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3-지혜의 인격화
2010020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3-지혜의 인격화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20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3-지혜의 인격화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46페이지까지 했는데 47페이지에 보면 [창조주요 왕이신 야훼]라는 제목이 나와 있죠. 거기에 침멀리가 잠언서 1장에서 9장에 나오는 지혜를 인격적으로 묘사하는 대목에 있어서 기존의 조직신학에 이야기하는 걸 완전히 뒤집는 이야기를 했어요. 아마 여호와증인은 좋아라 할 내용을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잠언 8장에 나오는 지혜란 것이 피조물이라는 거예요.
피조물인데 그냥 보통 인간과 다른 피조물은 아니고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한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형성과정에서 중세나 초대교회 신학자들이 이 대목을 살피지 않는 게 아니거든요. 다 살피고 난 뒤에 잠언서 8장에 나오는 그 지혜가 과연 피조물이냐? 아니면 창조주냐? 창조에 관여했다는 때문에 문제 삼는 건 아니고 그건 다 인정하니까. 문제는 피조물이냐,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침멀리가 주장하는 것은 구약에는 두 분의 신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는 구약학자기 때문에 신약은 손대고 싶지 않고, 구약에는 유일신이기 때문에 신은 항상 하나로 표현되지 구약부터 신이 둘 될 수 없다고 나오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중세나 초대 삼위일체에 참여했던 신학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반발하겠습니까? 아마 침멀리 보고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유일신’ 하고 ‘하나의 신’을 당신은 혼동하고 있다. 유일신하고 단일신하고 다르다는 겁니다. 조직신학에서는.
어떤 점이 다르냐 하면, 인간의 입장에서 신1, 신2, 신3 여러 가지 신이 있는데 이런 신들은 전부다 허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라고 할 때는 이것은 단일신이 되죠. 신이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신, 신, 신 여러 가지 신이 있더라도 이 위에 총괄하는 신이 있다면 이쪽 신하고 다른, 높이에서 다르겠죠. 이거는 유일신이 되겠죠.
유일신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인간이 바로 신에게 접근하는 게 아니고 뭘 하나 중간에 거쳐서 유일신이 나오겠죠. 그냥 바로 못 간다 말이죠. 그냥 안 거치면 단일신이 되니까. 뭘 거치느냐 하면, 신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신들과는 차별되는 신들보다 신 위의 신이라고 할 때 이런 신과 격이 다른 그런 높은 신 그럴 때 그게 바로 유일신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잠언서에 나오는 지혜라는 것이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사실은 구약에서는 밝혀지기 힘들죠. 왜 힘드냐 하면, 유일신이기 때문에 여기 만약에 진짜 하나님의 뜻이 두 분의 신을 내미는 것이 본 뜻 같으면, ‘내 옆에 또 하나의 신이 있거든.’ 이렇게 나와야 될 텐데 잠언서 8장에 보면, 내가 지혜를 펴고, 지혜를 만들고 했다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지혜롭게 창조했다. 이거는 신이 몇 분이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질서가 있느냐, 없느냐? 그 문제다 이 말이죠. 그냥 무질서하게 혼동 가운데 방치되어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리원칙 가지고 잡고 뭔가 원리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왜 지혜가 이래야 되느냐 하면, 지혜가 짜임새, 구조죠. 구조가 돼버리면 인간들이 어디에 포착되느냐 하면, 이 지혜대로 살아야 인간들은 생명을 얻고, 만약에 지혜대로 안 살면 인간은 죽게 되죠.
그러면 이 지혜는 어떤 기능을 갖고 있습니까? ‘사느냐, 죽느냐? 생명이냐 아니면 죽음이냐?’를 가르는 기준이 되겠죠. 지혜가. 이 말은 곧 지혜가 없이 인간들이 단독적으로 살겠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음이다. 또 한 가지는, 인간들이 유일신에게 접근하려면 반드시 지혜를 거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도 이야기하죠.
짜임새, 세상은 하나의 무수한 변화가 있고 여러 가지의 혼돈이 있다 할지라도 다 하나님의 짜임새대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에 이런 사상이 팽창했던 것이 유대주의 또는 필로의 신비주의, 유대교적 묵시문학. 그런데서 굉장하죠. 그중에 한 사람이 최근에 20세기에 아브라함 헤셀, [예언자들] 책이 있지요.
그 사람들에게는 메시아를 믿으라, 잠언서 8장에 나오는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모든 틀과 규정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확정이 됐는데 이게 뭔가 미흡하다든지 이래서 세상이 설명 안 된다든지 체제가 안 잡혔다든지 하면 ‘우리가 뭘 잘못 알았구나.’라고 틈이 발견할 텐데 유대주의 자체가 완벽해요. 완벽하니까 예수님이 밀침을 당했잖아요. 그 자체가 완벽하다니까. 유일신께서 지혜로 오셨고, 그 지혜를 우리가 순종하면 그게 곧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살아갈 수 있는데 여기에 무슨 틈이 있어야지. 틈이 없는데.
그래서 인간 속에 지혜가 모든 일상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면 그 인간 자체가 바로 움직이는 지혜가 되겠지요. 그러면 잠언서에 나오는 모든 일상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성취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 성화주의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니까요. 죄 씻는 문제에 대해서 잠시 예수님이 다녀갈 뿐이고, 떼어버리고 나머지는 유대교가 적당하다 이 말이죠.
유대교라는 것이 아마, 아마가 아니라 확신하건데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의 완벽한 체제가 유대교적 체제가 아닌가. 신이 있다면 그 완벽한 체제가 유대교 체제입니다. 하나의 질서를 잡힙니다.
그래서 침멀리가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에 관여했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유대교처럼 하면 문제가 없는데 침멀리처럼 돼버리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곧 말씀인데, 모세도 마찬가지고 지혜도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 주면 되지 왜 말씀, 지혜가 인격화 될 이유가 없어요. 괜히 인격화 되면 간섭하잖아요. 하나님께서 말씀 주면 말씀 지키면 되잖아요.
오늘 강의에 ‘지킨다’는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가 생각해봐야 되는데. 지킨다는 의미가, 봅시다. 출애굽기 31장 16절, 17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거기까지만 봅시다. 문제는 ‘지켜서’라고 거기까지만 나왔다고 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가 뭡니까? 어떻게 지킬 것인가?
백 사람이면 백 사람마다 안식일 지키는 방법이 다 다르겠지요. 전부다 마음으로는 안식일 지키겠습니다. 안식일을 다른 날들과 차별해서 스물네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그러면 차별해서 보내는 그 내용, 스케줄을 제시해봐라. 백인백색, 다 다르단 말이죠. 그중에서 뭘 집어내어서 지키는 겁니까? 침멀리가 이런 걸 모르는 거예요. 왜 지혜가 인격화 되어야 되는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안식일 지키는 것이 진짜 지키는 건데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화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것은 지혜가 인격화 되어서 창조에 관여했다는 이 의미가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냥 말씀 주시면 지키기는 누가 지킨다? 우리가 알아서 지키면 돼. 똑똑한 인간들이. 그것도 택함 받았겠다.
지키면 되는데 우리가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이렇게 지키는 것이다’라고 조언할 수 있는 분이 필요한데 우리가 지금 안식일 잘 지키고 있는데 왜 오냐 이 말이죠.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모세가 너희들을 고소한다 하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게 감이 오질 않죠. 잘 지키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이태리 요리, 파스타를 식당에서 잘 만들고 있는데 이태리에서 파스타 제일 잘 만드는 사람이 와서 주방에 들어가서 대번 ‘이것도 파스타 가?’ 엎어버릴 때에 만약에 이태리 사람이 안 왔더라면 맛있게 먹는 거예요. 보람을 느끼고 ‘이게 파스타구나.’ 했는데 막상 ‘이것들 개나 줘라. 이것도 음식이야.’ 하면 그들은 뭐냐? 최선을 다했잖아요.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천국 안 가고 싶은 사람 없어요. 다 가고 싶은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그 바리새인들 의를 엎어버렸으니까 우리 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 다음에 봅시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안식일에 어떻게 하라는 세부 세칙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없고, 안식일에 제사를 다른 날보다 유별나게 드리고 그때는 일을 하지 말라. 이 두 가지만 이야기하니까 그 스물네 시간 어떻게 보낼 겁니까? 티비 시청이 일에 속하느냐, 안 속하느냐 그 문제.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진짜 버스 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그럼 버스 타는 기사는 공짜로 봉사해야 돼요? 그 날은 제하고? 이런 문제가 되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이렇게 보면 정답이에요. 조직신학자도 모르고 침멀리도 몰라요. 유일신이 지혜를 할 때 조직신학자는 유일신에서 예수님이 나온다고 하는데 잠언서에 봐도 예수님 안 나와요. 그건 신약에서 무리한 해석이 되고. 예수님, 유일신이 이게 앞에서 보면 하나인데, 뒤에 보면 층으로 돼있어서 빠져나온 거예요. 인격적인 신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한 분밖에 없는 신이 지혜라는 이름으로 또 나온다는 것은 자신이 둘로 분신되는 거죠.
분신된다 하니까 이걸 사람들은 존재적으로 분신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구약은 존재적인 게 아니고 모든 것이 사건화 돼요. 존재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건 이건 바로 우상에 속하는 거예요. 왜 우상에 속하느냐?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인간이 존재잖아요. 인간은 자기 존재를 인정하거든요. 인간이 존재에서 존재로 통할 수 있는 신은 전부다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데, 사건으로 나타나는데, 이 사건은 사람이 지킬 수 있는 사건이 아니고 말씀대로 언어로만 오는 게 아니고 그 약속이 지상에 사건화 되어서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존재성에 광대하게 펴져있는 우상성을 공격하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말씀화 돼요. 사건화 되고.
이 대목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창조 전에 우리를 선택이라 한다면 그냥 우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오게 되면 이 안에 뭐가 오냐 하면, 선택의 개념이 성장하죠. 그런데 이 선택의 개념이 존재론적 개념이라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항상 우리 존재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미지를 받아들여요.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해도 항상 나의 존재적인 의미로서 온다 이 말이죠. 내 존재에 유리하냐, 불리하냐?
그런데 선택이 지상에 우리에게 진짜 오게 되면, 선택이 주님에 의해서, 이거는 사건화 되는 거예요. 무슨 사건이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선택을 박살내는 사건화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역사화 돼버리면 이렇게 되죠.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품고 존재론적으로 진행해도 주께서는 하나의 바람처럼, 구름처럼 우리에게 계속해서 ‘그게 아니야, 그 선택이 아니야’라고 새로운 이벤트를 자꾸 열어주는 겁니다.
이벤트를 열어주면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선택이라 하는 것이 너무나 내 위주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부셔지면서 새로운 선택의 의미가 다가오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새로운 선택의 의미가 내 존재가 있는 이상 고착돼요. 고착되면 그 다음 이벤트, 사건에 의해서 고착된 선택의 의미가 또 깨져버려요.
그래서 계속해서 끌고 가는데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면, 진짜 주님께서 말씀이 육신 된 사건, 십자가 사건에 이 모든 구약의 언약 개념, 하늘 개념, 땅 개념, 율법 개념, 안식 개념, 성소 개념, 이스라엘 개념 등 모든 개념을 십자가에 나온 참된 인간이신 예수님 안에 전부다 모아놓죠. 모으면서 기존에 인간들이 존재론적으로 생각했던 모든 구약 개념은 정죄함을 받아요. 죄라고 규정돼요.
침멀리도 그렇고 침멀리의 선택, 언약을 읽어보면 문제점이 뭐냐 하면, 침멀리는 학자기 때문에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그냥 받아들여요. 그런데 그것이 사건화 되어서 쉽게 말해서 칼날, 톱날, 전기톱. 말씀은 그냥 우리에게 말씀이 오는 게 아니고 중첩해 있는 사건들을 담고 있는 하나의 보따리처럼 되어서 그게 톱날이 돌아가고 있는데 그 사건들이 우리한테 우르르 부어지면 지금 내가 알고 있던 개념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다 날카롭게 잘라지는 거예요.
그것도 칼날이 다 쏟아지는 게 아닙니다. 잘라지면 우리는 잘라진 나의 구원들을 다시 돌아서서 주워 모으면 그 다음 차례에 전에 있지 않은 새로운 사건이 와서 내가 주워 모은 사건을 또 잘라버려요. 그걸 주체를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 계속해서 자르고 자르는 거예요. 골수와 관수를 쪼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 성경 한두 번 본 게 아니잖아요. 처음에 봤을 때 은혜 받았고, 두 번째 봤을 때 은혜 받았고 다 다르잖아요. 이 말씀은 내가 아니까 안 받아도 돼요. 이런 게 없어요. 어떤 사건, 상황이 접하게 되면 뻔히 아는 말씀도 다시 한번 나한테 은혜가 되면서 또 작살나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또 십자가밖에 볼 게 없다 이 말이죠. 자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참 인간인데 우리는 뭐라고 우기느냐 하면, ‘나도 인간입니다. 나도 인간인데 왜 소원 안 들어줍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우리 동네에 성당이 하나 있는데 성당의 푯말에 선교위원회 이름으로 플래카드 있어요. 간단해요. ‘청하면 주시리라’ 마태복음 7장 7절. 구하라 주실 것이요, 그걸 청하면 주십니다. 그건 뭘 유도하느냐 하면, 성당에 관심 둔 사람이 지나가면서 거들떠보면 다 가정에 뭔가 존재적 결핍이 있잖아요. 아쉬운 게 있잖아요. 빌고 싶은데 그동안 성당 안 나와서 어려워서 못 오는 사람, ‘청하면 주십니다’ 하니까 가서 빌어보자. 자기 나름대로 ‘청하면 주십니다, 구하면 주십니다.’라는 마태복음 7장이 자기 존재론 입장에서 하나의 말씀으로 왔지요. 오고 난 뒤에 그걸로 계속 가버리면 문제가 크지요.
진짜 성도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네가 처음 성당에 올 때 그때 그 말씀이 그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한 뜻은 따로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시켜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좋은 것, 우리가 좋은 것 말고. 성령이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나오니까. 성령 받아도 구원 못 받아요. 십자가 알아야 돼요. 십자가 영으로써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것이 나중에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나의 의가 아니고 주님의 의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 복음을 진짜 주시고자 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성당의 신부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런데 내가 당신 말에 동의를 한다. 동의를 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초짜들한테는 청하면 준다고 일단 꼬시는 문구를 날리는 것도 정당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 일에 포함시켜 달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게 아니고 그건 비 복음적이라고 하면, 그들은 말하기를 비 복음적이라고 하면 안 하면 비 복음적이 안 되는 줄 알고 있는데 비 복음적이라는 것은 모든 게 비 복음적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합리적으로 따져서 생각해보세요. 여기에 청하면 주신다고 해서 한 백 명 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중에 다 떨어지고 두 명만 만약에 복음 알아서 천국 간다고 합시다. 그럼 처음부터 ‘십자가를 주십니다’ 했다면, 처음부터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보낸 자는 반드시 오기 때문에 두 명만 오기 때문에 성당 크게 안 지어도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구십팔 명이 두 명을 결국 이 성당에서 못 들어오게 쫓아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성당은 백 명에 만족하지 않고 이 백 명, 삼 백 명 하기 위해서 더 노골적으로 나중에는 불교도 구원 있습니다. 이런 소리해야 성당에 올 테니까. 우리 성당은 사주팔자 봐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볼 것 아닙니까. ‘청하면 주십니다’ 해서 그 정도 왔다면 이제는 아예 딱 깨놓고 ‘수능 백 일 남았습니다. 빌면 좋은 대학 갑니다.’라고 했으면 더 올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럼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는 정말 인간들의 근원적인 욕망까지 전부다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수용합니다란 소리를 해야 될 텐데 계속해서 그런 소리를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더 해야 되죠. 이제 한국교회는 아예 노골적이잖아요.
벌써 방향 자체가 이쪽이란 말은, 교회 자체가 그냥 우상이라 보면 돼요. 이게 존재론적으로 말씀이 깔은 이유가 인간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새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산다는 신약에 나오는 해답이 있잖아요. 그걸 구약에 미리 보여주니까 신약은 새 언약이라면, 구약은 바로 언약이 무엇인가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언약 주시고 그리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언약 주셨다는 말이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침멀리 책을 보게 되면, 이 사람은 언약과 선택 개념 자체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사건화 되어서 진행한다는 걸 생각 안 하고 우리가 어떻게 언약을 이해하느냐,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해하고, 하나님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하면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 뜻을 이해하느냐 거기에 치중을 한 거예요. 오늘 진도 나가면서 그걸 하나하나 부셔 봅시다. 그게 얼마나 잘못 됐는지. 그렇게 해서 창조의 하나님 하는 것은 지나간 겁니다.
그리고 잠간 다시 결론을 내린다면, 유일신이 맞아요. 맞는데 성급하게 예수님을 끄집어내면 무리가 되니까 유일신이 하나의 사건화 됐죠. 인간한테는 존재론이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유일신이 인간에게는 존재론적이 아닌데 이스라엘에게 존재론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뭐냐? 자기가 존재거든. 나는 바람이라 하면 되는데 내가 바람 같으면 주님도 바람이 돼서 주께서 바람 같이 일하신다. 나도 있다가 없어지는 바람이다.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인생은 평생 살아봐야 순간에 불과하다.
이런 게 어려운데 시간이 짧으면 공간도 좁아져요. 논리상 그래요. 시간이 길면 내 능력이 넓어 보입니다. 빨리 지나가면 공간이 좁아요. 이거는 KTX 타보면 압니다. 대전서 영동 지나갈 때 영동은 작아요. 그런데 완행 타고 가면 영동 크게 보입니다. 천천히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속 빠른 속도로 이끌고 가게 되면 인간은,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항상 자기 존재에 메이지 않고 왜? 좁으니까. ‘주여 언제 오십니까?’라든지 주께서 하실 일, 주께서 곧 이룰 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일, 앗수르가 유다를 침범하고 바벨론을 치는 그 일이 우리 보기에는 중첩됐지만 중첩된 것이 앞당겨서 오는 거예요. 시간이 앞당겨 오니까 상대적으로 비례적으로 무엇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내 인생, 어떻게 밥 먹고 사는 것 안 중요한 겁니다.
이걸 주일날 오전에 설교에 자리를 연연하지 말고 그 시간을 당겨버리면 우리의 자리는 진짜 정주영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듯 아무 의미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리 있잖아요. 자리를 세례요한이 오면 밀어붙이는데 시간으로 자리를. 그때는 마지막 때가 오게 되면 사람의 골짜기마다 이런 것이 다 편평해진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소박한 인생관, 우리가 자리라 하는 것 있잖아요. 밤낮 이건 내 자리라는 그것이 시간이란 불도저 앞에 다 허물어져버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구약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항상 우리 존재를 생각하면 여기에 있는 신은 존재 신이 되기 때문에 이건 여호와, 여호와 백 날 불러도 우상이 돼요. ‘예수님의 부활하셨는데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잖아요. ‘어디’라는 말은 반드시 존재론적이 될 때 어디가 성립되는 거예요.
‘항상 계십니다’ 할 때 이것은 하나의 사건화고 현재 일하는 액션, 움직이는 기능으로 생각할 때는 현재 내가 살아가는 것도 누구의 기능이다? 우리 주님의 살아계신 만져주심, 그냥 다듬어주심인데 내가 존재가 되면 존재는 뻣뻣해지거든요. 주체란 고착화, 단단해지는 걸 말합니다. 단단해진다는 것은 자꾸 안 넘어가려고 안 허물어지려고 붙잡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뭐든지 응축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여러분 전자레인지에다 계란이나 떡이나 이런 음식물을 한 번 덥힐 때 괜찮은데 두 번, 세 번 덥히면 완전 숯 돼버립니다. 물기가 다 빠져서. 특히 사람들도 나이 많으면 점점 더 자기밖에 몰라요. 그러니 이게 완전히 숯 덩어리, 죄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여기 침멀리의 책에서 선택과 계약 책에서 이런 이야기했는데 그건 참 잘 이야기했어요.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이스라엘은 ‘땅+언약’이 있어야 이스라엘 된다. 이거는 기존의 모든 인식을 뒤집은 거예요. 우리 인식은 이스라엘이 땅을 받고 그 다음에 언약 받고. 침멀리는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땅과 언약이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침멀리 말 그대로 합시다. 하나님 백성이 땅을 만날 때만 이스라엘 된다고 했어요. 이건 상당히 놀라운 발견이죠.
그러니까 이건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 백성과 이스라엘은 다르다는 겁니다. 이 백성은 땅을 만나야 되니까 이 백성 단독적으로 보면 떠돌이에요. 노마디즘, 유목이에요. 떠돌이가 땅을 만날 때 국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런 인식을 한 것과 이스라엘과 백성이 같다는 인식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이렇게 돼버리면 이스라엘 존재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땅을 떠나버리면 이스라엘이 떠나는 것이고, 이스라엘 떠나버리면 땅이 떨어지면 다시 하나의 백성이 되면서 떠돌이 되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바벨론 남은 자의 개념이 하나님 백성 개념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땅을 고대하는 거예요.
땅을 고대한다는 말은 이 사람 속에 뭐가 포함됐느냐? 이스라엘 되기 전에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 백성1이라 하고 이스라엘 됐다가 다시 땅을 빼앗기고 포로 된 것을 백성2라 한다면 백성1과 백성2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백성1은 잃어버림이 없어요. 결핍이 없어서 그냥 이대로 목축하고 살지. 그런 게 있다면 백성2는 무슨 느낌이냐 하면, 잃어버린 빈자리를 소유하고 있는 백성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잃어버림이 없으면 자기는 여러 민족 중에 하나가 되지만 잃어버린 흔적을 갖고 있으면 비록 이 사람들이 땅을 잃었다 할지라도 모든 민족 위에 우리만 하나님이 아시는 유일한 백성이 되는 거예요. 아모스 3장 2절. 모든 민족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침멀리가 강조한 대목입니다.
침멀리가 이걸 내다보면서 설명한 거예요. 아주 탁월하죠. 침멀리 논리가 지금 왔다 갔다 해요. 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아까 우상 할 때는 존재론이라 하고, 이건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화 됐죠.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분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가 하나고 나를 본 자만 하나님이지 하여튼 나 말고 하나님 이야기 꺼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삼위일체가 문제가 커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삼위일체에서 존재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존재인 거죠.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이 삼위일체다. 이거는 되는데 세 분의 존재자가 계신다 하면, 이건 말장난밖에 안 됩니다. 시어머니 세 사람입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그래서 초대교회에 뿔 달린 머리 세 개 달린 괴물이 등장하고 이러잖아요.
예수 믿으면 되는데 삼위일체 알라 하는데 인간에게 안다는 자체가 사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와 삼을 이룰 수 있는 논리가 인간에겐 없어요. 인간은 둘도 안 돼요. 인간은 두 주인도 못 섬기면서 셋을 섬긴다? 어디 누구한테 거짓말 하려고. 논리도 안 되면서 하는 거예요.
침멀리가 그렇게 주장하는 대목이 창세기 33장 봅시다. 제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침멀리 책이 왔다 갔다 해요. 33장 20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어떤 때 외쳤다? 단을 쌓고 땅과 만났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국가를 내다보면서. 왜냐하면 그 앞에 보면 바로 야곱의 허리에서 왕들이 나와요. 왕이 있다는 말은 왕이 통치할 영역 공동체, 국가가 있다고 보지요.
침멀리는 이걸 나중에 후대에 기록했다 하니까 자꾸 문서설 등장하는데 그것 다 빼버리면 문서설 인정하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 봐서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이란 인간 안에 나라를 집어넣은 거예요. 야곱은 나라를 집어넣었으니까 알맹이는 이스라엘 나라고, 껍데기는 야곱이란 인생이고.
야곱은 자기 안에 큰 사건 들어있는 줄 모르고 야곱은 자기 존재만 생각해요. 그래서 누굴 이기려고 해요? 자기가 형을 이기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야곱이 에서를 이기면 안 되고, 진짜 네가 존재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에돔을 이겨야 되는데, 자기는 형한테 에돔이, 야곱이 이스라엘인 줄 몰라요. 자기는 껍데기 자기 몸만 살피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도 똑같아요. 성도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 있는 건 생각 안 하고 만날 자기만 살기 힘들어서 예수 믿기 힘듭니다. 그만 믿을까요? 만날 자기 생각해서 불평을 터뜨리네. 자기 안에 거물 되시는 분 들어있는 줄 모르고.
도미니카 대사가 말 함부로 못 하지요. 이거는 도미니카 한국 대사가 개인적인 사견을 말하면 안 되잖아요. 그 안에 대한민국 들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우리 안에 천국이 들어있죠. 그래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뭘 발산해야 됩니까? 이래야 천국 간다는 것, 천국은 이런 모습이라는 걸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할 때 또는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비유할 때 천국은 이와 같다 해서 항상 누굴 거론합니까? 천국 같으면 우리는 어떤 전설, 신화, 동화 같은 이야기, SF영화, 아바타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누굴 거론했습니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가라지와 알곡, 농부와 보물하는 것, 아주머니가 누룩 밀가루 반죽하는 것, 농부가 겨자씨 뿌려서 나무 크는 것.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천국을 끄집어낸다 말이죠. 결국은 천국은 네 속에 심겠다.
그러면 인격이 땅을 만난다. 땅이 하나님 백성을 만난다 할 적에 이 백성도 껍데기가 되고 땅도 껍데기가 되겠지요. 옛 언약 안에서는. 그런데 새 언약이 되면 흙이 이 땅이 아니요, 인격도 이 인격이 아니죠. 이거는 하나의 그림자처럼 본체는 따로 있다 이 말이죠.
그쯤 기초적으로 해놓고 하나님의 선택 해봅시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안 된다. 벌써 다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존재론적으로 보면 우상입니다. 사건으로 봐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분의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고 그 외는 몰라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만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딴 데는 못 봅니다.
이스라엘 선택에 있어서 침멀리가 시비를 걸고 나옵니다. 왜 시비를 거느냐 하면, 침멀리가 조직신학자들 겨냥한 시비를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택이 되려면 선택할 항이 두 개 이상 돼야 선택이란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를 잡아버리면 그냥 가지는 것이지 채택이 되죠. 선택이 안 되잖아요. 선택이라 하는 것은 골라잡을 항이 여러 개 있어야 선택이 된다 이 말이죠.
떡이 하나 있는데 떡을 가져버리면 채택이 되지요. 떡이 여러 개 있으면 ‘어느 떡 먹을까?’ 하고 하나를 골라잡죠. 그럴 때만 채택이 아니고 선택이 되죠. 그런데 창세전에 선택해버리면 창세전에 선택할 게 없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해버리면 그러면 선택할 게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물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지옥 갈 사람들과, 천국 갈 사람을 선택했다. 이렇게 볼 수 있지만 창세전의 예정은 그런 선택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택했다는 이 의미는 이거는 딴 걸 배제한 의미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너는 내 모습을 담을 하나의 그릇으로 이미 나를 채택해서 만들었다는 그런 의미거든요.
그런 의미기 때문에 침멀리는 조직신학을 겨냥해서 선택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상에서 인간이 선택하는 건데, 그 선택하면서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등장한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겁니다. 복잡하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주님께서 패 까고, 우리 패 까고 이렇게 까는 게 아니고 너부터 먼저 까라는 거예요. ‘너 선택했나? 그것 아니거든.’ 하고 그 패를 보고 그 다음의 패를 내놓는다. 이게 바로 변증법칙입니다. 정반합의 관계성. 정을 내놓고 정이 ‘아니요’란 평가를 받고 다시 올라가고, 그 다음에 합이 ‘그것도 아니야’라고 해서 나온다고 되는 겁니다.
변증법이 그전에 있었는데 헤겔이 이걸 채택해서 유명해졌는데 정반합의 변증법을 헤겔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를 전에 부산강의에서 했지요. 헤겔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푹 꺼지는 대목을 제시했다. 그 대목이 뭐냐 하면, 신이 인간이 돼야 돼요. 신이 인간이 되었으니까 신은 어디서 만나느냐? 위에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이 푹 꺼지는 대목을 만날 때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걸 성육신.
헤겔은 성육신을 중심으로 해서 전체가 인간의 모든 이성은 비로소 해답을 얻는다고 본 겁니다. 이거는 고린도후서인가, 에베소서인가, 빌립보서인가, 세상 아무리 철학들이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나오죠(빌3:8). 그러니까 헤겔은 그 당시 기독교 복음을 철학화시킨 겁니다. 성육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푹 꺼져 나온 겁니다.
이 꺼지는 하나님의 참된 이성을 쭉쭉 뻗어나가는 진보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꺼지는 것을 집어넣으면 이걸 두 개를 겹쳐보면 가다가 꺼지고, 가다가 꺼지면서 결국은 최종 목표에 이런 식으로 도달한다고 보는 겁니다. 위쪽으로.
그런데 나중에 학자들이 많이 비판을 했지요. 마르크스는 이렇게 올라가는데 이성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노동으로 올라간다. 과학의 발전과 물질의 발전으로 올라간다고 봤는데. 지금의 현대철학자 라캉이나 들뢰즈는 올라가는 게 없다는 거예요. 그냥 이렇게 해서 늘 꺼진다고 본 겁니다. 레비나스 이런 사람. 들뢰즈나 니체는 이것도 아니에요. 가기는 어딜 가? 뱅뱅 돈다는 거예요. 영원회귀. 영원영겁. 계속 된다는 거예요. 돈다고 하니까 불교에서 대환영했어요. 윤회설 드디어 나왔다. 철학적으로 증명됐다.
푹 꺼지는 건 맞는데 이건 다 인정하는데 사람이 그냥 곱게 못 가거든요. 인생을. 변화상. 하지만 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은 이 안에 신이 있다고 본 게 화이트헤드 철학이에요. 이 자체가 신이다. 스피노자는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자체가 신의 속성 가운데 놓여있다고 보는 겁니다.
선택에 대해서 이스라엘 선택을 이야기하면서 여기 나오는 건 여러분들이 공부할 때 배웠던 대목이 나와요. 선택이라 하는 것은 그 당신 족장들이 다른 나라 국가의 족장들과 계약할 때 상거래 할 때 했던 계약할 때 깬다는, 파열. 옛날에 나오잖아요. 청춘남녀가 거울 깨서 맞추고 빗 같은 것 깨고 맞추듯이 깨는 절개면이 그대로 유지할 때 다시 합치는 거예요. 일본의 야쿠자들이 정맥 끊어서 마시는 이런 것이라든지.
뭐냐 하면, 일부인데 전체를 깨서 하나씩 가져가게 되면 비록 우리는 흩어져도 언약에 여전히 전체에 부분으로써 종속돼있는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계약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언약을 설명한 겁니다. 알트란 사람이라든지 여기 철학자들이 많이 나오죠.
선택이 먼저고 선택 다음에 언약이 나와요. 선택했다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 중에 너희만 알았으니까 아모스 3장 2절 여러 번 나와서 강조하고 있어요. 결국 침멀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모든 민족 가운데 너희를 알았으니까 선택했기 때문에 너희가 그런 줄 안다면, 너희도 모든 민족 간에 갖고 있는 신을 선택하지 말고 여호와를 선택하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침멀리의 선택의 개념을 일방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하는 선택의 초점을 하나님의 선택 초점과 일치되도록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치 실을 바늘구멍에 넣을 때 그게 아니고 약간 옆쪽으로. 옳지 이제 통과했다.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아바타 영화 보면 서로 두 사람이 교류를 할 때 머리카락이 나와요. 이것 하고 이것 하고 머리카락 뒤에 나오는 그걸 잇게 되면 교류가 나온다. 이건 뭐냐 하면, 전선과 전선을 이으면 스파크가 일어나서 생각이 교류가 된다는 겁니다. 이 아이디어가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할 때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제가 그걸 하려고 하는데 이런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공속, 공속이란 말은 스스로 어떻게 동행하는가? 어려운 말로 공속, 같이 속해서 갈 수 있는 매개체가 뭐냐는 그 문제입니다. 말은 쉬워요. 동행한다, 주가 우리와 함께 있다 할 때 아바타는 아주 노골적이라. 뒤에 있는 머리카락을 넣으면 시각적으로 머리카락과 머리카락, 손가락과 손가락이 합쳐지니까 되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현미경으로 확대해봅시다. 이쪽 머리카락 있잖아요.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 머리카락 해서 이렇게 되잖아요. 할 때 이 교류와 교류는 여전히 이 몸은 남자에 속하고 이 몸은 여자에 속하기 때문에 남자, 여자 교류가 어떻게 일어나요? 같이 섞여도 문제가 된다니까.
콩하고 팥하고 아무리 흔들어도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 되잖아요. 이 머리카락이 아무리 세밀해도 지시는 누구한테 받습니까? 남자한테 지시받고, 여자 것은 여자 몸의 지시를 받는단 말이죠. 어떤 경우에 여자의 지시가 끊어지고 남자의 지시를 따르는 그 시점이 어떤 구조에 어떤 경우에 그렇게 되는가 하는 그 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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