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15-17 (저주받은 세상)
눅 3:15-17 (저주받은 세상)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7)
본문 : 누가복음 3장15-17절
제목 : 저주받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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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02-14 12:2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15강-눅3장15-17(저주받은세상)-luk100214.hwp
이근호
10-02-14 13:32
저주받은 세상
2010년 2월 14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15-17
(눅 3:15, 개정)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눅 3:16, 개정)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 3:17, 개정)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세례 요한이 했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보고 하라고 한다면 과연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꾸 우리는 세례 요한같은 선지자가 아니라는 핑계를 댑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도 예수님 앞에 서 있고 우리도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믿는 예수님을 우리도 같이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진다’는 말을 우리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차마 이 말을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뭔가 불합리한 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단정을 내립시다.
‘쭉정이는 불에 태워진다’는 말을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다고 단정지웁시다. 세상에 나서면 우리는 자꾸만 이 성경 말씀을 누려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그런 똑같은 사람들 뿐입니다. 즉 누구는 천국에 들어갈 알곡이요 누구는 지옥갈 쭉정이가 된다는 식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가 무엇이냐 하며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사람의 무리’입니다. 즉 사람들이 교회 와서 목사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를 하고 교회 봉사를 하는 것은 결코 교회됨을 증표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자들만이 교회입니다.
세례 받는 것? 이것도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 그것도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전도? 헌금? 봉사? 예배 참석? 모두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규정은 이러합니다. 인간이 도저히 못하는 것을 해내는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이 과연 ‘인간이 내는 것만 하는 자’인지 아니면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자’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표현하는 주님’과 ‘주님이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나’를 구분하는 자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요구사항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이러이러한 주님이 되어서면 좋겠다는 식으로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영어시간에 학생들이 영어선생님을 평가합니다. “선생님, 물을 영어로 뭐지요? 워터이지요?”라고 물으니 현지인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워터? 노! 워러!”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선생님보고 발언이 좋지 않다고 발언을 고치라고 가르치려듭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교회 올 때는, 자신에게 맞는 하나님과 예수가 되라고 하나님에게 요청하게 됩니다. 자신이 신앙생활 잘 하도록 내가 요청하는 것을 들어주는 그런 착한 신이 제발 되어달라고 신에게 요청합니다. 즉 “워러가 아니라 워터”라고 발언하라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도리어 참된 인간은 이러이러하다고 그 규정을 제시합니다.
즉 이러이러한 인간일 경우에만 참된 내 자녀라는 겁니다. 바로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알고 있어야 참된 성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시하는 참된 피조물상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의 경우, “쭉정이 같은 인간은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말을 함부로 고백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발언을 주변 사람들에게 했다간 단번에 “너는 뭐가 잘났어”라는 핀잔을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못합니다. 즉 우리는 알곡과 쭉정이로 구분되어야 되는 그 이유조차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하늘에 어떤 결과를 낳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원인이 되고 우리 자체는 단지 결과로서 빚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도저히 납득을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과 성령의 세례’ 의미가 밝혀집니다. 구약에 할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는 티를 신체에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문신을 새겨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입을 깨물고서라도 그 문신을 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쭉정이로 남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리 말씀드렸듯이 참된 구원받은 교회란, 인간의 힘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사람들의 집합이기에 불과 성령의 세례라는 문신도 우리에게 그림의 떡입니다.
아니, 성경 전체가 우리가 행하기는 그림의 떡 같은 것입니다만, 그 말씀의 적용을 받아 심판받는 것인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결과는 우리가 우리에게 행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는 사람에 한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불과 성령의 성령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행세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불과 성령 세례는 예수님께서 이 땅을 관통하면서 사셨던 그 일생이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성령세례 받고 십자가에서 불세례 받았습니다.
바로 이 과정이 성령이 임한 성도에게는 전부 덮쳐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성과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성도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초점 잡히게 됩니다. 성도의 일생 전체가 바로 불과 성령세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즉 “주님, 앞으로 저를 어떻게 사용하실 참입니까?”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19:5-6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례가 다 내게 속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그 어느 사건이든 예수님이 개입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겁니다. 그 개입이 원인이 되어 이루시는 결과는 바로 언약 백성이라는 자기 백성 만들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심으로 말미암아 산상설교나 기적같은 것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의 자신이 흘리신 피로만 우리로 하여금 천국 창고의 알곡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10-02-17 23:22
20100214 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눅 3:15-17/저주받은세상)
2010-02-17 22:09:54 녹취 : 오용익
20100214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3장 15-17절/저주받은 세상(이 근호목사)
(기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시편 107:1-3)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인 줄 압니다. 안 해도 될 일이 아니라 필히 해야 되고 할 수 밖에 없고 하는 것이 즐겁고 하는 것이 감격스러울 그런 고백과 모임을 주께서 주선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부족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그 지극한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크게 드높일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3장 15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2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3:15-17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방금 읽었던 본문대로 소개를 했습니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쭉정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농사에서 말하는 쭉정이를 뜻함이 아니겠지요. 어떤 사람들을 말하겠지요.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데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합니다. 제가 말을 넣는다면 ‘쭉정이니까 쭉정이 같은 인간들은 영원한 불에 태운다.’라고 한 겁니다.
뭐든지 습관이 되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세례요한 같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선지자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마음껏 할 수 있다, 이렇게 하겠지만 사실은 이 성경구절은 이 구절대로 우리도 할 수 있느냐고 우리보고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것 다 생략하고 쉽게 합시다. ‘쭉정이 같은 인간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을 저는 믿습니다.’라는 말을 일반사회에서,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설날 세배를 하잖아요. 자식이 세뱃돈 안 바라고 절을 할 리가 없으니까 손자라도 세뱃돈 받으려고 절을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덕담을 해 줘야 되지요. “아버님, 새해도 건강하시고 오래 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좋은 덕담이 오면 인간적으로 가는 것도 좋게 가는 게 좋거든요.
“쭉정이 같은 인간은 불에 태우시리라.” 그렇게 하면 흔히 요새 이야기하는 인간간의 소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집안이 파탄 나고 작살나는 일밖에 더 되겠어요? 이것을 선지자가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아예 우리는 이 성경책을 덮는 것이 났습니다.
‘선지자? 이 성경 덮어서 눌러버릴 테니까 너는 성경 속에서나 그런 잔소리 많이 하고 나는 이 성경책을 안 들출 테니까 내가 사는 세상에서 나는 그런 소리할 의사가 없다.’ 하고 꾹 누르면 되는데 우리가 성경을 펼치고 봤다는 것은 이러한 발언을 세례요한이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어야 그래야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왜? 세례요한도 예수님 앞에 서 있고 우리도 바로 이런 일을 하시는 분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 앞에만 서 있는 예수님 같으면 우리는 안 해도 돼요. ‘세례요한하고 예수님 두 분이나 짝짜꿍 잘 하세요.’ 그러면 그만인데 이 예수님이 세례요한만 건지시는 예수님이 아니고 진짜 허접스러운 우리도 구원하시는 주님이잖아요.
세례요한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동일하게 구원한다면 세례요한도 구원받아야 될 입장이고 우리도 구원받아야 될 입장이라면 동일한 고백이 나와 줘야 논리적으로 맞지요. 이것은 당연한 겁니다. 제가 무리한 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걸 요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소리를 잘 못하지요. 상대방에게.
“너는 뭐야!” 이렇게 되니까. “너는 천사야?” 이런 식으로 구박들을 수도 있고 그래서 우리는 아예 설교 초반부터 다짐을 합시다. ‘세례요한 같은 이런 고백이나 이런 발언을 우리 입에서는 차마 못한다.’ 동의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하는 식으로 ‘우리 입에서는 차마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없다. 세례요한은 선지자고 그게 주특기니까 당신이나 그렇게 살고 우리는 안 할래. 그냥 밥이나 먹고 살래.’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싸잡는 것, 그게 정상입니다.
누가복음에 그런 소리 있더라, 하면서 슬쩍 성경책 탓으로 미루는 것, 그것이 우리의 정상이고 모든 인간의 타고난 겁니다. 우리는 거기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괜히 어쭙잖게 세례요한 흉내 내지 마세요. 세례요한 흉내 낸다고 괜히 직장 잘리고 가정파탄내고 가출당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시고 이것은 우리가 못한다, 라고 아예 단정을 그렇게 짓고 나갑시다.
초반부터 이렇게 단정을 짓고 나가야지 괜히 우리의 수준을 높이지 맙시다. 괜히 높여 놓았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그런데 요즘의 한국교회 말고 성경에 나오는 교회를 보니까 그 정의가 뭐냐?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사람을 교회’라고 그렇게 정의 내리고 있어요. 제가 설교 시작하면서 5분 이상 지나고 있는데요, 5분 동안 한 이야기가 뭐냐? ‘못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렇게 이야기할 사람은 없다.’라고 단정을 지었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다들 제 말에 동의들 하셨어요. ‘순교할 목사나 이렇게 할 문제지 우리는 관계없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성경을 덮을 경우에는 맞아요. 그런데 성경을 펼치니까 성경 속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 뭐냐 하면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느냐’를 우리에게 묻고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것을 한다면 당신이 바로 교회요, 성도다.’라고 하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 하면 남들이 다 하는 것 하게 되면 그것은 성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남들이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하게 되면 역시 성도가 아닌 거예요. 예배당 앞자리에 앉는 것은 보통 사람은 못하는 거예요. 앞자리에 앉는 것은 성도 맞아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회의하고 의논해서 어떻게 결론을 내리느냐에 관계없이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너는 거듭난 사람이고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런 사람만 구원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바쁘지요. 뭐가 바쁘냐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해도 못 따라 오는 것,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엇이 무엇이냐, 그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기도? 다 해요. 방언? 단양의 구인사라는 절에 가면 방언 전문입니다. 다 합니다. 병 고침? 그것은 교회 안가고 절에 가도 다 할 수 있어요. 갓 바위에 가도 되고 다 할 수 있어요. 전도? 사람 꾀이는 것, 보험회사도 다 하잖아요. 예배드리는 것? 그거야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서 찬송 따라 부르고 대충 음정 맞춰주고 끝나고 점심 먹을 때 숟가락 들고 같이 먹어주고 그런 것이 뭐가 어려워요.
헌금 내는 것? 아이티구호성금도 내는데 성금 내듯이 내면 되는 것이죠. 노골적으로 이야기합시다. 그것 말고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제가 그대로 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장담 하에 그대로 해도 구원 안 되고 그대로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이 될 수 있는 그 무엇, 성경에 있는 ‘기도하라, 전도하라, 헌금하라.’ 이런 것 하나도 안하고 예배참석도 안하고 나쁜 짓만 골라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되는 그 무슨 요소, 그 무엇, 그게 있어야 성경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뜸들일 것 없지요. 거기에 간단히 답이 나와 있어요. ‘어린양의, 희생양의 표식을 가진 자’라고 요한계시록에는 되어 있어요. 상당히 난해한 용어지요. ‘어린양의 표식을 가진 자의 무리, 또는 집합체’를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니까 그것은 치우고요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만드는 인생이 아니라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께서 만들어 나가시는 그러한 인간임을 자기가 발견하는 사람. 내가 원하는 나,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레고장난감처럼 매일같이 조립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인생을 날마다 손에서 떼어내 지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인생으로 날마다 만들어져가는 인생, 그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성도는 어떤 점을 아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은 이렇습니다, 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얘야, 성도는 이런 사람이 성도란다.’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표현해주는 그 표현, 그 규정을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수업시간인데 영어 선생님이 미국에서 와서 영어를 잘 해요. 수업을 하는데 애들은 자존심이 있으니까 선생님이 실력이 있는가를 보기 위해서 “선생님, 물이 영어로 뭡니까? 우리는 ‘워털’로 배웠는데 ‘워털’이 맞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 믿는 우리가 ‘이래야 예수님이 맞지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듣고는 선생님이 “물? ‘워러!” 하거든요. “선생님, 틀렸습니다. 워러가 아니고 워털, 워털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적어도 예수가 되었으면 적어도 나에게 이런 것, 이런 것을 해 줘야 되고 이런 예수가 되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자꾸 예수님을 가르쳐요. 자꾸 예수를 교육시킨다고요.
‘주님, 내 인생 이렇게 꼬이게 한 것은 주님이 실수하신 겁니다. 앞으로 주의하세요. 지금이야 내가 인간성 좋아서 교회 나와 주지 두 번 다시 이런 일 있으면 나 교회 안 나옵니다. 주의하세요.’ 자꾸 우리가 예수를 가르쳐요. 그런 식으로 내 입맛에 맞는 예수지요. 본래 시어머니가 연세가 많아지면 입맛이 갑니다. 그래서 반찬을 다 짜게 해요. 특정인 누구라고 제가 이야기는 안하겠습니다만 연세가 많아지면 하는 음식이 전부 다 짜요.
그럴 때는 젊은 며느리가 어쩔 수 없이 ‘어머니, 간을 좀 싱겁게 하세요.’라고 가르치게 되면 그 말이 맞아도 듣는 시어머니 기분 나쁘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 이쯤해서 우리교회 부흥시켜 줘야 되고요 헌금도 좀 나오도록 해 줘야 되고 주님께서 맨 날 예배만 받지 마시고 뭐가 주는 것이 있어야 우리도 복 받은 것 가지고 떼어서 헌금할 것인데 복을 줘야 돈이 있지 먹고 사는 것도 급한 판인데, 우리 좀 잘 지내봅시다.’하는 식으로 주님한테 잔소리를 늘어놓아요.
그런데 그런 식의 주님은 인간이면 누구나 조작해 낼 수 있는 주님이고 진짜 성경속의 주님은 ‘얘야, 성도는 이렇게 되어야 성도다.’라고 주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마치 눈처럼, 눈 싸라기처럼 내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쌓이는데 그 주님의 말씀이 우리가 기대한 말씀 같으면 차곡차곡 쌓고 싶은데 오늘 본문 17절 끝에 보니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는 이런 말씀도 과연 우리 가슴팍에 곱게 쌓이겠습니까?
‘쭉정이같은 인간은 영원한 저주의 불에 들어간다.’라는 이 말은 아주 막가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께서 끝까지 해보자는 이야기거든요. ‘쭉정이 같은 인간들, 알곡이 되지 못한 인간들은 영원한 지옥 불에 보내시는데 적극적으로 밀어서 보내신다는 식으로 나오실 때 과연 이것이 곱게 아주 순하게 깃털처럼 거부감 없이 우리 가슴에 쌓이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답변은 이 말입니다. 없다는 거예요. 좋은 소리, 복 준다는 소리 하면 차곡차곡 쌓이는데 저주 이야기하고 지옥이야기하면 좋아할 위인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키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안 되니까 과연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새겨질 때까지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질주, 달려가십니다.
십자가의 길로 질주하시고 십자가지시고 부활하셔서 과연 그러함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맘속에 반도체 칩처럼 우리 속에 새겨 넣을 때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애써도 새길 수 없던 이 말씀이 어느새 우리 속에 새겨져 있으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희생양의 표식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이라 합니다. 희생양의 표식, 어린양의 표식.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 표식 외에 다른 표식은 감추어놓든지 잘라버리든지 기억에서 다 지워서 잊든지 그렇게 해야 되잖아요.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남겨야죠.
그런데 교회는 나한테 유리하고, 불리하고가 아니라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 그 표시가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아예 문신을 했다고 할까요. 그 문신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구약 때는 할례라고 했고 신약 때는 세례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우리가 표시하면 기껏 할례 합니다.
요새 포경수술이죠. 기껏 할례정도 해서 하나님의 표시가 내 몸에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 말고! 그것 말고! 그것 말고! 할례는 유대인들도 할 수 있는데 그것 말고.’ 어떤 사람은 또 말하기를 ‘저는 할례 없습니다.’라고 할례 없다는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할례 없는 그것 말고, 할례 한 그것 말고 세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또 말하기를 ‘세례 받았습니다. 재작년에 받았잖아요. 목사님, 기억 안 납니까? 치매입니까? 직접 물 뿌려서 온 얼굴 다 젖게 만들었는데 기억 안나요? 저 세례 받았어요.’ 그것 말고, 손들고 앞으로 나와서 세례 받는 것은 인간이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말고, 내가 받고자 해서 받는 그런 것 말고, 내가 받고자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 집어넣어준 그 무엇 말입니다. 그 무엇, 그게 있어야 돼요. 그걸 가지고 성령세례라 하는 겁니다. 이게 동전의 양면이에요. 앞에는 성령세례고 뒤에는 불세례에요.
성령과 불세례라는 말은 이 성령과 불을 누가 먼저 경험했느냐 인데 예수님이 갔던 그 일생이 성령과 불의 과정이었습니다. 성령세례 받았고 십자가 지는 것이 불세례라고 성경에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불세례라고 해서 뜨거운 불에 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다 인간적으로 할 수 있지요. 불에 인두 지져서 소나 말에 마크 찍듯이 그렇게 하라고 하면 독한 사람들은 합니다.
천당 가는데 뭘 못해요. 독한 사람들은 궁둥이 내놓고 거기에 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물고기모양으로 생긴 것으로 인두 지져서 찍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 말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내 열손가락으로 할 수 없는 그 무엇,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에 찍힌 그 무엇, 그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령세례고 다른 하나는 불세례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목사님, 성령세례와 불세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일대기가 여러분 속에 찍힌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총각으로 지내야 됩니까? 우리도 가끔은 물위를 걸어야 됩니까? 가끔은 아침밥 하지 말고 기도해서 오병이어 기적처럼 해서 먹어야 됩니까?’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일대기가 다 이루었다는 취지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기적이 모아진 것이 바로 십자가기 때문에 십자가가 찍혔으면 주님이 그 전에 하신 모든 것이 다 십자가영생으로 통하는 기적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세웅아! 십자가대이~.’ 하잖아요. 그 십자가라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 22절에 보면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심판’을 분해해보면 아까 읽었던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는 그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런 심판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내려진 결론을 쉽게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쭉정이를 불에 던지 우지 않도록 알곡 되게 해서 천국에 들이는 것인데 인간이 팔짝팔짝 뛴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뭘 해도 불가능입니다.
‘우리가 실현 불가능한 것을 주님께서 가능케 하셨는데 우리 안에 들어온 그 가능한 것이란, 우리 힘으로는 저주에서 생명으로 갈 수 없는 그것과 관련되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기능과 효능을 가진 것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한테 집어넣었다.’ 이렇게 될 수 있거든요. 문장은 길지만 들어보면 대충 감은 오지요.
만약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동의하신다면 기본적으로 여러분은 뭘 동의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교회 와서 목사 말 듣고 뭘 어떻게 해서 그걸 근거로 구원되는 그런 방법은 애초부터 일체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야 돼요. 교회 올 때부터 교회 왔다는 것 때문에 구원받는다든지 교회 와서 무슨 의식을 행사한다든지 세례를 받는다든지 성만찬을 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해서 구원받는다는 계획을 애초에 철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흉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거 하면 안돼요. 병 고침, 기적? 만약 병을 고쳐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까지 갈 필요가 없어요. 병 고치는 기적만 행사해서 하는 말이 ‘너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고 십자가까지 가는 것 말고 바로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서 바로 하늘로 올라갔을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산상설교를 지킨다는데 산상설교를 지켜서 구원받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얘들아, 내가 해 준 이야기가 있지?” “예” “뭔데?” “예, 산상설교입니다.” “잘 지켜라.”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간다. 나중에 보자.” 그리고 그냥 올라갔을 거예요. 산상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산상설교 어느 말씀도 애당초 우리의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게 산상설교에요.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그 어떤 기적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기적들을 베풀어 준 겁니다. “그럼 목사님, 예수님의 기적이 오늘날에는 안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일어나지요.” “일어나는데 왜 우리 힘으로는 못한다 합니까?” “일어나는 것 하고 우리 힘으로 되는 것 하고 같습니까?” 산상설교에 보면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무슨 화학약품을 써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 했어요. 그러면 중국사람 구원받습니까, 그 사람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까? 감기가 들었는데 기도해서 기적으로 감기 나았다. 감기가 나았으면 그걸 근거로 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깁니까? 그게 쭉정이에서 알곡 되는 겁니까? 아니거든요.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그런 기적들, 오병이어 기적들, 병 고침, 산상설교와 물세례 받는 이 모든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절대로 인간들이 흉내 낼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고 인간들이 이것을 그대로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카펫같이, 자갈밭같이 깔려 있고 이 모든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너는 나를 따르라.” 하니까 어떤 제자가 말하기를 “아버지 장례인데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겠습니다.” 그럴 때 믿음 좋은 사람은 막 분개하지요. ‘예수님의 영생을 모르고 자기 아버지 장례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안 따라가느냐?’ 하는데 그러면 아버지장례 안 치르고 따라가면 구원받습니까? 그렇게 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지셨습니까?
안돼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어떤 말씀도 못 지킨다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자꾸 건방을 떨면서 이 성경말씀대로 지킬 수 있다고 버티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또 불만스러운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말의 취지는 제가 백 프로 이해를 하지요. 예수 믿기 전에는 이 성경 말씀 우리가 못 지켰지만 그래도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이 성경말씀을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나와요.
그러면 그 앞에서 다른 소리 하고 싶지도 않아요. 세숫대야에 물 담아놓고 한번 걸어 보라고 하는 거지요. 예수님도 베드로도 물위를 걸었는데 당신도 한번 걸어보라는 거지요. 세숫대야에 들어갈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세숫대야 들어서 던져버립니다.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예수 믿고 나서 안 것은 전에 우리 힘으로 했다는 그것마저도 주님의 은혜였다는 것, 주님의 기적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옛날에 입시시험 쳐서 합격 된 것이 자기 힘으로 된 것인 줄 알았지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보니까 그 때 시험문제 가운데 하필이면 내가 아는 문제만 나온 거예요. 제가 운전면허 시험 치는데 60점 이상 되어야 합격인데 62점 맞았습니다. 기적입니다. 아는 문제만 해서 62점 나왔어요. 어떤 사람은 공부 잘해서 합격되었잖아요.
공부 잘 할 수 있는 여건은 누가 마련한 겁니까? 만약 아프면 어떻게 할래요? 운전면허 시험 치려고 하는데 허리 아프면 어떻게 합니까? 입원해야 되잖아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의 발자국도 주님께서 헤아리고 있다. 참새가 주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아니한다.’라는 사실을 예수 믿기 전에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주님의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그 말을 괜히 한 소리로 여겼지요.
성령세례 받고 난 뒤에는 그야말로 참새 한 마리가 나는 것도 주님 주신 힘으로 난다는 것이 보입니다. 한 2초 동안이고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한 2초 지나면 또 자기 힘으로 했니 어쩌니 하고 나오지만 정말 성령을 받게 되면 지금까지는 내가 원하는 내가 이 정도라고 자기증언을 하기 위해서 잘난 체 하기위해서 살았는데 주님의 성령이 박히고 부터는 주님이 원하는 내가 지금까지도 만들어졌지만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쁨과 즐거움이 마구 밀려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것이 지금 시점뿐만이 아니고 앞으로 주님 만날 때까지 계속 된다는 그 느긋함, 그 여유만만, 아, 인생 즐겁습니다. 참 즐거워요. 그럴 때 성경은 이렇게 하지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주여, 어떻게 하면 죽어서 천당 갑니까?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맨 날 그것만 생각했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주여!” “왜?” “앞으로 날 어떤 인간으로 만들 겁니까? 지금까지 주님 뜻대로 날 주물렀는데 앞으로는 내 인생을 어떻게 만들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딱 성경책을 내놓지요. “네 인생? 여기 있네. 말세에 자기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부모도 공경 아니하고 거역하는데 너는 그렇지 않고 주님 사랑하면서 감사하고…….” 이렇게 나오지요.
주님께서 내 인생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성경책에 다 나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내 모습이다 하고 있는데 옆에서 하는 말이 “아이고, 이 선생, 예수 믿더니만 인간되었네.”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런 인간되기까지 내가 나한테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주님이 성령께서 나를 이렇게 했습니다.”라는 발언을 할 경우에만 우리는 나의 증인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원했던 바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본론 들어갑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내가 예수를 만들어가든지 내가 예수한테 잔소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은 듣지도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우리가 만들어져 가는데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 가능치 않고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능한 것은 뭐냐?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되기 위해서 하루에 공부 몇 시간씩 했으며 어느 대학을 나왔으며 우리 집안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교육에 헌신적 이었으며……, 이런 요소들을 집어넣어요. 그걸 가지고 어렵게 말해서 원인을 이 땅에서 찾고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끼워 맞추는 식은 우리가 아주 잘해요.
그런데 원인을 나에게서 출발하지 말고 원인을 하늘에 두고 결과만 이 땅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보는 것, 이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이 박힌 사람에게만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그 모든 동기,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하늘에 있다 이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데 그렇다면 하늘에서는 어떻게 그런 동기가 나오는가?
1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정하게 한다는 말은 깨끗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거 우리교회 제직회에서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와 관계없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셨는데 우리는 어디에 흡수되었는가?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미가 주어지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동화사 주지라면 17절,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하는 말씀을 보고 ‘예수라는 작자가 정신병 환자구나. 어릴 때 트라우마, 정신적인 상처가 있었나? 어릴 때 어떤 열등의식이 있었나? 왜 보편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될 인류에 대해서 극단적인 막장 드라마 식으로 인류를 둘로 쪼개면서 그 쪼개는 주체, 쪼개는 기준을 예수 제가 뭔데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알곡은 알곡대로 쭉정이는 쭉정이대로, 하면서 그것을 자기 맘대로 라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이것은 정신적인 폭력? 강간? 또는 횡포? 조폭? 뭔가 예수라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이 가정에서 학대를 받았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예수님을 모독할 수 있을 거예요. 방금 제가 동화사 주지라고 했지요. 동화사 주지 같은 사람은 그럴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목회를 40년 50년 한 목사가 그런 소리를 합니다. 교인들은 상상도 못하지요.
‘여러분, 예수만이 참된 인간이고 부처도 인간이다.’라는 그런 말은 갈수록 점점 더 번져 나옵니다. 왜 그러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요소가 있어야 그 사람이 성도인데 만약에……, 여기서 수요일에 한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예배당을 지었는데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사람만 예배당에 오라고 하면 예배당은 지어놓고 교인 몇 명 모이겠습니까?
단 한명도 안 될 가능성이 90퍼센트 넘습니다. 99퍼센트입니다. 그러니 교회 예배당을 지어놓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소통이 되는, 서로 서로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 줘야 교회에 사람들이 채워집니다.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착해질 수는 있지 않습니까? 양심이 있으니까.
‘양심대로 신에게 경배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온다 이 말이지요. 그 이야기하고 ‘쭉정이가 어떻게 알곡이 어떻고’ 하면 누가 오겠습니까? 우리교회 이렇게 왔지만 왔다는 것이 이상스러워요. 수상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진짜 주님 살아 계신가 싶고,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신다는 이 말보다 더 막가는 말이 어디 있어요.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이야기해야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면 그것은 말 자체가 어폐가 있잖아요. 못하는 줄 알면서 하라는 이야기를 왜 하겠어요. 갓 두 살 먹은 애보고 대학시험에 나오는 수학문제 삼각함수를 풀라고 하면 이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성경책 자체가 뭐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네가 푸나 못 푸나?” “못 풉니다.” “못 푸니까 내가 풀어줄게.”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성경이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못 푸는 문제 와서 주님이 풀어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를 내 힘으로 풀어서 내 힘으로 천당 갔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 말입니다. 그게 우리의 속마음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옥 갈 쭉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안에 주님의 요소가 없고 인간들의 죄악 된 요소만 들어있기 때문에 쭉정이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목사로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참 난처해요. 여러분이 제 심정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난처해요. 케이블기독교방송 틀어보세요. 나오는 말이 한결같이 하나밖에 안 나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복 받는데 왜 복은 달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은 왜 안 하십니까? 하기만 하면 복을 주는데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니까 복을 못 받아서 가난하잖아요. 하라는 것을 하면 복을 받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했으니까 그 약속을 믿씁니다, 하고 믿으세요. 그러면 됩니다.’라는 이야기밖에는 안 해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납득이 되잖아요. ‘그래, 세상살이 바빠서 너무 교회에 소홀했어. 괜히 세상 너무 좋아했어. 어떻게 하면 좋아?’ 뿅! ‘교회충성?’ 이렇게 나오지요. 이제 교회 충성하겠다 이 말이지요. 이 일방적인 분류와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심판하는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출애굽기 19장을 보겠습니다.
5절부터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찾아왔습니다.
제 말 비판하지 말고 일단 듣기만 해 보세요. 비판은 나중에 제가 해줄 테니까, 여러분 비판은 제가 해줄 테니까 듣기만 하세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찾아오고 단군의 자손을 포함해서 모든 민족에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걸 두자로 우상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이라 할 때 다른 민족하고 비교해 봐야 그게 우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냥 여러 가지 신이고 다신이에요. 신들이 많은 거예요. 하지만 ‘저것이 우상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참된 신이 등장하는 경우에서만 그 참된 신과 다르기 때문에 저쪽은 우상이 되는 거예요. 너무나 일방적이지요.
참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독대해서 십계명 주면서 ‘너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라고 했을 경우에만 졸지에 단군의 자손들이 섬기는 우리의 신은 무슨 신을 섬기든지 착한신이든 나쁜 신이든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참된 하나님이 오셔서 ‘내가 언약을 줄 테니까 이 약속을 지키는 민족은 살고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불바다 된다.’ 일방적인 선언을 한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합시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될 인간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일정부분 약간이라도 그들의 의견을 들어서, 그래서 하나님도 좋아하고 인간들도 좋아하는, 다 같이 좋아하는 그런 하나님을 만들면 세계평화, 우주평화가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하신다면 그것은 우상에서 나온 겁니다.
제가 만약에 우상을 섬긴다면, 제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저는 이렇게 비판할 거예요. “여호와라는 신이시여, 인간 누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만들었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왜 사람을 만들어놓고 지옥을 보냅니까? 아예 만들지를 말지. 지옥 보낼 것 같으면 사람을 만들지를 말지 왜 만들어놓고 지옥을 보냅니까? 너무 횡포가 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내 맘 대로다. 왜!” “아니 그래놓고 어떻게 자비가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입니까?” “자비가 넘친다는 것은 네가 지어낸 하나님이고 너는 진짜 하나님을 못 만나 봐서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서 내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는 영원히 내 백성이 되고 내 소유가 되는데 그것 때문에 나는 온 세계가 내 손에 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발걸음 하는 것 안 믿는 사람들이 당구치는 것, 스케이팅 하는 것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 황하강의 파리 날개 짓 하나까지, 러시아의 어떤 아저씨가 꿈꾸는 것 까지 이 모든 것이 다 누구 손에 있다? 다 내손에 있기에 이 모든 것을 내가 주장하는 이유는 오직 내 언약, 내 약속,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약속, 영원한 내 소유가 되게 하는 약속, 이 약속을 증거 하기 위해서 안 믿는 사람들을 안 믿게 하고 믿는 자를 믿게 한다.”는 거예요.
“내가 일방적으로 주도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다. 이걸 네가 믿느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지금 제 설교를 끌어가는 핵심이 뭐냐 하면 어째서 하나님께서 쭉정이를 지옥 불에 넣느냐, 그 문제를 처음부터 다루고 있었던 거예요. 알곡을 천국에 넣는다는 그 이야기는 들어도 시답지가 않아요. 왜? 늘 상 들었던 소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천국 넣어준다.’ 그 이야기는 다 아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쭉정이는 지옥 불에 간다는 것, 그 쭉정이가 만약에 내 아들이라면, 내 딸이라면 이것은 문제 큰 문제 아닙니까? 언젠가 아이티에 지진 일어났을 때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났다. 누가 일으켰는가? 하나님이 일으켰다.
그런데 아이티사람들 가운데 성당 다니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다. 꼴좋다. 자기들이 사랑한다는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성당을 폭파시켜 버렸고 무너지게 했다.
그러면 이제는 무엇으로 사랑할래? 뭘 로 사랑할래? 사랑하기 위해서 성당 지었고 예배당 지었고, ‘이런 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큼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찬양과 영광과 감사를 돌렸던 그들을 향하여 지진을 일으켜서 콘크리트 더미를 무너지게 한 하나님인데 이제 뭘 로 사랑하지요? 사랑할 건더기가 있어야 사랑하지요. 뭘 로 사랑할까요?
‘주여,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는 것으로서 제대로 주님을 파악하게 됩니다.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고집이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사람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신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노선에, 만약 사자 같으면 자기노선에 사자가 있으면 사자를 죽이고 싶어요.
토끼가 가는데 다른 토끼가 있으면 죽이고 싶어요.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기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있으면 기분 더러워요. 그처럼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일방적인 자기노선만 있어요. 그 노선에 하나님이 있어도 안 되고 예수님이 있어도 장애가 되고 그저 내 앞길은 나만이 걸어갈 수 있는 대로가 훤하게 펼쳐져야 만족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깨지는가 하면 죽음이라는 것에 부딪힐 때입니다. 죽음이 앞길을 떡 하니 가로막고 있습니다. ‘비켜라, 죽음아! 나는 너를 죽일 거야.’ 그 나의 길을 막는 그 죽음을 죽이는 것이 모든 종교의 깊은 교리에 담겨 있는 보편성입니다. 죽음이 나를 가로막으니 그 죽음을 뛰어넘으면 나는 죽음마저 죽여 버리는 것이 돼요.
그러니까 결국 교회 오나 절에 가나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자기만 우뚝 서기 위해서 교회 나온 셈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바로 그 노선에 일방적으로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는 말씀을 지뢰처럼, 흙을 쌓아놓은 둔덕처럼 죽 두었다 이 말이지요.
두게 되면 내 쪽에서 그걸 보지 말고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서 그 말씀의 둔덕 쪽에서 보면 ‘아, 내가 저렇게 쭉정이였는데 나를 알곡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내안에 십자가라는 용서와 영생을 일방적으로 심어주었구나. 저걸 심지 않았다면 나는 지옥갈 수밖에 없었는데 내 안에 들어온 주님의 생명,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살았구나.’라는 것을 새롭게 기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지나온 노선이나 앞으로의 노선이나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실현되는 노선이 바로 우리가 가는 노선이 되는 겁니다. 이게 새로운 피조물의 노선입니다. ‘죽음아, 비켜라.’가 아니라 ‘주여,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죽어도 괜찮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전에는 내가 애써서 내가 노동해서 내가 애써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열심히 밤새워 공부해서 얻었던 직장, 학력 이런 것들이 말씀 쪽에서 보니까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 때 공부하고 애쓰고 수고했던 것들이 주님께서 주신 지혜와 밤샘하라고 힘 주셔서 공부했구나, 수능 치는 그때 아는 문제만 나왔었구나, 그 때 이 여자 만나서 결혼한 것도 뭔가 내 눈에 씌도록 만들었구나, 모든 것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범사에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주님의 말씀의 열매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이 아무리 흉내 내면서 교회 와서 발광을 해도 그런 것은 다 믿지 마시고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정말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예수의 흔적이, 어린양의 은혜가 각인되고 새겨져서 이것이 감사로 퍼지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는 말씀이 살아 있는 성도,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 남들이 흉내 내도 할 수 없는 것,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내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는 정말 납득하기 힘든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서 다 이루었는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지 다시 말씀을 보니 모든 것이 은혜인줄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이 약속이 우리 속에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그 약속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 때문에 구원된 것을 증거 하면서 내 힘으로 구원되었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