보게 된다.”라고 합니다. ‘너는 자유를 얻었다. 눈을 떴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된다.’라고 합니다.

‘너는 은혜를 얻었다. 눈을 떴다. 자유를 얻었다.’라고 주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모든 것, 너희들이 그 자유를 쟁취한 것도 아니고 은혜를 얻고자 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눈을 수술해서 보게 된 것도 아니고 그냥 예수님의 공로로 너희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유, 눈뜬 것, 은혜 받은 것 이것을 제대로 알려면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면 그동안 예수님 말고 우리식대로 성경말씀 지켜서 눈을 떠보려고 애썼던 것, 은혜를 받아보려고 애썼던 것, 자유를 얻어 보려고 애썼던 것 그것은 다 헛짓이라는 겁니다. 그런 짓은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열심히 성경을 봐도 자기는 자유다, 자유다 하고 외쳐도 진짜 자유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몸을 직접 건드려 보면 알아요.

몸을 건드려 보면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해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몸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평생 살면서 자기 몸에서부터 자기 몸의 욕심에서부터 자유 해보려고 무소유, 무소유, 무소유 그렇게 외치는 그것, 그 사람은 예수님이 거저 가져다주는 것을 몰라요. 눈을 뜨지 못했기에 예수님이 주시는 눈뜸과 자유와 은혜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거저 가져다 줄때에만 은혜롭게 발생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도를 닦는 거예요.

도를 닦아서 무소유로 살면 자유가 되고 은혜가 되고 세상 보는 눈을 뜨게 된다고 주장한 겁니다. 그 사람이 자기 몸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가 6천만 원 나왔어요. 그게 무소유입니까? 사람이 몸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그 몸에서 자유로울 수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서로 배우자에게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결혼하면서도 ‘난 자유다.’ 이것은 바보 아니에요? 어떻게 결혼하면서 자유입니까? 결혼해보세요. 자식이 애물단지인데 어떻게 자식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자식은 맨 날 다고, 다고 하면서 붙들고 있는데 어떻게 자유롭습니까? 자식이 “용돈” 하면 부모가 “누구시죠?” 이렇게 이야기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뭐가 자유에요? 어떻게 우리가 자유입니까/

내 몸이 출발할 때부터 이 땅에서 출발할 때부터 우리는 얽히고설킨 구조 안에서 태어난 겁니다. 그 얽히고설킨 구조를 지난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몸을 가졌으니 일단 먹어야 살 것 아닙니까? 사람은 떡, 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신앙생활 백날 해보세요. 돈이 생기는지. 돈 안 생깁니다. 인간이 자기의 몸뚱이가 있는 이상 자유라는 것은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몸이 있는 이상은, 자유케 하리라, 자유를 얻었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고 우리 자신도 그것을 믿을 수가 없지요. 은혜를 받았다, 그 말은 공짜로 받았다,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가만있으면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이 그냥 떨어집니까? 떨어질 때가 있겠지요. 떨어져 보세요. 그러면 소문나서 열댓 명 줄 서지요. 경쟁해야 되니까.

은혜라는 것은 주님을 피해서 자기가 도망을 가도 따라와서 먹여주는 것이 있어야 그것이 은혜 아닙니까? 황수관이 한 말대로 사슴이 도망가도 사슴 붙잡아서 목에 빨대 꽂아서 피를 빨아줘야 그것이 은혜다 이 말이지요. 예수 안 믿겠다고 도망간 그 등산간 현장에까지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그것이 은혜다 이 말이지요. 주의 은혜는 우리가 받을 때만 주는 것이 아니고 받고 안 받고 관계없이 그냥 안겨줘서 그냥 오는 거예요.

눈 뜨는 거요, 눈 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다 대일밴드 붙이고 나 눈 안 뜨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밴드 떼어내고 감긴 눈 벌리게 해서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하는 능력이 임하는 겁니다. 눈 뜨겠다고 길상사 만들고 조계사 가서 빌고 교회 가서 기도해봐야 눈 안 떠집니다. 눈 떠지는 것도 주님의 공로로 눈이 훌쩍 떠지는 거예요.

심 봉사야 딸 하나 잘 만나서 공양미 3백석 바쳐서 눈 떴는데 공양미 3백석이면 돈이 얼마입니까? 요즘 쌀 한 가마에 얼마입니까? 계산해보세요. 더욱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입니다. 그래서 심 봉사가 눈을 떴지만 그 심 봉사 죽을 때 도로 눈 감았어요. 공양미 3백석 소용없다니까요. 주님께서 주신 공로로 은혜로 눈 뜨는 것은 우리가 죽음 이후에도 계속 눈이 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은혜가 계속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육신이 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기껏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그저 육신만 살려내면 그만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주신 은혜, 이 말씀이 응했다고 주신 은혜라는 것은 우리의 육신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도 통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 진짜 하나님 앞에서도 저주받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주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 은혜가 임했다고 하고 우리는 안 받았다고 우기고 누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5만 불 줬다고 우기는 측이 있는 반면에 5만 불 죽어도 안 받았다고 하는 측이 있고 대체 누가 맞는 거예요. 5만 불을 선반위에 올려놨다고 하고 한쪽은 안 받았다고 하고 있어요. 주님은 우리에게 줬다고 하고 우리는 안 받았다고 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걸 본문을 통해서 조사해보자는 겁니다. 주님은 줬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안 받았다고 우기는지. 대체 그 사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져서 그렇게 되었는지 한 번 보자는 겁니다.

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말이 나오지요. 지난시간에 했습니다만 다시 하면 주의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하늘이 열리면서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구멍이 생기고 거기서 성령이 임하게 되고 그것이 예수님에게 임하게 되니까 갑자기 주변의 어두운 세력이 예수님 중심을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갑자기 숨어 있던 마귀가 예수님을 공격하고 모든 것이 예수님을 저항하는 쪽으로 움직여 나가게 되는 겁니다.

멀건 죽 같은 것에 약품을 넣게 되면 갑자기 엉기고 성기면서 형체가 나타나는 것처럼 조용한 세상인데 예수님께서 성령 받아 나타나니까 마귀가 언제 있었느냐 하는 식으로 마귀에 대해서 몰랐는데 갑자기 아주 민감한 반응을 드러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세상은 조용한 세상입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세상에 심판이니 저주니 하는 말도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평소 내 사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다들 모른 채 죽는 그 순간까지만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그렇고 그런 세계에 우리가 다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임하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덮친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현재 인간들의 세계와 하늘나라 세계가 둘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커튼인데요, 원어를 따질 필요 없이 그 의미란 커튼인데 애들 보면 커튼 뒤에 뭐가 있는지 들춰보거든요. 하나님께서 커튼을 쳐서 커튼 바깥쪽에는 하늘나라고 안쪽은 인간나라라면 그동안 사람들은 커튼 너머의 하늘나라를 볼 수도 없었고 볼 힘도 없었고 그냥 안쪽에서 옹기종기 살다가 죽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커튼을 열고 그 커튼 뒤에서 성령이 임하면서 예수님이 커튼 뒤의 동네에서 사시다가 커튼 이쪽의 동네에 오신 거예요. 오시면서 하는 말이 ‘이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응했다, 이루어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의미는 눈 감긴 자는 눈을 뜨게 될 것이고 그러니까 눈 감긴 자는 커튼 뒤에 숨겨져 있던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될 것이고, 현재 커튼 안쪽의 마귀에 잠겨 있는 너희들은 커튼 뒤의 마귀가 없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자유를 얻을 것이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더 이상 마귀에게 구속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살 것이고 그 다음에 여기 있는 여러분은 커튼 뒤에 있는 천국을 공짜로 선물로 받게 될 겁니다, 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잘 한번 들어보세요. 예수님의 이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라면 우리가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요. 그동안 우리는 누구에게 속임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우리는 커튼 뒤의 하늘나라를 모르면서 반 토막 난 세상 안에서 살면서 이것이 전부인줄 알도록 누군가로부터 속임을 당하고 사기를 당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우리는 세상을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살면서도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여기서 감을 잡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을 오해했던 사람들은 ‘아, 우리는 뭔가를 놓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사기 당했다. 대체 누가 우리를 속였는가?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가 아닌데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누가 이렇게 우리를 속였는가?’라는 그러한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을 현재 지배하는 악마의 입장에서 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를 해야 되지요. 이걸 죽어야 다시 원상복귀, ‘아무 일 없습니다. 예수라는 것은 하나의 사기꾼이었습니다. 괜한 이벤트를 벌였는데 속지 말고 우리 평소 살던 대로 그냥 사십시다. 예수님 하신 그 말씀 시답지 않은 것 귀담아 듣지 마세요. 우리끼리 여러분이 그냥 사시던 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라는 쪽으로 몰아놓을 필요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다 이루었다’ 하는 지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 때 그 때 예수님이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희들은 죽어가면서도 죽음이 뭔지조차 모른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산다는 게 뭐냐?’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죽어가면서도 죽는 것이 뭔지를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사람이 열심히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은 안 죽으려고 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죽기가 무서워서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이래요. 사람은 한 번 태어났으면 원래 안 죽어요. 원래 죽는 법이 없습니다. 죽지도 않는데 ‘너 그러면 죽는다, 죽는다.’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렁이 막 밟아도 꿈틀거리면서 잘 안 죽잖아요. 사람은 그 지렁이보다 더 질겨서 아무리 군화발로 밟아도 안 죽게 되어 있습니다.

장례식 하는 것은 잠시 잊을 뿐이지요. 지금 법정스님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지옥에 가 있습니다. 안 죽어요. 죽어도 무덤에서 호출당합니다. 사람이 괴로울 때는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여서 나를 사라지게 하옵소서.’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고통도 함께 사라지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하잖아요. 그 이야기가 민수기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민수기 11장 15절에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을 모세가 이야기해요.

요나만 자살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이렇게 말 안 듣는 백성들을 나에게 붙여줬을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는 죽음이 뭔지를 모르고 이런 소리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죽음을 경험하면 사람이 안 죽는다는 것을 알아요.

하나님께서 나라는 인간을 한 번 태어나게 했으면 두 번 다시 찢는 법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종이를 만들어놓았으면 두 번 다시 찢는 법이 없습니다. 그 종이에 다른 것을 쓰지요. 하나님은 재활용을 아주 잘하세요. 자기종이를 없는 것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법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죽음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겁내는 겁니다.

죽음을 겁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할 수가 없어요. 순종하게 되면 혹시 내가 죽지 않을까, 아까 모세이야기처럼 순종하려 하는데도 너무 힘드니까 ‘차리라 저를 죽여주옵소서.’ 하지요. 모세는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자기 몸에서 나오는 대로 자기가 알던 대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 다 소용없는 일이에요.

사람이 죽음을 모르기에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죽음 뒤의 생명도 경험한 적이 없는 거예요. 사람의 영생,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오해에서 나왔느냐 하면 현재 내 상태에서 약간 더 좋아지는 것 자꾸 그런 것을 염두에 둔다 이 말이지요.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산다는 것을 몰라요. 죽음도 모르지요. 산다는 것도 모르지요. 남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죽을까봐서 겁을 내는 공포심 외에는 아무것도 내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마귀가 가르친 대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산다는 의미가 ‘사람이 떡으로 산다.’ 할 때의 그 ‘산다’는 가짜입니다. 그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떡으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마귀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진짜 사는 것은 말씀이 응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말씀이 우리를 휘감을 때 그 때 우리는 말씀의 세계에서 사는 거예요.

정말 답답합니다. 집단 자살을 해야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정말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 못했기에 우리는 겁을 내는 겁니다. 번지점프를 안 해봤기 때문에 번지점프를 하기 전에 겁을 내는 거예요. 안 뛰어 내리겠다고 안 죽겠다고. 그런데 번지점프를 낙하를 열 댓 번 한 사람은 재미있고 기다려져요. ‘나 뛰어내릴래.’ 합니다. 그게 재미있으니까.

사람이 경험을 하지 아니하면 우선 겁부터 먼저 냅니다. 그게 무슨 자유입니까? 그게 무슨 눈뜬 겁니까? 그게 무슨 공짜로 사는 은혜를 받은 겁니까? 아직 겁나는 것이 있는데 아직도 두려움이 있는데 아직도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있는데. 사람이 공포영화를 만들어서 그걸 보는 것은 자기 안에 공포가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들어 있는 것을 미리 다 끄집어내서 만들어놓으면 심한공포를 미리 경험해서 좀 약한 공포는 견디겠다 싶어서 공포영화를 보는 거예요. 그런 공포영화를 만드는 것은 내 속에 그런 무시무시한 공포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겁니다.

공포가 들어 있다는 것은 나는 죽인지 밥인지 한마디로 인생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 말입니다. 도대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다만 느끼는 것은 이 몸뚱이 하나 편하면 좋겠다, 그것이고 안 편하면 모세처럼 죽여 달라고 하면 그 뿐이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갇혀 있는 자유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더 이상 네 몸에 대해서 구애받지 않는 삶, 늙어가고 나이 90이 되어도 구애받지 않는 삶, 목숨이 끊어져도 죽음 이후에 세계에서도 일체 구애받지 않도록 이 지상에서부터 미리 눈뜸과 은혜와 자유를 주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다 이루어서.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자유는 내용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만이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란 선악과 따먹은 자가 마지막에 어떻게 저주받는가에 관한 것이 죽음입니다.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죽음이란 뭐냐?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왜 지옥 불에 가야 될 이유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 죽음인데 우리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경험을 못했어요. 하지만 그것을 아는 자가 있어요. 마귀가 알아요.

원래 지옥이란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악마를 위해서 만든 것이 지옥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악마, 옛 뱀을 처벌하기 위해서 만든 그 유황불에 마귀의 인을 받은 사람들은 같이 참여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천국은 우리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든 세계에 이마에 인 맞은 사람은 참여한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귀나라 주님나라에 양쪽으로 갈라지기 위해서 대기상태에 있는 것이 인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해서 ‘이런 인간은 악마편이다.’ 하고 구분하고 ‘이런 인간은 천국 간 사람이다.’ 구분하는 것 그 중간지점에 우리가 놓여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뭣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몸이 따라주는 대로 바깥으로 외칠 뿐입니다.

사람들이 왜 치과에는 가기 싫어하는 겁니까? 치과에 가면 그 이빨의 뿌리를 흔들어요. 대충 아픈 것이 아니라 무지무지 아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 이빨 뿌리를 흔드는 겁니다. 아프라고 말씀으로 찔러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프다고 움츠러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키는 대로 할게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라고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의 맛을 못 봅니다.

선악과 따먹은 죄 값, 하나님의 진짜 죽음이, 이런 저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될 텐데 그 경험을 놓쳐버리면 계속해서 죽을까 싶어서 공포심에서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한 번 죽어봐야 자유를 얻습니다. 한 번 죽어봐야 공포가 없어요. 너의 죄 값을 치렀다,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한테 어떤 차원에서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너는 저주를 몰라. 지옥 불을 온몸으로 받아야 되는 정도로 너는 저주스러워. 그 저주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너 자신이 모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저주받아야 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저주받아야 되는 인간을 향하여 ‘너의 죄 값을 내가 대신 치렀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하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인줄을 언제 아느냐 하면 정말 아플 때 느끼는 거예요. 따져봅시다. 이빨 아픈 것이 기도를 적게 해서 아픈 겁니까, 교회 안 나와서 아픈 겁니까, 헌금 안 해서 아픈 겁니까? 이것은 내 몸 자체가 아파하는 거예요. 내 몸이 아프면 그 몸에서 구성된 자아도 덩달아 아파요. 인간은 몸이 요구하는 대로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것이 애벌레 같은 자아라니까요.

자아요, 그것 다 헛방입니다. 몸 아프면 자아고 뭐고 다 귀찮아요. 이빨이 아픈데 무슨 이웃사랑이 되겠어요. 자기 몸이 아픈데 어떻게 이웃사랑이 되겠어요. 안되지요. 예배당에 아침에 와보니 밑층에서 공사한다고 두두두두, 하고 있어요. 아무리 좋은 말씀 들리고 있어도 밑에서 드릴가지고 소음내면서 뚫고 있어 보세요. 그 음파에너지가 귓가에 들어오면, 지금도 퉁퉁거리고 있습니다만 그 소음이 귓가에 들어오면 말씀이고 뭐고 다 귀찮아져요.

저주받은 몸이 있는 이상은 자아란 그 몸을 따라서 하나님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꾸 우리에게 미움 받는 식으로 말씀을 전해요. 그것은 우리 자아를 탓하는 것이 아니고 네 자아를 만들어내는 원래 몸이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께 대적하게 되어 있는 마귀가 지배하는 몸인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우치도록 하려는 겁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계룡산에 가서 도 닦는다고 은혜 받는 것이 아니에요. 이 몸이 있는 이상은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오랜만에 바른 소리를 해서 너무 기쁩니다. 몸이 있는 이상은 ‘하나님, 왜 자꾸 저를 갋습니까?’라고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지요. 이 몸 가지고 목사 되고 장로 되어 봤자 그것은 위선이고 다 소용없습니다. 구약학 하고 신약학 해서 박사학위 받아 봐야 소용 없어요. 우리 몸 자체가 하나님께 대드는 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신 것은 ‘나한테 와서 날 죽이라.’ 그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다 건드려도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세요. 다른 것은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세요. 이것 건드리면 화냅니다.’라고 제일 아래쪽에 건드리지 말라하는 그 대목이 있어요. 주님께서 치과의사가 되어서 그걸 톡 건드려 버리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면 우리는 행함으로는 구원 못 받겠네요? 내가 행함으로 구원 못 받으면 그럼 우리는 구원 못 받잖아요. 구원 받게 하지도 못할 교회 내가 왜 다니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그것을 제대로 건드리는 겁니다.

사람이 말씀을 줘도 우리 몸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내 순종으로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만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이빨은 완전히 썩었어요. 썩었는데 안 썩었다고 우기는 것이 있어요. 썩었다고 하니까 ‘주여, 이것은 썩었지요. 이것은 썩었지요.’ 하고 자기가 썩은 부분을 자꾸 따로 골라내고 부흥회에서 회개하라고 하면 과거 중에서 회개할 거리 자꾸 골라내는데 그것은 소용없어요.

회개하라는 말은 우리는 회개할 수도 없을뿐더러 회개해봤자 그 회개했다는 그 자체가 나의 의로움으로 나의 대견함으로 나의 잘남으로 해골수습하고 사리수습 하듯이 도로 수습이 돼요. 이미 흙으로 돌아갔으면 그냥 휙 버리면 되는데 다시 거기서 사리 찾는다고 하는데 거기서 사리 왜 찾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있는데, 주님이 우리를 만들었기 우리가 이미 흙에 속한 것을 알잖아요.

주님이 이미 우리가 흙인 것을 알고 죄 값을 치렀다고 하는데 죄 값을 알고 죄만 찾으면 될 것을 가지고 그래도 의로운 것,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사리, 혹시 나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무엇을 따로 찾는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하는 자를 계속 말씀으로 건드릴 수밖에 없는 거지요.

우리가 교회 와서 은혜 받으면 그 결과가 어떠냐? 제가 의존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하면서 제가 은혜를 받았어요. 저의 집이 옛날에 비산동에 살았는데 우리 집 지대가 높으니까 창문 너머로 앞집이 다 보여요. 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냥 보여요. 앞집 아저씨가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해서 들어오면 자기 부인이 저녁 밥상을 차려줍니다. 툇마루에 밥상을 올려놓으면 우선 손으로 상위에 차려져 있는 반찬이며 국그릇들을 손으로 확 훑어버립니다. 그러면 상위가 말끔하게 되지요. 그 다음에 발가지고 상을 아예 차버리면 상이 마당으로 툭 떨어져 버립니다. 그때 어린마음이지만 그 아저씨가 남이지만 정말 죽이고 싶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 오늘 헌금 가져왔습니다. 예배드리러 왔습니다.’하면 주님께서 술이 떡이 된 아저씨처럼 되어서 “차라!” 하면서 음식그릇 싹 쓸어버리고 그 다음에 발가지고 상마저 차버릴 때 우리는 속이 시원합니다. 우리는 “성경 석장 봤습니다. 기도 두 시간 했습니다. 봉사도 했습니다.” “다 치워라. 언제 그런 것을 나에게 가져오라고 했느냐.”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안면을 군화 발에 채이는 그 쾌감, 그 희열이 있어야 돼요.

주님한테 군화 발에 채여서 얼굴에 시뻘겋게 자국이 나고 마당에 툭 나가떨어지는 쾌감, 희열. ‘내가 너를 아는데 너는 왜 너를 모르냐.’ 그 말입니다. 그 비슷한 노래도 있어요. 이 모든 말씀이 지금 너에게 응했다, 그 말이에요. 지금 임한 거예요. 그럼 이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말씀이 되는가? 오늘 본문 말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 말씀이 이사야 61장 1절에서 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이게 빠져 있어요.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라는 것입니다. 꽃으로 된 관을 씌운다는 말씀이죠.

지금 제가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예수님처럼 같이 펼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는 구약밖에 없었기 때문에 구약 펼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사야 61장을 펼치고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여기서 ‘시온에서, 시온,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에게만 이런 특별한 혜택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가 어떤 자인가? 이사야 전체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퍼져 있는 것을 한 점으로 모으는 작업을 이사야가 하는 겁니다.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잉크 한 방울 똑 떨어뜨리면 하나의 점 되지요. 퍼져 있는 것을 응축하고 응축해서 한 점으로 모으는 작업을 이사야가 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나라 있다.’ 무슨 나라? ‘그 이름은 이스라엘. 보기는 보았나, 들어는 봤나, 우리는 이스라엘 하나님이 함께 하며 지켜준다.’라고 이스라엘이 생각한 겁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잘라라.’ ‘씨 뿌리는 것은요?’ ‘씨 뿌리는 것마저 다 잘라라. 이것은 내 백성이 아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나라가 있다고 펑퍼짐하게 있는 모든 것을 한 점으로 모으는데 그 모으는 지점이 장차 메시아가 오실 시온, 시온에서 오실 분이 모든 것을 한 지점으로 다 모으는 겁니다.

진공청소기죠.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입니다. 제가 여기서는 진공청소기라고 예를 들었는데 의존교회에서는 뭐라고 예를 들었느냐 하면 사출성형, 사출성형이라고 들어본 적 있습니까? 성형수술 할 때 그 성형 말고 사출성형입니다. 플라스틱 제품의 원료인 석유에서 나오는 수지가 있습니다. 160-260도 사이의 높은 온도에서 수지가 돼요. 플라스틱 바가지를 만든다 할 때 그 모양을 뜨는데 그걸 금형이라 합니다. 금속으로 바가지모양의 틀을 만듭니다. 사출기를 가지고 금형에다 수지를 쏘면 그 액체가 금형 틀에서 바가지가 되어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위 우리가 내어놓는 많이 아느니, 똑똑하니, 많이 가졌느니,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도와준다느니, 교회 다니니 복 준다느니 하는 이 모든 것을 강한 고온에 의해서 이걸 다 녹여 버려요. 녹여서 사출기로 쏘는데 그 사출기 끝에서 하나의 점으로 모입니다. 하나의 점으로 모이면 성령께서 사출하듯이 쏩니다. 쏘게 되면 어떤 사람은 키가 크거나 작거나 어떤 사람은 목사이거나 장로이거나 어떤 직분이든 어떤 인물이든 나이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그 안에서 다 똑같은 플라스틱 제품이 나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플라스틱이면 우리도 플라스틱, 이삭이 플라스틱이면 우리도 플라스틱, 모세가 플라스틱이면 우리도 플라스틱입니다.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변화 산에서 같이 이야기한 것 아시지요. 그렇다면 그 하늘나라는 플라스틱 나라입니다. 똑같은 수지, 주께서 우리를 녹였던 적이 있는, 주께서 점으로 만든 경험을 가진 사람의 공통점을 가지고 하늘나라 넣어주는 겁니다.

원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것이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씀에 의해서 지시받게 되어 있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지시 받게 되어 있는데 그 지시를 벗어나서 자기세계를 갖게 되면서 이것이 점인데 그 점이 자기면적과 크기를 가지고 자기 공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게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수학에서 점이라 하는 것은 크기나 면적이 없는 것을 점이라 합니다. 똑 한 방울, 이게 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야, 네 점 크다.’하면서 점과 점 사이의 크기와 우열을 논하게 되었고 면적 가지고 우쭐대기 시작한 거예요.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점으로 모아놓는데그 최초로 점으로 모아놓으신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것이 없어요. 자기 것이 없고 아버지의 말씀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사출기, 점으로서 움직이는 겁니다. ‘이 모든 말씀이 내게 응했다.’ 할 때 예수님이 자기자존심이 없습니다. ‘이사야의 모든 말씀이 내게 응해서 나는 말씀이 하는 대로 그 기능을 발휘할 뿐’인 거예요. 하나의 점일 뿐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탓하는 것은 말씀을 탓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점이 아니라 우리까지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점으로 만들어놓고 점으로 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말씀이 응했다. 말씀이 응했다. 말씀이 응했다.’를 하나님께서 보시고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두 가지 과제가 있는데 하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사’라고 할 때 우리가 하나의 점이 되지 않고 나의 고유한 영토, 나의 확장될 수 있는 힘의 영역이 있다면 ‘가난한자에게 복음을’라고 하면 우리는 가난한 자가 되기 싫은 거예요. 가난한자가 되어야 복음을 아는데 우리는 아예 가난한자 자체가 되기 싫은 거예요.

우리는 나만의 영역에서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가난한자’라는 말씀을 위해서 우리를 ‘가난한자’에 모으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집이 세 채, 네 채 있어도 관계없어요. 가난한자 되게 하는 거예요. 가난한자가 되어야 그 다음에 금형에 의해서 우리는 복음을 아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여기서 우리를 포로 된 자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간섭받기를 싫어해요. 제가 울산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그 지명이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지명이 어디입니까? 그 지명을 밝혀야 돼요. 지어냈다고 하기 때문에. 그 지명 이름이 농소? 농소에 있는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그 앞에 있던 일군들이 큰 소리로 이야기해요.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아내가 교회 가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나는 교회 안 간다. 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이이다.’ 하는 거죠.

그 사람은 점이 아니에요. 응축이 아니고 펑퍼짐한 자기영역을 만들어놓았어요. 어떤 사람은 ‘나는 목사가 와서 아무리 교회 나오라고 해도 교회 안 간다. 내가 자유인인데 왜 교회를 가서 이 자유를 방해받아. 어떤 중이 나보고 절에 오라고 그렇게 해도 나는 절에 안가. 왜 내가 절에 가서 자유를 방해받아.’ 농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응축이 아니고 평생 동안 살면서 늘여놓은 자기역사가 있어요. ‘이것은 내 것이고 여기까지는 내 영역인데 이것을 왜 남에게 빼앗겨? 교회가면 이것을 더 키우고 확대시켜야. 그 맛에 내가 교회 간다.’라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뭡니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님의 말씀이 응해버리면 우리를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뭘 느끼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원래부터 자유가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평생토록 살면서 성도로 살면서. 직업 바꿔보세요. 그거 바꾸면 또 간섭하는 사람이 있고 가게 차려서 혼자 일해도 고객들이 압박을 가해요. ‘치킨이 맛이 영 …….’ 또 일요일 날 문 안 열면 ‘이집은 왜 일요일에 문을 안 열어. 장사 그만하려 하나.’ 이렇게 나옵니다. 이 모든 것, 우리는 도대체 자유가 없어요. 그걸 느끼게 해요.

세상 사람들은 자유가 없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자유를 넓히려고 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더 넓히려고 하다 보니까 하나님이고 교회고 다 필요 없고 그저 자기 힘만 키우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요.

여러분이 죽을 때 ‘자녀들아, 내 눈과 장기 다 대구동산병원에 기증해라.’고 유언하잖아요. 소용없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죽어계시고 아버지 뒤처리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뜻대로 할지 안할지 아무도 몰라요. 법정스님이 책 내지 말라 해도 출판사들이 책 다 내버리면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자기 맘대로 안돼요.

그래서 우리가 평생토록 느끼는 것이 뭐냐? ‘아, 포로구나. 내 맘대로 아무것도 안되는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시는 자유를 통해서 이곳은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우리는 내 것 되게 하기 위해서 보니까 좁은 것만 보는데 내 것을 나한테서 빼앗아가는 사태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눈을 뜨고 다 알 수가 없어요. 나중에 가서 보면 내가 뭔가 안다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나 같은 것을 위해서 눈떴다는 이야기를 했을까, 라는 것을 새삼 알게 하는 거예요. 커튼 뒤에 있는 세계, 그것이 점점 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마지막에 ‘주의 은혜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은혜라는 거지요. 세상사람 만나는 것 세상 살아가는 것 내 뜻대로 되는 것 하나도 없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미래까지 소급해서 전부다 주의 손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 순간이 올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나를 만들어놓은 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를 부리고 있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점으로서 말씀대로 산 것처럼 우리도 부정적이나마 주님의 말씀의 은혜 속에 한평생 말씀대로 살아서 포로 된 자가 뭐며 눌린 자가 뭐며, 행함이 뭐며 은혜가 뭔지를, 죄가 무엇이며 진짜 죽음이 무엇인지를 남에게 증거 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정말 잘 알고 계시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의 영역을 확대하려고 힘을 더 모으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우겼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차라리 말씀이 모이는 그 점에 동참하게 해 주시고 한 점으로 응축이 되어서 말씀에 부림을 당하고 예수님한테 사용을 당하는 구원받은 증거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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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