삯꾼목자와 선한목자와의 차이
삯꾼목자와 선한목자와의 차이
이름 : 김대식(IP:124.59.86.9)
삯꾼 목자(거짓 선지자)와 선한 목자와의 차이
뭐든지 차이가 드러나면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쉽다.
(만약 비스무리하면 헷갈린다.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귀의 작전은 뭐고, 그 마귀의 작전과 차이나는 예수님의 작전은 뭔가?)
너무 너무 쉽다. 복음 보다 쉬운게 없다.
피가 모든 실상을 차이성으로 허상을 동원하여서 증거했기 때문이다.
왜 천국을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시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는가 그렇게 차이성을 부곽 시키는 것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예수님은 참으로 천진난만하게 말씀하신다.
(마 11:25, 개정)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왜 천진난만하다 라고 내가 표현하는고 하니? 딱 맞아 죽을 소리를 골라 했다 라는 생각에서이다. 어떤 목사도 이런 소리 못한다. (천진난만한 유일한 분이다. 하늘에서 난 유일한 분이다. 딴 사람은 땅에서 난 자요. 알 턱이 없다.)
(마 11:26, 개정)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정)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침 식사 중에 어머니가 티비를 보다가 동물들이 나오는 화면을 보고 물으신다.
왜 동물들은 항상 윗대가리가 있는지 참 신기하다?
왜 있는줄 아니? 그건 말이지 왕질 ...
성질 급한 내가 말을 딱 짤라먹고 까먹기 전에 내질러버렸다.
그것은요?
예수님이 왜 선한목자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그 증거에 동원되는 소모품입니다.
어무이!!
왜 광야에서 동물들이 항상 떠돌이 하다가 강을 건널 때 꼭 악어들이 일부러 기다리고 있는 곳에 왜 가는 줄 아십니까?
여기서 삯꾼 목자와 선한 목자의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진짜 목자는 (윗대가리- 경상도이라서 정감있는 표현이지 욕이 아님) 자기 백성을 일부러 악어(죽음) 있는 곳만 골라 다니면서 강을 건너고 통과 합니다.
왜냐하면 악어 저거 아무것도 아니고 죽음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는(허상)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짜 목자입니다.
그런데 아주 아주 재미있게도 가짜 목자인 삯꾼 목자는 항상 악어(죽음) 없는 곳으로 골라 골라 갑니다.
어무이 !! 여기서 아주 중요합니다.
가짜 목자 가짜 부모 가짜 선지자가 악어(죽음=심판=저주) 없는 곳으로 백성을 몰고가는 이유는 백성을 디기 디기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등쳐먹기 위해서 자신이 악어임을 감추기 위한 겁니다.
반대로 선한 목자와 참선지자는 심판 있는 곳으로만 몰고갑니다. 죽어도 상관 없는 죽음이 묻지 않는 약속이 우리 속에 있는지 없는지 오히려 가려내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약속이 발린 자는 처음부터 죽음과 상관없기에 약속이 그 사람을 다루고 있고, 약속이라는 피가 발리지 않은 자는 처음부터 탈락이기에 탈락을 더더욱 구체화 시키기 위해서 죽음으로만 몰고갑니다. 그게 어제 설교 세례요한와 회개에 대한 이야기 잖아요.
(참부모란 죽음으로 몰아가는 자이다. 그 부모를 존경하라고 했다. 예수님의 심판의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는 부모는 반드시 그 반대로 너는 잘되어야 돼 살아야 돼 라고 죽음만 피해 피해 자식을 몰고가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미 죽어 있는 상태다. 디아더스. 그러니 아브라함이 얼떨껼에 믿음의 조상 된 것이다. 자기가 부모 노릇을 해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난 미래의 사건이 덮쳤기 때문이다.십자가죠 십자가)
사실 수요일 설교 축복 개념도 그런 의미이고 어제 학생회설교에서 나온 부모 개념도 그런 의미입니다.
섬기는 목자는 그 섬김이 자꾸 죽을 곳으로만 몰고간다는 것 곧 심판입니다.
반대로 등쳐먹는 삯꾼 목자는 심판만 피해 반대로 구원받을 만한 곳으로만 인도 합니다.
등쳐먹기위한 돈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매일 욕 얻어먹어가면서 맨날 맨날 죽을 곳으로만 인도 잘하다가
갑자기 막판에 바위를 한 번 쳐야할 것을 두 번 치는 이유는
하도 하도 답답해서
이래도 안 믿을끼가? 확실하게 믿을수 있는 근거를 주마 하고 믿게해줄려고 과거의 경험을 끌여다가 기적을 보여줍니다. 빈자리에 덥석 앉은 거죠.
그래서 옳치 옳치 주님께서 인간의 한계성이 바로 이것이고 인간에게서는 섬김이 있을 수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탈락 시키는 겁니다.
비록 탈락해도 율법을 쥔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기에 구원하고는 상관 없고 그 역할을 하시는 겁니다. 그 당시로는 모세가 구원인지 모르죠.
모든 권한은 예수님에 달린 것이니까요.
아무튼 율법을 쥔 인간의 완악성을 바로 예수님의 섬김과의 차이성에서도 좋은 예를 들어준 겁니다.
아무튼 삯꾼 목자는 어린아이도 알아볼수 있습니다.
말로는 분명히 섬깁니다.
그러나 때려죽어도 백성을 심판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어그러진 길 (예레미야 14:10-12)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48강-렘14장10-12(어그러진길)-jer100203.hwp ]
물 속으로 집어 넣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아니라, 세례식 장난만 칩니다)
반대로 구원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구원은 없고 정작 구원장사로 돈 쳐먹죠.
또 반대로 물 속이 아니라 물 밖으로 끄집어 내 놓고 오히려 평생 코 끼이도록 만들어 종으로 부려먹습니다. (그들의 유아세례와 노아방주를 교회라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그러함)
그러나 선한 목자는 아예 본인이 본을 먼저 보여줍니다. 악어 중앙으로 통과 합니다. 죽을수도 있는게 아니라 먼저 일빠다 일번 타자로 죽습니다. 이래 죽으래이 라고 말이죠.
그러면 또 반발하죠. 이단사상 중에 집단자살로 구원을 이룰려고 했는 사건들을 예를들면서 도리어 이단이다고 거짓선지자다 라고 공격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집단자살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죽음으로 사적인 구원챙길려는 개인의 욕망일 뿐이고
여기서 말하는 심판 곧 개인 죽음이 아닌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저주인 심판으로만 몰고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성령은 좋은 것을 주실려고 친히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인도자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방식인 이 십자가의 방식이 아니면 다 거짓이다 라고 성령은 우리를 매일 매일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웁니다.
내 죽음을 실제화 시키라는 말이 아니라. 그 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 본들 그건 죽음도 아니요 저주도 아니요 심판도 아닙니다. 그저 허상이요 우상적일 뿐입니다.
실상의 심판과 실제적인 죽음은 예수님 뿐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을 보라고 성령은 우리를 몰아 넣는 겁니다.
여기에 반드시 동원이 되는 것이 악어와 같은 거짓선지자입니다.
거짓선지자의 목적은 처참한 인자의 달리심을 못 쳐다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자의 죽음을 왜 쳐다보는데?
말라꼬?
내 죽음도 아닌데?
왜 남의 죽음을 쳐다봐야 하는데?
인자의 죽음은 모든 아담의 동질이 된 죽음을 못 밖고
마지막 아담의 죽음과 상관 없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교체하기 위한 심판임을 보라고
달리시고 들리시는 십자가의 예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 몰라 몰라 시끄럽다. 우리는 악어 피해 갈란다.
과연 악어 피해 갈 수 있을까요?
아주 아주 놀라운 것은 자기자신이 악어(귀신)인데? (식스센스)
그래서 어제 설교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진노를 피할줄 여기지 말라 라고 외치는 세례요한의 세례가 구원용이 아니라 심판용 임을 반대로 설교 했지요.
[ 회개 (누가복음 3: 7- 9)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14강-눅3장7-9(회개)-luk100207.hwp ]
왜 심판용인가? 잉여(여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하지 아니하면 잉여(은혜)가 아니라 자기행위(열심이 특심)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과 동류가 안되고 자꾸 처음 아담과 동류가 되기 때문에 새술은 새부대에 담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중고등부 성경공부 잠언 84강
]
도끼가 나무에 놓였으니 열매맺지 아니하면 찍혀 버리는 이유는
바로 그 도끼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우기는 회개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겠다는 발상 자체가 마귀자식임을 드러내는 것이 도끼입니다. 단절입니다.
오히려 돌삐처럼 회개조차도 무능함에 놓여있는 심판받아 마땅하고 독사의 자식임이 마땅함을 아는 것이 바로 물세례의 취지입니다. (악어 피하고자 회개와 열매맺기가 아니라 악어 백번 물려 죽어도 마땅한 죄인임을 예수님이 악어에게 물려죽음을 보고 내가 악어였구나 라는 실상(하늘에서 난)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나무에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자입니다. 봐서 보게 되는게 아니라 하늘에서 났기에 동류인 겁니다.)
바로 이 물세례가 동류 찾기입니다.
물세례 조차도 하늘에서 나지 아니하면 벌어지지 않는 사건입니다.
지나개나 교회에서 세례식때 물 뿌리든 침례등으로 물에 빠뜨리든 그것은 다 그림자일 뿐입니다.
하늘에서 나지 아니한 물세례는 의미 없습니다. 그 물세례 조차도 하늘에서 나지 아니한 것은 다 도끼에 찍혀 불에 태우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백부당 만부당 죽어 마땅한 독사의 자식임을 알아야 되는 것이 마땅하지
구원의 정당성? 아브라함 자손? 선민? 선택? 다 헛소리죠.
실상은 심판입니다.
그래서 참목자요 선한 목자는 아주 아주 얄밉고도 정말 싫을 정도로
마귀가 악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곳만 골라 골라 가서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보여주는 곳으로만 (낮추심 = 십자가) 인도하는 겁니다. 이게 교체의 목적인 광야 교회죠.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 곧 회개란 교체작업인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회개란 자기가 자기를 치고 심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죠.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령이 씌인 거짓목자는 악어가 없는 곳으로만 피해 다닙니다.
놀랍게도 식스센스 지가 악어입니다. 자기가 악어인줄 모르고 악어 피해 다닌 겁니다.
바로 너가 악어야 라고 그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세례요한의 세례요, 하늘에서 난 물입니다. 짤라버리는 겁니다. 제대로 실상을 보라고 허상을 짤라버리는 단절의 물, 하늘에서 난 물입니다.
또 같이 따라간 그 놈들도 지가 악어인줄도 모르고 악어 피해 돌아다닌 것이죠.
(식스 센스)
이 엄청난 반전이 십자가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지혜입니다.
참 목자가 왜 심판으로 몰고가고 죽음으로 몰고가고 십자가로 몰고갈까요?
십자가 밖은 꾀임 뿐이기 때문입니다.
(갈 3:1, 개정)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진정으로 섬기는 자는 심판으로 몰고가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심판 받은 자가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놈도 심판 받은 자는 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알고 아브라함이 쳐다본 겁니다.
(롬 4:1, 개정)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정)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정)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정)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롬 4:5, 개정)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정)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롬 4:7, 개정)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롬 4:8, 개정)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믿음의 조상인 겁니다. 예수님의 작품입니다. 내 심판 받고 죽으마 너 구원받고 살아라. 이것이 어린양의 제물 되심입니다.)
(요일 4:10, 개정)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관리자(IP:124.♡.86.9)
10-02-09 12:02
스스로 버릴 권리와 스스로 다시 얻을 권리
2010/02/09 11:50 in 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요 10:1, 개정)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2, 개정)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요 10:3, 개정)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4, 개정)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요 10:5, 개정)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6, 개정)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요 10:7, 개정)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8, 개정)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9, 개정)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10, 개정)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1, 개정)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개정)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개정)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개정)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정)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개정)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7, 개정)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 10:18, 개정)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지난 달에 요 10장 부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생전 잘 비이도 않던 문구가 보였다.
그냥 흘러가던 문구가 그동안 선한 목자 라는 키포인트만 보다가
아니 여전히 그 포인트만 잡고 봤는데 숨겨진 문구가 보였다.
참 신기하다
숨겨지긴 뭐가 숨겨졌겠는가?
내가 못 본 것이지 !!
아니다 분명히 봐도 포인트를 선한목자로 잡았기에 아무리 봐도
아무리 공개 되어 있다 할 지라도 안 보였다.
에이 너무 과장하지 마라?
그것은 성경 뿐만 아니라 어떤 책이든 사물이든
눈의 시선이 중심점을 하나 잡게 되면 다른 것은 잘 비이지 않는 원리이기에
너도 그럴 뿐이다.
맞다 그럴 뿐인 것 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선한 목자가 키 포인트가 아니다는 말이다.
엥?????? ................
너! 또? 성경 또 삐딱하게 보고 선동할려고 하는 것 아니냐?
아뿔사 내가 이걸 왜 몰랐을까?
선한목자가 키포인트가 아니였어 ! 맞어 그거야 그거
그럼 뭔데? 뭐가 포인트인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 10:17, 개정)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거야 이거
참 나 그것이 바로 선한목자가 중심해석이다는 증거야 난 또 뭐 다른것인줄 알았네
그러니까 너희는 틀렸지
왜 틀렸는데?
니가 방금 올린게 그거라니까?
틀린 이유는 바로 이거 이기 때문에 이거야
뭔데?
(요 10:18, 개정)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엥?
스스로 버릴 권세가 있다는 것을 다 알겠지만 또 그것 때문에 선한 목자로 해석을 하겠지만
문제는 스스로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는 문구 때문에
선한목자로 덥석 잡는자는 다 틀렸다는 것이지
스스로 다시 얻을 권세 때문에 그런 그런 해석이 다 틀렸다는 것이여!
믄 소리를 또 할려고
우리는 선한목자를 포인트로 잡고 해석하게 되면(물론 모든 이단자들과 자칭 구원받은 선택자, 건전신학, 성화론자, 개혁주의 다 그렇게 당연히 주장) 자연스럽게 이제 그 선한목자를 믿는 자기자신은 양이다는 해석이 숨은채로 뒤따라 덥석 물게 되는 거지.
선한목자로 해석해야 자신이 양이다는 해석으로 정작 자기자신은 마귀자식이라는 것을 안들키게 되는 것이야
내가(모든 인간 즉 아담) 예수님을 선한목자로 본 이상은
아무리 예수님이 나를 싫어해도
적어도 이 땅에서만큼은 (죽은 다음에는 모름)
양이라는 탈을 마음껏 쓸 수가 있다는 것이지.
혹시 아남? 진짜 양인지?
결국 자기 자신이 양 됨에 관심 있는 거야
바로 그런 해석을 뒤 엎어버리는 것이 요 10장의 포인트가 스스로 버릴 권세와 스스로 다시 얻을 권세이다는 것이지.
즉 인간들이 노리는 것은 스스로 버릴 권세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선한목자 취급해 주고
정작 자신은 양이라는 탈만 쓰면 되는 것이니
문제 될 것 없다는 것이지
여기서 그런 통밥이 안 통하는 방식이 바로 스스로 다시 얻을 권세 때문에
죽기는커녕 다시 살아나서 가려낸다는 것이지
뭘 가려내는가?
바로 고 따위 식으로 해석해서 자신을 양이라고 우기는 자들을 가려내는데 기가막힌 내용이다는 것이다. 영과 혼과 관절 골수 제대로 쪼개지는 방식이지.
차라리 이 말씀을 못 봤다면
선한목자에 대해서 몰랐다면
사함이 되겠지만
바보 같이 선한목자에 대해서 알았고 더 나아가서 이것을 가지고 반드시 외칠 수밖에 없으며 외칠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양 됨을 은근히 정당화 하는데 점점점 고착 고정이 되기에 오히려 선한목자 이용해서 자기 영역을 챙기게 되는 것이지
(마 12:32, 개정)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에이 설마 너무 오바해서 생각한다. 그런 마음 추호도 없는 사람 많아. 늘 삐딱하고 부정하게 보니까 니 마음이 그런거야?
실제로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율법사 또는 서기관의 질문으로 선한자? 또는 이웃? 결국 그 친밀성의 관계가 자신들은 이미 형성 되어 있음을 과시하듯이 예수님을 끌어 당긴다.
(막 12:24,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막 12:25, 개정)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막 12:26, 개정)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막 12:27, 개정)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막 12:28, 개정)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눅 10:21, 개정)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정)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23, 개정)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24, 개정)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눅 10:25, 개정)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개정)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개정)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여기에서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그렇게 인간들 자기들 멋대로 잇고 잇고 이은 그 친밀성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단절성으로 답변하신다.
오히려 저들이 말하는 그 친밀성을 끌어들여서 정작 친밀하기는커녕 아주 아주 마귀적이다 라고 증거하시면서
도리어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하나 됨의 친밀성에 모든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신다.
맞다 소외다. 그것도 철저한 소외이다.
그런데 말귀를 못 알아 먹는 우리 인간은 그 친밀성을 깨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바쁘며
철저한 소외는커녕 무조건적인 편애성으로 끌어당길려고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 됨을 깨는 식이다.
즉 이것을 유발케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이것을 유발치 않는다면 가짜요 삯꾼이요 등쳐 먹는자요 늑대이다.
자 이렇게 보면 우리 주변에 목자 라고 나서는 모든 지도자들은 선하지 않다 라는 것을 보게 된다.
저들은 말한다. 때려 죽어도 선한 것을 붙들었기 때문에 비록 부족하지만 참으로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선한 쪽으로 봐 달라고
맞다 선하게 보고 싶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버린 이상은 그 기준에 의해서 도저히 선하게 볼 수 없고. 선하기는커녕 아주 아주 마귀적인 악마성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어쩔수가 없는거다. 기준 때문에
매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깐?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다,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이 하늘에서 내려온 방식이 아닌 것은 스스로 버릴 권세도 없을뿐더러 더더욱 중요한 것 스스로 다시 되 찾을 권세도 없다는 것이다.
(요 10:14, 개정)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정)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에 철저하게 소외 되었다면 소외 당하면 될껀데 소외 안 당할려고 하니
오히려 말려드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양을 새로 창조하시는 방식이 바로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친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사나? 서기관이나? 큰 계명 즉 말씀 운운하고 선한목자 운운할때에
정작 자신이 양이 아님을 아는 것이 이 말씀의 취지인데
아니 누가 그 말씀을 운운하면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그 내용으로 자신을 소외 시키고 부인할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 말씀을 운운하면서 정작 자기자신은 버림받았다 라고 외친다면
그 선한목자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니가 버림받은 주제에 남에게 선한목자 운운할수 있겠느냐 라고 따질것이 아닌가?
그리고 정작 선한목자를 운운하는 자기자신이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은 버림받았다 라는 사실을 안다면
제대로 된 해석이자
또 말씀 스스로가 다시 찾을 권세가 바로 이 말씀 때문에 있음을 본인이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것이다.
결국 자기자신의 고백이나 해석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철저하게 소외 되고 소외 된 그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임을 도리어 아는
양은커녕 양의 탈을 쓴 늑대요. 이리요. 삯꾼이요. 강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려주시는 것이 성령인데
그 성령이 알려주신바를 거부하고 그래도 끝까지 양 될래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양 자리를 덥석 물게 된다면
바로 그 놈이 성령을 훼방하는 자 이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이 말씀을 받을만 하겠는가?
그저 선한 목자 되어 준다는 해석을 말해주니까 그저 좋다고 덥석 물기나 했으니
도리어 자신이 양 될 가치도 없는 자인줄도 모르고
양 되었다고 자기들 멋대로 해석했고 마침 그 엉터리 생각에 삯꾼들이 부추기게 되니
욕망의 동질이 형성 되어
애정결핍증 환자들이 집단화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애정결핍증을 채워주고자 다가오는 선한 목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애정결핍증을 채워달라는 쓰잘데 없는 그 그릇 자체를 깨부숴버리신다.
(요 4:12, 개정)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3,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개정)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개정)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6, 개정)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전남편이 그 그릇을 쓰잘데 없이 책임도지지 않으면서 만들어 놓고 간 것이다.
괜히 그 그릇에 우물이 안 채워졌다고 인생이 꼬였니 마니 투덜거리면서
좀 채워지면 이쁨 받았다고 까불까불 거리고
좀 말라버리면 미움 받았다고 우울증 걸리고
아예 차라리 그 그릇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이 세상에나 그릇 깨지니까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물 길을 그릇도 내팽개 치워버리고 그냥 뛰어들어 수영을 신나게 하면 될 뿐이다.
생명의 바다가 있는데 어떤 누가 그릇을 들고 그것고 깊니 얇니 깊으면 고생 좀 하고 얇으면 편리하게 퍼 나르는 쓰잘데 없는 짖을
아예 바다 자체가 덮쳐 버리는 (물세례)
혜험 칠 줄 몰라도 저절로 수영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리시는
물고기로 만드시는 것이다.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님에게 제대로 낚인 것이다.
(반대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낚을려고 우찌하던간에 예수님이라는 대박을 자기 쪽으로 아무리 땡겨도 대박은커녕 쪽박 찬다. 그릇 자체를 더더욱 고수하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에서 난 것이 아니면 백날 해도 소용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친히 양을 만드시는 방식은 무엇인가?
양을 찢어버리는 방식이다. (그릇을 깨뜨리심)
그것이 선한목자다. 그래서 찢겠다는 의도로 자신이 찢기신다.
찢겨야만 예비할 처소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도살장이라는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요
그 도살장에 오로지 찢는 영을 예비하기 위함이다.
맞다 성령이다.
성령을 백정처럼 일하시도록 일자리 만들고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러 오셨다.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이 그러하다.
오죽 성령을 천하디 천한 백정의 일에 고정하지 않으면 안될정도로 우리가 늑대들이기 때문이다.
육의 소욕이 있을때마다 감사하게도 성령께서 오셔서 찢어버리신다.
그릇을 깨뜨린다.
깨뜨림 당함에 서러워 할 것 없다.
오히려 신난다. 쓸데 없이 그것도 힘들게 우물 바가지 찾고 그 우물 바가지를 더 깊고 깊은 곳에 파고 길러야 겨우 겨우 목마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은 처음 창조한 방식이 아니다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비정상적인 것을 피할수 있으랴?
바로 이 비정상적인 것을 짝으로 삼아서 인자의 일을 하신다.
정작 비정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인 것을 자기들 스스로 해결했다는 겉모양을 갖추었다는 자체가 인자를 훼방함으로써 성령을 훼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자는 백정처럼 확확 찢어버리는 성령을 자신의 짝으로 삼아서
이 둘이 지나가는 자리에 모든 것을 초토화 시키는 허리케인으로 지나가시는 것이다.
그 지나간 자리의 흔적에 제대로 찢겨지고 깨어진 자가 바로 우물가의 여인처럼 물 깃는 바가지 그릇이 깨어진 자이다.
그 잃어버린자를 만드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자는 되찾는 방식이다.
왜? 우리가 잘나서?
아니다 인자가 바로 스스로 잃어버림을 당함으로써 모든 육체를 찢었고
다시 되찾는 권세를 통해서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다.
(계 1:7, 개정)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다시 오심이 심판주의 모습이다.
결국 그 심판주를 선한목자로 못 보는 선한목자 해석은 다 엉터리 해석인 것이다.
인간들이 싫어하는 심판을 퍼붓는 나쁜 못땐 선한목자로 증거치 않는 자가 바로 삯꾼이다.
아니 생각해 보라
나쁘고 못땐 선한목자를 증거하면 돈이 될 리가 없다.
선한 목자를 외쳐야 돈이 된다.
둘 다 안하고 제 3의 영역의 해석은 없다.
돈과 유익이 안 되는 방식을 인간들은 할 줄 모른다. 행함이란 과거의 경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방식은 돈이 될 수 없는 방식 뿐이니 말이다.
스스로 버릴 권세와 스스로 다시 얻을 권세가 하나가 되어서
두 권세가 둘이 서로 뺨을 때리면서
과격하리 만큼 찢어지고 쪼개버림으로써
그 틈 사이에서 창조물인 새피조물이 태어난다.
아들과 아버지가 둘이 하나이면서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그 아들은 버림 받고
그 버림받은 아들을 다시 되찾음으로써
그 사이에서 성령의 처소가 마련 되었듯이
인자는 성령과 짝꿍으로 서로의 두 회오리 줄기가 서로 뺨을 치듯 충돌을 통해서 스파클로 도저히 어떤 누구도 흉내 못낼 생산물을 잉여로 배출했듯이
이제는 성령이 자신의 성령의 전과 짝꿍이 되어서
자기(성령) 스스로 치고 (성령의 전을 치심)
물에 빠뜨리고 (세례)
죽음 속에서 심판 속에서 저주 속에서 피어난 생명 구원 사랑을 증식 시키신다.
이제 땅에서 난 것들은 하늘에서 난 것에 의해서 삭제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되찾는 방식은 딱 하나다. 십자가 다,
즉 그 사람의 땅의 밑천을 거들내는 것이다.
그 사람이 딛고 있는 그 원천이 하늘에서 난 것인지 땅에서 난 것인지
파재끼는 것이다. 찢어버리는 것이다.
그 찢어버린 그 틈 사이로 약속이 나오면
할수 없이, 어쩔수 없이, 외친다.
당신은 어쩔수 없는 피 남편이군요 라고 십보라가 외쳤듯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섬기는 자인 선한 목자가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되찾는
삯꾼 목자와의 차이점이다.
관리자(IP:220.♡.41.197)
10-03-03 16:51
김대식 2010/02/08 16:15
이 글을 읽고 또 오해할까 싶어서 댓글을 달아본다.
제발 좀 참 선지자, 선한 목자, 참 부모 될려고 하지 말라.
차라리 자신이 거짓 선지자요. 이단이요, 삯꾼이요, 거짓 부모임을 알자 라고 쓴 글이다.
오직 참 선지자요. 선한 목자요, 유일하게 섬기는 자요, 참 부모는 예수님 뿐이다.
괜히 덥석 그 자리 앉겠다고 설치면 설칠수록 위선자일 뿐이요, 너무 너무 수상하다. 악어 아닌채 해도 악어 짖만 골라 할 뿐이다.
관리자(IP:220.♡.41.197)
10-03-03 16:51
김대식 2010/03/03 16:50
[그것이 바로 섬기는 자인 선한 목자가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되찾는
삯꾼 목자와의 차이점이다.]
지금 다시 요 부분을 보니 소름이 끼친다
즉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언약이라는 의미가
주와 주의 연결된 처음과 나중의 연결된 오뎅 꼬챙이에 구멍이 뚫혀진 그 뚫어버리는 연결꼬챙이가 바로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의미로 자신의 언약을 자신이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의 언약을 다시 세우셔서 완료 하는 여기에 동원되는 미말의 찌기가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놓여진 자들이다.
아 그래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라는 표현은 곧 인자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음으로써 언약성취된다는 의미이다. 그 인자의 자리를 미리 앞당겨 그림자처럼 보여준 것이 바로 성도이다. 결국 인자란 예수님이며 그 자리에 그림자로써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아브라함이 앉고 기타등등 앉아서 버림받고 깨어지고 스스로(사실 언약 때문에 말씀에 의해 깨어짐을 당하는 입장) 버리고 다시 그 스스로 언약을 깨뜨리면서 다시 언약을 세우시는 곧 버리신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시는 방식인 오직 십자가로만 귀결 되도록 유일한 예정인 십자가의 사랑을 완료하신 것이다. 사랑이란 곧 때려죽어도 미워하겠다는 그 버림받는 자리 곧 저주 자리(잃어버림의가 바로 다시 되찾는 자리이다. 그래서 주께서 내 주께 곧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되찾는 방식은 십자가 뿐이다.
한진영(IP:119.♡.131.197)
10-03-04 20:33
"아주 아주 놀라운 것은 자기자신이 악어(귀신)인데? (식스센스)"
식스센스 - 푸하하 오! 놀라운 센스, 식스센스. 속이 다 시원하네..
악어 없는 곳만 골라서 델꼬 다닌 악어
지가 악어인줄 또 다시 발각 당하는 악어
여기 한마리 또 있심다. ㅋ
한진영(IP:119.♡.131.197)
10-03-04 21:00
"그것이 바로 섬기는 자인 선한 목자가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되찾는 삯꾼 목자와의 차이점이다"
당췌 몬 말씀인지..
김대식(IP:124.♡.86.6)
10-03-04 21:55
"그것이 바로 섬기는 자인 선한 목자가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되찾는 삯꾼 목자와의 차이점이다"
아 오타군요
"그것이 바로 섬기는 자인 선한 목자가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되찾으심이, 삯꾼 목자와의 차이점이다"
요거 댓글이라 수정불가라서 여기에 올립니다.
참고는 제 블로그에 수정했습니다.
http://crosslamb.tistory.com/734
인간의 눈이 어둡고 소경이기에 아무리 봐도 자신이 [섬긴다]는 개념을 가지고 보는 그 섬김은 결국 삯꾼목자와 결합이 되고. 도저히 섬긴다는 개념과 부합이 되지 않는 섬김으로 다가오는 것은 인자의 섬김 뿐이니 도리어 격분의 살인의지를 발휘하게되는 제대로 섬기는 분을 악마 취급하겠지요.
인자의 섬김이란 바로 이 인간 속의 악마성을 끄집어 내어 발각케 만드시는 섬김인데
왜 내 속의 악마를 깨우느냐 라고 그 섬김을 도리어 지워버리고 없애버리는 방식이 인간 육이 정립한 섬김 이겠지요.(이것이 악어 삯꾼인 바로 나의 섬김이요, 이 섬김과 정반대인 섬김이 인자의 섬김이요 전혀 섬김처럼 보이지 않는 자존심 무너뜨리는 섬김이겠지요. 괜히 건드리다가 죽임당한거죠 뭐 - 그러나 그것 지적 받지 않으면 십자가를 알수없도록 하신 유일한 섬김입니다.)
이것이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의 차이겠지요. 결국 영의 소욕의 지워버리고 없애버리는 삭제의 의미란 바로 저런 육의 소욕인 자신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인자의 섬김을 지워버리는 방식을 들추어내는 반대의 방식이겠지요.
또
[사랑이란 곧 때려죽어도 미워하겠다는 그 버림받는 자리 곧 저주 자리(잃어버림의)가 바로 다시 되찾는 자리이다.] 댓글 중에 괄호 하나 ) 빠졌구요
문장이 이상한것 많지 싶네요
한진영(IP:119.♡.131.197)
10-03-04 23:49
네네.. 인자의 섬김을 삭제 시키려는 육의 섬김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인자의 섬김이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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