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5:16-21 (예레미야의 구원)
렘 15:16-21 (예레미야의 구원)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7)
본문 : 예레미야 15장10-14절
제목 : 예레미야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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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3-10 20:52
예레미야의 구원
2010년 3월 1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6-21
(렘 15:16, 개정)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 15:17, 개정)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렘 15:18, 개정)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렘 15:19,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렘 15:20, 개정)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15:21, 개정)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는 의미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잔뜩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월등한 카리스마와 힘을 가진 자’이라는 인상을 예레미야마저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가 가지는 위상에 대해 예레미야는 기존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로서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는 식으로 하나님에게 따지고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매우 난처한 입장으로 깊숙이 몰리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그의 몸은 아파옵니다. 그리고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자신을 속이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갖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믿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에 준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는 말씀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 하며는, 비록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외톨이가 된다 할지라도 말씀만 함께 있다면 그것으로 그의 생을 즐거워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런 자신의 생활에 대한 보상이 예상 밖의 처참함으로 계속 주어지고 있으니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말씀대로라면 예레미야는 결코 악인이 받아야 하는 재앙이나 저주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도리어 그는 복을 누구보다 더 듬뿍받아야 될 대상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도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누구보다 더 심하게 묵상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행위가 결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데’ 있어 손색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처지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정반대이기에 하나님께서 도리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까지 합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즉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대로 알려면 ‘악한 자’의 손에 붙잡혀 있어야 하고 ‘무서운 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하나님의 구원이 뭔가를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는, 자신이 기대한 축복을 획득하는 자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구원의 의미를 발산해야 할 위치에 놓인 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절망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로 절망적이어야 하느냐 하며는, 기존에 그가 알았던 모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회의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깊은 절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다시 검토되어야 합니다. 분명 애굽 나라가 없이는 이스라엘 나라도 없습니다.
애굽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10가지 재앙과 저주를 받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애굽=재앙 받은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이 이 재앙의 의미를 모르고서 제대로 출-애굽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애굽 나라가 받은 재앙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즉 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곱게 보내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강퍅케 하셨습니다. 그 강퍅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재앙의 강도로 세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진정 자신의 구원의 의미를 알려면 이 재앙의 강도를 접해야 하고 이 재앙의 강도는 강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것은 그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구현됩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습니다. 그리고 저주받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는 예수님은 자신의 미래 전부를 아버지에게 일임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에 참여되어야 하는 것이 참 이스라엘이요 성도입니다. 이 참여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실시됩니다. 인간은 매사를 자기 편한대로, 그리고 더 살고싶어하는 본능이 작용하는 가운데 말씀을 대합니다. 말씀을 대하면 대할수록 더 편하고 다복스럽게 살고 싶은 본심이 발각되는 겁니다.
하지만 원래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죽게 하신 그 말씀들’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말씀을 대하는 순간, 힘으로 구축된 자아는 벗겨져서 살고자하는 본연의 자아가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하박국 3:17-18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얼른 보게 되면 사진의 인화지처럼 한 장으로 되어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화지를 자세히 보면 사진면과 매끈한 뒤쪽 면을 조심스럽게 분리해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각자에 대해 이 인화지처럼 둘로 쪼개어 벗겨내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곡해부분이 왜 발생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즉 은근히 인간은 말씀을 통해 힘을 축적해서 마치 힘 있는 자가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대표적인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부분을 절망으로 연결시켜 버립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전적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뿐입니다. 우리 본인은 당연히 재앙 받아 마땅한 강퍅한 자인 것을 자인하게 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구원은 빛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버림받았음에서 오는 아픔에 저희들이 동참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늘 새롭게 느끼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03-13 13:20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3강-렘15장16-21(예레미야의구원)-jer100310.hwp
우리교회
10-03-13 13:21
053강-렘 15장16-21(예레미야의구원)-jer100310
2010-03-13 11:22:49 녹취 : 오용익
053강-렘15장16-21(예레미야의 구원)-이 근호목사
(기도)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남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시편 108:6,7)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무엇이관대 저희들을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건져내시고 말씀 안에서 뛰놀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해주시니 이 큰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 시간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움직이는 약속에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이 다 쏟아질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우리가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닙니다. 각자 우리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중심이 따로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 중심에서 코드가 나오고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이 나오고 원리가 나오는데 우리는 막무가내로 우리의 중심이 되어서 우리의 원대로 뜻대로 되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중심이동을 해서 주님중심에 함께 합세할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관심사, 주님의 관심사가 우리들의 관심사가 되게 하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관심사에 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사적인 관심사에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를 허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평생을 허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심이 다르다 보니 매사에 하나님께 감사는커녕 불평과 원망이 이어지는 한심스러운 마귀가 좋아하는 인생이 아니옵나이까. 이 시간 중심이동을 제대로 해서 우리 중심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5장 16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예레미야 15:16-2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같으시리이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찌니라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찌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하리라.”
선지자가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6절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자라.’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있거든요. 분명히 예레미야라는 본인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라는 이름과 상관없이 주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처럼 평생을 살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얼른 들으면 ‘야, 사람이 하나님처럼 평생을 일컬음을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으냐.’ 하고 영웅처럼 인식될 겁니다. 실제로 드라마 제목에 <신으로 불리운 사나이>라는 것도 있어요. 그걸 좀 늘여보면 ‘신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사나이’가 되겠지요.
저는 보지도 않습니다만 그 내용은 어떤 만화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중국의 삼합회, 러시아마피아, 일본의 야쿠자조직을 이 사람이 전부 다 접수한답니다. 보통 영웅이 아니죠. 니므롯보다 더 센 현대판 최고의 영웅,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던지 ‘야, 너는 인간이 아니고 신이구나.’ 하면서 겁을 낼 정도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을 내놓은 것 같아요.
만화책에 나왔다는데 성경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신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사나이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건짐 받지 아니하면 자기는 자기 힘으로 절대로 건짐 받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는 겁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구하여 건짐’이라 되어 있고 21절에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예레미야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게 되느냐 하면 ‘악한자의 손에 붙잡혀야 되고 무서운 자의 손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구속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고 건짐의 의미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힘 있는 자의 개념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고 정반대잖아요.
예레미야의 이러한 처량한 신세는 자력으로는 왜 그리 인생이 꼬이는지 갈수록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손쓸 수가 없는 위급한 지경의 인생의 연속이죠. 이러한 모습은 장차 주의 이름으로 오실 메시아의 이 지상삶이 꼭 예레미야를 닮았어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고 이야기하더냐?” 하니까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 같다고 합디다.”라고 했어요.
그 예레미야라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나도 예레미야처럼 저렇게 한 번 살아봐야지.’라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동정의 대상이 되고 답답한 마음으로 ‘어떻게 팔자도 저렇게 더러운 팔자를 타고 났느냐.’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대상으로서 살아간 거죠.
그래서 난처한 지경에 놓인 예레미야는 이것을 선뜻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상황이 서로 바뀌어지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레미야가 ‘내가 하나님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는데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고 하나님께 따졌던 그런 시기, 그 다음에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어려움이 옵니까?’라고 하는 것이 17절부터 나오지요.
17절 끝에 보면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내 안에 주님의 진노와 분노가 가득합니다.’ 18절에 “나의 고통이 계속하여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뭔가 예측을 하면 안 되고 기도하면 기도대로 안 되고 희망이 보인다 싶으면 깨어지고 부도나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나의 앞길을 막대기 부수듯이 부수고 잘라버려서 희망이라는 것은 아예 없이 절망과 절망의 연속으로, 절망의 나락으로 계속 떨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도대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신뢰도 품을 수가 없고 하나님이 날마다 나를 속이는 재미로 살아가는 그런 느낌을 예레미야가 지금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계속 고생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약을 올리는 게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예레미야가 호소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 교인가운데 이런 인생이 계속 된다면 목사로서는 참 안타깝기 짝이 없지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발 목 좀 그만 조르세요.’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목 조르듯이 힘들게 하면 제가 나서서 ‘하나님, 예레미야에게 너무 힘들게 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제가 얻어맞을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불평하는 그 속에 어느 정도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을 잘 믿을 테니 세상의 이런 힘든 일에 대해서는 들이닥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뭔가 사전방비책으로 추스르고 움츠리는 비 신앙적인 요소가 예레미야와 더불어 있을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보람이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 믿기 전보다 더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될 때에 그 때 하나님을 믿으려고 할 때에 도대체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의욕이 전혀 나지 않는 그런 심정이죠. 그런데 이걸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하는 모든 의지를 다 잘라버립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대드는 그 근거가 있어요, 시편 1편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하는 중요한 대목이 나오거든요.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죄인은 의인이 받는 축복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 보통 교회에서 이 대목을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짧기도 하니까 많이 이야기들 하는데 그렇게 하는 근거를 사람들이 무엇에서 찾느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는 말씀을 예레미야나 우리나 지금 잘 따르고 있습니다. 따르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뭘 보장해줘야 되는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주어지는 그 악인에만 해당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빼줘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율법을 사모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데서 오는 어떤 보람이라는 것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악인의 회중에 들지도 않았는데 왜 갈수록 나에게 난처한 일이 벌어지면서 자꾸 하나님이 나를 말씀가지고 놀리고 속이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여기에 대해서 답변해 주세요.’라고 나서는 겁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할 겁니까? 이게 어려워요. 하나님은 어떻게 답변하실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답변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미리 설교초반에 언질을 드렸습니다. 신이라 불리우는 사람, 하나님의 대행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사람은 남들 보기에는 본인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인이 뭘 느끼느냐 하면 ‘저는 하나님의 그 다음조치 아니면 저로서는 완전 절망입니다.’라는 것을 혹독하게 남보다 먼저 체험해야 될 존재로서 신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혹독하게 모든 희망과 여망이 다 끊어져서 주위 사람들이 ‘너 하나님 없지.’라고 놀릴만한 사태까지 이를 때 비로소 우리가 그렇게 될 때 우리 본인도 예상 못하고 남들도 예상 못한 하나님의 그 다음조치, 그 다음조치가 주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가 납득할 만한 증거로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받은 증거를 따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날마다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날마다 절망하는 증거만 가지도록 허락되는 거예요.
참,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이러한 처량한 신세로서 인생을 살아야 되는지 그것을 출애굽당시의 이야기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걸 출애굽이라 하지요.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그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나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애굽과의 인연은 다 끊어졌다고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오산입니다. 인간은 자기구원을 생각하느라고 애굽에서 벗어나면 구원된 것이 되지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구원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애굽이라는 나라는 재앙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것도 사람으로부터 재앙 받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은 나라가 애굽입니다.
여러분, 애굽, 하거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재앙을 받은 나라, 재앙의 나라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자기백성을 그냥 곱게 건져내면 될 문제를 왜 재앙을 내리시고 건져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 재앙을 내리시고 건져내느냐 하는 이 문제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놔줘라. 놔줬나? 그러면 되었다.’ 이러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그 강퍅의 수위를 점점 높여가요.
그 강퍅의 수위를 점점 높여가니까 애굽의 바로왕은 본의 아니게 자꾸 나가야 될 이스라엘을 붙잡는 역할을 계속 해야 되는 거예요. 붙잡을 때마다 얻어맞는데 자기 맘 같아서는 그냥 놔주고 싶어요. ‘가라, 가라!’ 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그 바로왕의 마음을 자꾸 교만케 하고 강퍅케 해서 놔주려고 하다가 자존심상해서 또 붙잡고 붙잡으면 또 얻어맞고, 혼 줄나서 그냥 가라고 하면서 보내줄 의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재앙이 또 없어지면 또 붙잡게 되고 또 얻어맞고 그걸 계속 하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뭐냐? 애굽에서 구원되었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이 내린 저주 신이 내린 재앙에서 구원될 때는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되지 않는 법칙이 여기서 수립되는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까요? 그들은 광야를 거치면서 이제부터 서서히 알아갑니다. 우리도 다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와 재앙을 받았지요.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합니다. ‘목사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대신 저주받은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으로서 재앙과 저주가 우리하고는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구원되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구원되면서부터 우리가 예수님이 받으신 그 저주의 성격, 재앙의 성격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가야 됩니다.
그것을 알아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본인이 아버지 앞에 어떤 자세 어떤 태도로 십자가에 달렸는가, 거기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겁니다. 완전하게 힘을 빼서 완전하게 연약해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고백에 우리도 같이 참여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만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 배경을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저를 속이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서 나의 상처가 낫지 아니합니까? 어찌하여 나의 고통이 계속 됩니까?’ 꼭 욥 같아요. ‘어떻게 해서 나의 상처가 지속되는 겁니까? 왜 그렇습니까?’
예레미야는 아직까지 힘을 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에서 나의 것이 벗겨져야 돼요. ‘나’라고 할 때 보통 나를 하나로 봅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둘도 아니요 셋도 아니요 하나밖에 없다고 봅니다. 사진을 보게 되면 한 장이죠. 이것을 이력서에 붙이려고 들면 안 벗겨지는 것을 억지로 매끈한 뒷부분을 벗겨서 떼어내고 거기에 풀 발라서 잘 들러붙게 하잖아요.
떼다가 잘못 떼면 사진까지 절반 날아가고 그런 경우 많지 않습니까? 떼어지지 않는 나를 떼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나를 두 쪽으로 째는 작업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말씀을 주면 우리는 이 말씀이 나를 구원하는 귀한 말씀인줄 알고 접근합니다. 말씀에 접근하면 말씀에 접근하는 그 순간 우리의 손은 썪어 문드러집니다.
동상에 걸려서 썩은 손처럼 완전히 죄 덩어리로 변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말씀을 지키면 지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나의 고통과 나의 아픔과 나의 경제적인 모든 여건들이 더욱 악화되니까 우리는 거기서부터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불평불만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말씀을 더욱 깊이 있게 연구를 하고 잘 전한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은 나의 하는 일을 안도와주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 인화지를 둘로 쪼개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대신 고통 받아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압니다. 십자가 아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아는 것으로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받았어요. 그 때부터 예수님의 고통과 우리가 남남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성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맨 날 기도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바도 알지 못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시키는 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권면대로 야고보의 명령대로 다 해요.
하면 그 하는 와중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십자가의 계시가 우리를 찢으면서 나에게서 나를 벗겨내는데 구원받을 나와 겉으로 힘으로 포장된 나, 내가 나 되게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힘들을 끌어 모았습니까, 그 힘들을 벗겨내는 작업이 되는 거예요. 말을 어렵게 했습니다. 생중계 된다고 하는데 말을 어렵게 하고 말았습니다.
쉽게 합시다. 김 길태라는 사람 혹시 아십니까? 김 길태라는 사람, 여중생 성폭행 하고 살해한 사람이 잡혔는데 그 사람의 과거를 소개하는데 귀에 확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어요. 작년엔가 경기도인가의 어떤 이삿짐센터의 직원으로 한 달간 근무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왜 그 사람이 이삿짐센터의 직원을 그만 두었을까, 하는 거예요.
이게 남의 일이 아닙니다. 왜 그만 두었을까? 그만두는 이유는 뻔하지요. 힘들었기 때문에 그만둔 거지요. 왜 힘들면 그만두는가? 그게 중요합니다. 사람이 힘들면 ‘내가 이삿짐센터에 계속 있으면 죽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간 거예요. 결국 그 사람은 계속 힘들어서 죽겠다 싶어서 자기 양아버지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온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람이 이삿짐센터 직원으로서 하루 종일 12시간씩 일했다면 집에 가서 퍼져서 범죄 할 꿈도 못 꾸었을 거예요.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거기서 한 달 하고 때려치웠다는 말은 그만큼 힘들었다는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죽기 싫다.’는 거예요. 그 죽기 싫다는 마음가짐으로 우리는 이 모든 성경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고 이걸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말씀을 지켰다는 예수님의 말씀 지키심과 순종하심과 격이 안 맞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말씀 지켜놓고 하나님께 따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김 길태라는 사람이 이삿짐센터 그만두는 것과 똑같은 심정이에요. ‘하나님이여, 나는 살려고 예수 믿는데 왜 자꾸 죽이십니까?’ 결국 그 논리에요. ‘나는 살려고 교회 왔는데 왜 자꾸 힘들게 합니까? 이렇게 힘들면 나 교회 안 다니겠습니다.’ 김 길태 보고 은혜 받았어요. 저 인간이 바로 나다.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할 때 우리의 손모가지가 왜 썩어 문드러져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저주받은 말씀인데 우리는 그 말씀을 지켜서 ‘내가 악인의 회중에 들지 아니하고 내가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면 내 여생이 보다 행복하고 편한 여생으로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이런 모습, 이것이 김 길태가 아니고 뭡니까?
이게 바로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박국 3장 17절에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라.”
여기 구원의 하나님하고 앞에 있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그리고 외양간의 소의 숫자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요. 상관없는 것이 아니고 정반대지요. 이 하박국 5장 17절의 말씀은 심방 갈 때 많이 나오는 신명기 28장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는 그 말씀하고 성경내부에서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어느 목사가 신명기 28장 그것도 초반부에 있는 말씀을 들고 와서 ‘복을 받아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잘 나오시면 애가 고 3이라던데 서울대학 분명히 갑니다.’ 이런 식으로 ‘군대 가더라도 전방으로 안가고 후방으로 빠집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지 가뜩이나 장사 안 되는 가게에 가서 하박국의 이 말씀을 언제 전하겠습니까? 과태료 내고 벌금내도 감사하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김 길태라는 사람이 공기업의 사원이 되어서 연봉 8천 받으면 여중생 성폭행 하겠습니까? 번듯한 직장에서 살기 좋은데 그런 짓을 하겠어요? 결국 모든 인간은 제 편한 것이 진리고 배부른 것이 진리고 남한테 간섭 안 받는 것이 진리고 외양간에 소가 많고 포도나무의 소출이 많은 그것을 구원이라 여기고 그걸 행복이라 여깁니다.
그러한 마음이 우리 속에 있었어요. 그걸 인화지 찢듯이 두 쪽으로 찢어야 되는 겁니다. 그걸 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는 뭘 주느냐, 말씀을 줘요. 말씀을 주면 감추었던 이런 살고자 하는 더러운 본색이 나오는데 사람이 말씀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상상을 하지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라고 까불 때 그 때 작살나는 겁니다.
“주여, 말씀대로 안산 사람은 놔두고 말씀대로 산 나에게 왜 이런 어려움과 수모가 옵니까?”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하지요. “구원이라는 게 애굽의 재앙에서부터 건져낼 때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치 자기가 재앙 안 받아도 되는 사람처럼 자신은 저주가 안와야 되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그게 무슨 출애굽 한 겁니까? 애굽 사람과 더불어서 같이 재앙 받고 같이 저주고 같이 강퍅해도 마땅한 우리인데요. 그 가운데서 출애굽, 애굽에서 떨어져 나와서 이스라엘만 따로 분리되어서 구원한다면 바로 그들에게 떨어졌던 그 재앙과 그 저주를 느껴야 되는 겁니다. 그 느끼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말씀을 안봅니다. 말씀은 안보고 뭐만 챙기느냐 하면 ‘여러분은 십자가 덕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만 챙기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았습니다.’ 그것만 챙기는 겁니다. ‘자, 이제 구원은 되었고 편하게 살아야지. 그래가지고 무슨 하박국의 5장 17절의 말씀을 온몸으로 느끼겠습니까?
외양간의 소가 날아가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와락 떨어지고 포도나무가 냉해로 다 얼어 죽어서 힘이 쫙 빠질 때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실 때의 그 때 그 심정이 이해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도 아버지한테 다 맡겼구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다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비로 용서로 구원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은혜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한 가운데 놓여있게 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 것을, 십자가의 피의 공로인 것을, 주님의 그 은혜가 지금도 우리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날마다 새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