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23 (예수님의 족보)
눅 3:23 (예수님의 족보)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7)
본문 : 누가복음 3장 23절
제목 : 예수님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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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02-28 10:39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17강-눅3장23(예수님의족보)-luk100228.hwp
이근호
10-02-28 14:51
예수님의 족보
2010년 3월 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23-24
(눅 3:23, 개정)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눅 3:24, 개정)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따분한 족보를 가지고 무슨 은혜가 나오겠는가 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족보가 하나님에게까지 도달되는 것을 봐서 그 가운데 끼인 자들은 큰 복을 잡은 자들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마치 어묵을 꼬챙이로 관통을 하게 되면 어묵들은 꼬챙이 주변에 팔랑개비처럼 매달리는 꼴이 됩니다.
전 세계가 이런 구조를 핵심으로 갇히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지난번 시간에 했던 ‘세례’입니다. 즉 전 세계는 세례구조 안에 갇혀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불세례와 성령세례에 의해서 세상을 절단 냅니다. 지옥 갈 자들에게는 불세례를 구원받을 자들에게 성령세례가 주어집니다.
이 말은 곧 인간 스스로 구원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 전우를 군 본부에서 헬리콥터를 보내어 동료 군인이 지상까지 내려와서 그 전우의 껴안고 다시 헬리콥터에 실어서 본부까지 데려가게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구출’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구출 작전’이 구약의 출애굽입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오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로프를 매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로프를 따라 연결된 분들은 ‘예수님 족보’에 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족보를 따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이 빠진 족보에 대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성도가 주님이 관통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자기만의 역사와 자기만의 족보는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당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만의 가족’이라는 것이 의미없게 됩니다. 이 로프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사도행전 2:34에 보면,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주님’이 두 분 등장합니다. 왜 한 분만으로 구원이 안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받아야 될 대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간은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용쓰고 애쓰도 인간은 스스로 무너져야 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은 자기 죽음에 입회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동안 모든 일을 자신이 선택해서 주어진 상황이라면 죽음이란 인간이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 죽음이 도리어 인간들을 집어삼키는 상황을 뜻합니다. 즉 인간이란 죽음에 갇혀있는 꼴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과 주님께서 창세전에 의논한 바에 의해서 예수님이 하실 일에 영광 돌릴 자들은 지정받게 되어 있는데 그 근거가 인간에게 일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바됩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곧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인간이 결코 그 완성에 대해서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피겨 스케이트 선수인 김연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렇습니다. 이 언약이란 로프가 주님과 주님 사이에 탱탱하게 연결되어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났다”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해야할 필요도 없고 더 해야 할 남은 일도 없습니다.
마치 군대 유격 훈련받으면서 외줄타기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지상에서 천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즉 주님으로서 주님에게도 건너가신 것입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셔서 그 길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위에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힘과 공로로 외줄 타기를 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력으로도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저쪽 지옥으로 통하는 길에 대로가 펼쳐져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를 노리는 자들이 벌떼처럼 들끊고 있는 길입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자들이 다 상인들입니다. 지식 팔아먹는 상인이요 영혼 팔아먹는 상인들입니다.
인간들의 타고난 욕망으로 서슴없이 들어설 수는 길이 바로 지옥 가는 길입니다. 그냥 방치하면 누구나 좋아할 길이요 외롭지 않는 길이 지옥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성령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장세우시면서 간섭하지 아니하면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길이 바로 지옥으로 가는 길이요 지금도 우리가 가고 싶어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기도하면서 원하는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하지만 좁은 길, 주님 가신 길에는 숱한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로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 피를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그 피가 왜 흘러져야 하고, 왜 그 피가 우리를 살려내는 용서의 피가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 피가 가는 길이 바로 언약이며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언약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그 언약에서의 원칙은 “행함으로 구원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언약의 로프는 쭉 늘어지게 늘어뜨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언약입니다. 모세언약을 사람들이 보고서는 ‘자기 행함으로 구원’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나도 나의 행함을 긍정하면서,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나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 사이에, 말씀 많이 지킨 자와 말씀을 못지킨 자 사이에 경쟁이 우월감과 서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로 인해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얻어맞아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 본인도 모르고 악마로부터 사주받는 악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즉 악마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임으로서 선악적으로만 구원이 성사되도록 부축인 것입니다. 바로 그 실상을 노출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신 것이고 인간은 거기에 말려들어서 메시아를 죽임으로서 자신의 죄를 드러내게 됩니다. 즉 메시아 죽인 가해자로서 말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대로 믿는 자를 믿게 하심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즉 “주님, 우리의 행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던 죄인입니다”는 고백을 내놓으면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연히 죽은 자를 건져내시는 그 과정에 들어서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관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10-03-03 11:13
017강-눅3장23(예수님의 족보)-luk100228
2010-03-03 10:24:35 녹취 : 오용익
016강-누가복음 3장 23(예수님의 족보)-이 근호 목사
(기도)
“이제 저희가 큰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노다.”(시편 107:19-20)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적으로 우리가 우리 영혼을 고칠 수 없음을 저희들이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셔서 말씀에 담겨 있는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저희들을 구원해 주시니 이시간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 말씀으로 구원되었는지 천국 되는지를 알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시간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3장 23입니다. 신약성경 92페이지입니다. 23절에서 몇 절만 더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3:23,24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삽 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안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방금 우리가 본 23절부터 3장 끝까지는 족보 이야기가 나옵니다. 족보를 가지고 무슨 은혜를 받느냐, 이게 걱정이 되지요. 족보를 죽 이야기를 했는데 ‘주께서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구나.’ ‘이게 족보인데 그게 뭐 어쨌다고?’ 이 족보를 이해하려면 앞에 세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세례라는 것은 보통 물 뿌림을 당하는 것을 세례라고 하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은 물 뿌림을 당하고 물속에 들어가고 성령 받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전체를 자신의 타작마당으로 전환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무슨 세례가 되느냐 하면 불세례와 성령세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불세례, 저주, 믿는 자에게는 성령 주셔서 천국으로, 알곡으로.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난 어떤 사람도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방금 제가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 안하고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들었다 합시다. “예수님이 하는 그 세례의 구조 속에서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피식 웃을게 아닙니까?
“나는 그 말 자체를 거부하거든. 나는 예수한테 안 잡혔거든. 나는 절에 가거든. (혹시) 나는 교회를 안다니거든.‘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꼼짝없이 잡히는 시점이 옵니다. 어느 시점이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70살까지 가고 나중에 80살까지 그 이야기하다가 90쯤 되어서 그 이야기 하면서 죽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 죽음에 입회하지 못한다.” 자기가 죽었는데 자기 관 옆에 서서 ‘죽었나?’ 이렇게 볼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살려고 살려고 애써도 이미 우리는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죽는다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애초부터 죽음에 갇혔다.’고 보는 겁니다.
죽음에 갇혔다는 말을 세례구조에 갇혔다고 말하는 겁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그것이 갇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3장에서는 죄에 갇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갇혀 있다’를 제가 벌써 다섯 번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나는 교회 안다녀. 나는 예수 안 믿어. 하나님은 나에게 간섭하지 마. 나는 독자적으로 살 거야. 갇혀 있는 것이 나는 싫어. 나는 자유를 얻고 싶어.’ 빠져나가지요.
자꾸 빠져나갑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빠져나가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불세례와 성령세례의 구조로 가두어 놓았다면 빠져나간 사람들뿐만이 아니고 여기 모인 성도라고 여기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는 죽고 그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세례의 구조, 불세례, 성령세례의 구조 안에 다 가두어 놓았다면 이것을 알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저는 무슨 가치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가 있어요. 그게 오늘 족보이야기로 죽 나오는 겁니다. 이 족보 예수님 족보입니다. 예수님 족보이고 나의 족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관심을 두지 않아요.
그냥 듣기만 하세요. 저는 경주이씨 산수공파 그런 쪽에 속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안에 누가 있느냐? 내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내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족보는 나의 족보입니다. 그것은 나의 족보인데 만약에 안동 권 씨 족보가 있다 하면 저는 안 봅니다. 왜 안 보느냐? 거기에는 내 이름이 없어요.
오늘 본문 23절에서 38절까지 족보가 지루하게 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오늘 이것만 알고 가시면 돼요. 한마디로 말해서 오뎅, 표준말로 어묵이라고 하는데, 그 오뎅을 꼬챙이로 죽 꽂게 되면 꼬챙이가 얇은 어묵을 통과해서 꼬챙이가 더 뒤끝으로 튀어 나오잖아요. 그러면 어묵은 어떻게 달려 있느냐 하면 팔랑개비처럼 그 중간부분에 달려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이라는 꼬챙이를 가지고 교인 몇 명 안 되지만 전부다 꼬챙이로 뚫어서 하나의 오뎅이고 어묵이 되는 겁니다. 쫙 뚫어서 뚫은 이것을 잡아 당기면 이것을 가지고 집단세례라 합니다. 예수 안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내 하복부를 관통하고 내 중심지를 통과해서 어디까지 이어진다? 예수님부터 해서 하나님까지 이어지게 했다는 겁니다.
23절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삽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라고 되어있습니다. 38절 마지막에 보면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시작을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그 꼬챙이 끝이 어디로 통과하느냐 하면 하나님께로 통과합니다. 토인들이 사람 바비큐해서 어깨에 들러 메고 갈 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나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린 시절에 보던 만화에 그런 것이 나와요. 멧돼지나 사람을 꿰어서 메고 가듯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바비큐해서 하나님 계시는 천국으로 어깨에 메고 가는 그런 꼴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저는 집단세례, 한꺼번에 주님의 성령세례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고 한 겁니다. 거기에 등록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채택되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에게만 생명나무가 허락이 돼요. 그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나 먹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중국산 과일 사먹듯이 사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 선악과가 우리로 하여금 죽게 만들었고 생명나무 가는 길은 막아놓아서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 따먹은 자가 없어요. 하지만 이미 생명나무과실을 따 먹은 그 주님께서 그 생명을 꼬챙이에 발라서, 오늘 설교가 좀 험악합니다만 이해해 주세요, 꼬챙이에 그 생명나무 소스를 발라서 꼬챙이로 뚫린 사람마다 전부 생명이 관통할 수 있도록, 생명이 흐를 수 있도록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 생명이 통과해서 결국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 이어가는 그런 식의 족보를 주님께서 이렇게 작성을 해 놓은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이 명단이 몇 명 되지도 않는데, 한 30여명 되는데 이 족보에 해당되는 사람만 구원받고, 여기에 보면 제 이름이 없지요. 제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족보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관계없는가? 이제부터 이 족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사도행전 2장 34절 중간부터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여러분, 우리가 생활에 바쁘다 보니까 성경을 잘 안 보게 되지요. 그래서 성경을 설교시간에만 접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성경을 막상 읽어보면 이해될 듯 안 될 듯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진도는 나가야 되겠고 그래서 훌쩍훌쩍 뜀뛰기 하듯이 뛰어 넘듯이 가는 수가 있어요.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면 ‘주께서 내 주에게’ 할 때 왜 주님이 두 분이 필요한가? ‘주께서’ 주 1(one), ‘주에게’ 주 2(two), 왜 하나님이 두 분이 필요한가 이 말이죠. 이런 의문점을 물론 안 갖겠지요. 생활에 바쁘시니까. 여러분, 누군가를 건진다고 할 때에 우리보고 ‘어이, 올라와. 이쪽으로 올라와.’ 한다면 이것이 산사람 같으면 ‘올라와’가 되는데 죽은 사람 같으면 죽었기 때문에 ‘올라와’ 해도 못알아 듣습니다.
그러면 죽어버린 자기시체를 건지기 위해서는 헬기에서 살아 있는 공수부대원이 내려와서 그 위험한 적진에서 그 사람을 건져서 헬기 태워서 헬기와 왔던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 글자로 ‘구출’이라 하지요. 출애굽에서는 그것을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Exodus, 구출, 구원, 공수작전이요. 이제부터 어려운 말 하겠습니다. 참 죄송해요. 설교시간에 쉽게 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행함으로 우리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와서 우리를 손잡고 데려가 줘야 돼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할 때 그 목자가 오셔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가’버려요. 어제 서울에서 제가 난리 났습니다.
한국의 보수신학자 200명이 모여 있는 신학회입니다. 모임 끝나고 나서 보니까 전부 다 서로 ‘박사님, 박사님’ 해요. 모임 끝나고 나서 어떤 분이 저보고 ‘목사님, 여기 모인 분들 전부 다 박사인데 왜 여기서 함부로 이야기하느냐?’고 했는데 그 박사님들 있는 그 모임에서 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난리 났습니다.
그 전한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할 테니까 여러분들도 박사님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들어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누가 죽였느냐 하면 바리새인이 죽였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을 그 때의 현장이라고 생각하고 할 테니까 여러분이 박사인데 그 현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들어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누가 죽였느냐, 바리새인이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이 구약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면 자기구원, 나 좋으라고 그렇게 해석을 할 때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해석능력, 인간의 이해, 인간의 지식, 인간의 지성, 인간의 지혜를 총 동원해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고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다.’ 했습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며 결국 너희가 나를 죽이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그 바리새인을 가지고 우리를 대표하는, 우리가 바리새인과 남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우리 속에 바리새인 속성이 있으며 우리가 바로 우리 아비는 마귀였는데 그야 말로 죽어 있는 인간인데 기껏해야 모든 성경해석 모든 세상 변화를 다 나 좋으라고 나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시도에 불과한데 그것이 결국은 뭐냐?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죽여 버리도록 만들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해석은 어디서 나오는가? 악마에서 나온 해석이고 그 해석 앞에 우리가 지게 된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어떤 해석이 악마의 해석인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벌써 난리가 났어요. “성경해석을 하면서 역사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 그게 악마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그런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느냐 하면 ……” 약간 어려운 용어를 쓰겠습니다. “……인간은 주체이기 때문에 주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어떻게 세상이 변해도 나 좋으라고, 나의 소망 나의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성경 아니라 뭘 봐도 순서를 그렇게 정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정해놓고 하나님이여, 이 순서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서 죄란 그 죄가 그냥 건성으로 왔다가 가는 죄가 아니고 내 주체 안에서 악마가 어떤 식으로 나를 내 위주로 만들었는가, 그것을 끄집어내야 진짜 우리는 진정으로 죄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했어요.
벌써 한 사람은 안 듣겠다고 시간낭비라고 뛰쳐나가버렸어요. 내가 말씀 지킨다고 하지 말고 그 말씀이 스스로 살아서 내속에 들어오면 ‘아, 나는 어떤 성경말씀을 대해도 나 좋으라고 만 성경말씀을 보는구나.’ 하는 이 죄가, 성경 쫙 펴놓고 ‘하나님 이 나의 일 도와 달라.’고 하는 이 죄, 맨 날 하나님 보고 도와달래요, 그것이 이 땅에서 천국을 가로막아서 못 가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성경 해석을 한다는 여러분들이 오히려 성경해석을 훼방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양쪽에서 여기저기서 얼굴 붉히면서 난리가 났어요. 옆에 있는 어떤 분은 “빨리 하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소.” 이런 식으로 저에게 압박을 가하고. 그렇게 시작을 해서 난리가 났습니다. 반박을 하는데 이렇게 반박을 해요.
“논문 형식에 어긋난다.” 이게 반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어요. “사도바울이 이 자리에 있으면 여러분은 그렇게 지적하겠습니까?”라고. 그게 우리나라의 모든 교회의 목사들을 다 배출한 200여명의 최고 박사들만 모여 있는 집단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족보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붙어 있을 때 왜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그냥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는데. ‘하나님이 말씀 주셨다, 십계명 주셨다.’ 그걸 그냥 지키면 되는데 왜 구태여 예수라는 분이 오셨고, 또 예수님이 오셨더라도 그냥 ‘잘 해라,응?’ 등 두드려 주면서 ‘교회 잘 다니고 헌금 잘하고 목사 말 잘 듣고 ……’ 이렇게 하고 ‘너 뭐 필요해? 내가 도와줄게.’ 이렇게 하고 가실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십자가의 피를 흘려서 ‘네 죄를 내가 대신 담당한다.’는 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도대체 그 죄가 어디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저 사람에게 있습니까? 이 사람에게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나를 봐요. 바로 내 안에 죄가 들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 죄는 내 선행으로 내가 신학공부해서 성경연구해서는 없어지지 않아요. 공부하면 할수록 박사 되면 될수록 우리는 이 박사를 가지고 밥벌이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논문의 끝에 뭐라고 했느냐? “쓰레기”라고 했어요. “여러분들은 쓰레기입니다.” 자기의 거취문제, 박사가 되었으니 신학교 자리하나 얻어 보려고, 교수 자리 얻어서 밥 먹고 살려고, 예수 이용해서 밥 먹고 살려고 신앙 있는 체, 복음 이야기 안하고 신앙 있는 체 하는 거예요. “한국의 모든 목사가 복음 전하는 쓰레기가 되어야 된다.”고 했어요.
옆에 있는 좌장 하는 그 목사는 빨리 끝내라고. 따로 앉아 있던 최고 권위자는 벌써 밖에 뛰쳐나가버렸고. “저 사람 누가 불렀어요? 누가 불렀어요?” 이런 소리가 나오고.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면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 나와도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안 해도 되고 우리는 그냥 집에서 텔레비전 보면서 피겨스케이팅 감상하고 응원하고 있어도 괜찮은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주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잠자는 자여 일어나 깨어라.’고 해서 ‘네가 구원되기로 이미 작정했음’을 누가 통보해 주십니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거예요. 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 다른 어려운 말로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언약! 김연아를 인터넷으로 보고 제가 감동받은 것이 있어요. 간단합니다. ‘이제는 끝났다.’
이겁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울은 거예요. 김연아 아십니까? 스케이트 잘 타는 그런 소녀가 있어요. 모든 것이 끝난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이 성경 본문을 보고 ‘주께서 주에게’ 모든 것이 이제는 끝나버린 거예요. 이미 우리는 오뎅이에요. 이 안에 예수님이 관통한 겁니다. 착한 것, 헌금하는 것 아무 소용없어요.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흘리신 그 용서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배를 관통하고 말았어요. 관통해서 어디까지 이어졌느냐? 하나님에게까지 이어지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까지 이어지니까 우리는 바비큐가 되었어요. 하나님과 하나님에 의해서 덜렁 들려진 바비큐에요. 이승훈 선수가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받을 때 옆에 은메달, 동메달 받은 사람이 갑자기 돌발 사태를 일으켰죠.
이승훈 선수를 들어서 어깨에 들어버렸죠. 지금 예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바짝 들어버린 거예요.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난 거예요. 모든 것이 끝난 상태에서 그 다음에 우리가 할 것은 뭐냐? ‘주님이여, 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라고 할 때 그것이 바로 ‘너 빼놓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던 언약,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두 분이 소곤거리듯이 두 분이 의논해서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되었기에 야곱 같은 사람을 모아서 거기에 사랑을 주신다.’ 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기로 작정했다.’고 사랑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랑이 오게 되면, 내가 만약에 신학박사고 신학교수라 합시다, 그 사랑이 오게 되면 장차 목사가 될 신학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겠습니까?
“여러분, 목사 된다고 까불지 말고 나중에 나처럼 박사 된다고 까불지 말고 교회 크다고 까불지 말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러면 우리가 왜 사는가? 그것은 이런 학문을 통해서 얼마나 학문을 가지고 밥 먹고 살려고 애쓰는 인간의 근원적인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이 근원적인, 나이를 많이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냥 먹고 살아야 되겠다는 이 근원적인 욕심, 이런 죄를 주께서 해결했다는 것, 여러분은 그것을 증거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그런 교수님들이 되었으면 해서 저는 거기에 갔었고 회비도 만원이라고 해서 만원 냈어요.
차비는 오 만원 받았으니까 4만원밖에 못 받았어요. KTX타고 올라가는 차비밖에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 ‘주여, 나 같은 죄인을 왜 구원하십니까?’ 이것뿐이에요. 저는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한 게 하나님의 은혜는 받아놓고도 감사할 줄 몰라요. 바쁘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났다는 말은 하면서도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장소를 못 찾았다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에요.
매일 같이 해 뜨는 것이 은혜이듯이 오늘도 밥 먹고 사는 것이 은혜라면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우리 인간적으로, 인간적으로 봐서 마땅한 것 아닙니까? 아파서 못 오는 그런 것은 이해되지만 그것도 아니고 멀쩡한데 등산가고, 무슨 등산을 가서 은혜에 영광을 돌립니까? 말씀, 언약을 알아야지요. 언약을!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유격훈련 받을 때 ……, 참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여자분 들에게는 미안해요. 군대 좀 갔다 왔다고. 유격 훈련 받을 때 이 골짜기와 저 골짜기 사이에 로프를 칩니다. 로프를 탱탱하게 쳐야 돼요. 탱탱하게 쳐 놓고 외줄타기를 하는데 줄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총 둘러메고 그 줄을 타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골짜기를 넘어서 유격! 유격! 하면서, 애인 있는 사람은 애인이름 불러가면서 가요. 그렇게 가는데 지금 우리 인간은 천국에 못갑니다. 창세기 3장부터 막아놓았어요. 막아 놓았는데 주님께서 외줄을 타면서 유격! 유격! 하면서 그걸 이미 가셨어요.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가 죽듯이 죽었습니다. 죽으셨는데 세상에,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것도 언약대로, 그것도 약속대로. 우리는 뻔히 보면서도 못갑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은 갔거든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예수님 가는 길을 우리는 못 가는데, 우리는 ‘싫어. 나는 여기서 더 살고 싶어.’ 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을 합니다.
그걸 성령의 임재라 합니다. 성령의 세례라 하지요. 모든 것이 세례의 구조니까. 성령이 덮치면 유격! 유격! 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는데 그 인도하는 길이 뭐냐, 좁은 길로 인도합니다. 좁은 길, 다시 말해서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이 아닌 길로 인도하지 않아요. 인도하는데 그 인도하는 로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이라는 말, 그 앞에 아브라함이 붙어서 아브라함언약, 이런 식으로 언약인데 그 언약이라는 것을 풀이해보면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주님께서 먼저 가신 그 로프, 완성하신 그 줄, 이미 끝장냈다고 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줄에 배를 깔고 ‘유격!’ 하면서 가기만 하면, 행함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 가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거예요.
그 로프, 그 줄에 뭐가 있느냐, 흠 없는 어린양들의 피가 묻어 있어서 우리는 그 줄을 탈 때 피가 묻히면서 내 대신 흘린 피를 만져가면서 로프를 잡아당기면서 기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또 누구입니까? 우리도 자식이 있고 아내가 있고 밥도 먹고 살아야 되고 보험도 들어야 되고 이런 저런 게 있잖아요. 우리는 주님의 피를 보면서도 한 2초? 한 3초? 다시 우리는 세상이 부러워요.
아예 고속도로를 뚫어놓았어요. 거기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하면 된다, 적극적 사고방식, 이렇게 하면 돈 벌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상인이 되어야 돈 법니다. 모두 다 장사꾼이 되지 않으면 안돼요. 교수도 장사꾼, 목사도 장사꾼, 돈 놓고 돈 먹기, 그런 쪽으로 사람들이 확 몰려가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부러워서 미쳐요.
그리고 이쪽에 와서는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따집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내 인생을 이렇게 조져놓습니까? 사람이 주는 것이 있어야 내는 것도 있지 별로 축복도 주지도 않고.’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미워져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종의 트릭, 속임수 일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해서 하나님을 내편으로 유인하겠다는 유인책일수 있거든요. 그러면 안돼요. 우리는 하나님한테 미움이 아니라 사랑받도록 되어 있는데 사랑받으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사랑이냐?’ 그래서 제가 광주강의 할 때 이렇게 했거든요.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묵살당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묵살시킬 때 내 뜻대로 안되고 주의 뜻대로 되게 하시는 분이 나에게 따로 계시는 것을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면서 느낄 수 있어야 돼요. 내 기도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 아주 즐거워요. 그게 즐거워야 됩니다. 만약에 기도대로 응답이 된다면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무당이 돼요.
남에게 내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고 하는 과시가 돼요. 내 기도가 다 잘리고 안 될 때,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대로 인도하는구나.’를 깨달아야 됩니다. 그럴 때 이 존재의 가벼움은 말할 수 없이 새털같이 가벼워요.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말이 좋아서 그렇지 쉽게 하면 ‘몰라! 몰라! 몰라!’ 이거예요.
‘내 인생 나도 몰라. 난 내 인생 내 맘대로 살 거야.’ 이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모습입니까? ‘몰라, 몰라. 내 인생 내 맘대로 살 거야. 주께서 조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세요.’ 이미 끝났는데 뭐, 이미 끝났는데. 언약이라는 것을 제가 설명했는데 언약 안에는 뭐가 들었느냐 하면 날마다 투정하고 날마다 따지고 미워하고 발로 차고.
엄마가 애 데리고 시장에 가면 애가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 안 사준다고 엄마 치마를 붙들고 엄마를 발로 막 차는 거예요. “엄마, 이거 사줘.” “안 사줘.” 그러면 또 발로 차고 때리고 “엄마, 떡볶이 사줘.” “안 사줘.” 그러면 또 때리면서 엄마에게 대들 듯이 우리는 주님한테 끌려가면서 평생을 주님을 발로 차는 거예요.
“이것도 해줘.” “안 해줘.” 그러면 또 차고 미워하고 또 미워하고 또 싫어하고 “나 이제 교회 안 나올 거야.” 또 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구원의 은혜는 받고. “조용히 해라. 너 나중에 천국 가서 보자, 응? 사람들 있어서 지금 가만있는 다만 나중에 천당 가거든 한 번 보자.” 그런 식으로 막 몸부림치면서 끌려가듯이 천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어가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한테 집니다. 항상 지게 되어 있어요. 약속한테 집니다. 그 언약이 아까 제가 말한 아브라함 언약인데 그걸 믿음이라 했고 그 뒤에 나오는 언약이 모세언약인데 이 모세언약을 설명하고 제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탱탱하게 한 것이 아브라함언약이라면, 참 어렵다, 탱탱하게 한 것이 아브라함 언약, ‘오직 행함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를 받았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탱탱한 줄이 푹 쳐졌어요. 축 쳐지니까 ‘나는 죄인이고 주께서 창세전에 구원했다.’는 것은 까마득히 잊고 탱탱하던 것이 축 늘어지면서 율법이 주어지니까 그 때부터 ‘누가 율법을 잘 지켰느냐? …… 나는 너보다 착하다, …… 나는 너보다 못났다, …… 나는 매일같이 기도해서 이만큼 인간성 좋아졌다, …….’
그 때부터 율법가지고 싸우는데 왜 주님께서 탱탱한 줄을 가지고 낮추느냐 하면 우리가 죄에 갇혀 있고 마귀에 갇혀 있고 날 때부터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을 그냥 탱탱한 채로 있으면 몰라요. 축 늘어져서 우리가 지킬만한 고만고만한 말씀을 줄 때 우리는 ‘잡았다’ 하고 ‘하나님, 저도 말씀 지킬 줄 알아요.’ 하고 우리가 말씀 지켰다고 하고 착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되면 ‘주여, 말씀 이만큼 지켰는데 뭔가 반대급부,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는 식으로 내미는 것, 이것 숨겨진 우리 죄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목사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예배 일찍 나오세요.” 우리교회에서 제가 예배 일찍 나오라고 얘기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교회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할 수 있거든요. ‘야, 이거 만만하다. 말씀 어렵지 않네. 우리가 지킬 수 있겠구나.’ 예배는 일찍 참석하면 되고 십일조 하면 십분의 일을 떼어서 내면 되고 기도는 하면 되고, ‘천당 가기 쉽네.’ 하지요. ‘그런데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하니까 나보다 못난 사람이니까 지옥 갈 사람이고 나는 지키니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이 자꾸 뭔가 할 수 있다는 리스트, 항목을 만드는 이 버릇,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숨겨진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축 늘어진 그 지점에 나도 말씀 지킬 수 있고 나도 행함으로 의인될 수 있다는 그 마지막 끝 지점에 주님께서 반대로 서서 “여러분, 여러분은 세리와 창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강도가 천당 갑니다. 여러분이 행한 것 다 무효! 나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행함이 아니고 나의 가치를 믿기를 원합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들, 자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고 그것이 약속이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행함을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천국을 못가면서도 마치 천국을 가는 양 착각하게 만드는 악마적인 본성을 있는 대로 다 드러내게 하시고 주님께서는 그 잘난 인간들에게 맞아죽는 못난 인간이 되십니다.
그 못난 인간을 보내셔서 잘난 인간, 슬기롭고 똑똑한 인간들에게 맞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는 이 세상의 천하의 이단, 천하의 죄인의 모습으로 죽었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분을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노선이 행함 노선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처럼 거저 주시는 용서의 노선, 사랑의 노선만이 구원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물세례, 불세례를 거쳐서 그 소식은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그대로 알려지는데 ‘십자가 피를 바라보니 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날 때부터 죄인이었고 주님이 죽은 나를 품에 안고 데려가지 아니하면 나는 주님계신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온몸으로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든 족보, 언약의 족보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서른 몇 명의 사람들에서 나름대로의 족보가 죽 이어지겠지요. 여러분, 지네를 생각해보세요. 지네는 다리가 많잖아요. 몸통 따로 있고 다리가 따로 있지요. 배 안에서 밖으로 노들이 튀어 나와 있는 것처럼, 그 튀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끌려가면서도 튀어나오는 내 자랑입니다. 내 시간성, 내 주체 ‘나 이만큼 했다.’ 그거 나중에 천국가면 다 잘립니다.
우리 족보 다 잘리고 우리가 오직 자랑할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 주님께서 관통했다는 이 사실만 증거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아무도 천국 갈 수 없었는데 주께서 내 주에게 언약이라는 로프를 걸쳐놓고 그 언약을 이미 우리 앞서서 다 끝내놓았습니다. 다 이루었고 이루었다는 증거로 피를 적셔놓았는데 우리는 그 피를 자꾸 잊어버리고 자기 행함 자기열심을 내세워서 출세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코앞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웬 피 인지 왜 흘려져야 하는지 왜 뚝뚝 떨어져야 하는지 우리 죄를 겨냥해서 떨어진 피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