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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10. 1. 22) 1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강의(2010. 1. 22) 1강

이름 : 서경수(IP:112.152.146.69)

광주 강의(2010. 1. 22) 3-1

에스겔 3장 1~3절입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 구절에서 뭘 상상할 수 있습니까? 에스겔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책을 받아서 그것을 먹는 장면이 보입니다. 이것을 보면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에스겔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리고 두루마리 책을 먹는다. 여기서 사람들 마다 궁금한 것이 다 달라요.

‘에스겔은 하나님을 어떻게 봤을까?’ 이것이 궁금할 수도 있고, 또는 ‘사람이 어떻게 두루마리를 먹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고, ‘에스겔이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런 지시를 했는가?’ 이런 궁금증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나무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 따먹고 싶었어요. ‘과연 저 열매는 어떤 맛일까?’ 또는 ‘저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죽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런 의문도 들었을 것이고, 사단의 말로는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정말 하나님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했겠지요.

사람이 자기 외부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 자체가 우리한테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다도, 내 궁금증을 가지고 이 사건 현장에 다가가서 그 궁금증을 해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100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성경을 달달 외웠는데,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죽였어요.

에스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나 예수님과 같이 있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저리 가! 당신은 귀신 들렸어.’ 라고 분명히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가 순전히 상상력만으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수상합니다.

아까 공부 시작하기 전에 나눈 이야기 중에서, 증도(전남 신안군 증도면)에 있는 엘도라도 콘도가 좋다는 것을 우 집사님이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듣는 사람은 상상을 해요. 그 상상하는 근거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과거에 가본 괜찮은 콘도, 멋있는 경치 등을 종합해서 거기에서 더 좋은 것을 추가를 시켜서 콘도를 상상합니다.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든지 할 때,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줄 모르고 항상 자기가 갖고 있던 과거의 습관이나 기억에 준해서 추가로 덧붙이는 식으로 이해하니까, 정작 말하는 사람의 엘도라도와 내가 상상하는 엘도라도는 전혀 달라요.

이것을 에스겔에 적용시켜 보면, 성경에서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었다는 안목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내용인데, 이것이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었기에 우리가 읽으면 우리는 우리의 궁금증을 가지고 계속 접근하게 됩니다. ‘두루마리를 정말 씹어 먹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지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 흘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사람들의 관심사는 ‘저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지? 십자가 질 때 우리의 죄는 뭐지?’ 이런 것에 관심을 둘 수도 있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수도 있는데, 원래 예수님의 십자가의 내막을 우리가 접근을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울과 같은데, 예를 들면 커피숍이 있는데 그 벽이 거울이라면, 밖에서 안은 안 보이고(단지 거울 같고), 그러나 안에서는 밖이 보이는 것 있잖아요. 고급 차 선팅은 바깥에서 안은 안 보이고 차안에서는 밖이 다 보이지요. 이처럼 십자가는 이런 거울과 같아서 밖에서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죽었구나. 이 십자가가 뭐지?’ 하고 십자가에 다가서며 기웃거리는 태도와 행동을 빨아 당기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삼키는 이것은 마치 신약 시대의 십자가와 같아서 ‘에스겔이 정말 먹었을까? 그렇다면 맛은 어땠을까?’ 하면서 나름대로 기웃거리는 이 전부를 죄로 여기고 잡아당기면서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먹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봅시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사람들은 궁금해서 호기심으로 다가갈 때 그냥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이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래 어서 네 죄를 내 놓아라.’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도리어 이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마치 거울이 있는데 바깥에서는 거울이지만 안에서는 유리와 같아서 밖에서 행동하는 모습이 다 보이듯이, 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은 성경을 접근하는 태도마저도 이 안에서는 이미 다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혼자의 십자가가 아니고, 반드시 십자가로 생긴 사건은 바깥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인간들의 죄를 흡수해서 생긴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십자가를 아는 성도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십자가에서 되비춰 나오는 예수님의 고통하는 모습이 결국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받고자 하는 나의 죄마저도 용서하기 위한 십자가의 피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믿어서 ‘천당 가야지.’하는 것까지 죄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성령 받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기독교에도 주문이나 주술 같은 것 없나?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 것, 문장 몇 개 외우면 천국 가는 것 이런 것 없나? 뭐, 십자가 믿으면 된다고? 그러면 십자가 믿어야지. 자, 하나님 저는 십자가 믿었습니다.’ 라고 나설 때, 이것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입니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바로 이따위 식의 사고방식, 자신의 죄를 모르고 그냥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 쥐면 곧장 천국 가리라고 여기는 이런 죄까지 주님이 빨아 당겨서 그것을 도로 ‘이것이 네 죄다.’ 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감나무에 감이 달리지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가 감나무라면 감만 따먹으면 된다고 여겨요. 감의 효과로 구원 받으려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십자가는 감을 먹어요. 먹게 되면 감나무 농사를 지어야 됩니다. 이미 구원 받았기에. 어찌해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이런 고생을 했는가 하는 그 과정을 겪도록 되어 있습니다.

겪어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감을 먹어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 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모든 여정을 가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십자가를 처음 볼 때는 내가 주인공이고, 십자가를 알고 난 후에는 십자가 지신 그분이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주인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똑같은 원리가 본문에 나옵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만약 제가 성경공부에 와서 아무 말도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3분 45초가 지나서 성경책을 먹었다고 합시다. 이런 예술가가 있었어요. ‘존 케이즈’라는 사람인데 백남준이 존경했던 인물입니다. 그 사람은 3분 45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끝나고 난 뒤에 ‘작품 끝났습니다.’ 라고 했어요.

침묵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무것도 안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비로소 얼마나 분주한가를 발견하는 거예요. 사람이 행동하게 되면 남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왜? 자기 행동에 자신이 지쳐서. 자기만 고생하고, 자기만 힘든 줄 알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게 되면, 이런 나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기지요.

본인이 자꾸 움직이니까 남이 나에게 베푸는 혜택은 모르고, 자기가 남에게 해주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 엄마가 되어서 만날 자식한테 ‘공부해라. 숙제해라. 밥 먹고 설거지했나?’ 자꾸 잔소리하지 말고, 엄마가 3박 4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해보는 거예요. 하나의 이벤트로. 남편이 퇴근해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집안이 잘 돌아가겠습니까? 안 돌아가는 줄 알지요? 잘 돌아가요.

사람이 자기가 행동하게 되면 내가 남에게 해준 것만 기억나기 때문에 굉장히 불평이 많아요. 세상에 대해서. 왜? 내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안 주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심지어는 잔소리도 안 하면(잔소리를 하면 잔소리한 덕분에 얘가 저만큼은 됐다고 우기기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남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혜택을 입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현대 전위예술에서는 이런 실험을 통해서 의미를 끄집어내요.

그런데 에스겔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합니다. 사람이 빵을 먹어야지 왜 두루마리(말씀)를 먹습니까? 말씀은 먹는 게 아니고 보고 실천에 옮기는 거잖아요. 그런데 에스겔은 실천이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실천은 나라는 주체가 성경이라는 객체(대상)를 보고 뭔가 내 쪽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성경 자체가 내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대상으로 여겼던 그 성경 말씀이 대상이 아니고, 내가 나 된 것은 말씀이 나로 하여금 있게 만들고 에스겔을 에스겔답게 이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일종의 헤프닝이죠. 에스겔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킨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누가복음 18장 이야기인데, 저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를 못하겠어요. 너무 좋아서.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교인들로 하여금, “여러분들, 예수 믿었습니까? 이제부터는 헌금하시고, 말씀 지키시고, 봉사하시고 --” 전부 그런 쪽으로 나가는데, 누가복음 18장에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 또 한 사람은 세리. 이 두 사람이 성전에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심(경기에서 심판)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주심인데, 예수님의 판결 외에 다른 판결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 판정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판단하고 정죄하고 고소해도 소용없어요. 마지막 심판 주(주심) 되시는 분이 판정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것이 뭡니까? ‘나는 의인이며, 나는 십일조 했으며, 나는 간음이나 토색이나 사기나 이런 것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소극적인 의(義)지요. 이뿐 아니라 금식도 했지요. 이것은 적극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극적, 소극적으로 모든 것을 다 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 사람이 나서서 심판을 본다면 세리는 천하의 몹쓸 인간이고, 바리새인은 누가 봐도 의인이고. 이 두 사람을 목사가 판정한다면 누가 천국 갑니까? 바리새인은 천국, 세리는 지옥 간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심판 주(예수님)에 의해 어떻게 판정 나는가를 보세요. 예수님은 두 사람의 기도를 다 들었어요. 경기는 끝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최종 판정만 남았습니다. 그 판정에서 세리가 이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세리를 의인이라고 했고, 바리새인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판정의 기준이 뭡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기준은 간단해요. 성전이 힌트입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와도 성전에 온 것이 아니고, 자기가 온 거예요. 자기가 이동한 겁니다. 집에 있는 자신이 성전에 있는 자신이에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자기 바가지가 성전에 온 겁니다. 자기가 뭘 쳐다보고 있습니까? ‘구원의 주체는 나다. 내가 행동한 그것이 나로 하여금 천국가게 만든다.’ 라는 것을 믿은 거예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뭘 느끼는가 하면, 자기가 성전에 왔다는 거예요. 성전에 제사 지내러 온 거예요. 그런데 세리는 뭐 하러 왔습니까? 죽으려고 온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주여! 저는 이 성전에 와서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저 같은 죄인이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겠습니까?’ 라고 했더니만, 주님은 ‘네가 의인이다.’

결국 이 기준은 ‘지금 네 관심사가 어디에 있으며 뭘 쳐다보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있어요. 자기가 주인공이 안 되는 식이 곧 성령 충만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안 되는 그 짧은 순간. 사람이 자기가 주인공이 되면 모든 잘못된 것은 남 탓이고, 하나님 탓입니다.

오늘 아침이 게시판에 올린 글에 보면,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관 속에서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처럼 남을 보기 때문에 아이티 지진으로 난민이 생기고 20만 명이 죽었을 때 그 난민의 입장을 안 들어보고 자기가 지진을 당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지진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라고 물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단층이 갈라져서 일어났다고 답이 나오지요. 그러면 안 되고 ‘누가 일으켰는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으켰지요. 이것을 아이티 국민들 중에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진은 신의 계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를 욕하겠어요? 하나님을 욕하겠지요. 그래서 제 글에 이렇게 썼어요. 하나님을 욕하기 때문에 ‘탄핵’이란 표현을 했어요. 인간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탄핵하는데 그 방법이 뭐냐? 헌금을 안 하는 거예요.

헌금을 한다는 말은 ‘하나님, 당신의 뜻에 동의합니다.’ 라는 뜻이고, 헌금을 안 한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나는 동의 못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당신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기에 돈 받을 자격이 못 됩니다.’ 그런 의미로 헌금을 안 합니다.

그런데 이걸 아셔야 돼요. 헌금을 하라고 하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헌금을 해버려요. 믿음도 없이 헌금을 하면 이것은 문제가 걷잡을 수 없는 겁니다. 성경에서 헌금을 하라는 말의 진짜 의도는 뭐냐 하면, ‘당신은 지금 누구를 보고 삽니까?’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의 조치에 당신은 감사하면서 살아갑니까?’ 그런 뜻으로 물었는데, ‘헌금 하면 되지. 해버리자.’ 이런 식이 되면, 믿음도 없으면서(주님을 안 바라보면서) 나중에 ‘목사님, 저는 헌금 했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본인이 감사하는 마음도 없는데 헌금을 괜히 해놓고, 그 다음에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헌금만 받아 챙기는 더러운 하나님!’ 이라고 욕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헌금 하라고 한 목사가 잘못 되었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헌금은 반드시 ‘하나님, 당신이 하신 일 참 잘했습니다.’ 라는 동의하에 헌금이 되어야 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감사가 나와야 될 텐데 감사가 없다는 말은 ‘요즘 하나님 하시는 일이 영 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아이티에 헌금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들을 땅 밑에 매몰시켜도 우리 인간의 가치는 고결합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힘을 합쳐서 지진을 일으킨 신을 부끄럽게 만듭시다. 인간 가치를 묵사발 만든 신에 대해서 다같이 저항합시다.’ 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치약, 칫솔, 화장지, 라면 등을 보내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짓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천만번 지진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할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지금 내가 지진 때문에 땅에 매몰되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정말 죽어도 마땅할 죄인이 죽습니다.’ 라는 경우에만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내려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햇볕 주셨지요, 공기 주셨지요, 눈까지 내려 주셨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어떤 지역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닐하우스가 망가지고 농작물이 얼어 죽었는데 그곳에서는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눈을 내려 폭삭 망하게 한 더러운 하나님!’ 이라고 하면서 화를 내지요.

그래서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은 것은, 우리가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짓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구원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와 의논하지도 않고 우리 구원을 위한 확실한 작업을 하고 있단 말이지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누가 있는가? 인자.

신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호칭할 때 뭐라고 합니까? ‘인자’라고 하지요. 이 말은 모든 인간들을 다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의 아들’인데,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풀이를 하면 안 돼요. 풀이하지 말고 그냥 ‘인자’라고 불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 인자가 에스겔이고 다니엘이고 다윗이죠.

에스겔, 다니엘, 다윗 이런 속성을 갖고 있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선지자(선지자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안에 누가 들어 있는가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가 들어 있어요. 메시아가 들어 있으니까 그 메시아는 먼저 인자, 에스겔, 다니엘, 다윗 같은 그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나아가서 그것을 성취해 나가면서 오실 분이 바로 진짜 메시아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에스겔 이해 못하고, 다니엘 이해 못하고, 다윗 이해 못한다면 결국은 예수님을 이해 못하지요. 아무도 에스겔, 다니엘 이해 못했습니다. 역시 예수님도 이해 못했죠. 결국 ‘사람의 아들’ 즉 ‘인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하게 통하는 분인데, 뭐가 통하느냐? 이게 중요하죠. 언약이 통한다. 이것을 언약적인 관계 또는 언약적인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자인 에스겔, 다니엘은 언약적인 몸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몸이 에스겔 3장에 보면 말씀을 먹으니까 나오는 결론이 뭐냐 하면, 예수님 안에는 뭐가 들어 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말씀이 들어 있어서 예수님이 성취하게 되면 우리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성취된다는 그런 구조가 여기에서 성사되는 겁니다.

이제 이해되지요? 에스겔이 말씀을 먹은 것은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지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었다고 하니까 ‘에스겔이 얼마나 맛있었겠는가?’ 이런 쓸데없는데 관심을 두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마저 우리의 죄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나중에 용서해 주시지요.

만약 어느 가정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여보, 이제 우리 교회에 갑시다.’ 라는 간단한 문장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내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하나님이 이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과 인자만이 아는 내용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까? 우리는 몰라요.

모르는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가 아는 하나님으로 접근하지요. 그 자체가 나중에 진짜 십자가를 알게 되면 ‘아하, 내가 처음 교회 나오면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알았던 것도 내 욕망의 산물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그 날이 옵니다. 감 먹고 난 뒤에 감나무 키우는 고생을 한다고, 우리가 구원 받고 난 뒤에 ‘아하, 주님께서 이런 죄까지 용서했구나.’ 하는 것을 차후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 지으려고 할 필요 없어요. 왜냐? 그냥 사는 것 그 자체가 죄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죄 지을 이유가 없어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나쁜 짓을 해서 죄가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죄 인줄 알고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 앞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미 용서될 수 있는 죄가 되는 겁니다.

감은 이제 따 먹었어요. 먹고 난 뒤에 감이 흘러가니까, 감이 지나가는 식도, 위장부터 소장, 대장 내려가면서 전부다 거치는 곳마다 죄가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환희와 즐거움 ‘야, 내가 뭘 해도 죄인이구나. 만세!’ 이런 존재의 가벼움.

그런데 방금 한 이야기를 강의 초반부터 연결해서 들으면 좋은데 방금 문 열고 누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방금 한 이 대목만 듣고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다. 그래도 우리는 용서 받았다.’ 라는 말만 들고 나갔다면, 그 사람은 뭘 생각하는가 하면, ‘내가 뭘 해도 용서가 되니까 이제 나쁜 짓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겠네.’ 이렇게 나와요.

감은 먹었는데, 감나무 심고 가꾸는 고생을 해야 된다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이제 감하고는 끝났어. 이제 감하고는 안 놀아. 이미 감은 먹었는데.’ 이런 식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과는 안 놀래. 나는 내 마음대로 놀래.’ 이렇게 되면 관심사가 어디로 갑니까? 자기가 주체가 되지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마지막 주심이 뭐라고 판정합니까? 세리는 성전 기능에 눈이 가 있는데, 바리새인은 성전에 와서도 성전에는 관심이 없고 성전에 와있는 자신에게 관심이 있죠. 즉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께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 믿는 나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의인 맞잖아.’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기가 차지요.

그런데 죄 지어도 괜찮다는 이 인간은 결국 어디를 봅니까? ‘죄 용서가 어디에서 나왔지?’ 여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야호, 이제 죄 지어도 괜찮다.’ 라면서 자기가 자기를 보는 거예요.

이제부터 3장 1절 이하에서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는 대목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테니까 주의를 기울이고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에스겔이 입을 벌리고 여호와가 그 두루마리를 먹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경책을 인간이 먹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이쪽 하늘의 구조가 땅의 구조 속에 침투하는 겁니다. 만약 어떤 가정이 예수 믿는다면, 그것은 내가 예수에 대한 지식을 머리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갖고 계신 구조(천국이죠)가 나의 모든 세계에 그대로 침투가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침투 되는가 하면, 하늘의 구조가 나에게 밀려오면 나는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이 구조가 밀려오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그동안 나만의 구조를 따로 챙겼구나.’ 하나의 새장처럼 내가 나만의 구조를 형성한 거예요.

이 구조의 형성이, 안의 보이지 않는 구조가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을 철학에서는 ‘언어(말)’ 또는 ‘언표’라고 합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말을 통해서 고속도로를 깔아놓아요. 저는 결혼 후 지금까지 나이트클럽 이란 곳을 한 번도 안 가봤습니다(결혼 전 형들에게 끌려서 한 번 가본 적은 있지만).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간접 경험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부칭할 때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광고에 보면 ‘이 보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라는 것이 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화를 하면서 과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가 보니까 묻는다는 거예요. 뭘 묻는가 하면 이름도 묻고 성별도 묻고 등등을 물어요. 그래서 이 광고는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반드시 대화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 아무에게나 대화를 걸지는 않습니다. 김 집사님이 고속터미널에 저를 마중 나왔는데, 그곳에 있는 승객들 아무에게나 말을 걸지는 않습니다. 기다렸던 저를 만나면 얘기를 합니다. 왜 저에게 얘기를 합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

이게 뭐냐 하면, 말을 한다는 것은 이근호 목사는 김 집사님의 구조 안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그냥 그 말을 허비하기 위해서 말을 거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과 없었던 길(고속도로)을 새로 닦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골조를 깔 때 그것이 언어로 뛰어나온단 말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뭐로 만들었습니까? 말씀으로 만든 거예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빛이 있어라.’ 하시니까 빛이 생겼어요.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님이 사람들을 흩어지게 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언어를 혼란시켜서 서로의 구조체제에 장애가 생기도록 했어요.

말이 안 통하니까 함께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니 흩어지지요. 이것을 유대인 철학자 벤야민은 말하기를 ‘바벨탑의 그 언어가 인간의 모든 문명의 기본이다.’라고 했어요. 라캉이란 사람은 언어 밑에 무엇이 있는데, 언어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무의식에서 나왔다. 무의식의 구조가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 언어다. 진짜 언어는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로 가려면 무의식으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갈 때 언어가 바깥에 나온 것도 언어고 언어의 토대가 무의식이기 때문에 바깥으로 나온 언어는 위선이죠. 즉 말발이고 실재로 음흉한 것은 말로 표현되기 전의 무의식입니다.

그래서 진짜 언어는 어눌함과 아이들의 옹알이, 그리고 다급할 때 나오는 비명 같은 것이 그 사람의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나 이사야가 하나님 만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욥이 하나님 만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입을 막았지요. 입을 막는다는 것은 자기의 철근구조에서 하나님과 이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께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는 있을 수 없고, 하나님 쪽에서 말씀을 해 주셨다는 그 자체가, 그 철근이 쭉 뻗어 나와 나에게 꽂힐 때 ‘저는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지요.

꽂힌 사람은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세리처럼 ‘주여, 이 성전이 나를 살렸습니다.’ 라고 하지요. 나는 의인이 될 수 없는 자인데 일방적으로 ‘너는 구원 받았어.’ 라고 하시는 그 선언. 그 말씀. 마지막 주심이 판정하는 “‘너는 의인이야.’ 라는 선언 때문에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라는 그 고백. 그게 바로 에스겔에서 이미 시작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0. 2. 25. 11:1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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