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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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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혁신학회 2010년 2월 27일 논문발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강의다니엘

한국개혁신학회 2010년 2월 27일 논문발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이름 : 관리자(IP:124.59.86.6)

100227 개혁신학회논문발제 다니엘70이레비역사적해석

첨부파일 : 다니엘70이레에대한비역사적해석.hwp (166.0K), Down:11

관리자(IP:124.♡.86.6)

10-02-2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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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6.6)

10-02-27 22:26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Ⅰ 서론

Ⅱ. 본론
1. 언약과 주체의 발생
2. 발생적 성전관과 주체
3.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
4. 70년 포로 기간의 의미
5. 70이레의 의미

Ⅲ 결론

[영문초록]

Non-historical Interpretation on 'Daniel's Seventy Weeks'

A Conventional interpretation method on theology is to interpret the Bible on the premise that the mankind have abilities to interpret the God's Word without fallacy. This arises from an attitude of taking it for granted that God never gives the mankind a way of inducing any fallacy in interpreting the His Word.

But what if the Bible itself contradicts the people's preconception? What if the mankind's understanding itself be a momentum of defying the Truth? What if the mankind can not escape the awareness of pretending himself pious, and of manipulating God?

For a proper interpretation of this, a related research on human subjectivity should be taken into consideration. I convince myself that God Himself opens the path of indicating this concept of limitation through His Words, for God is alive and active(Hebrews 4:12), and Holy Spirit is working where the Words and the human subjectivity confront each other. A revelation of God for the 'Daniel's Seventy Weeks' would have the same grounds, too. As His revealed activities are associated with the entire sphere of the Bible including the time of Daniel, we should interpret the Bible within the Cross with the concept of the Covenant. We therefore can observe the inside of the God's revelation and the human subjectivity at the same time because the Crucifixion, the gospel delivered by Paul, contains the concept of 'completion of the New Covenant'.

A concept of human subjectivity has been expressed as that of the 'human history'. This resulted in a strong possibility that a world view by the human made the human return to their subjective entities for existence. It formed a metaphysical environment of time and space, after all, which derives a distorted interpretation. God therefore stood the Son of Man called the Messiah in the heart of His revelation to rebuke them for their world view. In this context, I will examine His function as 'the Son of Man' in association with the 'revelation of God for the 'Daniel's Seventy Weeks'.

[한글초록]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성경에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하는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이러한 인간들의 선입견에 반박한다면? 인간 이해력 자체가 진리를 훼방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본인들부터가 늘 신앙심을 가장해야 하고 하나님을 조작하고픈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런 문제와 결부된 말씀 해석이 되려면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주체의 만남의 장은, 하나님의 말씀 쪽에서 지금도 살아 운동하기에 (히 4;12) 성령을 일하심에 따라 인간들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도록 친히 열어주신다. 구약 다니엘이 접했던 ‘70이레’에 관한 계시도 이러한 묵시의 장으로서 오늘날 다가온다. 하나님의 이 묵시적 활동은 다니엘 시절뿐만 아니라 전 성경의 범위 전부와 연관되어 있기에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인 십자가 사건이 ‘새언약으로서 성취’라는 내용을 품고 있기에 이 십자가 안에서 인간의 주체 문제와 더불어 묵시의 내막을 비로소 살필 수 있다.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세상관 정립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을 구성하면서 결국 자기 존재 가치를 향한 주체적 의미로 귀착되기 때문에 이것이 왜곡된 해석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인간의 역사관을 공격하고 늘 위기와 종말로 몰아세우는 묵시적 작용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메시아를 세워놓으셨는데 그 분의 ‘인자로서의 기능’을 다니엘에게 주어진 70이레의 계시와 관련지어 파악해본다.

Ⅰ. 서론

전통적으로 70이레에 대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는, 어떻게든 유대공동체를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인정해주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약속보장의 영속성의 흔적을 이들의 역사적 존재성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남은 자’란 ‘드러나지 않는 남은 자’로서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그들 생각에, 이것이 담보되어야지만 후기 선지서의 편집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그 선지서 내용이 윤곽이 드러나고, 비밀로서만 회자되는 묵시문학의 내막이 역사적 근거 확보에 준해서 납득이 가능한 해석지평으로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공동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공동체 죽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즉, 천국의 본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천국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 공동체는 짐승의 세계에서 야기된 짐승의 분할 현상이다. 즉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땅과 씨에 대해 독점적 해석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브라함의 신체와 연계된 혈통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이는 주체로서 발현될 신체를 현재의 자기 신체들 이외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짐승’이라는 묵시적으로 부정(否定)적이고 악함의 의미를 싣고 있는 실체 등장의 근거가 혈통이라는 물질적 사유로서는 도저히 해명해 낼 수가 없게 된다. 단지 곡해하기를, 유대공동체에 대한 애매한 핍박을 가하는 비-여호와적인 정치적 바깥 세력 정도로 간주해서 유대공동체 내의 결속과 주체성을 다지고 함양케 하는 계기로 활용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명분이다. 진정한 짐승의 활동은 특정 신앙공동체와 연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내부 활동에서 자체적으로 주체성을 구성해나가는데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주체(자아)란 실은 하나님의 영적 다스림을 드러내는 기능점으로서만 발현하기에 그러하다. 권력이 ‘실체없는 효과’로서 작용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주체자들이 자신의 허한 주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타인의 절대적 욕망에서 그 대상을 찾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짐승이나 그 짐승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고 자처하는 유대공동체나 마찬가지다.

다니엘에서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국가 자체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태고적 힘들이 밀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땅의 기존 인간들이 주체가 되어서 다룰 수 없는 이질적인 힘을 말한다. 이 힘은 땅을 적시면서, 모든 위치에서 생산되고, 모든 관계를 다시 조성한다. 결코 혈통적이나 육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이미 국가라는 추상적 주체에 예속된 주체로서는 국가의 영적 성격을 파악해낼 수 없다. 국가의 정체성을 말씀대로 ‘땅 외적 요인’으로 되돌아가서 해석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란 단지 힘의 뭉치가 아니라 그 이질적으로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의 파도가 차후적으로 조성되고 배치된 힘들의 관계구조를 실행하는 주체가 된다.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다니엘의 국가들은,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무질서적 힘이 스스로 ‘빈 칸’ 만들어내고 그 공간을 일시적으로 채우는 식으로 조성되는 가운데 돌출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국가나 공동체는 힘으로만 조성되는 주체성에 매료되고 그 유혹에 황홀해한다. 유대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인자 같은 이’의 몸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단 7:13) 도리어 땅에서 시작하는 묵시 세계를, 바다에서 시작한 영적 세력이 죽이고 미워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이방제국과 다를 바 없다. 도리어 그 힘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지층이다. 이는 곧 힘의 바깥에서 조절하는 ‘인자 같은 분’의 묵시적 조치로서만 움직인다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이 조치에 의해서 힘으로 ‘안으로 접치게’ 되면서 국가라는 주체가 발생된다. 이 ‘주체화’ 작업은 ‘인자 같은 분’의 인격적 발현성과 병행하게 된다. 즉 진정한 묵시세계의 주체 등장과 견줄 수 있는 주체로 적당하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이방 국가 권력 안쪽에서는 영적으로 더 심화된 ‘짐승’의 힘이 잉태되고 있었다. 유대공동체라는 종교집단체다. 짐승에서 나온 힘의 결절(結節)이라고 할 수 있다.(고후 11:13-20) “저희는 양의 탈을 쓴 악마 나라의 직원들이다… 너희들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 결절, 곧 갈라짐이란, 발뒤꿈치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각질과 같은 것으로서, 짐승의 내부 속성이 자꾸만 표면화되는 올라와 층으로서 자체적인 구조를 이루는 현상을 말하는데 내부적으로 공격과 저항을 병행한다. 거룩한 가치를 사수한다는 명분 하에 정치적 권력 집중화를 통한 주체화 및, 계시 생산과 독점이 이루어지면서 인자와 성도의 세계마저 삼키려는 힘이 최고점을 향해 빨리 질주하고(단 12:4) 발휘된다. 종말의 강도가 고도조로 강화되면서 숨어있던 종말이 깨어지듯이 열리고 심판의 스케줄이 본격화된다. 권력은 영적 집중성을 역사적 벌판에 토해낸다. 땅의 백성들은 역사적 메시아를 희구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그동안 짐승이 작업해 놓은 업적이다. 땅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같이 생긴 짐승을 내심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주체의 한계다. 본인들 각자가 그 힘의 융기 위에 올라온 돌출들로서 짐승에게 배속되어 있는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주체들을 묶어주는 것은 오직 가시적 역사를 잃지 않으려는 힘들의 관계뿐이다. 유대공동체는 자기를 압박하는 이방민족과 말씀을 사이에 두고 결코 대척점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일한 목적(권력이란 허구가 보여주는 효과=영적 지배)을 지향하면서 같이 움직일 뿐이다.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 상대하는 유대집권층은 그 당시 유대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비를 악마로 보았다. 그들은 뱀의 자식들이다. (요 8:44/마 23:33) 그들은 본인들도 천국을 가지 못하면서 천국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이다.(마 23:14) 역사적 해석의 결과로 자칭 남은 자로 간주하는 이들 유대공동체의 손에 예수님이 피살되므로서 새로운 해석이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묵시적 해석이 전 역사를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단 유대라는 이름의 공동체적 나라와 다른 짐승의 나라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수혜자라는 입장이 곧 하나님의 백성됨을 증명하는 역사적 혜택임을 자부하면서 나름대로 종교적 공동체라는 ‘주체적 형식’을 예수님에 근접하여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예언이 유발한 권력집중화 현상은 지상에 권력체를 영적으로 대변해줄 수 있는 ‘가공의 장(場)’ 역할에 충실케 하게 했다. 모든 국가의 정치적 다스림의 궁극적 지향점이 실은 영적인 이상(理想)체 실현과 관련된 채 ‘영적 전쟁’의 실무자들로 참여된다는 증거를 유대공동체는 미리 보여주었다. 쉽게 말해서 영적 공동체(교회)라는 자부하는 단체들이 ‘메시야 살해’로 이어진 영적 전쟁에 부정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곧 인자되시는 분의 본질을 가장 근접한 위치에서 드러내도록 접촉된 상대자인 유대공동체로서 드러난 악마성은 전체 역사적 지평으로 확산된다.(요한계시록의 테마) 이는 곧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땅의 세계는 ‘색출의 현장’이 된다는 말이다. 영적전쟁의 주력들은 각기 자기 사람들을 호출해내면서(짐승의 표와 어린양의 표) 스스로 세상을 두 조각나는데 가담되고 있다. 이 때 각자의 세계에서 내민 고른 시간판이 사용되는데 고유의 역사관 끝에 종말을 매달므로 서 주체자로서 활약하는 단체의 활동 여부에 따라 종말의 시점은 자꾸만 역사 끝 지점이 각가지 변수로서 계시 내용이 풍부해지는 현상을 띠게 된다. 이런 경향마저 읽어내기 위해서는 70이레 계시가 주어진 다니엘 상황에서의 다니엘의 주체성을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었고, 다니엘이 ‘선지자’라는 입지를 고려해서 그 전의 관련된 선지자의 임무와 일관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선지자와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성을 검토해야 했고, 그것이 성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서는 왜 다윗 언약에 있어 성전의 존재가 중요한 사항인가를 제시할 필요성을 가졌다. 이 성전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의 목표인 동시에 언약민족의 목표이기도 하기에 전쟁과 언약의 기능을 언급해야 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논문의 출발은 언약을 받은 자의 주체성부터 다루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람을 불러내어 언약 사람으로 움직여가면서 뿜어내는 역사적 인식과 묵시성(비역사성) 인식의 대조성이 밝혀지면, 70이레에 대해 역사적 해석만 고집하는 단선적 해석의 문제점이 밝혀지게 된다.

‘이레’라는 시원적 시간단위는 새로운 인식론을 필요로 한다. ‘이레’는 결코 ‘7 년’이란 일상의 시간 단위로 환원되어 표현 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적 약동이 ‘이레’라는 시간단위를 적용하시면서 지상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주체자의 약동은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의 붕괴와 관련지으면서, ‘인자’라는 구체적이고 묵시적 인물을 지향하게 된다. 반면, 역사적 이해에 밀착된 주석들은, 과거에서 미래로 쳐 올라오는 식으로 해석하므로서 지나간 사건에 대한 재생 의미를 차단시켜 버리게 된다. 이것은 인간 주체의 한계성을 노출시키는 바가 된다. 즉 7이레 시점이 확고하면 그다음 62이레의 기간과 1이레의 기간과 확실하게 점찍을 수 있다고 보는 동시에 그 7 이레는 이미 지나간 일회성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예언은 십자가 복음과의 지속적인 연관성이 소멸된다.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아의 출현 사이에 계시적 연결은 시간적인 계기로 가능하지 않다. 십자가 못 박힌 그 메시아의 주체의 묵시적 위상에서 해결 지어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환원시켜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그 해석 주체자들의 살고자하는 (어떠하든 구원되고자) 육적인 본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의 연관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간주되어 ‘인자의 죽음’의 시각에서 다니엘의 70이레를 해석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곧 심판의 결과며 묵시의 완성이다. 이 심판성을 품고 죽은 자로서 참여하는 것이다.(갈 2:20) 그렇게 되면 70이레의 진면목이 단지 지나간 한 역사상의 과거의 계시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생명의 힘을 전달하는 내용을 품고 영원히 적용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회적인 것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으로 지난 날의 계시까지 묵시적 구조 안에서 영원히 장악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바이다. 즉 70이레 해석에서도 십자가 의의는 묵시의 자격으로 역사 위에 쏟아지게 되어있다. 이러한 해석 인식은 이미 베드로가 제안한 바가 있는 인식이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느니라”(벧전 1:10-11)

Ⅱ. 본론

1. 언약과 주체의 발생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종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종말됨’을 계속 거부하면 ‘종말’ 이후의 혜택에서 제거된 자가 되어 버린다. ‘종말 이후의 혜택’이란 ‘심판 너머에 있는 구원의 혜택’을 의미한다. 이 구원의 혜택이 벌써 말씀 안에 들어 있어 이미 우리 앞에서 제공되어있다. 문제는 그 ‘심판성’을 어떻게 타넘느냐는 것이다. 역사적 존재인 인간은 정렬된 역사적 시점들을 헤아려가면서 다음 순서를 기다린다. 하지만 역사적 산물로서의 인간 몸은 닳아져 없어지는 시간과 더불어 함께 삭제된다면 그 ‘기다림’조차 삭제대상이다. 자신의 신체가 살아있다는 조건 속에서 헛꿈 꾼 것이 된다. 즉 인간은 종말을 곱게 통과할 신체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심판과 저주와 죽음과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은 비거룩에 대한 ‘거룩의 공격’이라는 형태를 띠기에 아담의 육이 내뿜는 죄의 고유성으로 인해 거룩의 공격을 버텨낼 수가 없다.

하나님 쪽에서 희망을 전해오셨는데 그 희망이란 바로 인간조차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말씀에 준해서 내민 영속성 있는 자비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토해내면 된다. 이런 취지의 말씀이 다니엘에게 주어졌다. “인자(人子)야”라고 호명되면서 제공된다.(단 8:17) 호명(呼名)이란, 호명 받은 자가 호명한 자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적 의미를 갖는 관계를 말한다.1) 이렇게 되면 호명 받은 자의 선택은 호명하신 분의 선택에 의해서 전부 박탈당한다. 이는 인간들이 ‘본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이 실은 ‘비본래적 선택행위’를 그동안 발휘해왔음을 비로소 지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호명이 일어나면 이는 곧 ‘박탈의 장(場)’, 곧 주체의 공터(무)를 발생시키는 사건이 되고 이 무(無)는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숨어있는 바를 배태하고 터져 나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면 거기서 무에서 올라와서 새로운 유를 창조하는 새 주체자가 등장의 조짐은 ‘묵시적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지평위에 지뢰처럼 수시로 터지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기존 주체자를 부정하고 새로운 말씀 주체자로의 이전과정을 ‘이름’을 통해서 밝힌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기존의 이름들을 공격하는 전략적 이름이요 전술적 군사 개념이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그 역사적 현장은 군사(軍士) 활동 개념에 준해서 해명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또한 그러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4/겔 37:10) 적은 산출되어야 한다. 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되면서 역시 ‘무’에서 호출되어야 한다. 다니엘서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다.(단 7:2-3) 하나님 창조에 있어 바다란, 땅의 경계 너머로의 침범을 허락받지 못한 세계를 의미한다. 이는 땅 위에서 진행되는 역사에서 자체적인 한계의 징후를 말해주기 위해 대기된 세계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5:22) 이 창조의 원칙은 그동안 노아의 언약에 근거해서 확정된 것이다.(사 54:9)

그런데 노아 언약으로 형성된 땅의 질서는 바닷물의 침범을 차단하는 장치가 되어있었다. 노아 언약의 본질은 하늘과 땅에 새 요건을 추가 시키므로서 알리게 된다. 우선 하늘에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지개이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비 내림’이란 곧 심판의 지속이 여전함으로서 ‘죽음과 심판과 저주’로 이해된다.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그들에게 ‘비 그침’이란 자애로운 특별한 혜택으로서의 생명이다. 죽음이 그 생명의 혜택을 갈취하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언약의 능력에 의해 수행된다. 이 사랑의 표징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설치시켰다. 따라서 무지개 언약의 배후에는 항시 ‘심판의 지속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배경이 없이는 해석될 없는 것이 바로 ‘언약’이다. 그런데 이런 ‘심판과 저주’를 배경으로 해서 인간이 새로이 등장하게 되면 그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 주체의 내막은, 이 언약을 닮아있다. 인간 외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인간을 규정하고 종속시키는 언약성의 위력은 인간 내부에 질적으로 차이나는 시각을 유발하면서 주체 내부를 끊임없는 분절시키는 현상이 발생된다. 홀로 있으면서도 그 홀로됨을 유지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2) 엄연히 창조 공간에는 무지개가 떠있다. 그런데 이 무지개 구조물이 제대로 기능이 작동하게 하는 조건 또한 지상에 장착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것은 ‘피’였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3-6)

지상에서의 축복과 저주, 곧 생명이나 죽음이냐의 결정짓는 기호로서 새롭게 등장된 것이 ‘피’이다.3) 하늘의 무지개는 지상의 피의 유무와 관련지어 그 지상 보호 기능을 유지하게 된다. 하늘의 무지개는 지상에서 벌어지는 피의 기호적 의미를 받아서 그 보호 기능의 원활함 유무를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하늘의 운명은 땅에서 일어나는 피 중심적 사건에 따르게 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이제부터 지상에서는 ‘피’가 주도권을 쥔다. 따라서 같이 땅 위에서 살아야 될 인간은 피와 관련된 주체이기를 요구받게 된다. ‘억울한 피’가 땅을 적시면 땅이 분노하고 저주하는 그 질서에 저촉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을 규정하는데 있어 인간이 처해 있는 ‘땅’의 속성 에 따라야 함을 말한다.

인간은 외부 환경에 의해 내부의 질이 결정되는 대상이다. 그만큼 인간은 언약 속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다. 만약에 인간 자신들이 언약의 주체로 나서려고 한다면 이는 곧 비현실적 처신이 된다. 언약으로 굳혀져버린 체계와는 맞지 않는 비현실적 몸부림이다. 언약에 의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생각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에 비중심적이고 비독자적인 위치만을 배정받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이는 곧 세상 해석에 있어 이미 주도권이 상실되었으며 실제적인 언약 실행자 쪽으로 넘겨지는 것을 체득하면서 살아야 될 운명이다 는 말이다. 만약에 인간이 인간을 규정하려고 든다면 실제 현실을 조성하는 언약적 조치와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육으로는 말씀을 해석할 자격과 권한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언약조차 낯선 세계의 원리처럼 느껴지는데 (특히 이방민족에게는) 이로서 자기와 동질성을 맞추지 못한 대상들은 모두 배척하고 미워하는 식으로 주체성을 발휘하게 된다. 인간의 주체는 타인을 배척하면서 자체적인 동질성으로 내용이 채워지고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 주체성으로 인간은 모든 현상과 변화를 읽어내고 그 가운데 자기중심적 역사를 엮어낸다. 따라서 늘 하나님의 언약과 충돌되지 않는 역사란 없다.

하나님께서 관여하는 지점이 이 지점이다. 즉 차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시는 그 지점이다. 창세전의 선택이 본격적으로 발휘되는 지점도 없었던 차이가 새로 발생되는 지점이다. 예정하심을 근거로 해서 본격적으로 분리 작업에 나서신다. 하지만 그 차이의 장(場) ‘주의 이름 안=예수님 안’으로 창세 전부터 확정된 마당이다.4)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 형제들의 제사 해석에 친히 관여하신다. 이런 관여로 인해 졸지에 아벨은 형에게 맞아죽는다. 하나님의 관여 때문에 발생된 ‘억울한 피’다. 그가 흘린 억울한 피는 단지 아벨 개인의 억울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땅도 합세할만한 성격이었다. 땅은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하늘에다 호소한다. 땅과 하늘은 결코 떨어질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땅의 사정이 하늘까지 확대된다. 가인에게 징벌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가인이 기대한 안정적인 땅 위의 삶의 터전이 도리어 무서움이 되는 징벌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저주가 대지에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지에서 저주를 피하는 방식이 바로 역사에 희망을 거는 방식이다. 역사에 아무리 역경과 고난이 넘쳐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긍정적 결말을 이끌어내고, 소망을 낳는 해석을 선취(選取)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면 여전히 ‘억울한 피’는 반복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인간의 갈라진 주체가 포기 못하는 그 역사의 장(場)이란 기껏 환상에 불과하다. 언약이 멈추지 아니하는 한, 이와 같은 불길한 징후는 묵시에 의해서 끝까지 추적당한다.

‘억울한 피’들로 인하여 땅이 저주받으면 언약적 보호 장치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풀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땅은 바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바다에 자리 잡은 ‘무질서’의 세력이 땅을 점령하게 하는 구실이 되고, 그러면 땅은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이 혼돈을 감당하는 소관은 땅 위의 인간이 아니다. 욥은 모른다. 산 염소가 새끼 치는 것을(욥 39;1). 욥은 모른다. 사람 없는 황무지에 구태여 비가 와야 하는 이유를.(욥 38:26) 그리고 까닭없이 자기에게 고난이 덮친 사실을! 그렇다면 누가 아는가? 그것은 영적 존재가 이 땅에서 출현하여 언약의 배경으로 하여 철저하여 ‘땅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분이 ‘주의 이름’이다. 이로서 이 땅에는 ‘주의 이름’되시는 분 따로 있고, ‘인간의 이름’으로 사는 자들이 따로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해석도 사뭇 다르다. 대립된 입장에서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땅위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터 중앙’에 불러 나온 인물이 다니엘이다. 그렇다면 그 다니엘도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 한다는 성전의 운명과 마주 대하면서 자신의 위상이 드러낸다. 곧 ‘인자(人子)’로서의 위상이다.

2. 발생적5) 성전관과 주체

다니엘 70이레는 성전의 위상에서 배출되어 나온 시간 구조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지 않는 이방민족에서는 나올 수 없는 시간 구조를 제공한다. ‘주의 이름’이 임재한 성전이 어떻게 해서 독자적인 시간관을 방출해 내는가?

보수주의 경향의 구약 신학자 카이저 Walter C. Kaiser나 비-보수주의 경향의 구약학자인 침멀리 Walther Zimmerli 나 모두 성전의 의미를, 어쨌든 다윗의 기획과 솔로몬의 추진에 의해서 즉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서 역사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가시적 건축물이라고 규정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문제는 ‘사람의 손으로 지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성전의 존재함에서 인간이 본디 부정하고 죄악적이다는 사실을 도출할 논리적 근거를 갖추지 못하고 도리어 방해한다는 점이다. 카이저의 경우는, ‘다윗의 가문’, ‘다윗언약의 혈통’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간주하고 그 약속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지상의 ‘예배하는 집’으로서 성전을 허락했다고 보고 있다. 카이저 Walter C. Kaiser, 『구약성경신학』,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2), pp.204-205. 이렇게 되면 ‘집’ 개념과 ‘성전 개념’, 혹은 ‘집’ 개념과 ‘장막’ 개념이 처음부터 벌어져서 따로 존재하는 두 개의 개념이 된다. 카이저는, 언약의 변천으로 인해서 ‘집’ 개념의 변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노아의 ‘집’은 방주에 들어갔으나 ‘노아가 거주한 건물’은 방주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도 버려야 했던 ‘실제 살림집’이 단지 하나님의 ‘그 집’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버려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집에 일부러 영광스럽게 거주하실 이유가 분명치 않게 된다. 즉 같은 시간대에 ‘집’과 ‘성전’이 공존해야 할 당위성을 성전개념에서 뽑아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반면에 침멀리는 성전개념을 ‘하나님의 자유로운 임재의 장소’로 본다. 침멀리Walter Zimmerli, 『舊約神學』,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4), pp.90-103. 성전이란, 그 어떤 공간에도 억매이지 않고 인간을 가까이 하기 위해 자유성을 보여주는 우발적 공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발을 붙잡아둔다는 법궤라는 상자(하나님의 발등상)의 지정되어야 할 이유가 분명치 않으면 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구속성을 갖는지 이유가 모호하다. 결국 두 신학자가 제시하는 성전의 의미는 ‘인간에게 납득이 되는 만남의 장소’로서 가시성(可視性)을 충분히 보장해주는 식으로 배려하신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의 의미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와 관련지어서 숨어있는 ‘잠재성’의 모습으로 일어난다. 인간의 주체성이란 신마저 자기 동일성 지평으로 포섭하려는 식으로 발휘되기 때문이다. 성전의 시작은 사무엘하 7장, 다윗의 성전 제안으로 비롯된다. 다윗의 주체성 발휘로 야기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백향목 궁전에 사는 것을 법궤가 있는 공간보다 더 월등하게 호사스럽고 우수한 환경이라고 여겼다. 즉 백향목 궁전 안에 들어있는 자신과 천막 안에 들어있는 법궤상자를 상호 비교될 수 있는 동등한 주체라고 여겼는데 이런 발상이 외부적인 것을 동일성 차원에서 다루는 주체자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다윗의 제안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 사이에는 동일성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차이성으로 마주쳐야 하는 관계임을 분명히 하신다. ‘사람을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다윗의 성전 제안’을 계기로 해서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있는 성전’에 대한 부정(否定)을 내포한 성전개념으로서 지상의 인간들이 염두에 둔 성전과 결합된다. 이처럼 성전의 의미란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상호작용의 대립적인 틈을 통해 발생적으로 드러난다. 이 성전 규정은 오늘날 신약시대의 교회 규정과도 통한다. 하나님은 자기 성과를 사수하시고 소멸되지 않게 하시는데 역점을 두시는데 이 사수하심으로 통해서 성전의 소유를 놓고 ‘인간의 이름’과의 치열한 영적 전쟁을 경과하면서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다.

성전은, ‘전쟁하시는 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기념공간이기에 성전은 반드시 땅 위의 전쟁을 경유하면서 땅 위에 세워진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전리품이 발생되는데 이들도 또한 하나님의 자랑거리로서 그들만 하나님께 기거하시는 집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로서 성전은 하나님의 자기자랑거리가 된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림 영원무궁하시도다”(출 15:17-1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랑이신 이 성전에 ‘주의 이름’ 이외의 딴 이름이 걸리고 경배 받는 것을 용납 못하신다. 심지어 성전 건축을 한 ‘인간의 이름’도 허락될 수 없다. 그런데 그 성전이 이제는 성전이 무너져야 한단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철회하려 하시는가? 하나님의 조치의 결과는 아모스 9:6에서 미리 알려진다. “그의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즉 본래의 성전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인간이 인간의 그 더러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성전의 의미란 늘 새롭게 발생된 사태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전은, 애초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우호적인 격려와 협력 속에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인간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각기 성전 의미를 고수하므로서 발생되는 영적 충돌 속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의 검은 연기를 피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사 드림’ 자체가 ‘주의 이름’이 벌리시는 일에 관여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인간은 결국 ‘주의 이름’이 원하시는 결과를 내놓을 수 없는 존재임이 드러난다.6) 즉 성전을 중심으로 시도되는 인간의 노고는 하나님의 자랑거리인 ‘주의 이름’의 가치를 무산시키는 비거룩한 성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공간이 되고 장치가 되는 것이 바로 성전의 취지였다.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 74:3-7) 존재적이 아니라 발생적으로 봤을 때, 성전이 공격받으면 곧 ‘주의 이름’이 공격받는 것으로 간주하시되, 성전이 깨어지면서 드러나는 성전의 성격은 곧 ‘인간의 이름’으로 제안된 성격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의도이 인식되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은 계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가시적이고 존재적 성전개념’을 고수하기에 기존의 성전이 하나님의 본거지로 하나님께서 영구히 지정해놓으신 공간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로서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도리어 노골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역사적 접전 지점으로 허락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구조물을 허락하시되, 하나님은 사람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다윗으로 봤을 때, 성전은 긍정적인 의미에 이해했지만 하나님께서 부정적 의미로 다가오셨는데 이는 인간과의 만남이, 부정(否定)을 배경으로 할 때만 긍정적 의미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 부정과 긍정이 성전 파괴가 일어나는 시점에 ‘선지자의 몸=선지자의 신체’를 통해서 역사 한 가운데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신’에 둘둘 감겨 등장된다. “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그 문에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겔 11:1) 성신이 동쪽에서 빠져나가고 남은 성전은 불탄다. 하지만 새 성전이 완성되면 성신은 동편으로 다시 들어와 충만하게 된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겔 43:4-5) 주의 이름의 원수가 이미 역사적 구조물인 성전까지 침입하여 그 거룩한 공간이 우상의 자리에 세워진 공간으로 바뀐(겔 8:4) 이상, 이제 주의 이름이 머물 공간은 ‘인간들 속’이라는 새로운 공간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에스겔 선지자는 성신이 임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의 거리에 다니면서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도장을 매겨야 한다.(겔 9:3-5) 도장이 찍힌 사람만 산다는 말이다. 주의 이름이 훼손됨으로 갖게 된 주님의 억울함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 이름’은 포로 잡혀 가는 사람과 동행하면서 포로 생활을 같이 하신다. 그곳이 성소가 된다. 새언약이 완료되는 날, 그들의 마음속에 새 영이 부어지게 되고(겔 36:26) 하나님은 다윗이 되셔서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면 그곳이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성소가 된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26-28) 그런데 이 새 성전에는 물이 흘러나오게 된다.(겔 47장) 물이 나오지 않는 성전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새 성전이 아니다.7) 인간은 물을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 안에서 생명의 물이 인간보다 환경적으로 우선되는 입지를 갖기 때문이다.(창 2:10-15) 이로서 새 성전을 구성에서 인간은 배제된다. 새 성전을 향한 나름대로의 기대도 역시 허구다. 진정한 새 성전은 ‘기대하는 인간으로서 기대되지 않는 방식’으로 도리어 인간을 부정(否定)하기 때문이다. 인간차원에서 새 성전 건립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있는 성전은 없다.(슥 4:6) 이는 곧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주체성을 바꿀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새성전이 성취될 때까지 인간은 계속해서 주의 이름에 반발하게 되고, 거부가 일어나야 한다. ‘인간의 이름’에는 그 이름을 지향하는 시간관이 형성되어 그 시간관으로 큰소리치기 때문이다.

‘개혁’과 ‘쇄신’은 실은 거짓말이요 위선이다. 과거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와, 미래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 사이의 균열이 내부적으로 따로 시간층을 성사시켰고 수시로 변화는 외부적 동질성을 모색하려고 시도한 것뿐이다. 아무리 쇄신해도 몽상에 불과하며, 기존의 ‘인간의 이름’이라는 독자적 주체성을 갖다 버릴 적당한 역사 밖의 처소를 구하지 못해서 오는 폐쇄적 성질을 그냥 자꾸만 내부 깊숙이 쑤셔 넣고 있을 뿐이다. 즉 수평선 시간선이 쌓여서 자기 내부적으로 수직적 시간층을 가중시키게 된다. 이런 시간구조를 지니고 주체적으로 자신을 인식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에 맞서서 자살을 시도한다.(욘 4;3) 하나님께서 자기가 기대한 시간관에 따라 일을 진척시키지 않더라는 것이 그 이유다. 자신이 자기를 처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전과 관련되어서 바다 밑둥치에서도 살아남은 요나 선지자는(욘 2:4) 그 성전의 의미와 속성을 덧입는 사명을 끝까지 수행해야만 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조성한 환경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 환경은 성전에서 뿜어져 나온 환경이다. 그 안에서 선지자의 신체는 움직인다. 반항하는 신체다. 예언의 일관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본국에 있을 때는 니느웨성이 반드시 40일 지나면 멸망한다는 예언이었지만 졸지에 그 소식을 접한 니느웨성이 회개하고 마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오자 그만 멸망의 시점도 소멸되고 판결도 취소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요나 선지자는 인간의 주체적인 시간과 공간적으로 절대로 파악이 불가능한 다른 층에서 ‘주의 이름’이 제공하는 은혜와 자비성이 일관성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음이 도리어 선지자의 주체의 죽음을 야기 시킨 그 관련성을 접하게 되었다. 이렇듯 선지자의 자리는 선지자 본인의 주체적인 삶의 자리가 아니라 그 사태를 발생시킨 ‘주의 이름’을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자리였던 것이다.

3.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

다니엘 선지자도 이 요나 선지자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이란 바로 ‘포로 잡힘’이라는 처지다. 이 처지는 이미 자기 생명의 주도권이 다른 신, 다른 나라에게 이미 넘어가 버린 상황을 의미한다. 즉 자기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지자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과연 말로만 선지자이지 그의 선지자 기능은 과연 정지나 중지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운명과 더불어 같이 할 운명자로 ‘사람’ 혹은 ‘인자=사람의 아들’라는 호칭이 붙는 인물을 그 시대에 맞는 선지자로 제시했다. ‘인자’라는 인물이 깨어진 성전의 미래를 선도(先導)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좌정하시는 곳이다. 그런데 성전이 도리어 그 ‘하나님의 이름’의 의해서 와해되면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체다. 즉 옛 언약에 준한 성전이 깨어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실체가 드러날 수 없다. 에스겔 1:26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그 보좌는 불붙으면서도 사방으로 움직이는 마차와 같은데 그 위에서 등장하는 것은 ‘사람의 형상’이다. 똑같은 구조의 보좌가 다니엘 7:9-10에 나오는데 거기에 기거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다니엘에서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라고 묘사되어 있다.8) ‘이름’이 ‘인격’의 모양새를 갖추면서 그 언약적 기능도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이름’과 대결구조로 확대된다. 그 와중에서 다니엘은 “인자야!”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그렇다면 ‘인자 같이 이’와 ‘인자’와의 대비가 다니엘의 신체 안에서 성립되는데 이 대비는 곧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작용의 차이를 드러낸다.

예언의 일관성은 인간의 신체성이 뿜어내고 있고 있는 원초적 생존의 욕망과 그 육적으로 주변을 해석하는 해석성향으로 바깥으로 드러내게 만드는 것과 관련 있다. 인간들에게 있어 해석불가란 없다. 그것은 신체 자체가 ‘표현해 낼 수밖에 없는’ 신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장문정은 ‘메를로 뽕티의 살의 기호학’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신체(⇒살)를 내부와 외부를 소통시키는 교환원리(키아즘chiasme:기호학에서 말하는 교차대비구조)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자꾸만 자신의 몸을 구조화 시키고 구성화 시키는 그 구조를 해체하는 구조로서 작용한다고 보았다.9) 즉 그녀는, 신체를 통과하는 주름들은 안과 바깥의 이중성으로 표상되며 그래서 우리는 신체나 살의 주름들을 의식이라고 칭하기도 타자나 사물이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이것들은 주름의 안과 바깥이 그러하듯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10) 주체(나, 너, 우리, 그들)란, 오래된 내재성을 부활시키기는커녕 이러한 바깥의 새로운 안을 구성하는 깊은 습곡을 신체에 끌어들이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이는 공존과 지속으로서 잠재성을 설명하는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주체관에 동조하는 주장이다.11) 그래서 그녀는 주체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전이하고 진동하면서 동일한 살―신체, 말, 텍스트― 속에서 안이 바깥으로 되고 바깥은 안이 되는 의사소통적 순환의 장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기호학적 지시작용이 일어나면서 문화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한다.

보편화된 의사소통 세계 형성을 위해 처분가능한 의미작용의 법칙이 확립되는데 여기에 인간은 ‘수동적 자율성’을 발휘하게 된다.12) 신체는, 새로운 언어의 힘을 구사하는 중력장으로 행세한다. 파롤parole에서 랑그langue로의 전환이다. 스스로 역사 생성의 주체자 노릇을 자처하게 된다. 역사적 존재자로서 다니엘도 예외가 될 수 없다.13) 그럼에도 그에게는 특별난 호칭이 하나님으로부터 붙여진다. 그것은 ‘인자’라는 호칭이다.(단 8:17) 이 호칭은 에스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에 의해 붙여졌거나 사람에 의해서 불릴 이름이 아니다. 이 호칭으로 소통하실 분은 하나님에게 독점되어있다. 이 호칭의 이질성은 역사 속의 모든 인간 관계에 억매이지 않고 벗어난 위치에서 묵시적 업무를 행세하는 탄력적인 주체자에게 부여되는 특징이다. 탄력적 주체자란,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같은 이름으로 묶어져 살아가기 위한 근거로서 상호 다른 두 개의 세계를 말해주기 위해 두 가지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를 말한다. ‘다니엘’이라는 역사상의 이름으로서는 진정한 묵시적 주체적 내용에 부합되지 못한다. 그의 묵시적 기능의 주체자는, 그를 ‘인자’라고 불러주는 ‘주의 이름’, 곧 ‘인자 같으신 분’이다.

기존의 선지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역사상의 서열로서만 그의 선지자적 위치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에게 나타나신 ‘인자 같은 분’의 묵시적 작업으로 인해 다른 선지자들마저 그로 인해 새로운 묵시적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마치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차원과 같다.(마 17:3) 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기지시는 그 시기까지는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주어진 예언의 범위 내에서만 의미를 보여주게 되는데 온전한 것은 그도 알 수 없는 것이다.(요 8:56)14)

4. 70년 포로 기간의 의미

다니엘은 인간이다. 육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해명한다. 다니엘은 성전 파괴를 잊을 수 없고, 언제가 역사적인 건축구조물로서의 성전이 다시 세워지기를 원한다. 변치 않는 구원약속의 일관성을 드러내는 표식으로서 성전 회복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70년이라는 실제 역사적 기간만 지나면(대하 36:21) 필히 하나님께서 성전은 다시 본래의 자리에 건축되리라 믿었고 하나님은 다시 그 성전에 임재하리라 여겼다. 그렇다면 지금의 포로 기간은 그냥 자숙하면서 고난 속에서 잠잠히 있으면서 그냥 속히 지나가기만 고대하면 되는, 자체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이 될 것이다.

즉 다니엘이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언약적 사건은, 부서진 성전을 대신해서 예루살렘에 세워질 그 새 성전 건립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다. 그런데 포로 기간 70년이 지나도 다니엘은 성전 건립을 위해 다시 본국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되돌아갈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 회복이라는 것이 결코 성전 재건립이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상의 성전 재건립이 하나님께서 진정 약속하는 구원의 완성에 합류되기 위한 노선에로의 진입이 아니라면 이것은 성전이라는 개념이나 땅이라는 개념의 수정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역사 자체에 대한 개념 변화가 다니엘 내부에서 일어났음을 뜻한다.

다니엘은 현실을 또렷하게 의식하고 있다. 결코 다니엘은 자신의 꿈이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고 생각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회개해야 될 집단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율법을 무시하지 않는 처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그 어떤 행위도 70년 포로 기간을 무효화하거나 단축시키거나 취소시킬 능력으로 작용하리라고 생각하지 아니했다. 70년 포로 기간 이외의 다른 현실을 그 시점에서 따로 상정할 입장이 못 된다. 묵시세계를 끌어당기겠다는 의도 자체가 죄인으로서 주제 넘는 일이요 자신의 처지를 의식적으로 부정하고자하는 경솔한 반항심이다.

역사를 뒤집을 만한 그 어떤 틈도 보이지 않고 현실은 빡빡한 질서다. 느부갓네살의 통치가 장난이 아니다. 환상도 아니다.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의 파트너였다. ‘아래로부터 시작해서 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느부갓네살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다. 다니엘과 유대인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굳어져버린 현실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이 명하지 않는 음식을 거절했다고 해서 나라가 바벨론 제국이 유대나라 손에 전복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질서를 지탱하는 힘에는 누수가 없다. 하지만 여분의 지혜가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덧입혀진다.

이 지혜로 인해 유대나라가 다시 회복되는지는 않는다. 유대나라의 영속성을 지대할 수는 없고 지혜 속에 녹아버린다. 천하를 뒤덮고 있는 바벨론 제국의 무너짐은 지혜로 인해 유대나라의 영속성이 보장받는 것이 아니다. 그 무너짐은 대체해서 등장될 그 다음 나라와 관련 있다. 즉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단순히 같은 역사 속의 나라인 바벨론을 맞상대하는 자들이 아니라 본인들부터 역사 속에서 동일하게 무능자 신세일 뿐이다. 결코 바벨론 제국은 다니엘과 세 친구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다. 도리어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역사적 제국이다. 그런데 왜 70년 포로기간이 지나면 자신들은 앞으로 이 역사적 제국이 아닌 비역사적 제국에 복속되어 지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줄 나라와 관련된 채 이 지상에서 지혜자로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70년 포로기간은 다시 역사적으로 유지되는 유대 나라와 연결되는 기간이 아니라 역사에서 비역사적 나라로 이전을 통해서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관성을 비로소 밝히 보여줄 수 있다는 사태와 관련된 기간이 되는 것이다. 이 여부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행함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없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 어떤 경건스러운 자세를 취하며 살더라도 새로운 나라에 편입은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동안 유대나라는 이방민족화 되어서 도리어 이방민족의 통치권 안으로 삼키어졌다. 따라서 70년 포로 기간 중에, 왜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보다는 이방우상을 섬기는데 더 열중할 수밖에 없는 몸을 가졌음이 들통 나는데 이러한 우상 친화성을 보여주는 자신들의 신체성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70년 포로기간 중에 알아채야 했다. 만약에 그래도 유대민족들이 제대로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모른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70년이라는 포로기간이 다 채워졌을 때,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낼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하지만 다니엘이 나중에 깨달은 바는, 70년이라는 포로기간은 그 전에 자신이 스스로 규정해놓은 그 죄관에 의해서 회개를 하라고 촉구한 기간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도 미처 몰랐던 죄에 대한 다른 규정의 적용을 받기에 사람의 반성 여부와 상관없이 70년이 차면 필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회개조차 형편을 개선할 수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재 다니엘이 포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계시로 인한 변화는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일차적으로 영향을 입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과 유대민족을 통제하고 있는 권력자인 느부갓네살 몫으로 1차적으로 제공된다. 이런 의미에서 느부갓네살은 유대민족의 대변자 노릇을 하나님 앞에서 나서게 된다.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보편적 단독자’ 입장에 있게 된다. 즉 그의 운명이 모두의 운명을 대표하는 개인이 된다는 말이다. 매를 맞아도 그들이 먼저 맞는다. 바벨론 제국이 먼저 지적받지만 그 속에는 지난날 유대나라가 이방나라에게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가를 같이 지적하시는 내용이기도 하다. 느부갓네살에게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유대민족은 새로운 차원에서 남의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제대로 된 기준에 의해서 지적받은 기회를 갖는 기간을 갖게 된 다. 만약에 이 새로운 죄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70년 포로기간이 지나 본국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축하더라도 ‘인자人子의 나라’로서 보장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왕에게 계시를 주시므로서 인간 세계는 ‘주의 이름’에 대드는 악의 세계 속에 다함께 감금되었음을 알려주셨다. 즉 ‘차이’를 발생시키시는 것이다. 지혜의 계시와 말씀 해석의 차이에서 발생된 틈을 통해서 숨어있던 ‘주의 이름’의 행사를 역사 표면에다 토해내시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왕은 지난밤에 꾼 꿈의 내용을 모른다. 신하들도 모르고 당연히 다니엘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모르면 모르는 채 그냥 묻어버리고 지나가면 그만인 것이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최고의 권력자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가 하는 점이다. 최고 통치권자 위에서 따로 최고 통치권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낯선 지혜의 출몰에 그는 두려워해야만 했다. 느부갓네살 만큼은 눈치 챘다. 자신이 지난밤에 꾼 꿈은 분명 자신의 장래와 제국의 운명과 관련 있는 꿈인 것을!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반드시 그 꿈을 알아내어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혜자를 찾게 되는데 이로서 지혜는 현재라는 시간을 너머서서 현재를 장악하는 미래의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간들의 시간관에 잉여부분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위기를 부르는 사태다. 왜냐하면 인간의 미래란 어디까지 현재의 상황에서 자신의 욕구를 덧붙여 상상한 것이고, 그 현재라는 것도 실은 과거의 기억 가운데서 자신의 몸 유지를 정당화시켜줄 기억을 재료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편집하고 조작해낸 ‘지금을 위한 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가 미리 현재를 덮치게 되면 이런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시간관이 정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기존의 주체성으로는 해독이 안 되어 견딜 수 없게 된다. 15)

바로 이러한 보편적 인간성은 느부갓네살을 정점으로 하여 포로 잡혀온 유대민족마저 현실 안에다 잠가둔다. 또한 유대민족이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대리해서 보여주는 바가 된다. 그런데 설사 다니엘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미래를 알았다할지라도 그 미래의 모습은 느부갓네살의 몸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고 대책을 세울 수 없는 미래다. 인간의 몸에서 고대하는 미래상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이로서 ‘인자의 나라’에 입성은 성사될 수 없다.

다니엘로부터 꿈 해석을 들은 후 12달 만에 느부갓네살 왕은 꿈의 내용대로 짐승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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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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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