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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00217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14:19-2/주의 이름과 창조성)자유게시판예레미야

20100217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14:19-2/주의 이름과 창조성)

이름 : 오용익(IP:59.3.201.250)

20100217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4장 19-22절/주의 이름과 창조성(이 근호목사)

(기도)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시 107:2,3)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저희들의 원수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저희들을 동서남북 사방에서 불러주셔서 같은 마음으로 같은 음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 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사랑이고 축복인지를 저희들이 살아가면서 그리고 주님 만나면서 확실하게 더욱더 깊이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복음이라는 것은 안 믿는 사람에게는 악취 나는 것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향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향기가 되는 사람 따로 있고, 제발 그 복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 악취가 되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미리 알아서 악취든 향기든 우리에게는 향기가 되어서 남에게 전할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이를 기쁘게 하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는 복음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구원될 사람에게만 향기가 되고 나머지 사람에게는 악취가 되는 내용이 복음인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복음을 향수로, 향기로 알았는지 아니면 악취처럼 여겼는지 스스로 돌아보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목숨보다 귀한 향수로 다가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4장 19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4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4:19-22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려도 놀람을 보나이다 여호와여 우리가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일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사람이 자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지요. 신자가 누굴 믿느냐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어떤 하나님인가? 여기 보면 ‘비를 내리시고 소나기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한테 발등 찍힌다면 보통 문제 아니지요.

어떤 성도님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는데, 그것도 교회 오는 그 날에 도둑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현금이나 패물 가져간 것이 문제가 아니고 ‘과연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맞나? 아니면 내가 추상적으로 어떤 대상을 설정해놓고 마치 하나님인양, 하나님이 계신 것인 양 일방적으로 내가 스스로 최면을 건 것은 아닌지.’

돈 몇 십 만원이 문제가 아니고 ‘과연 내가 진짜 하나님을 믿기는 믿느냐?’ 하는 그 문제와 ‘만약 내가 믿었던 그것이 가짜하나님이라면 교회나 돈 잃어버린 자기 현실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죽고 난 뒤에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다가오는 겁니다. ‘사람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거예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죽는 것이 겁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있으리라.’ 했는데 과연 심판에서 무사히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편으로, 염소가 아니라 양으로 합류할 수 있느냐의 그 문제입니다. 합류가 되려면 진짜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을 우리가 알아야 거기에 합류되거든요. 평소에 그 하나님을 잘 믿는다, 믿는다 했는데 갑자기 그 믿는 하나님한테 발등 찍히는 식으로 뭔가 예상치도 못한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믿던 하나님이 통째로 흔들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제가 염두에 두고 수십 년 동안 설교를 해 왔습니다. 내가 지어낸 믿음 같으면 이런 저런 일에 백이면 백번 다 넘어갑니다. 그런데 진짜 내가 만들어 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준 믿음이라면 어떠한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 말이지요. 흔들리지 않는다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여주기 위해서 흔드는 작업을 또 하셔요.

‘하나님,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습니다.’라는 우리의 다짐만 받으시고 우리를 곱게곱게 인도하시면 참 좋겠는데 ‘저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그래? 과연 그런가 하면 볼까? 내가 한 번 봐줄게.’ 하고 흔들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좋게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으로 흔들리는 것을 대치했다고 여기면서 ‘다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로 흔들겠느냐’ 싶었는데 진짜 흔들어버리는 거예요.

진짜 흔들 때 ‘하나님, 좋게 나왔는데 왜 흔드십니까?’라고 우리가 반발을 하게 됩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설교 했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강탈당한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강탈당할 각오를 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식 정도가 아니고 자기 목숨까지도.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게 정상적인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앞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정말 하나님께서 이렇게 버리십니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하나님이 마음에 진짜 우리 시온을 싫어하시는 겁니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료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 보면 예레미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맞아도 쌉니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치료는 해 주셔야지요. 우리도 잘못되었고 우리 조상도 잘못되었습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21절에 보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마옵소서.” 합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우리를 미워하지 마시고’ 그 다음에 결정적인 것인데 ‘주의 언약 때문에라도 하나님 저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이야기가 되어 있어요.

예레미야가 유다를 대표하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주의 언약 때문에, ‘우리는 잘못했으니까 그 잘못을 인정할 테니까 주의 이름과 주의 언약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안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새로운 조건을 우리가 알도록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기존에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알았는데, ‘우리는 주의 이름을 안다. 우리는 주의 언약이 있다. 비를 내리고 소나기를 내리시는 분은 이 세상에 하나님밖에 없다.’라는 것을 안다는 조건 때문에 안 버릴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린다고 하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새로운 일에 부합되는 새로운 일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걸 알고 싶다는 겁니다.

성도에게 그야말로 난처한, 예상 못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식으로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면 어떤 수정을 가하게 되느냐 하면 지금까지 알았던 구원받던 조건,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것은 잘못되었고 뭔가 미흡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나의 잘못되었던 조건과 구원의 기준에 대한 수정을 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태와 더불어서 새로운 구원의 조건과 새로운 원칙을 주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

그걸 예상할 수 있는 겁니다. 왜? 이것은 구약이니까. 지금 이것은 구약이거든요. 유다나라가 고생했다고 해서 고생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인정하겠습니다.’ 죄를 인정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은 아니에요. ‘고생한다고, 벌 받는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죄를 인정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면 그렇다면 뭡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진정 자기언약을 이루시는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을 예레미야는 궁금해 하는 겁니다.

먼저 예레미야의 문제점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예레미야의 문제점은 자기 구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자기 구원, 또는 자기민족구원, 유대나라의 구원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누가 나서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지금 제 소원이 하나 있는데 저를 죽여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그렇다면 적들이 사도바울 죽이려 할 때 광주리 타고 도망치기는 왜 도망치는 겁니까?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이 어떤 짧은 순간 한 2초 동안 ‘주여, 제 목숨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라고 생각하고 ‘주여, 지금 제 목숨, 집안 다 거덜 나도 지금 주님만 만난다면 그것이 즐겁습니다.’라고 생각했는데 2초 지나고 난 뒤에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어머니,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라고 한다면 갑자기 난리가 나는 거예요.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우리 집에 진짜로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욥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필이면 나에게.’ 금방 한 말이 ‘주여, 이 몸은 죽어도 좋습니다. 다 날아가도 좋습니다.’라고 했는데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나오는 말은 ‘주여, 하필이면 나에게!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습니까?’

사라진 ‘나’가 또다시 등장하고 말았어요.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 전할 때는 니느웨에 복음전하라는 그 말이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말인 줄 알았어요. 복음 전하고 난 뒤에 그냥 자기는 산위에서 언제 망하는지 관찰만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계시가 바로 요나 본인과 관련되어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그러니까 요나는 급 수정에 들어가지요. ‘그러면 도대체 구원의 조건이 뭐냐?’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 구원의 조건과 전혀 예상 밖의 다른 사태를 하나님께서 일으켰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구원의 조건은 엉터리라는 말인데 이것은 완전히 쓰레기라는 말인데 그러면 내가 이런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서 그 안에서 어떤 구원의 조건을 쥐어야 되고 믿어야 됩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예레미야는 현재 자기의 구원의 조건에서 벗어나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개인중심의 계시가 있는 반면에 개인 주변에 떨어지는 계시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중심의 구원입니다. ‘내가 구원받으려면 내가 뭘 알고 있어야 됩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런데 그 물음자체가 잘못된 물음이라 이 말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바깥 환경을 구원시켜서 우리를 푹 들어서, 국자로 국을 뜨듯이 삽으로 흙을 파듯이 합니다. 모종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모종삽으로 모종을 푹 뜨면 모종 주변의 흙이 같이 모종과 같이 뜨이듯이, 우리는 가만있으면서 ‘구원의 원칙이 뭡니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의 흙이 푹 들리면서 그 흙속의 모종같이 우리가 있으면 이미 우리가 구원되는 거예요.

구원에 관해서 우리하고 의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언약의 완성자와 의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본인을 언약의 상대자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전도서 9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여러분이 잘 안보는 구절일 것 같은데요.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여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결국 일반이로다.”

결국은 다 똑같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로마서 9장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에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 됩니까, 라는 물음을 할 때 ‘네가 하나님을 섬기냐 안 섬기냐에 관계없고, 미래는 네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전체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 잘 믿으면 복이 온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집안에 재앙이 덮치지 않는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잘 섬기면 복 받을 것이다.’ 거짓말이에요. 전도서 9장의 말,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자가 하는 말이 사람이 아무리 요령 부려가면서 하나님의 입맛에 맞춰가면서 장래에 어떤 재앙이 오는 것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미리 선을 쌓고 착한 일을 백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네가 어떤 일을 행하고 안행하고에 따라서 재앙이 오고 안 오고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어느 집안에 가정우환이 있고 병자가 생기고 도둑이 들고 교회에 무슨 문제가 생기고 그것은 우리의 행동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럼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방금 그것을 믿으라.” 그 말이죠. 그것을 믿으면 돼요.

내 중심으로 자꾸 하나님을 당기는 것은 결국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 밖에는 안 되니까 ‘너를 위한 계시로부터 네 주변을 위한 계시로 이동하라.’ 이 말입니다. 결국 성도는 빠져나가는 존재에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거예요. 어디로든지 빠져나가야 됩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있었지만 그 도시의 포인트는 뭐냐? 그 도시가 잿더미가 된다는 거지요.

만약에 롯이 빠져나가지 않았으면 같이 잿더미 되는 겁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잿더미 되게 하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걸 롯이 미리 알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걸 미리 알아놓으면 ‘역시 하나님은 내편이야.’라고 이렇게 오해할 것이 뻔하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롯 편 아닙니다.

다만 심판했던 결과로 롯이 빠져나왔을 뿐이지요. ‘역시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봐서 빼냈어.’ 아니거든요. 그거 아니거든요. 누가 작용해서 빼내줬어요.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서 조카 롯이 빠져나왔습니다. 조카 롯은 그걸 몰랐지요. 그래서 나직하게 아주 조용하게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거 고함 안 질러도 이해되겠지요. 참 이거 아는데 평생 걸립니다. 한 2초 동안은 우리가 이걸 믿습니다. 오늘 예배마치고 집에 갔는데 도둑 들어왔다고 해 보세요. 왜 추방과 관련된 구원을 왜 자꾸 인간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이런 벌을 내리십니까?” “누가 뭐랬어? 그걸 왜 네가 지은 죄의 벌로 생각하느냐?” 그 말이죠.

그건 벌이 아니고 애초부터 인간은 벌을 따질 잽도 못됩니다. 그냥 아예 당연하게 여기고 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운명이라 여기시고 그냥 지옥가면 돼요. 내가 한 짓이 나빠서 벌 받아서 지옥 간다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지옥가면 돼요. 구원문제가 요란스러운 것은 우리 때문에 요란스러운 것이 아니고 언약관계, 우리를 대신해 주실 그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게 구원이 복잡한 겁니다.

우리의 심사가 복잡해서 된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교회 나와서도 항상 자기를 주목하기 때문에 교회 나와도 교회를 나왔는지 절에 나왔는지 도대체 분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제가 화요일엔가 경산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아주 평범하게 보통으로 살아가는데 남편한테 바가지를 많이 긁었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회사 다녀오는 길에 크게 교통사고를 당해서 남편이 거의 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바가지 긁은 것을 후회하면서 기도를 했답니다. ‘어쨌든 남편만 살려주세요.’ 그동안 잔소리했던 것이 그렇게 미안하고 ‘그 남편만 살려만 준다면 이제 잘하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기도덕분인지 남편이 완쾌는 되지 않았지만 목숨은 건졌답니다.

이걸 간증하면서 이것이 다 스님의 기도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이 방송이 불교방송이었어요. ‘다 스님께서 기도해준 덕분입니다.’ 난 기독교방송 듣는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불교방송이었어요. ‘아, 불교방송에 이런 것이 나오는구나.’ 그 아줌마가 ‘스님께서 기도한 덕분에 완쾌는 되지 않았지만 내가 이렇게 참회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간증하고 불교도들에게 신청곡도 띄우고 그랬습니다.

그걸 보면서 ‘야, 교회가 절이구나.’ 절로 갈 것이 없어요. 교회 오면 그냥 절에 간 거예요. 지난 주일설교에도 했지요. 성경에서 교회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는 겁니다. 이야기 백날 해줘봐야 2초뿐이고 다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하고 우리 주변에 계신분과 상대하는 거지요.

그러면 예레미야 같은 인간과 예레미야가 대표하는 이 유다나라를 우리나라구원중심에서 빼내야 돼요. 빼내서 ‘나’라는 것을 뭉개버리고 삽으로 모종을 뜨면 우리가 덩달아 구원받듯이 우리 주변으로 빠져나가서 이제는 나를 보던 그런 시선에서 그동안 누군가 내 대신 작업을 해놨다는 그 사실에 눈이 열리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구원의 원칙이 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개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 새로운 언약이 나오지요. 그게 오늘 본문에서 ‘주의 언약을 기억하소서.’라고 되어 있지요. 예레미야는 ‘주의 언약을 기억해서 유다와 저희들을 버리지 마옵소서.’ 하는데 주의 언약을 기억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원칙을 부수는 거예요.

왜? 주의 언약 때문에. 조금 어렵습니까? 하나님은 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성취하기 위해서 내 구원중심의 주의 언약을 의도적으로 흔들어서 깨버립니다. ‘너 중심의 계시가 아니라 너 주변의 계시로서 네가 빠져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빠져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빠져나갈 때는 길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길은 ‘이것이 길이다, 혹은 길이 아니다.’ 하는 것을 뭐가 인도하는가? 그것이 언약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을 예레미야는 자기민족 사는 것으로, 자기가 구원되는 것으로 봤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제가 알기로는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언약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이 완성되었다, 안 되었다.’를 결정짓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제공된다면 그것이 곧 언약이 완성된 겁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이제 빠져나와야 되는데 빠져나올 때 빠져나오는 그 길이 있어야 되거든요. 길이 백 개라면 백 개중에서 어느 길이 빠져나오는 길인지가 결정되어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그 빠져나오는 길의 모습이 뭐냐? 그게 바로 사도바울에 따르면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십자가의 길이 보이는 쪽으로 주님께서는 도둑 들게 하고 교회 흔들고 가정에 누가 아픈 일도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아프면 낫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거든요. 교인수가 빠지면 ‘채워주소서.’ 도둑 들면 ‘다음에는 도둑 든 이상으로 수입이 다 채워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제시한 길은 ‘안 아프게 해 달라. 교회 부흥시켜 달라. 돈 벌게 해 달라.’ 인데 이 세 가지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아니에요. 그것은 도로 빠져나오기는커녕 현재 있는 자리를 더욱더 보존하게 만드는데, 주저앉게 만드는데 보탬이 될 뿐입니다. 은근한 자존심이지요. 사람이 자존심이 있으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겁니다.

“주여, 하필이면 나에게! 저에게 이럴 수가!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제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허허, 그 자리에서 나오라니까? ‘내가 뭘 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라는 그 자리에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 말이에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찾아오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고민하는 차에 또 하나님께서 마침 좋은 예화를 주셨습니다. 최근에 벨기에에서 열차사고 나서 20명 죽고 60명이 다쳤다는 기사가 났지요. 열차 두 개가 있는데 이게 충돌한 이유가 다른 노선으로 가면 충돌이 안 되었을 것인데 같은 노선에서 두 열차가 마주 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두 열차가 아침에 충돌을 했어요. 충돌을 했으니까 양쪽 다 박아서 푹 들어간 지점이 있지요. 충돌해서 강하게 받친 그 지점이 형성될 때 거기서 열차는 깨지고 찌그러지고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 중첩되는 자리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고집하는 자기 인생 노선을 버리지 마세요.

괜히 믿음 좋은 척 하면서 ‘주여,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다고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것도 아니에요. “주여, 우리 죄를 아옵니다.” “그래서 뭐? 흔들지 말라 이 말이지.” 그런 것 상관없습니다. 그냥 우리 길을 가세요. 가게 되면 우리 노선에 저쪽에서 마주 오는 열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철도 없이 그저 내가 잘되는 것이 축복받는 것 인줄 알고 지금 열차가 가고 있습니다.

사고 뉴스에 보면 ‘신호를 보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우리는 십자가 신호를 봐도 외면해 버립니다. 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내가 꿈꾸는 비전만 보이지 십자가는 안보입니다. 신호가 와도 우리는 볼 줄도 모르고 보고 싶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그냥 가는데 저 앞에서 뭔가 쾅, 하고 박습니다. 천국행 열차가 와서 정면으로 받아버려요.

받아가지고 나도 죽고 주님도 죽고.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양은 그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 버렸다는 것을 알아채는 자가 진짜 양이 됩니다. 거기서 정면으로 부딪히니까 나의 꿈, 미래, 소망 이런 것은 박살나 버리고 그 박살나고 피투성이 된 그 죽음 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라 합니다. ‘연합되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들려오는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죽었기에 네가 죽었고 내가 살았기에 네가 살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삽니까, 라는 말을 내 앞에서 하지 마라. 내가 죽었으면 너는 죽은 거야.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는 말을 하지마라. 내가 살았으면 내가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네가 산거야. 네가 살고자 애썼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았기에 네가 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나한테 완전히 쾅 하고 받혀서 받힌 그 중첩자리를 형성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죽음과 주의 죽음의 만남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것 아시지요.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났다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의심을 해 봅시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착각을 해서 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자기 안의 무의식에 의한 상상력이 발동해서 악마를 만나고 나서 예수님 만났다고 우길 경우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그럴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바로 사도바울은 그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나 계시 받았다.’ 그게 아닙니다. 자기가 주님을 죽인 그 당사자인 것을 알았어요. 그게 바로 열차 두 개가 박치기 할 때 제대로 박치기 한 겁니다. 박치기 정 안되면 돌아가신 김 일을 불러야 돼요. 김 일 불러서 제대로 박치기해야 되는데 주님께서는 김 일입니다.

그냥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면 주님께서 아무소리 안하고 받아버립니다. ‘나 때문에 네가 살았어. 알았어?’하고 받아버립니다. 우리는 아직도 ‘왜 하필이면 나에게? 내가 뭘 해야 복 받습니까? 내가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맨 날 나오는 것이 ‘나’ 나가 나오는데 주님 만나서 박치기당해서 혹 뿔나고 피투성이 되어보면 ‘나의 욕심과 나의 비전이 나의 소망이 나의 구원욕심이 예수님의 은혜를 들이받아서 예수를 욕되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 구원 챙기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아셔서 우리 구원을 이미 챙겨줬다는 것,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나의 노선에 주님이 마중 나온 축복인줄 우리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여전히 우리 노선만 고집하고 나의 미래만 설계합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주께서 마중 나와 주셔서 구원의 기준과 구원의 조건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구원케 했던 마지막 조건이고 완성된 조건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모든 노선이 주님의 노선이 되었사오니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00217렘14(19-22주의이름의창조성).hwp (48.5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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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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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