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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1월 22일 강의 에스겔 3장 두루마리를 먹는 인자 (십자가의 원리)강의에스겔

광주 1월 22일 강의 에스겔 3장 두루마리를 먹는 인자 (십자가의 원리)

이름 : 관리자(IP:124.59.87.13)

100122 겔3장 두루마리를 먹는 인자 (십자가의 원리)

관리자(IP:124.♡.87.13)

10-01-2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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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6.6)

10-02-25 14:11

광주100122a에스겔3장a

광주 강의(2010. 1. 22) 3-1

에스겔 3장 1~3절입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 구절에서 뭘 상상할 수 있습니까? 에스겔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책을 받아서 그것을 먹는 장면이 보입니다. 이것을 보면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에스겔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리고 두루마리 책을 먹는다. 여기서 사람들 마다 궁금한 것이 다 달라요.

‘에스겔은 하나님을 어떻게 봤을까?’ 이것이 궁금할 수도 있고, 또는 ‘사람이 어떻게 두루마리를 먹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고, ‘에스겔이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런 지시를 했는가?’ 이런 궁금증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나무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 따먹고 싶었어요. ‘과연 저 열매는 어떤 맛일까?’ 또는 ‘저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죽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런 의문도 들었을 것이고, 사단의 말로는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정말 하나님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했겠지요.

사람이 자기 외부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 자체가 우리한테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다도, 내 궁금증을 가지고 이 사건 현장에 다가가서 그 궁금증을 해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100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성경을 달달 외웠는데,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죽였어요.

에스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나 예수님과 같이 있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저리 가! 당신은 귀신 들렸어.’ 라고 분명히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가 순전히 상상력만으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수상합니다.

아까 공부 시작하기 전에 나눈 이야기 중에서, 증도(전남 신안군 증도면)에 있는 엘도라도 콘도가 좋다는 것을 우 집사님이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듣는 사람은 상상을 해요. 그 상상하는 근거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과거에 가본 괜찮은 콘도, 멋있는 경치 등을 종합해서 거기에서 더 좋은 것을 추가를 시켜서 콘도를 상상합니다.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든지 할 때,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줄 모르고 항상 자기가 갖고 있던 과거의 습관이나 기억에 준해서 추가로 덧붙이는 식으로 이해하니까, 정작 말하는 사람의 엘도라도와 내가 상상하는 엘도라도는 전혀 달라요.

이것을 에스겔에 적용시켜 보면, 성경에서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었다는 안목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내용인데, 이것이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었기에 우리가 읽으면 우리는 우리의 궁금증을 가지고 계속 접근하게 됩니다. ‘두루마리를 정말 씹어 먹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지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 흘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사람들의 관심사는 ‘저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지? 십자가 질 때 우리의 죄는 뭐지?’ 이런 것에 관심을 둘 수도 있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수도 있는데, 원래 예수님의 십자가의 내막을 우리가 접근을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울과 같은데, 예를 들면 커피숍이 있는데 그 벽이 거울이라면, 밖에서 안은 안 보이고(단지 거울 같고), 그러나 안에서는 밖이 보이는 것 있잖아요. 고급 차 선팅은 바깥에서 안은 안 보이고 차안에서는 밖이 다 보이지요. 이처럼 십자가는 이런 거울과 같아서 밖에서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죽었구나. 이 십자가가 뭐지?’ 하고 십자가에 다가서며 기웃거리는 태도와 행동을 빨아 당기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삼키는 이것은 마치 신약 시대의 십자가와 같아서 ‘에스겔이 정말 먹었을까? 그렇다면 맛은 어땠을까?’ 하면서 나름대로 기웃거리는 이 전부를 죄로 여기고 잡아당기면서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먹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봅시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사람들은 궁금해서 호기심으로 다가갈 때 그냥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이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래 어서 네 죄를 내 놓아라.’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도리어 이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마치 거울이 있는데 바깥에서는 거울이지만 안에서는 유리와 같아서 밖에서 행동하는 모습이 다 보이듯이, 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은 성경을 접근하는 태도마저도 이 안에서는 이미 다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혼자의 십자가가 아니고, 반드시 십자가로 생긴 사건은 바깥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인간들의 죄를 흡수해서 생긴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십자가를 아는 성도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십자가에서 되비춰 나오는 예수님의 고통하는 모습이 결국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받고자 하는 나의 죄마저도 용서하기 위한 십자가의 피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믿어서 ‘천당 가야지.’하는 것까지 죄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성령 받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기독교에도 주문이나 주술 같은 것 없나?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 것, 문장 몇 개 외우면 천국 가는 것 이런 것 없나? 뭐, 십자가 믿으면 된다고? 그러면 십자가 믿어야지. 자, 하나님 저는 십자가 믿었습니다.’ 라고 나설 때, 이것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입니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바로 이따위 식의 사고방식, 자신의 죄를 모르고 그냥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 쥐면 곧장 천국 가리라고 여기는 이런 죄까지 주님이 빨아 당겨서 그것을 도로 ‘이것이 네 죄다.’ 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감나무에 감이 달리지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가 감나무라면 감만 따먹으면 된다고 여겨요. 감의 효과로 구원 받으려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십자가는 감을 먹어요. 먹게 되면 감나무 농사를 지어야 됩니다. 이미 구원 받았기에. 어찌해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이런 고생을 했는가 하는 그 과정을 겪도록 되어 있습니다.

겪어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감을 먹어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 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모든 여정을 가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십자가를 처음 볼 때는 내가 주인공이고, 십자가를 알고 난 후에는 십자가 지신 그분이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주인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똑같은 원리가 본문에 나옵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만약 제가 성경공부에 와서 아무 말도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3분 45초가 지나서 성경책을 먹었다고 합시다. 이런 예술가가 있었어요. ‘존 케이즈’라는 사람인데 백남준이 존경했던 인물입니다. 그 사람은 3분 45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끝나고 난 뒤에 ‘작품 끝났습니다.’ 라고 했어요.

침묵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무것도 안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비로소 얼마나 분주한가를 발견하는 거예요. 사람이 행동하게 되면 남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왜? 자기 행동에 자신이 지쳐서. 자기만 고생하고, 자기만 힘든 줄 알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게 되면, 이런 나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기지요.

본인이 자꾸 움직이니까 남이 나에게 베푸는 혜택은 모르고, 자기가 남에게 해주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 엄마가 되어서 만날 자식한테 ‘공부해라. 숙제해라. 밥 먹고 설거지했나?’ 자꾸 잔소리하지 말고, 엄마가 3박 4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해보는 거예요. 하나의 이벤트로. 남편이 퇴근해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집안이 잘 돌아가겠습니까? 안 돌아가는 줄 알지요? 잘 돌아가요.

사람이 자기가 행동하게 되면 내가 남에게 해준 것만 기억나기 때문에 굉장히 불평이 많아요. 세상에 대해서. 왜? 내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안 주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심지어는 잔소리도 안 하면(잔소리를 하면 잔소리한 덕분에 얘가 저만큼은 됐다고 우기기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남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혜택을 입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현대 전위예술에서는 이런 실험을 통해서 의미를 끄집어내요.

그런데 에스겔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합니다. 사람이 빵을 먹어야지 왜 두루마리(말씀)를 먹습니까? 말씀은 먹는 게 아니고 보고 실천에 옮기는 거잖아요. 그런데 에스겔은 실천이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실천은 나라는 주체가 성경이라는 객체(대상)를 보고 뭔가 내 쪽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성경 자체가 내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대상으로 여겼던 그 성경 말씀이 대상이 아니고, 내가 나 된 것은 말씀이 나로 하여금 있게 만들고 에스겔을 에스겔답게 이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일종의 헤프닝이죠. 에스겔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킨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누가복음 18장 이야기인데, 저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를 못하겠어요. 너무 좋아서.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교인들로 하여금, “여러분들, 예수 믿었습니까? 이제부터는 헌금하시고, 말씀 지키시고, 봉사하시고 --” 전부 그런 쪽으로 나가는데, 누가복음 18장에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 또 한 사람은 세리. 이 두 사람이 성전에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심(경기에서 심판)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주심인데, 예수님의 판결 외에 다른 판결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 판정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판단하고 정죄하고 고소해도 소용없어요. 마지막 심판 주(주심) 되시는 분이 판정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것이 뭡니까? ‘나는 의인이며, 나는 십일조 했으며, 나는 간음이나 토색이나 사기나 이런 것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소극적인 의(義)지요. 이뿐 아니라 금식도 했지요. 이것은 적극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극적, 소극적으로 모든 것을 다 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 사람이 나서서 심판을 본다면 세리는 천하의 몹쓸 인간이고, 바리새인은 누가 봐도 의인이고. 이 두 사람을 목사가 판정한다면 누가 천국 갑니까? 바리새인은 천국, 세리는 지옥 간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심판 주(예수님)에 의해 어떻게 판정 나는가를 보세요. 예수님은 두 사람의 기도를 다 들었어요. 경기는 끝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최종 판정만 남았습니다. 그 판정에서 세리가 이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세리를 의인이라고 했고, 바리새인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판정의 기준이 뭡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기준은 간단해요. 성전이 힌트입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와도 성전에 온 것이 아니고, 자기가 온 거예요. 자기가 이동한 겁니다. 집에 있는 자신이 성전에 있는 자신이에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자기 바가지가 성전에 온 겁니다. 자기가 뭘 쳐다보고 있습니까? ‘구원의 주체는 나다. 내가 행동한 그것이 나로 하여금 천국가게 만든다.’ 라는 것을 믿은 거예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뭘 느끼는가 하면, 자기가 성전에 왔다는 거예요. 성전에 제사 지내러 온 거예요. 그런데 세리는 뭐 하러 왔습니까? 죽으려고 온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주여! 저는 이 성전에 와서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저 같은 죄인이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겠습니까?’ 라고 했더니만, 주님은 ‘네가 의인이다.’

결국 이 기준은 ‘지금 네 관심사가 어디에 있으며 뭘 쳐다보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있어요. 자기가 주인공이 안 되는 식이 곧 성령 충만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안 되는 그 짧은 순간. 사람이 자기가 주인공이 되면 모든 잘못된 것은 남 탓이고, 하나님 탓입니다.

오늘 아침이 게시판에 올린 글에 보면,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관 속에서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처럼 남을 보기 때문에 아이티 지진으로 난민이 생기고 20만 명이 죽었을 때 그 난민의 입장을 안 들어보고 자기가 지진을 당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지진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라고 물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단층이 갈라져서 일어났다고 답이 나오지요. 그러면 안 되고 ‘누가 일으켰는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으켰지요. 이것을 아이티 국민들 중에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진은 신의 계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를 욕하겠어요? 하나님을 욕하겠지요. 그래서 제 글에 이렇게 썼어요. 하나님을 욕하기 때문에 ‘탄핵’이란 표현을 했어요. 인간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탄핵하는데 그 방법이 뭐냐? 헌금을 안 하는 거예요.

헌금을 한다는 말은 ‘하나님, 당신의 뜻에 동의합니다.’ 라는 뜻이고, 헌금을 안 한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나는 동의 못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당신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기에 돈 받을 자격이 못 됩니다.’ 그런 의미로 헌금을 안 합니다.

그런데 이걸 아셔야 돼요. 헌금을 하라고 하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헌금을 해버려요. 믿음도 없이 헌금을 하면 이것은 문제가 걷잡을 수 없는 겁니다. 성경에서 헌금을 하라는 말의 진짜 의도는 뭐냐 하면, ‘당신은 지금 누구를 보고 삽니까?’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의 조치에 당신은 감사하면서 살아갑니까?’ 그런 뜻으로 물었는데, ‘헌금 하면 되지. 해버리자.’ 이런 식이 되면, 믿음도 없으면서(주님을 안 바라보면서) 나중에 ‘목사님, 저는 헌금 했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본인이 감사하는 마음도 없는데 헌금을 괜히 해놓고, 그 다음에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헌금만 받아 챙기는 더러운 하나님!’ 이라고 욕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헌금 하라고 한 목사가 잘못 되었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헌금은 반드시 ‘하나님, 당신이 하신 일 참 잘했습니다.’ 라는 동의하에 헌금이 되어야 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감사가 나와야 될 텐데 감사가 없다는 말은 ‘요즘 하나님 하시는 일이 영 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아이티에 헌금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들을 땅 밑에 매몰시켜도 우리 인간의 가치는 고결합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힘을 합쳐서 지진을 일으킨 신을 부끄럽게 만듭시다. 인간 가치를 묵사발 만든 신에 대해서 다같이 저항합시다.’ 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치약, 칫솔, 화장지, 라면 등을 보내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짓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천만번 지진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할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지금 내가 지진 때문에 땅에 매몰되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정말 죽어도 마땅할 죄인이 죽습니다.’ 라는 경우에만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내려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햇볕 주셨지요, 공기 주셨지요, 눈까지 내려 주셨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어떤 지역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닐하우스가 망가지고 농작물이 얼어 죽었는데 그곳에서는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눈을 내려 폭삭 망하게 한 더러운 하나님!’ 이라고 하면서 화를 내지요.

그래서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은 것은, 우리가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짓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구원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와 의논하지도 않고 우리 구원을 위한 확실한 작업을 하고 있단 말이지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누가 있는가? 인자.

신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호칭할 때 뭐라고 합니까? ‘인자’라고 하지요. 이 말은 모든 인간들을 다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의 아들’인데,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풀이를 하면 안 돼요. 풀이하지 말고 그냥 ‘인자’라고 불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 인자가 에스겔이고 다니엘이고 다윗이죠.

에스겔, 다니엘, 다윗 이런 속성을 갖고 있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선지자(선지자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안에 누가 들어 있는가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가 들어 있어요. 메시아가 들어 있으니까 그 메시아는 먼저 인자, 에스겔, 다니엘, 다윗 같은 그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나아가서 그것을 성취해 나가면서 오실 분이 바로 진짜 메시아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에스겔 이해 못하고, 다니엘 이해 못하고, 다윗 이해 못한다면 결국은 예수님을 이해 못하지요. 아무도 에스겔, 다니엘 이해 못했습니다. 역시 예수님도 이해 못했죠. 결국 ‘사람의 아들’ 즉 ‘인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하게 통하는 분인데, 뭐가 통하느냐? 이게 중요하죠. 언약이 통한다. 이것을 언약적인 관계 또는 언약적인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자인 에스겔, 다니엘은 언약적인 몸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몸이 에스겔 3장에 보면 말씀을 먹으니까 나오는 결론이 뭐냐 하면, 예수님 안에는 뭐가 들어 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말씀이 들어 있어서 예수님이 성취하게 되면 우리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성취된다는 그런 구조가 여기에서 성사되는 겁니다.

이제 이해되지요? 에스겔이 말씀을 먹은 것은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지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었다고 하니까 ‘에스겔이 얼마나 맛있었겠는가?’ 이런 쓸데없는데 관심을 두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마저 우리의 죄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나중에 용서해 주시지요.

만약 어느 가정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여보, 이제 우리 교회에 갑시다.’ 라는 간단한 문장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내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하나님이 이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과 인자만이 아는 내용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까? 우리는 몰라요.

모르는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가 아는 하나님으로 접근하지요. 그 자체가 나중에 진짜 십자가를 알게 되면 ‘아하, 내가 처음 교회 나오면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알았던 것도 내 욕망의 산물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그 날이 옵니다. 감 먹고 난 뒤에 감나무 키우는 고생을 한다고, 우리가 구원 받고 난 뒤에 ‘아하, 주님께서 이런 죄까지 용서했구나.’ 하는 것을 차후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 지으려고 할 필요 없어요. 왜냐? 그냥 사는 것 그 자체가 죄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죄 지을 이유가 없어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나쁜 짓을 해서 죄가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죄 인줄 알고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 앞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미 용서될 수 있는 죄가 되는 겁니다.

감은 이제 따 먹었어요. 먹고 난 뒤에 감이 흘러가니까, 감이 지나가는 식도, 위장부터 소장, 대장 내려가면서 전부다 거치는 곳마다 죄가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환희와 즐거움 ‘야, 내가 뭘 해도 죄인이구나. 만세!’ 이런 존재의 가벼움.

그런데 방금 한 이야기를 강의 초반부터 연결해서 들으면 좋은데 방금 문 열고 누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방금 한 이 대목만 듣고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다. 그래도 우리는 용서 받았다.’ 라는 말만 들고 나갔다면, 그 사람은 뭘 생각하는가 하면, ‘내가 뭘 해도 용서가 되니까 이제 나쁜 짓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겠네.’ 이렇게 나와요.

감은 먹었는데, 감나무 심고 가꾸는 고생을 해야 된다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이제 감하고는 끝났어. 이제 감하고는 안 놀아. 이미 감은 먹었는데.’ 이런 식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과는 안 놀래. 나는 내 마음대로 놀래.’ 이렇게 되면 관심사가 어디로 갑니까? 자기가 주체가 되지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마지막 주심이 뭐라고 판정합니까? 세리는 성전 기능에 눈이 가 있는데, 바리새인은 성전에 와서도 성전에는 관심이 없고 성전에 와있는 자신에게 관심이 있죠. 즉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께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 믿는 나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의인 맞잖아.’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기가 차지요.

그런데 죄 지어도 괜찮다는 이 인간은 결국 어디를 봅니까? ‘죄 용서가 어디에서 나왔지?’ 여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야호, 이제 죄 지어도 괜찮다.’ 라면서 자기가 자기를 보는 거예요.

이제부터 3장 1절 이하에서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는 대목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테니까 주의를 기울이고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에스겔이 입을 벌리고 여호와가 그 두루마리를 먹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경책을 인간이 먹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이쪽 하늘의 구조가 땅의 구조 속에 침투하는 겁니다. 만약 어떤 가정이 예수 믿는다면, 그것은 내가 예수에 대한 지식을 머리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갖고 계신 구조(천국이죠)가 나의 모든 세계에 그대로 침투가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침투 되는가 하면, 하늘의 구조가 나에게 밀려오면 나는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이 구조가 밀려오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그동안 나만의 구조를 따로 챙겼구나.’ 하나의 새장처럼 내가 나만의 구조를 형성한 거예요.

이 구조의 형성이, 안의 보이지 않는 구조가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을 철학에서는 ‘언어(말)’ 또는 ‘언표’라고 합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말을 통해서 고속도로를 깔아놓아요. 저는 결혼 후 지금까지 나이트클럽 이란 곳을 한 번도 안 가봤습니다(결혼 전 형들에게 끌려서 한 번 가본 적은 있지만).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간접 경험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부칭할 때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광고에 보면 ‘이 보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라는 것이 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화를 하면서 과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가 보니까 묻는다는 거예요. 뭘 묻는가 하면 이름도 묻고 성별도 묻고 등등을 물어요. 그래서 이 광고는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반드시 대화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 아무에게나 대화를 걸지는 않습니다. 김 집사님이 고속터미널에 저를 마중 나왔는데, 그곳에 있는 승객들 아무에게나 말을 걸지는 않습니다. 기다렸던 저를 만나면 얘기를 합니다. 왜 저에게 얘기를 합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

이게 뭐냐 하면, 말을 한다는 것은 이근호 목사는 김 집사님의 구조 안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그냥 그 말을 허비하기 위해서 말을 거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과 없었던 길(고속도로)을 새로 닦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골조를 깔 때 그것이 언어로 뛰어나온단 말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뭐로 만들었습니까? 말씀으로 만든 거예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빛이 있어라.’ 하시니까 빛이 생겼어요.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님이 사람들을 흩어지게 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언어를 혼란시켜서 서로의 구조체제에 장애가 생기도록 했어요.

말이 안 통하니까 함께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니 흩어지지요. 이것을 유대인 철학자 벤야민은 말하기를 ‘바벨탑의 그 언어가 인간의 모든 문명의 기본이다.’라고 했어요. 라캉이란 사람은 언어 밑에 무엇이 있는데, 언어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무의식에서 나왔다. 무의식의 구조가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 언어다. 진짜 언어는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로 가려면 무의식으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갈 때 언어가 바깥에 나온 것도 언어고 언어의 토대가 무의식이기 때문에 바깥으로 나온 언어는 위선이죠. 즉 말발이고 실재로 음흉한 것은 말로 표현되기 전의 무의식입니다.

그래서 진짜 언어는 어눌함과 아이들의 옹알이, 그리고 다급할 때 나오는 비명 같은 것이 그 사람의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나 이사야가 하나님 만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욥이 하나님 만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입을 막았지요. 입을 막는다는 것은 자기의 철근구조에서 하나님과 이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께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는 있을 수 없고, 하나님 쪽에서 말씀을 해 주셨다는 그 자체가, 그 철근이 쭉 뻗어 나와 나에게 꽂힐 때 ‘저는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지요.

꽂힌 사람은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세리처럼 ‘주여, 이 성전이 나를 살렸습니다.’ 라고 하지요. 나는 의인이 될 수 없는 자인데 일방적으로 ‘너는 구원 받았어.’ 라고 하시는 그 선언. 그 말씀. 마지막 주심이 판정하는 “‘너는 의인이야.’ 라는 선언 때문에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라는 그 고백. 그게 바로 에스겔에서 이미 시작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0. 2. 25. 11:18 녹취 : 서경수)

관리자(IP:124.♡.86.6)

10-03-05 10:15

광주100122b에스겔3장b

광주 강의(2010. 1. 22) 3-2

지금 두 사람이 있는데, 에스겔 몸을 진짜 몸이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그가 두루마리를 먹었기 때문에(그 몸 안에 성경책이 들어 있으니까).

여기서 에스겔이 말을 한다는 것은, 철근 구조물이 삐져나와서 에스겔이 갖고 있는 이 구조(이것을 인자 구조라고 했습니다)가 나중에 메시아 구조, 즉 예수님 구조잖아요.

이렇게 에스겔이 나가는데 이쪽에 있는 백성들, 3장 4절 이하에 보면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이니까 지금 제가 이야기할 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인자가 개인의 자격이 아니고 하늘의 구조를 몰고 가서 대화를 하는데, 대화를 한다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 시간에 얘기 했지요. 대화를 한다는 것은 연결하는 것인데, 연결해서 거기에 포착된 사람은 말을 던진 사람의 구조에 합류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세요.” 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믿게 되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데 그 이유가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이 어느 구조에서 나왔어요? 천국 구조에서 나온 거잖아요. 이것을 언약이라고 하지요.

“십자가 피가 당신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라는 것은 누가 지어낸 겁니까?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조에서 삐져나온 것이지요. 영화 [프랜스포머]처럼 이것이 삐져나올 때 이것은 누구를 보고 이야기합니까?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언어를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어요. 말이 어려워서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가 일치 될 때 동의가 됩니다. 그래서 복음은 필히 방언으로 해야 될 이유가 이것을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의 의미입니다.

어제 집사님도 할머니께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지요? 그 말을 할머니가 왜 못 알아듣는가 하면, 할머니의 구조가 따로 있어요. 집사님은 할머니의 구조에 대해 잘 모르는데 복음을 전해보니까 그 할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는 것이 들통 난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구원 받으라고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이래서 지옥 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뜻도 있어요. 복음이 양 날을 가진 칼과 같아서 받는 사람은 구원이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지옥이고. 이 양쪽 다를 겨냥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목사가 사람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 구조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내가 무엇이든 행하면 그 행한 대로 내가 보상을 받는다.’ 즉 ‘바치면 복 받는다.’ 이런 구조인데, 그런 구조 속에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은 배척 받지요.

(경기의)주심도 없는 교회에 가서 구원 받는다고 앉아 있으니까, 이것은 차가 떠나지도 않았는데 금강산 관광 온 줄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천국에 대한 이미지만 있을 뿐이지 천국 근처에도 못간 엉터리 교회예요.

방주와 유사 방주의 차이점은, 진짜 방주는 물위로 떴다는 것이고 가짜 방주는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관광코스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듣고 그냥 오는 거예요.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계속해서 나와요. “여러분, 헌금해도 복 못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 해요. 왜? 이미 우리는 복 받았기 때문에. 복이 무엇인가? “여러분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아이티 지진 일어나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돈 내려고 하면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돈 내세요.”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전 세계, 온 국민이 아이티에 성금 보내자고 하는 마당에 ‘보낼 필요 없다.’고 아니까 그 말의 뜻을 못 알아들어요. 구조가 달라서 그래요.

그래서 선지자는 죽을 지경입니다. 왜? 서로 소통이 되어야 (복음)전하는 재미가 있는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핍박 받으라고 말을 전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데 선지자는 감은 먹고 그 다음에 감나무를 심어야 하는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감을 먹었으니 맛이 어떠했겠습니까? 달고 맛있지요. 3절을 봅시다.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입에서는 달지만 나중에 뱃속에 들어가면 씁니다.

자, 이제 구조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해 봅시다. 구조라는 것은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힘으로 이루어지게 되면 뭐가 없느냐 하면, 나(주체)는 힘의 지배를 받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맞선을 볼 때 “아가씨, 저 어때요?” 하고 남자가 물으니까, 여자는 “직장은 어디시지요?” 하고 되물어요. “아니, 내가 어떠냐고요?” 그런데 여자는 직장이 궁금한 거예요. 삼성그룹이면 좋겠는데 삼성사(시골 영세기업)라고 하면 곤란하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어느 힘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이걸 여자가 묻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남자는 ‘저 어때요?’ 하니까, 여자는 ‘아버지는 뭘 하시는 분입니까?’ 이렇게 나오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람의 주체라는 것은, 사람의 주체(나)는 없고 쪼개보면 힘의 조합입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가시적인 힘의 조합을 만들어요.

여자들이 옷이나 반지, 가방, 신발 이런 것들을 명품으로 하고 다닐 때, 힘을 둘둘 감고 있는 거예요. 그 힘을 감고 힘의 시장으로 나가지요. 그러면 저쪽에서 또 다른 힘이 와요. 힘이 빠져버리면 주체가 사라져 버려요. 그런데 힘이 있으면 남에게 과시하기는 좋지만 뭐가 문제냐 하면, 힘에 종속 된다는 것. 비자유죠.

자신이 내세울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 “우리 고모는 변호사고 우리 외삼촌은 사장이고--” 하면서 자기 주변에 있는, 내가 감고 있는 힘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말을 못하는 거예요. “Who are you?(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는데, “나는 의사입니다.” “직업을 묻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누구냐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나는 내가 어떤 자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요.

나는 어느 집안에 예속되어 있고, 어느 직장에 예속되어 있으며, 어느 학벌에 예속되어 있으며, 통장 잔고는 얼마나 되며 등등 항상 힘의 지배를 받아서 내가 힘이 없다면 나도 없어져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가지고, 개업하는 가계에 춤추고 있는 ‘키다리 풍선’이라고 합니다. 혼자 촐랑대로 춤추고 난리를 치는데 플러그만 뽑으면 바람이 빠지면서 그냥 힘없이 주저앉지요.

세상이 전부 자기 자랑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생각해서 그렇고, 세상은 힘의 구조입니다. 이것을 매트릭스라고 하지요. 즉 힘의 구조. 이 힘의 조직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아바타]라는 영화입니다. 여기에 보면 두 개의 구조(매트릭스)가 나옵니다. 한쪽 구조는 개화된 백인 구조가 나오고, 다른 구조는 인디언 구조인데 나비족으로 나옵니다. 이 두 구조의 차이점은, 백인구조는 자체적인 힘으로써 구조를 만든 것이고, 인디언 구조는 자체적인 힘이 아니고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구조입니다.

그러면 이쪽(인디언)은 신이 자기 바깥에 있겠죠. 그리고 신이 있으니까 신에 의존적이죠. 자꾸 기대는 거예요. 그런데 저쪽(백인)은 신이 없고 자기 자신들이 전부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힘을 합치겠지요. 이렇게 되면 이쪽에서는 신이 주체가 되지요. 저쪽은 (힘이 뭉쳐진)덩어리가 주체가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문명입니다. 이것이 [아바타]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현대문명은 독자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독자적이 아니고, 내가 소속된 힘 덩어리가 독자적이 돼요. 그러면 나는 그 힘에 굴복해야 될 부속품이 되지요.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습니까, 교회 때문에 구원 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지요. 그런데 기존 교인들에게 이 말을 하면 화를 내지요. 왜냐하면, “당신이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라고 하니까, 기존 교회에서 하는 말이 “우리 교회가 예수 믿어.” 이러고 있어요. 본인 이야기를 안 하고 ‘우리교회 목사님은 예수님을 전한다니까’ 이렇게 말해요.

왜 교회가 나옵니까? 주체가 자기가 아니고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보이는 하나의 구조가 자기를 대행(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를 대신하는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의 주체는 예수님으로 확정되었어요. 그러기에 구태여 내가 주체가 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힘의 구조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언제 다른 교회로 떠나는가 하면, 자기는 평소에 매월 10만원 헌금을 하는데 20만원 헌금 하는 사람이 오면 자기는 상대적으로 사랑을 덜 받겠지요. 그러면 그 교회를 떠나요. 다른 교회 가서 사랑 받으려고. 사람들이 목사에게 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해요.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자기 주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힘이 되는 곳으로 자꾸 떠돌아다닙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노마디즘(유목주의)’이라고 하지요. 친구도 돈 없으면 다른 돈 있는 친구로 옮겨갑니다. 힘 있는 나를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자꾸 이동해야 되고 떠나야 하고 그런 거예요.

TV [6시 내고향]을 보니까, 시골 어떤 마을이 나오는데 청년회 회장이 65세입니다. 이분들은 자녀 안 낳았습니까? 그러면 젊은 청년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시골에서 자녀들을 붙잡고 “얘들아 너는 나랑 같이 이곳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자.” 라고 하는 부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나는 못 배워서 시골 촌구석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이 가난을 너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다. 너는 돈 벌 수 있는(힘을 얻을 수 있는) 도시로 나가라.” 이렇게 해서 다 떠나보냅니다.

주체라는 것은 없고, 그저 내가 숨을 수 있는 힘을 찾아서 계속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힘의 구조에 지배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해야 하는가 하면, 에스겔은 몇 명이지요? 한 명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전하는 사람은 명 몇입니까? 이스라엘 전체지요. 숫자로 보면 약 100만 정도 될 것입니다. 1:100만 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100만 명을 1명으로 봐요.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몸은 하나밖에 없어요.

지금 화평교회에 여러 명 계시지만 하나님은 여러 명으로 보지 않고 한 명으로 봐요. 그 이유는 하나의 몸이 하나의 혜택, 하나의 용서를 받으면 절대로 두 명이라고 우기지 말란 말이지요. 왜? 주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주체를 인정 안 해요. 그 사람이 하나님께 힘을 받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너희 교회 몇 명이냐?” 하면, “우리 모두 주님의 몸입니다.” 이렇게 답변해야 합니다. “10명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말고. 왜냐하면, 주체라는 것은 숫자로 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소속된 힘이 어디서 오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란 말이지요. 세상에서는 세상의 힘을 보여주지만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전에 예정되어서 우리가 하나의 주체로써 활동하는 겁니다.

제가 주체를 말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러면 목사님은 아예 주체가 없네요? 그러면 불교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주체가 없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 땅에서 주체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을 증거하지만(사실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속한 힘을 증거하는 거죠)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지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 하나 던지고 갑시다. 그러면 에스겔을 하나님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인자. 인자라고 부른 것은 에스겔 안에 장차 오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은 하늘의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지요. 그래서 에스겔이 만난 이스라엘은 여러 명이 아니고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구조가 되지요.

그런데 이 구조가 에스겔이 전하는 구조를 거부하지요. 그래서 삼촌, 시동생, 형님 할 것 없이 한꺼번에 다 망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항상 이스라엘을 여러 명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봐요. 갈라디아서에서 이것을 인간 노선이라고 합니다. 인간 노선이니까 굴러가도 같이 굴러가지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다 지옥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구원 받을 사람 없습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에스겔 혼자뿐입니다. “그러면 진짜 다 멸망합니까?” 예. 진짜 멸망합니다. “아니, 그래도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구원 받지 않습니까?” 없습니다. 구원 받을 자는 있어요. 그런데 본인의 힘으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 받는가? 에스겔이 말할 때 전체가 다 거부했잖아요. 거부한 이들의 일부가 어디로 가는가 하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갑니다. 포로 잡혀 가면서 이 사람들은 멸망당하지요. 그런데 이 멸망당하는 가운데서 구원 받을 사람이 튀어나와요. 그러면 어떤 결과가 되는가 하면, 우리는 마땅히 멸망을 당하는데 주님께서 역사하셔서 에스겔이 우리와 동승하게 되면 멸망 받을 인간 노선에서 천국 노선으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탔기 때문에 에스겔 때문에 성령께서 방향을 틀어줘요.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아담의 몸을 가진 죄인이잖아요. 죄인인데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 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멸망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동승해 주니까 우리가 구원 받는 거죠.

그 다음, 우리는 육이니까 인간 노선대로 살지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힘을 그리워하며 살지요. 이것은 누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김 집사님 두 딸이 예쁘고 신앙도 좋고 훌륭한 신부감인데, 만약 선을 두 군데 봤는데 한쪽은 성형외과 의사고 신앙은 없고 겨우 교회 다니는 정도이고, 다른 한쪽은 복음은 아는데 아직은 직장이 없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물을 필요도 없이 의사 쪽을 택하는 것이 100%입니다.

왜 이런가 하면, 우리는 아담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힘을 좋아해요. 에스겔이 말하는 것은 듣지도 않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힘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그들과 동조해서 나도 힘 자랑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평생 죄만 나옵니다.

그런데 방향을 틀어주는 것은 누가 하느냐 하면, 우리가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동승하신 예수님께서 방향을 틀어서 바로 에스겔이 소개한 이 구조에 소속되어 있음을 수시로 알려줍니다. 우리는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하늘의 구조와 대비시켜보면 ‘내가 이런 죄인이었구나. 그런데 이런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희생을 하셨구나.’ 라는 것이 수시로 터져 나오도록 그렇게 하시지요. 이게 바로 에스겔의 주제입니다.

‘멸망해라. 잘 가라 이놈들아. 너희들은 너희 죄로 인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가야 해.’ 이것이 끝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너희들 그곳에 가 있어라. 나도 곧 따라갈게. 그래서 너희들 자체를 하나님의 잃어버린 성전이 되게 할게.’ 라고 하시는 겁니다. 따라가면서 하는 말이 ‘다윗을 내가 보내 줄게.’ 그 다윗은 누구인가? 여호와. ‘여호와를 보내 줄게. 너희들의 목자로.’ 하고 멸망당하는 자들을 따라가면서 동승해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상당히 슬프지요. 그런데 왠지 오늘날 우리들은 세상길로 나가면서 왜 즐거운지 모르겠어요. ‘예수 믿었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면 된다.’ 지금 이스라엘은 슬펐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포로로 잡혀 가야하니까. 이것이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입니다.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줘놓고 쫓겨났다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잖아요. 나중에 약속의 땅에 돌아오게 되면 약속의 땅이 하나가 아니고 둘로 갈라져요. UFO처럼 약속의 땅이 밑에 있고, 그 약속의 땅이 내려앉는 그림자가 뭐냐 하면, 바로 학개, 느헤미야, 스가랴에 나오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쪽 성전은 소용없어요.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하는데, 다시 본토에 성전을 짓는다면 그 성전은 깨어집니다. 왜냐? 그림자이기 때문에. 어쨌든 이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있다가 바벨론에 잡혀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우리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이방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붕 뜨지요. 우리 머리위에 약속의 땅이 붕 뜨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늘 같이 가요. 우리 가슴속에 그림자가 남고, 천국의 그림자가, 천국의 구조가 힘만 좋아하는 우리 구조 속에 겹쳐서 그림자처럼 내려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에스겔이 참 쉽지요.

그렇다면 방향을 틀어줄 때, ‘아하 우리가 구원 받았구나.’를 알게 되는데, 그 방향 틀어줄 때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고난을 알면 우리의 관심사가 여기에 꽂히게 되고, 그러면 나의 고난과 고통을 잊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고통과 고난을 잊으면 뭐가 크게 부각되겠어요? 나의 고통과 고난이지요. ‘아, 내 팔자는 왜 이런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어제 어떤 분이 제게 전화해서 “목사님, 죽고 싶습니다.” 라고 해요. 그 소리 듣고 제가 속으로 “할 일이 없구나.” 생각했어요. 바빠 보세요. 그러면 그런 전화 하지도 않지요.

8절을 봅시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이마가 딱딱하다는 것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이마로 대변되는 시대였습니다. 표정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딱딱하다고 하니까 씨도 먹히지 않지요. 그래서 11절을 보면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 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려면 거짓말을 안 하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해요. 거짓말 안 한 것이 있어야 거짓말 한 것이 드러나지요. 좋은 딸기만 있으면 ‘딸기가 섞었네.’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바구니에 담긴 딸기 중에 좋은 것도 있지만 섞은 것이 있어서 서로를 비교해서 ‘섞었네’ 또는 ‘싱싱하게 좋네’ 라고 할 수 있어요.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 안 하고 있는 것이 있을 때 거짓말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거짓말 하는 ‘나(첫번째 나)’와 이것이 바로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나(두번째 나)가 있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나’가 몇 개입니까? 두 개지요. 한 쪽 ‘나’는 ‘이번에는 거짓말 했지만 자꾸 거짓말하면 탄로 나는데, 다음에는 거짓말 안 해야지.’ 라고 하면서 타협조로 나와요.

만약에 진짜 IQ가 50정도 되는 사람 같으면 이 사람은 두 번째 나(반성하는 나)는 없지요.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인줄 모르지요. 이것은 비정상적인 사람의 경우고, 정상적인 사람은 반드시 거짓말을 했으면 거짓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짓말을 지적하는 ‘나’가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나’가 두 개가 됩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 거짓말 하는 나와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는 나. 이런 내가 처음 몸을 가지고 태어날 때 구성된 신체는 거울을 보면서 처음에는 눈하고 입밖에 몰라요. 그래서 모빌을 달아놓으면 모빌을 통해서 눈동자 운동하고, 입으로는 엄마 젖을 빨지요. 그러나 팔, 다리가 있는 것은 잘 못 느껴요. 알면 오줌을 안 쌀 텐데 있어도 몰라요.

그렇게 느끼다가 3개월쯤 지나면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전체가 보여요. 거울 속에 있는 것이 자신이란 것을 알아요. 자아가 전체적으로 윤곽이 잡히면서 처음 자신을 느끼는 이 단계를 ‘거울 단계’라고 합니다. 라캉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누가 얼굴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때려도 내가 맞는다고 여겨요.

처음에는 얼굴 중심으로 나를 느끼다가 좀 지나면 팔, 다리도 나인 것을 아는 것이지요. 이 단계는 엄마와 자신이 나눠지지 않아서 엄마가 없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fort - da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장난감인데, 던지면 실패에서 풀려서 멀리 갔다가 되돌아오는 장난감인데 얘들이 이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엄마가 있을 때(실패가 있을 때)와 엄마가 없을 때, 나에게 엄마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그것으로 내가 나인 경우와 내가 나인 줄 모르는 경우 두 가지뿐입니다. 엄마가 있어야 나를 아니까.

그 때부터 인간은 ‘나’라는 것은 나를 감싸주는 남을 통해서 나를 아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대화를 통해서 남을 아는 거죠. 그리고 남을 통해서 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잘 못 느끼는데, 아이가 ‘엄마 밥 줘!’라고 했을 경우에 비로소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꼭 남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합니다. 남이 형성해 주는 그 공간이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남이 동그라미로 나를 규정하면 나는 동그라미가 되고, 남이 나를 네모나게 보면 나는 네모난 사람입니다.

여기 이 자아에서 나온 것이 현재의 나인데, 여기서 거짓말 하는 것은 왜 합니까? 남을 속이기 위해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남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잖아요. 그래서 남이 없으면 거짓말 합니까, 안 합니까?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이것이 성경적으로 맞는가? 맞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의 타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여자의 타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입니까? 남자예요. 남자에서 나왔다고 해서 여자가 된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봐요. 남자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데 여자는 남자 없이는 못 살아요.

그래서 결국 주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남편으로 보는 여성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독자적인 남성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아쉬운 것이 없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아쉬운 것도 없고 나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그것만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종속이 되잖아요.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자기를 다스리는 주체가 따로 있게 한 거죠. 즉 이방 민족에게 사로잡히게 만들어서, ‘야, 이 세상나라보다는 역시 그 때 여호와가 좋았다.’ 라고 깨닫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상 좋은 것 실컷 맛보다가 버림 받고, 설움 받아봐야 그제야 ‘하, 주님 섬길 때가 좋았다.’ 라는 것을 매일 느끼게 만들지요. 특히 주일날 교회 가다가 야바위꾼이 보여요. 그래서 헌금할 돈을 가지고 야바위 게임에 참여해서 ‘돈을 따서 더 많이 헌금해야지.’ 하다가 돈을 몽땅 날리지요.

이처럼 돈을 잃어봐야 ‘아, 하나님께 헌금할 돈을 함부로 유용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교회 재정을 맡은 집사가 교회 돈으로 이자 많이 준다는 곳에 투자를 해서 돈을 다 날릴 때 ‘야, 주님의 돈을 함부로 굴리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듯이.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 모델인데 우리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선이 따로 있는데 이 노선이 뭐냐 하면, 과거 - 현재 - 미래로 이어지는 노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 보세요. 과거가 얇은 것이 아니고 두꺼운데 이 밑으로 내려가요. 밑으로 내려갈 때 현재라는 것은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현재가 이것을 선택 합니다. 선택하는 이유는 자기는 힘의 구조이기 때문에. 힘의 구조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세상의 힘이죠. 세상의 힘은 타인이고.

남들이 즐기는 것을 나도 즐기고 싶다. 따라서 내 과거 가운데서 숨기고 싶은 것은 숨기고, 자랑할 것은 꺼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재 인간이란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체로 있는데, 이 주체는 반드시 타인이 불러줄 때 나는 산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장이 불러줄 때 그 과장은 인정받는 과장이 되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관계가 늘 유지가 되어야 해요.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그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부부싸움에서 남자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자가 말을 안 할 때입니다. 뭘 물어도 대답도 없고, 뭘 요청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여자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내 존재가 없이 한 번 살아보라는 것이지요.

당신은 내 주체 형성에 있어서 쓸모없는 존재이기까 개입하지 말라. 당신은 내 주체에 전혀 보탬에 안 되고, 지금 있는 내 주체를 더욱 힘들게 하기 때문에 당신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만약에 지금의 현재를 이룬다면, 그럼 미래는 뭐냐? 현재가 골라낸 과거에서 잘 된 것을 미래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것을 금지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노선인데 이것을 잘라버립니다. 잘라버리고 하나님이 동승하게 되면, 현재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지요. 잡혀 가는 자의 희망은 뭡니까? 다시 약속대로 풀려나서 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희망을 들어주지 않는다니까. 하나님이. 이게 오늘 강의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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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0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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