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3월 12일 강의 요일 2:27 내 안에 거하라 와 형제사랑 (부분과 전체)
안산 3월 12일 강의 요일 2:27 내 안에 거하라 와 형제사랑 (부분과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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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12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고-부분과 전체
관리자(IP:124.♡.86.6)
10-03-1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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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13 23:05
안산100312요일2장27절a
안산100312요일2장27절a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부분과 전체)
요한일서2장 27절부터29절까지 보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 신약 이런 내용을 가지고 파악하려하면 파악이 잘 안돼요. 왜 안되느냐 하면 이렇습니다. 28절 같은 경우에는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다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줄을 앎이라” 여기에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얼마나 어려운 개념들이 연이어 나오는지 개념대로 적어볼게요.
여기 27절에 보면 주께서 강림하신다 했지요? 강림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재림이 되겠지요? 재림이라 하는 것은 이미 한번 오셨다는 이야깁니다. 강림하신다는 앞에 무엇이 근간이 되느냐 하면 초림이 이미 한번 왔다는 것이 기초가 되어 있겠죠? 강림하시니까. 그다음에 ‘그 안에 거하라’ ‘그의 안에 존재 하라’ 이것도 참 말이 어려워요. ‘하라’의 명령 ‘존재하라’ ‘거하라’ 명령이 과연 가능한가... ‘밥먹어라’ 이건 가능하잖아요? ‘거기 존재해!’ 그냥 ‘있다’ 하는 것은 지시만 할 뿐이지 명령은 내리지 않거든요. ‘마이크가 여기 있다’ 하면 되는데 ‘마이크야 여기 있어라’ 라고 지시할 사항은 아니란 말이지요. (이건 이따 설명해 드릴게요)
‘그의 안에 거하라’ 는 말을, 이 말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해보겠습니다. 그다음에 ‘그의 의로우심’ ‘예수님의 의’‘의에 행함’‘그에게 났다’ 그에게 났다는 말은 ‘출생했다’ 를 말하거든요. 이렇게 보면 28절 29절 두 절 가운데서 성경에 나오는 개념들을 쭈욱 부어놓은 거 같아요. 강림, 그의 안에 거하라, 예수님의 의, 행함, 우리는 그에게서 출생했다는 것... 이걸 전부다 압축을 시켜놓은 거예요. 압축을. ㅡ마치 조리기구에 소시지나 당근을 알알이 갈아서 전부치는 것처럼, 믹서기에 한꺼번에 넣어 돌리면 완전히 다 섞이듯이ㅡ
성경에 나오는 보통 초림, 재림, 부활 순서가 아니고 한꺼번에 전부 다 같이 모아놓지요? 그러면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이 개념들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해야 되요. 이런 개념들이 한꺼번에 다 섞일 수 있다, 한꺼번에 같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됩니다. 찾아내면 이것을 다 압축시킬 수가 없어요. 보통 큰 작업이 아니죠. 그래서 요한일서가 요한복음보다 더 어려운 겁니다. 이런 개념들을 한꺼번에 다 하나로 농축되는 것이 합당한 그 이유를 설명해야 됩니다. ‘이렇게 농축됩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러이러하게 연결시켜 보니깐 전부 다 하나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돼요.
이걸 증명하려면 논리로 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제가 쉬운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이층집에 빌라가 있습니다. 빌라가 있는데, 1층 있고 2층 있는데 베란다에 어떤 학생이 있어요. 친구가 밖에서 “아무개야 놀자~” 라고 말을 전달합니다. 그러면 빌라 2층의 아이에게만 전달된다는 것을 다 알지요. 여기는 골목이고 밖에 집이 있는데 “아무개야 놀자~” 하면 좀 있다 와서 논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2층 빌라가 아니고 목욕탕이라고 합시다. 목욕탕 안을 향해 “아무개야 놀자~” 하면 소리가 왕~왕~왕~하면 음파가 그 안에서 소리가 전체로 퍼지겠지요. 소리가 밖으로 흩어지지 않고 울리겠지요. 이렇게 되면 ‘놀자~’고 하는 주체하고 그 개체 상대자와 구분되어 있잖아요. ‘내가 이야기 했어’라고 구분되지요. 여기서 ‘놀~자’라고 해버리면 놀자 라는 말이 전체로 메아리쳐 울리다 보니깐 도대체 놀자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놀~자’ 하고 밀폐된 공간에 외쳤기 때문에. 그러면 이 부분은 놀자~놀자~ 메아리쳐버렸기 때문에 구분이 전체로 포함되어버렸지요?
27절에 한번 봅시다. ㅡ이렇게 어렵게 설명해야 되네요. 어떤 옆에 있던 신학자는 복음을 이렇게 어렵게 얘기해야 되느냐고 하는데ㅡ 27절에 봅시다.“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이렇게 되어있죠. 골목에서 외치는 한 사람이 ‘놀자’하면 가르치는 자가 되고, 빌라 2층에 있는 학생은 가르침 받는 자처럼 되어 있지요? ㅡ구약이 그렇습니다.ㅡ
그런데 신약시대에 보면 목욕탕이나 동굴 속에 가면 누가 가르치고 누가 가르침을 받는가,가 없지요. ‘놀자’라고 외치는 사람에게까지 가르침이 파급되니까 전체가 가르침 속에 포함이 되어있는 겁니다. 빌라의 예를 들은 것은 한쪽은 가르치는 자고 한쪽은 가르침을 받는 자로 두렷하게 분간되지요. 그 경우의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나는 가르치고 상대방은 가르침을 받는 자이기 때문에 뚜렷하게, 너는 내게 배우기만 하면 되는 거고, 한쪽은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신약시대에 와서 ‘그리스도 안에’ 되어버리면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놀자’라는 말이 전체에게 다 해당되지요. 모든 사람이 말씀에 대해서 저촉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라는 말은 목사가 만약에 가르친다고 나서면 그 가르침에 목사 본인도 저촉을 받는다는 말이빈다.
고린도전서나 로마서 보면 가르치는 은사가 있거든요. 당시에 사도가 가르칩니다. 할 때 그 가르침이 구약처럼 한쪽은 가르침을 받고 한쪽은 주님께 받아서 받은 것을 남에게 가르치는 그런 식의 시대는 이제는 끝나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으로부터 뭐가 오냐면, ‘기름부은 자,; 성령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이거는 누가 따로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다같이 성령의 가르침에 저촉을 당하는...전체 말씀 안에서 누가 주인공이 될 수없고 모두가 전체로서 하나의 부분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부분이 된다면...(이 말은 또 어려워요) ‘그의 안에 존재하라’ 했으면 되는데 우리 전체가 성령의 말씀에 의해서 저촉을 받고 말씀에 해당이 된다면 여기서 뭐를 따로 나눌 수 없냐면 툭 튀어나와서 나 따로 나오는 것이 허용이 될까요? 안될까요? 허용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사람 따로 나오면 아메바처럼 같이 따라 나오게 됩니다. 왜그러냐면 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힘을 입으면, 한 사람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따로 나올 수 있는 입장에서는 이미 끝나버렸어요.
한 사람이 A에서 B로 이동했다면 성령께서 그렇게 했으며,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당시에 빠져나온 사람 전체가(거기에 속한 사람) 이 사람을 따라서 이동하게 된 거예요. 요한일서에는 이걸 가지고 “이웃, 형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렵지요?) 보통 구약에서의 형제 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전체가 한쪽 사람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한쪽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은 없어요. 전체가 사랑하는 겁니다. 예를들면 여기서 아까 ‘놀자~’라는 말을 했는데 이번에는 뭐라합니까. 형제사랑은 목욕탕이나 동굴에서 외칠 때처럼 ‘왕~왕~왕~’하고 퍼졌다고 봅시다. 그러면 형제사랑이라고 할 때 구석진 곳에 있는 사람이 ‘나는 이 사람 몰라, 나는 저 사람 몰라’ 이럴 수가 없지요. 모든 것의 결국은,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 모두가 한 사람에 의해 연계되어 있지요.
이 경우를 뭐라 하냐면 모체, 메트리스라는 겁니다. 메트리스라는 것은 침대 밑의 스프링있죠? 한쪽 스프링 하나가 떨어지면 옆의 스프링도 헐거워지게 마련이죠? 왜! 메트리스니까.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교회가 몇 개입니까? 하나밖에 없어요. 아프리카 성도가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아프리카 성도의 어려움과 한국의 수천 수만 키로 떨어져있는 우리와 연계되어 있어요. 연계되어 있다고요. 아메바처럼 하나로 움직이기 때문에 단독적 주체는 예수님만의 주체인데요, 공동체 바깥에 나와있는 주체가 아니고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있는 주체가 됩니다.
* 아메바(Amoeba)는 위족(僞足)으로 움직이는 원생동물의 일종이며, 단세포 생물 중 대표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메바’라는 이름은 다방면에서 사용되는데, 아메바문(Amoebozoa)에 속하는 생물의 총칭, 또는 위족을 쓰는 모든 원생생물들에 쓰기도 한다.담수나 바닷물, 습지의 흙 속 등에 많이 살고 유사분열을 한다.다른 원생동물이나 세균 등을 위족으로 감싸서 소화시킨다. 용액상태의 액체영양물을 흡수하기도 한다.
마태복음 25장 한번 봅시다.(요한일서 참, 너무 어려워) 안 보셔도 다 아는 것인데,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여기 누가 목말라요? 여기 35절에 보면 ‘내가 주릴 때’ 할 때 누가 주린 거예요? 예수님이죠? 목마른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나그네 되었을 때 누가 나그네입니까? 예수님이죠.
한 사람이 목마를 때 먹을 걸 주었고, 마실 걸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그 사람들이 ‘제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먹을 걸 주었습니까?’ 참 희한한 이야기지요? 이 사람들, 천국가는 이 사람들은 누구한테 한 겁니까? 예수님께 한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소자에게 한 것인데 예수님이 나서서 하는 말이 ‘너희가 내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해주었다’는 거예요. 주님을 만나본 적도 없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 목말라서 물 대접한 것 뿐입니다.
언제 주님께 했습니까.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 말이 요한일서에서의 ‘너희가 내 안에 거한다,’는 겁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한다, 니까 우리는 자꾸 머리로 이해하겠다는데 이거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해요. 이해 못하고 다만, 말씀을 통해서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그렇구나, 이해는 안되는데 믿어지는 거예요. 이해는 안되는데 말씀이 그러니까 그런줄로 믿어지는 겁니다.
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이 어디계신거야 부산 사상구 어느 동네에 있는 거야?” 동민 3만명 동원해서 찾아도 예수님 보입니까 없습니까? 안보인다니까요. 왜냐면, 예수님은 나타나면 안돼요. 나타나면 인기가 많아서 안돼요. 순서 표 받고 어지간히 가난한 사람은 만나지도 못합니다. 이게 뭐냐하면 우리가 보통 사는 것이 부분과 내가 전체가 되어버리면 나머지는 나의 대상이 되고 내가 주체가 되면 나머지가 다 개체가 되고, 내가 주인공이 되면 나머지는 나의 부분이 되는데 신약시대의 교회는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든 누구든 모두 아메바처럼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는 거예요.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소자한테 한 것이 내게 한 거예요. 마태복음 25장 뒷부분에 보면 억울한 일이 있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 목말라 했을 때 물 한 그릇 대접 안했다고요. ‘염소야, 지옥 갈 염소야, 너는 내가 목마를 때 물주지 않았다’ 할 때 그들이 뭐랍니까. ‘내가 언제 예수님 목마를 때 물 안줬습니까, 예수님이 목마르면 드리지요 언제 안드렸습니까.’ ‘이 소자한테 안한 것이 곧 내게 안할 것이다’ 그러면 이웃사랑 형제 사랑이란 뭡니까.
내가 누구에게 못해주는 것은 형제사랑도 아니고 이웃사랑도 아니에요. 그러면 형제사랑 이웃사랑이 되려면 뭐냐 하면, 아까 말한 것처럼 ‘네가 내 안에 거하면 너부터 내 안에 거하면 남이 너에게 해주는 것도 예수님 사랑이 되고, 내가 주님 안에서 거하면서 행한 모든 것도 내가 행하는 형제사랑도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본이 뭐예요? 항상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 말씀대로 믿어야 되죠. 그걸 믿어야 된다고요. 이걸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되기 때문에, (한번 봅시다) 이해라는 것은 가르쳐야 되잖아요. 믿어야 된다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는 게 뭐냐 하면, 이해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이 믿어져야 되요.
이해되지 않는데 믿어진다, 이거는 엉터리예요.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는 수는 없어요. 이거는 말장난하고 있는 겁니다. 반드시 믿을 때 이해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해되지는 않지만 성경 말씀대로 믿어지는 것은 가능해요. 왜냐면 성령께서는 성경말씀을 다루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사람이 ‘당신이 예수님 물 위에 걷는 거가서 봤어?’ 이러거든요.‘안 가봤어’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거 봤어?’ ‘안 봤어’ 그러면 안봤으니까 안 믿어야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보지도 않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 너를 위해 흘린 피라는 것을...십자가 죽은 거 가봤어요?’‘안 가봤어’ 안 가봤는데 어떻게 그걸 믿나?
만약에 이해된다면 반드시 논리가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 피가 RH A형이 어떻게 해서 내 죄를 씻는다, 이 논리를 차곡차곡 채워야 되는데 논리가 불가능합니다. 안돼요. 논리라고 해봐야 이 논리에서 저 논리까지 끄집어내서 또 시비 걸어요. 성경말씀은 항상 논리로 따져서 믿었다는 것을 성령께서는 굉장히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성령께서 믿게 했는데 자신이 따져서 이해되었다고 우겨버리면 성령에 대한 모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논리를 따져 믿게 되었다면 그 사람이 우리를 가르친바 되기 때문에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성립이 안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경 본문 전체를 보면 이렇습니다. 누가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걸 믿는다면, 성령이 와서 믿게 되었다는 이것이 유지가 되려면, 반드시 ‘누가 우리를 가르치더라,’는 말이 빠져있어야 되지요. 용감하게 빼버리세요. 이근호 목사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걸 용감하게 빼버리시기 바랍니다. 주저하지 말고 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걸 확, 빼버려야 어떤 목사가 자신의 논리를 내 놓아 그 논리가 맞더라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몸체고 나는 내 몸체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 논리가 동일할 수 없어요. 성장과정이 다르고 환경이 따르고 말의 환경, 언어를 만들어내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아멘’이라고 해도 거짓말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아니고 주님의 신앙이 되려면 주님의 영을 줘야 그 사람을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가 가능한 거예요.
그러려면 성령께서는 인간의 논리로 가능한 것을 잘라버리는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요한일서 다시 한번 봅시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이 말을 ‘그러면 목사님은 결론적으로 말해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지금 우리는 주와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주와 함께 간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물으신다면 ‘우리는 지금 주님과 함께 목욕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굴 속에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수님이 한 마디 말씀하면 예수님이 가르치는 게 아니고 그 말이 동굴 벽에 부딪혀서 반사작용으로 왕~왕~왕~ 울리는 건데요. 그걸 ‘공명’이라고 합니다.
ㅡ 예: 징을 두들길 때 울려 퍼지는 소리의 울림, 진동ㅡ
소녀시대 콘서트 가서 남들은 ‘소녀시대!’ 하고 외치는데 내가 ‘ 더 걸! 원더 걸!’했다면 맞아 죽지요. ㅡ 시대 콘서트라면 소녀시대의 팬들만 모이는 콘서트에서 원더 걸을 자랑하게 되면 머리카락 쥐어뜯기듯ㅡ 만약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반응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내가 이해할 차원이 아니고, 나는 하나의 막이니까 외부공간에서 말씀이 작용하면, 외부 피부라는 조직을 통해서 우리 안은 공명이니까 안과 밖이 동의하잖아요. 누가 누구를 가르쳐요.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 말입니까.
어떤 인간이 목사가 되어서 가르칩니까. 주께서 스스로 말씀을 통해 공명을 일으키는데 누가 누구를 가르쳐요. 이럴 때 같으면 목사가 받은 공명은 자기가 증거하게 되고 그러면 이쪽에 듣는 사람들도 자기 가운데 성령이 계시니 그 말씀에 대해서 공명하게 되는데 이 공명의 만남은 ‘아멘’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했지요,’ 라고 ‘아멘’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성경에 있어서 주와 함께 있을 때 그 앞에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겁니다. 말씀 앞에 화답하는 거예요.
이걸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해서 모세가 가르치면 자기 내부에서 이해하는 자기 이해도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망한 거지요. 모세가 하는 걸 육으로 납득이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이번에는 조금 어려운 거 해봅시다. 여기까지는 조금 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방금 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의’ ‘ 그의 안에 거함’ ‘그의 강림하심’ ‘의의 행함’ ‘그에게 난 줄을(출생)’ 이 모든 이야기는 요한일서에서는 한꺼번에 같이 있다 했지요. 한 공간에 같이 있죠. 그런데 예수님 당시나 사도바울 당시에는 이것이 연결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출생,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성령 오심, 교회, 교회공동체,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연결되어 있죠? 연결되어 있는데 여러분은 어느것이 낫습니까. 사도바울편지나 예수님 당시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역사적으로 연결된 이게 편합니까? 아니면 함축된 게 편해요? (지금부터 강의는 좀 어렵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연결되면 나의 관점은 두루 보잖아요. 그러면 나는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밖입니다. 밖에 나온 게 문제가 되요. 밖에 나와 있으면 우리는 과거에서 나름대로 역사를 또 따로 만들어요.
역사가 어떻게 되냐 하면 철로가 노선이 두 개 돼버려요. 두 개 되어 교회에 와서 목사님이 설교를 쭈욱 하잖아요. ‘십자가, 부활, 성령, 교회’ 설교 하다가 갑자기 애가 아프다는 소리 듣고 지금부터 공식적으로 설교하고 있는데 애 아프다는 소리 듣고 교회 나가버린단 말이에요. 그러면 지금 애가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면 이 노선에 예수님 출생도 넣고 십자가 넣고 부활 넣는데 여기 뒤에 뭘 넣어야 되요. ‘가톨릭병원 205호 입원’ 이걸 집어넣는다고요. 집어넣으면 이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가있겠습니까.
주일 목사님 설교 들은 건 잊어버리고 마음의 초점이 어디에서 부풀어져버려요? 205호 여기에서부터 부풀어진다 이 말이지요. 여기에 부풀어져버리면 도대체 애가 혼자 길거리 가다가 다치게 되었을 때 ‘아 내가 애 집에 혼자 두고 교회 안 갔어야 한다’는 후회가 막심하지요. 애 놔두고 가서 자전거 타다가 다쳤으니까. 그러면 이 역사가 애가 어찌어찌 했으면 안다쳤을 건데... 이렇게 해서 다쳤다고한다면 여기 노선에서 뭐가 빠지냐면, 예수님의 출생도 빠져버리고 십자가 빠져버리고 다 빠져버려요. 빠져버리고 ‘아이고,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아이인데 지금 다리를 다쳤다,’그러면 이 사람의 역사 속의 건강했던 기억과, 다쳤다는 현실, 그 뒤에 나오는 게 뭐냐, 빨리 완쾌되었으면... 이게 나오죠.
그러면 나름대로 과거, 현재, 미래가 형성될 것 아닙니까. 역사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설명해봤자, 불과 설교시간 10분밖에 못가요. 그것도 설교시간 아니면 3초정도밖에 못간다니까요. 성경 볼 때 그때뿐이에요. 밖에 나오면 자기 의사가 따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떻게 개인의 역사에서 예수님 십자가를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들어가야 돼요? 개인의 삶으로 잠입해버리면 애가 아픈 것도 누구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제가 개혁주의 논문에서 그걸 설명한 겁니다.
어떻게 성경을 자기 역사 고수하면서 성경을 대해도 되느냐 말이지요. 십자가 끌고 들어가서 우리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게 된 역사로 만들어야 된다 말이지요. 그러면, 애가 아팠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모독했으면 예수님보다 자기 애 다친 것이 심각했으면, 그러한 마음가짐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겁니다.
한 개인에게 십자가가 들어가 버리면 그때부터 ‘내 새끼’가 아니라, 주님께서 왜 주셨을까, 무엇 때문에, 내 죄가 무엇이기에 이런 자식을 줘서 내가 주님보다 내 새끼 좋아하고, 남편 좋아하고, 내 인생만 좋아하고, 내 역사만 좋아하는가를 누누이 절실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면 내 의가 아니고 누구의 의 입니까? 예수님의 의죠. 그러면 <예수님의 의를 행한다는 것은 뭐냐, 늘 자기 죄를 아는 거죠.> 자기 죄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누구든지 죄 없다 하면 거짓말하는 자,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의를 행하는 거예요. 주님의 의가 나오는 거예요.(내게서) 그렇게 침투된 사람이 뭐다? ‘주님으로부터 난 자’가 되는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과 사도바울서신에 있었던 역사관이 요한일서에 들어가면 두 개의 역사가 아니고, 주님의 역사 내 역사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동굴 속에서 소리 지를 때 왕~왕~왕~ 울림이 있었던 것처럼 나의 역사는 없는 겁니다. 죽은 자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그리스도 역사가 되어버리면 성경적 역사가(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바울서신 요한일서) 다 되어버린다니까요.
나의 역사가 없어지고 주님의 역사가 되어버리면 주님이 강림하시잖아요. 강림하시면 그 자체가 주님과 거하는 게 된다고요. 이것은 이해로 되는 것도 아니고 논리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성령이 와서 말씀대로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학이라는 항구는 항상 자기학문을 밖에 세워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건 신앙고백이 아니고 그냥 신학, 학문, 장난감, 놀이기구입니다. 신학해서 교수도하고 돈이나 좀 벌라고 하는 짓에 불과한 거예요.
제가 거기서 강의할 때, 우리의 전 모든 역사가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라는 주체하고 나에게 들어왔던 주님의 주체사이에 충돌을 일으켜 그 틈 사이에서 십자가 나올 때 바른 해석이자 이게 묵시적해석이다” 라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항상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주님의 주체와 내 주체가 매일같이 싸워서 그 틈 사이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고 주님은 나로 인하여 피를 보신바 될 때 그때 십자가는 살아납니다. 늘 십자가 앞에 살아나는 그런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 그때 논문발표 하실 때도요, 칠판을 놓고 설명을 하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더라고요.
** 그걸 그 사람들이 용납하겠습니까. 말하는 것도 못하게 막는데 칠판 걸어놓으면 여기가 무슨 부흥회냐 뭐냐, 했을 거예요. 당신 발표하러 온 게 아니야, 우리가 심사하러 왔지, 이렇게 나올 겁니다.
위에는 예수님과 사도바울 밑에 구약이 있겠죠. 항상 성경은 구약을 근간으로해서 신약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서신 요한일서 요한계시록이 나온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구약에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구약에 가보겠습니다. 구약중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나라가 있죠?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죠. 그러면 이스라엘 바깥의 나라에는 뭐가 없습니까. 주가 거하지 않는 나라죠. (그 말은 쉽죠? 그 다음 말은 어려워요)
주와 거하지 않는 나라와 섞였다가 수제비 떨어지듯이 나왔죠. 처음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냥 히브리인들이 있었죠. 어느 나라에 있었습니까? 애굽나라에 있었죠. 애굽나라에서 뚝 떨어져 이스라엘이 됐잖아요.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훌륭합니까? 아니죠. 그냥 애굽 나라의 한 부분이었죠.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린 애굽에서 떨어지면 죽어, 우린 애굽에서 나가면 안돼,’ 라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와서 나가자할 때 ‘우리가 미쳤나, 우리가 왜 나가냐’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 모세와 아론 버려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광야에 가서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했습니다.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나라 사람보다 착하지 않아요. 다만,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이스라엘이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거주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해답을 알고 있지요? 신약과 요한일서 해답을 알고 있잖아요. 우리는 지금 무엇을 찾으려냐 하면, 이미 문제가 있는 곳에 해답이 없는 이곳에다 집어넣으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전략이...
이걸 집어넣어야 구약이 새롭게 이해돼요. 구약이. 구약은 구약만 봐서는 몰라요.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런데 해답을 안 상태에서 이걸 지금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집어넣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뭐냐, 그냥 애굽이었다. 애굽의 연장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것은 결코 이스라엘의 착함이나 행함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로움을 본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봅시다. 의롭지 아니하고 목이 곧고 교만한 거예요. 교만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었는가. 그것이 오늘날 우리는, 죄 많은 우리는 어떻게 주와 함께 있어, 주이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고 같은 질문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주님이 거할 때 특징이 있습니다. 보통 하나님이 거하시는 게 아니고 누가 거하냐면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의 하나님’이예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계시고 언약대로 행한다는 뜻이 아니고, 언역이 나타날 때만 나타나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언약이 나타날 때만 나타나시는 분. 그러면 언약이 안 나타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까. 모르게 되지요. 언약이 나타난다하는 말을 다른 말로하면 이게 사건화 된다는 말입니다. 사건화... 사건화 되는 이것을 신약에서는 ‘바람같이’라고 표현하죠. 바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날 개혁주의 신학 할 때도 했잖아요. 동사를 잡아버리면 명사로 바뀌어요. TO부정사는 동사역할을 하는데요, 어떤 이상한 사람이 말하기를 개혁주의는 문법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 문법을 박살냈거든요. 왜냐면 문법이 되려면 뭐든지 동사까지도 명사로 만들어야 이걸, 주어, 전치사...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시도하는 자체가 틀려먹었어요. 그렇게 시도하는 자체가 잘못되는 겁니다. 움직임을 포착해버리면 굳어져버리죠.
날아가는 새를 잡아버리면 이 새는 어떤 새입니까. 안날라가는 새기 때문에 원래 날아갔던 새는 아니잖아요. 날아가는 그 자유로운 동작이 어떻게, 삭제되고 소멸되죠. 그거는 원래 새가 아니죠. 이 말 참 어렵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진짜 원래 새가 아니면 잡지 말고 새가 와가지고 쪼아대면 우리는 ‘아 새가 이렇게 못됐구나’하게 되죠. 잡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의 특징은, 애굽의 특징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기가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체라 하는 것은 뭐든지 움직이는 것도 고정된 것으로 만들어줘야 나의 주체가 되는 법입니다. 뭐든지 그래요 뭐든지. 길에 가다가 친구를 만나면 ‘오, 친구야 오랜만이다’ 악수하잖아요. 이미 그 친구는 본래의 친구가 아니고, 내 기억 속에 있었던 규격화된 나의 고정된 개념에 의해서 해석된 친구가 되는 겁니다. 말은 않지만 ㅡ너 고3때 농땡이 많이 쳤지ㅡ
애들 남학생 여학생 들어오는데 저 혼자 올라가서 1등 돼가지고 손 벌리고 있던 게 누굽니까. 김길태잖아요.(부산 여중생 살인범) 중학교 3학년까지 사진 신문에 나왔어요.
뭐든지 그 사람의 행동 열 가지가 있다면 인간은 그 열 가지 다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납득하는 두 가지만 딱 잡아서 ‘너는 이런 인간이야’라고 규정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주체적인 행위가 된다 이 말이지요. 스스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조작하고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아줌마가 ‘남편 어떻습니까?’물으면 ‘우리 남편 말도 마세요,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못 살겠어요’ 하거든요. 그렇게 하면서도 누가 자기 남편 욕해보세요. ‘우리 남편 왜 욕하냐,’고 하지요. 그렇잖아요. 이런 남편이 있어요. 집에서는 자기 부인한테 말 함부로 하면서도 밖에 나가면 천하의 신사가 되어 칭찬은 혼자 다 받고 있는데 집에 들어가면 그 스트레스를 부인에게 푸는 겁니다. 그러면 집에 있는 아내가 보는 남편과 밖에서 남자로 보는 남편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다르지요.
이게 바로 언약이 아니고 언약이 없는 인간이에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언약이 우리에게 찾아와야 언약이지, 내게 언약 사건이 벌어져야 언약에 포함된다는 걸압니다. 살아계신 언약이 새처럼 날아와서 바람처럼 와가지고 언약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갈 수가 없어요. 언약이 와서 우리를 때려줄 때 ‘나는 이 세상을 일방적으로 내 임의대로 파악해 버렸구나’ 라는 죄를 안다 말이지요. 그러면 새 언약이 와서 때려주면 졸지에 우리는 뭐가 됩니까. 피를 흘리면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거예요. 언제까지? 평생...... 그게 우리 본모습이에요.
사람을 결정짓는 가장 큰 사건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일 때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게 가장 큰 사건입니다. ‘나는 신을 부인했다’ 이게 큰 사건이 아니에요. ‘나는 교회 유리창 깻다’ 이것도 큰 사건이 아니고, 그럼 예수 믿으라하니 안 믿은 거? 그것도 큰 사건이 아니에요. 중대한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내 죄 때문에, 내가 나 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자존심을 고수하는 것 때문에 주님께서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야...내가 못되긴 못됐다’ 라는 토로. 피 흘림을 보고, 예수님의 피와 나의 자존심이 매치가 될 때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부를 다 아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겁니다. 세상에 더 이상의 비밀은 없어요. 더 이상 남겨놓은 비밀은 없어요. 그게 전부예요. ‘세상에 나는 영어 못해,’ ‘나는 수학도 못해,’ ‘난 못하니까 모르고 있는 거야,’ 아뇨, 수학 알아봐야, 영어 물리 알아봐야 나를 위한 물리기 때문에 백날 알아봐야 내것밖에 안돼요. 예수님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이건 성령이 아니고서야 십자가의 비밀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 애굽의 주체가 언약의 주체를 요새는 무슨 주체입니까. 그게 바로 교회예요. 교회는 자기 자손심 때문에 모인 거예요. 왜 큰 교회 가는지 알아요? 큰 교회 가야 자기 주체가 자기는 큰 교회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엉기게 되고, 나는 큰 교회 교인이라는 자존심이 뭉쳐지고 응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이크도 없는 교회, 겨울엔 추워서 벌벌 떠는 교회...‘지금 어느 교회 나가십니까?’ 할 때 부끄럽잖아요.‘추워서 벌벌 떠는 교회 나갑니다.’ 이게 부끄럽잖아요.‘큰 교회 나오세요, 거기 왜갑니까?’ 말 되지요? ‘우리 처남이 한다고 해서 안 갈수도 없고 해서 갑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보통 개척교회 하면 친척들 우르르 와 줘요. 왜 와주냐면 개척교회 안되면 애들 공납금, 목사 아이들 공납금 누가 대야 되요. 친척들 또 호주머니에서 나가기 때문에, 그럴 것 같으면 우르르 가서 교회 부흥되고, 손님 많은 곳에 손님 온다는데. 새로운 돈 있는 사람들 오게 되면 자기 주머니에서 목사 아들 공납금 안 나가도 되니까 편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와 주는 거예요. 해도 안 되면 ‘나 처남교회 못가겠다’하고 그러면 부부싸움 하면서 ‘당신이 도와줘야지 누가 도와줘요,’ 하거나 ‘설교 꼬라지 보니까 오는 손님도 가겠다’ 이럽니다.
교회라는 것이 애굽입니다 애굽. 애굽에서 이스라엘 되는 것은 인간이 착해서 되는 게 아니고 누가 와야 되냐면, 뭐가 들이닥쳐야 되요. 세무서에서 들이닥치든지, 경찰이 들이닥치든지, 누가 들이닥쳐서 당신을 예수님 죽인 죄인으로서 체포합니다. 묶여 나갈 때 구원받은 겁니다. ‘저 의산데요?’ ‘의사가 어디 있어.’ 십자가 죽음 앞에서 판사 의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목삽니다.’ 목사가 무슨 의미 있어요? 주님 앞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걸로 붙잡혀 가면 그걸로 구원받은 거예요. 모든 계급장 떼버리고, 모든 직장 다 떼어버리고... 의미 없어요.
이 작업을 할 때 언약이 와서 하는 겁니다. 언약이 와서 작업을 하는데, (오늘 강의 중에서 가장 어렵습니다.) 언약내부에 보면, 주께서 주에게 나와요 창세전에. 이 자체가 뭐냐 하면 목욕탕에서 울리는 공명처럼. 아버지 일이 누구일이다? 예수님의 일이고, 예수님의 일이 아버지 일이죠. 예수님과 아버지사이에는 너, 나가 따로 없어요. 개체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전부가 하나의 안에 들어있어요. 그게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아버지가 나와 하나인 것처럼 저희들도 목욕탕과 동굴 안의 울림처럼 왕~왕~왕~ 울리고 있어요.
말씀이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예수님에게도 적용되고 아버지한테도 적용되고 성도에게도 적용되고 다 적용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을 위해서 14장 15장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처소와 우리와 함께 한다. ‘우리’는 창세기 1장에 우리의 형상대로 저희를 만들고 할 때 그 우리의 개념이라는 것이 신약에 오면 정답이 나오죠. 우리, 성부 성령과 천사들. 우리와 함께 한다. 우리와 함께 할 때 맺어주는 것은 언약밖에 없어요.
“언약의 공명 상태” 언약이라는 공명 상태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죠.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만들었고, 없는 이삭을 태어나게 했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 바꾸게 한, 왕~왕~ 울리던 그 공명. 이 공명의 하나님이 히브리인에게 약속대로 들이닥치게 되면, 애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떨어지죠.
이스라엘의 속성이 뭐냐, 애굽인과 똑 같아요. 똑 같은데 죄인들인데, 목이 곧은 백성인데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공명의 공동체,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는 겁니다. 이 집단은 히브리인들만 있는 게 아니고 누가 함께 했습니까?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 했습니다. 동행하면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직접 가르치죠. 가르치는데 모세 당시에는 누구를 통해서 가르쳤습니까? 모세를 통해 가르쳤지요. 그렇다고 모세가 완전한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반석을 가리키라했는데 뿔따구 나서 반석을 쳤지요. 모세도 짤려버리죠.
모세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땅 점령할 때 그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칼을 든 군대장관 나타났잖아요. 그러면 이 전쟁은, 여호수아는 시킨대로 할 뿐이지요. 여호수아가 나대면 안됩니다. 주님이 전쟁을 해야지 여호수아 전쟁은 없어요. 주님의 전쟁입니다. 나의 전쟁은 없어요. 전부 다 예수님의 전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전쟁의 양상은 바깥의 전쟁이 아니고 이 전쟁은 내부전쟁인 겁니다. 바깥의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부전쟁의 중심이 뭐냐 하면, 언약궤가 있지요. 언약궤가 있는데 여기 북쪽과 서쪽의 언약궤를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요. 서쪽과 북쪽의 지파는 별 의미가 없고 동쪽과 남쪽의 지파가 선두지파가 되어서 움직이는 겁니다.
한군데 찾아보고 합시다. 민수기 한번 봅시다. 민수기 10장 5절6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며 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라 ...” 동편 남편 쪽이 라헬, 정실부인 쪽이고 라헬의 우세한 지파들이 움직입니다. 그러면 북쪽 서쪽은 이름도 없어요. 뒤로 졸졸 따라가야 돼요.
그런데 북편은 나중에 진 끝에서 일어나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못 살겠다!’ 무리들이 제일 끝에서 외치다 작살나죠. 이게 뭐냐 하면, 결국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와 하나님께 불평한 자가 내부적으로 이미 구분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여기에 뭐가 필요한가, 속죄제와 제사가 필요한 겁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한 언약을 사건화 할 때 뭐가 되냐면 우리 역사 속에 십자가 들어온다 했잖아요. 이스라엘에 뭐가 들어오냐, 바로 제사가 들어오는 겁니다. 어린양을 매일 같이 잡는 제사법. 그 제사법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적인 집단이 되게 하는 겁니다.
십분 뒤. 2010-09-13 22:37:49 이름 : 박온정
관리자(IP:124.♡.87.52)
10-09-21 13:31
안산100312요일2장27절b
안산100312요한일서2장27절b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지난 시간에 한 거 요약해보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27절 28절 29절의 말씀인데 지난 시간에 했던 그림을 하나 그리는데요,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 예수님의 출생이죠? 그다음에 십자가, 그다음에 뭡니까? 부활, 부활다음에 승천하시고 그다음에 성령으로 오셨지요?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뭘 약속했습니까. 강림... 재림을 약속했잖아요. 예수님 당시에서는 항상 이걸 우리가 그냥 보는... 주체가 살아있는, 우리의 자아가 살아있어 이것도 믿고 이것도 믿고, 이런 식이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가 되어가지고 우리 나름대로의 인생이어서 예수님의 역사 따로 있고 예수님의 역사 따로 있으니까, 우리가 만약에 한 눈 판다면, 한 눈 판다는 게 뭐냐면 직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든지 사적으로 몸이 아팠다든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갑자기 뭘 잊어버립니까? 예수님의 일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 버리지요? 몸이 아픈데 이런 거 생각하게 되었냐, 이 말이지요. 가게 손님 왔는데 이거 생각 안 나지요?
이런 식으로 해서 구원 됩니까? 안 되지요. 주님을 수시로 안다면, 만약에 치매 걸리면 어떡해요. 나중에 나이 80넘어 치매 걸리면 옛날 교회 다닐 때 성경 공부한 거 어떻게 됩니까. 다 날아가 버리지요. 그런데 요한일서 같은 경우에는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했다 이 말이죠.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께서 너희를 가르친다 이 말은 역사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의 공간 속에 다 같이 섞이면서 들어갈 때 우리 역사는 죄가 되고, 주님의 역사는 ‘의’가 되어서 함께 섞이게 되지요.
함께 섞이게 되면 예수님께서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의는 결국, 말씀의 성취, 말씀의 완료차원이 되는 겁니다. 말씀의 성취가 완료차원이 되기 때문에 이 안에, 이 공간 안에(동굴또는 목욕탕)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목욕탕 안의, 목욕탕 특징이 뭐냐 하면, 메아리가 잘 되어 울리죠. 첫 째 시간에 얘기한 공명하는 것.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이미 완료된 것. 내가 다 이루었다가 메아리로 울리면 뭐가 되냐 하면 성경 66권이 다 포함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강림이, 이쪽에서 보면 예수님의 강림이 아직 오시지 않은 게 되잖아요. 한 쪽에서는 강림하심이 분명하지요. 성령 오시고난 뒤에 우리가 강림을 기다리는 편이지만 한 쪽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한 공간 안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강림하시기 때문에 강림은 보나마나 당연하게 일어날 일이다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강림을 기다리지만 강림이라는 소식 자체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지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생각할 때, ‘ 너 낼 뭐할 건데?’ ‘낼 돼봐야 알지’ ‘그러면 모래는?’ ‘모래 돼봐야 알지’ 우리는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강림 같으면 이미 강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도 이미 강림이 되었다는 입장에서 우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되면 요한2서에 나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새의 자랑거리는 예수님의 재림하는 그 현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 의미 없는 걸 재림할 때 그때 가서 포함되는 게 아니고 지금 강림은 안했지만 강림했다 치고 살아가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입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모른 것을 아까 뭐라 했습니까. 예를 들어서 햄버거, 햄버거라 하는 것은 야채, 소스, 고기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몽땅 들어있죠? 고기 따로 있고 야채 따로 있고 치즈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게 모아져 있는 것처럼 한꺼번에 되어 있으니까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주님의 강림이 계시니까 아무 문제 아니야’ 라고 위로가 되고,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주께서는 이보다 어려웠는데 감사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고, 또 여러 가지 세상에서 돈 문제로 사기를 당했을 때는 고린도전서에 보니까 ‘가진 자는 없는 것같이 하라,’ 하고 또 이혼을 했다할 것 같으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 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죠. 왜? 공명현상, 왕~왕~왕~ 그 울림으로 말씀이 완료상태기 때문에. 완벽하게 완료된 상태기 때문에 줄어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완료된 상태에 잇는 걸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다만, 아까 목사라 하는 것은 신체의 막으로 되어 있고 목사의 내부와 외부가 말씀의 공명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목사 외부의 말씀이 우리 안에 공명돼버리면 목사는 움직이는 말씀이 되겠지요. 움직이는 말씀을 밖으로 툭, 툭, 내 뱉으니까 그걸 가르치는 은사를 비치니까 듣는 자신도 그 말씀을 겪었기 때문에 동의하죠.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같은 공간, 목욕탕이나 동굴 안에 같이 들어있기 때문에 동의를 하죠. '아멘~ 아멘~‘ 식으로 동의를 합니다. 이건 성령께서 가르치는 문제지 누가 와서 가르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누가 와서 가르치는 것은 언제? 구약 때 주님이 계시고 중간중간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에 침투할 때는 제사법을 통해서 침투했죠? 열두 지파가 움직일 때 언약궤, 제사법(날마다 양들이 죽어 나가는)에 의해서 이들이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제사법이 들어오게 되면, 죄인은, 죄인에 의해서 흠 없는 제물 때문에 죄인이 뭐가 되죠? 제물 때문에 의인되는 겁니다. ‘의’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거룩’ 거룩한 사람이 되면, 이 집단이 이방집단과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누가 승리합니까? 이스라엘이 승리하죠. 이스라엘의 승리라는 것은 외부 힘이 세고 안세고 의미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부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의롭게 되었는가, 거룩하게 되었는가, 하나님 하시는 이 제사에 의미를 두고 있다면 바깥의 적들은 허수아비죠.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이걸 제가 부산 강의에서 이걸 뭐라고 했냐면, 전봇대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라 했지요. 아바타 포스터...전봇대와 포스터가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런 관계가 없지요? 아바타가 붙어있으니까 사람들이 전봇대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게 되지요? 이걸 뭐라하냐면 붙이심의 전쟁이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주님이 붙어서 보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이방인, 다른 전봇대가 이길 수 없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의 언약이 붙어있으니까요.
구원받는 걸 뭐보고 아냐면, 우리 이마에 새언약이 붙어 있으면 구원받고 아바타 붙어있으면 외국영화고, 한국 영화 포스터 붙어있으면 한국영화고, 우리 이마에 악마의 인이 붙어있으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지요. 천국과 지옥 가는 것은 본인의 행함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소속을 보여주는 이마에 악마의 인을 붙였는가 아니면 주님의 언약의 인이 붙여졌는가 그걸로 결정나는 겁니다. 어차피 인간은 하나의 바탕, 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그렇게 이해해 주시고요.
요한일서 2장27절 끝에 봅시다. “참되고 그릇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하죠. 주 안에 거하라,는 말은 아까 말했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잊지 말라는말이지요? 그냥 함께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완료된 것에 대해서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여기 28절에 보면 기죽을 필요 없는 걸 가지고 ‘담담해라, 했고 부끄러울 게 없다고 하는 거예요. 세상의 윤리 도덕에 대해서 기죽지 말라 이 말입니다. 윤리도덕으로 만약에 기죽는다면 우리와 함께 계신분에 대한 모독이죠.
그거는 따로 자기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자, 3장 봅시다. “보라 아버지께서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아버지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고” 요한일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쉬운 구절이 없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여긴 뭐라고 되어있냐 하면, 주님의 사랑이 임하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였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보통 자녀라 하는 것은 출생으로 결정하는 거 아닙니까.
아버지가 낳았으면 아버지의 자녀죠. 그러면 이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고 존재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김길태, 친 부모가 따로 있겠지요. 존재로서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못 받았지요. 처음부터 사랑으로 태어나야 되는데, 모든 인간은 사랑을 받기 전에는 뭐가 되냐 하면, 종이 됩니다. 사랑의 종이 아닙니다. 사랑이었을 때는 자녀가 되지만 종에서는 율법아래종이 되는 겁니다.
율법이란 말 어렵죠? 율법이라는 말 어려우면 쉬운말로 고칩시다. 양심...모든 인간은 양심의 종이 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용서 못한다 이 말이지요. 남은 용서해도 자기가 자기를 용서 못해요. 그래서 자살하고 그러죠. ‘나 같은 인간 살아 뭐하니’ 하면서요.아무리 나쁜놈들도 양심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한번 보세요. 성폭행범도 길 가다가 할머니가 넘어지면, (이걸 측은지심이라 하는데요,)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신호등도 잘 지켜요. 금연하라고 하면 금연 장소에서는 담배 안피웁니다. 히틀러 같은 경우에 수백 명을 죽였지요? 그런데 자신에게는 굉장히 엄격했어요. 그리고 천하 사람들이 자기 자식 못됐다 해도 자기 엄마는 영치금 넣어주고 찾아갑니다. 희한해요. 인간의 양심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본인은 그냥 종일뿐이에요. 그럼 뭐냐, 선악과를 지배한 그 힘이 인간을 종으로 삼아버려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는 악마의 차지가 되는 겁니다.
악마는 선악과를 가지고 인간을 종 부리듯이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따먹으려고 얼쩡거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이게, 어디서 감히!’ 따먹지 마라하는데 누가 배후에서 조종했습니까. 뱀이 조종했지요? 뱀이 조종함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훼손됐지요? 이로부터 전쟁이 일어나는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구분됨으로 말미암아 이미 전쟁이 벌어졌어요.
그 전쟁을 무시하면 안돼요. 선악과 양심이 있는데 양심가지고 하나님 잘 믿자. 이렇게 되어버리면 전쟁의 가치를 완전히 곡해하는 겁니다. 휴전선 있는데 북한에 아저씨 만나러간다고 손 놓고 가면 안돼요. 로버트박이라는 인간은 북한에 선교하러 가다가 너무 맞아서 정신병자 되어버렸어요.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배후 조종하는 자가 누굽니까. 뱀이잖아요.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는 이미 악마라는 주인이 자기 집에 가재도구를 이미 붙들어놓은 거예요. 냉장고가 알아서 밖에 못나가고, 가스렌지가 스스로 알아서 밖으로 탈출 못합니다. 이미 모든 가재도구는 이미 끝났어요. 집안에 있는 냉장고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강도가 들어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집소유로 되어있는 가재도구를 가지고 나갈 때만 가재도구는 악마의 집에서 탈출이 가능합니다. 그걸 가지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라 하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집주인을 묶어놓고 그 집에 임하는 가재도구를 가져가는 것처럼 하늘나라도 이와 같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너희들을 악마의 손에서 일방적으로 악마를 묶어놓고 너희들을 끄집어내어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식으로 합니다. 전리품 가져간다 하니 생각나는데요, 그 교수(개혁주의)는 어떻게 해서 여호와전쟁의 주체가 되는지 모르겠다, 합니다. 맨날 모르겠다 하니까요.
선악과는 이미 악마의 손에 넘어가버렸어요. 이미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선악과 쪽으로 완벽을 기해도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지옥 가는데 생명나무가 이미 선악과 따먹은 것을 알고 이미 길은 천사를 통해서 차단을 시켜 놨어요. 차단을 시켜놓으면 그때부터 선악세계는 악마의 힘으로 완전히 굳혀지게 됩니다. 그걸 저의 논문에서 뭐라했어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땅을 적시게 되면 땅은 이질적이라서ㅡ이질적이라는 것도 못알아들어서 이질적이라하는 것은 땅의 법칙가지고 감당이 안 되는 것을 이질적이라 합니다, 라고 설명해 주었어요ㅡ
여기 짐승에서 올라온 그것이 인간적인 윤리도덕과 학문과 양심과 모든 이성적인 것으로도 악마를 이길 수 있습니까? 이기지 못해요. 이건 또 ‘무소유’인지 뭔지 법정이라는 분, 법정이라는 스님은 무소유주의가 죄인지를 몰라요. 무소유가 죄인지를 몰라요. 무소유가 종에서 아들 만나는 게 아닙니다. 아들 만나려면 성령이 임하여야 아들 되지, 여기서 도 닦아 봐야 율법이 쏴대면요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논문 발표할 때 깔데기 얘기했잖아요.(그 말도 못알아듣더군요) 성경 한 말씀이라도, 한 율법이라도 역사적 해석 보면 단어 하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 단어 하나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율법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깁니다. 깔데기, 성경의 돌출부분을 통해서 다 쏟아지는 겁니다. 십계명의 ‘탐내지 마라’ 하는 걸 설명하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포함되는 거예요.
예레미야 선지자 말 해석하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기게 되요. 모든 말씀이 악마의 세계에 있는 율법에 의해서 우리는 뭐가 되냐면 종이 되게 되어 있어요. 율법에 의해서 어떤 것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전부 다...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3장 한번 봅시다. (로마서 3장 이야기도 논문에 나와 있습니다, 인간들 읽어보지도 않고) 3장4절에 다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 나오잖아요. 사람은 다 거짓되다, 거짓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되면 거짓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갈3:10)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 교회 오래 다니고 목사가 되기도 하지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뭐냐 하면, ‘성경이야기가 다 틀리다거나 구라요, 인간이 지어낸 소설책이며 이걸(성경) 덮고도 사람들이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교회를 다녀야 되며, 성경을 왜 봐야 되는가, 라는 문제를 자신에게 던져보라 말이죠.’ 성경을 덮고도 절에 가도 부자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골치 아프게 성경 이걸 가지고 천당 가겠다고(읽어봐야 천당 가지도 못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는지...천당이 있기는 있는 것인지...성경에 천당 있다고 하지만 남들이 없다고 한다면 없는 거지. 이때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거예요.
메시아가 왜 죽었을까요. “하나님은 참되시나 인간은 전부 다 거짓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내가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했잖아요. 그래서 산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는 “너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를 위하여 살게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것만 만약에 성령을 통해서 믿어진다면 세상사람들이 조금 잘 살고 으스대고 교회 안가는 것을 마치 자랑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보면 갖잖죠. ‘예수님이 죽었는데 왜 저 짓을 하고 있나, 하나님이 죽었는데 예수 안 믿는 것을 왜 저렇게 좋아할까, 저게 저주 받으려고 환장을 했지 지금...’
예수님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가 왔으되, 사람들은 그 생명나무를 죽여버렸어요. 질문 하나 할게요. ‘사람이 죽는 게 괴롭습니까? 안 죽는 게 괴롭습니까?’ ‘안 죽는 게 괴로워요’ 사람이 죽어도 안 죽게 되어있어요. 묻으면 죽잖아요. 죽으면 무덤가에서 불러 호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죽어도 죽으라고 밟아도 안죽어요. (아마 김길태 같으면 사형시켜주면 젤 좋을 거예요. 남들 욕하니까 욕먹기 싫어서 자살하면, 자살해보죠. 예수님 조금 기다려보죠. 김길태 이리와! 넌 지옥이야. )
사람이 답답한 것은 밟아도 밟아도 안 죽는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는 것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인간이 누굴 죽였습니까? 자기를 죽인 자는 신을 죽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