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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누가복음 3장18-23절 제목 : 하나님의 아들설교누가복음

눅 3:18-23 (하나님의 아들)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7)

본문 : 누가복음 3장18-23절
제목 : 하나님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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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02-21 09:55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16강-눅3장18-23(하나님의아들)-luk100221.hwp

이근호

10-02-21 15:28

하나님의 아들

2010년 2월 2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18-22

(눅 3:19, 개정)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눅 3:20, 개정)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눅 3:21, 개정)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눅 3:22, 개정)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면서 세상은 졸지에 두 개의 세계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인간 세상은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몰랐습니다. 마치 맨홀 뚜껑 밑에 있는 깜깜한 세상에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리 많은 말들을 주고 받고 진리를 언급해도 하늘이 열리지 않는 이상, 똑같은 지혜들만 주고 받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토막난 물고기처럼 앞머리 부분과 뒤에 있는 꼬리부분을 잘라내고 중간 부분, 눈에 보이는 부분을 가지고 인생의 전부라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세상을 중심체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인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중심체로 삼습니다.

하나는 공간적으로 중심체 작업에 나섭니다. 누구나 태어난 고향과 인상 깊은 지역으로 귀소하려는 본능을 갖게 됩니다. 아무리 외국에 나가서 독자적으로 살아간다 해도 고향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는 이유가 바로 자연적으로 공간적인 중심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인간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사수하고 확장하는 식으로 과거의 사건을 배정을 하게 됩니다.

즉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현재 자신이 있게 한 의미있는 시간이라고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건에 준해서 미래에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미래에 가서 예상한대로 안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자신의 시간적 노선을 조정하게 됩니다. 어쨌든 이래나저래나 자기 위주로 세상을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즉 맨홀 뚜껑이 열려버린 겁니다. 그냥 열린 것만 아니라 그 맨홀 뚜껑을 통해서 다음과 말씀도 같이 내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계는, 오로지 그 맨홀 뚜껑을 통해서만 내려옵니다. 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 세상은 악한 세상으로 분류됩니다. 헤롯이라는 왕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언하는 세례요한을 투옥시키고 말았습니다. 아마 하늘이 열리지 않았다면 세상의 모든 이들은 세상 권력의 무서움이 전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그냥 방치하는 것을 봐서 진정한 권력은 세상 권력이 전부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은 요한대로 잡히게 하시면서 따로 하늘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는 닫혀있는 세계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갈라디아서 3:22에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두움 세계에서 자기대로 정해놓은 기준이나 규칙이나 서열이나 계급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하늘에서 보기에 인간들 자기네들 끼리 손꼽놀이하고 있는 겁니다. 성공이니 출세니 행운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도 모조리 다 거짓된 것들입니다.

실은 그런 것들은 모두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긴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아담의 팔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좌절을 느낍니다. 러시아의 어느 시인이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인생이 너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모두 아담의 긴 그림자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개성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개인적인 그 어떤 특징과 재주도 실은 모두 아담의 속성에 불과하고 그 아담의 속성은 죄 안에 갇혀있는 바입니다.

아담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처지라면 우리 역시 우리 힘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는 이 세상 속, 즉 어두운 맨홀 뚜껑 밑으로 들어오므로서 이 세상은 졸지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의 행적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치 영화제에서나 볼 수 있는 붉은 카페트가 지상에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 카페트 만이 생명의 나라, 천국으로 통하게 됩니다.

이 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노선을 버려라는 겁니다. 사람이 자신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모르면 결코 우리 곁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이 느껴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자신이 더욱 더 더 생생하게 산 존재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 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참된 하나님을 찾으려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즉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2:5-9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오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들이 기피하고 거부하고 사람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손에 죄인으로 몰려서 취급받아 십자가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 죽은 십자가 현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맨홀 뚜껑을 통해 하늘로 올려주셔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코스만이 생명으로 통하는 코스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예수님이 오르셨던 그 십자가 자리로 몰아넣게 되십니다. 물론 자기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사항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마치 멧돼지를 무섭게 하는 호랑이의 울음 소리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그런 울음소리에 불과하겠지만 멧돼지에게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오금 졸이는 소리가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부터 변화하기에 변화하면서 하나님을 붙잡는 것은 모두 엉터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쪽에서 우선 자기 백성을 꼼짝없이 묶어두는 작업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33:20-23에 보면,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복사판 십계명을 만들게 하시는데 그 복사판 십계명이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죄인인 것을 분명히 해두고서 일을 시작하시는 겁니다. 즉 벌써 언약이 깨어진 상황에서 언약을 깬 장본인과의 관계에 하나님이 나서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위를 쳐다봐야 비로소 주님이 주님으로서 보입니다. 즉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죄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보이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예수님이 하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그 자리에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10-02-24 13:57

016강-눅 3장 18-23(하나님의 아들)-luk100221

2010-02-24 11:34:00 녹취 : 오용익

016강-누가복음 3장 18-23(하나님의 아들)-이 근호 목사

(기도)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시편 107:1-3)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주시고 결국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거할 그 하늘의 성에 도착되도록 지금도 이끄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오늘 이 모임이 주께서 또 다시 이끄심의 하나의 경로가 되게 해주시고 이러한 은혜가운데서 얼마나 주님의 자비가 넘치며 사랑이 넘치는가를 저희들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3장 18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2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3:18-22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두 개의 층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의 층은 ‘하늘이 열린다.’고 하는데 그 하늘위에 하늘 층, 예수님께서 나타나기 전에 계셨던 그 세계, 그것이 하늘 층이고 그 하늘 층 밑에 사람 층,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인간 층이 있습니다. 세상이라 하지요. 그 세상 층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서 전하는 그 세례요한이 상당히 수모를 당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지적했을 때에 그 당시 세상을 지배했던 분봉왕인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게 되는데 옥에 가두어서 살해하기 직전에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다는데 만약 하늘 문이 열린 적이 없다고 한다면 세례요한은 쓸데없는 짓 한 거예요. 악한 세상에서 자기가 바른 소리 한다고 해서 세상이 개혁되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쓸데없는 짓 했어요. 죽기밖에 더 했습니다. 죽고 난 되에는 시체가 무슨 직언을 하겠으며 회개를 촉구하겠습니까? 죽은 저만 손해지요. 만약 하늘이 안 열렸다면, 하늘이 안 열렸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늘이 안 열렸다면 모 태범 선수나 이 상화 선수가 아마 기분 좋았을 거예요. 하늘이 안 열렸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렸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늘이 열렸다면 이 세상은 일괄적으로 지옥 속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태어나기를 맨홀 뚜껑 밑의 지하세계에서 태어나서 평생 동안 어두운 동굴 같은 지하세계만 보고 살아온 청년이 있다면 한 20년 살면서 자기가 살면서 봐온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을 거예요. 지하세계에서도 권투시합이 있을 것이고 지하세계에서도 레슬링이 있을 것이고 지하세계에서도 돈 버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지하세계에서도 출세라는 개념이 있을 것이고 지하세계에서도 성공이라는, 그 성공의 서열이 있을 겁니다.

지하세계에서도 누가 더 성공했으며 누가 더 실패자며 누가 승진했으며 승진에서 누가 낙오 되었는가, 그런 지하세계 나름대로의 계급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을 겁니다. 그 청년은 물론 자기 세계가 지하세계인줄 모르지요. 그런데 그 청년이 그 지하세계를 걸어가다가 보니까 뭐가 훤하더라는 말이지요. 뭔가 하고 보니까 세상에! 맨홀 뚜껑이 열렸어요.

맨홀 뚜껑이라 하는 것은 지상에 있는 사람이 봤을 때는 맨홀 뚜껑이지만 맨홀 뚜껑이 덮힌 채로 있다면 지하세계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거기에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겁니다. 절에 가는 사람들이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설마 하늘이 구멍이 뚫릴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의 기상청에서 ‘내일 오후 2시쯤 하늘에 구멍이 뚫립니다.’ 하는 기상예보를 한 적이 없을 거예요.

전에 설교 했지만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나오지요. 목자가 양을 지키는데 갑자기 천사가 왕림했고 주변이 훤했습니다. 무대 위의 가수가 스폿 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훤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낯선 하늘의 천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대구시립남성합창단의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듣도 보도 못한 찬송소리가 나왔는데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은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내용의 가사의 찬송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깜깜한 밤인데도 불구하고 목자가 있는 그 주변은 사람들이 오금에 저리고 놀라 자빠질 정도로 하늘에서 광채가 비췄습니다. ‘사방이 훤했다.’고 했습니다. 웬일인지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이것은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빛 속에서 음성이 들리면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땅에 자빠뜨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러니까 맨홀 뚜껑이 열린 거예요. 하늘이 열림으로서 알게 된 것은 뭐냐? 모든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 좌절과 승리, 금메달 은메달, 승진과 낙오 이 모든 인간세계 내부에서 매겨진 모든 순서와 계급은 전부 다 무효가 되고 맨홀 아래의 어두운 세상이라는 면에서 일괄적으로 똑같이 취급당하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서는 그것을 일괄적으로 이렇게 했지요. ‘아담 안에 있다 …… 죄안에 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3장 22절에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 ‘죄 아래 가두어졌다.’ 사람이 자기가 죄지은 것도 모르는 채 태어나면서부터 수형자의 자식으로서 부모와 더불어서 하나님이 만들어 준 교도소에 갇혀서 살면서 성공을 논하고 출세를 논한 겁니다.

부와 가난을 논한 겁니다. 사실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입장이면서.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사람취급 못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 하다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푸시킨이라는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지요. “인생이 너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청소년들의 책갈피에 많이 쓰여 있고 우리도 학교 다닐 때 자주 썼습니다. 인생이 뭔지도 모르면서 좋은 것인 줄 알고 써놓았습니다. “인생이 너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얼굴들을 보면 지금 노하고 있고 슬퍼하고 있는 중에 있어요. ‘신께서 나의 인생을 왜 이리 조져놓았나.’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것을 성경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자기 그림자에 놀라지 말라.’ 왜냐하면 자기그림자는 없어요. 아담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선배, 최초인간의 그림자를 우리가 한 조각 갖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 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조상 아담이 망한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망했고 우리 할아버지가 망한 조상 대대로 망한 그 긴 그림자 안에 우리가 놓여 있다 보니까 내가 원하는 인생도 아닌데 우리를 슬퍼하거나 노하게 만드는 그런 그림자 속에 있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것은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생긴 그림자다.’라고 하니까 내가 내 인생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왜 하필이면 나에게!” 하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것은 네 그림자 아니야.” 노사연이 불렀던 ‘임 그림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달그림자’도 있고. 달이 있기에 생긴 그림자지요.

우리가 있기 전에 먼저 아담이 있었고 아담이 있고 그 아담 앞에 하나님이 계셨기에 아담과 하나님의 만남에서 발생된 그 긴 그림자, 아담이라는 임 그림자, 달그림자 때문에 생긴 그림자의 한 부분을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보니까 자꾸 자기 인생에서 놀라는 거예요. 출세를 못해서 놀라고 집에 돈 떨어져서 놀라고 사법시험 네 번 떨어져서 놀라고 자식이 말을 안 들어서 놀라고, 시부모간의 갈등, 이유 없이 병든다, 시름시름 아프다, 이런 것들 때문에 놀라고.

맨 홀 뚜껑 안에서, 이 어둠의 세계 안에서 자기밖에 모르니까, 뭔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원인을 모르니까. 그걸 가지고 톰배기라고 합니다. 서울서 톰배기라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톰배기, 머리 부분 잘라내고 꼬리부분 잘라내고 중간만 쥐고 이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 이것이 상어고기 톰배기 아닙니까? 제사상차림에 나오지요.

앞에 것 끊고 뒤에 것도 끊고 보이는 중간만 쥐고 있는 거요. 내 인생이 어디에서 흘러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고 인생을 중간토막내서 그걸 가지고 인생을 잘 살았느니 못 살았느니, 하나님이 천국 보내느니 지옥 보내느니 그렇게 일방적으로 단절을 내고 또는 우쭐거리는 겁니다. 얼마전에 MBC에서 방송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멧돼지가 하도 농민들을 괴롭히니까 멧돼지를 처리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 중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호랑이 울음소리를 녹음해 와서 틀어줬어요. 그 다음부터는 그 무서운 멧돼지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방송사에서 전문가에 의뢰해서 과학적으로 조사를 해봤습니다.

멧돼지를 농장우리에다 넣어놓고 하마 울음소리, 또 다른 짐승소리, 온갖 짐승 소리들, 우리가 듣기에 호랑이 울음소리와 똑같은 울음소리를 틀어줘도 멧돼지는 먹을 것만 맛있게 먹으면서 아무 반응도 없더랍니다. 그런데 우리 보기에 똑같이 들리는 호랑이 울음소리, ‘어흥’ 하고 틀어주니까 멧돼지가 벌벌 떨면서 도망갈 길 찾고 오금을 저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까 인간의 귀로는 포착이 안 되는 20헤르츠 밑의 음이 멧돼지의 뼈 속과 힘줄에 작용하게 되면 뼈 속으로 흘러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멧돼지의 두뇌의 온 신경조직이 벌벌 떠는 거예요. 그래서 무서워서 먹이도 못 먹고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20헤르츠 밑의 음을 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보기에는 호랑이 소리나 하마소리나 그 소리가 그 소리인데 멧돼지에게만 그 소리가 무서운 공포의 소리로 들리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귀가 있어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입니다. 보기는 봐도 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경말씀을 줘도 그 말씀이 스스로 살아서 우리의 오금을 저리게 해야 되는데.

이것은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고 들리는 자에게만 오금을 저리게 하는, ‘정말 이 세계는 뚜껑열린 그 죄 아래 갇힌 세계구나.’하는 겁니다. 자비가 없는 세계에요. 자비가 없는 세계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늘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하늘의 뚜껑을 열므로 말미암아 한 개만 있던 세계가 이제는 두 개로 변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 땅에서 출세나 행복과 불행,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좌절했다, 죽어서 어디 가느냐 하는 문제는 이제는 이 맨홀 뚜껑 밑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어디서 나오는가? 그 하늘 문이 열리면서 거기서 내려오는 그 소리가 바로 ‘어흥’하는 호랑이 소리고 그 소리에 준해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데 그 소리가 뭐냐? ‘처음이요 나중이다.’라고 했습니다.

톰배기가 아니고 우리가 어디서부터 시작했으며 마지막 어디서 끝나는가를 전체로 다 보여주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품고 어떤 분이 이 땅에 오시게 된 겁니다. 그 분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뚜껑이 열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일괄적으로 빛은, 진리는 이 땅에는 없고 빛과 진리와 생명은 이 땅 위에 있는 층에서만 있는데 그 층에서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이 땅이 왜 자비가 없이는 긍휼이 없이는 불쌍히 여김이 없이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지옥 같은 세상인가가 드디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서.

여기서 22절에 보면 오신 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여기에 하나 더 추가 되어 있어요. ‘너희는 그 아들의 말을 들으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호랑이 소리를 들어라 이 말이지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소리인지를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옛날 구약시대로 돌아가 봐야 돼요. 왜냐하면 여기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이 말은 예수님 빼놓고는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고 그냥 흙이다,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분은 예수님뿐이며 예수님 외에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 맨홀뚜껑을 통해서 호랑이소리로 이 땅에 내려온 거예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 가운데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통로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 아들이라는 통로, 그 통로 외에 다른 통로로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통로가 뭐가 발려있는 통로냐 하면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하는 하나님이 유일하게 기뻐하고 하나님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그 통로로 도로 빠지지 않는 한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사람도 되지 못하고 기뻐하는 존재도 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아들이 이 땅에 발자국을 남기게 되는 겁니다. 그 발자국이 바로 좁은 길이고 그 길이 바로 십자가로 가는 길인데 그 발자국을 좍 남겨두면 이것은 마치 영화배우들이 영화제할 때 붉은 카펫 깔고 그 위를 가는 것처럼, 다른 길로 가면 기자들한테서 사진 안 찍히는 것처럼, 그 카펫을 좍 깔아놓은 것 같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내려올 때부터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카펫이 내려와서 그분이 십자가시지고 부활하실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 노선에 접어들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예수님의 나라에 참여될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그 문제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좋겠네.’ 이렇게 단순히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이 세상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름을 가지고 왔던 그 자국, 그 자국이 바로 영생으로 통하는 자국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 왜? 너는 지하세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점을 계속 되새겨 줬어요. ‘누구든지 구원되고자 하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다음 말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자기를 미워하라.’는 거지요. 저는 지금까지 설교하고 목회하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겁니다. ‘내가 죽지 아니하면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주님은 덜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 있으나마나 한 존재고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안중요한 이야기가 되어버려요. 그러나 내가 죽는 순간 진짜 살아계신 분이 진짜 살아계신 분으로 나한테 나타나고 내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실은 산 것이 아니고 사실은 죽은 자에 불과하고, 죽은 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다 해도 당연한 것이고, 내 인생이 나를 슬퍼하게 하거나 노하게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내가 나에게 실망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동안 보이지 않던 호랑이 소리가 들리고.

‘아, 주여! 주는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군요. 나를 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군요.’ 나라는 것은 그냥 아담의 긴 그림자에요. 우리 조상의 긴 그림자에 섞여 있을 뿐이고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동안 전도한다고 깝죽대고 헌금이 어떻게 예배가 어떻고,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것이 모두 다 부질없는 짓이고 소용없는 짓이에요.

어떤 사람은 복음 안다고 교회 안 나온다는 사람도 있어요. 이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죄를 내가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죄를 나한테 적용시켜도 우리는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죄를 나에게 적용시킬 때 비로소 나는 죄를 아는 산자가 아니라 죄를 아는 죽은 자가 되어 있다는 거지요.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람이 마치 운전학원에서 운전기술을 배우듯이 교회 와서 천당 가는 기술을 배우는 거예요. 천당 가는 기술을 배우면 안 되는 이유가 천당 가는 기술을 배워버리면 천당 가는 기술을 알고 있는 나는 산자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주님은 덜 산자가 되고 살아 있으나 마나 그만이고 나보다 덜 중요하고 나보다 더 시답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왜? 내가 살아 있는 그것이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나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에 주님이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영 덜 기쁜 것이 되고 별로 마음에 당기지 않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심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교회 와서 하나님, 하나님 이야기 하는데 그 하나님은 자기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상이고요, 실제로 이 땅에 왔던 하나님 이야기를 해야 그것이 옳습니다. 실제로 이 에 오셔서 인간들과 같이 섞여서 살았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봐야 돼요. 그분은 이 에 오셔서 하나님인 것을 포기했습니다. 사람? 사람보다 더 낮아지셨어요.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길, 사람들이 되기 싫어하는 팔자, 사람들조차도 몸서리치는 팔자, 그 길로 갔습니다. 제자들도 가기 싫어하는 길, “주여, 그러시면 안 되지요.”라고 베드로가 말렸습니다. 주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너는 내 길을, 너의 구원의 길을 막는 자다.” 사탄은 자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길로 가지 마.’

지금도 매일같이 속삭이는 것이 뭐냐 하면 ‘대충 믿어라. 대충 믿으면서 하나님을 이용해야지 네가 하나님한테 이용당하면 안 돼. 그러면 너는 쪼다야.’ 사탄은 주님의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그것도 베드로의 목소리로 막았습니다. ‘주여,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탄의 본체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가는 길이, 사람의 종이 되셔서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것이 요새 말로 쉽게 해서 뭐냐? 저 전라남도 남쪽 끝에 로켓 쏘아 올리는 데 있어요. 나로도지요. 주님께서는 서울출신인데 전라도 나로도까지 가요. 거기에 왜 가시는가? 거기에 로켓 발사대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가시니까 그 죽었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는 것은 결국 ‘네가 강원도 사람이야? 충청도 사람이야? 전라도 사람이야?’라는 그것을 묻거나 따지지도 않고 어디에 집결하라는 말입니까? 십자가에 갔을 때 비로소 거기에서 맨홀 뚜껑이 보이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십자가가 뭐로 보이느냐 하면, 저 대구에서 혹은 광주에서 혹은 서울에서 나로 호를 보게 되면 뭐로 보이느냐 하면 우리가 거기에 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주여, 건강 주옵소서. 축복 주옵소서.’ 하는 거예요. 멀찍이 서서.

‘교회 부흥케 하옵소서. 땅을 사는데 땅값이 오르게 하옵소서.’ 땅이 다 개발되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융자내서 산 땅만 안 오르고 주변 땅값이 다 올라버린 거예요.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소리 안 나오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하는데 멀찍이 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수직으로 보게 하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밟았던 그 십자가의 자리에 참여시키는데 그렇게 참여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것이 산자가 아니라 그냥 죽은 자로 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죽은 자로 살아온 거예요. 죽은 자로 연애하고 죽은 자로 메일 보내고, 죽은 자로 수학 영어 과외 받으러 갔고, 죽은 자로 스케이트 타고, 죽은 자로 금메달 따서 깨물어 보고, 죽은 자로 국회의원 나와 보고, 대통령 되려고 애썼고, 죽은 자로 음주운전해서 벌금 2백만 원 물고 모든 것이 죽은 자로 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살았다고 볼 때는 그것을 최선의 노력으로 봤지만 주님 가신 그 십자가 밑에 가니까 ‘아, 그동안 했던 모든 짓들이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 죄가 나를 통해서 짓게 한 죄였구나. 내가 남들에게 지은 죄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죄인이구나. 사람 앞에서 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구나.’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서로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안 거예요. 그 자리를 주께서 마련해 줬는데 그 자리가 바로 나로도, 그게 바로 십자가죠. 주님께서 그 지점을 지적해 주기 위해서 간 거예요.

두 개의 중심체가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예수님 중심체가 내려오고 땅에서는 자기가 중심체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하니까 잘 들어보세요. 사람이 자기가 중심체가 되면 두 가지의 현상이 있습니다. 시간적인 중심체와 공간적인 중심체, 둘로 나눠요. 공간적인 중심체란 뭐냐? 아무리 그 사람이 미국가고 해외 이민가고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에 가도 항상 자기 본향을 못 잊는 것, 공간적인 자기의 선산이 있고 자기의 태어난 고향이 있는 곳, 그곳으로 자꾸 돌아가고 싶고 귀속하고 싶은 것, 나름대로 마음중심의 공간이 있는 것, 그것이 공간적인 중심체에요.

그래서 비록 서울 살고 인천 살아도 거기서 대구사람 만나면 반갑고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캐나다 살고 미국 살아도 올림픽에서 한국인이 메달 따면 같이 기쁘고, 이게 바로 공간적인 중심체가 있는 거예요. 두 번째는 시간적인 중심체가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고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그 여러 가지 시간적인 고리를 지금 내 중심으로 다시 배열을 하고, 내 현재 입장에서 지나온 사건을 다시 배정을 하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20년 만에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내 취직자리를 알아줄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라고 잊어버렸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남으로 말미암아 현재 내가 취직되었음, 이라는 현재의 내 중심 입장에서 다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배정되는 거예요.

그 뒤에 ‘내년쯤 그 친구와 사업이나 해볼까?’ 하면서 자기의 미래와 자기의 예견, 자기가 고대하는 것은 현재 깔린 그 노선대로 미래를 한 번 계획해 보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시간적 중심체가 현재 내가 이용하고 싶은 대로 새롭게 짜여가는 거예요. 그런데 2개월 후에 보증서라고 해서 그 친구가 사기를 칠 줄이야. 다시 한 번 중심체가 또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란 공간적인 중심이 있어요. 그것으로 인해서 경상도 사람하고 전라도 사람하고 길에서 만나면 서로 싸우는 거예요. 감정도 없는데 서로 싸운다는 말이지요. ‘너는 전라깽깽이 나는 경상도 문둥이’라고 하면서 서로 싸웁니다. 싸우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둘 다 동방신기 팬이에요. 그때부터는 이전 것은 다 깨지고 같이 동방신기 좋다 하고 또 박지성이 좋아하면 같이 와, 하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습성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항상 이 세상의 모든 변화와 사건들을 내 중심으로 눌러준다는 겁니다. 눌러준다는 말이 말 자체는 쉬운데 그게 어렵지요? 눌러주게 되면 거기가 딱딱해지지요. 딱딱해지는 그것을 가지고 주체라고 합니다. ‘나’ 자아라는 거예요. 모든 변화, 공간적인 변화와 시간적인 변화 이 모든 변화를 단추 누르듯이 딱딱 눌러주면 그 때 그 때마다 그것이 내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주체는 날마다 달라지는 주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습관은 뭐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일반평신도를 상대해서 말씀드리기가 미안스럽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그런데 제가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하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오늘 예배생중계가 첫 번째로 시도되는 기념적인 날인데.

내가 지금 변화되고 있는데 변화되고 있는 인간이 변화되고 있는 하나님을 잡는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화살이 날아갈 때 그 색깔을 몰라요. 모르는데 그 날아가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버리면 화살의 색깔이 보이지요. 뭐든지 사람들이 어떤 변화를 읽을 때는 내 손에 일단 잡아놓고 앞뒤를 살피는 거예요. 그러면 앞과 뒤가 내 손에 쥔 채로 이해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손에 쥐고 있는 그 나는 맨 날 자기밖에 모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세상을 볼 때는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진리란 자기를 위한 진리에요. 하나님? 자기를 위한 하나님입니다. 예수? 자기 좋아라, 하는 예수에요. 전부 다 손에 쥐고 보는 거예요. 성령? 손에 쥐고 보는 거예요. 제가 강의를 하는데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말씀이 다 맞는데 인간이 구원받고 난 뒤에는 뭔가 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을 끊었어요.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덮치는 겁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손에 쥐어버린 거예요. 쥐고 자기 자신은 날마다 변하면서. 구원은 손에 쥐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장충 체육관이라면 우리는 바퀴벌레에 불과합니다. 구원이 덮쳤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가지고 구원을 자기가 쥐었다고 생각하니까 ‘자, 이제 구원은 손에 쥐었고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볼까?’ 하고 또 하나님마저 성경마저 자기중심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쥐면 되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쥐고 꼼짝 마라,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나옵니다. 모세를 하나님께서 만날 때 모세를 꼼짝 못하게 바위틈에 꽉 막아놨어요. 꽉 막아놓고 이제부터 지나가는 것은 누가 지나가느냐? 하나님이 지나가버립니다.

하나님이 지나가버리면 이제는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있지요. ‘너는 꼼짝 마라.’ 하고 나는 하나님 손에 잡힌바 된 좁은 것이 되지요. 좁은 것이 되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고 그것이 깨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바로 현재 우리가 보는 모든 말씀, 성경은 원판이 아니라 기껏해야 우리주체를 가지고 이용할 수밖에 없는 복사판이 되는 겁니다.

그 깨어진 돌 판을 대신하는 복제판 돌 판이 언약상자에 담기는데 그것이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이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어렵지요? 언약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네가 그 성경을 건드려 봐라. 건드려 보면 그것이 너에게 지뢰밭이 될 것이다.’

건드리는 동시에 터져서 ‘주여,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군요.’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그 말씀이에요. 해석했다 하면 지뢰가 터지고 손댔다 하면 손마디마디가 시커멓게 타버리고. “그렇다면 주여, 우리의 모든 행색은 오해고 곡해고 정신착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을 다 이루었지.”

서울에서 강의하는 중에 사람들이 어려워서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제가 쉽게 이야기했어요. 송구영신예배를 하면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의 집구석은 리모델링해서 좋게 만들고 차도 새로 바꾸고 목사는 애가 어떻게 사는지 보일러는 때고 사는지 그런 것도 안보고 그래가지고 복 는다? 웃기지 마세요. 목사를 그렇게 천대해서 무슨 복을? 복 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송구영신예배 때 목사가 이렇게 해요. 왜냐하면 다음 달 월급이 걱정되기 때문에 합니다. 제가 강의 할 때 거기에 모인 분들이 몇 되지 않지만 “그럴 때 여러분들이 성경말씀을 아신다면 디모데전서 6장을 해서 ‘목사님,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가지고 갈 것도 없고 그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야지요. 목사님, 혹시 굶으십니까?’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잖아. 그럴 때만!”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고 자기가 그 말씀을 딱 붙잡고 있으니까, 지식으로 말씀이 남아 있으니까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믿는 것도 아니지만 혹시라도 진짜 목사를 건드렸다가 벌 받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붙잡힌바 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하니까 맨홀 뚜껑 밑에서 하는 행세를 그대로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눌러주는 것, 내 습관, 십자가 지기 싫어하는 내 습관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습관은 뭐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가 점점 더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다가 뭘 깔아놓느냐 하면 모든 성경말씀을 다 깔아놔요.

그래서 모든 사도바울의 명령, 권면, 훈계 신 ‧ 구약의 모든 말씀은 ‘손대라. 손대고 그 다음에 그 20헤르츠 밑의 호랑이 울음소리 같은 십자가로, 현재 너의 주체자리, 네가 눌러준 그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눌러준 자리, 나로도에 가야 비로소 주님이 보이고 그 피가 구원한다는 것이 보이는 그 지점까지 끌어당기기 위해서 모든 말씀을 다 깔아 놓았다.’ 하는 거예요.

모든 말씀, 산상설교? 어떤 말씀도 그러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목사님, 저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지 말고 말씀을 건드려서 말씀 안에 있는 십자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은 어떤 말씀을 건드릴까요? 예를 들면 어떤 말씀을 건드릴까요?” “간단합니다.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다.’ 그것을 건드리세요.” “미쳤나?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이 돈 때문에 살아가는데 돈을 왜 건드려?” “드디어 지뢰를 건드렸습니다. 지뢰, 드디어 폭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산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로 만들면서 우리의 그림자는 내 죄 때문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돈을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나야만 했던 아담의 일괄적인 집합에 포함된 그 나물의 그 밥 인거예요. 창세기 3장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서 영생을 얻지 못하게 했습니다.

창세기 3장부터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다음부터는 왜 우리가 영생에 못 들어가는가, 그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말씀을 주신 거예요. 성경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보면 제일 쉽습니다. ‘아, 이래서 나는 천당 못 가는구나.’ “목사님, 그래서 진짜 천당 못가면 어떻게 합니까?” 하지만 ‘아, 이래서 천당 못 가는구나.’라는 것을 아는 그 지점, 바로 예수님이 거쳐 간 십자가의 지점에서만 비로소 그 고백이 나와요.

‘이래서 내 행함으로는, 이래서 내가 교회 나와서는 천당 못 가는구나. 내가 예수 믿어서는 천국 못 가는구나. 주의 은혜로 구원받는구나.’ 비로소 주님이 왜 귀한 분인 줄을, 왜 주님께서 피를 흘린 줄 아는 거예요. 내가 피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피가 나를 적시는 겁니다. 마치 말씀이 덮치듯이 피가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우리는 나의 안에서 피와 나의 죄가 같이 요동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아주 특이한 사람, 속죄양, 어린양의 표식을 갖고 있는 아주 특이한 교회가 되는 겁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무슨 의미냐? ‘다른 사람은 내가 생각도 안한다.’ 그것은 다 아담의 긴 그림자에 불과한 거예요. 오늘 설교 다른 것 기억할 것 없습니다. 자기인생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이게 내 인생이 아니거든요. 우리도 어쩔 수가 없는 인생이에요.

세상의 어느 자식이 가난한집에서 태어나기를 원합니까? 태어나자마자 키 180이고 태어나자마자 재벌 아들이고 태어나자마자 유학 갔다 오고, 그런 팔자가 좍 깔려 있는, 막장드라마 같은데 나오는 팔자 같은, 인물 잘생기고 키 크고 똑똑하고 유학 갔다 오고 여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난리법석 떠는 그러한 자기를 생각 안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그런 팔자이고 싶죠. 슬퍼하고 노한다는 것은 ‘저런 인간은 저런데 나는 왜 이렇게 루져냐. 왜 이렇게 나는 키가 작으냐.’ 한국드라마가 세계를 다 버려놓았어요. 한국인, 한국의 것이 들어가면 교회도 버리고 다 버려놓아요. 언젠가 중국선교사를 만났는데 그 이야기를 해요. 복음을 전해놓으면 한국교회에서 와서 돈을 줘서 그 다음부터 그 사람들이 돈을 믿지 복음을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우리의 본 자리는 이미 주님께서 다 지정해 줬습니다. 십자가에서 멀리 있던 우리를 항상 말씀으로 당겨서 우리에게 ‘못 지키지? 그게 바로 십자가 자리야.’ 하는 겁니다.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잡아당겨서 십자가의 자리, 그 십자가에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자비를 구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힘을 원했는데,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는데 힘이 아니라 자비를 주시는, 용서를 주시고 긍휼을 주시는 하나님, ‘내 인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으니 우리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쁘고 즐거운 것은 바로 내가 그동안 남들 앞에 죄라 여겼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그 기쁨과 희열과 그 감격,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고, 이제는 부자 앞에서도 꿇릴 필요가 없지요. 왜냐하면 저나 나나 다 똑같은 달그림자고 임 그림자고 아담이 그림자이니까.

다만 감사한 것은 ‘너는 여전히 십자가 바깥에서 살고 있지만 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조명발 받아서 위를 보면서 어흥, 하는 호랑이소리를 듣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이유를 안다.’는 것,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고 내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비로소 죄인입장에서 바라볼 때 그것이 예수님의 길에 들어선 산자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들이 행동한다 해봤자 우리 바깥에는 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행위 하시는 것과 마주칩니다. 내가 행한 것 그것보다 이런 교만한 우리를 구원시키려고 열심히 행했던 그 행함이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의 보배가 되고 우리의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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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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