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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00124우리교회주일낮설교녹취(눅2:41-52/성전에서의 예수님)자유게시판누가복음

20100124우리교회주일낮설교녹취(눅2:41-52/성전에서의 예수님)

이름 : 오용익(IP:119.195.244.46)

20100124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2장 41-52절/성전에서의 예수님(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장 41절에서 5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1페이지입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좆아 올라갔다가 그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교회라는 것이 가정축복, 가정화목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정을 위하여 우리집안을 위하여 과연 예수님이 오셨겠는가 하는 겁니다. 오늘 대목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요셉가족의 일원이면서도 하는 말이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그것을 몰랐습니까?’ 하면서 되묻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것은 그 분의 양친, 요셉과 마리아한테는 큰 충격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자기사람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현대인들은 갈수록 자기가족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남자는 태어나면 세 번 운다는데, 태어날 때 울고 그 다음의 두 가지는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태어날 때 울고 부모님 돌아가실 때 운다는데 그것도 잘 안 먹히고 특히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운다는 겁니다.

이민 가면 울어야 될 나라, 그 대상이 바뀌잖아요. 갈수록 가족중심으로 나라가 갈수록 해체가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청년들아, 조국을 위해서 나서라,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일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나라가 우리 가정에 해준 게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계백장군의 그런 이야기가 있대요. 나라를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면서 자기 말과 처자식을 죽이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라가 우선이지 가정이 우선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대에 와서 사람들의 국가관이 바뀌면 모든 개인의 사고방식도 바뀌어요. 주체문제가 있어서 그런데 사람들의 주체라 하는 것은 옛날에는 나라 안에 주체가 있는데 지금은 우리 가정 안에서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우리 가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애를 열심히 키우는 것은 우리가정 나만의 패밀리가 잘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나라를 바꾸고 이민 가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우리 가정 앞에서 조국이란 없다, 다만 조국이 우리 가정한테 뭔가 해 줄 때에만 조국이다. 이것이 아예 체질화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학자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왜 요새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갈수록 사람이 자기 신체, 몸 위주로 살아간다 이 말이죠. 자기 몸 위주로 살아가니까 내 몸 위주로 태어난 그 가정이 우선이고 또 그 가정을 잘 다스려야 내 여생도 편하고. 내 몸만 편하면 세상이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맞아요. 제가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를 해보니까 이 말이 맞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우리가 육체, DNA를 물려받아서 아담의 성격, 성질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우리가 시대적으로 뚝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이 갖고 있는 그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죄지었던 그 성질이 그대로 우리에게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집중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서 하나님을 한 번 꺾어보겠다, 필요할 때는 하나님을 찾되 항상 생각하는 것은 독자적인 나만의 세계를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나라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 같은 말로,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똑같은 말인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상당히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을 제가 그냥 해버렸어요. 도저히 참다 참다 그랬는데, 아이티에 성금 왜 보냈느냐 그 문제였어요. 20만 명 죽었다는 아이티에 성금 왜 보내느냐 그 문제에요. 맞아 죽을 발언을 한 거지요.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저한테 완전히 미쳤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아이티에 성금을 보내는 심리를 조사해 보면 지진이 일어나서 어렵게 되었다 그 말이거든요. 지진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진은 북태평양 판이 갈라져서 일어난 것이고, 어떻게 일어났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누가 지진을 일으켰습니까? 아이티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신자 아닙니까? 그들은 말하기를 지진은 신의 소리다, 하나님이 일으켰다,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가족을 누가 죽였습니까? 날 사랑하는 하나님이 죽인 것이고 날 구원하는 하나님이 죽였다는 겁니다. 날 사랑하는 하나님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죽인다면 여기에는 뭔가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은 지진도 아니에요.

문제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 내부에서 내가 귀하게 여기는 내 가족과 그리고 나를 구원한다, 라고 떠벌이고 있는, 그런 설이 있는, 그런 교리가 있는, 그런 이론을 갖고 있는 그 하나님 사이에서 어느 장단에서 춤을 춰야 할지의 내부적인 갈등과 지진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진을 누가 일으키는가? 하나님이 일으켰다. 하나님이 여진까지 합해서 지진을 수십 차례 일으켰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으켰는데 왜 그렇게 일으키는가? 우리 사랑하는 가족을 죽으라고 일으키신 거예요. 내 뱃속에서 태어난 내 자식과 부모를 죽이려고 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려고 덤벼드는가?

그 이유가 성경에 보면 나오거든요. 이왕에 너희들은 벌써 죽은 몸이라는 겁니다. 남보다 일찍 이 세상을 제대를 시킨 거예요. ‘하나님이 내 사랑하는 그 사람들을 죽였다.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기 전에는 마치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살아간다고 오해할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한 번 손대 봤다. 내가 흔들어 봤다.’

그럴 때 하도 성경을 안보니까 ‘내가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하는 이 말을, 성경을 하도 안보니까, 또 본다 할지라도 믿을 생각을 안 하니까, 그것이 내 돈버는데 보탬이 안 되니까 관심이 없었었는데, 근본, 바탕조차 흔들어버리니까 ‘아,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군요.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가족을 죽이시는 것을 보니까 이미 죽은 자가, 나는 더 살아야 돼, 나는 더 살아야 돼, 라고 만 날 우긴 그것이 잘못이었군요.’라고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진 난 곳에 성금을 보낸다는 것은 신께서 지진을 일으켰으면 그 신을 우리가 혼내주자는 거예요. 신을 탄핵하자는 겁니다. 신에 대해서 손 좀 보자는 겁니다.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들에게 지진을 일으켰으니까 그 못된 신을 우리가 선방 날려서 손을 좀 봐주자는 겁니다. 신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지만 남아 있는 우리 인간들끼리는 인간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렸어도 우리는 당신을 버리지 않겠다.” 그런 정신들이 밑에 쫙 깔려 있지요. “하나님은 버렸어도 우리 인간들은 당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맙시다. 우리 인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 인간들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하나님이 죽여요.

알아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이십니다. 언젠가는 죽는데 그 죽는 이유가 뭐냐?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는 아담으로 태어나서 신체가 있는데 그 신체에서 아담이 갖고 있던 죄가 그대로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의 태어난 몸 자체의 성질이니까, 하나의 dna성격이니까 그대로 뿜어져 나오는 게 뭐냐? 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뭐냐? 나 중심으로 집중하는 거예요. 응축이라고 하는데 응축, 농축, 압축 다 같은 말입니다. 하여튼 인간은 자기신체가 여기 있으면 주변의 모든 것을 다 끌어 모아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거예요. 그래서 잠언서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지옥은 어떤 곳이냐? 잠언서에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신약에서는 불붙는 바다지만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지옥이란 아무리 먹고 먹어도 만족스러움이 없는 곳, 온갖 것 즐거운 것 기쁜 것을 다 해도 결국은 우리의 욕구를 채울 수 없는 곳, 배고픈 곳 그곳이 지옥이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았으면 모든 것을 나에게 우리에게 집중시키는 것을 중지할까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지옥을 어떻게 규정하든 지옥이 실제 그렇든 간에 그것은 성경이야기고 우리의 타고난 신체는 모든 것을 나한테 집중시키는 겁니다.

부모가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그 애는 남의 집 애가 아니고 우리 집 애에요. 그게 집중화됩니다. 그 집중화된 것이 모이면 교회가 됩니다. 교회라는 것은 애초부터 추상개념이고 교회라는 것은 없어요. 교회가 다 보면 가족끼리 온 거예요. 장로투표나 권사투표 할 때 보면 완전히 표 갈라먹기로 패 가름이 되는데 쫙쫙 다 패가 갈라집니다.

장로투표 할라 치면 우씨 집안이면 우씨들 몰표 나오고 정씨집안 나오면 정씨들 몰표 나옵니다. 우리 교회는 우씨나 정씨가 없으니까 맘 놓고 하는 소리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없고 가족단위로 온 겁니다. 누가 하나 삐지면 우르르 가족들이 다 따라 나가요. 요셉가정이 예수님을 자기자식인줄 알았어요. 내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요셉의 가정이 집중화되니까 ‘나는 아비고 네 옆의 여자는 네 엄마고 예수 너는 내 자식이고’ 그걸 주체화 또는 집중화라고 하는데 똘똘 뭉쳐서 ‘너는 이 가족이라는 이 구조를 벗어나면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종속시키는 그것이 요셉의 가정이었습니다. 교회라는 것이 가족끼리 모이고 결국 교회라는 것은 모든 가족을 집중화시키는 거예요.

그것이 잘못되었으면 안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하는데 다시 여러분께 다짐을 해 드립니다. 인간은 코가 있고 눈이 있고 이렇게 신체가 있는 한 뭐든지 자기 눈에 좋은 것은 뭐든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법이에요. 어린애들 보세요. 어떤 심리학통계에 보니까 이런 소리가 있어요. ‘어른들이여, 갓난애한테 속지 마세요. 갓난애가 얼마나 어른들을 속이는지 모릅니다.’

갓난애가 무슨 속임이 있겠는가, 하는데 갓난애는 항상 어른들을 속이면서 주변에 있는 물체를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하는 거예요. 이게 아담으로 타고난 겁니다. 이게 중생하든 목사가 되었든 소용없어요. 뭐든지 내 것 만들어야 속이 차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이것이 밑 빠진 독이 되어서 아무리 채워도 만족함이 없어요. 뭘 해도 만족함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에요. 결혼하기 전에는 국가 어쩌니 나라가 어쩌니 세계평화가 어쩌니 하다가 결혼하고 나면 자기새끼밖에 모르잖아요. 대학 때 앞장서서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 결혼만 해보세요. 민주화운동이 어디 있어요. 전부 다 애 과외 시킨다고 난리피우고 이제는 자기가족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 몸 자체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나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의 것을 집중화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그걸 학자들은 ‘주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나를 주체로 해서 그것이 커지면 가정이 되고 가정이 주체가 되면 나를 그 가정이라는 것에 배속되게 해서 충성을 다해야 되는데 그 가정이 교회, 국가 점점 늘어나지요.

하지만 그 중심에는 신체가 잡아당기는 그 힘 때문에 교회니 국가니 하지만 그때는 언제냐 하면 우리 가정 내 몸에 시비 걸지 않는 조건하에서는 그 교회 다녀줍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국민이 됩니다. 하지만 10년 20년 다녀도 내 가족의 명예를 훼손한다든지 내 가족에게 누를 끼친다면 손 털고 나가버립니다. 내 가족중심이에요.

지금 요셉과 마리아는, 마리아는 나중에 좀 먼저 알았습니다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겁니다. ‘너는 내 몸에서 났으니 내 자식이고 내 것이다.’라는 겁니다. 여기 아기예수라고 되어 있지만 열두 살이 되었으니 아기는 아니고 소년 예수님인데 소년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가족끼리 올라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빠, 엄마한테 일언반구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 볼 일 봤어요. 어디를 갔느냐? 성전에 가서 선생님들과 함께 말씀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 엄마가 아주 혼이 나갔어요. 자기 소유물인 자기자식을 잃어버렸으니까. 여기 46절에 보면 “사흘 후에 성전에서” 발견했습니다. 사흘 동안 찾아 다녔어요.

지구대에 신고하고 난리가 났겠지요. 그런데 사흘 만에 찾았습니다. 찾아서는 요즘 말로 엉덩이를 벗겨놓고 때리면서 ‘왜 부모 속을 썩였느냐? 부모 심정도 모르고’ 하면서 볼기를 때려도 시원치 않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왜 여기 있느냐?” 하니까 예수님 하는 말이 “왜 저를 찾았습니까?” 하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의 어느 교회가 교인수가 5천명이라고 합시다. 그 5천명 교인들이 지금 가족끼리 왔잖아요. 그 5천 가족이 한결같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합시다. 예수님이 그 교회에 안 계시다고 한다면 5천명이 찾으러 갔을 때에 예수님이 하는 말이 “5천명 교인들이여, 왜 저를 찾습니까?” “아니, 예수님은 우리 교회 와야지요.” “왜 내가 당신 주체화에 놀아나야 됩니까?”

교회하고 예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무 관련성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그것도 주체화, 집중화입니다. 예수님을 당겨서 내가 있는, 아담의 죄가 발산되고 있는 이 몸, 몸뚱아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서 여기 같이 있어 달라는 거예요. 어디서 건방지게 그런 주장을 합니까? 그것은 타고난 죄인데요.

예수님은 우리하고 흥정을 안 합니다. 예수님이 있어야 할 자리는 우리가 주체화하고 우리가 작업 걸고 목회하는 그 목회의 그 자리에 주님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예수님이 있을 이유가 없어요. 사람들은 교회를 뭐로 보느냐 하면 학원으로 봅니다. 양재, 영어, 태권도, 피아노학원, 그 학원에서 뭘 배우느냐? 천국 가는 기술을 터득하는 거예요.

옛날 우리 어머니 양재학원 다닐 때 보니까 죽죽 긋는 분필을 이만큼씩 갖고 다녔어요.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시겠지만. 요리학원도 있지요. 그 집안에 요리학원수강생 하나 있으면 요리 하나 배울라 치면 실습한다고 온 집안에 탕수육냄새가 번지지요. 요리라 하는 것은 기술을 습득하는 겁니다. 무슨 기술? 나를 여기서도 살 수 있지만 죽어서도 살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그 곳을 교회라고 사람들은 여기는 겁니다.

그것은 네 생각이고!!!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놀아나는 그런 주님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없어요. 교회는 여행사도 학원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권도같이 그런 기술 배우는 듯이 하는 데가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는 뭐냐? 교회는 발굴 현장인데 고고학자들이 모여서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하는 발굴단이 되는 겁니다.

자기 집중화가 아니고 숨어 있는 거예요. 이번에 지진 일어나서 무너진 현장에서 구조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가만있어요. 발굴해 줘야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84살 먹은 그 할머니가 지진에 무너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잔해 속에 그냥 있는데 무너진 그 틈바구니에서 찾아내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찾아내는, 예수님이 찾아내는 자기 백성입니다.

콘크리트 무너진 거기에서 무슨 양재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에요. 천국 갈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묻혀 있었을 뿐이에요. 찾아주면 고맙고 이쪽에서 안 찾아주면 그냥 죽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열두제자에게 부탁한 것이 있어요. ‘너희는 고기를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습니다. 고기가 학원을 다녀서 스스로 천국 가는 기술을 터득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발굴해주면 고맙고 발굴 안 해주면 그냥 거기서 죽는 것이고 그것뿐이에요. 예수님은 우리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예수님의 집은 요셉과 마리아가 본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12년 동안 살았는가? 그것은 그냥 등록한 거예요. 마리아 요셉 집에 그냥 등록한 거예요. 잠시 하숙친 거예요. 그런데 그냥 하숙친 것을 가지고 마리아와 요셉은 오해하기를 자기새끼인줄 알았어요. 예수님이 자기자식인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이 따로 있었고 마리아와 요셉의 목적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목적이 서로 달랐던 겁니다. 왜 달랐는가? 구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구조’ 인간의 구조는 모든 좋은 것을 잡아당겨서 나만의 구조를 만드는 겁니다. 저는 이 구조를 광주강의에서 설명할 때 ‘철근구조물’로 표현했는데 여러분이 공사현장에서 보면 철근구조물이 삐죽삐죽 튀어 나왔지요.

철근 공사할 때 그 튀어나온 철근을 다음에 이어서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철근과 철근을 이어나갈 때 대화, 언어가 필요한 거예요. 대화가,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은 속된 말로 저 사람을 꼬셔야 되겠다 해서 나라는 철근과 저쪽의 철근을 잇기 위해서 꼬시는 겁니다. 개그콘서트에서 꼬시는 방법이 뭐냐? (탁자를 두드리면서) 탕탕! 하는 겁니다. “뭐? 날 꼬시려고?” “그래, 한 번 꼬셔보자.” 그거란 말이지요.

계속 철근 구조를 이어나가면 이것은 집중화입니다. 그 사람 중심이 아니에요. ‘저건 나한테 낚였다.’ 낚이게 되면 완전히 그 사람한테 집중화되어서 충성을 다해야 되는 겁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서로서로 자기에게 잡아당겨서 자기에게 집중화시키는 곳인데 여기에 예수님이 가담하겠습니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님은 거기에 가담한 적이 없어요.

교회는 사람이 세운 거예요. 그것은 구원하고 아무 상관없는 곳입니다. 천명이 되든지 만 명이 되든지 상관없어요.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에 똑똑, 두드려서 발굴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름대로의 집중화가 있어요. 그 집중화는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예수님이 가는 아버지 집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게 뭐냐? 성전입니다.

유월절 날 요셉과 마리아가 소년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는데 마리아와 요셉은 ‘이것은 내 새끼다.’ 싶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라고 갔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고 소년 예수님은 이제야 오랜만에 아버지 집에 온 거예요. 자기 집은 아버지집이고 그동안 하숙을 해 온 거예요. 하숙생이 자기 고향에 간 거예요.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하고 이제부터는 아버지 집에 가야겠다 싶어서 아버지 집, 성전에 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작업은 거꾸로 성전으로부터 세상을 향하여 작업이 개시되고 요셉과 마리아는 이것은 내 새끼다, 해서 꼭 자기에게 종속시키려 하고, 그 요셉과 마리아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우리의 사고방식하고 똑같은 거예요.

오늘 본문 50절에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깨닫지 못 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이 잠을 자도 예수님과 같은 시간대와 같은 공간 대에서 같이 식사를 해도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교회 10년 다니고 20년 다녀도 교회를 양재학원이나 태권도학원이나 피아노학원처럼 천당 가는 기술을 터득하는 곳으로 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왜 깨닫지 못하느냐 하면 사람은 자꾸 주변에 있는 것을 잡아 당겨서, 철골구조물을 잡아 당겨서 내 중심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주님한테 딸려가야 하는데, ‘너희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했거든요, 말씀은 내 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딱 집히면, 주님의 말씀이 나한테 딱 도달되면 주님의 그 원천지로 딸려가야 되는데 우리는 말씀이 오게 되면 그 말씀마저 내 것으로 이용하려고 집중화시키는 거예요.

‘집중화’라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되실 텐데 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아요. 무조건 나 좋은 쪽으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말을 어렵게 했는데 좀 쉽게 합시다. 우리교회가 예수를 믿게 되면 ‘이제 우리 교회가 예수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없습니다.’ 이런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이제 다 예수님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 되었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주실 때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요셉과 마리아, 우리를 어떻게 하느냐? 방향이 반대에요.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있으니까 성전에서부터 작업을 개시하니까 자기사람들을 성전으로 잡아당깁니다. 교회가 아니고 성전으로 잡아당겨요. 그러면 성전은 뭐하는 곳이냐?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 또 한사람은 바리새인, 또 한 사람은 악명 높은 세리, 고질적으로 남 등쳐먹는 세금장이 이 세 사람이 등장해요. 예수님은 거기에 왜 등장하느냐 하면 축구로 하면 주심에 해당돼요. 부심 말고 주심, 최종심판주, 심판관으로 등장합니다.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게 되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다른 사람 등쳐먹는 것), 불의(나쁜 짓),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구제를 해야 되니까 구제도 했을 거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누가 봐도 의인이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이여, 어때요? 저 구원받을 수 있겠지요?’라고 나선 겁니다. 그런데 세리는 감히 하나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한 거예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두 사람의 운명은 최종심판하는 심판관에 달렸어요.

주심이 어떻게 판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오래 살든 짧게 살든 그 사람의 모든 운명은 끝나버립니다. 주심 되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판정을 내려요. ‘세리는 의인이고 구원을 받고 이 바리새인은 지옥 간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 판정 내리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서부터 일어난 작업을 그 성전에서부터 출발해서 해 나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작업에 걸린 것이 아니고 자기가 열심히 살고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이것을 가지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자기에게 끌어다가, 하나님을 끌어다가 자기가 바르게 살았다는 것, 훌륭하게 살았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식으로 자기 집중화시킨 거예요. ‘하나님 시킨 대로 사니까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칭찬 좀 해 주소. 다 나좋으라고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 만큼 하나님께 충성을 했으면 우리 인간적으로 구원을 해 놓아야지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자기를 위한 주체화, 집중화, 자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끌어당긴 겁니다.

교회를 5천명, 만 명 불러 모아 놓고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5천명, 만 명 모았으니 우리를 구원해야지요.’ 이렇게 예수를 끌어당긴 것과 똑같은 것이고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 지옥 갑니다. 한국교회가 지옥 가는 교회입니다. 성전의 성격을 몰라요. 성전의 성격, 예수님의 성격하고 자기 성격하고 같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에서 태어나서 죄짓는 성격을 보여주는데 반해서 예수는 아담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생각이 정반대라는 것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생각을 못한 겁니다. 이렇게 판정을 내립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와도 성전이 뭔지도 모르고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가 열심히 행한 것, 열심히 살았던 것 이것만 집중해서 주체화해서 이것만 신경써가지고 ‘이런 것 이런 것을 했습니다. 어때요?’ 라고 자기 떠벌이는, 성전에 와서조차 그것 떠벌이는데 분주했다면 이 세리는 제대로 성전을 알았어요.

‘주여, 내가 이 성전에 왔는데 올 자격도 못됩니다. 내가 감히 얼굴을 들고 어떻게 주님을 봅니까?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는 죄인 맞습니다.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저는 무조건 죄인 맞습니다.’ 죄인 맞지요.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니까, 특별히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니까.

그러니까 성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집중화 때문에 가려진 우리의 진짜 모습을 엑스레이 찍듯이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그 성전에 예수님이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건물이 우리 죄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성전에서 나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는 그 십자가 앞에서 아, 우리는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고개 쳐들지 말고 그냥 엎드리는 거예요 그냥, 죽었다 치고.

‘저는 날 때부터 죄인 맞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는 이것을 했다, 저것을 했다 말할 자격도 못됩니다. 그저 아담의 확장으로서 아담이 연장된 것, 늘어난 것이 접니다. 아담의 죄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평생토록 나는 나밖에 모를 정도로 나만 챙기면서 좋은 것은 다 끌어당겨서 남에게 안 지려고 경쟁에서 안 밀리려고 하면서 뭐든지 내 중심으로 생각했던, 나는 손톱에 피도 나서는 안 되고, 누가 날 건드리면 화만 본능적으로 잘 내는 나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여러분들이 소유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종속하려 들면 안돼요. 예수님 작업은 따로 있습니다. 문제는 판정, 판정입니다. 내가 날 판정할 자격이 못되고 판정은 예수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이거 하나 아시고 가야 돼요. 이거 하나 아시고 오늘 밤에 죽어도 괜찮습니다. 판정 앞에 설 때 어쩔 수 없었다느니, 부모를 잘 못 만나서 그랬다느니, 개떡 같은 목사를 만나서 그랬다느니 그런 핑계로 통하지 마시고요, 십자가 앞에 나갈 때, 주께서 피를 흘릴 때 이걸 아시면 돼요.

주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목숨 대 목숨으로만 이야기 한다는 것, ‘내 목숨 죽는 것 봐서 네 목숨은 목숨도 아니다.’라는 겁니다. “뭐, 지진이 일어났어?” “그거 내가 일으켰다. 왜, 아니꼽나!” “아닙니다. 수천 번도 더 일어나야 됩니다.” “그렇지, 수천 번 더 일어나야지. 봐라. 내가 죽잖아. 내가. 나도 너 때문에 죽는다.” 이 말이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바로 사람을 대할 때 죽을 목숨으로 보겠다는 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나는 너를 볼 때 진작 천만번 지진 일어나서 죽을 목숨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피 흘림이거든요.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주여, 그저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것뿐입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이번에 아이티는 어떻게 해서 지진이 일어났습니까? 주님이 혹시 실수한 것이 아닙니까? 한번 일으켰으면 그만 되었지 왜 진도 6도 여진은 또 일으켜서 더 힘들게 합니까? 그 사정이 얼마나 딱합니까? 주님께서 눈과 귀를 만드셨으면 주님께서도 그 귀가 있고 눈이 있을 텐데 그 사정이 안 들립니까? 엄마 죽고 애 죽고 가슴 아프게 우는 그 소리가 안 들립니까? 하나님 진짜 손 좀 봐야겠네. 아무리 깡패 같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을 이렇게 무시해도 다 되는 겁니까? 우리의 동포애, 인류애 이걸 다 깡그리 무시해도 됩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

여러분, 성금 하려고 하면 복음전하는 교회 성금해 주세요. 이 십자가복음 전할 수가 없어요, 성금이 안 들어와서. 사람들은 자기가 성전 지어 넣고 예수님 모시려고 합니다. 스카우트 하려고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고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데 나밖에 모르니까 중심이 나고 그 다음에 어떤 방향성이 다 나에서부터 나와서 좋은 것은 다 끌어당겨서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인간인데, 거듭나든 아니든 교회 다니든 안다니든 복음 알들 아니든 다 관계없이 다 죽을 때까지 인간은 그것밖에 모르는데 그런 인간이 어떻게 주님한테 끌려가서, 말씀 앞에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 이렇게 죄인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까?” 물으신다면 저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벼락 맞으세요, 벼락. 벼락은 우연성입니다. 예상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벼락을 맞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피뢰침이 됩니다. 위에 있는 번개가 쳐서 아래로 빠지듯이 우리는 온 몸이 쭈뼛쭈뼛 해서 ‘아, 그동안 내 중심으로 살았구나. 그런데 그것이 죄였구나. 조상한테 물려받은 이 본성이 내 중심이구나. 죽을 때까지 이 못된 성품을 계속 가져가는구나.’ 이걸 쭈뼛쭈뼛 아셔야 돼요. ‘너는 의인이야.’라는 하나님의 용서가 벼락을 쳐서 죄 위에 온몸을 아예 완전히 발라버려야 돼요. 소스 바르듯이 온몸을 쳐 발라버려야 돼요.

저는 한국교회를 볼 때마다 뭐가 속이 상하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복음, 다시 말해서 ‘나는 죽을 너를 위해서 내가 죽잖아. 그러니까 너는 목숨 대 목숨으로만 이야기하고 다른 것은 이야기하지 말자. 내 목숨이 죽었기 때문에 네 목숨도 이미 죽은 목숨이니까 이제는 나에게 집중되는, 나에게 끌려오는 생명, 네가 뭘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복음을 위해서 살아라. 복음 외에 우리는 다른 것은 이야기하지 말자.’ 했는데 한국교회는 그렇지 않고 ‘여러분, 병 나으려면 기도하세요. 교회 부흥하려면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충성하고 봉사해야 여러분 가정이 복 받고 좋은 대학 갑니다.’

복음이 아닌 것, 복음 바깥에서 십자가바깥에서 성령을 당겨서 이야기하자고 나서고 ‘하나님, 이야기 좀 합시다. 우리 애가 벌써 삼수 째인데 영 안 됩니다.’ 자꾸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복음외의 영역에서 커피숍에 앉아서 하나님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려고 하는 이것, 이게 참 제가 속이 상해요.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가 이 말을 마음에 두는데요.

오늘 본문 51절 끝에 보면 “……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마리아는 당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이 자기자식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에게 당겨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뒤에는 성전이 있고 자기 자신은 자기주체밖에 없으니까 이제 알았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교인수가 몇 명이냐? 한 명 이에요.

한명 되어도 그것은 한명을 발굴한 겁니다. 여러분 교회는 공장이 아니에요. 학원도 아니고 공장도 아닙니다. 공장은 마구 찍어내고 생산하면 그만이지만 교회는 발굴하는 데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발굴 당했습니까? 누가 벼락 맞았습니까? 누가 지지직, 피뢰침 되었습니까? 그걸 찾는 작업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찾아짐을 당한 사람, 한명이든 두 명이든 숫자에 관계없이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네 맘대로 사세요. 우리의 신체를 손대서 수정하지 마세요. 해봐야 위선밖에 안됩니다. 아닌 척 하지만 결국 돌아서면 나중에 나한테 다 돌아와요. 그런데 이 벼락은 우리가 맞아야 됩니다. 벼락을 맞아서 우리 속의 시커멓게 변하도록 벼락 맞아야 착한 내가, 양심 좋은 내가, 죄인 됩니다. 벼락 맞아 죄인 되는 기쁨을 누리소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하나의 피뢰침 되게 하옵소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세상에, 주님한테 엎드릴 줄 알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인 줄 알고 그 피가 최종 판정이 되어서 죄 지음에도 불구하고 의인 되었다는 최종판결이 나는 근거인 줄 깨닫는 것은 주여, 저희들이 벼락 맞았기 때문에 그런 줄 압니다. 성령에 충만하여서 이제는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그런 행복한 미래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00124눅2(41-52성전에서의 예수님).hwp (51.0K), Down:17

관리자(IP:124.♡.87.13)

10-01-27 08:49

감사합니다. 늘 수고해 주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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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0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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