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부산 3월 9일 강의 침멀리 04 구약신학 - 야웨의 선물 (전쟁과 야웨의 승리) p93강의[신학]

부산 3월 9일 강의 침멀리 04 구약신학 - 야웨의 선물 (전쟁과 야웨의 승리) p93

이름 : 관리자(IP:220.81.41.197)

100309 한 아담을 대상으로 하는 여호와 전쟁과 승리

관리자(IP:220.♡.41.197)

10-03-09 17:09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부산/부산100309a침멀리04구약신학-여호와의전쟁과승리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부산/부산100309b침멀리04구약신학-여호와의전쟁과승리b.hwp

관리자(IP:124.♡.86.6)

10-03-16 19:44

부산100309a침멀리04구약신학-여호와의전쟁과승리a

20100309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4-여호와의 전쟁과 승리
(강의:이근호 목사)

그건 답변을 이렇게 해야 돼요. 항상 객관적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주관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거는 강의내용에 나와요. 항상 시간만 바뀌면 객관이 바뀌어버려요. 어떤 인간도 항상 객관을 추구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게 주관으로 바뀝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체 때문에 그래요. 그 문제 다룬 거예요.

왜 객관이 자꾸 주관으로 바뀌는가? 그게 논문의 핵심이었어요. 요나가 고국에 있을 때 분명히 객관이었죠. 그런데 막상 니느웨에 가서 심판하는 것 보고 뭐로 바뀌었습니까? 나는 분명히 객관적으로 우겼는데 나중에 그게 보니까 나 나름대로의 주관이 되었잖아요. 그 주관을 버리면 되는데 못 버리고 자살하잖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본인이 버리려고 하니까 본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나님의 계시하고 내 계시가 같았다? 달랐다? 다르다. 그 다른 이유가 뭐냐를 추적하는 거예요. 다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내 내부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형식과 구조가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님이란 주체하고 계시를 받는 내 주체와 이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발표했잖아요) 항상 틀어지는 거예요. 그럼 진리는 어디 있는가? 그 차이의 싸움이에요.

말씀이 대해서 주체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체를 이야기하거든요. 맞지요? 모든 것이 예수님에 통일되었기 때문에. 근데 말씀을 대할 때 우리가 말씀 받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말씀 받기 전까지는 몰라요. 논문에 나와 있어요. 사람이 말씀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죄 짓기 시작한다고. 인간은 자기가 말씀을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이 들어온 순간부터 내부의 작동이 일어납니다. 내가 평소에 나도 모르는 소위 주관이면서도 그걸 뭐로 우기느냐 하면, 객관적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서 진리에요. 진리라고 우기는 거예요. 이렇게 했다고 해서 나쁜 게 아니고 원래 인간이 이래요. 말씀은 예수님 중심으로 했는데 인간들은 70이레든 뭐든지 받아도 자기 주관이 있는데 주관 위주로 내막에 보니까 그게 제일 처음에 서론부분에 이게 뭐냐 하면, 살고자하는 겁니다. 죽어서 좋은데 가려는. 그게 구원욕구거든요.

구원욕구기 때문에 인간은 처음부터 언약을 깬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그 말을 못 알아들어요. 언약을 깬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제가 모세의 복사판 이야기했거든요. 원판 줘도 되는데 원판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니고 깨어진 그 돌판의 복사판 중심으로 하나님 이름이 임하죠. 그러면 하나님은 원판과 관련돼있고, 하나님의 이름은 복사판과 관련돼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과 함께 관련돼있는 겁니다. 이걸 그들은 모르지요.

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하고 같이 하나님으로 생각해버리고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도 믿고, 예수 믿고, 성령 믿고 삼위일체 믿으면 구원되는 줄 알고 있다고.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와 주로 나눠짐으로써, 오늘 강의를 미리 해봅시다. 시간 넘었는데 왜 안 오는지 모르겠네.

주와 주로 나눠짐으로 말미암아 이 주님은 전쟁하는 주님이고, 이 하나님은 주님은 자기 아들을 전쟁을 시키는 하나님이죠. 그러면 그 전쟁의 대상이 누구냐 하면, 놀랍게도 우리 인간들이에요. 사람이 선악과 따먹었다고 입 닦을 수 없어요. 선악과 따먹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돼요. 그게 신약에 가면 부채상환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부채를, 빚을 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남의 것을 훼손했으면 갚아야 될 건 아닙니까. 양을 한 마리 범죄 했으면 네 마리 갚아야 되고, 소 한 마리 했으면 다섯 배 갚아야 되고 그리고 속건제에 보면 제사드릴 때 20% 추가해서 드리게 돼있어요. 이번 여름에 레위기할 건데 그런 걸 다룰 거예요.

모든 율법은 청구서입니다. ‘죄진 값 내놔라’ 이 말이에요. 청구서 안 내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피 값인데, 레위기의 핵심이 피 값이에요. 피 값을 내놔야 돼요.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목숨 값 내죠. 소용없어요. 자기 목숨이 피 값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게 가장 슬픈 팔자라 한다면,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죽고 싶어도 한 번 태어난 인간은 죽을 수 없다. 환장합니다. 무덤에 가도 소용없어요. 이거는 안 죽는 게 문제에요. 차라리 여호와증인처럼 없어지면 괜찮아요. 없어지면 마음 놓고 죄 짓고, 완전범죄하고 자기 성질 다 쓰고 자실해 버리면 그걸로 가루 되서 사골함에 넣으면 끝나는 건데

문제는 이게 사람의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거고 죽고 난 뒤에 마지막 심판에 있어서는 사람이 죽을 수 없어서 문제에요. 지금 교회한다고 돌아다니는 것, 인간들 가련해요. 왜냐하면 안 죽는 게 문제에요. 난도질해도 안 죽을 걸요? 심지어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바다도 죽은 자를 내죠. 이건 환장할 지경이에요. 지진이 일어나도 죽은 자를 내고.

왜 지진과 우박과 바다가 넘치고 이런 재앙이 오느냐 하면, 그 재앙이 옴으로 모든 물질이 갈라졌을 때 물질에 가려진 인간의 좁은 인식이 모든 전쟁과 기근과 이런 모든 장막, 베일,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것만 해도 심판일거야’ 이야기했던 그 인간적인 심판이 날아가 버리면 진짜 심판이 기다리는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영화 끝나고 사람이 영화관에 안 살잖아요. 자기 집에 가야 되죠. 이 세상은 영화관입니다. 영화 끝나고 어디 가느냐? 인간 자기 집이 어딘 줄 알아요? 선악과 따먹은 그 집, 에덴동산 그 집에 인간이 가야 돼요. 거기서 마귀와 더불어 심판을 받아야 돼요.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인간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지옥이 원래 악마에 대한 그 지옥에 누가 참여하느냐? 바로 악마한테 이마에 표 받은 사람이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매개체, 원래 천국은 인간 나라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고, 어린양의 나라고 하나님의 나라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어린양의 인 맞은 사람만 들어가게 돼있죠. 그러면 그 중간에 있는 인간은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인간을 만들어놓고 모든 인간의 운명 결정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배후에 있는 뱀과 관련돼있어요.

처음에 에덴동산 할 때 처음에 누구한테 저주합니까? 뱀한테 하잖아요. 약속에 인간의 안 들어갑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할 때 인간의 안 들어가죠. 여자의 후손이라고. 그리고 뱀의 후손이란 말이죠. 따져보면 인간들이지만 그 원천은 인간이 아니고 뱀이고, 이쪽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일 때 이것이 뭐냐 하면, 아담이라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아니고 아담이 한 사람입니다. 참 이런 인식도 굉장히 중요해요. 그 논문에 나와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 세 사람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상대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지요. 아담 안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만 상대하고, 계속 한 사람만 상대하고, 계속 한 사람만 상대해요. 계속해서.

그런데 그 한 사람 안에 담겨있는 자가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만 상대하면서 하나님 형상과 상대하고. 하나님의 형상과 상대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이 처음에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이에요. 우리가 형상대로 만든 사람이라니까 악센트를 어디다 두느냐 하면, 자칫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인간에다 악센트를 줘버리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나, 인간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뭐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 이래되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만들었고, 모든 것이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형상 위주로 돌아가야 될 해석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는 거예요. 벌써 이게 틀어지지요.

요한복음 5장 39절에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 하는데 도대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러한 관점을 가질 수 없어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모든 계시는 자기를 위해서 증거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증거하기 때문에 벌써 여기서부터 틀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면 말씀은 원래 주체가 예수님인데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자기 주관을 근거로 해서 객관을 끄집어내고, 신학입니다. 그걸 진리로 일치시키죠. 그런데 이 객관은 곧장 주관으로 돌아오게 돼있죠. 주관으로 돌아오니까 원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돼있는데 인간은 말씀을 주면 자기 주관을 위해서 산다 이 말이죠.

주관 위해 산다는 말은 이게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주관은 주관을 만들어내는 요인이 있어요. 그 주관 안에 아무 근거 없이 살고자하는 구원욕구죠. 욕망, 욕심이 있다 이 말이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했지요. 이게 말이 어려워요. 죽으리라 했으면 그 다음에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 자체를 내가 정복해버리면 죽음 자체가 묵살됐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악마의 생각이에요. ‘죽으리라’를 없애버리면 죽음 자체가 사라진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이 뭔가 잔소리하게 되면 어떻게 하면 돼요? 순종하지 말고 그렇게 잔소리하는 하나님을 죽여 버리면 되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노렸던 거예요. 하나님을 죽여 버리면 그 다음부터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더 이상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이 죽었다’는 그 순간 누가 신 돼버렸어요? 신이 죽었다는 말은 자기가 신이 되었잖아요. 더 이상 자기를 죽이는 자는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인간을 죽으리라 해놓고 안 죽여 버리면서 인간을 죽여 버리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말이 참 어렵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하도록 방치하신 거예요. 인간이 신을 죽이잖아요. 죽이는 방법이 뭐냐 하면, 가인이 누굴 죽입니까? 아벨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신의 흔적을 죽이는 거고, 이 땅에서 모든 신을 죽이는 겁니다. 왜냐? 아벨에게는 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기 때문에 죽이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이면 하나님을 죽이는 건데 사람의 속에는 날 때부터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극복하려는 거예요. 대표적인 게 불교 아닙니까. 신을 죽임으로써 더 이상 자기를 죽이는 외부의 타자가 전혀 없게 하는 겁니다. 타인이 없게 되면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죠.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절망적이다 이 말이죠.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죽어야 되는데 막상 살아보니까 죽고 싶어 미치는 거예요. 죽고 싶어도 못 죽는 거예요. 왜? 죽고 난 뒤에 죽은 자도 자기가 죽었던 그 자리에서 호출을 받고 심판받는 겁니다. 심판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내가 죽는 거예요. 죽으면 심판의 대상도 없어지죠. 심판의 대상도 없어지면 죽음이란 행위자체가 소멸되고 없어지는 겁니다. 사람이 노리는 게 그거에요.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이 말이죠.

어제 제가 어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몇 사람이 중국집 와서 ‘나는 교회 안 간다. 나는 자유인이다.’ 바로 그겁니다. 자유인. 그러니까 다른 것은 허용되었지만 선악과는 허용되지 않았잖아요. 허용되지 않은 하나만 제거해버리면 그걸 없애버리면 그러니까 선악과 뿌리 밑둥치를 잘라버리면 나머지는 허용이 되지요. 허용이 될 때 그걸 자유라고 보는 겁니다.

비록 안 믿는 사람뿐만 아니고 믿는다고 우기는 사람에게도 같은 이야기하는데 당신이 교회 나오고 예수 믿는 본색이 뭐냐? 본색이 말씀으로 들킨 적이 있느냐? 그 사람은 들킨 적이 없다고 우기는 겁니다. 매 설교에 들키면서. 늘푸른교회 목사님 설교하시면 교인들 늘 들킵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절대로 들켰다고 하지 않죠. 당당하죠.

왜? 들켜버리면 자기는 목사의 종이 되기 때문에 간섭을 받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선악과 잘라버린 그 심보가 그냥 가만히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나에게 잔소리해.’ 목사든 장로든 잔소리하면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내 앞에 얼쩡거리면 죽여 버리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이 말이죠. ‘너는 목사만 해도 교인만 키우고 헌금만 나오면 되지 나한테 간섭만 하지 마라.’ 이 말이죠. 이게 교인들이 처음엔 본색이 안 드러나도 장로가 될 때 비로소 자기 본색을 드러내요. ‘그만 키워라. 많이 먹었다.’ 이것 아닙니까.

오늘 테마가 전쟁입니다. 내가 나하고 전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말씀으로 있는 나와 버티는 나와 버티지 말라는 나와 나가 전쟁을 벌이는데 왜 그렇게 전쟁을 해야 하느냐 하면, 그래야 우리 몸이 성전이 되기 때문에. 성전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관이 성전이에요. 이것도 옆에 있던 신학박사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해요.

성전은 전쟁을 했기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 손으로 지으신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도행전 7장에 나옵니다.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 나오죠. 도무지 이 사람은 둘 다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런 걸 보고 ‘통전적’으로 해놓고 괄호 열고 물음표 해놨다고. 통전적이라 하면 자존심 또 상하거든요. 통전적 아닌 비스무리한 통전적(?)이라고 모독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지으신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하니까 기존에 있는 모든 한국교회 예배당이 성전 아닌 게 되니까 그 사람이 지교회에서 지적받는 거예요. 그 말 차마 못하는 거예요. 출애굽기 15장에 하나님의 전쟁에서 승리한 게 뭐냐? 하나님은 용사시니 나오고 그 마지막 대목이 뭐냐? 하나님은 자기가 구원한 자의 성소를 이룬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강의 해봅시다. 지금 침멀리의 내용이 억수로 부실해요. [여호와의 전쟁과 승리]가 굉장히 부실한데 왜 부실하냐 하면, 이 사람이 가장 오랜 된 찬미에서 “너희는 야웨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이래 돼있죠. 이게 잘못이에요. 출애굽을 가장 큰 제일 먼저 있었던 전쟁기사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보는 이유는, 창세기를 모세가 자기 사견으로 편집했다고 보고, 모세 사견은 모세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에서 나왔다고 본 겁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모세는 출애굽 시대, 그런데 모세 이전의 창세기 전체는 모세가 썼다. 모세가 글을 쓸 때는 모세의 인격적 삶의 정황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출애굽기에 있는 모든 사상은 출애굽 사상을 반영할 것이다. 지금 구약 전달 그렇게 하거든요. 하기 때문에 제일 처음의 전쟁개념은 출애굽기 15장 21절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때 모세가 경험했기 때문에 자기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했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게 뭡니까? 결국 모세의 주관이 하나님의 객관과 혼합이 되어서 하나의 진리로써 해줘야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말씀은 한다는 자기 논리에 부합되거든요.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사용하되 인간을 죄인으로 사용한다는 기본 논리를 거부하는 거예요. 인간을 죄인으로 사용한다고 안 하고 죄냐, 아니냐를 유보하여서 중립으로 본다는 거죠.

교인들이 교회 올 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어떤 죄입니까?’라고 묻는 식으로 교회 안 오잖아요. 오히려 반대로 되잖아요. 인간은 중립도 안 돼요. ‘하나님, 교회 나오는 자체가 얼마나 훌륭한 태도입니다. 이 훌륭함에 복 주옵소서.’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선과 악 그 사이가 없어요. 선과 악 중에서 조금이라도 선이 많으면 자기를 의인으로 보고, 조금이라도 악이 많으면 자기를 죄인으로 보는데

나중에 그것도 사실은 죄가 악보다 많아질 수가 없죠. 왜냐하면 아무리 유괴범이라도 항상 핑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기본은 핑계를 대서 죄도 악의 경계로 다 넘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의인으로 자처합니다. 이 성질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돼요. 이건 고쳐서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 나온다고 인간 되는 게 아니에요. 뭘 해도 전부다 자기 의로움을 내세우려해요. 그걸 목사가 건드리면 교회 안 나옵니다.

이미 이 주관 자체가 예수님의 주체와 대결 일어나죠. 그렇다면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그들을 목이 곧은 백성으로 들춰나야 돼요. 그야말로 신약성경에 죄인 중의 괴수로 목이 곧은 백성으로 드러나야 돼요. 자비와 긍휼과 합해서.

재미있는 것은 이런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순서가 뭐냐 하면, 왜 자비와 긍휼만이 구원되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죄를 차후적으로 들춰내는 방식으로 말씀을 주신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430년 후에 모세 언약이 가 있는 겁니다. 이미 아브라함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행함이 아니냐를 먼저 보여주고 왜 경건치 않은 자가 경건케 되며, 악한 자가 의인이 되느냐를 그 근거를 아브라함 언약에 두고, 그 다음에 너희들이 악하고 경건치 않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 언약을 줘버린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돼버리면 처음부터 자비와 은혜를 받은 사람과 자기가 자비와 은혜를 쟁취하려는 사람과의 구분돼야 되겠죠. 남은 자와 남은 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사람과의 차이. 남은 자 되려고 시도하는 주체가 구원받는 본인이 되지만 긍휼과 자비로 남은 자 된다면 자기 주체는 잘라지고 남은 자 되게 하는 자비는 다른데서 흘러 들어와요. 그럼 주체가 누굽니까? 저쪽이 주체가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남은 자 개념은 천국 가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 뜻이 돼요.

‘내가 왜 남았지?’라고 묻는 것과 ‘주여, 남은 자 되려면 뭘 해야 됩니까?’ 묻는 것은 완전히 다르잖아요. 완전히 180도 다른 문제라니까요. 교회가 되는 것과 교회 되려고 애쓰는 것과 완전히 정반대로 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게 잘못됐다고 보는 겁니다. 뭐가 잘못됐느냐? 출애굽할 때 모세의 주관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주관, 이삭의 주관, 야곱의 주관이 들어와야 된다는 거죠. 그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거든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건 죽어도 산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죽어버린 아브라함하고 이야기고, 죽어버린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죽여 버리고 언약에 의해서 죽은 아브람을 상대하지 않고 살아있는 아브라함하고 상대하죠. 사라의 태가 살아있을 때는 사라는 어떤 어미도 될 수 없어요. 사라의 태가 죽었을 때 비로소 엄마가 돼요. 누구 엄마입니까? 약속의 자식을 낳는 엄마가 되죠. 그래서 여자의 뱃속에 들어갈 수 있죠. 마리아와 요셉과 동침하기 이전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리아는 여자의 후손에 합치되지 못합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왜 하나님 언약 아래서 사람이 죽은 자가 될 수 없고, 산 자가 돼야 되는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야곱도 사실은 죽은 자라 할 수 있죠. 어떤 경우에만 야곱이 있느냐 하면, 한 대 얻어맞은 김대중처럼 지팡이 쥐고 저는 그 모습으로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여 놓고 일하죠. 살려서 일하지 않습니다. 죽여 놓고 일해야 그 인간이 앞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 값에 해당되는 사람인 것을 증명하게 돼있습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내가 너를 값 주고 샀지요. 피 값으로 산 거잖아요.

그렇다면 그 남은 생애는 자기 자신이 살았음을 위해서 살 수 없고 피로 말미암아 공짜로 살았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서 계속 언약적으로 다루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피 값이 되려면 죽어가고 있는 우리 내부에서 그런 전쟁이 이미 이뤄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주체가 모세의 주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세 안에 싸움이 일어나죠. 모세에서의 싸움이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가 하나님 일 하려고 애굽에 갔을 때 갑자가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죠.

하여든 성경에서 중요한 대목이 요나가 자살하려는 것과 모세 죽이는 건데 신학자들이 다 뺐어요.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 갑자기 이 대목이 들어와서 흐름을 깨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니 흐름이 잘못됐어. 자기 흐름이 잘못돼놓고 자기가 생각한 흐름과 안 맞는다고 손 떼버리는 거예요.

왜 모세의 아들을 죽입니까? 그건 모세의 아들을 죽이는 게 아니고 모세의 가정을 죽이는 거예요. 모세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십보라라는 부인은 모세 가정을 살리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어버립니다. 할례를 행해서 모세 발 앞에 던짐으로써 모세와 아들과 연결이 아니라 모세와 할례 언약과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모세의 가정처럼 그런 가정사가 똑같이 벌어지는 한도 내에서 그들은 출애굽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보면 공통점이 할례를 다 행했죠. 유월절에 할례 행하지 않으면 유월절 될 수가 없어요. 피 뿌려도 안 돼요. 할례 행한 자에 한해서 피를 뿌리고 그 다음에 하게 돼있어요. 그것은 인간을 구원함이 아니라 할례 언약이라는 자체를 안에 있는 언약을 역사로 구체화시키는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의 미끼였고, 하나의 인화지였고, 하나의 사진판이었고. 그 사진판의 사진은 어린양을 찍히기 위해서 인간은 할례를 행해야 했어요.

이 말은 뭐냐? 주께서 주에게만 이야기해요. 주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주께서 주에게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조가 하나님의 형상 중심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게 통일되기 때문에 에베소서 1장 10에 의하면. 주님께서 예수님에 통일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처음부터 언약 위반자로 만들었단 말이죠. 그런 가운데서 말씀을 줘버리면 말씀성취는 하나님이 누구한테 한다?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이름에게 한다. 그래서 전에 이름과 형상의 관계에 대해서 글 썼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 이름에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깨어진 돌판 그러니까 복제판, 원판은 하나님이 갖고 있고 그 복제판에 하나님 이름이 임재하죠. 복제판 담긴 상자 위에. 거기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 그 연기를 하나님이 흠향하시고 맛있게 마시는 거예요. ‘아아 그 냄새 좋다.’

이런 이야기가 모세에서 나왔다 하는데 모세에서 나온 게 아니고 이미 창세기 8장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께서 노아 방주 이후에 하나님이 흠향하시고 인간이 생각함이 처음부터 어릴 때부터 악한 것을 아시고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뭐하고 연결돼있다? 바로 정결한 짐승을 흠향하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것이 레위기에 가면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있는 제단 중심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뤄지는 자기 실적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 하시는 실적을 보고 기뻐하시지 우리 보고 기뻐하시는 게 아니에요.

무지개 은혜가 유지되는 것은 무지개가 떴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밑에 있는 피 흘림,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에 대해서 전에 있던, 땅에서 저주가 올라온 이유가 뭡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그 피가 올라왔죠. 옛날에 노아 홍수 이전에 있던 피 흘리는 사건을 되풀이하지 않을 경우에만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그동안 있었던 자연에 있던 은혜의 모든 체계가 요한계시록에서 지진이라든지, 천장에 있는 모자이크 그림 무너지듯이 모세 언약에 의해서 수놓았던 모든 모자이크들이 조각조각 파편 되면서 우리 머리 위에 다 떨어지죠. 그러니까 밑에 있던 사람들, 종이나 자유자나 뭐라 합니까? 자기를 지켜주는 모든 자연이 떨어지니까 바위에 숨어서 ‘제발 자기를 지켜 달라’ 하잖아요. 살아남으려고. 바보같이.

그러니까 위에서 쏟아지니까 바다에서 깨지고 위에서 깨져 지진이 일어나니까 아래위로 다 박살난 거죠. 결국은 인간의 대자연은 연극의 세트였습니다. 이 세상은 환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 생명나무도 세트였습니다. 인간은 세포로 돼있다고 과학자가 하잖아요. 흙으로 돼있어요. 세트가 연극이 끝나고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죠. 네가 바다에 갈지라도 신을 떠날 수 없고 우리는 거기서 하나의 연극 세트로 만들어낸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보면서 솟구치는 욕망에 의해서 새로운 악마의 면면을 보여주니까 그걸 지난 주일날 설교에서 애벌레 자아, 구더기 자아. 어느 자아가 어떤 자아인 줄 몰라. 하지만 그 자아가 크면 내 자아가 되는데 사건이 오게 되면, 그 사건에 반응한다고 해서 이쪽 사건, 사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자아 중에서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서 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의 막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그 막을 말씀으로 찢어버리죠. 울컥하고 먹물이 쏟아지듯이.

그러면 전쟁의 최초는 어디서 생겨나는가? 이거는 여러분 잘 아십니다. 전쟁은 이미 야곱 언약 때 아브라함에서 이삭 나올 때 이미 패가 두 패로 나눠졌잖아요. 축복, 저주죠. 축복, 저주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어떤 전쟁을 경과하고 난 뒤에 그 전쟁에 의해서 하나님 편과 악마 편에 나눠질 때 하나님 편에 서는 걸 축복이라 하고, 악마 편에 속한 것을 저주라 하지 않습니까?

이게 아브라함 때부터 갈라진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두 노선, 언약 노선이 나왔죠. 하나는 사라고, 하나는 하갈. 두 여자는 두 여자가 아니고 두 언약이다. 여자배우의 연극이었어요. 언약을 보여주는 하나의 연극배우가 사라와 하갈이었죠. 그런 내용을 인간이 자기 주관적으로 성경말씀을 보니까 인간이 그 말씀을 알 수가 있습니까?

전쟁이 군대적인 것은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침멀리 글에 대해서 내가 많이 반대하는 이유는 창세기의 이런 내용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말이죠. 32장 1절에 보면,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였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군대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가 인간입니까, 천사들입니까? 천사들이죠. 천사들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들에 속해요. 그렇다면 여기 하나님의 군대와 야곱의 만남은 결국 야곱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12장에 나오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라. 하나님의 군대라면 이스라엘의 기존의 시간 역사는 중단이 돼버리고 어떤 역사로 도약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역사로 도약하게 되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할 때를 첫 달로 하죠.

이걸 울산 공부할 때는 정지화면이라 했지요. 두 자로 하면 묵시. 정지화면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스톱 돼 있잖아요. 시간이 흘러도 정지화면은 안 변하잖아요. 하나의 구조로 보여주는 거예요. 구조가 언약이 되어서 계속해서 그 뒤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역사의 기준을,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하나의 해석의 기준이 정지화면으로 하는 거예요.

‘첫’이 있으면 둘이 있는 게 아니에요. 첫 달은 둘째, 셋째, 넷째를 지배하는 지배적인 시작 단위가 되는 겁니다. 제 말이 어렵습니까? 민수기에 보면 나오죠. 양을 열 마리 째마다 한 마라 가둬두면 그거는 십일조 양이 되죠. 십일조 한 것과 다른 양과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십일조 양은 어디서 잡느냐 하면, 제사장이 잡아요. 십일조로 제사장 드리기 때문에 그들이 먹을 수도 있고.

그러면 첫 번째 양은 존재하는 자리가 달라요. 열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하고 나머지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것하고 일대일로 대응하는 게 아니고 이것 하나하고 2, 3, 4, 5, 6 ... 10 전체하고 대응한다 이 말입니다. 이것 하나를 저를 보편적 단독성이라 하는 거예요. 이 한 마리에 두 번째, 아홉 번째 모두가 운명이 결정돼요. 이게 십일조, 맏아들이에요. 로마서 8장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상대해요. 항상 이걸 잊지 말아야 돼요. 한 사람만 상대해서 언약을 주지요. 주님은 주님만 상대해요. 그분은 주님의 이름이에요. 주와 주를 갈랐다는 말은 거기에 들어왔다? 죄가 여기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죄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주와 주가 갈라져요. 그리고 예수님의 주는 죄인의 자리, 무슨 자리? 십자가에 죽으심이고 그리고 이 주님은 하늘에 있고. 아들을 죽게 하고, 아들을 내어주고. 이분은 아들을 내어주신 분이고, 이분은 아들이고.

이 사이에 있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연극무대는 남은 자 그러니까 긍휼을 입은 자와 긍휼을 입지 못한 자의 구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원래 창조했던 속성을 피조물로서 창조의 주 되심을 보여주는 역할로써 지옥 가는 자나 천국 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전쟁이라 하는 것은 이 내부에서 주님이 여기에 오는데 있어서 악마가 달려들겠지요.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 나오는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누구한테 오느냐 하면,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해서 하나님 언약이 있는 백성과 언약이 없는 이방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오는 메시아 이걸 왕이라. 다른 말로 별. 우리 별이 함께 있다. 왕이 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누구시뇨.

제가 어디서 그런 이야기했죠. 별이 베들레헴에 바로 뜨면 되는데 왜 베들레헴 시민이 아닌 동방박사에게 별이 떴으며 왜 따라와야 되면 첫 번째, 두 번째는 뭐냐? 별이 계속해서 베들레헴에 바로 가면 되는데 예루살렘 거쳐서 별이 사라졌다가 등장해야 되느냐?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별이 사라짐과 등장함이 장차 유대인의 왕이 이 땅에서 가야 될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고 동방박사는 그 뒤를 따라감으로 동방박사가 그 왕의 백성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동방박사 돌아가는데 그냥 점잖게 돌아갔습니까, 혼나고 돌아갔어요? 천사가 아니었으면 죽었습니다. 그만큼 주님 따라 가는 길이 위험해요. 베들레헴 애는 다 죽었지요. 그때 베들레헴 애는 누구 자식입니까? 라헬이죠. 라헬의 남편은 호세아에 의해서 애굽에 가있어요. 애굽에서 불러낸 거예요. 이스라엘은 지금 애굽에 가있고, 자기 부인과 자식은 베들레헴에서 다 죽어버리고. 전쟁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애굽에서 빠져나와서 죽어버린 자기 백성을 십자가 부활로 되살리는 그런 시나리오를 가지고 주님이 이 땅의 일평생을 다 지배하겠죠. ‘걱정하지 마라. 죽어도 산다.’ 그 산다는 의미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삶이죠. 우리는 밥 먹고 사는 걸 사는 걸로 보지만 주님께는 생명나무 따먹는 것만 사는 걸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기존에 있던 떡으로 먹던 인생은 죽어 마땅해야 되죠. 그래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이유는 만날 떡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 겁니다.

죽어 마땅해야 다시 말해서 내가 산다는 의식을 순간순간 우리는 별이 사라져서 답답해 할 때마다 우리가 오직 떡 없이 사는 그 삶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2초나 3초 동안 가끔은 거기에 대해서 볼 수 있는 그런 창이 열리죠. ‘주여, 죽여 버리소.’ 만날 하는 이야기가 ‘그만 살랍니다. 나는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런 소리하다가 옆에서 돈 이백 만원 주면 고맙다고 해서 더 살랍니다 하고.

모든 개념을 다 예수님 중심으로 바꿔야 되죠.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오면 다윗 언약 같은 경우에는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윗이 재림합니다. 저는 다윗 재림이란 말은 어느 신학자한테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에스겔서 보세요. 분명히 있지요. 에스겔 37장에. 장차오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보내시리니 다윗이 와서 이스라엘 왕 노릇하죠.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의 근거가 뭡니까? 구약 때 이미 다윗이 재림한 것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 재림하는 거예요. 만약에 다윗 재림을 이해 못하면 아무리 예수님의 재림 이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왜 예수님이 재림해야 되는가? 구약의 다윗이 재림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재림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다윗이 왜 재림해야 되는가? 물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재림하는 거예요.

에스겔 37장 24절.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이미 다윗은 죽은 사람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봐서 다윗의 재림을 기다리죠. 그런데 26절 봅시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내 성소를 그들 가운데 세우죠. 이 성소가 뒤에 보면 물이 흐르는 새 성전이죠. 세상에 이 이야기를 적어놓으니까 옆에 있는 교수가 새 성전을 여기서 왜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무조건 모르겠다는 거예요.

구약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그건 가해자에요.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모든 종교의 종교심에서 나와요. 삼신할머니한테 물어봐요. 하나님 어디 있는지.

없는 성전을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만드는 겁니다. 다윗이 재림해야 돼요. 다윗은 죽을 때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성전으로써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하 7장에 보면, 하나님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은 무슨 성전이었습니까? 다윗의 가문이었어요. 다윗의 가문이 죄로 말미암아 망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재림은 관점이 뭐예요? 성전 재건이에요. 성전 재건은 무너진 성전과 다시 재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70이레가 필요한 거예요. 7이레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자기 할 일을 해야 돼요.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어떤 짓을 한 걸 해야 돼요. 그게 뭐냐? 성전 세우고 62이레 지나면 밑에서는 톨레미 위에서는 셀루쿠스 왕에 의해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완전히 다 부서지죠.

세울 때는 자기 마음대로 못 세우고, 깨지기 위해서 헬라나라 짐승이 있어야 되고. 세우는 것도 짐승에 의해서 세워야 되고, 깨지는 것도 짐승에 의해서 깨지니까 그 다니엘 이후에 보편적 단독성은 이스라엘 아니고 큰 성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니의 보편적 단독성. 깨지고 난 뒤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성령에 의해서 지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성령은 누구한테 오느냐 하면, 재림 때 다윗이 왔을 때 성령을 몰고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에서 제사하지 않고 성령에 의해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했거든요. 진리와 영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 이 말이죠.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모두 다 연극무대라 했어요. 그걸 히브리서는 모형이라 했어요. 모형이고 그림자라 했어요. 우리도 하나의 그림자에요. 그림자라 하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100편에 나오죠. 우리는 하나의 그냥 그림자 같이 분요하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느냐 하면, 위에서 흔들어줄 때 그림자가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림자가 단독적으로 생각하면 위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왜 이걸 좋아하고, 기타를 왜 쳐야 되고, 내가 농사를 왜 지어야 되고, 내가 목사를 왜 해야 되고, 이것은 위에서 그림자가 하는 거예요.

노아는 왜 방주를 만들어야 되고 아브라함은 방주 왜 안 만들죠? 노아는 방주 만드는 그림자고, 아브라함은 나그네 될 그림자고,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되어야 할 그림자고, 이사야는 톱으로 켜야 될 그림자고. 각자각자 달라요. 그때그때 달라요. 그래도 힘내라고 많은 허다한 증인들이 먼저 골인지점에 도착한 사람들이 박수치잖아요. 모태범 금메달 따고 난 뒤에 이상화 할 때 박수치잖아요. 자기는 땄으니까. 김연아할 때 응원해주고 참석해주고.

김연아 금메달 따고 난 뒤에 울면서 하는 소리가 있지요. ‘이젠 다 끝났다.’ 그게 십자가 이야기에요. ‘다 이루었다.’ 퍼펙트, 완료에요. 미완료라는 게 없습니다. 완료기 때문에 우리는 쓰레기처럼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논문의 마지막 결론에 나와 있지요. 그런데 자꾸 인간들이 미완료라 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 주체를 포기 못한다는 거예요. 남이 부럽고.

이것만 하고 10분 쉽시다.

다윗이 재림하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냥 사람들 복 주려고 오는 게 아니고 깨어진 성전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데 성전에 하나님 이름이 있어요. 하나님 이름을 주로 높이기 위해서 성전을 세울 때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다 이걸 그대로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해석하려면 구약의 이 구조를 충분하게 그림자를 분석을 해서 이것이 왜 죄 때문에 미완료며, 이것이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할 때 예수님과 구약이 매치가 되는 겁니다.

구원, 복, 땅 개념, 옆에 옆에 있는 어떤 약간 늙수그레한 사람이 ‘땅 개념이 왜 연결 안 됩니까?’ 하거든요. 신약에 가면 예수님에 의해서 땅 개념이 바뀌면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어느 게 땅이에요? 하늘의 땅이에요. 그걸 옆에 있는 구약학자 또 모르는 거예요. 그들이 소리할 때 내가 다 귀담아 들어요.

땅 개념이 예수님에 와서 바뀌어요.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 새로운 땅,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모든 성경해석은 예수님의 일평생에서 나와야지 그걸 거쳐서 성경말씀을 나하고 연결시키면 안 돼요. 내가 원하는 걸 연결시키면 성경해석 다 엉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는 누구냐? 하나님이죠. 네 아비 장례 지내지 말고 너는 날 따르라. 구원이 뭐냐? 모든 것이 예수님한테서 나와야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되는 건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124.♡.86.6)

10-03-16 19:45

부산100309b침멀리04구약신학-여호와의전쟁과승리b

20100309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4-여호와의 전쟁과 승리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32장에서 천사가 군대죠. 천사가 군대라면 이스라엘은 군대 되잖아요. 이스라엘은 전쟁해야 되니까. 그러면 그 원판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찾아볼 수 없지요. 이스라엘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전혀 자체 내에서 계획을 잡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성도가 ‘하나님 이렇게 살고 싶다’고 하나님께 요구할 자격이 전혀 없는 거예요. 성도의 갈 길, 모든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미 위에서 결정 난 겁니다. 그 결정 난 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됐다.

그러면 앞으로 내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면 사는 보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사는 보람은 간단하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죠. 은혜 되기 위해서는 평생을 살면서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죄를 아는 즐거움.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구나.’라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즐거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알 때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한 순간에.

그렇다면 바로 이렇게 아름다울 때 형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요한일서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지요. 야고보 이야기는 4월 달에 해야 되는데 미리하면, 야고보서에서 행함이라 하는 것은 ‘형식 만들기’입니다. 형식 만들기에 우리가 동원된 거예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의 행함이 주께서 하나의 법 체제, 하나님의 은혜 체제를 우리를 통해서 윤곽이 잡히도록 바깥에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목적이 자기 구원하는데 있으면 이런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목적이 내가 쓰임 받는다면 뭘 해도 그것은 바로 행함이 되는 거예요. 그 예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죠. 기생 라합이 거짓말하죠. 이 아이디어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아브라함 본인 아이디어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런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 윤곽이 없으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 형식이 바깥에 안 드러나겠지요. 안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 형식에서 비껴나 있는 그런 사람에 해당돼요.

그래서 지난 주일날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깔때기 이야기했는데, 말씀이 하나 있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이 한 말씀 안에 다 담겨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 말씀은 어기면 모든 말씀을 다 어긴 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관심사도 아니고, 이것은 이스라엘 관심사도 아니고, 마하나임의 관심사도 아니고 이것은 위에 계신 분의 은혜와 자비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로서만 활용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은혜와 자비를 주시는데, 수제비 예를 잘 들었는데 그게 적당해서 그래요. 아직도 생각나는데 그것만큼 더 적당한 게 없어요. 수제비 덩어리 해놓고 냄비의 펄펄 끊는 물에 떼어 넣잖아요. 여기서 한 부분이 돌출되죠. 이 돌출을 제가 서론부분에 이걸 주체라 했어요. 점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떨어지고 떨어져서 똑 떨어질 때 비록 떨어졌다할지라도 나는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알고 떨어지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떨어지고 난 뒤에는 원래 본질을 몰라라 하면 어떻게 돼요? 여기서 이웃 사랑이 안 나오죠. 왜? 자기가 자기 사랑밖에 절대적이니까. 그래서 똑똑 떨어져도 우리는 한 몸, 한 지체라는 걸 안다면 떨어져도 같이 떨어진 사람을 형제 사랑할 수 있겠죠. 형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고 이렇게 설명된다 말이죠.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사명 때문에 돌출된 주체란 말이죠. 주체가 있고 나라는 게 있고 사명 받는 게 아니고 목사로 살겠다 이게 아니고 이미 삐져나온 의도가 나를 증거함이 아니라 전체 증거하기 위해서 삐져나온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도로 가고 싶다고 안 합니까? 내 소원은 쓰레기처럼 사용되다가 도로 가고 싶다. 스데반 집사도 나왔다가 도로 가고 싶다.

신약에서 사람들이 질문하는 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 명령하고 권면하고 있는데, 왜 이 목사는 구원론만 천착하고, 집착하고 왜 윤리 이런 것은 그냥 넘어가느냐? 그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론 자체도 잘못이에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와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무슨 구원론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명감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이루는 것뿐이에요. 거기에 무슨 구원론이 있어요. 항상 성경을 예수님이 어떻게 했다고 비교해야 될 텐데 이걸 빼놓고 심지어 예수님만 이용하려고 하니까 ‘이제 구원론으로 구원은 받았고. 다음엔 착한 일 해서 보태서 영광 돌리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개인의 주체가. 그래서 논문에 주체라는 것을 핵심적으로 집어넣어 들어간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예요. 하나님과 같은 분이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것처럼 우리도 창세전에 예정된 자로서 이 땅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도로 가면 돼요. 고무줄 달려서 손만 놓으면, 강도가 와서 죽여 버리면 도로 원상복귀 됩니다. 그 강도는 천사였어요. 그냥 돌아가는 겁니다.

이런 게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안 보이니까 이것이 눈에 보게 보면, 전체가 서론부분에 나와 있어요. 힘의 축적이죠. 자기 주변에 힘 있는 자들은 끌어 모아서 그것으로 살고자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힘만 보여요. 말씀은 눈에 안 보이게 돼있어요. 보이는 힘과 안 보이는 말씀이냐? 사람은 떡이라는 힘이냐, 아니면 말씀의 능력이냐? 평생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싸우고 있죠. 힘이냐, 말씀이냐?

이 설교해서 괜찮은 교인 몇 명 들어와서 이 교회가 유지되는데 힘 되느냐, 아니면 이 설교 자체가 말씀에 합당하냐? 그 싸움이 설교자의 싸움이에요.

그러면 천사가 전쟁을 하게 되면, 여호수아 봅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여호와 전쟁이 뭐냐 그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 5장 1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칼은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전쟁할 때. 전쟁은 누가 합니까? ①여호수아, ②백성, ③천사. 천사가 하는 거예요. 마하나임 했잖아요.

아까 이야기 안 했지만 야곱의 머리 위에 사다리 왔다갔다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천사들. 야곱 구원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전쟁에 야곱과 그 후손들 증인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전쟁이 ‘붙여주시는’ 전쟁이에요. 전쟁의 핵심은 붙여주는 전쟁입니다.

제가 여러분한테 말도 안 되는 질문할게요. 전봇대에 영화포스터를 붙였습니다. [아바타]를 붙였다. 그렇다면 이 전봇대 역할은 뭡니까? 전봇대와 영화의 관련성은? 없지요. 전봇대는 전기를 이동하기 위해서 세운 건데 그냥 극장 관계자가 아바타 포스터를 붙인 거죠. 그럼 사람들은 전봇대를 보는 게 아니고 아바타 보는 거예요.

로마서에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느냐 하면, 은혜에서는 행함이 안 나오게 돼있어요. 은혜에서는 믿음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전봇대가 행함이라면 아바타는 은혜에서 나왔기 때문에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 떨어지면 행함만 부각하게 돼있고, 믿음이 들어오면 자기 행함이 죽어요.

행함이 죽어 버리면 윤리, 도덕은 없어요. 성도한테 윤리, 도덕이란 없습니다. 뭐만 하면 됩니까? ‘나는 아바타를 믿는다.’ 이것만 하면 돼요. 이게 만약 십자가라면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주께서 십자가란 포스터를 알리기 위해서 그냥 평생 나를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언제가 십자가 포스터가 바람에 날아가 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자기 행함밖에 남는 게 없어요. 행함밖에 남는 게 없으니까 천당은 가고 싶어서 사도 바울의 윤리와 도덕 찾고 있는 거예요. ‘하라’하는 걸 왜 하지 마라 하느냐? 그래서 저는 설교시간에 그랬잖아요. ‘제발 죄를 지으세요.’ 욕심 좀 내라고. 욕심이 잉태하니 죄를 낳으니까 욕심 좀 내라고.

만약에 성도 같으면 뭐만 보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아바타만 믿습니다.’ 이렇게 되겠고, 성도가 아니라면 어떻게 합니까? ‘나 이 목사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지옥 가도 내 책임 없어.’ 이렇게 나오죠. 처음부터 그 사람은 아무것도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할 때 정말 만약에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들통 나겠지요. ‘난 이 목사 시키는 대로 나쁜 짓해도 구원받는다. 이 목사 시키는 대로 나쁜 짓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것 봐. 당신 주체밖에 안 나오잖아.’

그 주체밖에 없는 인간들을 교회다가 돈 주고 끌어 모아서 ‘여러분, 바르게 사시오. 말씀대로 사시고 십계명 지키시오.’ 이렇게 나오니까 아바타란 포스터도 없으면서 목사 시키는 대로 흉내 내기만 하면 마치 신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으니까 그럼 차라리 욕심내시고 죄를 지라 이 말이죠.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죠. 애벌레 자아를. 실컷 착한 일 하다가 사건 하나 일어나면 자존심 다 튀어나오고. 믿는 게 어디 있어요. 그동안 자기를 위해 살았지.

여호와 전쟁의 개념이 슬슬 윤곽이 잡히지요. 결국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이스라엘을 참여시키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죠.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그냥 전봇대에 불과한데 단지 포스터 하나 붙였다는 이유 때문에 전봇대도 구원받는 거예요. 포스터가 뭐냐?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전쟁은 언약대로 이뤄지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이 전봇대란 이스라엘 속에 어떻게 임재 되느냐? 바로 언약 상자니까 언약궤가 가는 곳에 적들이 굴복당합니다.

이게 땅에 정착되고 난 뒤에 사무엘상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 언약궤가 뭐로 발전하느냐 하면, 서서히 어떤 인물이 돼요. 이 대목이 아주 어려워요. 논리적으로. 언약궤와 함께 있던 분이 어떻게 해서 전에는 언약궤가 움직였잖아요. 언약궤가 바퀴 없지요. 그럼 언약궤를 사람이 들어서 움직인다고. 언약궤를 들 수 있는 그 당사자의 일평생이 이제는 언약상자라 할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언약 개념으로 전환됩니다. 그게 바로 모세 언약에서 인격 언약인 다윗 언약으로의 전환입니다. 그 가운데 여러 사건 터지지요. 언약궤가 도리어 빼앗기고 맙니다.

침멀리에도 나오지만 재미나는 것은 언약궤를 빼앗겼잖아요. 언약궤를 빼앗은 자가 언약궤 위에 지배하는 위치에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블레셋 군대가 언약궤를 분명히 잡아놨는데 언약궤 가는 곳마다 재수가 옴 붙었어. 재수가 없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장차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가 가족이 예수 믿고, 남편이 예수 믿고, 아내가 예수 믿고, 아버지가 예수 믿고, 자식이 예수 믿고, 주변이 온 처가 쪽이 목사 가정이고 해서 교회 다니면 구원되는 줄 아는 사람들, 창세전에 이름이 기록되지도 않은 인간이 주변의 기독교 분위기에 휩쓸려서 모태에서 세례 받아서 그렇게 한 사람, 결국 뭘 감당 못해요? 언약궤를 감당 못해서 핍박하는 식이 되죠.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유대인이죠. 누구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창세전에 기록되지도 않으면서 자기 아비가 마귀면서도. 제가 서울 가서 화났던 것이 용어 하나만 집으라면, ‘너희 아비는 마귀이다.’ 은혜라 했어요. 생각 못했는데 나왔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맞잖아요. 바리새인.

그래야 구약의 말라기와 세례요한 이후에 계시가 없는 걸 악마들이 짐승들이 역사적 해석법으로 다리를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다. 계시 없이 인간 쪽에서 만든 계시. 그걸 그들은 헤롯 성전 유지해서 헤롯 성전 중심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부과 그게 모든 시중에 나온 구약신학입니다. 계시는 떨어졌지, 남은 자에 대해서 잇기는 해야 되겠지 그래서 남은 자 잇는 것이 유대인들을 정당화시키는 거예요. 대표적인 사람이 샌더스에요.

논문과 관계없잖아요. 성경하고 관계있잖아요. 성경하고 관계있어야지 주님이 함께 있는 자는. 논문하고 관계없어도 괜찮아요. 성경과 관계있으면.

마귀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쥘 때 이게 안 쥐어진다는 거예요. 안 쥐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그쪽은 가해자가 돼야 되고, 진짜 하나님의 언약궤 되시는 분은 피해자가 돼야 되는 거예요. 피해자가 되고 죽게 되면 모세 언약에 의해서 언약궤답게 유지했던 게 뭐냐? 아침, 저녁 어린양의 피를 발랐잖아요. 어린양의 제사 드렸잖아요. 세상 죄를 진 어린양이 마귀들의 도움으로써, 가룟 유다의 도움으로써 협조 하에 실패하는 양상으로 성공을 해버렸어요. 말씀이.

그래서 목회 성공은 목회 실패를 통해서 성공하는 법입니다. [기독교 허상]이란 책에 나와 있어요. ‘목회자여, 실패의 길로 가거라.’ 그게 목회자 구원의 길입니다. 매일같이 실패에요. 매일같이 설교에 실패하고, 심방에 실패하고, 기도에 실패하고. 그런데 그게 모아 놓으면 유일하게 목회 성공이에요. 주님 가신 그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전쟁이라 하는 것은 언약대로 이뤄집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여호수아에 나오지요. 언약대로 이뤄진다는 것은 언약대로니까 축복과 그럼 축복만 완성하면 전쟁이 아니죠. 반드시 저주받아야 하는 게 드러나야 전쟁 중인 걸 알고 있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저주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8,817 우리교회 [주보] 무시당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3-14
8,816 우리교회 삼하 12:15-23 (내게로 돌아오지 않음) 사무엘하 최고관리자 10-03-14
8,815 설교 누가복음 4장16-21절 제목 : 성령과 이사야 예언 이사야 최고관리자 10-03-14
8,814 우리교회 눅 4:16-21 (성령과 이사야 예언) 이사야 최고관리자 10-03-14
8,813 우리교회 [일반] 생방송 [방송] 최고관리자 10-03-14
8,812 자유게시판 생방송 [방송] 최고관리자 10-03-14
8,811 우리교회 [일반] 70이레 평에 대한 논평: 이준 성도님의 글 다니엘 최고관리자 10-03-14
8,810 자유게시판 복음의회복 복사판 마감 - 최고관리자 10-03-13
8,809 강의 서울 3월12일 가짜 하나님을 믿는것을 매일지적당하는 성도(너희속에 착한일을 시작하신 이) [신학] 최고관리자 10-03-13
8,808 강의 안산 3월 12일 강의 요일 2:27 내 안에 거하라 와 형제사랑 (부분과 전체) 요한일서 최고관리자 10-03-13
8,807 자유게시판 무소유 - 최고관리자 10-03-13
8,806 자유게시판 053강-렘 15장16-21(예레미야의구원)-jer100310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10-03-13
8,805 자유게시판 복음의회복 복사판 - 최고관리자 10-03-12
8,804 묻고답하기 인간 성전 vs 인자 성전 전도서 최고관리자 10-03-11
8,803 우리교회 렘 15:16-21 (예레미야의 구원)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10-03-10
8,802 묻고답하기 구원불가능성과 교회 되기 - 최고관리자 10-03-10
8,801 우리교회 [일반] 구원불가능성과 교회 되기 [일반] 최고관리자 10-03-10
8,800 자유게시판 018강-누가복음 4장 1-4(예수님과 마귀의 만남)-luk100307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3-10
8,799 자유게시판 20100305b 울산강의-출애굽기 11장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0-03-10
8,798 자유게시판 20100305a 울산강의-출애굽기 11장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0-03-10
8,797 자유게시판 동상이몽[同床異夢] !! 로마서 최고관리자 10-03-09
열람 ➜ 강의 부산 3월 9일 강의 침멀리 04 구약신학 - 야웨의 선물 (전쟁과 야웨의 승리) p93 [신학] 최고관리자 10-03-09
8,795 묻고답하기 성령과 이사야 예언 이사야 최고관리자 10-03-07
8,794 우리교회 [주보] 성령과 이사야 예언 이사야 최고관리자 10-03-07
8,793 우리교회 [일반] 생방송 고정주소 [방송] 최고관리자 10-03-07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