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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렘 15: 1- 4 (네 가지 벌)우리교회예레미야

렘 15: 1- 4 (네 가지 벌)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7)

본문 : 예레미야 15장 1- 4절
제목 : 네 가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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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02-24 19:34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1강-렘15장1-4(네가지벌)-jer100224.hwp

이근호

10-02-24 21:08

네 가지 벌

2010년 2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4

(렘 15:1,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렘 15:2, 개역)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렘 15:3,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렘 15:4, 개역)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싫어합니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성황당이나 마을 느티나무에다 빌듯이 얼른 빌고서는 곧장 자기 자리로 되돌아와 버립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더 사랑하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말씀에 의하면, 성도란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참된 양은 목자가 있는 곳을 자기 자리보다 더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22편에 보면,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란 한시도 목자의 자리에서 이탈되고 싶어하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자리’ 문제가 거론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리와 인간들의 자리를 구분하십니다. 사람들이 잠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실은 자기의 것을 확고히하기 위한 용도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자리와 그들의 자리를 구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에게 주어질 것은 저주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계신 곳을 사랑하거나 사모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고수한다면 그곳은 바로 사망이요 칼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요 기근이요 포로 잡힐 자리라는 겁니다. 곧 목자이신 하나님 계신 곳만이 축복이요 그 자리를 사모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면 저주만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 원칙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누가복음 22:31-34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이란 예수님 자리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기 때문에 베드로가 악마의 세력에 이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에게나 예수님에게 하는 것을 믿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시고 목자로서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제 자식 이삭을 바치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심 바’를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보다 자기의 것을 사랑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가지 벌이란 유다 백성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면서 받는 능욕을 두고 말합니다. 이러한 벌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 4절에 나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므낫세라는 왕이 무슨 잘못을 저질는가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21:3-6에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우리는 여기서 므낫세 왕이 나름대로 열심히 빌고 정성을 바치고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해서 성의를 다하고 있음을 압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까지 제물로 바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대 인간으로 본다면, 우리 자신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 신에 대해서 열심히 섬기는 것이나 대동소이하다고 간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열심히 섬긴 므낫세 왕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벌을 받고 모진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오늘 벤쿠버 동계 올림픽 여자 피겨 대회에서 캐나다 선수가 나와 경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의 어머니가 딸의 경기를 보고 싶어하며 경기장으로 오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 여자 선수는 경기 시작할 때도 울고 끝나고서는 울었습니다. 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경기를 봐야 할 어머니 자기 곁에 없다는 것이 슬퍼서 울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이 없다”는 때문에 울고, “누가 없다”는 때문에 웁니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 왜 제가 있어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즉 “어제 죽어도 상관없는 내가 왜 오늘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없다’고 한다면 현재 있는 것은 곧 나의 것인양 여기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남들에게 다 있는 어머니가 왜 나의 것이 나의 어머니는 내 곁에 없습니까?”고 따지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내가 꼭 있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없어도 되는 주님의 것으로서의 내가 왜 오늘도 여기 있는 겁니까?”라고 묻는 바가 됩니다. 므낫세 왕의 잘못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아니라 ‘나의 것을 없이하지 않고 있도록 내가 지킨다’는 의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 우선이고 이로 인하여 목자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리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저주를 받는 겁니다.

출애굽기 28:42-43에 보면,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왜 있어야 하느냐 하면, 바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도 이스라엘이 생존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무너지만 백성들은 저주받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거룩은 유지되어야 하고 백성들은 그 중보자의 거룩 기능을 인정해야 그들도 죽지 않고 복을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룩의 기능이 우리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 덕분에 죄인도 살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님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02-26 11:40

051강-렘15장 1-4(네 가지 벌)-jer100224/이 근호목사

2010-02-26 10:56:29 녹취 : 오용익

(기도)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시 107:2,3)

하나님, 우리가 고통 중에 있고 어두움과 질고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해주심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 시간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떠하며 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가치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그 기준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있는 그 복음이 바로 우리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 또는 우리 양심이 이야기하는 말들을 듣지 마시고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주시는 십자가의 보혈 앞에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 그것으로 우리의 기준으로 삼기 위해서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기준을 자주 자주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준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마치 인생을 잘살았느니 못살았느니 결정짓는 기준인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적인 유혹에 우리가 넘어가지 않게 해주시고 세상적인 모든 기준들을 다 철거시켜 주시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 말씀 앞에 항상 우리 자신을 내비추면서 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5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4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5: 1- 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쫒아 내치라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싫어하잖아요. 어디로 갈지를 모릅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자기 양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 모은다고, 제가 보기에는 성경에, 요한복음 10장에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몰고 다닌다.’ 그리고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성도는 목자인 어린양을 졸졸 따라다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 하나님께 나오느냐, 그것도 하나님께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잠시 이용하기 위해서 언제 나오느냐하면 자기 일이 답답할 때 꼬일 때 잘 안될 때 잠시 하나님께 나왔다가 다시 본디의 자기자리로 되돌아가 버려요. 이 정도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오는 것 자체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옛날 한국의 조상들은 성황당에 가서 빌고 마을 한복판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에 가서 빌고 뒷산에 있는 기괴한 모양의 바위 밑에서 빌지요. 그들은 느티나무를 섬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잠시 이용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는 거지요. 그 성황당 자리에 교회가 있고 예수님이 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에요. 어쨌든 인간에게 하나님은 타인이고 남입니다.

남이라 하는 것은 늘 상 같이 안사는 존재가 남이지요. 같이 있으면 부담되는 것이 남입니다. 같이 살고 싶지 않은 것이 남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설교 처음 시작할 때 했듯이 ‘여호와는 목자시니 자기 양을 모은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진짜 양은 목자를 그리워하고 목자음성을 듣고 싶어 하고 목자 곁을 떠나는 것을 굉장히 위험스럽게 생각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서 목자가 올까봐 겁을 내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것은 ‘하나님께 오기 싫거든 그냥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형식적으로 잠시 이용하고 잠시 미팅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것 말고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어쨌든 간에 하나님자체가 꼴 보기 싫고 하나님말씀은 그 자체가 듣기도 싫고 하나님자체가 짐 되거든 나한테 오지 말고 각기 갈 길로 나가라 하는 거예요.

유다 이스라엘자체가 전부 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 자처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예레미야가 그런 과격한 소리를 하니까 그들은 또 묻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로 나갈까요?” 2절에 보면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계신 곳이 제일 안전한데 그들은 하나님을 죽자고 싫어하고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척은 해야 되겠고 ‘하나님, 저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하고 얼른 제자리로 돌아갈 때 그 자기 자리는 어디냐 하면 바로 ‘사망의 자리이고 칼을 받을 자리이고 기근당할 자리고 포로 될 자리’ 저주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남녀가 서로 연애할 때 남자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 합시다. 만약에 여자 집에 대명 2동에 있다 합시다. 그 남자가 여자가 보고 싶어서 맨 날 여자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오늘 시간 있는가요? 만날 수 있나요?’ 하고 맨 날 묻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가 어느 날 대명 2동의 그 집을 팔고 봉덕동으로 이사 갔다 칩시다. 그러면 계속 그 남자가 대명 2동의 그 집 초인종을 누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보고 싶은 그 여자 따라 가지요.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겁니다. 하나님이 이동하는 곳에 하나님이 이동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과연 너희들이 갖고 있는 그 재산과 나라와 땅과 백성, 이런 것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하나님 때문에 내 을 좋아하고 하나님 때문에 교회를 좋아하는지, 교회가 좋아서 하나님보고 우리교회를 부흥시키라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좋아서 자기교회를 사랑하고 자기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지, 그것을 한번 보자.’는 거예요.

그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이 하는 조치에 대해서 짜증내면 그것은 수상합니다. 아주 수상해요. 짜증을 낸다는 말은 여전히 자기 것이 있다는 것이거든요. 사람이 자기 것이 있어버리면 자기것 외에는 전부 다 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뭐가 되느냐? 내 것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마저 타인이 되고 남이 되어 버려요.

내일을 도와 줄 때만 좋으신 하나님이 되고 내 일을 꼬이게 하면 꼴 보기 싫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뜻인데 하나님은 뭐냐? 현재까지 살아온 그것도, 현재의 모든 내 갖고 있던 그것도 하나님이 다 선물로 준 것이라는 겁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욥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자꾸 일깨우기 위해서 왔다는 말입니다.

친구의 지갑을 몰래 가져왔는데 나중에 친구가 그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힘이 약하고 나는 힘이 세요. 내가 힘이 세니까 그 친구는 나에게 함부로 하지를 못하고 쉬는 시간마다 와서 “그 지갑 내 것인데” 하고 “저리 안가!” 하면 그냥 가고 그 다음 영어시간 끝나면 또 와서 “그 지갑 내 것인데” 하면 “저리 안가!” 하면 또 그냥 가버리고 또 점심시간에 와서 “그 지갑 내 것인데” “저리 안가!” 우리는 평생 동안 그래요.

귀찮게 하면 “너하고 안 논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것을 유지해줄 경우에만 같이 놀면서 노닥거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것에 손대면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 안하기로 작심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이 이동하는 곳에만 축복이고 자기 것이 있든지 없든지 그 외곽에는, 하나님이 떠난 그 모든 자리에는 저주가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4절에 나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므낫세왕이 나오지요. 이 왕은 히스기야의 아들인데 히스기야는 소위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참 신앙 쉽지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 므낫세는 뭐냐?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신앙이라는 것이 아주 쉬워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자기를 제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나 예수나 교회나 목사나 자기 빼놓고는 전부 다 남이 되는 겁니다.

남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이용할 것만 있으면 잠시 이용하고 그 다음부터는 얼른 자기 쪽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뭐로 보느냐? 축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축복과 저주의 기준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축복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계신 곳 목자가 있는 곳만 축복이고 목자가 떠나버린 그곳은 아무리 자기 것이 많더라도 그 자체가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저주에서는 사망과 칼과 기근과 포로 됨, 이런 것들이 들끓는 거예요. ‘너의 동네는 그런 것들이 들끓는다.’고 하는 겁니다. 3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그렇게 네 가지로 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계신 곳만 벌이 없고 하나님 안 계신 곳만 벌이 있어요. 저주가 있는 거예요.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에요. 다 아시니까 안 찾아보겠습니다만 누가복음 22장에서 “내가 너희를 떠나서 죽어야 한다.” 고 할 때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제가 목숨 버리더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베드로 네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인데 마귀가 너를 나에게 떼어내어서 악마의 세계로 잡아당기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내 사람이라고 잡아당기고 고르고 골라서 자기 사람 만드는 그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악마를 네가 이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악마한테 끌려가는 베드로가 자기 힘으로 의지로 악마한테 끌리지 않고 주님께로 가는 그런 방법, 혹은 능력이 베드로에게는 없어요. 베드로가 능력이 없다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베드로야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해 줄 테니까 내가 기도한 덕분에 너는 악마의 꾐에 빠지지 않는다.”

이 말은 “네 기도나 순교나 순교의지 혹은 믿는 의지 믿겠다는 각오, 그런 것을 의지하면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믿음이냐? “너를 위하여 기도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인정하면 그게 바로 믿음”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예수님과 남이 되고 어느새 우리는 악마의 얼굴로 변해져 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얼굴이 변하는데 그 얼굴이 뭐냐? 어떤 힘을 요구하는 얼굴이에요. ‘나에게 힘만 준다면 누구든 섬기겠다.’는 그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악마의 얼굴이에요.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면 인간은 자기가 짐승보다 못한 얼굴이라는 것이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시편의 신앙인은 말하기를 ‘주여, 하나님께서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지 마옵소서.’ 합니다.

항상 하나님 얼굴만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하신 기도, 예수님이 하신 기도덕분에 우리가 마귀의 꾐에 빠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껏 ‘내가 기도 많이 했잖아요. 내가 충성 봉사 많이 했잖아요.’ 요새는 그런 것도 안하니까 그런 것을 안 하는 것을 자랑해요.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을 내가 주님 앞에 하는 것보다 더 효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들을 바치는 대단한 신앙보다도 주께서 친히 준비하셨다는 그것, 그것을 믿은 거예요. ‘주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신앙생활하고 교회 나간 그것보다도 우리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철없는 우리를 위해서 뭔가 준비했어요.

그것은 구원의 확정입니다. 영생이고 생명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이 주신 생명, 영생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버릇과 습관 때문입니다. 그 버릇과 습관이 뭐냐 하면 내 것이 일단 확보되어 있고 이 내 것을 키우고 내 것을 지키는데 심지어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하고 예수마저 이용하려 하고 성령마저 이용하고 교회 목사까지 이용해서 내 것 채우는데 내 것 다치지 않게 하는데 전력을 다했거든요.

“하나님, 내 자식 잃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 어쩌라고?” 그 자식마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지키시는 거예요. 자식이 멀리 있더라도 주께서 지키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와서 내가 기도하면 이 기도발이 먹혀서 멀리 있는 자식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기도를 곱빼기로 했는데 자식이 더 안 풀리면 기도 다섯 곱빼기로 하다가 그 때도 더 안 되면 하나님과 거래 끊을 사람입니다. ‘나 이대로 죽이려면 장사 안 한다.’고 장사 끊을 사람이에요. 이 므낫세라는 왕이 한 짓이 열왕기하 21장 2절부터 나와 있습니다.

“므낫세가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의 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찌라.”

거기에 선지자도 핍박하고 여러 가지 했어요. 이렇게 므낫세가 우상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섬겼는데 우리가 이런 행위를 한 므낫세를 한번 이해해 봅시다. 이것을 나쁘다고 하지 말고 왜 그렇게 했는가를 이해해보려고 합시다.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보냈다고 한다면 보통 정성이 아니잖아요. 자기는 나름대로의 열심과 정성을 다해서 빌고 싶은 대로 빌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므낫세의 행위에 대한 벌로 인하여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유다나라 전체가 다 멸망해서 포로 잡혀 가게 되어 있어요. 그냥 므낫세 이 사람이 무조건 나쁘다 하지 말고 그 왕이 우리 아버지고 혹은 삼촌이나 내 동생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여, 왜 우상을 섬겼습니까?” 라고 한다면 뭐라고 하겠어요? “얘야, 그게 나를 위해서 그랬겠느냐? 다 너희 잘되라고 한 거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기든 바알이름으로 섬기든 부처한테 가서 섬기든 다 내 가족 잘되라고 섬기고 나 잘되라고 섬기는 것은 전부 다 저주를 불러요. 누구 이름 부르든, 예수 섬기든 부처 섬기든 마찬가지입니다. 정성과 성의를 다해서 섬기는 거예요. 여기서 문제가 있어요. 자기자식까지 제물로 바치는 정성 같으면 보통 정성이 아니잖아요.

‘네 정성은 정성이고 내 정성은 정성이 아니고 내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네 믿음만 믿음이냐? 왜 내 믿음은 깔보느냐. 사람 멸시하지 마라.’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 성경을 덮어버리고 교회 와서 열심 내는 그것가지고 비교해 보면 ‘네가 기도하는 것만 기도고 최고냐?’ 하는 이런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성경을 덮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치면, 우리가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다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기식대로만 열심히 빌면 복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상식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네 신앙 네가 알아서 하고 남 신앙 탓하지 마라.’ 이렇게 나올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므낫세 이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지 부지런히 섬겼는데 그 결과는 저주였다 이 말이지요.

그 저주가 3절에 나오는데 다시 한 번 봅시다.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그들을 벌준다고 하는 거지요. 신앙생활 잘하고 벌 받고 정성을 지극히 드리고 벌 받고 열심히 기도하는데 저주받고 교회 열심히 나오는데 지옥가고 그 원인 분석 들어가야 됩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 아니에요. 제가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낮에 캐나나 여자선수가 피겨스케이팅을 하는데 하기 전에 박수 받을 때 울고 다 마치고 난 뒤에 또 울었어요. 왜 우느냐? 자기 엄마가 피겨스케이트 대회 하는 것 보러 왔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엄마한테 보여주려고 피겨를 배웠는데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그래서 왜 우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당연하지요. 엄마가 죽었으니 울지요. 엄마가 죽었는데 왜 우느냐. 왜 남들의 엄마, 김연아 엄마는 있는데 그 선수의 엄마는 없는 거예요?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없기 때문에 운다는 거예요. 질문이 ‘다른 엄마는 다 있는데 우리 엄마는 왜 없느냐?’입니다. 질문이 잘못되었어요? ‘내가 왜 있느냐?’ 이렇게 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한테 나올 때 ‘왜 남들은 있는데 나는 없습니까?’ 자꾸 없는 것을 가지고 기도해요. 기도를 바꿔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왜 여기 있습니까? 없어도 되는데 왜 있습니까? 어제 죽어도 되는데 왜 오늘까지 살아남아 있습니까? 내 자식은 죽어도 괜찮은데 왜 내 자식은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까? 내 남편은 왜 살아 있습니까? 대체 왜 있는 겁니까?’

만약에 ‘왜 나는 돈이 없고 엄마가 없고 뭔가가 없느냐.’고 한다면 현재 있는 것은 내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질문을 ‘하나님, 저는 왜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나는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있게 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하나님의 소유로서. 질문을 그렇게 해야 돼요. 그렇게 질문해야 이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나는 왜 없습니까? 더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성경 덮어놓고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기도에요. 교회 나와도 소용없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가 왜 있고 이스라엘은 왜 있습니까? 출애굽기 28장 42절-4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제사장들이 제사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법을 내려줬어요. 아론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갈 때는 옷을 짧게 입지 말고 발치까지 내려오도록 길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어서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 나갑니다. ‘제사장이 왜 있습니까?’ 이 말은 ‘왜 그들은 안 죽습니까?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겁니까?’

하나님의 주신 거룩이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는 그 거룩 때문에 죽어야 될 자도 안 죽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의 모든 죄를 커버한다는 것을 세계에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세계반방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만이 우리의 생명을 영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은 겁니다.

오늘 본문 15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기도를 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좀 봐주세요.’ 할 때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까지 능가하느냐 하면 모세와 사무엘의 기도까지 능가해 버립니다.

그것은 이미 유다백성이 모세와 사무엘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 편에 선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 위주로 자기들소유의 사람으로서 막 먹으려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를 볼 때에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목사가 제 밥벌이 하려고 우리 좋은 소리만 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 거룩한 말씀, 복음이 더 이상 그 사람에게는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사견이고……’ 이렇게 되어 버려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칭찬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전한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니 실로 그러하다. 그 말씀이 자체적으로 너희들 속에서 움직일 것이다.’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 속에만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다른 나라를 위한 모세가 아닙니다. 그 모세에게 법을 준 것은 ‘너희들이 사실은 죽는다. 저주 받는다. 너희들도 다른 인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네 것만 생각하고 네 가진 것만 생각하고 더 달라고 하는 것은 다른 나라와 똑같다. 그런데 모세가 지정한 제사장이 너희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들추어내어서 그 죄가 어떤 식으로 커버가 되고 어떤 식으로 용서가 되고 어떤 식으로 그 죄가 의가 되며 어떤 식으로 그 죄가 영생으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중간매체로서 중보자로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이렇게 물어야 돼요. ‘하나님, 저는 나밖에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이 네 가지 벌로 죽어야 마땅하고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제 안 죽고 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겁니까? 도대체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이유로 뭘 하기 위해서 뭘 시키시려고 어떤 일을 하라고, 왜? 왜 내가 살아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정답은 하나님이 원하는 지정된 거룩이 없으면 어떤 인간도 지옥가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을 네 삶을 통해서 주변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결론을 내립시다. 그렇다면 유다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겁니까? 시편 107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9절부터 21절까지 보면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18절에는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망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지를 가깝게 접촉케 해서 이 가운데서 구원할 자,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기도덕분에 우리가 지금도 예수님을 잊지 않고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로 이어지고 찬양으로 이어지고 고마움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21절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해결책을 내 놓았다는 것을, 나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거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곤경에 처하는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저희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신데요.’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내가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 떨어져요. 몇 해 전에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거든요. 사람이 내 것이라 하는 것이 뚝뚝 떨어져 나갑니다. 내 소원대로 안 되고 떨어져 나가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예 없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도 이 땅에 진작 없었어야 될 인간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을, 바로 이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고 이 소식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런 조치를 주께서 해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사는 기준이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기준이 있는 것을 우리가 깜빡 했습니다. 주께서 어항에 있는 금붕어 들여다보듯이 우리의 모든 것을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우리는 이 사실도 깜빡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힘든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우리가 노력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와 뜻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세상에 널리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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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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