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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아마샤의 형태로 속살을 드러낸 구속받은 이스라엘(대하25:1~28)-서울 의존교회 주일 낮 설교자유게시판역대하

아마샤의 형태로 속살을 드러낸 구속받은 이스라엘(대하25:1~28)-서울 의존교회 주일 낮 설교

이름 : 송재원(IP:119.149.105.154)

아마샤의 형태로 속살을 드러낸 구속받은 이스라엘(대하25:1~28)-서울 의존교회 김명현 목사

다윗언약으로 구속을 받은 아마샤라고 부르는 아마샤 백성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밝힌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대하25:2). 어쩌면 이 말씀이 우리 같은지 모른다. 우리를 꼬집어서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현실을 기록해 놓고 있다. 여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다는 말은 솔직히 드러내놓고 말해서 ‘자기 부인’을 정직히 해나간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다윗언약에 정직히 행한다는 말인데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을 정직하고도 성실하게 해 나간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여기 나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말씀을 통해서이다(마16:21~26).

다윗언약의 실체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에 연합을 받아 구원된 자로서 성령에 의해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을 정직히 행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자기부인이며 제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이라는 것은 자기 부인이며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이다.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베드로는 공포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 공포란 죄의 깊이와 죄의 짙음이었다. 인간 베드로가 죽었다면 어쩔 수 없는데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살아야 한다는 그 인간의 죄의 본성이 공포로 드러난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었다. 또한 인간이 신이 되다가 말았다. 이렇게 괴상하게 되어버린 인간의 본성이란 자기 목숨 살리기인데, 그 목숨 살리기라는 죄의 깊이와 짙음이 이렇게 무서운 공포로 발휘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공포로 발휘된 것이 주여 죽지 말라는 것이었다. 주여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했다. 베드로 내가 이렇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 있는데 주님이 죽기는 왜 죽느냐고 한 것이다. 차라리 나 먼저 죽이고 당신 죽든지 말든지란 식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와 같은 죄의 짙음의 폭발에 대해서 사단으로 즉 악마의 속성으로 지칭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유지키 위한 우상 덩어리에 불과하였다. 예수라는 우상은 자기에게 이 세상과 천상을 자기 목숨대로 휘저을 수 있을 것 같은 만취상태의 환상적인 우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목숨을 위한 그 우상의 강도가 얼마나 강력한가!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것은 베드로 제 생각 밖에 모르는 지경에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부르짖으며 좇아다녔지만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의 목숨의 세계를 지키는 생각만 하는 자였던 것이다. ‘상실된 마음’ 그것은 자기 목숨이라는 영광성을 신의 보좌에 맞추기 위해 수많은 죄악을 즉각 저지르게 한다. 상실된 마음 그것은 공허한 상태가 아니라 이렇게 수많은 죄악을 발휘케 하는 상태의 세계이다(롬1:28).

그러므로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는 말은 여호와 보시기에 자기부인을 살살 눈치 보며 행하고 살았다는 말이다. 자기 목숨을 버리는 정직히 행함을 하기는 했는데 한 쪽 눈을 감고 궁예처럼 하고 살았다는 의미이다. 자기 부인과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을 하기는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것이 자기 부인을 하며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삶으로 규정화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인 우리를 그의 부활과 함께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이다(골3:1). 주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성령께서 그의 죽으심과 함께 한 자들에게 이루시기 때문이다. 즉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이루시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예수님이든지 아니면 우리든지 둘 중의 하나는 없어져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도 하나님인데 예수님이라는 하나님과 우리라는 하나님은 그냥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고후6:15).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을 타락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이 세상에서 그림자로 만들어 가신다. 그 그림자의 실체가 무엇이냐하면 우리를 자기부인으로 만들어 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자기부인’이라는 것은 악마처럼 매우 은밀하게 내재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맛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숨통’을 끊어간다는 의미이다. 이 살맛나는 것에 대한 숨통이 자기 목숨인데 이것을 끊어간다. 이 살맛나는 숨통이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밀하게 나를 나됨으로 살맛나게 한다는 ‘숨통’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우리를 실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숨통을 계속 끊어놔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그림자가 된다. 이 숨통을 끊어놓는 일을 주께서 하실 때에 우리가 죄인인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죄인으로 거침없고 쉬임없이 드러날 때 우리는 그림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 그림자가 될 때에 드디어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며, 그 하나됨의 확인 속에서 나에게 실체로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뿐이라는 것으로 나타남으로써이다.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것인데 있다고 착각하는 이 살맛나는 죄의 숨통을 끊어 놓음으로써 나에게 있는 것은 주의 보혈뿐임을 아는 것이다. 나에게 있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됨 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부인의 상태이며, 자기 목숨을 잃은 상태이다. 주의 보혈이 임한 것만을 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여호와 전의 종교는 자기부인으로 규정화된다. 여호와 전의 종교는 ‘복덩이로 굴러들어온 어린양의 피를 돈보따리 끌어안고 놓지 않듯이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규정화 되는 것이다’.

여호와 전의 종교는 이렇게 자기부인으로 규정화 되는데, 그런데 지금의 현실로서의, 아마샤라고 이름하는 구속받은 백성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고 있었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부인을 하기는 하였는데 여호와의 눈치를 살살보면서 했다. 여호와의 눈치를 살살보면서 행하는 자기부인이라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기부인을 못하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자기부인이 없었다는 말과 같다. 여호와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는데 온전한 마음으로는 행치 아니했다는 말은, 이미 끝장난 존재들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여기 이 말씀을 보면서 문뜩 생각나는 것은, 참으로 우리는 성전 종교를 다루는 사깃꾼 같다는 생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여호와 보시기에 자기부인을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고 있는 아마샤 백성들의 행태에 대해서 역대하는 그 증거들을 기록해 나아가고 있다. 그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나라가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 율법 책에 기록한대로 함이라”라고 쓰고 있다(대하25:3~4). 이 말씀의 의미가 뭔고 하니 진정 자기부인은 없고 윤리만 드러냈다는 의미이다. 아마샤가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때가 되자 죽인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복수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부왕 요아스를 죽인 신복들을 죽이라는 선지자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때가 이르자 그들을 죽여버린 것을 통해서이다. 또한 부왕 요아스가 그렇게 죽은 것은 여호와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은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그 신복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아마샤에게 있어서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안되는 것이 그에게 살맛나는 숨통이었다. 그들에 대한 복수심 바로 이것이 그를 존재케 하는 숨통이 아니던가? ‘무엇을 선명하게 인식하며’ 사는 것을 살맛나는 숨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부왕을 죽인 놈들은 반드시 죽인다. 이것이 그가 살아있으면서 그에게 내재된 살맛나는 숨통이었다. 그러니까 그 신복들을 자기 마음대로 죽였던 것이다.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그가 때가 이르자 죽였다는 기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마샤가 이렇게 그에게 있어서 ‘살맛나는 것’은 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했다는 말씀에 대한 본뜻이 된다.

이렇게 은밀하게 살맛나는 것은 해치웠다는 것이다. 죄니까 죄로 알고 해치워 버렸다는 뜻이다. 부자 청년에게 십계명은 어렸을 때부터 다 지킨 것이었다. 그와 같은 십계명 지키는 것은 그에게는 누워서 떡먹기였다. 그러나 내 돈은 건드리지마! 나 이것 때문에 지금 살아있어였다. 나에게 있는 것 모두 다 가져가라. 그런데 내 자존심은 안돼! 나 이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어. 나에게 있는 것 모두 가져가라.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남자 또는 여자는 안돼! 나 이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어 이 자식아 알아? 나에게 있는 것 다 가져가라! 그런데 내 종교 열정은 안돼? 나 이것 때문에 겨우 사는 맛을 내며 산다야? 나의 삶의 의욕을 꺾는 일은 하지마 나 무엇하고 사냐이다. 그 신복의 자식들은 얼마든지 살려준다. 나는 종교인인데 주의 율법의 근거해서 그의 자식들은 살려준다. 내가 그렇게 막가는 놈은 아니다. 이 정도로의 자기부인은 있어. 그런데 내 부왕을 죽인 놈들은 죽여야 된다. 나 이것 때문에 살아왔어! 이 복수심의 내밀한 숨통으로 살아왔어?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어? 그렇기에 나 이 복수심 하나 키우면서 살아왔고, 내가 지금까지 존재해서 살아온 목적도 이 복수심 때문이야 알겠는가? 이렇게 복수할 능력도 있고 이 복수심 이것이 살아있는 아마샤 내면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신복들은 죽이고 그들의 자녀들은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살려주었다는 것은 자기부인이 아니다. 이것은 왕윤리이다. 이것은 모세 율법이 아니다. 모세 율법을 빙자한 왕윤리 발휘일 뿐이다. 여러분 윤리가 뭔지 알지요. 장래가 총망되는 목사가 부부 싸움의 와중에 농약을 박카스처럼 들이마시고 즉사하사 그의 부인은 그 시신을 기증하는 것이 윤리의 극치이다. 그 시신을 해부용으로 기증하는 사랑의 행위를 베풀었다. 여러분, 이것은 선이 아니라고 했다. 천국 가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위선적인 인간의 악에서 발원된 윤리의 극치이다. 시신을 기증했다고 말하지나 말지? 기증했다고 말했기에 그래서 이것을 윤리라고 한다.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윤리이다. 신의 자리에서 선이라고 생각하고 행위로 나아간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간의 사악적인 개념을 윤리라 한다. 천국과 지옥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간의 선악 개념을 윤리라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는 말은, 윤리에 속하는 그 가증한 것을 기독교적 자기부인이라고 하면서 그 수준의 범위 안에서 몸을 요리조리 내둘르며 움직이며 살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여호와 전의 어린양의 피가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 볼 수가 없다. 어린양의 피는 죄 때문에 이제 죽음을 선택한 사항에서 보이는 것이다. 발가벗겨지는 삭제를 당하는 심판만이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본다고 했다.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이는 일을 그만둬야 하는 자기부인의 고통 속에서 어린양의 피가 보여지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 어린양의 피의 능력이 부활의 능력으로 작용하여 그를 자기부인을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죄는 저지르고’ 윤리를 행한 것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한 것이다. 그래도 살맛나는 것은 저지르고 간에 기별도 안가는 가증스러운 윤리라는 것은 행하고 악은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왕을 죽인 신복들은 죽이고 간(肝)에 기별도 안가는 그의 자녀들은 모세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는 지금의 인간의 본성이다’. 죄는 지금 나 살아야 되겠다는 본성이다. 그 죄를 실핏줄을 따라 이리저리 저지르고 그 가증스런 것을 선으로 간주하고, 그 가증한 것을 악으로 간주하여 선악이라는 윤리 안에서 행동하고 사는 것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않은 것이다. 주의 피로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가 여기까지였다. 이 한계란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로 가지고 나온 죄의 심연(해구)의 한계였다.

그 다음에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고 있는 증거를 역대하는 기록하고 있다. “아마샤가 유다 사람을 모으고 그 여러 족속을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되 유다와 베냐민을 함께 그리하고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하여 창과 방패를 잡고 능히 전장에 나갈만한 자 삼십만을 얻고 또 은 일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을 삯내었더니”라고 하는 말씀 안에서이다(대하25:5~6). 왕이나 선지자들은 자신의 존립 자체인 교회 부흥을 위해서, 또한 교인인 백성들은 ‘자신’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여호와 전의 종교에다가 여로보암 종교를 은밀히 접붙여서 선택하고 그 종교를 도입하여 목표를 에돔의 사상, 또는 에돔 추구에 두었다는 말이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는 말은 매우 은밀한 개인의 내면을 말함이다. 이것은 여호와와 어쩌면 자기만이 감지하고 있는 은밀성이다. ‘살맛나는 숨통’이라는 것은 에돔 사상이며 에돔의 우상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확’이다. ‘뻘겋게 달구고 싶은’ 자기 확이다. ‘살맛나는 숨통’이라는 것은 이렇게 죄를 위해서 여호와 전의 종교인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않아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여호와 전의 종교 안에서 이런 여로보암 종교를 접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를 우리가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이 기도라는 형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 짓을 자행하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이 뭔가? 우리가 하는 기도 소리가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우리 맘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을 토로한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살맛나는 숨통에 대한 수많은 내용의 아룀이다. 누가 들으면 기가 차고 우습기가 한량없고 너무나 추잡하고 너무나 이기적이고 더럽기가 한량없는 내용들을 하나님을 부르며 퍼붓는다. 기도라고 하면서 그 퍼붓는 내용은 자기 살맛나도록 숨통을 터 달라는 것으로서의 에돔적 사상이다. 그 기도 형식이 전적으로 여로보암적 종교 형식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본문의 말씀과 같은가? 우리가 믿는 것은 주님의 피고 주의 용서이다. 주의 용서만이 내 자산이며 내 재산이다. 그런데 눈만 감으면 여로보암 종교인으로 변해 가지고 에돔 사상과 에돔 추구를 간구한다. 여호와 성전의 종교인들이 눈만 감으면 그 에돔 사상인 ‘나를 신정동으로 가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신월동으로 발걸음을 돌려놓는다. 그 이유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기 때문이다’(약4:3). 또한 응답이 된다 하여도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 기도 능력이 신통방통해서 응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응답이 되어봤자 천국 가는 것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허무로 끝나고 행복 없음으로 끝나고 만다. 참으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됨으로 끝난다. 이렇게 여로보암 종교 형식이란 헛됨과 무용지물로 끝이 나고 만다(대하25:15).

그런데 그렇게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뭣이 어쩌란 말입니까? 그 응답이 아하 좋다 그것인가요? 아아 기분 짱이다 그것인가? 에돔을 정복했나요. 에돔이란 세상을 추구하게 되었나요 그러나 그것도 무용지물이다. 에돔을 정복했다. 세상대로 내 일이 이루어졌다. 에돔이라는 세상을 내 손아귀에 넣었다. 내 계획과 생각과 목적과 기분대로 척척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과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황폐화시킬 뿐이다(대하25:14~15). 신의 자리에 오른 교만한 인간의 본성을 결코 채워줄 수가 없다. 참으로 진정으로 응답을 받아야 할 것을 응답을 못 받고 평생 응답 한번을 못 받고 죽을 수 있다. 여호와 전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매일 여호와의 전의 어린양의 피로 용서를 받고 구원받은 것을 응답받아야지 않겠는가? 이것이 곧 천국으로 직결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기도 응답으로 받으라고 성전에서 어린양이 피 흘리고 태워지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서 저는 이러이러해서 용서를 받았습니다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을 되돌려 받기 위함입니다. 기도야말로 진정한 내면이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하나님의 계명을 삽입시키는데 그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으시는 계명을 하나님께서 회수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의 기도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죄 많은 세리요 다른 한 사람은 참으로 경건해 보이는 바리새인입니다. 그 현장에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누가 봐도 바리새인의 기도는 응답이 되고 세리의 기도는 거부당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현장에 나타나셨을때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참 하나님 되시는 여호와께서 진정 원하시는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뜻의 삽입 여부로 결정됩니다.

또 마6장에 보면, 역시 두 종류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는 이방인의 기도요 다른 하나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식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 욕구와 기대치와 자기 생존과 야망을 위하여 기도하지만 성도의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는 식으로 기도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보면, 성도란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방인들의 기도는 반대로 자신의 뜻이 되레 하늘까지 뻗히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기도 응답은 자신의 몸이 만들어내는 환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의 계시인 용서로 가득차서 이미 용서받은 입장에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식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응답이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하나님 홀로 다 하시는데 왜 우리가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대로 우리 속에 낡은 계시, 엉터리 계시, 악마가 심어준 계시, 이런 것들로 가득차서 정작 하나님의 뜻이 들어올 여지를 만들지 않고 세상 것으로 꽉꽉 채워진 것을 다 털어놓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인간이 꽉 차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죄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지만 이미 우리에게 임하고 있는 ′용서′의 의미가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를 받았으면 우리가 받을 기도 응답은 모두 다 받은 것입니다‘(이근호 목사님 설교에서).

그렇다! 여호와 전의 종교라면 여호와의 피로 용서되었음을 응답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피로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만이 우리 안에 있다. 여러분! 기도라는 것이 뭡니까? 기도란 두 눈을 감고 주님께 아뢰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두 눈을 감으면 뭐가 떠오릅니까? 내 안에 있는 것이 떠오를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뢸 것이 무엇인가? 나같은 죄인이 주님의 피로 용서되었다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는 고백이 아룀의 내용이지 않겠는가? 나의 실체,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 내 안에 움직이지 않고 더욱 풍성하게 안주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뭔가? 나와 같은 개를 어찌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까 라는 내용이지 않는가? 이와 같은 고백을 어찌 더럽고 추악하고 기가 차고 이기적이고 우습기가 끝이없다고 할 수 있는가? 세리가 매일 드렸던 기도, 그것은 세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가지고 이렇게 기도한 것이다. 그에게 이같은 모습으로 기도가 응답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응답을 소유했어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자유가 임한 것이 된 것이다.

이 구원이 내게 임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비틀거리며 구원을 찾아 이 바다 저 바다로 북에서 동이 멀다하고 울고 돌아다녔던가?(암8:12). 율법이라는 무서운 법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받아던가? 아무리 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우리의 본성은 더 음탕하고 더 치밀하게 더 극한을 향해서 수렁으로 빠져들어갔음을 경험을 하였다. 수 많은 경건 서적을 읽어 보았어도 많은 설교자들을 만나서 그 설교에 심취해 보았어도 율법에서의 해방은 찾아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아이 xx, 지옥아 나를 삼켜라, 지옥탕아 나를 잡아 먹어라. 그래 나는 이제 사는 이유는 지옥가기 위해서 산다. 지옥갈 날을 기다리며 나는 살게 되었다. 만약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같은 내가 죽어서 천국을 갈 수 있겠는가로 상념에 젖어 보았지만 그러나 결국은 지옥아 나를 잡아 먹으라였다. 이와 같은 죄의 극한 앞에서 나의 종교 행위가 무슨 힘이 있으며, 내가 하는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고, 그 설교의 방향은 잡을 수가 없었고, 나는 포기했으니 당신들이나 율법을 잘 행해서 천국에 가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는 마음으로 설교하였다. 그러나 나는 큰 죄인이라 어디서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하는 은밀한 인생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극한에 이르러서야 복음이 내게 찾아 들었다. 이제 내게 임한 구원으로 안식을 하며 쉬고 싶다!!

역대하는 계속해서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는 행치 아니한 행태에 대한 내용을 기록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나아가 가로되 저 백성의 신들이 자기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선지자가 오히려 말할 때에 왕이 이르되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선지자가 그치면 가로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고 쓰고 있다(대하25:15~16). 한 선지자가 구속받은 아마샤 백성들에게 설교한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너희들 말야 에돔을 너희들 욕망대로 소유하고 나니 행복하냐고 물은 것이다. 자기 심취라는 에돔 사상에 빠져서 살아보니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이와 같은 선지자의 책망에 대해서 아먀샤는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고 대들었다.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는 말은, 어찌하여 네가 우리의 일을 간섭하느냐는 의미이다. 우리가 에돔을 소유해서 행복하든 말든 네가 무슨 참견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래 우리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계속 에돔을 좀 추구해야 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까불지말고 입 닥치라는 것이다. 어찌하여 맞으려고 하는가? 뭘로 맞으려고 하느냐이다. 쇠몽둥이로 맞을래, 곤봉으로 맞을래, 채찍으로 맞을래, 뭘로 맞을려고 까불고 있느냐는 뜻이다. 에돔을 독사처럼 집어 삼키면 아주 하나님처럼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도륙해 보니 별 것이 아닌데, 그래도 이 재미로 살겠다는 뜻이다. 이런 삶이 재미가 없는데 그래도 재미가 있으니 재미라고 느끼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재미가 아닌 재미를 느낀다면서 살아가는데 여기에다가 왜 그렇게 재미없는 삶을 악을 쓰면서 구태어 살아갈려고 하느냐고 시비를 건다면 맞아 죽을려고 환장한 짓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지자의 설교 목적은 에돔을 추구하는 것을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었다. 에돔을 추구했어도 너희들 행복하지 않지를 묻는 것이다.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도 재미라고 느끼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너희들의 그 존재가 뭐냐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여호와보시기에 정직히 행한다는 이름과 형식을 갖고 있으나 그 실체는 에돔을 통해서 자기를 섬기고야 마는 온전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사깃꾼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쉴새없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설교를 했던 것이다. 너희같은 죄인들을 어린양의 피로 구속시켰다는 사실을 성전 종교에 맞게 그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선지자는 설교를 한 것이다. 그런데 성도라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 듣기 싫어서 미치고 환장할려고 한다. 아마샤 백성들은 선지자의 이 말을 이해를 못했다는 말이다. 우리처럼 이 말을 이해를 못했다는 점이다. 선지자의 말이 이해가 가지는 않고 계속 말하니까 그치라고만 했다. 입 닥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그 인생에 대해서 뭐라고 한다면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인데 거기에다 뭐라고 하면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나를 모르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그것을 짙게 쉬지 않고 인식하라는 것이 선지자의 선포 목적이었다. 그치라고 하지 말고 두둘겨 맞는다고 대항치 말고, 쉬지 않고 듣고서 진정으로 죽을 죄인으로 인정하라고 선지자가 선포를 하는 것이었다. 내 안에는 이 죄를 위해 죽으신 어린양의 피만 임재해있구나를 또한 새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선지자도 그치라고 하니까 그치지 말고 계속 선포해야 한다. 우리 구속받은 존재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는 한계에 부딪친 존재들임을 말이다. 즉 지독스런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역대하는 마지막으로 아마샤와 그의 백성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마음으로는 온전히 행하지 않는 행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유다 왕 아마샤가 상의하고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오라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고 쓰고 있다(대하25:17~24). 아마샤가 북이스라엘과 싸우고자 한 것은 화가 치밀어 올라서였다(대하25:13). 아마샤는 값을 주고 산 북이스라엘 군사들을 어떤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고 돌려보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에브라임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대하25:7). 그 이유는 에브라임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여로보암 기독교를 만들어 신봉하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고 에돔 정벌에 화가 미칠 것 같은 예감을 받고 아마샤는 그들을 돌려보낸다. 하나님을 힘입어 기도하고 에돔을 추구하러 가는 판인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없다면 그들을 데리고 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아마샤는 이러하였을 것이다. ‘저 에브라임 인간들이 믿고 있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고 사이비 기독교이지, 저 사이비 기독교에 선지자의 말대로 여호와는 있을 수 없지, 저들이 종교의 본질로 해서 신봉하는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평생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는 바로 점, 복이지 않는가? 정말 큰일날 뻔 했내 내가 순간 헛것에 씌여서 여로보암 종교를 내 사업과 내 계획에 사용할뻔 했다니 아이구 정말 재수 없는 인간들'이라고 말이다. 아마샤의 이런 점이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라고 말한 대목의 내용이 될 수도 있다. 유다 왕 아마샤가 여로보암 종교꾼들인 에브라임 군사들을 돌려보낼 때 얼마나 그들을 재수 없게 보냈으면 그들이 엄청나게 열 받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대하25:10).

그런데 에브라임 종교인들이 여호와의 전의 종교를 신봉한다는 유다 아마샤의 백성들을 볼 때에 자기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인간들이었다는 점이다. 여호와 전의 종교를 믿는 놈들은 입만 열면 어린양의 피,피,피,말하지만 그 속내는 얼마나 응큼하고 음란한지 그리고 그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 에돔이라는 돈 정벌과 자기 본성 숭배에 환장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종교 형식만 다르고, 말하는 것만 다르고, 설교의 내용만 다르고, 자기들을 향해서 금송아지 교인들이라고 비꼬며 말하는 것만 달랐지, 그 진정한 몸통의 내면은 자기들과 같거나 추구하는 것이 더 하더라는 것이다. 자기들도 에돔을 삼켜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절제하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하는데 저 피를 설교하고 말하는 저 종교의 인간들은 쉴새없이 에돔을 삼키고자 하는 일에 심취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공격해 온 것이다. 그들이 분연하게 공격해 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저 종교인들로부터 맹렬히 욕을 얻어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대체 에브라임 종교가 유다 종교를 볼 때에 자기들과 다른 점을 분간할 수가 없다. 분간할 수 없는 능력이 에브라임 그들에게 없다는 것도 되지만 또한 그렇게 자기들보다 더하게 보이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에브라임 종교인 북이스라엘이 자기들보다 한 술 더 뜨는 아마샤 종교 이놈들이 우리를 욕보이고 우습게 여기고 돌려보낸 앙갚음으로 아마샤 백성들을 향해 오늘날의 쌍스러운 표현으로 말한다면 씹었다는 것이다(대하25:13). 이렇게 그들 종교가 씹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마샤 백성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있지를 못했다. 그들이 씹는대로 그래 맞다. 우리는 너희들보다 더한 에돔 정벌에 빠져 있는 죄인들이라고 인정했다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데 말이다.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얼굴에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그러나 아마샤 기독교인들도 그들을 대항해서 같이 씹었다. 그것이 여기 종교 전쟁이다. 아마샤 종교가 한번 대면하자고 선전포고를 했으니 북쪽 종교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웃옷을 벗고 덤벼들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원래 종교 싸움꾼들이기 때문이다. 북쪽 종교가 이렇게 웃옷을 벗고 공격해 온 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이다.

가시나무가 백향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백향목을 향하여 혼인관계를 맺자고 대들고 있으니 이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백향목이다. 백향목이 뭔지 너희들 아냐, 백향목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호14:5~7). 가시나무는 뭔지 아냐, 그것은 엉겅퀴야, 저주받은 자를 의미해 너희들 그것 아냐(창3:18). 솔직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북쪽 에브라임이다. 그렇지 않는가? 한 번 따져볼까나? 우선 교인 숫자가 많잖아, 야곱의 후손 대부분이 이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 너희들 그것을 알고 있냐? 그러니 당연히 예배당도 큰 것들이 많다. 목사들도 유능한 사람들이 많다. 교인들도 능력을 받은 교인들이 많다. 감사헌금 한번에 10억을 하는 교인도 있어야(강남 순복음교회). 여호와의 축복과 응답을 받은 자들도 많다. 그리고 뭐니 뭐니해도 우리 종교는 뜨겁고 살아있는 종교다. 북쪽 나라의 온 천지가 종교의 열정으로 힘쓸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종교에 비해 너희들은 뭐냐? 우선 너희들 유다는 교인들 숫자가 적다. 그러니 예배당 같은 예배당 하나 없다. 예배당이라고 보면 창고에다가 의자 몇 개 갖다 놓고 예배당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너희들 종교 안에 있는 목사들 중에 유능한 목사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그리고 교인들을 봐라 능력있는 교인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너희들 종교 열정을 봐라 종교 열정이란 찾아볼 수 없다. 너희들 피, 피, 외치는데 결국은 종교가 분명치 않아! 너희들은 종교가 없는 족속들 같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에돔을 추구하는 본성은 하늘을 찌르고 혀를 내두룰 정도다! 유다 종교에 대한 여로보암 종교의 이와 같은 조롱은 능히 받을만하다. 종교는 없는 것 같고, 어린양의 피 어쩌구 밤낮으로 말하면서, 에돔을 쳐서 삼키고자 하는 일에만 미쳐있는 자들이다. 아니 에돔을 도륙해서 이미 먹은 놈들이 너희들이라는 것이다(대하25:14). 그러니 너희들 원하는 대로 일이 잘 돌아가서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인데, 어린양의 종교고 뭐고 전부 다 집어치우고 너희들 집에서 잠이나 자빠져 자라는 것이다. 계속 이따위식으로 우리보다 더 음탕한 주제에 죄(본성)라면 사족을 못 쓰고 저지르고 보는 너희들 계속 까불면 죽는다는 조롱이다. ‘레바논 짐승(군대)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이같은 조롱대로 그들은 여로보암 종교로부터 개망신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대하25:21~24).

구속받은 아마샤 백성들의 존재라는 것은 이처럼 성전 종교에 있었기에 형식과 이름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했으나라고 명명되고 있었으나 온전한 마음으로는 행치 않는 존재성으로 있었던 것이다. 북쪽 종교의 말대로 아먀샤 백성들은 종교는 없는 자들 같았고 죄만 가득한 존재들로 현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 어린양의 피가 임한 아먀샤 백성들은 진정으로 에돔을 쳐서 먹고 싶어서 환장한 죄인들이었다. 에돔의 우상을 가져다가 섬기고 싶은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여로보암 교인들의 조롱이 여호와의 음성임을 알고, 오늘의 본문 그대로 우리는 에돔을 쳐서 에돔을 먹어버린 ‘죽고’ 싶은 죄인들이라고 실토를 했어야 한다. 그것이 여호와의 전의 종교를 신앙하는 자들이지 않는가? 이것이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소유한 구속받은 백성들의 모습이지 않는가? 다윗처럼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삼하16:10~11).

그런데 아마샤는 다윗을 저주케 하기 위해서 시므이를 사용하신 것처럼, 아마샤를 저주하기 위해 이스라엘 왕 요아스를 사용하셨으나 듣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며 그렇게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알려준다. 본문 대하25:20절에 "아마샤가 듣지 아니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저희가 에돔 신들에게 구하였으므로 그 대적의 손에 붙이려 하심이더라"라고 있다. 아마샤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여기서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다윗과는 달리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을 받은 바로 아마샤의 상태, 속살이었다. 아마샤가 그렇게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은, 하나님께서도 이 한계에 있는 인간을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한계 말입니까? 에돔이라는 우상을 통해 자기 몸을 섬기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린양의 피로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길뿐이다. 그리고 그 죄인들을 죽여서 어린양의 부활에 연합시키는 길 뿐이다.

역대하는 구속받은 아마샤 백성들에 대해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샤가 돌이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저를 모반한고로 저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모반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저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그 열조와 함께 유다 성읍에 장사하였더라"(대하25:27~28). 이러한 죄의 ‘한계’에 살다가 죽는 것이다. 성도는 죽어야 한다. 성도라는 죄인은 죽어야 한다. 모반을 당해서 죽든지 어떻게… 죽든지 죽어야 한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죄인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죄인은 흙이 안성맞춤이다. 죽을 가치가 없어서 아직 죽지 못하면 조금 기다렸다가 죽으면 된다. 죄인이 죽어야 약속의 땅인 막벨라 굴에 묻히는 것이다. 죄인이 죽어야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이다. 이처럼 구속을 받은 백성들이 죽어야 "그 실체를 말에 실어다가 그 열조와 함께 유다 성읍에 장사할 것이 아닌가요"(대하25:28). 그래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고 하였다(시116:15).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은 죄인 아마샤와 아마샤 백성들을 이렇게 죽여서 유다 성읍에 장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저희가 에돔 신들에게 구하였으므로 그 대적의 손에 붙이려 하심이더라(대하25:20). 이처럼 다윗언약만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찬란하게 무조건적으로 빛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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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