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2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3-지혜의 인격화
20100202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3-지혜의 인격화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202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3-지혜의 인격화
(강의:이근호 목사)
55페이지 중간에 보면, 거룩이란 말은 여기 그 말 그대로 읽어 드릴게요. “이 거룩이란 말은 결코 어떠한 윤리적인 의미에서 쓰여진 말이 아니라 야웨의 특별한 소유로 구별된 존재이다.” 침멀리는 벌써 구약에서 거룩을 구별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별됐다는 이 말을 함으로써 선택이란 의미를 여기서 찾아내는 겁니다.
구별을 시킨다는 말은 구별을 시키는 주체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분이 구별시킬 때 다른 것, ‘너는 아니고 이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침멀리가 그걸 의식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침멀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신약의 선택하고 달라요. 신약의 선택은 반드시 구원받기로 사랑하기로 선택했으면 반드시 미움 받기로도 선택이 있어야 돼요. 로마서 9장 같은 경우에. 그런데 침멀리는 구약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건 생각도 안하고 본인이 믿지도 않는 것 같아요.
아모스 3장 2절처럼, “여러 민족 가운데 너희만 알았나니”라는 말 아까 끄집어냈고 그건 이야기 안 하고 아까 했으니까. 구별시킨다는 말은 너희 민족과 다른 식으로 하는데 구별된 이걸 거룩이라 하고, 이걸 끄집어내는 행위를 선택이라 하고, 선택된 자에게 차이 나게 언약이라 본다 이 말입니다. 침멀리의 논리 전개가 그렇게 돼있어요. 거룩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기 때문에 침멀리가 이야기 안 하고 선택과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선택이라 하는 것은 결국 선택의 주체 문제죠. 누가 선택하는가? 여기에 56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 보면,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마지막 대목에 보면, “만일 야웨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선택이 일방적으로 뽑아낸다, 뽑혔다. 포크로 찍어내듯이 집어내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선택할 것을 정하라고 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는 여호아를 믿겠습니다’라고 해서 사람들 앞에 뭘 의식시키느냐 하면 배경, 선택될 여호와와 선택 안 될 신들이 어떤 신들이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는 전면에 부각이 되고 나머지 신들은 여호와보다 못하다는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침멀리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참 잘 본 겁니다. 왜 잘 봤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체로 끄집어낼 때 강제로 ‘너, 이리와’ 하는 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자꾸 네 속에 있는 마음 끄집어내라고 자꾸 뭔가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노출시키고 드러내는 식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끄집어내면서 그들은 뭐 하겠습니까? 처음에는 좋게 나올 때 ‘우리는 여호와 믿습니다.’ 하다가 나중에 어떻게 나옵니까? ‘여호와 믿는데 왜 내 인생이 꼬입니까?’ 이게 나중에 사사기잖아요. ‘여호와 잘 믿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삽니까? 여호와 잘 믿는데 다른 나라는 큰데 우리 민족은 안 큽니까? 에이. 여호와는 믿긴 믿되 다른 신들도 믿으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 다른 생각이 들 때 그들이 싫어하는 다른 신이 도리어 이스라엘을 구박을 하게 되면 다시 그들은 회개의 길을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거룩이 무슨 개념은 아니다? 윤리적 개념은 아니죠. 그러면 회개가 윤리적 개념은 아닌 거예요. 이것 때문에. 윤리적 개념이 반성이라면, 회개라 하는 것은 그 방향이 처음, 초심,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행했던 처음 은혜 그쪽으로 방향을 잡는 걸 회개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러니까 회개 개념을 하기 위해서 다른 개념들이 전부다 도입되는 거예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어떤 특정 개념을 잡아당기면 다른 개념 다 딸려 나와야 됩니다.
제가 십자가마을 댓글 올렸을 때 이런 글을 했지요. 어떤 사람이 왜 철학을 공부해야 되느냐 할 때 제가 이런 답변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가 기도의 응답이 된다는 말을 하게 되면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위하여 거기에 인류문화학, 언어학, 정치학, 신학, 철학 개입돼야 됩니다. 경영학도 개입돼야 되고.
왜 성경구절만 안 대고 그게 왜 개입되느냐? 인간 본성에서 철학이 나오고, 경영학이 나오고, 인류문화학이 나오고, 언어학이 다 나온다 말이죠. 사람들이 기도할 때 인류학적으로 기도한다고 이런 소리 안 하거든요. ‘주여, 기도하면 응답되지요.’라고 그냥 자기 존재에서 발산이 된다고요.
그러면 그 존재가 나왔기 때문에 구약을 보잖아요. 이제 본격적으로 알게 됩니다. 구약을 보게 되면 우리 인간이 육체로 돼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신약처럼 영혼을 자극하는 게 아닙니다. 전에 래드 할 때 영, 혼, 육 그런 개념 없다고. 그냥 인간 자체가 영이고, 인간 자체가 혼이고, 인간 자체가 육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룰 때 공속, 공속이라 하는 것은 공히 같이 속한 것 또는 동행하는 건데. 인간은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을 자극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언제 자기 마음이 나오느냐 하면, 살기 어려울 때 또는 자기감정이 나올 어떤 계기, 사건들. 예를 들어서 자기 복 받았다고 좋아할 때. 갑자기 양이 늘었다든지, 소가 늘었다든지 좋아할 때.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감정이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살점, 세포가 움직이면서 어떤 냄새처럼 풍겨 나오는 아우라, 후광 그런 것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과 동행할 때 같이 사람 되서 옆에 붙어봐서 떨어지니까. 같이 끌어안아 봐야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세포니까 교류가 안 돼요. 교류가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같이 동행할 때 사건을 주게 되면 인간에서 뭔가 뿜어 나오는 게 있어요. 사건 받아서 인간에서 행위가 나오죠. 행위는 노림수가 있어요. 행위가 주변에 있는 것들을 변화시켜요. 선지자에게 귀싸대기 때린다든지.
시드기야란 선지자가 왜 미가야 선지자 뺨을 때리지 않습니까. 뺨 때린다는 것은 이쪽 팔 근육이 움직여서 때린 것이고 팔 근육이 움직인 것은 오른 쪽 두뇌가 작용해서 때린 거잖아요. 주변에 있는 선지자의 뺨을 때리고 예레미야에게 욕설을 하잖아요. 그것도 주변에 있는 것을 반응을 드러내죠. 하나의 사건이 되죠. 변화가 일어나죠.
이 변화에 대해서 주님께서 축복과 저주로 응답하는데 그 근거가 언약입니다. 이게 동행하는 방법이에요. 아까 아바타 같은 영화에서는 머리카락으로 물리적으로 연결하잖아요. 해봐야 머리카락 섞여야 맨 각자 딴 머리카락이란 말이죠. 그게 아니고 인간이 주변의 상황을 자연을 변화시키려고 애를 쓴다고. 애를 쓰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인간의 미움, 시기, 질투, 핍박 이런 게 막 나온다 말이죠. 또는 저희끼리 마음을 합쳐서 단결 이런 게. 결국 이 노림수가 뭐냐 하면, 우리가 잘 살아보자, 편하게 살자. 주로 이런 쪽 아닙니다. 자기 편한 것, 육체니까.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동행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잘 살아보자 했는데 못 살게 되고, 편하게 살자 하는데 고생을 하게 만드는 식으로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노림수가 있다는 겁니다. 노림수가 대자연의 변화지만, 이 변화가 내 몸 하나 편하고, 내 몸 하나 잘 사는 것이 이게 바로 사람들이 원하는 노림수인데 인간이 사는 이 환경을 힘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거로 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환경을 구약에서 성경에서 한 자로 이야기해요. ‘땅’이다 이 말이죠. 땅에서 저주가 올라오고 땅에서 곡식을 내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누가 힘들어요? 땅에 사는 사람이 힘든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너희와 함께 있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정리해보면, 인간은 자기 살 중심으로, 하나님은 축복과 저주 중심으로. 축복과 저주의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면 복을 받고, 못 살면 저주 받는다. 이건 창세기 4장, 8장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심지어 아브라함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특히 야곱이 자기 노임을 못 받으니까 자꾸 열 번이나 변경을 시도하니까 화가 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노하우를 집어넣죠.
야곱의 소유가 늘어나면 상대적으로 라반이 줄어드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했구나.’ 라반이 하는 말이. 그건 에서도 마찬가지고. 항상 기준은 뭡니까? 땅이죠. 길게 한 걸 간단하게 뭐냐? 하나님의 언약은 땅과 관련돼있다. 그러면 우리는 땅 없이는 못 사는데. 그렇지.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땅에서 저주 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이 없으면 땅을 주관하시는 언약을 봐야 될 텐데 예수 안 믿는 의사, 예수 안 믿는 판사, 검사들은 뭘 집착합니까? 여전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판사 때려치우고 국회의원 할까, 뭘 할까, 권력 쥘까 자꾸 땅에서 벗어나지 못해. 땅에 승부를 걸어요. 이것 때문에 교회 오고. 교회 오다가 목사한테 걸려서 성경공부하고.
그렇다면 구약의 언약은 땅과 관련돼있다. 신약의 새 언약은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는데 이 땅이 유대인들한테는 그 땅으로 보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서서히 땅에서 뭘 보이느냐 하면, 이 땅이 예수님 계신 곳으로서의 땅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땅에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면 뭐가 땅이 됩니까? 하늘이 예수님 곳이 되고, 예수님 재림하셔서 이 땅에 오게 되면 주님 계신 곳이 그게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개념이 어디로 흡수 통합되느냐 하면, 예수님 하신 그 십자가 복음 안으로 모든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은 축복이 되고, 예수 바깥은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어라. 간단한 거예요. 구약에서는 언약을 믿어라. 왜냐하면 언약 사람들은 땅+언약이 이스라엘. 그렇지 않고 언약 없으면 저주 받는 이방나라. 구약의 그 개념이 신약에 와서 예수 안에 있으면 축복이고, 예수 밖에 있으면 저주가 되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 같은 경우엔 축복이죠. 스데반 집사도 축복이고.
그런데 ‘예수 안에’ 거기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라든지, 거지 나사로 안 될라 해요. 기왓장으로 긁고 이런 거 안 하려 해요. 개가 핥고 이런 거 안 하려 합니다. 핥더라도 촌에 안 보이는 곳에서 하고 그러지. 온 동네, 성문교회 앞에서 ‘저 사람 봐. 옛날에 목사였던 사람이야.’ 이런 소리 안 듣고 싶단 말이죠. 그리고 자기 동창생 부잣집 바로 앞에서 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이거는 얼마나 인간으로선 도대체.
그래서 신약의 새 언약은 굉장히 어려워요. 구약은 간단한데. 구약은 땅으로서 축복과 저주를 표현한다. 아주 쉬운데. 신약은 표현할 게 없어요.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하니까 너무 추상적이에요.
진도 한번 나가 봅시다. 59페이지 봅시다. [시내산의 하나님의 계약과 계명] 다시 합시다. 거룩이라는 것은 분리된 걸 거룩이다. 거룩이란 것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다. 이건 확실하게 명심해야 되고요. 그 다음에 거룩을 짜는 주체문제는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일방적으로 뽑아낸 게 아니고 선택은 인간들이 자기 본성, 먹고 살라는 것, 생존에 입각해서 선택할 것 아닙니까. ‘나는 내 땅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어.’ 자기 선택을 해놓고, ‘그게 아니거든’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한다고 했지요.
그걸 첫째 시간에 우리는 존재 중심인데 하나님의 선택 개념은 존재 중심을 언약으로 잘라버리고 하나의 사건 중심으로 이 존재 중심을 어디로 끌고 갑니까? 장차 새 언약 쪽으로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끌고 갈 때 공속, 동행이라 하고. 그래서 자기 백성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린 적이 없지요. 이스라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이 늘 바뀌죠. 이스라엘이란 틀은 변함이 없는데 구성원은 늘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에서 땅 중심으로 축복과 저주가 오는데 땅이 힘들게 하면 자기 백성은 저주에서 복으로 바꿀 때 ‘축복주세요’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구나’ 하는 쪽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따라서 땅 중심이기 때문에 그 점을 다시 설명을 해야 되지 싶어요.
땅+하나님의 백성=국가 이스라엘 되지요. 하나님의 백성 된다는 개념을 침멀리는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끄집어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 언약을 끄집어내야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이 백성이 애굽에 갈 때 애굽 나라가 이 사람 히브리인들은 자기 땅인 줄 알은 거예요. 애굽 땅인데. 그런데 이 땅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그 땅이 그 땅이 아니라는 거예요. 약속의 땅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일단 나왔어요. 일단 나왔으니까 이 사람은 땅이 없는 거예요. 땅 없음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이는 언약을 이해 못한다는 겁니다. 제가 어제 강의할 때 그 이야기했습니다만 요셉하고 야곱 둘 사이에 요셉은 잡혀서 애굽의 총무대신 돼있고, 야곱은 가나안 땅에 있을 때 여기에 언약이 간여하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는 건 요셉이 자기 동생 같으면 한번에 다 오라 하면 될 텐데 이게 세 번 왔다 갔다 해요.
처음에는 시므온 잡아놓고, 그 다음엔 베냐민 놓고 세 번째는 마차 보내서 아버지 데려오죠. 세 번씩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냥 만약에 요셉이 첫 번째 알아버리면 야곱의 자기 세계, 자기 생존의 구조 안에 요셉을 그냥 첨가한 것밖에 안 돼요. ‘야. 우리 동생 하나 똑똑하게 뒀구나. 사법고시 합격해서 국무총리 됐네.’ 이미 자기 구조를 안 잃어버린 채로 현재 있는 구조에다 괜찮은 동생 하나 온 게 되지만
요셉의 구조에 이들이 오려면 요셉이 경과했던 것, 지나온 과거 누구한테 버림 받았어요? 형한테 버림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야곱과 형들은 자기가 자기 생각한테 버림받은 경험이 있어야 요셉이 돼요. 내가 나한테 실망해야 된다고요.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죄라는 걸 알아야 돼요. 내가 구원받고자 애쓰는 자체가 죄라는 걸 알아야 돼요. 그러면 온전하게 요셉 구조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다 버리고.
요셉도 국무총리 되기 전에 뭐했습니까? 자기가 꿈꾸던 요셉 아니에요. 그것마저 박살나버리고 진짜 지하 감옥에 있어서 그래야 ‘내가 된 것은 아버지 주신 언약대로 되는구나’를 아는 것처럼 지금 야곱이나 형들도 요셉의 세계를 알려면 자기가 자기한테 실망해서 자기가 미워져야 돼요.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하는 건 본인이다. 그럼 내 구원을 본인이 방해한다면 나의 선택, 나의 개념, 내 생존 이것도 뭘 방해합니까? 실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훼방자가 내가 되는 거예요. 나는 훼방자요, 폭행자요 죄인의 괴수로다.
나사렛 예수를 이단이라 해서 사울이란 사람이 왜 공격했습니까? 다 자기 살려고 한 거예요. 자기 구조를 못 버려서 그런 거예요. 그 잃어버림이 있어야 되는데 교회에서 이런 식으로 하면 참 교회에 아무도 안 남을 겁니다. 남는 게 기적이죠. 주께서 복음 듣게 하셔야 남지 사람 힘으로 꼬셔서 회유해서 될 수가 없어요. 교인은 될지 모르겠지만 성도는 안 되겠지요.
지금 침멀리가 여기서 아주 잘 본 게 있어요.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이 아니라 했어요. 아직까지 광야에 있을 때. 이스라엘 되려는. 물론 명칭은 ‘너는 이스라엘이라’ 했지만 땅이 없기 때문에 늘 쫓겨 다니는 위험부담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들에게 목표를 줬죠. 너희들은 반드시 국가 이스라엘이 돼야 되고 나라가 돼야 된다. 그렇다면 선택은 됐는데 선택 내용은 없다. 그 내용은 뭐냐? 언약입니다.
이제 언약을 봅시다. 언약에 들어가려면 아까 요셉과 야곱처럼 기존에 있던 뭐가 다 빠져야 됩니까? 기존에 언약 아닌 것, 그걸 성경에 애굽적인 것. 애굽으로 돌아간 사람 다 죽여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건 돌아갈 것도 없어요. 그리고 너희들이 보고 있는 놋뱀처럼 하나님한테 까불면, 놋뱀을 들었다는 말은 뭐냐? 뱀을 주체가 하나님이 보냈다. 너희들이 우연히 불뱀 많은 곳에 가서 불뱀 온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물어 죽이려고 일부러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낸 당사자가 바로 우리를 저주케 하신 그분을 믿어야 구원받는다.
그러니까 십자가한테 공격받아봐야 그 사람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 돼요. 우리는 자꾸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잖아요. 믿지 말고 얻어맞아야 되죠. 십자가를 자꾸 소유하려 하지 말고 얻어맞아야 돼요. 십자가에 오만 볼트 전기를 깔아놔야 돼요. 이게 어데? 시커멓게 타버려야 돼. 십자가 손대면서 타야 돼요. 시커멓게 탄 그것이 저주받은 내 모습인 줄 알아야 됩니다.
그걸 그들은 광야하면서 애굽적인 것을 끄집어내는 게 애굽에 주신 양식 주는 게 아니고 이게 뭐꼬? 만나죠. 만나를 줌으로써 만나를 뭐로 봅니까? 만나를 가지고 너희 마음을 낮추라. 마음을 비워라. 또는 애굽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라. 그런 것 비워내라. 그리고 아말렉 전쟁할 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지팡이 들면 다 된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어떤 틀, 구조를 가지고
그럼 그 내용이 뭐냐 하는 겁니다. 언약이 나오는데. 계약이라 돼있지요. 참 골치 아픕니다. 여기에 계약이란 공동의 책임을 말한다. 침멀리의 이야기입니다. 침멀리가 이런 소리 할 때는 신약의 십자가를 의시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딴에. 공동책임이란 말은 뭘 의식합니까? ‘대속’ 이게 떠오르죠. 네가 안 돼? 그럼 내가 나설게. 왜? 우리는 공동책임이기 때문에.
공동책임이라면 목적하는 바가 있죠. 나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고 너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언약은 언약 그 자체를 위해서 공동책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유지돼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책임이라는 설에 굉장히 유력한 거예요. 신약하고 맞는 거예요. 이걸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이루려 함이 아니라 아버지 뜻을 이루려 함이라.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 뜻? ‘배고픕니다. 오병이어’ 하죠. 자기 뜻이죠. 예수님은 자기 뜻 행하려 왔잖아. 저도 강의하다 보면 이런 비난 많이 들어요. 특히 복음에 불만 있는 사람들이 엄청난 모독적인 말을 많이 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님은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밖에 모른다는 걸 탓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밖에 모르듯이 우리도 우리밖에 모르는 걸 봐줘.’ 이 말이에요. 얼마 전에 손성식 목사 그거 아닙니까.
그런데 침멀리의 이론은 강력하게 반론거리를 갖고 있죠.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거야.’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 언약에 말씀에 관심이 있는데 예수님 시험했던 악마들은 ‘너 잘돼야지. 예수, 너 편해야지.’ 악마가 그런 소리한다는 것은 악마가 악마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악마가 하나님 뜻은 관심 없고 하나님 뜻을 몽땅 훔쳐서 악마 자기가 신 되려 했잖아요.
그리고 그 성질을 우리한테 그대로 물려줘서 우리도 하나님 뜻도 관심 없고, 예수도 관심 없고 교회 오면 기도하는 게 자기 공부 잘 하고, 사업 잘 되고, 자기 몸 편하고 자기밖에 모른다 말이죠. 그러니까 침멀리의 언약 개념은 진리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공동책임이기 때문에 여기서 침멀리가 어렵게 나가요. 언약은 뭐고, 계명과 차이점은 뭐냐? 우리한테 질문하는 겁니다. 계약과 계명의 차이점. 침멀리는 말합니다. 계약은 전체 외부에 나타난 포장지를 말하고, 한쪽에서는 법이 들어있다. 계명을 뭐로 봅니까? 왜 언약이 있고 법이 들어 있느냐? 법이 있어야 공동책임을 얻을 수 있다. 공동책임이라 하는 것은 결국 죄를 끄집어낼 수 있단 말이죠. 죄란 것은 법이 있어야 성립되죠.
그런데 침멀리가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법이 있더라도 그 법을 지키는 법을 또 만들어야 되고, 그 법을 지키는, 법을 지키는 법을 또 만들어야 돼요. 지금 침멀리가 여기까지는 잘 왔어요. 공동책임까지 잘 왔다고. 공동책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체적인 선택을 쳐다봐야지 각자 자기 야욕 채우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약이 파기된다고 보거든요.
쳐다볼 때 만약에 내용이 법이잖아요. 십계명이 법이니까. 예를 들어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법이 주어졌을 때 이 법이 모세를 통하든지 누구를 통하든지 들려왔단 말이죠. 들려오게 되면 인간 속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언어를 해독하는 구조가 있겠지요. 구조가 있는데 인간 속에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따먹었으니까 선한 이미지 하고 악한 이미지가 대립돼있겠지요. 그러면 위에서 법이 오게 되면 분류작업이 됩니다. 이건 선한 것, 이건 악한 것 분류를 하는 거예요. 탐내면 악한 것, 탐 안 내면 선한 이미지라고 분류가 돼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공동책임이니까 하나님하고 공동책임이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생각한 십계명 법 따로 있겠지요. 지금 침멀리가 인간이 생각하는 법은 이야기하면서 뭐는 이야기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생각하는 법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고 있습니다. 왜? 구약에 안 나오니까. 사실은 나오는데 그걸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분명히 공동책임이라 해놓고는 모든 계명이 공동책임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한 거예요. 명령한 건 공동책임이 아니잖아요. ‘술 사 온나.’ 이게 무슨 공동책임입니까? ‘안 사와? 내 사 올게.’ 이건 아니란 말이죠.
침멀리가 기존 언약개념의 모순점이 뭐냐 하면, 공동책임이 되려면 그 법 제정에 누가 관여해야 됩니까? 인간이 관여해야 되죠. ‘하나님 이 법 좀 빼주시고 우리가 지킬만한 법을 해줘야지 탐내지 말라는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건 네가 배고플 땐 탐내도 괜찮다든지 유도리 있게 해 달라. 처음부터 관여해서 그게 할 수 있는 걸 의제로 올려서 공동결의문처럼 해서 그렇게 하는 거라는 거예요. 그게 언약이라 하는 것이 그 당시 상인이나 종족 간에 한다면 상호 납득이 되는 걸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 개념 해놓고 지금 납득이 안 돼요. 일방적인 명령만 했다 말이죠. 그 점에 침멀리가 아무 소리 못하고 있어요. 현재 나온 모든 언약 개념의 문제가 그겁니다.
법을 쪼개서 너 하나 갖고, 나 하나 갖고 이건 좋아요. 베리트란 말이 깬다. 깬다고 전체가 날아가는 게 아니고 각자 전체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공동책임이란 말을 하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 인간의 의사를 반영해주지 않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침멀리가 63페이지 봅시다. 중요한 걸 끄집어냈어요. 제 뜻을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다만 침멀리 이야기만 나열하고 있는 거예요. 63페이지 제일 위에 보면, 호렙산에서 언약을 세웠지요. 이 언약은 우리 열조와 세운 것이 아니요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는 우리와 세운 걸로 돼있지요. 신명기 5장 2, 3절.
이것은 침멀리가 잘 지적했듯이 호렙산, 시내산 계약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계약이 잃어버린 거죠. 마치 박태환이 수영하면 카메라가 이동하고, 우샤인 볼트가 뛸 때 같이 달려가면서 찍죠. 침멀리가 발견한 게 뭐냐 하면, 언약은 같이 동행하고 있다는 거예요. 동행하면서 체결이 한번에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그 시대, 시대마다 체결이 성립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근거가 뭐냐?
이런 이론이 만약에 근거가 된다면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마지막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십자가와 계약관계가 성립되니까 상당히 유효한 논리가 되겠지요. 하지만 구약에서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답변이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는 되는데 왜 그렇게 되는지 어떤 논리에 의해서 그게 나왔는지에 대해선 답변이 없어요.
그건 침멀리가 뭘 빠뜨렸느냐 하면 바로 인간의 죄를. 그러니까 박태환이 수영할 때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찍기만 하지만 주님의 동행은 찍기만 하는 게 아니고 죄를 유발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법으로 닦달 내는 겁니다. 계속해서 나무라는 거예요. 나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애굽적인 요소 그러니까 인간적인 요소, 악마적인 요소가 계속해서 여기서 터져 나와야 되겠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봐서는 이만하면 비울 대로 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죄가 드러날 때 언제냐? 이만하면 나도 신자다 했는데 죄가 언제 드러납니까? 하나님께서 새로운 환경 속에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주여, 난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하다가 누가 물만 튕기면 ‘이게 씨.’ 이렇게 되지요.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하다가 갑자기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면 ‘살아야지’라는 새로운 게 나온다 말이죠. 그런 환경을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백날 해도 살고 싶은 게 네 속에 들어 있잖아. 빨리 자백해라.’라는 식으로 계속 끄집어내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이만하면 죽어도 좋습니다’ 하면서 계속 가는 거예요. 이게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뭐라 했습니까? 여기가 좋다 해놓고 혹시 중간에 성경책 째진 사람 보면 이상하게 생각해요. 여기가 좋사오니 해놓고 나중에 요한복음 보면 세 번씩 부인하고. 도대체 같은 인간인지 구분 안 되지요. 초반에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다가 나중에 예수님 배반해버리고.
그래서 저는 이걸 인간의 무의미성인 거예요. 인간의 무의미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마지막에 사랑한다고 몇 번 묻습니까? 세 번 묻지요. 네가 사랑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 베드로 눈치 채요.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사랑한다고 하면 되는데 자기가 말을 못해요. 주체를 자기에서 주로 옮겨버려요. ‘내가 백날 사랑한다 해도 내 입이 부끄럽습니다. 내가 말을 해도 의미 없는 겁니다. 하지만 주께서는 아십니다.’ 그 주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주체를 베드로에서 옮겨가는 거예요.
그래서 죄를 끄집어내는 것은 사람을 낯 뜨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구원의 주체가 누구한테 달렸다? 이게 바로 언약에 신경 쓰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다? 우리는 언약에 관심 없어요. 우리는 생존에 관심 있어요. 밥이나 먹고 존재에 관심 있는 것에 반해서 언약에 관심 있는 분은 언약 이루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따라 붙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제가 어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죽음이라는 게 우리가 원해서 온 게 아니죠. 죽음이라는 게 덮치듯이 생명도 우리가 좋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냥 죽음이 어쩔 수 없이 찾아오듯이 구원도, 영생도 그냥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이제는. 죽어도 지옥 못 갑니다. 팔자가 그렇게 됐어요. ‘죽어도 좋습니다.’ 백날 다짐에 다짐을 해도 우리는 죽기 싫어요. 우린 죽는 게 겁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천국 가기 싫다 해도 가게 돼있습니다. 그게 뭐냐? 언약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래요.
이 점을 침멀리가 여기서 파악해내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파악하는가? 제가 그걸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침멀리가 계속해서 자꾸 언약을 누구하고 언약했다?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언약했다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하고만 언약해요. 인간하고 언약 안 합니다. 그러면 인간한테 언약을 세운다고 돼있는데 그 인간은 로봇인가, 개, 돼지냐?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다 중앙, 중심지를 만들어요. 삽으로 파는 겁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내가 용사가 되서 애굽에서 끄집어낼 때 나의 성소를 너희들 가운데 두는 거예요. 중앙지가 성립되면 중앙지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주하는 곳이고 장막이며 법궤며. 그러니까 침멀리는 뭐냐? 법, 법 하지만 법의 마지막 종착점을 이야기 안 해요. 십계명만 이야기했지 십계명에 뭐가 뿌려진다? 피를 뿌리려면 제물이 필요하고 제사 드리는 지점이 있어야 되고, 여기에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오고. 왜 이름이 등장하느냐 하면 복이 오고. 복은 딴 데 안 옵니다. 중심지에 와요.
봅시다. 출애굽기 20장 24절. 십계명 이야기 해놓고 침멀리 말대로 법 이야기했습니다. 법이 언약 맞아요. 맞는데 법은 중심지를 향한다는 거예요. 침멀리는 법이 나한테 향한다. 나한테 향하는 게 아니고 나한테 삽으로 파요. 영화에 보면 권총 같은 것 숨기기 위해서, 밀수하기 위해서 책 파내고 권총, 마약 숨기잖아요.
주님께서 우리한테 파내고 법을 줘놓고 법제화시켜요. 완전히 법 덩어리입니다. 법 줘놓고 출애굽기 20장 24절처럼 우리에게 성소를 내서 화목제물을 심어놓으니까 우리는 축복과 저주가 뭘 겨냥한 축복과 저주냐 하면, 성소를 드러내는, 주의 피를 드러내는 축복과 저주인데 우리는 무엇과 관련시키느냐 하면, 내 세포 유지와 관련된 축복과 저주인 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 파악하는데 신약까지 가야 돼요.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게 합니다. 우리 성전이 아니고 그리스도이 성전이에요. 성령의 성전이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유일한 의인이 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의인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우리가 의인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헵시바라는 다음에 보면 누가 도배를 해놨어요. 반대한다고. 정낙원 목사님의 글을 새 생명 글을 올려놓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욕설까지 해서 화가 나서 한다고요. 그래서 제가 글을 하나 올렸어요. 뭐냐 하면, 사람이 자꾸 자기 생각하니까 내가 의인 되는가, 내가 죄인 되는가 따지는데 이미 우리 안에는 말씀이 와서 관절과 골수를 다 파내버립니다.
파내버리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담기면 하나님은 누구하고 계약하겠습니까? 우리하고 계약한 게 아니고 우리는 인간도 아니에요. 우리는 흙이고 누가 인간입니까? 예수님이 인간이죠. 예수님이 하나님 형상이고 맏아들 되신 예수님과 계약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의인되니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누구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증거할 줄 모르면 그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증거하면서 자꾸 뭐라고 우기느냐 하면 자기가 산 자라. 여기 가까운 교회에 계십니다. 왜 자꾸 이근호 목사는 우리가 살았는데 자꾸 죽었다 하느냐? 네가 산다하는 건 산 게 아니고,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 해야 산 거다 말이죠. 성령을 안 받아서 그래요. 이장우 목사님 강의하실 때 잘 이야기해줘야 돼요. 자칫하면 자기 잘난 척하고 돌아다니거든요. 복음 안다고 잘난 척한다고.
안에 하나님이 주신 중앙지, 파낸 자리가 있어야 돼요. 그 파낸 자리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죽음에 넘기우고 그러니까 우리가 중앙이 아니고 변두리에 있는 우리의 주체는 만날 중앙지에다 죽음에 넘기우고 주님의 성령으로 죽은 자가 날마다 중앙지에 넘겼기 때문에 살고, 그래서 우리는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유한 자고. 이게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중앙지 하고 예수님 아버지 되시는 아버지하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모르면 계약 당사자도 몰라요.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계약했는데. 그게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하는 거잖아요.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하는 게 계약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 보고 예수님이 나를 믿어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 말이 너하고 나하고 따로 논다는 게 아니고 하나 된다는 거예요. 하나 된다는 것이 동등하게 된다는 게 아니고 나는 완전히 주님 앞에 중앙지를 주체를 주님한테 다 이미 양도 돼버린 상태란 말이죠. 다 파낸 상태가 돼버려요.
침멀리에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당신처럼 되면 계약이 누굽니까? 여호와 계약이죠. 계약 당사자가 이스라엘 같으면 하나님이 각자 머리 위에 동행하면 돼요. 그게 아니에요. 분명히 해놓고 어디를 동행한다? 법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어디에 올라옵니까? 각자 머리에 올라옵니까? 각자 머리에 올라오는 것은 신약 때 오순절 이후에 각자 우리한테 오는 것이고 구약 때는 뭡니까? 성소에서 구름 기둥, 불기둥이 있잖아요. 왜 그것과 연관을 못 시키느냐 말이죠.
법궤의 의미, 그 십계명이 어떻게 방치됐는가? 십계명이 각자 속에 있습니까? 십계명은 상자에 담겨서 증거궤, 법궤죠. 일년에 한 번씩 피를 뿌려서 그래서 그게 하나님의 긍휼의 증거로서 오잖아요. 그래서 증거궤 아닙니까.
복이 어디로 옵니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증거궤는 포기 못한다. 그래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 빼앗겼는데 증거궤 혼자 돌아다니면서 누굴 다 쳐버려요? 나중에 블레셋이 ‘아이고 감당이 안 됩니다.’ 하고 토해놨는데 그걸 겁 없이 그냥 만지다가 웃사가 죽어버리고, 다윗은 좋다고 곱게 모셔서 오니까 미갈은 그것도 모르고 남편이 주책 핀다고 하다가 저주 받은 자 되잖아요.
축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뭣을 인정할 때 축복이고 무엇을 인정 못하면 저주다? 주님이 우리 중앙지를 완전히 파버렸다. 우리 안에 언약이 있는 걸 인정하면 그건 축복이고, 언약을 인정 못하면 그건 저주가 되죠. 거지 나사로나 스데반 집사 죽어도 그건 축복 받은 사람인데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한번 제 의견을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법궤 할 때는 이것이 언약을 위해서 한다는 점은 침멀리와 나하고 같으나 언약이란 법이 지향하는 건 침멀리가 놓치고 있다. 그게 어디냐? 여호와 이름이 임재하시는 바로 법궤, 피가 하나님의 언약의 피를 모세가 머리에 뿜는 것, 출애굽기 24장에, 이것이 바로 언약의 피란 말이죠. 그 피를 위한 법이지 법으로 우리 살려고 하는 건 축복이 아니고 피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그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 된다 이 말입니다.
조금만 더 해봅시다.
65페이지 봅시다. 침멀리가 궁금한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중간에. 그렇다면 하나님 면전에서 먹는 식사는 뭐냐? 화목제물 마치고 난 뒤에 식사하죠. 화목제는 식사용도로 하는데 식사의 의미가 뭐냐 할 때 이걸 침멀리는 공동책임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같이 누린다. 같이 식사한다.
그런데 침멀리의 이런 주장은 어디에 효과가 있느냐?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이것은 바로 주님과의 공동식사를 말하는 거고 그것이 되풀이 된 게 성만찬이었지요.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라 해서 화목제의 완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럴 때는 하나의 중요한 논리적인 근거를 구약 때부터 제시하는 거예요. 화목제의 공동식사다.
여기 식사할 때 앞에 무슨 절차가 있는데 절차를 지금 침멀리는 놓치고 있어요. 그냥 처음부터 식사하는 게 아니잖아요. ‘양 내라’ 이러지 않잖아요. 여기 속죄제, 속건제를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드리고 그 다음에 화목제로 식사한다고. 그렇다면 식사하기 전에, 그러니까 양을 뜯어먹기 이전에 양을 우리 죄 때문에 안수하고 피를 내고 죽여야 된다고. 그런데 식사가 흠 없는 양의 죽음 안에서의 식사죠. 그냥 식사는 안 되고 죽음 안에서의 식사죠. 죽음 안에 들어가면 어떤 혜택이 있느냐 하면, 더 이상 죽음의 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관여하지 못하죠.
그러면 전체 식사 앞에 이걸 식사를 포함해서 법이라 하죠.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하는 것은 죽음을 하는 건데 결국은 우리가 관통 못하고, 이야기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식사를 한다는 자체가 이렇게 자리를 베풀어 준다는 자체가 일방적인 주님의 은혜가 되죠. 주님 은혜가 되면서 이걸 관통하고 흠 없는 제사 관통해서 이걸 마무리하는 것은 인간들끼리 식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이 식사에 동참 여부에 달려있는데 이것은 앞에 있는 제사가 주 앞에 응답이 될 경우에만 식사가 되고, 만약에 응답이 안 되면 식사 못하는 거예요. 결국은 이 식사에 관여한다는 것은 이 식사를 먹을 때까지 모든 절차는 누구 은혜로 했다, 누구 능력이다? 바로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써 네가 식사에 참여한 줄 알아라가 되죠.
그래서 여기서 65페이지 중간에 보면, ‘하나님 면전에서 식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라고 해놓고, ‘식사는 계약체결을 할 때 수반하는 계약의 확증이다.’ 확증이라 하지 말고 완성이라는 게 옳죠. 다 이루었다. 내 피와 내 살. 그러니까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 십자가 사건으로 다 이룬 거예요. 왜 이루었느냐 하면, 마지막 마무리 제사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한테 행함 같은 게 필요 없습니다. 예수의 피와 살 이것이 믿어지고 그걸로 완료됐다는 게 믿어진다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는 중앙지가 중심지가 있어서 그 중심지에서 나오는 화목제물 그 식사로 인하여 우리는 날마다 감당할 수 없는 영생의 은혜를 받고 있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증거해야 될 축복이 예수님이 다 이루었던 그 죄와 죽음과 저주를 이기는 그 능력이 우리가 증거할 축복인 줄 아노니 이 축복을 누리면서 또 증거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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