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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10. 1. 22) 2강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광주강의(2010. 1. 22) 2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1. 22) 3-2

지금 두 사람이 있는데, 에스겔 몸을 진짜 몸이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그가 두루마리를 먹었기 때문에(그 몸 안에 성경책이 들어 있으니까).

여기서 에스겔이 말을 한다는 것은, 철근 구조물이 삐져나와서 에스겔이 갖고 있는 이 구조(이것을 인자 구조라고 했습니다)가 나중에 메시아 구조, 즉 예수님 구조잖아요.

이렇게 에스겔이 나가는데 이쪽에 있는 백성들, 3장 4절 이하에 보면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이니까 지금 제가 이야기할 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인자가 개인의 자격이 아니고 하늘의 구조를 몰고 가서 대화를 하는데, 대화를 한다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 시간에 얘기 했지요. 대화를 한다는 것은 연결하는 것인데, 연결해서 거기에 포착된 사람은 말을 던진 사람의 구조에 합류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세요.” 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믿게 되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데 그 이유가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이 어느 구조에서 나왔어요? 천국 구조에서 나온 거잖아요. 이것을 언약이라고 하지요.

“십자가 피가 당신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라는 것은 누가 지어낸 겁니까?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조에서 삐져나온 것이지요. 영화 [프랜스포머]처럼 이것이 삐져나올 때 이것은 누구를 보고 이야기합니까?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언어를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어요. 말이 어려워서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가 일치 될 때 동의가 됩니다. 그래서 복음은 필히 방언으로 해야 될 이유가 이것을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의 의미입니다.

어제 집사님도 할머니께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지요? 그 말을 할머니가 왜 못 알아듣는가 하면, 할머니의 구조가 따로 있어요. 집사님은 할머니의 구조에 대해 잘 모르는데 복음을 전해보니까 그 할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는 것이 들통 난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구원 받으라고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이래서 지옥 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뜻도 있어요. 복음이 양 날을 가진 칼과 같아서 받는 사람은 구원이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지옥이고. 이 양쪽 다를 겨냥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목사가 사람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 구조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내가 무엇이든 행하면 그 행한 대로 내가 보상을 받는다.’ 즉 ‘바치면 복 받는다.’ 이런 구조인데, 그런 구조 속에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은 배척 받지요.

(경기의)주심도 없는 교회에 가서 구원 받는다고 앉아 있으니까, 이것은 차가 떠나지도 않았는데 금강산 관광 온 줄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천국에 대한 이미지만 있을 뿐이지 천국 근처에도 못간 엉터리 교회예요.

방주와 유사 방주의 차이점은, 진짜 방주는 물위로 떴다는 것이고 가짜 방주는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관광코스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듣고 그냥 오는 거예요.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계속해서 나와요. “여러분, 헌금해도 복 못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 해요. 왜? 이미 우리는 복 받았기 때문에. 복이 무엇인가? “여러분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아이티 지진 일어나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돈 내려고 하면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돈 내세요.”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전 세계, 온 국민이 아이티에 성금 보내자고 하는 마당에 ‘보낼 필요 없다.’고 아니까 그 말의 뜻을 못 알아들어요. 구조가 달라서 그래요.

그래서 선지자는 죽을 지경입니다. 왜? 서로 소통이 되어야 (복음)전하는 재미가 있는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핍박 받으라고 말을 전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데 선지자는 감은 먹고 그 다음에 감나무를 심어야 하는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감을 먹었으니 맛이 어떠했겠습니까? 달고 맛있지요. 3절을 봅시다.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입에서는 달지만 나중에 뱃속에 들어가면 씁니다.

자, 이제 구조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해 봅시다. 구조라는 것은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힘으로 이루어지게 되면 뭐가 없느냐 하면, 나(주체)는 힘의 지배를 받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맞선을 볼 때 “아가씨, 저 어때요?” 하고 남자가 물으니까, 여자는 “직장은 어디시지요?” 하고 되물어요. “아니, 내가 어떠냐고요?” 그런데 여자는 직장이 궁금한 거예요. 삼성그룹이면 좋겠는데 삼성사(시골 영세기업)라고 하면 곤란하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어느 힘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이걸 여자가 묻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남자는 ‘저 어때요?’ 하니까, 여자는 ‘아버지는 뭘 하시는 분입니까?’ 이렇게 나오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람의 주체라는 것은, 사람의 주체(나)는 없고 쪼개보면 힘의 조합입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가시적인 힘의 조합을 만들어요.

여자들이 옷이나 반지, 가방, 신발 이런 것들을 명품으로 하고 다닐 때, 힘을 둘둘 감고 있는 거예요. 그 힘을 감고 힘의 시장으로 나가지요. 그러면 저쪽에서 또 다른 힘이 와요. 힘이 빠져버리면 주체가 사라져 버려요. 그런데 힘이 있으면 남에게 과시하기는 좋지만 뭐가 문제냐 하면, 힘에 종속 된다는 것. 비자유죠.

자신이 내세울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 “우리 고모는 변호사고 우리 외삼촌은 사장이고--” 하면서 자기 주변에 있는, 내가 감고 있는 힘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말을 못하는 거예요. “Who are you?(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는데, “나는 의사입니다.” “직업을 묻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누구냐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나는 내가 어떤 자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요.

나는 어느 집안에 예속되어 있고, 어느 직장에 예속되어 있으며, 어느 학벌에 예속되어 있으며, 통장 잔고는 얼마나 되며 등등 항상 힘의 지배를 받아서 내가 힘이 없다면 나도 없어져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가지고, 개업하는 가계에 춤추고 있는 ‘키다리 풍선’이라고 합니다. 혼자 촐랑대로 춤추고 난리를 치는데 플러그만 뽑으면 바람이 빠지면서 그냥 힘없이 주저앉지요.

세상이 전부 자기 자랑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생각해서 그렇고, 세상은 힘의 구조입니다. 이것을 매트릭스라고 하지요. 즉 힘의 구조. 이 힘의 조직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아바타]라는 영화입니다. 여기에 보면 두 개의 구조(매트릭스)가 나옵니다. 한쪽 구조는 개화된 백인 구조가 나오고, 다른 구조는 인디언 구조인데 나비족으로 나옵니다. 이 두 구조의 차이점은, 백인구조는 자체적인 힘으로써 구조를 만든 것이고, 인디언 구조는 자체적인 힘이 아니고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구조입니다.

그러면 이쪽(인디언)은 신이 자기 바깥에 있겠죠. 그리고 신이 있으니까 신에 의존적이죠. 자꾸 기대는 거예요. 그런데 저쪽(백인)은 신이 없고 자기 자신들이 전부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힘을 합치겠지요. 이렇게 되면 이쪽에서는 신이 주체가 되지요. 저쪽은 (힘이 뭉쳐진)덩어리가 주체가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문명입니다. 이것이 [아바타]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현대문명은 독자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독자적이 아니고, 내가 소속된 힘 덩어리가 독자적이 돼요. 그러면 나는 그 힘에 굴복해야 될 부속품이 되지요.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습니까, 교회 때문에 구원 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지요. 그런데 기존 교인들에게 이 말을 하면 화를 내지요. 왜냐하면, “당신이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라고 하니까, 기존 교회에서 하는 말이 “우리 교회가 예수 믿어.” 이러고 있어요. 본인 이야기를 안 하고 ‘우리교회 목사님은 예수님을 전한다니까’ 이렇게 말해요.

왜 교회가 나옵니까? 주체가 자기가 아니고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보이는 하나의 구조가 자기를 대행(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를 대신하는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의 주체는 예수님으로 확정되었어요. 그러기에 구태여 내가 주체가 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힘의 구조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언제 다른 교회로 떠나는가 하면, 자기는 평소에 매월 10만원 헌금을 하는데 20만원 헌금 하는 사람이 오면 자기는 상대적으로 사랑을 덜 받겠지요. 그러면 그 교회를 떠나요. 다른 교회 가서 사랑 받으려고. 사람들이 목사에게 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해요.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자기 주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힘이 되는 곳으로 자꾸 떠돌아다닙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노마디즘(유목주의)’이라고 하지요. 친구도 돈 없으면 다른 돈 있는 친구로 옮겨갑니다. 힘 있는 나를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자꾸 이동해야 되고 떠나야 하고 그런 거예요.

TV [6시 내고향]을 보니까, 시골 어떤 마을이 나오는데 청년회 회장이 65세입니다. 이분들은 자녀 안 낳았습니까? 그러면 젊은 청년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시골에서 자녀들을 붙잡고 “얘들아 너는 나랑 같이 이곳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자.” 라고 하는 부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나는 못 배워서 시골 촌구석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이 가난을 너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다. 너는 돈 벌 수 있는(힘을 얻을 수 있는) 도시로 나가라.” 이렇게 해서 다 떠나보냅니다.

주체라는 것은 없고, 그저 내가 숨을 수 있는 힘을 찾아서 계속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힘의 구조에 지배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해야 하는가 하면, 에스겔은 몇 명이지요? 한 명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전하는 사람은 명 몇입니까? 이스라엘 전체지요. 숫자로 보면 약 100만 정도 될 것입니다. 1:100만 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100만 명을 1명으로 봐요.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몸은 하나밖에 없어요.

지금 화평교회에 여러 명 계시지만 하나님은 여러 명으로 보지 않고 한 명으로 봐요. 그 이유는 하나의 몸이 하나의 혜택, 하나의 용서를 받으면 절대로 두 명이라고 우기지 말란 말이지요. 왜? 주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주체를 인정 안 해요. 그 사람이 하나님께 힘을 받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너희 교회 몇 명이냐?” 하면, “우리 모두 주님의 몸입니다.” 이렇게 답변해야 합니다. “10명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말고. 왜냐하면, 주체라는 것은 숫자로 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소속된 힘이 어디서 오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란 말이지요. 세상에서는 세상의 힘을 보여주지만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전에 예정되어서 우리가 하나의 주체로써 활동하는 겁니다.

제가 주체를 말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러면 목사님은 아예 주체가 없네요? 그러면 불교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주체가 없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 땅에서 주체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을 증거하지만(사실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속한 힘을 증거하는 거죠)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지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 하나 던지고 갑시다. 그러면 에스겔을 하나님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인자. 인자라고 부른 것은 에스겔 안에 장차 오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은 하늘의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지요. 그래서 에스겔이 만난 이스라엘은 여러 명이 아니고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구조가 되지요.

그런데 이 구조가 에스겔이 전하는 구조를 거부하지요. 그래서 삼촌, 시동생, 형님 할 것 없이 한꺼번에 다 망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항상 이스라엘을 여러 명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봐요. 갈라디아서에서 이것을 인간 노선이라고 합니다. 인간 노선이니까 굴러가도 같이 굴러가지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다 지옥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구원 받을 사람 없습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에스겔 혼자뿐입니다. “그러면 진짜 다 멸망합니까?” 예. 진짜 멸망합니다. “아니, 그래도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구원 받지 않습니까?” 없습니다. 구원 받을 자는 있어요. 그런데 본인의 힘으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 받는가? 에스겔이 말할 때 전체가 다 거부했잖아요. 거부한 이들의 일부가 어디로 가는가 하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갑니다. 포로 잡혀 가면서 이 사람들은 멸망당하지요. 그런데 이 멸망당하는 가운데서 구원 받을 사람이 튀어나와요. 그러면 어떤 결과가 되는가 하면, 우리는 마땅히 멸망을 당하는데 주님께서 역사하셔서 에스겔이 우리와 동승하게 되면 멸망 받을 인간 노선에서 천국 노선으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탔기 때문에 에스겔 때문에 성령께서 방향을 틀어줘요.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아담의 몸을 가진 죄인이잖아요. 죄인인데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 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멸망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동승해 주니까 우리가 구원 받는 거죠.

그 다음, 우리는 육이니까 인간 노선대로 살지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힘을 그리워하며 살지요. 이것은 누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김 집사님 두 딸이 예쁘고 신앙도 좋고 훌륭한 신부감인데, 만약 선을 두 군데 봤는데 한쪽은 성형외과 의사고 신앙은 없고 겨우 교회 다니는 정도이고, 다른 한쪽은 복음은 아는데 아직은 직장이 없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물을 필요도 없이 의사 쪽을 택하는 것이 100%입니다.

왜 이런가 하면, 우리는 아담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힘을 좋아해요. 에스겔이 말하는 것은 듣지도 않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힘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그들과 동조해서 나도 힘 자랑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평생 죄만 나옵니다.

그런데 방향을 틀어주는 것은 누가 하느냐 하면, 우리가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동승하신 예수님께서 방향을 틀어서 바로 에스겔이 소개한 이 구조에 소속되어 있음을 수시로 알려줍니다. 우리는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하늘의 구조와 대비시켜보면 ‘내가 이런 죄인이었구나. 그런데 이런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희생을 하셨구나.’ 라는 것이 수시로 터져 나오도록 그렇게 하시지요. 이게 바로 에스겔의 주제입니다.

‘멸망해라. 잘 가라 이놈들아. 너희들은 너희 죄로 인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가야 해.’ 이것이 끝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너희들 그곳에 가 있어라. 나도 곧 따라갈게. 그래서 너희들 자체를 하나님의 잃어버린 성전이 되게 할게.’ 라고 하시는 겁니다. 따라가면서 하는 말이 ‘다윗을 내가 보내 줄게.’ 그 다윗은 누구인가? 여호와. ‘여호와를 보내 줄게. 너희들의 목자로.’ 하고 멸망당하는 자들을 따라가면서 동승해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상당히 슬프지요. 그런데 왠지 오늘날 우리들은 세상길로 나가면서 왜 즐거운지 모르겠어요. ‘예수 믿었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면 된다.’ 지금 이스라엘은 슬펐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포로로 잡혀 가야하니까. 이것이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입니다.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줘놓고 쫓겨났다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잖아요. 나중에 약속의 땅에 돌아오게 되면 약속의 땅이 하나가 아니고 둘로 갈라져요. UFO처럼 약속의 땅이 밑에 있고, 그 약속의 땅이 내려앉는 그림자가 뭐냐 하면, 바로 학개, 느헤미야, 스가랴에 나오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쪽 성전은 소용없어요.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하는데, 다시 본토에 성전을 짓는다면 그 성전은 깨어집니다. 왜냐? 그림자이기 때문에. 어쨌든 이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있다가 바벨론에 잡혀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우리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이방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붕 뜨지요. 우리 머리위에 약속의 땅이 붕 뜨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늘 같이 가요. 우리 가슴속에 그림자가 남고, 천국의 그림자가, 천국의 구조가 힘만 좋아하는 우리 구조 속에 겹쳐서 그림자처럼 내려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에스겔이 참 쉽지요.

그렇다면 방향을 틀어줄 때, ‘아하 우리가 구원 받았구나.’를 알게 되는데, 그 방향 틀어줄 때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고난을 알면 우리의 관심사가 여기에 꽂히게 되고, 그러면 나의 고난과 고통을 잊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고통과 고난을 잊으면 뭐가 크게 부각되겠어요? 나의 고통과 고난이지요. ‘아, 내 팔자는 왜 이런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어제 어떤 분이 제게 전화해서 “목사님, 죽고 싶습니다.” 라고 해요. 그 소리 듣고 제가 속으로 “할 일이 없구나.” 생각했어요. 바빠 보세요. 그러면 그런 전화 하지도 않지요.

8절을 봅시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이마가 딱딱하다는 것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이마로 대변되는 시대였습니다. 표정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딱딱하다고 하니까 씨도 먹히지 않지요. 그래서 11절을 보면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 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려면 거짓말을 안 하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해요. 거짓말 안 한 것이 있어야 거짓말 한 것이 드러나지요. 좋은 딸기만 있으면 ‘딸기가 섞었네.’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바구니에 담긴 딸기 중에 좋은 것도 있지만 섞은 것이 있어서 서로를 비교해서 ‘섞었네’ 또는 ‘싱싱하게 좋네’ 라고 할 수 있어요.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 안 하고 있는 것이 있을 때 거짓말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거짓말 하는 ‘나(첫번째 나)’와 이것이 바로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나(두번째 나)가 있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나’가 몇 개입니까? 두 개지요. 한 쪽 ‘나’는 ‘이번에는 거짓말 했지만 자꾸 거짓말하면 탄로 나는데, 다음에는 거짓말 안 해야지.’ 라고 하면서 타협조로 나와요.

만약에 진짜 IQ가 50정도 되는 사람 같으면 이 사람은 두 번째 나(반성하는 나)는 없지요.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인줄 모르지요. 이것은 비정상적인 사람의 경우고, 정상적인 사람은 반드시 거짓말을 했으면 거짓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짓말을 지적하는 ‘나’가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나’가 두 개가 됩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 거짓말 하는 나와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는 나. 이런 내가 처음 몸을 가지고 태어날 때 구성된 신체는 거울을 보면서 처음에는 눈하고 입밖에 몰라요. 그래서 모빌을 달아놓으면 모빌을 통해서 눈동자 운동하고, 입으로는 엄마 젖을 빨지요. 그러나 팔, 다리가 있는 것은 잘 못 느껴요. 알면 오줌을 안 쌀 텐데 있어도 몰라요.

그렇게 느끼다가 3개월쯤 지나면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전체가 보여요. 거울 속에 있는 것이 자신이란 것을 알아요. 자아가 전체적으로 윤곽이 잡히면서 처음 자신을 느끼는 이 단계를 ‘거울 단계’라고 합니다. 라캉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누가 얼굴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때려도 내가 맞는다고 여겨요.

처음에는 얼굴 중심으로 나를 느끼다가 좀 지나면 팔, 다리도 나인 것을 아는 것이지요. 이 단계는 엄마와 자신이 나눠지지 않아서 엄마가 없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fort - da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장난감인데, 던지면 실패에서 풀려서 멀리 갔다가 되돌아오는 장난감인데 얘들이 이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엄마가 있을 때(실패가 있을 때)와 엄마가 없을 때, 나에게 엄마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그것으로 내가 나인 경우와 내가 나인 줄 모르는 경우 두 가지뿐입니다. 엄마가 있어야 나를 아니까.

그 때부터 인간은 ‘나’라는 것은 나를 감싸주는 남을 통해서 나를 아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대화를 통해서 남을 아는 거죠. 그리고 남을 통해서 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잘 못 느끼는데, 아이가 ‘엄마 밥 줘!’라고 했을 경우에 비로소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꼭 남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합니다. 남이 형성해 주는 그 공간이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남이 동그라미로 나를 규정하면 나는 동그라미가 되고, 남이 나를 네모나게 보면 나는 네모난 사람입니다.

여기 이 자아에서 나온 것이 현재의 나인데, 여기서 거짓말 하는 것은 왜 합니까? 남을 속이기 위해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남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잖아요. 그래서 남이 없으면 거짓말 합니까, 안 합니까?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이것이 성경적으로 맞는가? 맞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의 타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여자의 타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입니까? 남자예요. 남자에서 나왔다고 해서 여자가 된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봐요. 남자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데 여자는 남자 없이는 못 살아요.

그래서 결국 주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남편으로 보는 여성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독자적인 남성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아쉬운 것이 없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아쉬운 것도 없고 나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그것만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종속이 되잖아요.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자기를 다스리는 주체가 따로 있게 한 거죠. 즉 이방 민족에게 사로잡히게 만들어서, ‘야, 이 세상나라보다는 역시 그 때 여호와가 좋았다.’ 라고 깨닫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상 좋은 것 실컷 맛보다가 버림 받고, 설움 받아봐야 그제야 ‘하, 주님 섬길 때가 좋았다.’ 라는 것을 매일 느끼게 만들지요. 특히 주일날 교회 가다가 야바위꾼이 보여요. 그래서 헌금할 돈을 가지고 야바위 게임에 참여해서 ‘돈을 따서 더 많이 헌금해야지.’ 하다가 돈을 몽땅 날리지요.

이처럼 돈을 잃어봐야 ‘아, 하나님께 헌금할 돈을 함부로 유용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교회 재정을 맡은 집사가 교회 돈으로 이자 많이 준다는 곳에 투자를 해서 돈을 다 날릴 때 ‘야, 주님의 돈을 함부로 굴리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듯이.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 모델인데 우리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선이 따로 있는데 이 노선이 뭐냐 하면, 과거 - 현재 - 미래로 이어지는 노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 보세요. 과거가 얇은 것이 아니고 두꺼운데 이 밑으로 내려가요. 밑으로 내려갈 때 현재라는 것은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현재가 이것을 선택 합니다. 선택하는 이유는 자기는 힘의 구조이기 때문에. 힘의 구조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세상의 힘이죠. 세상의 힘은 타인이고.

남들이 즐기는 것을 나도 즐기고 싶다. 따라서 내 과거 가운데서 숨기고 싶은 것은 숨기고, 자랑할 것은 꺼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재 인간이란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체로 있는데, 이 주체는 반드시 타인이 불러줄 때 나는 산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장이 불러줄 때 그 과장은 인정받는 과장이 되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관계가 늘 유지가 되어야 해요.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그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부부싸움에서 남자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자가 말을 안 할 때입니다. 뭘 물어도 대답도 없고, 뭘 요청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여자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내 존재가 없이 한 번 살아보라는 것이지요.

당신은 내 주체 형성에 있어서 쓸모없는 존재이기까 개입하지 말라. 당신은 내 주체에 전혀 보탬에 안 되고, 지금 있는 내 주체를 더욱 힘들게 하기 때문에 당신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만약에 지금의 현재를 이룬다면, 그럼 미래는 뭐냐? 현재가 골라낸 과거에서 잘 된 것을 미래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것을 금지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노선인데 이것을 잘라버립니다. 잘라버리고 하나님이 동승하게 되면, 현재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지요. 잡혀 가는 자의 희망은 뭡니까? 다시 약속대로 풀려나서 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희망을 들어주지 않는다니까. 하나님이. 이게 오늘 강의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노선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이것은 기존 교회에서 하는 주장이고), 인간 노선을 구원할 때는 예상 못한 인간으로 나오게 해요. 예전에는 돈 100만원으로 한 달을 못산다고 했는데 은혜를 받고 난 뒤에는 돈 90만원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그런 새로운 인간으로 나오는 거죠.

방금 제가 100만원으로도 못 사는데, 90만원으로도 산다고 했지요. 저에게 이런 소리 들은 것을 여러분은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앞으로 희망은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 일 때문에 90만원으로 사는 일은 없습니다.

참 인간은 재밌어요. 방금 제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미래는 우리가 예상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현재 100만원인데 300만원짜리 미래를 예상했는데 하나님께서 예상 못하는 90만 원 짜리로 인도할 때, ‘90만 원 짜리로 인도합니다.’ 라고 제가 이야기하면 ‘그럼 90만 원짜리 미래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지.’ 라고 해서, 이 미래는 어디에 포함 됩니까? 현재 100만 원 짜리가 포함되는 이 노선에 포함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제가 이야기한 것을 미리 여러분이 알았잖아요. 미리 안 것이 일어나는 법은 절대 없어요. 왜냐하면 그쪽은 옛날 현재 노선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자 되게 하는 것은 쉬워요. 앞으로 10만원으로도 살 겁니다. 이러면 여러분은 부자 될 겁니다. 왜? 앞으로 그런 일은 안 벌어지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주여, 이번에 기도 응답해 주시면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막상 기도가 응답되면, 예전에 기도할 때 봉사하겠다고 생각했던 그 심정이 기도 응답 후에는 안 생깁니다. 왜냐? 이미 누구 노선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미 내 노선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 도와준다니까. 하나님은 항상 예상 밖의 일을 펼칩니다. 아무리 예상을 해도 그 예상을 빚나가게 늘 새로운 것을 주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상을 하면 내가 그것에 대해서 견뎌요. 그것을 인내하며 버틴다고.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 예상을 합니다. 과거에 시험 치기 전에 내가 잠을 잤기 때문에 시험을 망쳤다. 이것이 과거지요. 이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요. 현재가 선별합니다. 과거 내가 시험 치기 전에 9시에 잤다. 10시에 잤다. 11시에 잤다. 이 중 어느 것이 제일 효과가 있었는가? 아, 11시에 잔 것이 효과 있었다. 그러면 11시에 잡니다. 그렇게 11시에 자볼 때 현재의 자리에서 예측이 되지요.

새벽 3시까지 공부하고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시험 시면 이번에는 적어도 90점은 나오겠지. 라고 예측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예측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현재에 예속된 예측이잖아요. 이것은 해봐야 소용없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 되는가 하면 11시에 일어나서 새벽 3시까지 하면 막판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집중력을 발휘했기에 된다. 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난데없이 옆방에서 축구 국가대표 경기 중계방송이 있어서 그것을 좀 보다가, 아니지 내일 시험인데 공부해야지. 생각해서 공부할 때 그 때 자신도 모르게 집중이 돼요.

그러니까 집중이란 것은,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 공부에 집중이 됩니다. 공부할 때 뭘 잊어버린다? 내가 공부하고 있나, 아닌가 하는 자체가 생각나지 않을 때 가장 공부가 잘 돼요. 그런데 현재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시험 잘 치겠나?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면 공부가 집중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언제,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상한 것이 전부 빚나가게 합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그 예상 끝에 ‘나’가 있어요. 나를 의식하고 ‘주여, 내가 어떻게 하면 복 받겠습니까?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절대로 여기에 동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주님께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생길 때는 뭘 잊습니까? 나를 잊게 되지요. 그 때 갑자기 멀리 있던 불평 요소가 나에게 다가와서 하나의 천사가 되고 전부 감사의 요인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이다.’ 할 때 평소에 나무라던 자식도 예뻐 보이고, 애먹이고 늦고 집에 돌아오는 말썽꾸러기 녀석도 사랑스럽고 모든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은혜가 온다는 것은 주변에 내가 천대했던, 내가 시시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다시 몰려와서 주님이 주신 하나하나의 은혜의 선물로 다시 모일 때 그 주체는 내가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을, 예수님의 은혜로 집중화 되는 그런 현상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이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11절을 다시 봅시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다 잊어버리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나게 되지요.

12절에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여호와의 성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하니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에스겔의 이름이 뭐라고요? 인자. 위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하늘의 구조. 이것이 몇 절입니까? 이것이 13절부터 쭉 나오지요. 밑에는 뭐가 있죠? 말 안 듣는 땅의 백성. 거기에 에스겔, 인자가 동승하지요.

그러면 인자를 성도로 봅시다. 성도의 위에는 뭐가 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고. 아래는 뭐가 있습니까? 예수 안 믿는 광주 사람들. 이 속에 누가 있다? 성도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래를 보지 말고 위를 보고 살라는 겁니다. 땅을 보면서 내 말이 사람들에게 안 먹힌다고 세상을 보면서 불평하게 되면 계속 자기 자신의 위치가 세상적인 주체가 되어버려요.

우리 주체는 내가 아니고 누가 만들어준 주체입니까? 하늘의 구조가 만들어 준 주의 복음 전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내가 내 주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말씀이 와서 인도하는 대로, 방향대로 우리가 살면 위도 보이고 아래도 보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우리가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구원의 힘, 용서의 힘 속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로 인하여 그동안 불평, 불만했던 모든 것도 다 사라지고 주님 주신 용서의 힘이 우리의 행복이 됨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3. 4. 14:3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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