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2월 26일 에스겔 3:12 주의 처소의 움직임
광주 2월 26일 에스겔 3:12 주의 처소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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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26 겔3:12 주의 처소의 움직임 (처소와 영광)
관리자(IP:118.♡.205.170)
10-02-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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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16 19:39
광주100226a에스겔3장12절a
광주 강의(2010. 2. 26) 4-1
에스겔 3장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먹으라”고 했고, 그 다음 7절에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이 여기 있는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라고 하시면서 에스겔에게 찾아왔습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은 말씀의 덩어리가 한꺼번에 다가오는 것이지요. 이것을 깔때기로 봅시다. 이 깔때기가 에스겔을 인자로 바꾸지요. 인자 되게 하는 겁니다. 인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이 에스겔을 인자 되게 하는데 깔때기가 있고 깔때기 위에 모든 말씀이 다 (부어져)들어가지요.
여기 부어지는 말씀의 덩어리는 에스겔이라는 몸체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됩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에스겔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만약에 신자라면 오늘날 신자도 전부 에스겔처럼 되어야겠지요. 깔때기를 통해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그 말씀이 바깥으로 전해지는데 이 말씀을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들을 때, 이것은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에스겔 영역과 바깥 영역은 점점 더 갈라집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오늘 공부할 것을 본격적으로 해 봅시다. 12절에 보면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라고 했는데,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은메달, 동메달을 딴 선수가 금메달을 딴 이승훈 선수를 번쩍 들어 올렸어요.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첫째시간은 이 대목을 깊이 있게 살펴볼 겁니다. ‘주의 처소’지요. 3장에 보면 에스겔이 있는 영역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영역이 구분되어 있고, 방금 제가 질문한 것은 에스겔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했고, ‘에스겔 당신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나는 선지자입니다.’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나 되기 위해서 나를 번쩍 들어 올리는데, 누가 올립니까? 성신이 나를 올리고, 그 성신은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하게 합니다.
자, 여기서부터 확대하겠습니다. 인자와 에스겔을 확대하게 되면, 에스겔의 이야기를 왜 못 알아들었는가 하면, 에스겔이 있는 이곳, 깔때기로 말씀 덩어리가 채워진 이곳이 주의 처소가 되었고, 주의 처소는 주변에 성신으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뭘 보여주는가 하면, 주님의 처소가 같이 움직이는 것이 되는데, 이 주의 처소에는 성신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도 같이 움직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뭐냐? 그 사람 내부가 주의 처소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남이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김연아가 아무리 연습해도 도저히 우리를 못 따라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 우리 안에 주님의 처소가 발생되는 것.
이런 주의 처소가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시상대를 만들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주여, 이제는 종을 편히 쉬게 하시는군요. 내가 이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지금까지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늘나라 애국가가 들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김연아가 금메달을 땄는데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사다마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연아가 또는 아사다마오가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인데, 그것이 있는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제가 성도를 말씀 덩어리로 보는 이유가 뭔가 하면, 교회 다니는 연습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도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서 에스겔이 전한 그 말씀 덩어리를 전하는 거예요. 그러면 바깥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나오는 장로나 집사들이 말씀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지요. 이것이 바로 에스겔 3장의 내용입니다.
‘에스겔아, 말씀을 먹어라.’ 그리고 그 먹은 말씀을 전하면 주변 사람들이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다? 도저히 못 알아듣지요.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은 김연아나 아사다마오처럼 ‘네가 하면 나도 한다.’라고 흉내를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흉내만 내지요. 흉내를 내는 것은 연습하면 가능합니다.
아무리 연습하고 흉내를 내도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은밀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외부사람들이 아무리 흉내를 내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에스겔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거룩한데, 이 거룩이란 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레위기에서 나옵니다. 레위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출애굽기에서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시내산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 원판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원판은 깨어지고 복제판을 만들지요. 복제판 만들 때 누가 개입하는가 하면, 인간의 손이 개입됩니다. 모세가 만들지요. 복제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이미 너희는 언약을 깨뜨린 자다.’ 언약을 새삼스럽게 지키는 자가 아니고, 이미 언약을 위배한 자를 품고 주께서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인도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위반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그 중앙에 이스라엘의 본질, 언약을 깨뜨린 자라는 그 본질이 담겨 있고, 레위기 3장에 보면 제단에 피를 뿌리게 되어 있어요. 이미 언약을 깨어진 상태입니다.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는 그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아사다마오가 기독교 신자 되려고 시도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냥 피겨 스케이트나 타라고 하세요. 하늘나라에서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본인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없고 깨뜨린 자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필요합니다. 그 외에는 필요 없어요. 세리, 창기가 필요한 거예요. 훌륭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이 거룩이란 것이 레위기에서 오는데, 그 전에 출애굽기를 이야기하겠는데, 출애굽기에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근접한 장소에서 만나게 됩니다. 만날 때 모세는 반석위에 그냥 서있고 하나님이 지나가지요. 그렇게 되면 반석위에 있는 모세가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하나님은 지나가면서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 입을 자에게 긍휼을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비와 긍휼이 모세로 하여금 항상 stop(정지)시키죠. stop 시키게 되면, 모세는 은혜를 받아야 살고 자비를 받아야 산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모세로 하여금 언약 위반자로서 정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자기가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언약 위반자가 아니야. 나는 잘만 하면 말씀 지킬 수 있어.’ 이렇게 나서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나 자비를 베푸는 입장이 아니고 지상에 있는 인간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만약에 인간이 나서고 설치게 되면 무슨 의식이 날아가는가 하면, 나는 언약을 안 깨뜨릴 수 있다는 의식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됩니다. ‘잘만 하면 하나님 말씀 지킬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언제까지나 죄인 취급받는 것은 싫어. 얼마든지 의인 될 수 있고,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데 왜 평생을 죄인 취급 받아야 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가만히 있어!’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그래서 내가 설치게 되면 하나님이 stop 돼요. 화살이 날아가면 화살의 색깔이 안보입니다. 이 안 보이는 것을 보기 위해서 잡습니다. 잡는 순간 stop 되지요. stop 되면, 날아가야 할 것이 정지되었지요. 이것은 동사에서 명사로 바뀐 거예요. 원래 화살은 날아가는 것인데 인간들이 이것을 어떻게 왜곡하는가 하면 ‘이것은 내 손에 잡혔으니까 stop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stop 된 것을 가지고 ‘동시성’이라고 합니다. ‘동시성’이 뭔가 하면, 앞과 뒤가 똑같다는 거지요. stop 되었으니까. 여러분, 날아가는 파랑새가 파랑새입니까, 손에 잡힌 파랑새가 파랑새입니까? 날아가야 새가 새답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날아가는 것은 정확하게 안 보이니까 내가 그 새를 잡아놓고 ‘빨리 그림 그려!’ 그러면 그 그림에 있는 새는 동사가 아니고 명사가 되지요.
우리는 항상 뭐든지 명사로 만들어서 해석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명사기 때문에, 내가 stop이기 때문에 너도 나와 같이 stop으로 잡아서 사태를 파악하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내 행함에 대해서 긍정하게 됩니다. ‘내가 왜 언약을 깨드려. 내가 왜 죄인이야? 하나님! 말씀 주옵소서.’ 말씀이 움직이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잡아요. 그래서 지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이며, 예수님을 죽었던 사고방식입니다.
사람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인자와 자비를, 말씀 덩어리가 결국은 인자와 자비인데, 인자와 자비를 망태기에다 담아버리면, 인자와 자비는 동사지요. 움직이는 겁니다.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인자와 자비가 넘쳐.’ 라고 하면, ‘2월 26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인자야?’ 라고 묻는다면 그 물음이 합당치 않지요. ‘아니, 우리 할머니는 늘 인자하셔.’ 이렇게 되거든요.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인자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할머니, 이쪽으로 와 보세요. 할머니 인자 내 놓으세요. 감사합니다. 우리 할머니는 인자하셔.’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날아가는 화살을, 날아가는 인자를 내가 붙잡아서 내 주머니에 넣고 하는 말이 “주여, 인자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어요. 그러다가 교통사고 나서 다치면 “하나님, 인자로우신 분이 왜 이런 일을 일으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인자가 나를 망태기에 담아서 인자가 변화됨에 따라서 같이 변화되는 거예요. 인자가 롤러코스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자(롤러코스트)를 잡아버리면 인자는 제일 싫어합니다. 우리는 인자의 망태기에 담기기 때문에 인자가 위로 올라가면 우리도 위로 올라가고, 우리가 차사고가 나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인자를 느끼고, 로또 복권 100억에 당첨되면 그곳에서 인자를 느끼고, 인자는 롤러코스트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우리도 같이 타면 인자가 없을 때가 없고 자비가 안 올 때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약 위반자였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가해자입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가해자로써 주를 따라 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어느 한쪽에 고정시켜놓고 인자를 고정된 지점에다 퍼 담으려 하니까 ‘내가 원하는 인자가 아니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처음에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서 계약했던 그 계약에 위반됩니다.
출애굽기 34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돌판을 처음 것과 같이 만들어서 올라오라고 하시고, 모세가 그 만든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6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하나님은 이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입니다. 이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경우이냐 하면, 9절에 보면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이것이 하나의 계약인데, 주님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하면, 우리는 목이 곧고 처음부터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할 경우에만 만남이 되지요. 우리는 천하의 죄인인데 이런 죄인도 주께서 용서하시니까 그보다 더 위대한 자비가 어디 있으며 긍휼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것은 간단하지요.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고, 죄가 많고, 악을 저지르는 자다.’ 이런 모습으로 인자의 자비에 끌려가서 롤러코스트를 타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의 코스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데,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것은 멸망의 과정을 통해서 인자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언약을 이야기할 때 상자(궤)로 이야기합니다. 노아 언약은 뭘로 이야기합니까? 처음에는 방주였고 나중에는 하늘의 무지개였지요. 그렇다면 이 모세 언약의 언약 상자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이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우리가 바로 하나님 언약을 깨뜨린 장본인입니다.’ 라는 증거가 들어 있어요. 그러면 이 언약 상자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면 뭐가 되겠습니까? 우리 안에 언약궤가 있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내가 말씀을 지켰다는 말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합니다.’ 이러면 된단 말이지요.
‘우리가 세리고 창기며 저주 받을 사람입니다.’ 이러면 된단 말입니다. 그 언약이 나중에 새언약으로 바뀌거든요. 새언약으로 바뀌면 거기에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는데, 우리는 가해자가 되고 예수님은 피해자가 되셔서 우리 안에 살과 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거룩이고 자비고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듯이 김연아가 열심히 노력하고 좋은 코치 만나서 잘 지도 받으면 금메달을 딸 수도 있지만 언약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방금 출애굽기를 이야기했는데, 레위기에 대해 살펴봅시다. 레위기는 어렵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위기는 ‘우리가 바로 제물이다.’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입니다. ‘목사님, 우리 아이가 고3인데 대학을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는데, 제 답변은 하나뿐입니다. ‘제물이 되세요.’
내가 있는데 내가 소나 양이나 염소로 바뀌면 돼요. 내가 혼자 있을 때는 내가 무릎 꿇을 사람도 없고 경배할 사람도 없고 섬길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소나 양이나 염소가 되면 나보다 더 거룩한 분이 내 앞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제 딸의 말에 의하면 지금 독일에서는 한국인 기독교 연합 집회가 있답니다. 자기도 가보고 싶데요. 그래서 제가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은혜 받기를 원해요(?). 은혜 받는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인간이다.’ 라고 하다가 인간에서 제물로 바뀌는 것이 은혜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면 나밖에 없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러나 제물이 되면 나는 누구에게 이며 바쳐진 제물, 바쳐진 존재가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너는 제물이다.’ 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산 제물이 되어 바쳐진 존재가 되었다.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제물 된 것처럼 너도 예수님과 같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 되어라.’ 제물이 되면 어떤 것이 좋으냐 하면, 첫 번째는 내가 내 인생을 책임 안 져도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래가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제물 자체가 인격 완성이라는 겁니다.
제물이 되면 내가 내 인생을 책임 질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안 받지요. 어차피 나는 이미 하나의 제물이니까. 카프카가 쓴 ‘벌레’라는 단편 소설이 있어요.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니까 처음에는 가족들이 안타까워하며 챙기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니까 무관심해 져요. 사람이 벌레가 되듯이 우리가 제물이 되면 내 인생을 내가 책임 안 져도 돼요. 그러니까 벌레 된 사람이 다시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애쓸 필요 없이 그냥 벌레로 살면 되는 거예요.
제물이 되면 좋은 점이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미래는 어떤 사람만 필요한가 하면 제물 된 사람만 필요해요. 제가 지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가 로마서 15장 16절을 읽어보세요.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께 제사장 직분을 받았는데, 제사장 직분은 구원 받을 이방인을 제물로 간주해서 성령 안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나의 직무다.’ 라고 했지요.
방금 읽은 로마서 15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이방인으로 하나의 제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물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하나님 나라에 바쳐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제물이 되면 우리를 누가 먹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먹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뱃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마치 우리가 예수를 먹어야 하듯이. 그런 관계에 들어가요.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레위기에 보면 화목제의 경우 제사장이 제물을 먹어요. 그런데 이 제물이 탈 때 냄새가 나는데 그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해요.
레위기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절차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서 그것을 태울 때, 그 때 나는 냄새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아, 참 냄새 좋다.’ 라고 하신단 말이지요. 이거 너무 엽기적이지 않습니까? 양과 소가 태워질 때 본인은 고통스러운데 그 냄새를 하나님이 맡으면서 기뻐하시는 것이 레위기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통닭구이 냄새를 맡으면서 ‘맛있겠다.’ 하는 것처럼.
왜 그 냄새가 맛있는가 하면, 그 제물이 어떤 제물인가 하면, 거룩한 제물이기 때문에 그 제물이 타면서 거룩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의 코에 들어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굉장히 흡족해 하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레위기는 아주 섬뜩하지요. 죽어가는 제물의 존엄성이나 가치, 인격성 그런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어요. 그저 향기로운 냄새만 피우면 하나님은 아주 흡족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물 되게 인생을 책임지시고 미래를 보장하시고 제물 자체가 미완료가 아니라 완료입니다. 제물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우리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인데 왜 이렇게 사는가?’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지요.
‘하나님의 제물인데 너는 왜 이렇게 사느냐?’ 그러면 그 기준이 뭔가 하면, 제물의 특징은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거기에서 뭐가 빠져나오는가 하면, 우리를 제물 되게 했던 거룩이 나오지요. 자, 봅시다. 인간이 있는데 여기에 거룩이 오게 되면 인간은 뭐로 변한다? 하나의 제물로 변한다. 그런데 이 제물은 뭘 품고 있다? 들어왔던 거룩이 하나의 요소로 품고 있다. 그런데 제물이 죽으면서 거룩이 나온다. 이 제물이 타면서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거룩을 주신 것은 제물을 통해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기 위한 하나의 식재료지요. 피조물이 그런 존재입니다. 제가 왜 레위기를 자꾸 거론하는가 하면, 신학자들이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레위기에 대한 위력을 회복하는 것. 그것을 에스겔의 주제로 잡고 있기 때문에 레위기를 제가 거론하는 겁니다.
인간을 제물로 바꾸는데 여기에 거룩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거룩이 임할 때 이 거룩은 어떤 식으로 임하는가 하면, 인간은 이미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인간이 거룩을 못 만들어냅니다. 거룩은 완제품으로 주어집니다. 완제품으로 주어지는데 두 가지로 주어집니다. 하나는 기름이고 하나는 피입니다. 그것이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은 기름과 피를 바르게 되어 있어요. 기름과 피를 발라서 거룩하신 분(하나님)께 보이게, 이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서 대표하게 되면 이 백성들도 거룩에 합세하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를 잠시 보겠습니다. 28장 42절에 보면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여기에 보면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제사장들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거룩이 있으면 살고 거룩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간, 이 공간이 거룩한 공간인데 이것이 이스라엘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공간이 있다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거룩한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았다는데 의의를 부여하라는 겁니다. 나같이 부족한 인간도 천국이란 거룩한 곳에 가더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제사장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만든 이 거룩은 뭐냐 하면, 기름과 피가 발려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하는 모든 율법은 다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기름(기름 부음)과 피(피 흘리심)에서 나왔던 율법과 말씀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은 이 자기 속에 있는 거룩을 보여주기 위해서 백성들이 갖고 나온 이 제물을 통해서 피를 내고 기름을 내어서 피와 기름을 제단에 바름으로 말미암아 이 제물을 바친 백성이나 이 제물을 잡았던 제사장이나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 안에서 같이 공유할 수 있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장치가 마련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제물을 중심으로 해서 백성과 하나님은 동행할 수가 있어요. 이게 바로 출애굽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레위기를 봅시다. 3장 2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라고 했는데, 피를 뿌립니다. 성경을 이렇게 보니까 쉽지요? 우리는 이미 언약을 깨뜨렸다. 깨뜨린 입장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받으면 거룩한 제물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날 위한 인생이 아니고 제물로 살아가는데, 그 거룩은 무슨 요소냐? 피를 뿌리면 그 피안에 모든 거룩이 다 담겨있어서 피를 받으면 우리는 산다.
그렇다면 모든 성경 말씀은 어디를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까? ‘피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것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우리는 언약을 못 지키는데, 언약을 못 지키는 우리를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피를 뿌렸고, 그 피 안에는 모든 말씀의 완성이 다 들어가 있는 거죠. 예수님은 바로 거룩한 피를 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제물로 섬기게 하기 위한 말씀의 완성을 예수님 홀로 다 지켜냈다는 겁니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하지요.
레위가 3장 5절에 보면,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어요. 그리고 16절에 보면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제물을 바치라고 했고, 제물을 바치면 이 제물의 피가 흐르고, 불에 타니까 하나님의 코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지요.
그렇다면 제물을 바치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지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지시하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그야말로 들러리죠. 들러리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대전 강의에서 했어요. 하나님 옆에 누가 있다고? 예수님 계시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이 아래로 축 처져서 다시 위로 올라가게 되면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 모세 언약 이렇게 축 처져서 다시 아브라함 언약으로 돌아간다고 했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시110:1)” 하나님이 하나님께 전달하는데, 이것을 사람(자기백성)을 통해서 우회해서 전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참 쉽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지시하고, 그 지시하신 것을 하나님이 완성했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들러리로 참여된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제물이 되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제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린양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거기에 참여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제물 되셨는데 우리가 제물 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귀하신 아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제물이 되었는데 늘 죄만 짓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 되어서 은혜를 받는데 그것도 못합니까?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은, 결국 ‘이 모든 하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나와는 절교하겠다. 나는 그 말씀에 대해 못들은 척하고,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듣기도 싫고 나는 나 홀로 존재하겠다.’는 것이죠.
우리교회 어떤 부인이 나오시는데, 그 남편에게 교회 가자고 하니까, 수메르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도 유대교의 신 중 하나다.” 이랬다고 해요. 이것이 뭐냐 하면, 자기 이성이 날아가는 신을 잡아서 ‘기독교 신이 어떤 신인가? 옛날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신 중 하나다.’ 수메르는 바빌로니아 남부에 위치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이 발상한 지역·민족, 또는 그 문명을 말하는데 --
결국 이것은 누가 누구를 판단해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판단해야 될 그 진리를 하나님도 아닌 내가 신을 판단한단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욥이 책망 받는 것과 똑같은 책망을 받아요. “욥아, 내가 별 만들 때 너는 어디 있었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참여 안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는데 왜 얘들이 끼어드나 말이지요.
욥기 내용이 뭡니까? 하나님과 누구와 내기를 했지요?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를 했어요. 그런데 욥이 왜 끼어듭니까? 어른들끼리 화투를 치고 있는데 꼬마 녀석이 와서 ‘아빠 나도 끼워줘.’ 이러면 안 돼요.
생명나무, 선악과는 누구만 알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끼리만 아는데 인간이 끼어들지요. 그렇게 되니까 인간 취급을 못 받는 겁니다. 모든 진리는 내가 잡는 순간 파랑새가 아니고 죽은 새가 됩니다. 이것은 원래 파랑새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내일 개혁주의신학회에서 제가 논문발제를 하는데, 그 논문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움직이는 동사를 명사로 잡으려고 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윤곽만 파악할 뿐이지 실재로 움직임 자체는 사람 손에 안 잡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를 몰라요.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고 했을 때 예수님은 답변을 안 했어요. 답변을 해주면 그것이 우리 안에 개념이 되지요. 개념이 들어오면 내가 알고 있는 경험속의 개념이 돼요.
사람이 죽는데, 그 죽음을 자신이 입회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의 마지막에 대해서 그리고 출생에 대해서 관여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우리가 처음과 끝은 제외하고 중간 부분만 끊어서 인생이 이렇고 저렇고 논하지만, 내가 왜 태어났으며 왜 죽는가를 모릅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엄마가 심장마비로 죽은 캐나다 선수가 있는데, 그 선수가 동메달을 땄어요. 제가 수요일에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엄마가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른 사람은 엄마가 있는데 왜 나는 엄마가 없는가?’ 라고 하지만,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데 왜 없는가?’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없어도 될 내가 왜 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해요.
그것은 바로 하나의 제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못 죽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됩니다. 죽으면 우리에게서 뭐가 나온다고 했어요? 거룩이 나오지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용서(“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가 나오잖아요.
죽어서 거룩이 나온다는 말은 살아 있어도 우리 안에 거룩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이 거룩은 제가 강의 초반에 설명하기를, 깔때기에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부어지는데, 이 말씀은 누가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그래서 에스겔의 이름을 ‘인자’라고 불러요. ‘에스겔아, 너는 들러리야. 장차 오실 분이 바로 너한테 역사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님께 하신 모든 말씀을 다 지킵니다. 에스겔은 못 지켜요. 못 지키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에스겔이 해야 될 일을 할 때, 그것은 에스겔이 지킨 것이 아니고 에스겔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지킨 겁니다. 이 상황은 오늘날 우리와 똑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단 한 구절도 못 지킵니다. 못 지키는데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가요. 이게 이상하지 않나요? 말씀은 못 지켰는데 천국은 간다. 그러면 천국 가게 된 이유는 우리 행함(율법 지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계신 분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갑니다. 이걸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나의 행함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내 안에 지켜서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농땡이를 부를 수도 없는 것이 날마다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 자꾸 말씀을 지켜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어기고 싶어도 우리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 없다고 했다가, 말씀을 지킨다고 했다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죄인 되게 하는 그 말씀을 주께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이제 됐지요. 우리가 절대로 못 지킨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그 말씀을 주께서 반드시 지켜내는 거예요. 그래서 면류관도 반납하고 ‘나의 구원은 예수님 십자가의 피로만 받지 내 행함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한다는 말이죠.
자, 이제 에스겔을 봅시다. 3장 27절에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그러면 듣는 사람은 패역한 족속입니까, 아닙니까? 패역한 족속입니다. 패역한 족속이라고 할 때 ‘아멘!’ 하면 그 사람은 구원 받고, ‘나는 패역한 족속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그냥 패역한 족속이고. 둘 다 패역한 족속인데 한쪽은 구원 받는 패역한 족속이고, 다른 한쪽은 구원이 안 되는 패역한 족속이고.
성도는 ‘네 힘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야.’ 라는 말이 기쁘게 들려야 합니다. 대전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의 즐거움이 뭔가 하면, ‘묵살당하는 즐거움. 기도 응답 안 되는 기쁨.’ 이런 것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기도 안했으면 응답 안 될 수가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기도한 것이 의미가 생겨버려요.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패역한 족속인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우리가 패역한 족속인 것이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점점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패역한 족속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는 항상 묵살당하고 거절당하는데, 거절당하는 것이 왜 즐거운가 하면, 우리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책임지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묵살당하는 가운데서 새삼스럽게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기도를 해야 묵살당하는 것도 알 것 아닙니까. 지금 이것이 말장난 같이 여겨지는데 아닙니다. ‘묵살당할 것을 왜 합니까?’ 라고 하면, 만약 기도를 안 하면 묵살당하는 경험을 못합니다. 묵살당하지 않으면 묵살당하는 즐거움이 없지요.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내가 중풍에 걸려 오른손을 못 씁니다. 그런데 침을 맞고 나았어요. 남편은 그게 너무 좋아서 아내의 팔을 사용하도록 장난을 치는데, 아내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의 채널을 확 바꿉니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이 쥐고 있는 리모컨을 빼앗으려고 팔을 붙잡고 야단을 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묵살하고 계시다는 그 즐거움. 내 뜻대로 안 되고 아버지 뜻대로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남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이미 너의 인생은 완성되었으며, 너는 패역한 자야.’ 그래서 우리를 죽여가면서 우리 안에 ‘너같이 악한 죄인도 천국 간다’는 것을,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간다는 것을 만방에 보여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0. 3. 15. 12:01 녹취 : 서경수)
관리자(IP:124.♡.86.6)
10-03-19 19:52
광주100226b에스겔3장12절b
광주 강의(2010. 2. 26) 4-2
에스겔 3장 18-19절에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게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이 굉장히 복잡해서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세분이 등장하는데, 첫째 하나님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깔때기로, 깔때기 안에 말씀 덩어리를 부어주지요. 말씀 덩어리를 달리 표현하면 ‘거룩’입니다. 이 거룩은 어떻게 유지된다고 했지요? 피로 유지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 말씀 덩어리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지시한 모든 것이 들어 있지요.
지금까지 한 내용은 이해되지요? 하나님이 하나님께 지시한 모든 것이 바깥으로 나타날 때는 피로 나타납니다. 이 피는 우리가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주께서 피를 흘렸고, 이 피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는 죄인이며 주님의 자비와 긍휼로만 구원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누구한테 전한다는 것입니까? 이 이야기를 악인에게 전하지요. 그런데 에스겔 자체가 이미 악인입니다. 왜냐? 자기 스스로 구원 못 받으니까. 자기도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구원 받기 때문에 자신도 죄인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악인에게 전할 때는 일단 자기의 것을 전하면 안 되지요. ‘나는 구원 되었으니까 나를 본받으라.’ 이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 받았어.’ 라고 하면 안 돼요. ‘나 죄인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죄인을 위해서 어떻게 하셨다.’가 복음이지 ‘나 죄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대로 한다.’ 이것은 부흥사들이나 하는 짓이지 복음 전도자가 하는 소리는 아니지요. 그러면 악인에게 에스겔 본인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전할 때 ‘본인은 죄인이며, 하나님 은혜로 씻음 받았다’는 이 전체를 다 전해야지요.
그런데 만약 에스겔이 전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에스겔이 두 개로 분리 되죠. ‘나는 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이렇게 분리가 되면 악인이 어떻고와 관계 없이 에스겔과 하나님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에스겔 자체가 하나님 은혜에서 탈락한 악인과 동일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 쪽에 속하는지 아니면 악인에게 속했는지 하는 것은 에스겔의 하기에 따라서 결정 되겠지요. “전해라.”고 했는데 “나는 안 전할래요.”라고 한다면, 악인이 저주 받을 그 피 값을 에스겔에게 찾겠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런 지시를 내리는 이유가 뭡니까? 에스겔로 하여금 결코 너의 전한다는 선한 행위가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너희에 임했다는 것(강조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네가 말 안 듣는 악인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네 믿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형식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해도 참 어렵네요. 이것은 쉽게 할 수가 없어요.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인자로써 죽음을 당하는 그 이유가 뭔가 하면, 하나님을 전하라고 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전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신의 자랑을 전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 버려요. 그러면 예수님 자체가 누구한테 버림 받습니까?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지요.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전 강의에서 여러 번 했는데 다시 해 봅시다. 물세례 받을 때에 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지요. 그러면 물속에 들어가고, 물속에 들어가면 물속에 죄가 가득하겠지요. 물이 더럽고 탁하겠지요. 탁한 물에 예수님이 뛰어들려고 하니까 세례요한이 말리지요. “예수님, 당신은 죄 씻는 세례를 받을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은 “아니다. 내가 뛰어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물에 뛰어든다는 것은, ‘죄인인 너는 거기 있으라. 내가 너에게 찾아갈게. 네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네가 있는 더러운 물속에 내가 들어가서 너의 죄와 같이 한 덩어리가 되겠다.’ 이것이 바로 물세례가 되지요.
물세례 다음에는 불세례 차례입니다. 심판, 십자가. “내가 받을 불세례가 남아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불세례가 있고, 불세례 끝나면 성령세례가 있는데, 예수님의 세 코스를 다 밟아요.
물속에 들어가서 물세례를 받는데,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죄인들의 더러운 죄에 합류해서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으로 사시는 분. 이것이 물세례입니다. 그 다음에 불세례는 뭔가? 그 죄 값을 그대로 아버지 앞에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지 않아도 될 분이 아버지께 저주 받는 불세례. 그렇게 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자기만 부활하면 안 되잖아요. 자기가 대신해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령 받을 자에게만 성령을 주어서 물세례, 불세례의 효과를 그들의 구원의 효과로 이전시키는 성령세례. 이 세 가지가 덮쳐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을 보겠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만약 저에게 성령이 왔다면 “고맙습니다.” 하고 도망칠 것이 아니라, 내가 에스겔이 되어서 성령 받은 내가 받은 성령을 나누어 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먼저 받으신 거예요. 여기서 먼저 받았다는 것은 독점하라는 것이 아니고 분배해 줘야 될 책임자로써 먼저 받아서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만 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물세례, 불세례가 따라오기 때문에 이 코스를 밟으면 우리는 패역한 족속인데 우리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았기에 우리는 죄 없는 의인이 되어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성령세례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물세례, 불세례를 합치면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됩니다.
자, 에스겔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를 때 어떻게 부릅니까? ‘인자야!’ 라고 하지요.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인자야, 너는 이 악인에게 복음을 전하라. 만약에 악인이 듣지 않으면 그 책임을 인자 너에게 묻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전할 때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없단 말이지요. 없으니까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져야 됩니다. 이게 바로 물세례, 불세례, 성령세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뭘 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인간도 그 말을 이해 못합니다. 왜 이해 못하는가? 날아가는 화살을 내가 잡기 때문에 이해 못합니다. 사람이 어떤 말씀을 들으면 그것을 내가 잡으니까, 예를 들어서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제물입니다.”라고 했어요.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것을 잡고, ‘아, 날 구원하려고 제물이 되었구나.’ 이렇게 오해를 하게 돼요.
내가 제물 된 것은, 제물이 나에게 잡힌 제물이 아니고 제물이 움직이고 제물에 내가 딸려가는 거예요. 주의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했고, 예수님이 작은 말씀이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면 내가 그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 나는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어서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행복한 운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마구 패역한 모습이 튀어나오지요.
기도할 때마다 ‘주여, 저는 제물 되기 싫습니다.’ 이런 마음이 막 튀어나와요. ‘하나님, 제 아이가 공부 잘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번역하면 ‘주여, 제물 되기 싫습니다.’가 되고, ‘하나님, 사업 잘되게 하옵소서.’ 이 말도 ‘나는 제물 되기 싫습니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쓰레기로, 항상 우리는 이 쓰레기를 벗어나 명품이 되려고 하는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때, 우리는 항상 말씀을 대하게 되고 늘 기도해서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얼마나 쓰레기인가를 아는 것 가운데서 구원 받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없으면 우리는 감사를 모르고 늘 불평합니다. 젊은이들은, ‘왜 나는 재벌 부모를 못 만났는가? 나는 왜 미인으로 태어나지 못했는가? 왜 내 머리는 천재가 아닌가?’ 등등. 그런데 우리가 태어날 때는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기저귀 한 장도 가지고 나온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내가 옷을 입고 있다면 벌써 혜택을 입은 것이고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에스겔은 하나의 말씀이고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는 거예요.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아예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지세요.
에스겔 말씀은 우리에게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못 지키는 악한 자인가를 실감하게 합니다. 20절에 보면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악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어떤 사람이 분명히 처음에 믿었는데 나중에는 안 믿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 믿었던 시대에 준 자비와 은혜는 도로 회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자체가 은혜를 주되 이것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은혜롭다는 것을 증거하는 재료로 사용할 뿐이에요.
구약은 한시적이고 임시적으로 사람을 다루면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자비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사람을 사용하는 반면에, 신약은 사람을 사용하는데 영원히 자비롭고, 영원히 용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를 포착했으니까 신약 성도는 자신이 한없이 죄인인 것을 알고, 구약 성도는 좀 지치면 잘난 척하고 까부는 그런 특징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레위기를 잠깐 보겠습니다. 레위기 5장 1절입니다.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증인 노릇을 하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이렇게 되면 ‘내가 이것을 전하면 나에게 유익할까, 불리할까?’ 이것을 생각하겠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자기 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지면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자비가 만나서 자비가 나오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나올 자비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죄만 드러나지요.
증인이 증거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받을 죄를 증거 안한 당사자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벌 받음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증거하라고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증거하지 않은 우리의 죄까지 예수님이 담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은 망해도 싸지요. 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이방인을 더 무서워하니까 망했지요.
그렇다면 그들만 망한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망해야 마땅한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증언 못할 줄 아시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죄를 드러내면서 그걸 통해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 안에서 증인 노릇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빈틈이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기 전까지는 ‘주님의 용서’를 알 수가 없지요.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주께서 튀어나오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하지 않아요. 결국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행위로 지은 것도 죄가 되지만 추가적으로 증언 안한 것도 죄가 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죄지만 하나님을 알고도 하나님이 시키신 것을 안 해도 죄가 되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도 아시고 또 그것을 다 증언했고 그러니까 죄 지은 것이 없어요. 죄가 없는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벌을 받았다는 말은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까? 증인 노릇도 하지 못하고 죄만 짓는 이런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벌을 받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원대로 안 되고 의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의를 증언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는 겁니다. 그래서 김연아가 금메달 따서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면서, ‘세상에서 상 받는 것으로도 저렇게 기뻐하는데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도 왜 눈물을 안 흘리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든, 뉴스를 보든, 동계올림픽 경기를 보든 항상 겹쳐서 복음을 보게 됩니다. 김연아가 경기 끝나고 왜 울었습니까? 그동안 죽도록 연습했는데 스스로 만족스러운 경기를 했기에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7-8)”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순간 다 사라졌잖아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성도여, 여러분들이 받은 직분은 천사들도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동계 올림픽에다 성경을 입히세요. 그러면 동계 올림픽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해석이 돼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복음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을 보면서 복음을 이해하는 거예요.
자, 지금까지는 쉬웠습니다. 이제 어려운 대목을 해 봅시다. 레위기 5장 1절에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아니면 이 말씀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라. 지키라.’고 해놓고는 결국은 우리에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께 말씀하신 것이고, 이 말씀은 하나님만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레위기 4장 13절에 보면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수송아지를 드려라.’ 여기서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 어겼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죄와 의는 같이 붙어있기 때문에 죄가 아니면 의고, 의가 아니면 죄입니다. 의도 아니고 죄도 아닌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을 자기는 잘 지켰다고 봅니다. 그러면 의가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저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구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찬치도 않은 거죠. “저는 이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이제 복을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주님은 “네가 아직도 깨닫지 못했구나.”라고 하시지요.
결국 모든 말씀을 인간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까 죄를 가지고 의라고 오해를 하는 거예요. 특히 성화론자들. ‘방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러면 제가 묻지요. ‘도대체 방종 안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 가지로도 그 예를 좀 들어 달라’고. 그들이 대답을 안 해요.
어떤 사람이 지하철에서 전도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지하철에서 전도해 봤습니까?’ ‘예, 해봤지요.’ ‘얼마나 했습니까?’ ‘한 달했습니다.’ ‘그러면 왜 지금은 안 합니까?’ ‘힘들어서요.’ ‘왜 힘듭니까? 전도할 때는 성령으로 했는데 이제 성령도 힘이 든 모양이지요?’ 이 사람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는 갈라디아서 말씀과 같은 거예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깨닫지 못하니까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상태, 이 상태에 대해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레위기 4장 22절을 봅시다.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 잡을지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서 처음에는 자기가 죄를 깨닫지 못한 거예요. 깨닫지 못할 때는 자신이 잘난 줄 알았는데(1번) 깨닫고 나니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았고(2번), 그 후에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3번). 이것이 구약이고, 신약은 1번, 2번, 3번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3번부터 먼저 합니다. 이게 바로 땡 잡은 거예요. 3번부터 먼저 하니까 아무리 우리가 깨닫지 못해도 십자가(3번)는 살아 있어요. 십자가부터 해서 역으로 오지요.
구약으로 하면 내가 알아서 깨닫는 것이 되지요. 깨닫지 못하다가 깨닫는 방법은 율법을 통해서 됩니다. 그러면 율법 들어가면 깨닫습니까? 바리새인은 깨달았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1번에서 2번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길은 있는데 우리가 갈 능력이 없으니까 신약에서는 3번에서 2번으로, 2번에서 1번으로 가는데, 3번(십자가)에서 2번(죄를 깨닫는 것)으로 갈 때 3번으로 힘으로 갑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피 흘린 채로 나타나면, ‘저분이 왜 피를 흘렸지? 나는 전도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는데 왜 예수님은 피를 흘렸지? 저 피가 바로 내가 말씀을 한 구절도 못 지켰기 때문에 흘리는 피구나.’ 내가 만약 잘한 것이 있다면, “00야, 너는 이것은 잘 했고, 이것을 잘못했다.” 이렇게 하실 텐데, 어떤 것을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아예 피 채로 ---
구약 말씀을 다시 정리해봅시다. 속죄제의 피를 흘린다는 말은 어떤 경우입니까? 부지중에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다가 깨달았을 때 속죄제를 드리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뭘 이야기합니까?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항상 깨닫지 못하는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김연아가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몸에 성호(천주교 신자들이 몸에 그리는 것)를 그렸어요. 그리고 금메달을 땄어요. 그러면 천주님의 은혜입니까? 김연아한테 금메달을 주지 말고 십자가 피를 줘야 돼요. 공중 회전을 돌다가 넘어져 15년 공든 탑이 무너지고, 엄마는 응원하기 위해 왔다가 심장마비로 죽어서, “주여, 나에게는 메달도 없고 엄마도 없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원망)을 할 때, 그 자체가 바로 주께서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죄악 된 심령인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죄인인 것을) 깨달을 자가 없고,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나 의인될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피를 흘렸다는 것은 도저히 1번에서 2번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부지중에 죄만 짓는 거예요. 그러니까 3번부터 들어오니까 비로소 우리가 죄를 깨닫는데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죄를 깨닫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분은 누구인가? 모든 말씀을 다 이룬 분이다.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피를 흘렸다면, 다시 깔때기를 생각해 봅시다. 모든 말씀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깔때기를 타고 갈 때는 피로 떨어지니까 그 피를 볼 때마다 ‘다 이루었다.’가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피가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다 이루었다.’가 밑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인생을 다 살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