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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일반] 70이레 평에 대한 논평: 이준 성도님의 글우리교회다니엘

[일반] 70이레 평에 대한 논평: 이준 성도님의 글

이름 : 이근호(IP:117.55.136.28)

다니엘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에 대한 논평을 읽고

이름 :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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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비역사적 해석이 아니라 반역사적 해석이라고 해야 보다 엄밀한 표현이라 본다.
아담 세계(느부갓네살이 본 우상)는 역사성을 띠고 있고, 그 세계에 대항하는 예수님(뜨인 돌)의 나라는 그 역사에 대항 혹은 심판(끝장내기)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초월적 섭리(뜨인 돌의 쳐부숨) 그 자체는 말그대로 역사성을 초월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심판은 선행하는 역사를 심판 행위의 대상물로 삼는다는 점이다.
비역사적이라는 말이 '아담들에게' 오해(?)의 소지를 띠고 있음은, 모든 것들이 역사성을 띠고 있기에 역사적 관점을 벗어나서는 해석이 불가하다고 여기는 아담들의 보편적 의식 때문이기도 하고, 아울러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모든 인간사를 시공속에 가두어 두신 섭리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아담들에게는 '비역사적'이라는 말보다 '반역사적'이라는 말이 더욱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심지어 아담들은 판타지(가상 내지는 묵시)의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역사 텍스트의 기본적 내러티브 요소들을 가지고 전개해 나간다.
이에 대하여 반역사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역사 의식에 기반을 둔 모든 해석이 왜 엉터리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출발점에 기반을 둔 것이며 역사라는 흐름의 존재성을 견지하면서(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역사라는 흐름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립하는 것이다. 물론, 의미에 대한 부정은 의미(내용물)를 담고 있는 역사라는 형식(그릇, 껍질)에 대한 존재론적 부정에 가까울 수도 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따라서 비역사적이라는 말과 반역사적이라는 말이 알고 보면 언뜻 일정 수준 이상은 동의어인 셈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차이가 있다.

비유적 예를 한 가지 들어 보면, 버스 차체에는 결함이 없는데, 버스 운전기사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 버스 기사를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미친 듯 달리는 그 버스에 타고 올라 그 미친 기사를 운전석에서 제거할 것인가라는 논쟁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버스의 존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버스라는 역사에 실린 의미(버스 기사)의 부정적 성격을 문제삼는다. 즉, 버스(역사)라는 형식(그릇)을 겨냥하는 것은 역사성 부정이기에 비역사적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고, 버스 기사에게 맞서는 것은 버스(역사)라는 형식(그릇)이 담고 있는 의미와 힘에 맞서는 것이기에 반역사적이라 명명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버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비역사적'이라 표현한다면, 이에 대해 버스가 왜 미친 듯 달리고 있는가의 원인(의미) - 여기서는 버스기사- 를 엄밀히 따져 보고 그 의미가 부정적임을 간파하면서 그 의미에 대항하는 것은 '반역사적'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주의의 반대는 무역사주의가 아니라 반역사주의인 셈이다.
(위의 비유는 주지하다시피 본 회퍼의 그것에서 가져온 것인데, 같은 비유를 두고서 이 글에서 사용한 취지와 본 회퍼의 취지가 사뭇 다름을 이 글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진보신학자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버스 기사를 끌어내리려는 물리적 수단 행사 여부를 기점에 두고서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으로 엇갈리게 됨은 주지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금번에 백석대학교 논문발표회에서 드러난 바, 신학하는 아담들의 모습은 평소 숨겨졌던 자신들의 유치찬란함과 무식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해프닝 가운데 하나였다.
예컨대, 일개 목사가 감히(?) 신학자들 사이에 기웃거리면서 발제 형식에도 맞지 않은 글을 가지고 운운하느냐라는 그들의 푸념어린 모습을 대하면서 마치 가래떡을 부엌칼로 썰어야 보기 좋지 왜 손으로 뚝뚝 떼고 그래...라고 핀잔을 주는 부엌데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가소로움을 목도하며 아연실색하였다. 또한 그들의 푸념을 통해 머리 굵어보이는 초딩들의 어리광과도 같은 사뭇 앞뒤가 맞지 않는 어색한 코미디류를 관람하는 듯했다. 일개 학자들이라는 특정 집단의 태도가 학문을 업으로 삼는 자로서 이른바 이론가들이 아닌 실천가들의 입장과 그간 고민들을 포용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네들의 밥그릇 보존 차원에서 비아냥거림과 시건방짐으로 일관한 듯 보였다. 즉, 그들은 학문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부터가 안 되어 있었다. 사회속 일선 현장에서 성경신학과 철학신학 등을 바탕으로 다양한 세력들과의 교전을 통해 실전격투기 경험을 쌓아온 한 백전노장이, 속세와는 담 쌓고 그저 자기네들 산 - 여기서는 '구약신학계'를 가리킴 - 에서 도나 닦아온 자칭 무술가들 사이에 불쑥 나타나 도전장(?)을 내밀며 다소 왈가왈부해대니 자기네 밥그릇 챙기려는 본능적 반응이 튀어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여지껏 대구에서 멀쩡하게 목회(?)하며 잘 살아온 사람을 두고서 계룡산에서 도닦다 내려왔느냐는 비아냥거림 - 이는 참으로 적반하장임을 바로 위에서 언급했다. 일선 목회자는 신학자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는 식의 선입견과 뒤섞인 자기네 밥그릇 챙기기식 반응을 통해 그들 신학자들을 자기네 우물 속에나 갖혀 있는 개구리들 내지는 자기네 신학자들의 세계를 '산'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국한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그 산에서 도나 닦아 온 자들로 제한시키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핀잔은 자신들의 골수에 사무치도록 깊이 박힌 아담의 태생적 의식, 곧 (첫아담의 반역과 타락으로 오염된) 역사성에서 비롯된 것임도 여지 없이 보여준 대목이다.

(막 4:23, 개정)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위의 성경 구절은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만 들린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들을 귀가 없으면 아예 원천적으로 못 듣게 되어 있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한다(모든 말씀이 내게 '복'을 주는 것이라는 마귀적 발상은 옛 동산에서 축출된 아담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자기 중심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현상의 일부이다).
솔직히, 구약신학을 하는 자들의 속실력은 뻔하다. 그들의 실력이란 외국어 실력 하나 말고는 그저 일반인들의 사고 수준과 별반 차이가 없다(이런 현실은 나로서도 수년 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터다). 일반 언어학의 일부에 불과한 히브리어 원어 및 원전 연구, 본질주의적 사회과학 분야 - 역사학, 고고학, 지리학 등 - 에서 차용한 영역(성서고고학, 사본학, 원문비평학, 고대근동학, 비문연구, 성경지리학 따위), 그리고 실용주의적 사회과학 분야인 정치학, 법학 등에서 차용한 영역(율법과 고대 법전 연구, 왕국사 및 전쟁사 연구 등) 등은 인문학적 기반 - 특히 여기서는 철학적 기반 - 을 두지 않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알고 보면 그게 그 소리고 동어반복에 가까우며 일반적인 사회과학의 일부이거나 거기서 차용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으며, 순수한 성경신학적 면모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이 점은 최근의 구약신학 연구 동향이나 자신의 소논문을 소개하는 구약신학 전공 교수들의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을 방문하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과연 구약신학자들인지, 아니면 일반 역사학전공자들인지 분간이 안간다는 점 말이다. 이것은 학문의 기본 특성 가운데 하나인 간학문성으로 인해 학문간의 공통분모나 중첩 영역이 어쩔 수 없이 상존한다는 불가피성 때문이 결코 아니다).
아담의 모든 학문들은 그것이 인문학 분야든, 사회과학 분야든, 자연과학 분야든, 예술문화학 분야든 간에 죄다 철학적 기반을 근간으로 하여 진행되는데, 논문발표회에서 철학적 전문용어를 구사한 그 백전노장에게 왠 철학 타령이냐는 식으로 대꾸하던 그 교수들의 비아냥거림 속에서 오히려 그들의 얕은 학문적 밑천이 훤히 들여다 보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철학적 기반이 없다는 말은 학문적 기초 체력이 부실하다는 말과도 같다. 신학이라는 학문이 인문학의 일부가 분명하며, 그러한 인문학적 성격을 띤 신학 분야 중에서도 교의학과 성경신학은 순수 신학 분야임과 동시에 철학적 함의가 다분한 문학적 성격이 짙은 분야임이 분명한데 철학적 기초에서의 출발과는 거리가 먼 경영학이나 경제학 등 - 문학적 소양을 등한시 하면서 이러한 실용 학문을 중시하는 풍토에 대해서는 C.S.Lewis도 자신의 저서 '악마의 편지'에서 지적한 바 있다 - 과 같은 저질적 세속학문과 진배 없음은 어찜인가. 철학적 기반이 없는, 철학적 접근을 거부하는 그 구약학자들의 주장을 들여다 보면 원전이나 선행 연구물들을 텍스트로 삼아 문법적, 역사적 연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귀납적 방법론 차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작 철학적 기반 - 구조, 뼈대에 해당 - 이 없으니 한글로 봐도 될 것을 원어나 타어학 실력을 가지고 들이민다고 해서 신선하거나 의미 있는 해석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그들은 철학적 기반 위에 가해지는 모든 류의 해석들을 신학적이며 의도적이고도 짜맞춘 해석이라 몰아부치면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야말로 원전에 충실한 순수한(?) 해석이라 주장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제 밥 그릇 챙기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컨대, 내가 살고 있는 곳에 가까운 어느 장로교 계열의 신학대학원의 한 교수는 유수한 국내 아무개 대학의 아무개 문학과를 나와서 국외에서 구약신학 박사학위과정을 통해 70인역 연구를 전공했는데, 정작 이런 사람들의 연구물이나 설교를 들어보면 국내에서 신학대학원 나온 일반 목사들의 설교 수준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원전(실은 사본)에 대한 (최신) 연구라는 것도 실은 고고학이나 비문 연구, 생태 연구 등의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에 걸친 간학문적 연구 결과의 지원 사격에 의해 새로이 구성되는 융합적 사고의 결과물이지 순수하게 원전 자체 연구만 가지고 도출해낸 순수한 추가적 해석은 전무하다.
그러니 정작 언어학적 소양을 밥그릇으로 삼는 자들이 언어철학적 기반에 대해선 무지함을 드러내면서 다니엘 70이레와 기표, 기의의 문제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이러한 그들의 무지함이 우리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아울러, 생애와 정력을 소비해 가며 자신들은 주님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그 전파를 위해 진력했노라고 주장하겠지만, 정작 진리이신 그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롬 10:6-7, 개정)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저 자기 좋아서 한 일을 가지고 무슨 거대하고 심오한 학문적 깊이나 가지고 있는 듯 착각해선 안 된다. 애당초 기존의 아담 세계의 의식, 곧 첫아담의 의식에서 유발된 역사 의식을 가지고 성경 또한 하나의 텍스트(해석 대상)으로 삼아 해석을 가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조금도 산출해 내지 못 한다.
사람들은 속고 있다. 자신들의 돈을 갖다바칠 목사들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자들, 곧 신학자들 밑에서 배우고 있다는 현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이들의 연구에서는 결코 영생이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마소라 사본을 전수했던 유태인 가문의 가상함도 불구하고 그 가문들에 구원받은 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말씀 전수를 맡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영생)의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갔다는 말은 분명히 들어 왔다. 오늘날 똑같은 작태가 신학교라는 공간에서 신학자들이라는 첫아담의 후손들에 의해 여전히 통시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창 4:20-21, 개정)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아담의 후손, 곧 아담들에게는 온갖 재주 부리는 재능들이 값없이 원천적으로 제공되었다. 인간사 모든 분야에 걸쳐 첫 출발점에서 각양 세부적인 것들이 보다 세련화되는 과정을 거쳐 학문적 기초를 수립하게 되었고 오늘날 거대한 학문 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는데, 정작 그 거대한 영역을 들여다 보면 다음 한 말씀의 경계선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전 1:9, 개정)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이미 있는 아담의 것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의식적 관점을 가지고 해석적 결과물을 내놓은 것은 기존의 아담 세계에 대한 이야기 밖에는 안 된다. 우주선이 아무리 힘차게 대기권 밖으로 박차고 나가도 결국 다시 지구로 되돌아 오는 것과도 같다. '의'의 세계는 외부로부터 터치고 들어온 새로운 공간이다. 이 묵시의 세계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이 세계 내부에 대한 열람과 이해는 아무에게나 허용되어 있지 않다.
아담들에게 있어서 그 세계는 무지의 공간이요, 이 외부 세계로부터 아담들의 세계에 도착하는 끊임 없는 분노와 경고성 어린 메시지는 아담들의 눈에는 그저 생소하면서도 우발적인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닫힌 세계요, 어둠의 공간이다. 믿음 없는 자들, 곧 아담들에게는 이 세계가 오히려 어둠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어둠의 자식들이 내뱉는 소리를 이번 신학논문 발표회에서 자칭 구약신학자들이라는 자들이 유감 없이 토해내었다.

실로 그랬다. 구약시대의 성막 안도 어둠의 공간이었다. 빛 비췸이 없으면 그저 그 공간 내부는 어두울 뿐이었다. 빛을 발하는 촛대, 생명을 상징하는 빵, 향기를 발산하는 향단, '거룩'이라 이름 붙여진 그 어둠의 공간을 채운 소박하고도 초라한 그런 소품들이 상징하는 것은 다름아닌 오직 한 분 예수님 뿐이었다. 빛은 어둠에 대하여, 빵(생명)은 죽음에 대하여, 향단의 향기는 아담들(송장들)로 가득찬 우주의 오아시스 아닌, 우주의 공동묘지인 이 지구 유성 전역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 아담들이라는 육신들로부터 진동하는 시체 썩는 냄새에 대하여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아무나 그분께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창 3:24, 개정)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첫아담의 세계에 속한 자는 첫아담 세계의 의식에 걸맞는 말과 글을 구사하기 마련이며, 둘째(마지막) 아담의 세계에 속한 자 또한 자신이 소속된 세계의 말과 글을 구사하기 마련이다. 각기 그들의 말과 글을 해석하려 듦에 있어 각자 말과 글에 품긴 독특성(개성)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요 18:37, 개정) 『...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전자는 시공간, 곧 역사에 갇힌 죽음의 존재들이기에 역사성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해석할 수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기 마련이다. 후자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 1:8)"에게 속한 자들이기에 역사초월적인 이야기를 해도 곧잘 알아듣게 되어 있다. 자신이 믿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 이야기에 바로 이러한 아담 세계의 죽음성을 극복한 사연, 곧 역사초월적인 담화를 얼마든지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물물을 길어올리는 과정적 행위에서 두레박은 간간히 우물 안쪽 벽에 부딪히며 소리와 낙수 현상을 유발한다. 그저 우물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설명을 두고서 거룩한 학문적 해석, 곧 신학적 해석이라 주장하려 드는 것은 분명한 종교적 사기이다.
예수님께서 몰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한 복음은 우물 안의 개구리들을 괴멸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원래 그 우물은 오염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개구리들...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오랜 예전부터 그 우물안에 개구리 알들이 생기고 개구리들이 우물물을 길어 쓰는 사람들을 위협해 왔다.

(마 13:25, 개정)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8, 개정)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나님 나라의 도래, 그 나라가 십자가라는 말뚝으로 아담 세계 심장부에 "콱!"하고 꽂히면서 그 우물 안에서 설쳐온 개구리들에게는 종말이 고해졌고, 그 우물 속에 개구리들을 풀어놓은 장본인인 사탄에게도 심판의 선고가 내려졌다.

(계 20:2, 개정)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우물 안의 어둠 세계와 우물 밖의 외부 세력 간의 이런 대립적 양상으로 성경을 보지 못하니 다니엘 70이레를 역사적으로 보려드는 시각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저 다니엘 70이레의 역사적 나열 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대할 뿐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려는 바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며(요 5:39), 그 예수님과 관련된 핵심 사건은 오직 십자가 사건 뿐이다(고전 2:2).
다니엘 70이레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문법적-역사적 해석이 되었건, 비역사적 또는 반역사적 해석이 되었건 아무런 신학적, 복음적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신학자들은 예수 또는 십자가,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역사적 사실성을 담보해냄으로써 자신들의 역할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든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행위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여긴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문법적-역사적 해석이라는 학문적 도구이다. 이에 대하여 자연 과학적 측면에서 창조론자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역사적 사실성을 담보해냄으로써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과 주님께 영광 돌린다는 다중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과학적 실증주의이다. 방법론은 다르지만, 시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이나 흔적들을 질료로 삼아 자신들의 신학적, 또는 과학적 작업에 따른 의도된 결과물을 산출해내고자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작업들이 다름 아닌 그간 아담 세계에서 똑같이 행해져 온 바, 바로 그 아담(들)의 학문(적 행위)라는 점이다. 이 모든 아담들의 학문적 작업들은 십자가 사건에 담긴 의미와 정신에서 유발된 게 아니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의 복음은 기존의 아담들의 의식에 천착된 학문적 뿌리와 방법론마저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방식으로 작용하시기 때문이다.

(요 5:41, 개정)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지방선거에 출마한 어떤 자들을 두고서 목사들이 이런 추천사를 언급했다.

"아무개 장로님이 **에 당선되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고장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보다 빨리 오게 될 것이라..."고. 한 마디로 '사기'다.

대통령님께서도 가장 큰 서울시의 시장 시절에 그 도시를 하나님께 바쳤다 말았다 하셨는데, 그에 비하면 피라미도 안 되는 '것들'이 감히 저런 망발을 입에 담는다. 정치 분야에서도 이러한데, 신학계 - 여기서는 구약신학계 - 는 별 수 있는 분야던가.

예수님의 복음, 곧 십자가 사건에 담긴 의미성은 아담들의 갸륵한 학문적 업적과 성과물이라는 포장에 담겨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이번 논문발표회에서와 같이 세련되게 포장되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으면서도 나름대로 학문적 차림새를 걸친 십자가 복음은 거룩을 가장한 아담의 학문 - 여기서는 구약신학계 - 를 공격했다. 여지 없이 아담들의 모든 행위성들 - 아담 행위의 총합은 곧 역사다 - 을 부정하면서 돌파해 오는 것이 십자가 복음인데, 다니엘 70이레의 해석 결과 또한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와 성격이 발견되어져야 함에도 정작 반역사적 해석이 아니고서는 그 복음 - 아담 세계 대한 대립적 삶의 주도'력' - 이 성도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적용되는 통시적 성취가 담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물리적 진행 속에서 유발되는 아담들의 다양한 삶의 총체적 흐름을 두고서 흔히들 '역사'라 부른다. 이 역사 속에서 아담들이 종속적으로 살아가면서 스스로는 역사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들 착각하는데, 어쨌든 이 역사 없이는 아담의 삶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을 한다면서도 이 역사성, 곧 첫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의식적 관점을 탈피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면서 신학자 노릇을 하고 있다. 첫째 아담에 속해 있음이 뻔히 드러나는데, 둘째 아담을 위한 학문을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내가 쓰는 글에서 '(첫)아담' 또는 '아담들'이라는 말은 1차적으로는 '지옥 갈 수밖에 없도록 결정된 존재(들)', 즉 '언약 밖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백석(흰돌)' 위 - 여기서는 백석대학교 기독대학원의 논문발표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붙어 있는 이름을 가리킴 - 에 모였던 그들은 신학이라는 '장난질' - 비트겐슈타인의 게임, 또는 언어놀이 - 에 몰입해 있는 바로 그 순간, 자신들이 발 디디고 있는 그 '백석'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 것이다.

'흰돌'의 의미를 풀어내기 위해 문법적, 역사적 작업을 감행해봤자 거기서 아무런 의미가 나올 수 없다. 흰돌은 문법적으로는 그냥 흰돌이다. 다른 추가적인 의미는 없다. 그럼 흰돌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초대교회 당시, 즉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 흰돌의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중세교회시대, 종교개혁시대, 근현대교회시대 등을 거치면서 각각의 시대에 역사적으로 어떤 추가적 의미와 가치를 띠는가 라는 점을 간파해내는 작업이 중요한데 그러한 작업이 역사성을 추구하는 작업인가, 아니면 비역사성 내지는 반역사성에서 유발된 어떤 특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작업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곧잘 언급하고 그 의미를 거론하지만, 부활이라는 사건 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시간성 - 거시적으로 표현하면 '역사성' - 을 거부하고 역행하는 엄청난 의미체였다. 신생-성장-사멸이라는 일련의 아담 세계의 고정화된 시간성(또는 역사성)을 여지 없이 무너뜨린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활 사건은 아담 세계의 역사성을 심판하고 부정하고 종말을 고한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하여 유발된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것의 관건은 어디까지나 십자가 사건(의 의미에 대한 바른 이해)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들은 부활 사건 조차 일련의 역사적 진행 단계들 가운데 일부로 해석해왔다. 이런 의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역사 종속적 관점에서 복음이 능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 사로 잡혀 있는 자들이 복음을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하는 신학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눅 11:52, 개정)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믿는 예수님,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담의 세계, 아담의 역사를 끝장내 버린 반역사적 의미체이다.

(계 1:8, 개정)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갈 6:14, 개정)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러한 기본적인 논의의 출발점에서, 본 주제인 다니엘 70이레도 마찬가지로 다루어져야 한다.
다니엘의 7이레, 62이레, 1이레를 역사적 사건의 순서적 나열로 이해하는 것은 언뜻 신구약중간시대부터 예수님의 초림때까지의 일련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증명하는 갸륵한 작업인 듯 보인다.
그럼에도 1이레를 문자적, 문법적으로 7일이라 보고 70이레를 490일로 해석하는 것은 신구약중간시대의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고, 7년으로 보아 490년이라는 역사적 기간 동안 발생했던 신구약중간 시대 당시의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지으려 해도 마지막 한 이레의 내용, 즉 7년간의 언약을 맺은 자들이 실재하지 않았기에 이 또한 역사적 사실성이 전무하다. 이와는 판이하게 세대주의자들은 환란전휴거설을 견지하면서 계4~19장을 다니엘 70이레의 마지막 1이레를 '야곱의 환란 때(렘 30:7, 소위 7년 대환란을 가리킴)'로 끼워맞추려해도 잘 안 되는 억지 해석를 가하기도 한다. 결국 다니엘 70이레를 490년이라는 기간으로 보고 과거적으로 해석하거나 나머지 1이레를 미래적으로 해석하는 식의 역사적 접근법은 구약신학의 주석학적 늪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끼워 맞추려고 해도 결론이 안 난다.

그렇다면 남은 대안은 비역사적 내지는 반역사적 해석 외에는 없다. 다니엘 70이레라는 특정한 표현은 일종의 상징적 기간인 셈이다. 하지만 비역사적 내지는 반역사적 해석의 가능성은 역사적 해석의 실패와 그로 인한 대안적 필요성에 의해 유발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성격에 비추어 보면 처음부터 필연적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러기에 반역사적이다. 다니엘 70이레의 선포는 '하나님의 일방적 예정과 선택', 그리고 '언약적 결별'이 원천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다니엘 70이레가 지향하는 한 사건, 곧 십자가는 세상과의 결별인데, 이는 아담 세계의 역사와의 결별이다. 역사라는 것이 아담 세계의 생명과 문화의 총체적 흐름이라 정의한다면 둘째 아담, 곧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첫 아담 세계와의 분명한 결별이요, 첫아담 세계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었다.

첫 아담에 속한 생명을 죽이시고 둘째 아담의 세계로 옮겨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셨다. 예수님의 생명 주심의 취지는 한정된 아담의 생명의 연장에 있는 게 아니었다. 십자가 사건은 아담의 세계, 그 세계가 배태하고 유지하고 전수해나가는 생명 체계에 대한 전면 부정 선언이었다.

역사, 곧 아담 세계의 시간 속 삶의 총체적 흐름은 십자가에서 부정되었다. 느부갓네살의 우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담 역사속 시대별 왕국들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그 순서는 분명히 역사성을 견지한다. 그럼에도 마지막 아담 왕국의 끝부분, 즉 발과 발가락 부분을 뜨인 돌이 날아와 박살내버린다. 이는 아담 역사의 파국이요 종말이다.

더 이상 역사는 전개되지 않고 단절되어 버린다. 역사는 십자가 이후로 정체되어 있고 진행하지 않는다. 물리적 시간은 흐르는 듯 감지되지만 역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시간의 흐름 자체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역사의 의미가 이미 종말 선언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담 세계에 이미 종말이 고해졌기 때문이다. 시간의 물리적 흐름, 시간 경과의 누적이 역사의 사실성을 입증하거나 담보하지 못 함은 역사의 종말이 이미 선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시간의 물리적 흐름 속에서 십자가 사건으로서 발생되었다. 그럼에도 시간 속에서 터져나온 이 십자가 사건은 아담 세계의 역사성을 대적하는 반시간성을 띠고 있다. 늘 현재적이며 늘 진행적이다.

(계 1:1, 개정)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반드시 속히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는 늘 현재적이며, 늘 진행적 성격을 띤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임에도, 이는 늘 현재성을 띤다. 어떤 현재성을 띠는가. 아담 세계, 곧 죽음의 세계, 지존자께 대한 반역으로 인해 저주받은 죽음의 세계에 대한 저항적 목적의 현재성이다.

(계 13:7, 개정)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늘 두 세계, 곧 첫아담의 세계와 둘째(마지막) 아담의 세계는 대립하고 상충되는 세계이다.

시간의 물리적 진행으로 인해 우리는 비역사적이라는 말을 단정적으로 쓰기엔 다소 부적합하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지닌 더이상의 역사 의미의 무가치성을 염두에 둔다면 다니엘 70이레의 성격은 '반역사성'이라 언명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니엘 70이레에서 이러한 반역사성을 띤 십자가 사건을 미리 - 선취적으로 - 내다보아야 한다. 특정 텍스트에 대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가하는 것은 언뜻 학문적 객관성을 담지하는 작업인듯 여겨지지만, 정작 우리가 다니엘 70이레라는 그림자적 텍스트를 통해 발견코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실체이다.

모형(론)과 실체(론)을 구별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성 어린 작업은 아닌 듯하다. 모형들 속에 실체가 투영되어 있고, 실체 속에서 모형들의 의미가 새삼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간의 물리적 진행, 곧 역사성은 실체의 현현과 동시에 모형들의 가치 상실을 유발시킨다. 이 점에서도 문법적-역사적 해석자들은 자신들의 선배가 유태교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눅 21:6, 개정)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다니엘 70이레를 역사적으로 해석했을 때 거기에 언급된 성전은 분명히 스룹바벨 성전이고 증축된 헤롯 성전이다. 그럼에도 이 정당한 역사적 관점에서 이룩된 물리적 공간은 여지 없이 무너뜨려지리라는 선고를 받고 실제로 그에 합당한 죄벌이 집행되었다(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시공간 속에서 구축된 공든 탑에 여지 없이 가해지는 심판과 파괴는 또 하나의 역사성 어린 사건인가, 아니면 반역사적 힘의 작용인가. 나는 분명 후자라고 본다. 십자가 사건을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하는 자들, 다니엘 70이레에서 이런 반역사적 성격을 띤 십자가를 도출해내지 못하는 자들, 구약(의 각종 모형들, 곧 그림자들)을 읽고 대하면서 신약의 이러한 실체(십자가)를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 삶의 다양한 현장에서 피어나는 이런 십자가 사건의 재현을 간파하지 못하는 자들은 죄다 아담의 의식을 가진 아담의 후손들이며 역사주의 중독자들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은 늘 현재진행적이다. 달리 말해 늘 살아계신 몸이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성전, 즉 성전 건물의 파괴는 실체의 현현을 앞두고 발생해야할 필연적 사안이었다. 모든 그림자들은 실체의 도래(현현)을 통해서만 그 진정성이 확보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전히 구약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엿가락 늘이듯이 길게만 진행되는 역사성 자체에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역사속에 주어진 그림자들(모형들)은 언젠가 드러날 실체이신 예수님과 예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지향토록 숙명지워졌기에 우리는 그러한 취지에서 그림자와 실체간의 경이로운 조화를 맛보게 된다. 역사성 자체가 더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없음은 여러 사례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새삼스런 '영생'의 필요는 아담이 지닌 기존의 생명에 대한 부정이 요청되어야만 가능하다. 다니엘 70이레의 핵심은 '성전'에 있는데, 이 '성전'이라는 특이한 공간은 다름아닌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 앞에서 지니게 되는 가장 중대한 주제는 다름아닌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존재 가능성은 생명의 반대인 '죽음'의 존재와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 확보된다. 성전은 그런 곳이었다. 다니엘 70이레의 핵심은 바로 성전의 위상 문제였던 것이다. 마지막 1이레는 바로 이 성전과 관련된 문제였다. 앞의 69이레의 의미는 오직 이 마지막 1이레를 지향함에 있었다. 70이레의 역사성과 그에 대립하는 비역사성 내지는 반역사성은 다름아닌 성전의 실체적 위상 구조와 관련된 논제인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 주님의 이름과 관련된 특이한 공간이었으며, 성전이라는 공간 안에서 인간의 실존성, 곧 인간 이름의 가치성은 사라져 버려야 했다. 성소는 거룩의 공간이었으며, 그 거룩이 담보되기 위해서는 피의 희생이 끊임 없이 요청되었다. 하나님, 거룩하신 주님께 나아오는 모든 육체들은 오직 희생 제물(의 이름)에 의해 자신의 이름이 대체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었다. 성전이라는 공간은 그렇게 생명과 죽음의 상호대체가 성사되는 특이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아담의 이름, 아담들의 이름, 기존의 첫아담으로부터 받은 생명성, 그 모든 아담들이 성소 밖을 디디며 구축해 갔던 모든 삶의 총체성으로서의 역사성 - 성소 밖 아담 세계의 총체적 생활상의 흐름 - 은 성전이라는 공간 속에서 여지 없이 와해되고 사라져 버려야했다.

느부갓네살의 우상이 뜨인돌에 의해 여지 없이 와해되고 사라져 버린 것은 다름 아닌 특정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성전이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 대체될 것임을 선취적으로 보여준 묵시였다.

이러한 복선이 다니엘서의 초두부터 70이레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음에도 자칭 구약신학자라는 직함을 가진 자들이 다니엘 70이레 문제를 거론하면서 발제자의 다니엘 70이레와 성전관 사이의 관계를 새롭고 특이한 것이라고 취급했음 또한 그들의 무지함을 여지 없이 드러낸 현상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논의에 개입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주의 이름으로 전쟁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이다. 전쟁은 유태인 공동체와 이교도들 간에 이루어진 교전들만이 아니었다. 때때로 우상에 빠졌던 유태인 공동체들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구약시대의 일상 중에 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그러한 전쟁, 곧 생명의 범주와 사망의 범주 간에 벌어진 일상적 대립(전쟁) 상황의 진행성을 목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결코 못 하시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다름 아닌 거짓말, 패전 등이다. 전쟁하시는 하나님의 사전에 결코 패전이란 없다. 반드시 승리하시고 승전하시는 여호와가 다름 아닌 다니엘 70이레를 선포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여호와 쪽의 패전은 있을 수 없다. 자기 거룩의 일관된 확보를 위해 결코 비거룩을 용납하시는 바가 없으신 하나님은 오직 거룩한 몸을 지향하는 성전을 염두에 두셨다. 다니엘 70이레의 반역사적 성격(해석)은 이러한 취지의 한치 양보 없는 관철을 위해 역사적 성전이라는 그림자의 와해를 이미 예정해 놓고 계셨음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해석 관점이다.

반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다니엘 70이레는 구약신학 주석의 늪지대이기는커녕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성전을 지향하는 분명한 메시지임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요 2:19,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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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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