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3월 5일 출11장 나를 위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함이라(고후 5:15)
울산 3월 5일 출11장 나를 위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함이라(고후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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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05 출 11장 은혜 베푼자의 분노 (십자가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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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0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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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10 15:13
울산100305a출11장a
2010-03-10 11:29:49 녹취 : 한윤범
20100305a 울산강의-출애굽기 11장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11장 내용은 애굽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다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면 성도 있고 비 성도가 있으면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계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양쪽 다 계시를 비성도의 태도, 성향, 그들이 할 것, 그들이 하게 될 일까지 다 하나님이 계시로 내려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게 될 때 성도는 비성도가 이렇게 비 신앙적으로 나오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쪽으로 이걸 흡수해서 이해해 달라는 거예요. 성도가.
그러면 성도 안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성도 안에는 뭐가 빠지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일에 포함돼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을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구원에 흡수당했다’, ‘거기에 합세하게 되었다’고 되는 겁니다. 첫 번째, 두 번째 구원관이 다르죠. ‘나는 구원받았어. 나는 구원받았으면 됐어.’
우리교회에 그런 분이 있어요. 우리교회 나오시다가 영 안 나오시는 분이 있어요. 나중에 전화 와서 물어봐요. ‘요새 왜 교회 안 나오십니까?’ ‘나, 죄인이고 구원받았으니까 더 이상 교회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이래 나와요. 그래서 얼른 내가 뭔가 잘못 말씀 드렸는가? 나는 그런 식으로 안 했는데 그분들은 비 성도가 어떻게 하는가? 사실은 그런 모습이 비 성도거든요.
비성도가 어떻게 하는가를 더불어 알게 되면, 관심사가 나에서가 아니라 같이 포함되니까 성도의 관심사가 내가 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저를 성도답게, 어떻게 저 사람을 성도답지 않게 하셨습니까?’라는 말씀, 이런 계시 여기에 초점을 두게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뿐만 아니고 새순교회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겠죠.
관심사가 ‘말씀이 이렇게 해서 구원됐구나.’ 이렇게 돼야 될 건데 ‘나는 구원받았는데 뭐.’ 말씀에 관심 없어도 돼요.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말씀에 관심 없어요. 난 원래 죄인인데. 이 목사님이 이야기했잖아. 우린 죄인이라고. 그러니 죄인 할게요. 말씀에는 관심 없어요. 다만 나는 구원만 챙기면 됐어요.’ 그것이 제 설교라든지 성경 자체에 대해서 너무 잘못 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진짜 오랜만에 보는 분이 있어서 두 달 치를 한꺼번에 하려고 하니까 약간 어렵게 되는데. 이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11장의 내용이 이거니까. 그래서 제가 문장을 적어볼 테니까 여러분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지요.
‘살기 위함이 아니라’ 했는데, 만약에 내가 지금도 살고 죽어서 구원받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예수 믿는 것은 나 살기 위함, 죽고 난 뒤에도 살기 위함. 예수 믿는 것도 나 살기 위한 예수가 되겠지요. 예수 믿는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나는 뭐냐 하면, 주인공이 누가 됩니까? 하나님이 영광이 되고 나는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 번, 이렇게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이 번, 이렇게 살아가십니까? 이것은 성경에 나오죠.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분명히 나오죠. 제가 없는 소리 하는 것 아니죠.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나는 살았다’ 까불지 말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함이라. 분명히 나오잖아요. 여기에 두 가지 나오죠. 하나는 ‘나를 위하여’ 나오죠. 두 번째가 ‘나를 위해서 내가 살지 않고’ 세 번째,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함이라’
그러면 일 번에서 삼 번 가면서 중간에 뭐가 변화되었습니까? 첫 번째는 나를 위하여. ‘역시 예수님도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라’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이 내려오면서 구원받은 나까지 뭐에 포함시킵니까?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까지 몽땅 바구니에 담아서 그 전체를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려고 첫 번째, 일 번으로 다가온 겁니다. 이게 바로 출애굽기 11장, 12장의 내용입니다.
출애굽해서 복잡하게 할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구원해줄게.’ ‘아이고.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건 아니고, ‘구원해줄 테니까 구원받은 너희는 더 이상 너 자신을 위해서 사는 인생은 없다.’
그러면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가 아닌 채로 주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 이걸 줄여버리면 예수를 믿는 것은 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 하신 일의 영광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부모님이 ‘예수 믿으라’ 하면 ‘지금은 바빠요. 나중에 편안할 때 믿을 게.’ 자꾸 자기를 위해서 예수 믿으라는 것처럼 오해를 하시는데 우리가 피조물로써 마땅히 해야 될 것을 그냥 할 뿐이에요.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지, 예수 믿어서 뭔가 더 잘 살고 밥 먹고 산다든지 그걸 노리시면 곤란합니다.
여기까지는 쉬워요. 여기서 ‘나를 위해서’ 하는 이것이 출애굽기 11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걸 설명하면서 제가 글을 써보겠습니다. [은혜 베푼 자의 분노] 여러분 이 글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문장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압축을 해서, 응축을 해서 참기름 짜내듯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은혜 베푼 자의 분노에요. 그냥 분노가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경질 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은혜 베푼 자의 분노’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선뜻 안 받아줍니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말과 뒤에 나오는 말 ‘분노’가 잘 엮여지지 않습니다. 은혜를 줬으면 끝까지 은혜를 줘야지 왜 은혜 베푼 자가 분노하느냐? 은혜 베푼 자는 십자가고, 분노는 마지막에 심판하는 거고. 어떻게 은혜 베푼 자가 심판할 수 있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라고 나오는 거예요. 인간들은 은혜 주시려면 계속 은혜 주시지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풀 때부터 이 분노가, 정당한 분노, 이걸 두 자로 공의, 하나님께서 분노할 만해서 분노, 지옥 가도 할 말 없을 정도로. 그래서 은혜 베푼 자의 분노를 실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에 대해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다.
은혜 베푼 자의 분노라면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자라면 분노에서 면제가 돼요. 이 은혜를 알면. 그런데 은혜를 모르면 이 분노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어야 됩니까? 은혜 자리에 있어야 되겠지요. 은혜 자리에 있으려면 쉬워요. 은혜라 하는 것은 뭔가 받는 자리기 때문에 나는 작고, 하나님은 크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분노의 자리에 가게 되면, 내 위에 누가 없어요. 뭐만 있어요? ‘나’만 있습니다.
그래서 11장 내용이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은 애굽인이고. 바로와 애굽인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자기밖에 몰라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훌륭한 사람 아니거든요. 똑같은데 하나님께서 은혜 베푼 자의 분노가 열 번째 재앙으로 주어지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모자를 쓰는 거예요. 그 모자가 뭐냐 하면, 은혜 베푼 자의 분노가 자체가 은혜의 모자가 되어서 전부다 출애굽 나갈 때 모자 하나씩 쓰고 나가는 거예요.
모자 하나씩 쓰고 나오면 그 사람 마음속에 은혜 베푼 자의 분노가 담겨있으면서 모자를 쓰고 나왔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날 구원하신 분을 위해서 모자를 위해서 살게 함이라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러한 은혜 베푼 자의 분노가 다같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게 되거든요. 이 기간이 우리의 한 평생 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쉬우니까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것도 쉬운 건 아닌데.
제가 지난 토요일에 한국개혁신학회에 참석해서 논문을 발표했는데 어떤 분이 물어요. ‘목사님 논문의 핵심이 뭡니까?’ 제목이 어려워서 제목도 역사적, 비역사적 어려운데 핵심이 뭡니까? 그래서 제가 화요일 공부 다 끝났는데 강의 다시 했어요. 그 대목을. ‘우리 평신도는 어려운 말 모르고 딱 집어서 핵심이 뭡니까? 70이레 하는 해석인데 핵심이 뭡니까?’ 묻기로 제가 핵심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여러분도 그 핵심을 알면 되는데.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들이 학교 때 왕따를 당했다. 고3을 졸업해서 경찰관이 됐다 합시다. 권력이 있는 거죠.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자기를 괴롭힌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다섯 명이 있다 합시다. 이 다섯 명을 어떻게 손을 봐줘? 일 번부터 손을 봐서 트집을 잡아서 유치장에 다 집어넣을까 복수를 할 때 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복수가 안 되지요. 저놈도 죽여야 되고, 저놈도 조져야, 조져야 되고. 다 하는데 순서를 어떻게 정합니까? 한꺼번에 다 하면 자기가 감당이 안 되잖아요.
하나씩 찾아서 ‘실례지만 음주운전입니다.’ ‘실례합니다. 넌 안전띠 안 맺어.’ 복수를 할 때 순서를 정하죠. 어려운 이야기합니다. 한꺼번에 다 오는 게 아니죠. 그런데 이미 한꺼번에 다 있죠. 한꺼번에 다 있더라도 순서를 정해서 일 번 손 보고, 그 다음에 이 번 손 보고 하죠. 그렇다면 이 사람이 다섯 명을 한꺼번에 알 때 이걸 묵시고, 비역사적이고 그걸 이미 아는 주체가 묵시적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묵시적 주체라는 거예요. 그게 내 주장이었습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해석한다고? 아니에요. 모든 죄인들은 모든 인간들은 내 중심이니까 손 볼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있죠. 제 말 이해하겠습니까? 한꺼번에 온다고요. 일 번 손 보고 난 뒤에 이 번. 쟤도 손 봐야 되는데 잊어버렸구나. 삼 번. 맞아 쟤도 고등학교 2학년 때 괴롭혔어. 저 놈도 손 봐야 돼. 이렇게 등장합니까? 아니잖아요. 이미 다섯 명 손을 다 보는데 다만 손 볼 때 일 번부터 손 보고, 이 번부터 조지고 삼 번 할 때 그 순서를 정할 때 묵시가 역사라 바뀌는 거죠.
인간도 자기가 역사 노선 바깥에서 묵시적 주체 노릇을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일할 때 노아 홍수 해놓고, 다음엔 또 뭐하지? 심심한데? 여리고 성 무너뜨려야지. 이렇게 하십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은 먼저 된 자요 나중 되고, 알파요 오메가.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다가 이미 손 볼 사람 다 해요. 모든 사건을.
그러니까 하나님은 역사적 존재가 아니고 묵시적 존재. 이해되십니까? 창세기부터 마지막에 누가 생명책에 기록되고,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까지 머리 속에 완전히 다 하시는 거예요. 로마서 8장 30절에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하나님이 무슨 존재입니까? 묵시적 존재에요. 그런데 그 순서를 나타내면 역사가 되죠.
그러니까 역사를 순서로 봐야지 기수로 1, 2, 3, 4. 1이 있을 때는 2가 없었고, 1, 2 하면 3이 없었고, 그 다음에 3 등장하고 4 등장하고. 이게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역사적 존재가 돼서 이런 일이 생겼네. 조치해볼까. 이런 일이 생겼네. 그런 역사적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죠.
인간도 이 땅에서 묵시적으로 살아가는데 어설픈 묵시지만.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안 택한 백성 미리 안 정하겠어요? 다 정했어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에 예정하사. 그러면 여러분 왜 태어납니까? ‘저런 인간이 태어난 줄 몰랐다. 구원해줘야지.’ 이런 하나님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태어나라, 태어나라, 누구 집안에 태어나라.’ 이것은 뭐냐 하면, 손보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효과가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를, 다시.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신 거예요. 그런데 신학자란 인간들이 그걸 못 믿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킨다는 겁니다. 나는 ‘아니오’라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화투장을 깔아놔요. 방바닥에. 이것부터 손대야지. 들추는 거예요. 이미 한 방 가득 화투장이 있어요. 천국 갈 사람 화투장이 따로 있고, 지옥 갈 화투장이 따로 있는데 들추는 이것이 바로 성경 맞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해요.
그들은 자기들이 역사적 주체가 되어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적인 동력을 얻어서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간다. 말씀만 주면 우리가 알아서 지켜서 만들어간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적 해석이고, 저는 이미 한 방 안에 하나님의 화투장이 있고 이걸 들춰내는 거예요. 들춰내면 우리는 몰랐지요. 들춰보니까 ‘예수님 믿기로 작정했구먼. 주여, 은혜입니다.’ ‘주여, 이것도 창세전에 예정한 은혜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저쪽을 들춰보면 ‘하나님, 전 창세전부터 지옥 가기로 예정됐습니다.’라는 말을 안 하죠. 왜? 그 이유를 이제부터 설명할게요.
이건 여러분 쉽게 이해됐다고 치고 넘어갑니다. 나중에 다 잊어버리겠지만. 기수와 서수에요. 그냥 기수, 서수 나가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요. 서수란 순서. 순서만 있을 뿐이지 이미 존재는 다 깔려 있고. 기수라 하는 것은 1번 존재 있을 때 2번 존재 없었는데 1번 끝나고 2번 있고, 2번 끝나고 3번 있고. 이거는 기수적인 사고방식인데 역사적 사고방식이고, 서수는 뭐냐? 이미 확정된 걸 까데미는 것.
그렇다면 제가 아까 ‘그러면 목사님. 인간들도 묵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점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인간들의 묵시는 인정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 때 인간은 자칭 묵시적 존재라 해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신처럼 됐잖아요. 역사를 합니다. 예를 들게요. 여러분들이 피곤하시기 때문에 쉬운 예만 자꾸 들어요.
아들이 있는데 엄마가 말하기를 철아. 초등학교 2학년 때 오줌 쌌지. 엄마가 묵시적 존재기 때문에 역사를 만들어요.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오줌 쌌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선생님한테 얻어맞아서 불려갔다. 이런 역사가 있는 반면에 아들의 역사는 뭐냐? 초등학교 2학년 때 옆집 부잣집 딸이 이사 와서 걔한테 떡볶이 얻어먹으려고 사귀었다고 나와 있어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운동을 잘해서 체육시간에 인기를 얻었다.
자, 여러분 아들이 다른 사람입니까? 아니죠. 똑같은 아들인데 아들이라는 이름에서 삐져나온 역사의 노선은 자기가 자기 구미에 맞는 따로 역사를 만들었지요. 그러면 아들 자체가 묵시인데 자기가 묵시가 되어서 역사를 초월해서 따로 자기 역사를 만드는 것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의 사건들을 배열해서 역사를 만들지요. 그런데 엄마는 뭐냐? 너 초등학교 2학년 오줌 싸서 세탁한다고 애 먹었다고 엄마는 나름대로 아들을 역사 배열을 따로 하는 거예요. 두 묵시 가운데 어느 게 맞습니까? 둘 다 안 맞아요. 왜? 아들이 살아가면서 빠진 사건들. 그 빠진 사건을 이 아들 형이 알고 있네.
그러니까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칭 하나님 행세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행세가 뭐냐 하면, 내가 진짜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사건, 사건을 뽑아서 이어보는 거예요. 이어보니까 자기 역사를 자기가 만드니까 그 역사 속에 자기가 포함됩니까, 포함 안 됩니까? 포함이 안 되지요. 자기는 보지요. 슬슬. ‘이 역사 빼야 되겠다. 부끄럽다. 옳지, 옳지. 적당해.’ 나의 일기장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뭐냐? 역사를 초월한 신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하나님 흉내 내는 겁니다.
배열해놓고 그 다음에 뭐냐? ‘하나님. 오년 뒤에 취직시켜 주세요.’ 자기가 멋대로 여기다 점선을 칩니다. ‘오년 뒤에 대기업 삼성에 취직.’라고 하는 거예요. 이걸 꿈이라 하고 비전이라 하잖아요.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으니까 오년 뒤에 삼성 입사, 하나님 알지요?’ 이렇게 하고. 엄마는 ‘하나님, 쟤가 오년 뒤에 장가가게 해 달라’ 또 다른 배열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일방적이냔 말이죠. 그렇게 배열한 이유가 뭐냐? 나는 이렇게 역사를 볼 수 있는 그런 가치가 있고 정당하다 이 말입니다. 이 두 역사가 충돌하면 싸움이 벌어지는 거죠.
그런데 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이걸 해야 성경이 해석이 돼요.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 중에 뭘 뽑느냐 하면, 자기가 성경 속에 들어간 존재가 아니고 성경 바깥에서 마치 신처럼 행세하면서 성경을 자기 원하는 대로 역사를 해서 여기다 집어넣어요. 이것은 내가 열일곱 살 때 기도해서 은혜 받은 것, 이건 스물다섯 살 때 암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은 것. 전부다 집어넣는다고. 그러면 이 역사는 누구를 위한 역사입니까? 현재 내가 신처럼 굴어도 합당한 이유를 보여주는 자기가 잘났다는 걸 증명해 줄 역사만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글을 쓸 때 이렇게 했지요. ‘우리 가족은 다 거짓말쟁이이다’라고 했을 때 본인은 그 가족에 포함됩니까, 안 됩니까? 아, 어렵지요. 포함이 되게 되면 이런 소리 하는 것도 거짓말이죠. 그런데 빠져버리면 가족이 아니죠. 그건 남이잖아요. 우리 가족이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하면서 역사를 다 만들고 난 뒤에 그 역사의 주인공으로써 자기가 들어가요. 들어가면서 자기 쪽으로 모은 거예요. 이게 라멕이 가인의 후손 중에서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는 자는 죽인다는 게 나옵니다.
어떤 학자는 이런 걸 가지고 사람은 복수하기 위해서 산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복수심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아주 인간의 행동을 잘 보여줘요. 복수심. 엄마가 아들 보고 착하라 하면 착해요. 왜? 엄마한테 복수하기 위해서. 더 이상 나의 나쁜 점 시비 걸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만약에 말씀대로 살라 하면 말씀대로 살아요. 왜? 하나님이 더 이상 나보고 죄인이란 소리 안 하도록. 자기가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서 말씀대로 다 지켜버리는 거예요. 그게 성화론 아닙니까. 얼마나 나쁜 놈들이에요. 복수에요.
그러면 역사 속에 들어가 버리면 어떤 모순이 있느냐 하면, 역사 속에 들어가니까 부분이죠. 부분이 전체를 알 수 있습니까? 모르잖아요. 부분은 어디까지나 부분일 뿐 전체가 아닌데 전체를 알려면 부분에서 튀어나와서 전체를 봐야 전체를 아는데, 자기가 아무리 역사를 끌고 가지만 자기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도 한 가족이잖아요. 우리 가족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 때 가만 보니까 그런 소리하는 자기도 몰래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간 순간 진짜 내 가족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만 빼놓고 다 거짓말쟁이라고 할 것 아닙니까. 전에 우리 가족이 다 거짓말쟁이라 한 것은 나 빼놓고는 다 거짓말쟁이라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걸 듣고 형이 하는 말이 내가 평소에 그 말 하고 싶었어. 나 빼놓고 다 거짓말이야. 하고 가족 다섯 명이 다 그렇게 한다 말이에요. 이 말은 뭐냐? 부분이 전체를 모르잖아요. 결국 인간은.
그럴 때 놀라운 사실은 네 속에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의 자리가 죽음의 자리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면, 우리 같은 역사에 전체를 아시는 분이 죽음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결국은 이 전체가 주님 보시기에 예수님이 죽어야 마땅한 그런 자리였어요. 그러면 이 역사는 누구 역사입니까? 우리 역사가 아니고 주님의 역사, 주님을 위한 역사죠.
주님에 의한 역사 같으면 그 중심점이 뭡니까? 바로 십자가 자리겠죠. 십자가가 우리에게 왔다면 우리는 내 자리 버리고 예수님이 죽었던 자리를 찾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 자리가 뭐냐?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나같이 신처럼 까불다가 결국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구나. 예수님이 죽은 그 자리가 진짜 역사의 해답이 된다.
그러면 그 자리에 합류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고, 내가 그리스도가 살면 그게 모든 역사가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모든 역사와 모든 말씀이. 저는 그걸 깔때기라 봅니다. 인간이 있으면 깔때기를 통해서 다 내려오는 거예요.
토요일 날 평하던 사람 중에서 옆에, 옆에 사람의 글에 보면, 다니엘의 70이레는 최악의 늪지라서 이거는 해석이 불가능한 대목이란 소리를 듣고 제가 반박을 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반박을 못했는데 말 끊어서. 70이레가 불가능할 것 같으면 모든 성경이 하나도 모르는 게 돼요. 그 사람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들은 생각하기를 70이레만 모르고 다른 건 안다는 거잖아요. 그게 뭐냐? 감히 부분이 전체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거는 모르겠고, 이거는 알겠고 판단한다는 자체가 모든 성경말씀이 한꺼번에 모든 성경구절을 통해서 깔때기처럼 쏟아진다는 사실을 몰라요. 창세기 1장 1절을 해석할 때 요한계시록 12장이 거기에 포함되는 걸 그 사람은 모른다니까요.
그러니까 건방지게 자기가 쪼개는 거예요. 이거는 모르겠고, 이거는 알겠고. 내가 보기에 안다는 것도 모르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 5절의 말씀 속에 레위기 3장의 말씀이 거기 포함돼서 깔때기처럼 들어온다는 사실을 몰라요.
깔때기, 깔때기하니까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제가 어릴 때 우리 집에 할아버지나 우리 아버지가 저한테 심부름을 엄청 시켰어요. 저는 심부름을 너무 잘해요. 왜 잘합니까? 배웠지요. 다 잊어버렸습니까? 사람은 심부름 잘할 때 복수하기 위해서. 더 이상 나한테 흠을 잡지 말라는 식으로 일종의 소극적인 방어에요. 그게 한이 쌓인 거예요. 한 번 보자. 바리새인이 그거 아닙니까. 한이 쌓인 것.
그래서 복수 방법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순종함으로 복수하고 또는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법 자체를 무시하는 방법이 있어요. 하여튼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간에 둘 다 좋은 게 아니에요. 둘 다 복수에요. 복수해서 생긴 꼴이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이런 복수하려는 나밖에 모르는 어느 놈이 날 건드려? 나의 의를 건드려? 복수하기 위해서 살았던 나를 위해서 주께서 죽었구나. 이걸 알면 주님 앞에서는 복수 안 하잖아요. ‘주여’ 이렇게 되지 주님 앞에서는 복수를 안 해요.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제가 티브를 거의 안 보는데 아내가 좀 보는데 얼른 본 게 있어요. [파스타] 네 쉡. 파스타에 보면 얼른 봤어요. 이선균이란 남자 주인공이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고, 공효진이란 여자가 뒤에서 안고 있어요. 둘이 눈이 안 마주쳤어요. 여자가 이선균을 안는 장면이 있어요. 이걸 보고 보통 남자가 마주 보게 되면 손을 만져도 성추행입니다. 어디 음녀가 손을 대. 남자는 이런 게 있어요. 여자가 안았다는 말은 ‘내 것 다 가져가라’ 이 말이거든요. 물론 남자도 포함되겠지만. 하여튼 다 줄 테니까 다 가져가.
이거는 뭐가 없습니까? 안을 때 복수심이 없지요. 이게 심령이 가난한 거예요. 이게 바로 복이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주여, 다 가져가세요.’ 이제는 날 위해서 살지 않고 날 위해 죽었다가 사신 분을 위해 내가 살려 함이라. 안에 다 비웠어요. 그냥 기대요. 우리 보통 남자 같으면 부담돼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너무 심하게 나오지 마 부담되니까. 예수님이니까 부담 받아주니 사람한테, 남편한테 기대하지 마세요. 남편은 이러면 겁을 내요. 무섭습니다. 괜히 싸움하고 이러면 도망가는 수가 있어요.
인간들이라서 이렇게 못하는데 만약에 정말 이래 나오면, 사람들은 사랑이 무서워요. 차라리 거래가 좋아요. 거래가 편해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이게 편하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 하면 도망가 버리죠. ‘주여 감당 안 됩니다. 제발 말씀만 하고 지킬 것 지킬 테니까 저를 사랑한단 소리 마세요.’ 사랑하게 되면 자기 의를 내세울 기회가 없잖아요. 자기가 자기 위해 복수할 기회가 없잖아요. [파스타] 괜히 끄집어냈어. 하여튼 이런 뜻인데.
여기서 다시 봅시다. 예수님께서 만든 역사 속에 우리가 예수님 자리, 십자가 자리를 만들었다 말이죠. 만들었으면 이 역사를 누가 가져갑니까? 하나님께서 관여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하고 누구하고 관계입니까? 역사의 주인이 애초부터 누구였어요? 예수님이었어요. 하나님과 예수님밖에 없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가 삐져나온 겁니다. 이게 예수님, 인자가 묵시적 존재기 때문에 아까 늦게 오신 분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다 알잖아요.
묵시적 존재가 기수적이 아니고 순서적이에요. 그러면 처음에 창조 있어야 되고, 선악과 심어야 되고, 그 다음에 가인이 아벨 죽이고 이건누구 머리 속에서 나온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야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등장할 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 해석이 바로 성령의 해석이고, 베드로전서에 보면 모든 선지자 앞에 예수의 영이 있다는 그 말이에요. 그러면 그 해석을 포착을 해야 된다니까. 우리가 성도라면. 그걸 포착하려면 내가 역사를 본다는 나만의 역사를 포기해야 되겠죠.
포기한다는 말은 뭡니까? 나는 죽은 자로서 그 속에 참여해요. 욥처럼 입을 다물고 재를 뒤집어쓰고. ‘욥아. 네가 북극성 놓을 때 어디 있었지?’ 이게 뭐냐 하면, 북극성 놓는 그 순서에 대해서 욥은 부분이기 때문에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전체는 하나님이 전체기 때문에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왜 까부느냐 말이죠. 욥은 왜 고난 받았느냐? 이제 안 거예요. 욥의 고난은 욥 입장에서 이해하도록 준 게 아니고 묵시적 차원에서 고난이 와야 하기 때문에 준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욥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 악마의 관계기 때문에 욥은 빠져있단 말이죠. 욥이 거기 관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왜 고난 옵니까? 그거는 하나님과 악마하고 지금 화투치고 있는데 삼자가 왜 낍니까? 화투치다 한방 맞는 것, 그게 고난 아닙니까. 시월 단풍으로 한 대 얻어맞고 질질 울면서 왜 때립니까? 구월 달 쳐버리고. 왜 때립니까? 이게 바로 묵시적 해석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역사적 기수가 1, 2, 3, 4가 아니라 존재, 존재가 아니라 이미 확정된 것을 패를 까뒤집으려면 이건 뭐냐 하면, 7이레+62이레+1이레가 아니고 7이레가 역사 전체를 다 덮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옆에 있는 사람이 잘 이야기해줬어요. ‘그러면 목사님. 7이레가 역사 전체를 덮습니까?’ 본인이 글로 썼어요. 얼마나 기특한지.
7이레 하고, 1이레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덮이고. 왜? 주인공이 누구다? 인자기 때문에. 묵시적 주체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 사이는 어떻게 7이레란 주체가 전체를 창조했던 창조역사 주인공이 누구냐를 지향하는 이 기간이 62이레. 인간의 손으로 하는 건 다 망가져. 이 해석이 70이레 해석입니다. 이걸 순서를 정하면 안 되고 수직으로 층을 이룬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내가 건방지게 역사적 포함된 존재면서도 부분이면서도 마치 역사를 꿰뚫는 묵시적 존재인 척 했던 이것이 바로 진짜 죄군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 앞에 죄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죄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과 누가 더 하나님이었느냐의 죄였지, 누가 더 잘났느냐의 죄는 아니었어요. 스스로 하나님 되려는 게 죄였습니다. ‘나도 세상에서 압니다.’라는 것이 죄였어요. 참 천기누설 해버렸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 가족은 거짓말쟁이라 할 적에 우리가 포함되죠. 포함되면 우리 가족은 거짓말쟁이라는 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지요. 내가 포함되면서 마치 전체를 아는 것처럼 됐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 앞에 죄는 아니에요. ‘주여, 우리 가족은 거짓말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게 죄에요, 아니에요? 죄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럼 뭐냐? 주님 앞에서 내가 생각했던 죄관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것마저 죄란느 것을. 그래서 회개한다고 구원 못 받아요. 회개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의 은혜로 구원받아요. 회개하나 안 하나 우리는 역시 부분을 일뿐이고 전체는 누가 쥐고 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것을 믿는 것은 자기로부터 그야말로 끄집어내줘야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십자가 죽음의 자리가 와야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적으로 부활되기 때문에 되살아났기 때문에 ‘내가 저렇게 회개하는 것도 죄구나’ 하는 것이 발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때부터는 아담이 육이니까 죽을 때까지 죄만 지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기 안 죽으려고 애를 쓰지만 적어도 주님한테는 복수를 안 하죠. ‘너 한 번 욕 보라든지, 너 팔아 먹을란다.’ 이런 소린 하지 않죠. 만약에 그런 소리 하더라도 성령이 가만 두지 않죠. 성령께서 만날 하는 일이 뭡니까? 간단하잖아요. 책망이죠. ‘또 네가 주인공 됐구나. 네가 또 교회 주인공이구먼. 개혁신학 강좌에서 뜨는 것 보니까 네가 주인공이군.’ 주께서 배치했는데 마치 자기가 잘나서 하는 것처럼 항상 우리는 나만의 역사적 사건을 했다 이 말이죠.
이것 평생 사라질까요, 안 사라질까요? 아예 포기하세요. 안 사라집니다. 다만 십자가의 은혜로 ‘이게 바로 죄구나’를 깨닫게 하죠. 평생토록 우리가 성질 못 고친다는 사실, 우리는 계속 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요한복음 17장 2절에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든 역사의 선을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인 것은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게 하심이라. 그러면 울산에 있는 모든 사건, 비 오고 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 택한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출애굽기 11장이죠. 11장을 봅시다. 11장을 할 때 우리는 묵시적으로 보라 이 말이죠. 5절에 봅시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어서 죽습니까? 제가 어려운 질문했죠.
‘죽을지라’ 할 때 왜 이들이 죽어야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이 이스라엘보다 죄를 더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이 죽고 이스라엘이 사는 것 자체가 조화를 이루어서 이게 하나의 세트가 이루어서 바로 예수님이 주인공, 어린양이 역사의 주인공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쪽은 죽기 위해서 만들어져야 되는 거예요. 하나의 순서상 이건 죽고, 이건 사는 그런 순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 간단해요. 그 다음에 이런 순서가 됐다. 패를 까보니까 이건 죽는 패에요. 죽는 패라서 죽어야 되고, 패 까보니까 이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죽을 때 이 사람들 다 죽입니까? 아니면 누구 죽어요? 가축이나 사람이나 첫 사람 죽지요. 첫 사람 죽인다는 말은 이쪽에 첫 사람 살지요. 그러면 첫과 첫 사람 죽는다는 말은 사람 죽은 것을 주관하는 어린양은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첫 열매가 되는 거예요. 첫 열매를 생산하는 방법이 죽이고 살리고 첫 열매.
하나 물어볼게요.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람이 몇 명입니까? 한 명밖에 없어요. 이걸 우리가 만약에 역사를 만든다면 가인도 있겠다, 아벨도 있겠다, 셋도 있겠다. 한 명이 뭐고 수 백 억이 돼야 되죠. 우리가 역사를 짜면 우리 선에서 나가면 전부다 여러 명이 돼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담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아담만 상대해요. 그런데 아담을 상대하는 이유가 아담 안에 자기 아들이 들어있어요. 이 아들이 첫 열매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아담의 역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몇 명을 상대한다고요? 한 명만 상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은 하나만 필요하죠. 하나님께서 아담을 상대할 때는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지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너를 상대하지만 네 안에 있는 계신 분을 상대하기 때문에 너는 아니라는 거죠. 너는 아니라는 것을 위해서 아담을 상대하는 겁니다.
만약에 아담뿐이라면 아담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면,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달리 상대할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그 다음에 생명나무 기능을 차단했다는 말은 결국은 선악과와 생명나무 두 가지 요소를 통해서 아담 안에 계신 분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따먹지 말라는 것을 앞서서 배치한 거예요. 이걸 건드리면
007 영화를 보면, 007이 일을 잘 수행하고 있는데 전화가 와요. 제임스 본드야. 네가 좋아하는 여인이 빨리 오라고 호출했다. 본드 씨 빨리 와주세요. 그러면 관객들은 조마조마하죠. 가면 안 돼. 왜 가면 안 됩니까? 거기에 미끼가 있지요. 너의 사랑하는 여인은 내 손에 있지. 무기를 버려라. 하고 나쁜 놈이 거기 있잖아요. 관객들은 가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가면 드디어 분하다 하고 총을 놓잖아요. 여자만 아니었으면 나는 죽였을 텐데.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것을 배치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걸려들면 결국은 하나님 실상이 뭐냐 하면,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구분 지은 거죠.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구분 지으면서 주님께서는 아담이 둘로 쪼개지면서 아담 안에 들어있는 진짜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가 튀어나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이 누구 안에서 선택했다?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하나님이 누구 안에서 우릴 선택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면 하나님과 처음에 언약 상대자는 누구에요? 아담이 아니고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포장하는 자가 누구였습니까? 아담이죠.
그걸 가지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은닉, 숨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오지 못하게 숨겨서 하나님을 숨기는 그런 기능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어서 결국 인간은 선악과 따먹으면 하나님 형상과 멀어지고 하나님 형상은 생명나무를 통해서 형상을 형상되게 하면서 예수님을 닮는 새로운 피조물을 조장하는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걸 교수들이 아직까지 자기 역사를 고수하는 거예요. 선악과를 건드림으로써 생명나무의 실체가 그때 드러나는 겁니다. 선악과를 안 건드려주면 생명나무가 뭔지를 몰라요. 선악과를 건드려줬기 때문에 진짜 아담 안에 들어있는 원래 언약의 상대자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에 보면, 주께서 주에게. 주님이 두 분이에요. 주님께서 주님께. 모든 말씀은 우리 보고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고 실천할 분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실천해서 구원은 우리가 받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구원받은 우리조차도 몽땅 예수님을 위해서 구원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구원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나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220.♡.41.197)
10-03-10 15:14
울산100305b출11장b
2010-03-10 11:30:44 녹취 : 한윤범
20100305b 울산강의-출애굽기 11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해봅시다.
여러분 이런 용어를 들어본 적이 아마 없을 거예요. ‘텅 빈 시간’이란 용어 못 들어봤지요.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정지화면’ 이건 들어봤지요. 비디오 보다가 스톱, 정지화면 되지요. 화면이 운동이 정지가 되면 시간도 정지가 돼요. 시간이 흘러가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정지화면을 시켜버려요. 텅 빈 시간을 해버려요. 시간이 텅 비어있다. 정지화면이 돼버리면 시간을 정지시키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기존의 모든 사건은 정지화면을 위하여 여기 다 모아집니다. 시간이 정지가 되면 쉽게 이야기해서 여기서 정지시킨 어떤 분과 정지당한 어떤 분, 두 분만 남아요.
예를 들어서 cctv에 차를 훔치는데 이걸 정지화면 하게 되면 걔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맨 여기 화면에 있지요. 그 장면 스톱하면 스톱시킨 분이 있지요. 바로 역사의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해야 될 보여줄 역할이 정지화면으로 대조가 되면 나머지 모든 시간은 그것에 늘어난 거예요.
왜 정지화면이 중요하느냐 하면, 도대체 이 역사는 어떤 역사야? 이 역사의 흐름이 어떤 주제야? 알고 싶은 항상 그때마다 정지화면을 주셔서 역사라 하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이렇게 드러나고, 거기서 그 역사에 당해야 할 사람은 이렇게 당한다. 정지화면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이해된다고 강제로 되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면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씨름하죠. 그때 정지화면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하고 야곱하고 싸움을 했지요. 그런데 그 정지화면 해놓고 그 사건이 두고두고 오는 모든 세계역사를 주관하는 거예요. 그게 야곱 언약이에요.
야곱 언약 가운데 에서는 저주받고 야곱은 복 받고 정지화면 시켜버리면, 그 뒤에 나오는 요셉이든 모든 역사는 어떻게 됩니까? 에돔 나라는 저주받고, 에서의 나라가 에돔이니까, 야곱의 나라 이스라엘은 복 받고. 어떻습니까? 맞지요. 그 정지화면, 그걸 흔히 언약이죠. 무지개가 떴다. 밑에 피 흘리지 마라. 억울한 피 내면 저주받는다 했지요. 그러면 무지개 언약만 생각하면 그냥 은혜잖아요. 그런데 무지개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엇무엇 일 때 저주받는다는 정지화면이 있어야 된다니까요.
어떤 사람이 자동차에서 물건을 훔쳤는데 경찰관이 자기 형님이라. ‘너 훔쳤지?’ ‘형님 안 훔쳤습니다.’ ‘봐줄게. 빨리 빠져.’라고 했다 이 말이죠. 나중에 집에 가서 경찰관 형이 그걸 정지화면을 구해왔어요. 그래서 동생이 있다가 ‘형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는데?’ ‘비디오 틀어라.’ 보니까 자기는 도둑놈으로 붙잡혀 있고 형은 용서하고 있고. 정지화면이죠. ‘봤지?’ ‘잘못 됐습니다.’
정지화면이란 뭐냐 하면, 은혜라든지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이 새로운 저주를 유발시켜요. 이 은혜를 보여주기에 합당한 세트가 되는, 짝이 되는 저주가 있어서 이게 정지화면을 유지해야 되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정지화면의 주인공으로서 본인 나서기를 원치 않아요. ‘앞으론 잘 할게.’ 이게 뭐냐 하면 나름대로의 정지화면이 아니고 변화하겠다는 거예요. ‘앞으로 반성할 게.’ 그 반성 안 통합니다. 정지화면이 우리를 결정하지 내가 반성해봐야 얼마 안 가서 또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지화면화시켜서 ‘너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야.’ 이게 정지화면이에요. 나이가 칠십이든, 구십이든 괜찮아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 정지화면 되기 때문에 그 정지화면과 뭘 짝을 이룬다? 하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가 정지화면 되기 때문에 이것이 들어있는 사람은 뭐만 자랑합니까? 주님의 정지화면만 자랑하게 된다 말이에요. 이게 뭐냐?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너는 만날 십자가고? 이젠 십자가 잊어라. 십자가 믿는 건 좋은데 믿고 난 뒤에 새 사람 되어서 착한 일 해야지.’라고 정지화면을 해소해버리고 이제는 정지화면이 아니고 자기가 주인공 되어서 설치는 화면을 자꾸 내비치면서 ‘예수 믿고 술 끊었습니다. 담배 끊었습니다.’ 자꾸 딴 짓을 하는 거예요. 그걸 저는 뭐냐?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다. 그건 묵시가 아니죠.
그래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텅 빈 시간을 마련해서 텅 빈 시간 속에는 이게 운동이 주체가 돼요. 칠일 만에 완성했잖아요. 칠일 만에 완성한 것이 팔일, 구일 없어요. 그냥 칠일 만에 완성했으면 이 자체가 하나의 정지화면이 되어서 그 다음부터 창조 위배되는 것은 전부다 모조리 저주해버립니다.
그런데 늦게 오신 분들은 모르죠. ‘목사님, 창세기 1장에 죄 지었다고 끝까지 갑니까? 그 다음에 잘하면 되지요.’라고 늦게 오신 분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은 기수적이 아니고 서수적이다. 이미 다 아시는데 ‘이번엔 무슨 패를 들춰볼까? 옳지, 선악과 따먹는 패구나. 이번에는 가죽옷을 입히는 패구나.’ 전부다 화투패를 들추면 이미 한 방에 있는 데로 있어요. 같이 있는 걸 들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거예요.
변화산에서 모세가 나이 많습니까? 엘리야가 나이 많아요? 여러분, 하늘나라 맞먹습니다. 그러면 출생이 없고 나이를 못 따집니다. 지상의 나이는 뭐냐 하면, 경점이에요. 모든 인간, 구십 넘어도 경점, 백두 살 먹어도 경점, 한 점에 불과합니다. 오늘 한 점이잖아요. 내일 되도 점 두 개가 아니고 내일 되도 점 하나 뿐이에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았던 것 전부 날아갔습니다. 나이 구십 돼보세요. 구십 되도 그 사람 한 경점뿐입니다. 다 날아갔습니다.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라 하는 것은 원래 없어지게 돼있어요. 현재 있게 하는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묵시적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이러한 정지화면에서 텅 빈 시간이 어려우면 정지화면에서 쏟아진 거예요. 전체가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전부다 텅 빈 시간, 하나의 정지화면에 소속된 겁니다.
11장에서 정지화면 될 때 힘과 힘의 싸움이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힘은 애굽 힘이죠. 이스라엘은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힘이 없어요. 그래서 전도나 선교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힘을 빼고 전도하고, 힘을 빼고 선교해야 돼요. 오늘 너하고 붙어보자. 이거는 힘과 힘의 충돌이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고 상대방을 내가 장악하려는 하나의 폭력에 불과한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때 어떻게 했습니까? 힘을 쭉 뺐어요. 연약하심으로 돌아가셨어요. 그게 전도에요. 로버트 박(박동훈)이 북한 들어갈 때 너무 힘에 충만했어요. 내가 가서 김정일을 하야시키고 북한의 언로를 개방시키고 하겠다고 힘주고 들어갔습니다. 이 인사는 힘을 준 게 문제였어요. 힘주고 들어가니까 힘으로 얼마나 이 사람을 팼던지 자살충동을 일으켜 지금은 정신병원에 가 있습니다. 초반부터 패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북한을 너무 몰랐습니다. 사과합니다. 가기 전에 그 사람은 이 몸은 죽습니다. 그리고 갔어요. 자기들 모임, 공동체에서. 이 몸은 잊으세요. 난 이미 하나님께 바친 몸입니다. 날 잊으세요. 죽은 몸입니다. 죽으면 죽지. 왜 안 죽었어요. 사람이 힘을 빼게 되면 죽고 사는 문제가 더 이상 자기한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니엘 세 친구 같은 경우에는 힘을 빼버리니까 자기가 신앙이 좋아서 사는 게 아니고 힘 빼니까 그냥 죽었고, 죽어보니까 주님과 함께 있고 그 다음에 사는 것은 자기가 힘들게 사는 게 아니고 그냥 살아가기에 사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살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고 그냥 더 살아야 하기에 힘든 인생을 또 살아야 했던 겁니다. 그냥 힘을 빼는 거예요.
문제는 힘을 빼버리면 자기의 묵시성을 포기하기 때문에 이게 힘든 거예요. 자기가 주님의 묵시 속에 하나의 점으로 포함된다는 것이,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힘 뺐다 해놓고 또 힘을 찾아요. 우리가 어려울 때는 새벽기도를 나오잖아요. 힘 빼고 나와요. 힘 생기면 새벽기도 안 나옵니다. 힘 있는데 뭐 때문에 새벽기도 나옵니까. 교회 나오는 것이 힘을 갖추기 위해서 교회 나와요. 그러면 힘에서 못 빠져나와요.
이걸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애굽인데 하나님 여기 계십니다. 이걸 빠져나오는데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애굽인에게 강퍅한 힘을 줘서 힘으로 완전 포위해서 어느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 못 받도록 조치를 해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안에 심리가 뭐냐? 부글부글 거려요. 라면 끓일 때 물 끓는 것처럼 물분자가 액체에서 기체로 되서 뚜껑을 막 들이받잖아요. 그런데 냄비 만들 때 뚜껑을 단단히 만들어도 안 돼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죽어야 되죠. 어떻게? 스스로 죽어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힘없는 분을 보내서 같이 죽게 한 거예요. 같이 죽으면 살고, 같이 안 죽겠다고 버틴 애굽은 그냥 그대로 남아서 저주받고 죽게 되고. 주와 함께 죽으면 힘없이 나오고.
이걸 정낙원 목사님은 공짜로 구원받는다. 힘 빼고. 여기 식당에 라면 얼마입니까? 놔두소. 다 값을 치렀습니다. 공짜네. 공짜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힘이 빠져야 공짜를 알죠. 힘이 안 빠지면 꼭 자기가 돈 내려한다니까. ‘그때 내가 기도했더니만 은혜 받았구나.’ 이래 나와요. 기도란 값을 치러요.
힘 빼는 방법이 뭐냐? 욕심과 죄에 대해서 어떻게 이깁니까? 욕심과 죄가 올 때 지면 돼요. 왜 지면 되느냐 하면, 우리는 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냥 우리 본성대로 지세요. 욕심 나오면 욕심대로 사시고, 죄 짓고 싶으면 지으세요. 왜? 그게 우리 행세에 딱 들어맞아요.
아까 울산에 오는데 예쁜 스타킹 신고 나는 이십 대 아가씨인 줄 알았어요. 버스를 탔는데 보니까 아무리 못 되도 육십이에요.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미니스커트 입고 있는데 육십 대였어요. 어울리질 않아요. 격에 어울리지 않아요. 뒷모습 보고 치마 보면 이십 대에요. 그런데 역시 머리는 삭았어요. 머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라. 머리는 윤기가 없어요. 얼굴 늙었지요. 앞뒤가 격이 안 맞아요. 우리 격 좀 낮춥시다. 그냥 욕심대로 사시고 죄 생기면 지으세요. 이게 힘 빼는 거예요.
제가 주일 오후설교에 했잖아요. 세상에 일곱 시에 뷔페 있으면서 여섯 시에 집에서 라면 두 개 끓여먹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경건치 않는 자를 경건케 한다는데 왜 자기가 미리 경건하면 어떻게 돼요? 경건치 않는 자를 경건케 한다면 경건치 않은 자로 살면 되는데 꼭 자기가 알아서 경건 티를 다 내. 웃기고 있어. 자기 의를 채우고 말이죠. 그냥 사세요. 그냥 살라고. 그래야 뷔페 음식이 맛있는 줄 알죠. 맛은 허기지면 다 맛있어요. 허기지면 땅에 떨어진 떡가루도 다 맛있어요. 배고픔이 최고의 입맛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맛이 없어요.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만족을 얻을 것이다.
내가 이래서 구원된다는 힘을 축적하지 마세요. 이래서 구원된다는 힘을 축적하지 마시고, 갈수록 절망과 가망을 온 몸으로 체득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말씀이 체험이 되지 아니하면 은혜가 추상적 은혜가 돼요. 그리고 실제로 힘을 빼면 힘을 이래요. 심리적인데요. 인간이 힘을 갖고 있으면 주사바늘이 들어가질 않아요. 주사 맞을 때 뭐라 합니까? ‘아저씨. 힘 좀 빼세요.’ 힘을 빼야 주사바늘이 들어가요. 사람이 힘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시비 걸게 돼있어요.
오늘 낮에 오면서 우리교회 심방을 갔는데. 김◯◯ 집사님이라고 치킨집 하는데 그분을 보면 제가 존경스러워요. 그분은 자기 힘을 비축을 안 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든 전부다 웃음으로 대해요. 자기는 힘을 뺐기 때문에 힘 있는 사람과 힘과 힘의 대결구조로 안 가져가요. 애초부터 자기가 힘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치킨집에 노회를 마친 장로들이 온답니다. 이 사람들은 술도 팔고 하니까 설마 기독교신자인 줄 모르고 노회 서류 들고 와서 노회원들이 술 먹고 갔는데 그 사람들이 노회원들인 줄 몰랐어요. 그런데 노회 서류를 두고 갔어요. 그분들이 노회 마치고 스트레스 받으니까 술 먹고 갔구나. 그래서 알게 됐어요.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장사 안 되니까.’ 단골 하나 얻었어요.
힘 이야기 해봅시다. 이런 논리에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예를 들었지만 제가 예를 들어도 기뻐요. 옛날에 있던 박사교회에 나이가 구십이 됐는데 이름은 정장운인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그 당시 구십이었어요. 존경을 많이 받았어요. 평소에 내 재산 다 바쳐서 이 교회 세웠습니다. 이제는 이 교회만 있으면 교회는 하나님 것이지 내 것은 없다. 이래서 존경을 받았는데. 갑자기 이 장로님 말고 어떤 장로님이 들어왔어요. 교회가 힘의 축이 이 사람에게 넘어가니까 제가 설교하고 광고시간이었습니다. 뭐가 화가 났는지 ‘다 나가라 내가 세웠다.’ 그래서 나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 생기느냐 하면, 평소에 나를 느끼지 않다가 외부에 타인이 오게 되면 타인을 의식하는 순간 나라는 것이 괴물처럼 솟아나요. 남이 등장할 때.
세 식구 오순도순 있으면 나라는 게 없어요. 근데 ‘계십니까?’ 하고 노크 소리 들리면 ‘누굽니까?’ 갑자기 나라는 게 발생돼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나를 포기 못 해요.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왜? 하나님께서 외부에서 자꾸 힘 가진 사람을 주게 되면 갑자기 나가 응축이 되서, 응축이 된다는 말은 뭡니까? 있는 힘 다 모아라. 다시 말해서 새벽 두 시에 누가 들어온 듯 하면 망치, 야구방망이 힘 있는 것은 다 모으죠. 저쪽이 힘으로 나오면 힘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에 오후 열두 시, 아침 일곱 시 같으면 야구방망이 방안에 왜 둡니까? 미쳤습니까? 다 치우죠. 언제 힘이 생긴다고? 힘을 가진 외부인이 등장하면 힘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잔뜩 힘을 주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다시 말해서 힘이 생기면 힘이 생겨야 되는데 ‘힘 빼라. 힘없는 방법으로 구원할 테니까 그 말 좀 따를래?’ 하니까 힘을 빼는 게 뭐냐 하면, 어린양 피를 바르잖아요. 이거는 어린양 피가 죽었다, 패배했다는 말입니다. ‘졌다, 졌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심판주가 와서 이쪽은 진 거니까 그냥 넘어가고, 이쪽은 뭘 주장한다? 애굽은 ‘웃기고 있네. 우리는 힘 가지고 살 거야.’ 하는 놈은 다 죽여 버리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자 자체가 역사 속에서는 힘 있는 자가 아니라 힘없는 자로 와서 힘없는 자를 믿으면 힘없는 자가 구세주인 것을 인정한 사람이면 힘없는 자가 부활과 더불어 같이 부활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패, 그 다음에 패 넘김이 그거였습니다.
보통 힘없는 경우에 기도하게 되죠. ‘주여, 힘 뺐습니다.’ 힘 뺄 때 어떻게 합니까? ‘이번 일만 잘 되면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완전히 힘 빼버렸어. 그것 며칠 안 갑니다만.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하나님. 우리 애 병만 낫게 해주시면 내가 그동안 소홀히 했던 것, 교회에 잘 다니겠습니다.’ 한 달 잘 다닙니다. 목사도 그걸 기대해선 안 돼요. 왜냐하면 교인들이 잘 나오면 힘이 된다니까. 교인 세 명일 때 하고, 교인 백 명일 때 하고 설교가 달라요. 힘이 막 나요. 혼자 흥분했어. 지난 달 강의한 것하고 이번 강의 다르잖아요.
앞에 만약에 교인이 졸게 되면 목사가 힘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힘 빼라고 졸게 하시는 겁니다. 그걸 깨운다고 탁탁 깨우지 말고.
출애굽은 정말 진짜 구원자가 우리 속에 있을 경우에는 우리는 그분만 믿으면 되지 자기가 구원받겠다고 힘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정지화면 하기 위해서. 정지화면에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정지화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학대한 자가 애굽이죠. 애굽도 정지화면에 들어가는데 어떤 식으로 들어가느냐 하면, 까불다 맞았다는 식으로 애굽이 여기 정지화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정지화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했다고 들어가죠.
이 삼의 주체가 조합이 되어서 계속 그 다음 역사를 이 기준에 따라서 이끌고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 유월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누가 부러우냐 하면, 힘 있는 애굽인이 부러운 거예요.
여기 11장 7절.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면 구별 당했던 이스라엘이 자랑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자기는 구별 당했기 때문에.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해야 돼요. ‘주여, 왜 하필 저를 구원하십니까?’ 매일같이 묻는 것이 ‘하나님이여, 왜 저를 구원하십니다. 구원 안 해도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