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5a 울산강의-출애굽기 9장
20100205a 울산강의-출애굽기 9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205a 울산강의-출애굽기 9장
(강의:이근호 목사)
지금 출애굽기 9장을 시작하는데 출애굽기 7장부터 12장까지 열 가지 재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렸다는 말을 하는데 왜 꼭 열 가지 재앙을 내려야 합니까? 그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가 하나님 섬기겠다고 내보내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느냐 이 말이죠.
제가 묻는 취지가 이겁니다. 어차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사대가 지나서 애굽 땅에서, 함의 땅에 빠져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이잖아요. 그런데 이 안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까, 안 들어있습니까? 안 들어 있잖아요. 이삭 언약에도 안 들어있죠. 야곱 언약에도 안 들어있다고. 그러면 약속대로 해야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도 약속을 지킨다고 주장을 하시면서 약속 내용에 없는 걸 추가하면 하나님이 결국 반칙을 한 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사대 만에 끄집어내어서 자기 본향에, 자기 약속의 땅에 가게 해준다. 지금 아브라함이 가려는 곳에 가준다는 약속 속에 뭐도 빠져 있느냐 하면, 광야를 거친다는 그것이 포함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그것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했으면 상세히 설계도면을 짜서 미리 다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자꾸 없는 요소를 가미해버리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그 다음부터는 신뢰도가 떨어지잖아요. 또 말씀도 안 하신 것이 여기에 삽입이 될지. 이래서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이야기해놓고 이야기 안 된 내용이 들어가게 될지 당황스럽게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완전히 믿는 것이 아니고 ‘일단 믿어볼까’ 하는 식 밖에 안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곤란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사대를 지나서 그리고 이 민족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여기 있던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이고 여기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 내리고 그 다음에 플러스 광야 통과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이 열 가지 재앙과 광야 이야기가 약속에 안 돼있지만 나중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 보니까 하나의 인간의 뭉쳐짐, 인간이 뭉쳐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면 필히 여기에 열 가지 재앙과 광야라는 것이 여기에 삽입되어야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러한 열 가지 재앙과 광야라는 이것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이 될 때 이 과정에 포함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열 가지 재앙 내용이 각색이 되어서 새로운 차원에서 그대로 다 주어지게 돼있어요.
저는 아직까지 열 가지 재앙이 왜 되느냐 말씀 안 드렸습니다. 지금 이쯤 되선 아직도 미궁이에요.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왜 내리느냐 말이죠.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바로한테 깜짝 놀라게 해서 예를 들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바로 왕과 언약의 사람, 아브라함과 만났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 왕이 사라를 취하려 하다가 취하지도 못하고 밤에 여호와가 나타나서 후다닥 겁이 나서 불러서 ‘사실은 네 동생이 아니고 네 마누라지. 내가 놀랄 뻔했잖아. 어서 나가라.’ 이렇게 했잖아요. 그게 무슨 열 가지 재앙이 있고 광야가 있습니까?
여기는 단 시간에 아주 짧게 애굽 왕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나올 때 풍성한 선물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밟았다고 나와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애굽의 히브리인들이 나올 때도 그런 식으로 나오면 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곧장 나갈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발걸음을 지체시킵니다. 어떻게 지체시키느냐 하면, 재앙이 내릴 때 분명히 바로 왕이 약속을 합니다. ‘내 보낼게.’라고 해놓고 갑자기 재앙이 끝났을 때 바로의 마음이 업그레이드되죠. 그걸 성경대로 하면 강퍅케 하죠. 강퍅케 되서 방금 보낸다 해놓고 말립니다. ‘안돼. 안 보내줘.’ 이렇게 한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묻는 초점이 그겁니다. 보낼 사람 빨리 보내지 왜 그렇게 하느냐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융기, ‘융기’란 말은 떠오르는 거죠. 이스라엘의 부각되고 융기, 떠오르는 동시에 애굽 나라도 그 실체가 이스라엘이 점점 더 실체화 되는 것과 비례해서 병행해서 애굽 나라가 품고 있던 그 악한 실체도 같이 떠올라줘야 이게 하나님의 아브라함 언약에 담겨있는 내용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냥 후다닥 보내버리면 초점이 카메라가 어디 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약속의 땅에 있는 거기에 초점이 있지만 정작 애굽의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 훌쩍 보내버리면 무슨 정체는 여전히 미궁에 빠지느냐 하면, 애굽 나라가 과연 나쁠까? 그들이 선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히브리인들이 떠나왔던 애굽 나라 그 자리, 그들이 살았던 그 자리가 별로 나쁘지 않았던 자리네.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네. 하나님이 와서 보내라 하니까 보내는 것 보니까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식이 된다 이 말이죠.
방금 이야기한 것이 제가 초점을 의도적으로 비껴갔어요. 왜냐하면 이 다음 말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적어 볼게요. [진리란 끝에 서야 알 수 있다.] 진리라 하는 것은 제일 역사 끝에 서서 볼 때는 앞에 있는 진리의 내막이 다 드러납니다. 항상 그래요. 첫 번째. 두 번째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끝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이것도 맞지요. 천국과 지옥이니까.
세 번째가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해야 될 거예요. 이 끝이 역사의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역사의 끝이 아니고, 이 끝이 바로 지금 히브리인들 인도하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에, 역사라 하는 것은 수평적이니까, 살아봐야 아니까. 역사의 끝으로 보는 것은 유명한 신학자, 판넨베르그가 주장한 거예요. ‘누가 알아? 다 살아봐야 알지. 그런데 뭐 예수님 십자가 했다고 주장하느냐? 사도 바울도 몰라. 역사 안 살아봐서 몰라.’ 이렇게 주장한다 말이죠. 왜? 역사 끝은 아직 남아있다고 보니까. 끝이 안 됐는지 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잘못 된 것이고 끝이 역사의 끝이 아니고 바로 언약이 작용하는 그 위치가 바로 그것이 끝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달그림자 있잖아요. 달그림자 할 때 위에는 뭐가 있습니까? 달이 있지요. 그러면 달그림자의 진짜 원형을 찾기 위해서 산을 몇 개 넘어야 돼요? 산을 몇 개 넘어도 소용없지요. 스무 개 넘을까요? 서른 개 넘으면 달 보입니까? 아니죠. 달그림자 있는 그곳에 쳐다보면 거기에 달이 있잖아요. 그게 바로 언약의 위치에요. 그게 끝의 위치에요. 언약이 끝을 품고 있는 겁니다.
일 번, 이 번, 삼 번을 삼 번에서 거꾸로 올라가겠습니다. 역사의 끝이 끝이 아니라 언약이 마지막 끝이다. 그렇다면 언약이 작용하는 곳에 반드시 두 갈래 길이 생겨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강의할 것이 뭐냐 하면, 첫 번째 피, 두 번째가 개구리, 세 번째가 이, 네 번째가 파리, 다섯 번째가 오늘 본문에 공부할 악질이고, 그 다음에 독종이고, 그 다음에 우박,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메뚜기, 그 다음에 흑암, 열 가지 재앙 마지막 장자 죽음. 다 의미가 있어요. 오늘 주제가 재앙의 의미를 밝히는 겁니다.
어서 오세요. 멀리서 오셨네. 머리 부산서 오면 다시 해야 되는데. 다시 한다 해놓고 다시 하질 않아요.
악질 재앙부터 무슨 이야기 나오느냐 하면, 네 번째부터 하나님께서 애굽 사는 동네는 재앙을 내렸으나 히브리인들이 사는 곳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고, 구별하셨다고 돼있어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합니다. 진리는 끝에서 알 수 있다 했지요. 일 번에서. 끝에는 두 갈래 길, 하나는 천국과 지옥이다. 두 갈래로 생각하면 마치 역사 끝을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세 번째 뭡니까? 역사 끝이 아니고 뭐가 끝이다? 바로 달그림자와 달 사이처럼 우리 머리 위에 지금도 끝이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끝이 작용하는 것은 반드시 어떻게 된다? 두 갈래 길이 있다. 이 두 갈래 길을 방금 제가 적었던 ‘구별’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 될 자와 백성 안 될 자를 구별을 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히브리인들 입장에선 빨리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게 최고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이 애간장을 다 녹여. 조마조마하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탈출을 의도적으로 자꾸 지체시키면서 뭘 그들에게 뉘앙스를 심어주느냐 하면, 너희들이 직접 보란 말이죠. 뭘 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재앙이 뭔가 노리고 하는 재앙이에요. 한쪽은 재앙이 오고, 한쪽은 안 오고. 한쪽은 우박이 오고, 한쪽은 우박이 안 온다는 겁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신기한 일이냐 하면, 해는 뜨는데 한쪽은 저녁이고 한쪽은 낮이 되는 그 정도로 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기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재앙이 그대로 기적을 이루는데 요한계시록에서 기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별해주심’ 그게 기적이에요. 생명책과 기록된 자와 짐승의 인을 맞은 사람과 이마에 어린양의 인이 있는 사람과의 아주 날카로운, 그걸 요새 말로 엣지있는, 날카로운 그 구분 작업을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해서 그 작업이 이뤄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도 입장에서 빨리 승부 내버리고 재앙도 귀찮고 빨리 주께서 구름 타고 오시면 좋겠지요. 이것은 마치 열 가지 재앙 속에 있는 히브리인들 심정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 빨리 끝내버립시다. 강퍅케 하지 마시고 그냥 보내라 하고, 오고 그럽시다. 우리 사는 게 급선무지 저들은 내버려두고 그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내버린 자식인데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구원하는데 신경 써달라.’ 우린 이렇게 요구한다 말이죠.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저쪽도 되게 신경 쓰는 거예요. 버림 받은 사람들.
왜? 두 갈래 길을 걸을 때 두 갈래가 우리 성도 의견을 참작해서 또는 성도의 뜻을 참작해서 두 갈래가 아닙니다. 두 갈래 할 때 두 갈래는 예수님의 어린양의 속성 때문에 두 갈래 길인데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두 갈래인 줄 생각 안 하고 자꾸 자기 구원받았다고 예수님 입장이 아니고 자기 입장 주장해서 ‘보내려면 빨리 보내소서. 이 세상 살기 힘든데 제대시키소.’ 자꾸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기의 예수님은 뭐로 표현됩니까? 어린양으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두 갈래냐를 알아야 해요. 그런데 열 가지 재앙 되기 전까지는 누구 때문이라고 오해합니까? 우리 히브리인들 구원하려고. 아브라함 언약이 누굴 겨냥한다? 애굽에서 고생하는 우리를 겨냥한다는 거예요. 그것 완전히 오산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린양 겨냥해요.
요새 말하면 모든 언약은 예수님을 겨냥하는데 교인들이냐 성도는 뭘 오해하느냐 하면, 날 위해서 언약이 있다는 거예요. 날 위해서 아브라함 언약 있고, 날 위해서 이삭 언약 있다는 거예요. 이 오해 풀려면 창세기부터 다시 해야 됩니다. 지금 창세기 울산서 강의한 것, 그게 분량이 엄청 된다는 거예요. 교정 볼 사람이 없어요. 전부다 나자빠졌어요. 그래서 계속 하나님이 지연되고 있어요. 지체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언약 중심이기 때문에 창세기 책 내는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맡으면 좋겠습니다만 지금 맡을 사람이 없어요.
재앙을 내리니까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는 재앙이 없고 애굽 사람들 재앙이 오니까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역시 우리는 훌륭해, 우리는 괜찮아.’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마지막 재앙에서 다른 앞에 있는 아홉 가지 재앙들은 그냥 히브리인들이 구원받을 자들이 가만있으면 재앙이 안 와요.
그런데 마지막 열 가지 재앙에서는 히브리인들이 뭘 해야 됩니다. 가만있으면 죽어요. 가만있으면 애굽 땅에서 떠나지 못해. 뭘 해야 됩니까? 히브리인들이나 애굽인들이나 구원받으려면 아홉 가지 재앙을 견뎠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아홉 가지 재앙에서 살아남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뭘 해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린양에 대해서 뭔가 고백을 해야 돼요. 진짜 우리에게 하나님이 관심 두는 분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가 종속돼야 되고, 우리가 예속돼야 될 다른 분을 겨냥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언약을 맺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히브리인들 찾아와서 ‘혹시 여호와 찾는 가정입니까?’ 예. ‘그렇구나. 그러면 통과할게요.’ 이랬습니까? 안 그러지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지요. 죽음의 사자가 누구하고 대화하고 가버립니까? 바로 대문짝에 발린 피지요. 십자가 핍니다. 히브리서 보면 피를 보고 넘어가요. 히브리인들도 오해했고, 애굽 사람들도 너무너무 오해한 거예요.
이게 어느 정도로 열 가지 재앙이 어려우냐 하면, 어려운 용어 하나 쓸게요. 바로 왕은 ‘보편적 단독성’이라 합니다. 말 재미있지요. 단독성은 몇 명입니까? 하나지요. 보편성이라 하면 뒤에 뭔가 우르르 끌고 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르르 끌고 오면서 하나님과 맞닥뜨리는 것은 한 명이잖아요. 이쪽에 두 갈래 길이 있죠. 이쪽의 대표자가 애굽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왕이 계속해서 부각돼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이 재앙 받는 것이 애굽 백성들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보편적 단독성, 바로의 마음 강퍅했기 때문에 재앙이 계속 오는 거예요. 보편적 단독성이 두 갈래 길에서 한 갈래 길을 차지한다면 이 앞에 보편적 단독성은 누굽니까? 모세도 아니고 아론도 아니에요. 바로 어린양이에요. 예수님이 보편적 단독성이 되는 겁니다.
보편적 단독성이 되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이름이 두 개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작용하면서 다른 사람이 그 이름에 전부다 복속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어렵다. 말 다시 할게요. 두 개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이 두 개 이름 중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하나의 이름으로 보편적 단독성으로 기능하면서 그 하나의 이름 때문에 두 개의 이름 중에서 나머지 이름에 해당되는 사람이 그 하나의 이름이 하나님과 만나는 그런 접촉점 때문에 혜택을 입는 걸 보편적 단독성이라.
예수님 이름이 뭐지요? 나사렛 예수지요. 마태복음에 나오잖아요.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님 본인은 자기를 인자라 하죠. 이름이 몇 개입니까? 지상의 이름은 예수고, 하늘의 이름은 묵시적 이름은 인자요. 다니엘 이름이 몇 개입니까? 땅의 이름은 다니엘이고, 하나님이 다니엘이라 부릅니까? ‘인자야’ 부르죠. 바로 두 개의 이름을 짓는데 그 인자가 오실 메시아의 기능을 다니엘이 해주는 거예요.
그걸 제가 2월 27일 날 서울에서 개혁주의 논문 발표할 때 저하고 두 사람이 논문 발표합니다. 정하졌습니다만 제가 논문 쓸 때 이걸 ‘탄력적 주체성’ 탄력적이란 말은 공처럼 늘어나고 줄었다 하죠. 이게 뭐냐 하면, 성도 자체가 예수님이 남들 보기에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레미야 아닙니까. 선지자 중에 한 사람. 분명히 그렇게 보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메시아죠. 탄력적이 돼야 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굴뚝 안에 계단이 있고 창문이 있다 합시다. 밑에 출입구 있고. 이 창문 보려면 이 밑에 입구 들어와서 창문 봐야 되겠지요. 밑에 입구 들어오는 것은 나사렛 예수, 위에 창문 보는 것은 인자로. 예수 안에서 죄인으로 들어와서 십자가 피 받고 나갈 때는 피로 말미암아 하얀 옷을 입지요. 나올 때는 의인으로 나오죠.
이걸 조직신학에서 몰라서 육과 영혼으로 따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틀렸어요. 육과 영혼이 아니라 두 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탄력적 주체라 했죠. 탄력적 주체성에 있어서 역사로 와서 묵시로 구원받는 거예요. 역사로서는 죽은 자요 묵시로서는 산 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 그러면 우리 성도의 주체는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탄력적 주체에요.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자로 만들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이 탄력적 주체성에서는 여기에 묵시적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역사와 상관없어요. 제가 물어보겠어요. 변화산에서 모세가 나타났고, 엘리야가 나타났잖아요. 그때 그분들 나이가 몇 살이죠? 묵시에서는 나이를 묻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몇 살까지 사셨어요? 서른두 살, 서른세 살 아닙니까. 묵시세계에서는 나이를 묻는 게 아니에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었지요. 죽었다 살아나고 또 죽었잖아요. 지금 연세가 우에 됩니까? 묻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역사 속에 아담은 구백 몇 살이고, 므두셀라는 제일 오래 살고.
여러분, 끝이 우리 머리 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인생 구십, 팔십이 끝이 아니고 우리 머리 위에 끝이기 때문에 지금 죽으면 낙원에 갑니다. 왜냐하면 묵시가 위에서부터 우리는 달그림자고 달은 거기에 계시고.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리의 생명은 여기 있는 것 같은데 우리의 생명은 땅에 없고 하늘에 간직된 바 있어요.
영화에 보면 은행에 비밀금고 있지요. 납작한. 부호들, 마피아들. 다이아몬드 넣고 있잖아요. 거기에 아무나 못 들어가고 육중한 문 열고 열쇠로 열고 은행 깊숙한 곳에 들어가잖아요. 그때 서랍들 하나씩 있지요. 하늘나라에 최 장로님 이름 있거든 열어보세요. 거기에 최 장로님 생명이 있어요. 그게 생명책이에요. 명단이 있어요. 정 살기 싫거든 가끔 가서 열쇠 달라 해서 열어보세요. 그러면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처럼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미 너희는 땅에서 죽었고. 지금 공장에 일하는 사람 이 이야기 못 듣습니다. 참석을 해야 듣는 거죠. 장로님 공장에 아직 퇴근을 안 하신 모양
사람들은 나의 인생 끝, 역사 끝 자꾸 끝을 바라봐요. 머리 위에 있는 걸 모르고. 자기 주체가, 인간에게 두 개의 이름이 있어요. 하나의 이름은 저 같으면 이근호에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은 흰 돌 위에 선 이름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의 것이란 이름이에요. 크리스천이죠. 인자의 이름이 우리 이름을 대신하는 거예요. 왜? 이미 죽은 자는 이름이 필요 없잖아요. 우리 안에 살아있는 분이 우리 이름을 대신해야죠.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행세를 해야 되고, 행세뿐만 아니고 그게 실제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이 후딱 지나가는, ‘목사님 열 가지 재앙 후딱 지나갑시다.’ 후딱 지나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또 반복 되니까. 열 가지 재앙은 우리로 하여금 초점이 히브리인들이 구원받는 게 초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모든 것의 진리의 끝이 있다 했지요. 세 번째 안 해도 되지요. 진리의 끝이 앞으로 오는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한다? 분류시키고,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히브리인들만 성도만 신경 쓰는 게 아니고 성도를 붙잡고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그 정체가 드러나는데 그것을 보편적 단독성.
그러니까 바로 왕을 뭐로 사용하는 거예요? 어린양에 대비되는 어린양과 대조가 되는 보편적 단독성으로 세우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왕은 결국 이름이 몇 개입니까? 자기는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는 악마의 종이라는 또 하나의 기능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본인은 그걸 인정하지 않지요. ‘히브리인들 내보낼 때 후딱 내보낼 걸. 괜히 열 가지 매를 맞았네. 그것 참.’
그러니까 바로 왕은 자기의 적이 누구라고 아느냐 하면, 피를 흘린 어린양으로 보지 않고 그 어린양한테 구원받는 히브리인들을 자기들의 원수로 생각해서 나중에 홍해 갈라지기 직전에 그들은 말 타고 군대들을 보내서, ‘잡아라. 저놈들. 이 나라의 권력밖에 벗어나는 걸 용서치 말라.’ 하고 따라오잖아요. 그들 눈에는 뭐가 안 보입니까? 그들은 히브리인들이 잘나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성의와 열성 때문에 구원받는 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그게 아님을 알지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히브리인들이 그냥 아홉 가지 재앙 받을 때처럼 가만있다가 ‘우박 떨어져? 안 떨어져. 흑암 내려져? 우린 안 내려져. 그럼 가만있으면 마지막에 우린 나오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열 가지 재앙에서는 그게 안 되지요. 결국 뭡니까?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구원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잖아요.
보편적 단독성 되는 바로 왕은 어린양의 피 효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뭐만 보이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엉뚱하게 본인들도 희한하게 구원받은 히브리인들, 이스라엘 그 사람을 자기 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퀴즈 하나 낼게요. 앞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악한 보편적 단독성으로부터 자기들이 구원이 계속 되려면 그들은 무서운 세상, 짐승 같은 적을 의식해야 됩니까? 아니면 구원받은 자기 의를 의식해야 됩니까? 아니면 출애굽 했을 때 어린양을 늘 생각해야 됩니까? 어린양이죠. 그 어린양을 회상하라고 해서 앞으로 매일같이 아침저녁마다 제사를 드려야 돼요. 그리고 양푼으로 백성들 위에 피를 확 뿌려야 돼요. 양을 잡고, 소를 잡고 피를 뿌려야 됩니다. 하나님은 피하고 이야기하지 인간하고 이야기 안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끝은 구원받은 사람은 훌륭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도 구원 안 받은 사람하고 똑같아요. 별 장점도 없고 더 훌륭한 사람도 아니에요. 신명기 7장에 나오죠. 너희들을 구원함은 너희들 의가 나아서 구원한 게 아니고 너희들은 아예 교만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다. 하지만 너희들 속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너희들을 구원한다.
제가 여러 번 예를 든 건데 울산 분들은 잘 안 들은 것 같아서 해보겠습니다. 밀수할 때 전화번호부, 실제로 안 봤지만 영화에 보면 나와요. 전화번호부 파서 권총도 숨기고, 비아그라도 숨기고, 마리화나도 숨기고 들어오잖아요. 이게 바로 우리 몸이 두꺼운 전화번호부라면 하나님께서 구멍을 파고,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요소를 담아버려요. 언약의 대상을 심어버린다고. 쉽게 말해서 이 안에 예수님 계신다 이 말입니다.
지금 어린양은 묵시에 속하지요. 묵시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지요. 그렇다면 어린양의 묵시가 내렸던 흔적은 있을 것 아닙니까. 유월절 이후에 흔적이 제사로 바뀌었지요. 그렇다면 이 제사가 각자 이스라엘 속에 있어줘야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전화번호부 바깥을 죄라 하고 안에 계신 분을 의라면, 우리가 의인되는 것은 뭐 때문에 의인되는 겁니까? 바깥에 죄 져서 의인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반성해서 의인되는 겁니까, 회개해서 의인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안에 누가 계시기 때문에? 의인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용기고 그릇이잖아요. 우리가 담는 그릇, 매개체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연합인데 연합을 세례라 하거든요. 세례 받고 난 뒤에 전에는 우리 안에 죄를 모셨는데 이제는 의인된 주님을 모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부터 죄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이죠. 이거는 묵시적이기 때문에 시간의 흘러감과 상관없죠. 그런데 보통 개혁주의신학은 뭐라고 합니까? 이제부터 의의 종이기 때문에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한 일하자. 착한 일하면 이건 묵시적이 아니고 역사적이 되서 이거는 그런 식의 논리라면 끝에 가봐야 알아요. 오십 세 살까지 잘 믿었다가 육십 네 살 때 안 믿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러면 그걸 오십 대에 미리 알았다면, 주여. 지금 제가 오십 다섯인데 계속 예수 잘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 일곱 때 주께서 안 믿게 하려고? 오십 일곱 때 안 믿게 한다면 난 미리 안 믿는다. 이렇게 나올 수 있죠. 육십 두 살 때 내 믿음 회수해가려고? 가려하면 지금 가라 하소. 괜치 육십년 동안 고생시키지 말고. 이래 된다니까.
관심사가 뭡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에 관심 없고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묵시는 생각 못하고 만날 역사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개혁주의신학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쓴 논문, 열네 번 고쳤거든요. 그 논문에 보면 이렇게 나왔어요. 악마가 계속해서 역사로 구원받으라고 유입을 시키고 있다. 결론부분에 그랬어요. 느부갓네살이 하나의 우상을 섬겼잖아요.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이죠. 요한계시록에 가보세요. 이 바벨론이 없어집니까? 요한계시록 17장, 19장 없어집니까? 아니죠. 거기 보면, 큰 성 바벨론 계속 가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바벨론 제국이 B.C. 500년경이고 지금 2500년 지났지요. 지나도 소용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달그림자 있는데 달 찾으려면 산을 몇 개 넘어야 됩니까? 산을 천 개 넘어도 소용없습니다. 달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 머리 위에 있잖아요. 우리의 끝이 역사 끝에 있는 게 아니고 머리 위에 끝이에요. 거기서 항상 어떤 작업을 한다? 두 부류로 갈라내는 작업을 하는데 그 갈라내는 기준이 우리의 착함입니까, 열심입니까? 아니죠.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겠다는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 은혜 주지 않을 사람에게 은혜 안 주겠다는 것. 그걸 로마서에서는 강퍅이죠. 계속해서 강퍅케 할 사람은 강퍅케 하고, 은혜 줄 자에게는 은혜를 주겠다는 것은 순전히 우리 예수님 소관이죠. 그 예수님이 우리 머리 위에 작용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면 수시로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나의 열심과 나의 착했을까, 악했을까 그것 쳐다보지 말고, 성령을 받게 되면 착함과 악함과 전혀 상관없이 주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로 구원받는데 그 은혜의 제일 마지막 장면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는 바로 어린양의 피로 들어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냥 들어오지 않고 피로 들어오느냐 하면,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상 자체가 더욱더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악함이 가해자가 돼야 되고, 우리 속에 들어오신 그분은 가해자로부터 피해를 보는 피해자가 될 때 악은 절정에 이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죠. 12장에 아들 보내고 마지막에 짐승들이 포진을 하죠. 누구와 싸웁니까? 여자의 남은 자들과 싸우죠. 그러니까 바로라는 악마의 입장에서는 아들은 떠나버리고 어린양은 구름 타고 갔으니까 누굴 자꾸 붙들고 시비를 거느냐 하면, 여자의 남은 자 된 우리를 붙들고 ‘네가 착해서 구원받았지. 행함으로 구원받지.’ 온갖 소리 다 하는 거예요. 우리는 또 그런가 싶어서 착한 일 한다고 어떻게 봉사하다가 지 말에 지가 삐져서 ‘참석 안 해.’ 했다가 또 다시 ‘참석은 해줘야지.’ 양심이 있는데. 자기 양심 팔다가. 세상에 양심 팔아서 구원받는 게 어디 있습니까.
바로 이렇게 우리 안에 이러한 언약이 예수님이 들어왔다는 증거가 우리 자신을 볼 때 탄력적인 주체성을 느끼는 겁니다. 어떤 때는 죄인 됐다가, 어떤 때는 의인 된 걸 믿었다가, 어떤 때는 천하에 죄인될 걸 알다가, 어떤 때는 나 잘난 척하다가 그것이 바로 죄인 걸 깨달았다가 하는 번잡한 갈등은 오직 묵시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지금 울산에 있는 많은 분들, 보편적 단독성을 본받은 그게 부러워서 정주영 이런 사람이 부러워서.
아까 보편적 단독성이 뭐라 합니까? 앞에 나설 때는 하나지만 그 뒤에 줄줄 따라오지요. 그걸 한 마디로 ‘힘’이라 해요. 세상 힘이죠. 그래서 보편적 단독성 바로가 강퍅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은 바로를 비롯해서 바로가 대표하고 있는 애굽 사람들 지역에 재앙들이 우르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힘은 어디에 작용하는지 그것 설명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힘이 작용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육입니다. 피곤하시겠지만 약간 어려운 걸 할 테니까 한 5분만 견뎌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신체는 물질이죠. 이 물질과 물질의 교류, 세포와 세포의 만남에서 아우라라 할까요, 어떤 후광이라 할까요, 여기 잉여, 여분의 힘이 쏟아져 나와요. 이걸 동양철학에서는 기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육이 뽑아내는 그냥 권력, 쉽게 합시다. 힘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존 신학에서는 이걸 정신이라 하고 이걸 영혼이라 합니다. 정신과 영혼은 한 마디로 말해서 육체가 뿜어내는 힘의 영역을 말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내가 배고프다. 육체지요. 밥이 들어갔습니다. 물질이죠. 같은 물질이고 육체도 물질이고. 물질과 물질인데 기분 좋죠. 몇 가락 기분 좋은 게 나옵니까? 기분 좋다는 건 뭐예요? 기분 좋다는 그런 물질 있습니까? 시장 가면 기분 좋은 것 팝니까? 안 팔지요.
이건 뭐냐 하면, 물체와 물질이 만들어낸 양상이죠. 기분 좋아서 성금내고 헌금 낸다. 이건 그 사람이 뿜어내는 힘이 되는 거예요. 이 힘에서 나오는 게 바로 언어가 되고, 여기서 어떤 힘이 집결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부부가 맞대고 잠을 자도 꿈은 다르죠. 그런데 자식이 좋은 대학 갔다. 부부가 다같이 하나가 되어서 좋아하죠. 보세요. 육체는 달라도 뭐가 있다? 아까 그걸 뭐라고 했는가? 보편적인 관심사가 있는데, 애가 좋은 대학가면 왜 좋습니까? 내 신체가 은근히 기대했던 그 힘에 보편성이 공통점에 내 자식이 한 몫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놈아. 이제 너는 좋은 대학 갔으니까 이 부모처럼 고생 안 할 거야.’ 이 말은 뭐냐? ‘평소에 나도 좋은 대학 나왔으면 이 고생 안 할 걸’이 이미 있었지요. 이 결핍과 모자람을 보충하기 위해서 자식만큼은 공부 잘해서 나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열심히 키웠잖아요. 그 가정의 보편적 단독성이 누굽니까? 아버지고. 사실은 배후에서 아버지보다 더 센 사람, 엄마죠. 실질적 보편적 단독성.
어쨌든 간에 온 가족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힘을 얻는데 그 힘의 모델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고, 사법고시 수석합격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온 나라가 각자 신체는 따로 놀아도 한 사람은 키 작고, 키 크고 다 달라도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은 하나가 될 수 있죠. 이해하시겠어요. 세포는 달라요. 같이 데이트해도 딴 몸이에요. 너는 짬뽕 좋아하고 나는 짜장면 좋아하고. 그런데 한국축구가 4강 들어가려면 어떻게 됩니까? ‘꿈☆이루어진다’ 누가 시킨 게 아닙니다. 다 하게 되는 거예요.
더 쉬운 예로 서울서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만 여러분, 간절한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난 간절한 기도한 사람 보질 못했는데. 자기 딴엔 간절한 기도하는데 휴대폰이 울렸어요. ‘예. 조금 기다리세요. 곧 끝납니다.’ 세상에 기도하면서 전화벨 소리 다 받고 하는 게 간절한 기도입니까. 우리교회는 더 해요. 예배시간에. ‘예. 알겠습니다.’
간절한 기도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딱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인자되시는 분. 그분은 땀이 핏방울 됐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뒤비자고 있죠. 세 사람. 겟세마네 기도에서. 그래서 서울강의에서 결정적 이야기했어요. 주님이 낮아졌다 했거든요. 주님이 낮아졌다하는데 그걸 목사들이, ‘주님이 낮아졌으니까 여러분도 낮아지라’ 하는데 둘 다 낮아지면 주님이 안 낮아져 보여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낮게 하니까 자기도 미안해서 같이 낮아진 거예요. 그러면 주님하고 자기가 동등이라. 주님이 낮아지면 우리는 키다리 돼야 돼요. 건방져야 됩니다. 이렇게 건방지니까 낮아졌구나. 이렇게 돼야 주님이 주님이지, ‘당신만 낮아져? 나도 낮아져.’ 그러면 안 돼요.
우리는 항상 기도를 해도 뭘 해도 바로 왕이 사모하고 있는 추구하고 있는 내 신체에서 나오는 힘인데 그 힘은 들뢰즈는 그걸 욕망이라 해요. 성경에서 야고보에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그 욕심의 DNA를 누구한테 받았어요? 아담한테 받았잖아요. 아담만 받았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니까 아담이 죄의 지배를 받으니까 우리는 그대로 죄의 지배를 똑같이 받는 거예요. 이 신체가 신체만 따로 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신체 뒤에 죄의 힘이 우리를 포진해서 덩달아 같이 와요. 마치 그림자 같아. 죄의 힘이 우리를 누르면서 오는 거예요.
그걸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세간이에요. 가구. 우리는 마귀한테 잡혀있는 가구인데 어떤 도둑놈이 와서 주인님을 꽁꽁 묶어놓고 마귀한테 있던 세간인 우리를 주님이 가져갈 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주님은 보편적 단독성으로 상대해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세상이 부러워라. 정말 재물이 부러워라. 우리는 때려죽었다 깨나도 세상이 부러워요. 예수 잘 믿어서 세상 것 얻고 싶어요. 교회 다니는 이유도 뭡니까? 세상 힘을 추가적으로 얻고 싶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교만한 우리를 위해서 저 밑바닥에 주께서 어린양으로 오신 거예요. 오셔서 주님께서 우리 전화번호부 안에 중앙지에다 구멍을 파고 거기에다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담았지요.
밀수하는 걸 숨기는 걸 ‘은닉’이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걸 ‘비밀’이라 합니다. 너희들은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다. 어디에? 전에 죄에 지배하던 그 자리에, 우리 바깥은 역시 죄져요. 죄가 지배했던 중앙 자리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경륜의 비밀 또는 비밀의 경륜, 복음의 비밀이 여기에 담겨 있으니까 이제는 죄는 실컷 짓는데 이상스럽게 그 복음이 생각나면서 우리가 복음을 운반하는 운반체라는 것, 아바타죠. 우리는 복음의 아바타에요. 신종용어 나온다. 복음을 바깥으로 보여주는 아바타에요. 하나의 아이콘, 상징 운반체에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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