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해도 소용없음을 아는 회개(심판의 때)
회개해도 소용없음을 아는 회개(심판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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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실천공간)해도 소용없음을 아는 회개(심판의 때)
우리교회 2월 7일 주보요약- 이근호
《 설교 요약 》 20010년 2월 7일
〈 지난 주 설교 요약 〉
하나님이 벌리시는 구원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함께 무너집니다. 세상에게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를 비켜가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 자신과 관련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까지 죄가 되고 저주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구원받겠다는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세계가 우리에게 덮쳐져서 가능합니다.
〈 이번 주 설교 요약 〉
본문 : 누가복음 3:7 -9제목 : 회 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고 자부했을 때, 과연 그 공로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회개라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시절이 세례요한 때의 시절이었습니다. 심판의 때가 다가온다고 세례요한은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심판의 기준은 세례요한이 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단지 심판이 날이 접근했다는 사실을 분명할 뿐입니다. 세례요한이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장래는 축복의 날이 아니라 진노 받을 날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받아야 하는지, 무슨 기준에 의해서 진노 받을 지에 대해서는 세례요한은 아무 것도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는 울퉁불퉁한 사람들의 마음을 평탄케 하는 시도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분수에 넘쳐나 있는지를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각자 종사하는 자들에게 있어 분에 넘치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직업 군인들이 행사하고 있는 과한 처신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말해줄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탐욕스러움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실 분을 보다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한 마음 준비차원이었습니다. 마치 임금님이 행차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움집했을 때, 앞의 사람들의 키를 낮추기를 유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키를 낮추는 행위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 봐야 할 분을 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요한이 일관되게 하시는 일은 이 일입니다. 마음 낮추기입니다. 이것을 그는 회개하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마음 낮추기는 심판주되시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보다 더 깊이 있는 낮아짐이 요구되었습니다.
관리자(IP:124.♡.86.9)
10-01-31 18:09
오늘 오전 설교와 연관된 입장에서
오늘 오전 설교에서 공간이라는 자리 또는 영역은 미래의 때 앞에서 모조리 폐기처분 당할 입장에 놓여진 사라질 위치요 자리요 공간이요 영역이라는 겁니다. 그 때가 덮친자가 선지자로써 미리 앞당겨 맛배기를 본 입장에서 외치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단절성입니다.
아래는 오전설교 요약 입니다.
013강-눅3장3-6(세례요한의역할)-luk100131
세례요한의 역할
2010년 1월 3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3-6
(눅 3:3, 개정)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눅 3:4, 개정)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눅 3:5, 개정)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6, 개정)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하려 오시는 분의 세계가 따로 있는데 그 쪽 세계가 이 쪽 세계보다 더 안전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위험한 이 세상에서 보다 안전한 세계로 이동되지 아니하면 멸망받고 이동되는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쪽 세계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힘들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온갖 정성과 수모를 견뎌내 가면서 성취한 것이 이 세상에서 얻은 결과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현대건설 시절, 정주영 회장과 함께 밀어붙이기 식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이명박식 공사처럼 느껴집니다.
불도즈을 앞장세워서, 밀어붙이게 되면 각 고을마다, 고장마다 추억과 전설과 행운이 깃든다는 고목나무나 성황당마저 싸그리 밀려나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원자가 오기 전에 사람들의 생각해놓은 생각들이란 각자의 상상력과 환상에 의해서 구상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구원자가 들이닥치게 되면 이런 인간들의 소박한 세상관은 여지없이 환상으로 발각당해서 무너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하실 일의 그 과정에 철저하게 예속될 뿐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농담하거나 장난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진지합니다. 이사야에게 내려왔던 그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세례 요한에게 들이닥쳐서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잡으려고 합니다. 평생 밥먹고 살만한 내 만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자리를 잡을려고 하지 말고 때를 미리 당겨야 한다’는 겁니다. 즉 공간을 잡을 것을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만들어 수 있는 때가 아니라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때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왔다고 다시 월요일이 되면 자신이 잡은 자리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키우기 위해 열심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잡은 그 자리는 평평한 것 같지만 실은 경사져있습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그 자리는 자꾸 미끌어집니다. 나중에 어디에 처박히는가 하며는, 죽음이라는 자리, 심판의 자리에 처박히고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은 반성이 아닙니다. 자기 우수함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저쪽의 세계로 가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쪽의 세계, 즉 심판하는 그 시점으로 미리 가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쪽 세계 안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세례에 합당한 생활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9-2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 온 세상이 물이 빠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물이 안 보이지요. 그런데 그 중에 8 명이 물을 듬뿍 뒤집어쓰고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근본 원천에서부터 튀어나온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위력이요 세례요한의 위력입니다.
노아 홍수에 살아남은 노아 식구나 세례요한이나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사람은 무슨 표를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것은, “네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맛보니 혼났다. 그러니 너희들이 미리 하는 것이 좋을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표’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표가 구원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런 표를 보여주게 됩니다. 마치 화투장 12월달에 해당되는 화투를 보게 되면 어떤 신사 한 사람이 우비를 입고 우산 쓴 것이 보입니다. 바로 물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한 세계를 맛보고 온 사람은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즉 ‘죄사함’을 전제로 한 세례이기에 죄사함과 무관한 세례는 세례 받아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세례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죄사함도 함께 받았네요?”라는 물음에 “예”라고 할 건덕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구원을 구경하고 싶어하고 관찰하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들이닥치는 것은 거절하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마치 어떤 아가씨 뒤를 아저씨를 열심히 따라오니 아가씨는 자신을 해꼬지할 치한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말하는 것을 보니 자기 뒷머리에 껌이 묻혀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고마운 청년이었음을 드러나는 경우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푼다고 세상 불심판을 거론하니 사람들은 자기만을 빼놓고 하나님께서 일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죄씻음과 관련된 홰개의 세례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직접 다가올까요?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점을 생각해봅시다.
신명기 21:23에 보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즉 ‘나무에 달렸으면’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 맞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보라’고 하셔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무엇을 통과하느냐 하며는 바로 그 저주의 지점을 통과하게 됩니다. 곧 ‘나무’에 달려서 죽게 됩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들은 예수라는 분이 저주받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 맞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3일 만에 부활시키므로서 모든 인간이 실은 저주받은 자임을 드러내버립니다. 즉 그들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은 실은 그들 자체들이 저주받아야 할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저주받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다 환상이요 죄에 해당됩니다.
즉 인간들이 구원받겠다는 것조차 죄에 해당됩니다. 이제 구원될 일은 마치 노아 가족이 홍수에 삼킴을 당하듯이 이 십자가의 세례에 삼킴을 당하는 경우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십자가 앞에서 나온 사람은 그 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증거할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자의 표입니다. 세상이 모두 환상임을 알게 되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십자가를 믿지 말고 십자가가 우리를 덮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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