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5b 울산강의-출애굽기 11장
20100305b 울산강의-출애굽기 11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305b 울산강의-출애굽기 11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해봅시다.
여러분 이런 용어를 들어본 적이 아마 없을 거예요. ‘텅 빈 시간’이란 용어 못 들어봤지요.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정지화면’ 이건 들어봤지요. 비디오 보다가 스톱, 정지화면 되지요. 화면이 운동이 정지가 되면 시간도 정지가 돼요. 시간이 흘러가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정지화면을 시켜버려요. 텅 빈 시간을 해버려요. 시간이 텅 비어있다. 정지화면이 돼버리면 시간을 정지시키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기존의 모든 사건은 정지화면을 위하여 여기 다 모아집니다. 시간이 정지가 되면 쉽게 이야기해서 여기서 정지시킨 어떤 분과 정지당한 어떤 분, 두 분만 남아요.
예를 들어서 cctv에 차를 훔치는데 이걸 정지화면 하게 되면 걔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맨 여기 화면에 있지요. 그 장면 스톱하면 스톱시킨 분이 있지요. 바로 역사의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해야 될 보여줄 역할이 정지화면으로 대조가 되면 나머지 모든 시간은 그것에 늘어난 거예요.
왜 정지화면이 중요하느냐 하면, 도대체 이 역사는 어떤 역사야? 이 역사의 흐름이 어떤 주제야? 알고 싶은 항상 그때마다 정지화면을 주셔서 역사라 하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이렇게 드러나고, 거기서 그 역사에 당해야 할 사람은 이렇게 당한다. 정지화면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이해된다고 강제로 되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면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씨름하죠. 그때 정지화면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하고 야곱하고 싸움을 했지요. 그런데 그 정지화면 해놓고 그 사건이 두고두고 오는 모든 세계역사를 주관하는 거예요. 그게 야곱 언약이에요.
야곱 언약 가운데 에서는 저주받고 야곱은 복 받고 정지화면 시켜버리면, 그 뒤에 나오는 요셉이든 모든 역사는 어떻게 됩니까? 에돔 나라는 저주받고, 에서의 나라가 에돔이니까, 야곱의 나라 이스라엘은 복 받고. 어떻습니까? 맞지요. 그 정지화면, 그걸 흔히 언약이죠. 무지개가 떴다. 밑에 피 흘리지 마라. 억울한 피 내면 저주받는다 했지요. 그러면 무지개 언약만 생각하면 그냥 은혜잖아요. 그런데 무지개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엇무엇 일 때 저주받는다는 정지화면이 있어야 된다니까요.
어떤 사람이 자동차에서 물건을 훔쳤는데 경찰관이 자기 형님이라. ‘너 훔쳤지?’ ‘형님 안 훔쳤습니다.’ ‘봐줄게. 빨리 빠져.’라고 했다 이 말이죠. 나중에 집에 가서 경찰관 형이 그걸 정지화면을 구해왔어요. 그래서 동생이 있다가 ‘형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는데?’ ‘비디오 틀어라.’ 보니까 자기는 도둑놈으로 붙잡혀 있고 형은 용서하고 있고. 정지화면이죠. ‘봤지?’ ‘잘못 됐습니다.’
정지화면이란 뭐냐 하면, 은혜라든지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이 새로운 저주를 유발시켜요. 이 은혜를 보여주기에 합당한 세트가 되는, 짝이 되는 저주가 있어서 이게 정지화면을 유지해야 되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정지화면의 주인공으로서 본인 나서기를 원치 않아요. ‘앞으론 잘 할게.’ 이게 뭐냐 하면 나름대로의 정지화면이 아니고 변화하겠다는 거예요. ‘앞으로 반성할 게.’ 그 반성 안 통합니다. 정지화면이 우리를 결정하지 내가 반성해봐야 얼마 안 가서 또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지화면화시켜서 ‘너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야.’ 이게 정지화면이에요. 나이가 칠십이든, 구십이든 괜찮아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 정지화면 되기 때문에 그 정지화면과 뭘 짝을 이룬다? 하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가 정지화면 되기 때문에 이것이 들어있는 사람은 뭐만 자랑합니까? 주님의 정지화면만 자랑하게 된다 말이에요. 이게 뭐냐?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너는 만날 십자가고? 이젠 십자가 잊어라. 십자가 믿는 건 좋은데 믿고 난 뒤에 새 사람 되어서 착한 일 해야지.’라고 정지화면을 해소해버리고 이제는 정지화면이 아니고 자기가 주인공 되어서 설치는 화면을 자꾸 내비치면서 ‘예수 믿고 술 끊었습니다. 담배 끊었습니다.’ 자꾸 딴 짓을 하는 거예요. 그걸 저는 뭐냐?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다. 그건 묵시가 아니죠.
그래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텅 빈 시간을 마련해서 텅 빈 시간 속에는 이게 운동이 주체가 돼요. 칠일 만에 완성했잖아요. 칠일 만에 완성한 것이 팔일, 구일 없어요. 그냥 칠일 만에 완성했으면 이 자체가 하나의 정지화면이 되어서 그 다음부터 창조 위배되는 것은 전부다 모조리 저주해버립니다.
그런데 늦게 오신 분들은 모르죠. ‘목사님, 창세기 1장에 죄 지었다고 끝까지 갑니까? 그 다음에 잘하면 되지요.’라고 늦게 오신 분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은 기수적이 아니고 서수적이다. 이미 다 아시는데 ‘이번엔 무슨 패를 들춰볼까? 옳지, 선악과 따먹는 패구나. 이번에는 가죽옷을 입히는 패구나.’ 전부다 화투패를 들추면 이미 한 방에 있는 데로 있어요. 같이 있는 걸 들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거예요.
변화산에서 모세가 나이 많습니까? 엘리야가 나이 많아요? 여러분, 하늘나라 맞먹습니다. 그러면 출생이 없고 나이를 못 따집니다. 지상의 나이는 뭐냐 하면, 경점이에요. 모든 인간, 구십 넘어도 경점, 백두 살 먹어도 경점, 한 점에 불과합니다. 오늘 한 점이잖아요. 내일 되도 점 두 개가 아니고 내일 되도 점 하나 뿐이에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았던 것 전부 날아갔습니다. 나이 구십 돼보세요. 구십 되도 그 사람 한 경점뿐입니다. 다 날아갔습니다.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라 하는 것은 원래 없어지게 돼있어요. 현재 있게 하는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묵시적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이러한 정지화면에서 텅 빈 시간이 어려우면 정지화면에서 쏟아진 거예요. 전체가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전부다 텅 빈 시간, 하나의 정지화면에 소속된 겁니다.
11장에서 정지화면 될 때 힘과 힘의 싸움이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힘은 애굽 힘이죠. 이스라엘은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힘이 없어요. 그래서 전도나 선교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힘을 빼고 전도하고, 힘을 빼고 선교해야 돼요. 오늘 너하고 붙어보자. 이거는 힘과 힘의 충돌이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고 상대방을 내가 장악하려는 하나의 폭력에 불과한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때 어떻게 했습니까? 힘을 쭉 뺐어요. 연약하심으로 돌아가셨어요. 그게 전도에요. 로버트 박(박동훈)이 북한 들어갈 때 너무 힘에 충만했어요. 내가 가서 김정일을 하야시키고 북한의 언로를 개방시키고 하겠다고 힘주고 들어갔습니다. 이 인사는 힘을 준 게 문제였어요. 힘주고 들어가니까 힘으로 얼마나 이 사람을 팼던지 자살충동을 일으켜 지금은 정신병원에 가 있습니다. 초반부터 패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북한을 너무 몰랐습니다. 사과합니다. 가기 전에 그 사람은 이 몸은 죽습니다. 그리고 갔어요. 자기들 모임, 공동체에서. 이 몸은 잊으세요. 난 이미 하나님께 바친 몸입니다. 날 잊으세요. 죽은 몸입니다. 죽으면 죽지. 왜 안 죽었어요. 사람이 힘을 빼게 되면 죽고 사는 문제가 더 이상 자기한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니엘 세 친구 같은 경우에는 힘을 빼버리니까 자기가 신앙이 좋아서 사는 게 아니고 힘 빼니까 그냥 죽었고, 죽어보니까 주님과 함께 있고 그 다음에 사는 것은 자기가 힘들게 사는 게 아니고 그냥 살아가기에 사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살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고 그냥 더 살아야 하기에 힘든 인생을 또 살아야 했던 겁니다. 그냥 힘을 빼는 거예요.
문제는 힘을 빼버리면 자기의 묵시성을 포기하기 때문에 이게 힘든 거예요. 자기가 주님의 묵시 속에 하나의 점으로 포함된다는 것이,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힘 뺐다 해놓고 또 힘을 찾아요. 우리가 어려울 때는 새벽기도를 나오잖아요. 힘 빼고 나와요. 힘 생기면 새벽기도 안 나옵니다. 힘 있는데 뭐 때문에 새벽기도 나옵니까. 교회 나오는 것이 힘을 갖추기 위해서 교회 나와요. 그러면 힘에서 못 빠져나와요.
이걸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애굽인데 하나님 여기 계십니다. 이걸 빠져나오는데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애굽인에게 강퍅한 힘을 줘서 힘으로 완전 포위해서 어느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 못 받도록 조치를 해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안에 심리가 뭐냐? 부글부글 거려요. 라면 끓일 때 물 끓는 것처럼 물분자가 액체에서 기체로 되서 뚜껑을 막 들이받잖아요. 그런데 냄비 만들 때 뚜껑을 단단히 만들어도 안 돼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죽어야 되죠. 어떻게? 스스로 죽어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힘없는 분을 보내서 같이 죽게 한 거예요. 같이 죽으면 살고, 같이 안 죽겠다고 버틴 애굽은 그냥 그대로 남아서 저주받고 죽게 되고. 주와 함께 죽으면 힘없이 나오고.
이걸 정낙원 목사님은 공짜로 구원받는다. 힘 빼고. 여기 식당에 라면 얼마입니까? 놔두소. 다 값을 치렀습니다. 공짜네. 공짜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힘이 빠져야 공짜를 알죠. 힘이 안 빠지면 꼭 자기가 돈 내려한다니까. ‘그때 내가 기도했더니만 은혜 받았구나.’ 이래 나와요. 기도란 값을 치러요.
힘 빼는 방법이 뭐냐? 욕심과 죄에 대해서 어떻게 이깁니까? 욕심과 죄가 올 때 지면 돼요. 왜 지면 되느냐 하면, 우리는 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냥 우리 본성대로 지세요. 욕심 나오면 욕심대로 사시고, 죄 짓고 싶으면 지으세요. 왜? 그게 우리 행세에 딱 들어맞아요.
아까 울산에 오는데 예쁜 스타킹 신고 나는 이십 대 아가씨인 줄 알았어요. 버스를 탔는데 보니까 아무리 못 되도 육십이에요.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미니스커트 입고 있는데 육십 대였어요. 어울리질 않아요. 격에 어울리지 않아요. 뒷모습 보고 치마 보면 이십 대에요. 그런데 역시 머리는 삭았어요. 머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라. 머리는 윤기가 없어요. 얼굴 늙었지요. 앞뒤가 격이 안 맞아요. 우리 격 좀 낮춥시다. 그냥 욕심대로 사시고 죄 생기면 지으세요. 이게 힘 빼는 거예요.
제가 주일 오후설교에 했잖아요. 세상에 일곱 시에 뷔페 있으면서 여섯 시에 집에서 라면 두 개 끓여먹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경건치 않는 자를 경건케 한다는데 왜 자기가 미리 경건하면 어떻게 돼요? 경건치 않는 자를 경건케 한다면 경건치 않은 자로 살면 되는데 꼭 자기가 알아서 경건 티를 다 내. 웃기고 있어. 자기 의를 채우고 말이죠. 그냥 사세요. 그냥 살라고. 그래야 뷔페 음식이 맛있는 줄 알죠. 맛은 허기지면 다 맛있어요. 허기지면 땅에 떨어진 떡가루도 다 맛있어요. 배고픔이 최고의 입맛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맛이 없어요.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만족을 얻을 것이다.
내가 이래서 구원된다는 힘을 축적하지 마세요. 이래서 구원된다는 힘을 축적하지 마시고, 갈수록 절망과 가망을 온 몸으로 체득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말씀이 체험이 되지 아니하면 은혜가 추상적 은혜가 돼요. 그리고 실제로 힘을 빼면 힘을 이래요. 심리적인데요. 인간이 힘을 갖고 있으면 주사바늘이 들어가질 않아요. 주사 맞을 때 뭐라 합니까? ‘아저씨. 힘 좀 빼세요.’ 힘을 빼야 주사바늘이 들어가요. 사람이 힘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시비 걸게 돼있어요.
오늘 낮에 오면서 우리교회 심방을 갔는데. 김◯◯ 집사님이라고 치킨집 하는데 그분을 보면 제가 존경스러워요. 그분은 자기 힘을 비축을 안 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든 전부다 웃음으로 대해요. 자기는 힘을 뺐기 때문에 힘 있는 사람과 힘과 힘의 대결구조로 안 가져가요. 애초부터 자기가 힘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치킨집에 노회를 마친 장로들이 온답니다. 이 사람들은 술도 팔고 하니까 설마 기독교신자인 줄 모르고 노회 서류 들고 와서 노회원들이 술 먹고 갔는데 그 사람들이 노회원들인 줄 몰랐어요. 그런데 노회 서류를 두고 갔어요. 그분들이 노회 마치고 스트레스 받으니까 술 먹고 갔구나. 그래서 알게 됐어요.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장사 안 되니까.’ 단골 하나 얻었어요.
힘 이야기 해봅시다. 이런 논리에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예를 들었지만 제가 예를 들어도 기뻐요. 옛날에 있던 박사교회에 나이가 구십이 됐는데 이름은 정장운인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그 당시 구십이었어요. 존경을 많이 받았어요. 평소에 내 재산 다 바쳐서 이 교회 세웠습니다. 이제는 이 교회만 있으면 교회는 하나님 것이지 내 것은 없다. 이래서 존경을 받았는데. 갑자기 이 장로님 말고 어떤 장로님이 들어왔어요. 교회가 힘의 축이 이 사람에게 넘어가니까 제가 설교하고 광고시간이었습니다. 뭐가 화가 났는지 ‘다 나가라 내가 세웠다.’ 그래서 나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 생기느냐 하면, 평소에 나를 느끼지 않다가 외부에 타인이 오게 되면 타인을 의식하는 순간 나라는 것이 괴물처럼 솟아나요. 남이 등장할 때.
세 식구 오순도순 있으면 나라는 게 없어요. 근데 ‘계십니까?’ 하고 노크 소리 들리면 ‘누굽니까?’ 갑자기 나라는 게 발생돼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나를 포기 못 해요.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왜? 하나님께서 외부에서 자꾸 힘 가진 사람을 주게 되면 갑자기 나가 응축이 되서, 응축이 된다는 말은 뭡니까? 있는 힘 다 모아라. 다시 말해서 새벽 두 시에 누가 들어온 듯 하면 망치, 야구방망이 힘 있는 것은 다 모으죠. 저쪽이 힘으로 나오면 힘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에 오후 열두 시, 아침 일곱 시 같으면 야구방망이 방안에 왜 둡니까? 미쳤습니까? 다 치우죠. 언제 힘이 생긴다고? 힘을 가진 외부인이 등장하면 힘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잔뜩 힘을 주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다시 말해서 힘이 생기면 힘이 생겨야 되는데 ‘힘 빼라. 힘없는 방법으로 구원할 테니까 그 말 좀 따를래?’ 하니까 힘을 빼는 게 뭐냐 하면, 어린양 피를 바르잖아요. 이거는 어린양 피가 죽었다, 패배했다는 말입니다. ‘졌다, 졌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심판주가 와서 이쪽은 진 거니까 그냥 넘어가고, 이쪽은 뭘 주장한다? 애굽은 ‘웃기고 있네. 우리는 힘 가지고 살 거야.’ 하는 놈은 다 죽여 버리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자 자체가 역사 속에서는 힘 있는 자가 아니라 힘없는 자로 와서 힘없는 자를 믿으면 힘없는 자가 구세주인 것을 인정한 사람이면 힘없는 자가 부활과 더불어 같이 부활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패, 그 다음에 패 넘김이 그거였습니다.
보통 힘없는 경우에 기도하게 되죠. ‘주여, 힘 뺐습니다.’ 힘 뺄 때 어떻게 합니까? ‘이번 일만 잘 되면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완전히 힘 빼버렸어. 그것 며칠 안 갑니다만.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하나님. 우리 애 병만 낫게 해주시면 내가 그동안 소홀히 했던 것, 교회에 잘 다니겠습니다.’ 한 달 잘 다닙니다. 목사도 그걸 기대해선 안 돼요. 왜냐하면 교인들이 잘 나오면 힘이 된다니까. 교인 세 명일 때 하고, 교인 백 명일 때 하고 설교가 달라요. 힘이 막 나요. 혼자 흥분했어. 지난 달 강의한 것하고 이번 강의 다르잖아요.
앞에 만약에 교인이 졸게 되면 목사가 힘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힘 빼라고 졸게 하시는 겁니다. 그걸 깨운다고 탁탁 깨우지 말고.
출애굽은 정말 진짜 구원자가 우리 속에 있을 경우에는 우리는 그분만 믿으면 되지 자기가 구원받겠다고 힘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정지화면 하기 위해서. 정지화면에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정지화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학대한 자가 애굽이죠. 애굽도 정지화면에 들어가는데 어떤 식으로 들어가느냐 하면, 까불다 맞았다는 식으로 애굽이 여기 정지화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정지화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했다고 들어가죠.
이 삼의 주체가 조합이 되어서 계속 그 다음 역사를 이 기준에 따라서 이끌고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 유월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누가 부러우냐 하면, 힘 있는 애굽인이 부러운 거예요.
여기 11장 7절.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면 구별 당했던 이스라엘이 자랑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자기는 구별 당했기 때문에.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해야 돼요. ‘주여, 왜 하필 저를 구원하십니까?’ 매일같이 묻는 것이 ‘하나님이여, 왜 저를 구원하십니다. 구원 안 해도 되는데 구원할 가치도 없는 인간을 왜 구원하십니까?’
잠언서 30장 봅시다. 갑자기 잠언서 30장 보자는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30장 2절에 보면 942페이지 다같이 읽어볼까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이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이게 뭐냐 하면, 지식과 지혜가 다르다는 거죠. 지식은 힘입니다. Knowledge is power. 아는 것이 힘이다. 베이컨이 이야기했죠. 힘이에요. 반드시 힘은 누구를 더 완벽케 한다? 지식을 아는 나를 완벽케 하는데 지혜는 연결돼있어요. 지식은 과학이기 때문에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라고 하는 건 지식이고, ‘물을 흐르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묻는 것은 바로 지혜와 관계되는 누구십니까?
누가 바람을 손에 모았고, 누가 거룩한 분이며, 누가 이 모든 걸 만들었으며, 누가 하나님의아들입니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를 아는 자는 생명을 얻고, 지혜가 없고 지식만 있는 자는 이거는 저주받는 거예요. 잠언서 손 봐서 책을 내려고 합니다만 잠언서 내용은 뭐냐 하면, 지식과 지혜를 비교해서 사람들이 뭘 원하다? 힘을 원하지만 너희들은 뭘 원한다? 지식이 아니고 지혜를 원해서 도대체 나를 이렇게 만든 분은 누구십니까? 너 말고 다른 분을 ‘누구십니까’와 연결시켜라. 이게 지혜다 말이죠. 지혜는 곧 생명나무니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전부다 이렇게 하시면 힘을 얻는다고 힘을 응축하는데 힘을 집결하는 설교를 하죠.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면 안 들어요. ‘목사님, 그런 알면 복 줍니까? 힘 됩니까?’ 만날 이런 소리가 이거에요. 지혜가 생명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출애굽하면서 힘이겠습니까, 지혜겠습니까? 지혜잖아요. 그런 관점에 앞으로 출애굽기 12장을 봐야 된다니까. 한번 봅시다.
지식, 힘이 아닙니다. 힘은 누구다? 애굽이었다. 그런데 애굽과 이스라엘은 정지화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 있는 애굽은 조져버리고, 힘을 뺀 이스라엘을 주는데 힘 뺐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나 여호와를 아는 것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쉬워요. 그 다음부터 어려워요.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시간을 줘버려요. 이게 출애굽기 12장 봅시다.
12장 2절에 보면,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이게 어려워요. 첫 달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모든 것은 없다. 무효, 없다 이 말이거든요. 뭐가 없느냐? 나의 것이라는 건 없다. 그렇다면 현재 있는 나는 뭡니까? 첫 번째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첫 번째 있는 거구나.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 담긴,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는 첫 번째 사람이다. 누구? 이스라엘. 다른 민족은 아니야. 왜? 출애굽이란 경험을 안 했기 때문에.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이 너희를 첫 번째 민족이란 말은, 하나님의 사건이 너희 속에 삽입되어있다, 섞여있다는 겁니다. 섞여있기 때문에 첫 번째죠.
그러면 그 다음엔 두 번째입니다. 그게 바로 기수적인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역사적 생각이에요. 첫 번째는 말하자면 수직적으로 층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게 항상 정지화면으로 떠있어서 기존에 있던 모든 역사를 판별할 수 있는 모델이 되는 첫 번째. 첫 번째 다음에 두 번째 없어요. 계속 첫 번째에요. 계속해서 이스라엘, 이스라엘, 이스라엘. 예수님도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맨 이스라엘은 계속 첫 번째에요.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은 나머지는 다 애굽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입니다.
모든 것이 애굽이 되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고. 근데 그 이스라엘은 그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항상 첫 번째는 첫 번째지만 그 이스라엘은 첫 번째 내용이 늘 바뀝니다. 하여튼 첫 번째는 유에프오처럼 우리 머리 위에 떠있어요. 이거는 이레, 7이레 있어요. 첫 번째 예수님은 항상 우리 머리 위에 떠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끝은 역사 끝이 아니고 머리 위에 우리의 끝이 있어요.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가리라. 항상 끝은 위에서 당겨주는 겁니다.
울산에 오다가 보니까 롯데백화점 앞에 걷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펑크 머리 있죠. 뾰족하게 서 있어 위에서 당기는 것 같아.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항상 당기는 거예요. 지혜자에요. 지식이 아니고. 힘을 모은 게 아니고 뭔가 당기니까 당기는 힘만 있으니까 밑에는 딸려가니까 힘이 빠지는 거죠. 지혜를 가진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안에 텅텅 비어있으니까 당기는 힘으로 가는 거예요.
근데 그게 이렇게 뾰족하게 있으니까 위에 있는 그 묵시적 힘이 아래쪽에 영향을 주는 겁니다. 자꾸 힘 빼라. 힘 빼라. 죄질 놈은 죄 짓고, 욕심낼 놈은 욕심내고. 하여튼 너의 의가 힘 되는 식의 모든 것은 다 빼버려라. 그냥 경건치 않은 자로 살아가 줘. 제발 경건 티내지 말고. 원수 된 자는 원수 좀 돼줘. 죄인은 죄인 되라 말이죠. 그래야 네 대신 돌아가신 피의 의미가 계속 솟아나도록 그냥 살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힘을 그들은 빼질 못하죠.
거기 보면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죠. 이것 설명한 주석이 없어요. 도대체 설명을 못합니다. 구약학자들이 아무리해도 설명이 안 돼요. 제가 이렇게 강의하니까 김영한 교수가 고함을 지르면서 모든 해석의 기본은 역사적 그리고 문법적 해석을 해야 한다고 성가대석에 혼자 앉아서 가야바처럼 외치고 있어요.
역사적-문법적 안에 철학적 해석이 있어요. 철학적 해석에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 되기 전에 사울이었습니다. 철학적 해석을 하게 되면 여기서 문법이 되고 역사가 나와요. 철학적 해석은 ‘나는 누구냐’입니다. 지혜는 뭐라 했지요? ‘누구시냐’고 묻는 것은 위에 따로 있는데 철학적 해석은 ‘하나님,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겁니다.
철학적 해석자와 누구와 만납니까? 이 역사적 주체하고 묵시의 주체자인 예수님하고 만나서 완전히 깨져버렸잖아요. 예수님 만나서 깨어진 주체가 소용없는 게 아닙니다. 깨어진 채로 예수님과 한 세트가 되서, 홈쇼핑에 하나의 괜찮은 구성인데요. 이번에 특별 구성해서 기존의 철학적 해석, 역사적-문법적 해석하는 모든 바리새인들에게 공격하게 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 앞에 모든 철학은 버려라. 고린도후서 10장 5절. 모든 철학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거예요. 그걸 빌립보서에서는 배설물, 오용익 목사님이 이야기한. 똥, 오줌이다. 그것 내가 이미 다 했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것 내가 다 했거든. 그런데 와장창 깨졌거든. 내가 바로 예수님을 힘들게 한, 핍박한. 핍박의 원인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역사적-문법적 해석이 예수를 핍박케 한 거예요. 이게 바리새인입니다. 이걸 제가 증거했어요. 초반부터 분위기 심각했습니다.
사람이 내가 뭘 한다 하면 모든 해석을 내 위주의 역사를 구축하기 때문에 여기에 선별해서 오는 모든 사건들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오줌 싼 것 다 빠져요. 이웃집 계집애 친구 사귄 그게 남습니다. 골라잡아 해석을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고른 거예요. 그래서 이 괜찮은 역사에 대해서 누가 욕을 하게 돼요? 발각 뒤집어지죠.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 계셔버리면 우리는 전부가 세리와 창기가 돼요. 그래서 제가 오면서 주께서 그런 배치를 한 것도 주의 뜻인지 알아요. 주님께서 김영한 교수한테 배치해서 한 것도 이게 주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묵시는 시간이 정지화면이니까 시간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흐르지 않는 시간, 묵시적 시간이 여기에 삽입이 돼야 돼요. 그래야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워요. 이 흐르지 않는 시간, 완성된 시간이 삽입되려면 반드시 정지화면 돼야 되거든요. 정지화면 되려면 이스라엘만 정지하면 안 되고 애굽도 패역한 애굽처럼 돼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앞의 모든 역사, 첫 달이니까 둘째 달 있을 것 아닙니까. 왜 애굽이 애굽이어야 했기에 벌을 받아야 되는가를 그 정화을 이제부터 이스라엘 중심으로 역사적 배치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저리니까 저주받아야 돼. 저러니까 예수 안 믿으니까 지옥 가는구나.’라는 안목을 가지라고 첫 날 심어주는 겁니다. 첫 날이 정지화면, 시간이 정지하게 되면 그 뒤에 모든 시간은 어디로 귀환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되게 했던 첫 번째 사건으로 전부다 귀환, 귀속하게 됩니다. ‘주여, 이렇게 된 것은 다 은혜입니다.’
여러분 피곤하실 텐데 조금만 해봅시다. 여러분 피곤하실 때 제가 안쓰러워서.
주께서 주에게 가지요. 팽팽합니다. 주께서 주에게 할 때 아브라함이 납작 엎드리죠. 납작하면 다리가 되죠.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은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키고 사람은 못 지킵니다. 그런데 이게 축 쳐졌습니다. 소불알처럼 축 쳐졌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했던 것이 이삭 언약, 야곱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모두 어디로 갑니까? 도로 아브라함 언약으로 돌아가요.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이 몇 명입니까? 두 명, 세 명 몇 명이에요? 한 명밖에 없어요. 주님밖에 없어요. 주께서 와서 주로 가니까 아브라함 언약이라 하는 것은 모든 말씀은 주님이 주님한테 한 것은 네가 믿으면 이 노선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잘 들으세요.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행함이 아닌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축 쳐져야 되는 거예요. 축 쳐진다는 말은 모세 언약에 달렸거든요. 430년 후에. 모세 언약을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 눈앞에 가까이 온 말씀을 보니까 지키면 되는 줄 알고 지키는 거예요. 지키려고 보니까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파리 잡을 때 끈끈이 붙이죠. 파리가 맛있다고 왔다가 들러붙지요.
그러면 율법을 주게 되면 율법 줬다고 좋다고 하다가 율법을 주는 순간 율법에서 저주가 뿜어져 나오죠. 저주 뿜어져 나오면 원리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깔때기. 깔때기는 뭡니까? 하나를 지키면 이 말씀만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말씀 안에 모든 율법이 다 쏟아져서 들어오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 심부름 잘한다 했지요. 막걸리 심부름 할 때 막걸리를 대병에 담아 와요. 그 다음에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작은 병에 깔때기를 꽂아서 붓는 기억이 나요. 소리도 괄괄괄. 아직도 그 소리 기억하고 있어요. 할아버지 것, 아버지 것. 하여튼 모든 집안이 술꾼이에요. 거기에 저는 포함 안 됩니다. 저는 묵시적 존재기 때문에. 저 빼놓고 다 술꾼이에요. 엄청나게 술을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의 과거는 정당한 과거죠. 술 안 먹었으니까.
모든 말씀 중에서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깔때기. 아브라함 언약이 왜 믿음이냐는 걸 보충하기 위해서 모세 언약을 줘서 십계명 지킨다고 좋다고 다 들어붓는 거예요. 그 모든 말씀을 예수님만 지키고 다른 사람은 하나도 못 지키니까 저주를 사. 모든 저주를 사니까 예를 들면 정낙원 목사님 아가서를 하잖아요. 유대인들이 아가서를 알까요, 모를까요? 알지요. 알 때 그들은 아가서를 믿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짓을 하겠지요.
세상에 사랑받을 짓을 해서 사랑받습니까? 아가서 내용이 그겁니까? 죄인에 대한 죄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이죠. 그래서 사랑은 죽음보다 세다. 아가서를 주니까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백성이기 때문에 아가서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항상 자기 기초가 우린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 언약은 혈통적이 아니에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걸 몰라요. 아브라함 언약에 합당한 사람은 따로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혈통으로 하니까 결국은 이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자를 죽여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아무도 아브라함 언약대로 믿는 사람 있다, 없다? 없다. 심지어 아브라함도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아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누굴 기다렸어요? 자기 대신 구원할 자를 찾았죠. 아브라함이 예수님 만나고 기뻐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은 주께서 지키지 다른 사람은 못합니다. 주께서 은혜주실 때만 여기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게 뭐냐? 정지화면 되서 계속해서 이 원리대로 가는 겁니다. 원리대로 간다는 말은 다시 그걸로 전부다 귀속되는 거죠. 모든 언약이 다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호와께 귀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함께 가면서 항상 누누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나타내신 여호와라고 한 거죠.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지요. 그 별이 왜 움직이느냐 말이죠. 별이 왜 움직이느냐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별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죠. 민수기에 보면 유대인의왕으로 오신 분에게 별이 오게 돼있어요. 유대인의 왕이 별처럼 나타나니까 처음부터 베들레헴에 별 뜬 게 아니고, 동방박사 있는 곳에 별이 와서 별이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은 따라온 거죠. 처음부터 베들레헴에 뜬 게 아니고 아무 상관없는 동방박사에 별이 떠서 별 따라 왔다면 왜 처음부터 예수님 태어난 곳에 별이 안 떴습니까?
그것은 별이 오면서 뭔가 거치고 오죠. 어디서 별이 사라졌지요? 예루살렘에서 별이 사라졌지요. 그러니까 오실 유대 왕이 뭔가 푹 꺼져서 다시 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동방박사가 그냥 곱게 집에 갔습니까, 아슬아슬하게 집에 갔습니까? 아슬아슬하게 갔죠. 그걸 예루살렘에 안 거쳤으면 그냥 곱게 보고 곱게 갈 건데 꼭 별이 예루살렘에서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그 경로,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해야만 성도가 된다는 거죠. 그럴 때 그 별에 합당한 진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이 가신 경로와 같은 경로를 겪게 돼야 그게 진짜 참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경로가 삽입되는 겁니다. 동방박사 혼났어요. 밤에 천사가 안 나타났으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라헬의 족속들은 왜 라헬의 자식이 이스라엘에 남편은 애굽에 가있습니까? 호세아의 말씀대로. 남편은 애굽에서 불러내 가버리고 여자만 덜렁 남아서 여자의 자식들 다 죽었잖아요. 베들레헴에서 두 살 밑으로 다 죽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게 되면 어떠한 수모를 당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왜 그렇게 수모를 당하게 하느냐? 딱 집어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되는데 왜 그러느냐? 우리 나름대로의 초월적이고 역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뭘 믿으려고 하면 그 역사를 집어넣어서 한꺼번에 마시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는 역사 밖에 나와서. 역사 밖에서 ‘하나님 뭘 믿을까요? 예수 믿을까요?’ 역사를 만들어서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식이 아니고 예수를 믿으려는 그 자신도 죄의 역사 속에 포함이 되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 중에 포함시켜 버립니다. 그런 인간을 은혜로 구원하는 거예요. 참 어렵다.
우리 앞에 역사 있어서 ‘하나님 뭘 지킬까요, 뭘 믿을까요? 별? 별 믿지 뭐.’ 이러면 구원 안 되고 동방박사처럼 별 따라오게 해요. 별이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예루살렘 거쳐서 베들레헴 가니까 결국은 악마의 역사 속에 품어서 태어난 베들레헴이 되죠. 그러니까 여기서 자라나는 예수님은 주위에 뭐가 포진돼있습니까? 죽이고자 하는 악마의 어두움의 힘에 싸여 있지요. 거기에 동방박사가 참여했습니까? 동방박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지 자기가 별 따라와서 구원받은 것은 결코 아니며 심지어 황금과 몰약과 유황 준비했다고 구원받은 건 아니에요.
그래서 이러한 경로가 결국 왜 동방박사가 멀리서 구원받지 않고 별을 따라가야 했으며, 왜 중간에 스톱했다가 다시 등장하게 했는가? 그 경로 자체가 장차 예수님이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하늘나라 가느냐는 경로를 미리 동방박사 속에 담아서 같이 동참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 못 빠져나오는데 주님 혼자 빠져나와서 빠져나온 입장에서 역사 속의 죄인의 입장을 빼내는 그 방식 외에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을 우리를 구원한 적이 없다 이 말이에요.
이스라엘이 새로운 이스라엘 됐다는 말은 사람은 맨 그 사람이나 뭐가 지배합니까? 정지화면, 그러니까 새로운 묵시적 시간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앞으로 죄가 무엇이며 어떻게 인간은 망하게 되며 그리고 거기서 구원받는 것은 묵시적인 정지화면에 계신 그분에 의해서 구원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될 그러한 책임을 지고 이스라엘 역사는 시작이 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달랑 지식으로 알아야 될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야 될 우리가 포함돼야 될 앞으로 운명까지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운명이 별 따라가는 주님의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가는 길이기에 우리가 겁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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