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9. 12. 25) 2강
광주 강의(09. 12. 25)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12. 25) 2-2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에스겔 1장 26절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데, 이 보좌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고, 이것이 뭘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전 만들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 만들기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버틴 것은 ‘약속의 땅’이 주는 약속의 혜택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분에 의해서 시행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면 당연히 땅이 남습니다. 그 땅은 언약을 발휘해야 될 땅입니다. 땅은 노아 언약으로 준 것입니다. 멸망해야 하지만 노아 언약에 의해서 새 땅을 줬는데, 새 땅에다 뭘 심었는가 하면 아브라함을 심어놓았거든요. 그 다음에 이삭을 심었고, 야곱을 심었고, 그 다음에 쭉쭉 나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예고한 대로 나타난 민족이 무슨 민족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죠.
이스라엘 민족이 딱 나오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는 내 백성이고 언약 백성이며 제사장 나라가 된다.’ 다시 말해서 ‘너로 인하여 땅이 복을 받고, 너로 인하여 땅이 저주 받는다.’는 약속을 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만약 이스라엘의 특이성, 제사장 언약이 깨져버리면 이스라엘만 깨지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있던 기존의 모든 땅도 날아가 버려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 하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가?’ 궁금해 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땅이 이렇게 있는데, 땅에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으로 이렇게 흘러가지만 사실은 이것이 동그랗게 되어서 처음과 끝이 합쳐지는 거예요.
시작과 끝이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같이 만나게 되면 플러스(+)와 마이너스(-) 사이에 전기가 흐르듯이 창세기 1장의 원리와 계시록 마지막 원리가 똑같이 돼버려요. 같이 만남이 이뤄집니다. 창세기 1장 첫날에 뭘 만들었습니까? “빛이 있으라.”고 했지요. 빛이 어디 있습니까? 있을 자리가 없지요? “빛이 있으라.”고 해놓고 두 번째 날에는 결국 이 빛이 있어야 될 자리를 만들고, 또 이 빛을 머금어야 될 것을 만드는 것. 네 번째 날에는 뭘 만들어요? 해와 달과 별을 만들지요.
해, 달, 별의 특징이 뭡니까? 뭘 머금습니까? 빛을 머금어서 해는 빛을 되받아 반사하고, 달도 별도 반사해서 반짝이죠.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들죠. 첫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이 코스가 중간에 ‘꽝’하고 충돌이 일어나요.
하늘에 별이 있지요? 이 별을 보고 뭘 만들어 냅니까? 별 자리를 만들죠. 별들을 보면서 별자리 만들 때 누구 허락 받고 만듭니까? 저것은 곰자리다. 저것은 전갈자리. 그 곰자리 별들에게 물어보세요. ‘너 곰이야?’
창세기 2장에 보면 건방진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가 지나가는데 이름을 누가 짓습니까? 사람이 이름을 짓지요. ‘멍멍이’라고. 코끼리 지나가면 사람이 이름을 뭐로 짓습니까? ‘코 기르기’라고. ‘코 기리기’가 줄어서 코끼리가 돼요. 그런데 이렇게 이름 지을 것은 누구와 의논 했습니까? 코리와 의논 했습니까? 아니지요. 이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방향이 1부터 2, 3, 4, 5, 6 이렇게 진행 되는데, 마지막 날 만들어진 인간은 이렇게 진행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거꾸로 돼버려요. 이렇게 되면 무엇을 잃어버립니까? 여섯째 날 이름 짓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요. 나의 바구니에 담는 겁니다. ‘물고기. 너는 내가 낚시 할 거야. 채소. 내가 반찬으로 먹을 거야.’ 전부 다 이 방향이 첫째 날로 안 가고 여섯째 날 만들어 놓은 본인에게 오게 되어 있지요.
이렇게 되면 결국 빛을 잃어버려요. 이게 오늘날의 물리학이고 진화론입니다. 출발지점을 인간으로 잡으니까 ‘나에게 얼마나 효용이 있는가?’를 따지지요. 댐에 왜 물이 고여 있습니까? 이것을 물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요? 빛을 머금어서 물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으로 수력발전에 이용하지요. 여기에서 에너지가 나오고, 에너지가 전구를 밝히면 빛이 나오지요. 그러나 이 빛은 원래의 빛이 아니고 내가 필요한 빛을 만든 거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빛은 원래의 빛이 아니니까 이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어두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빛이 오신 것은 원래 빛이 있었는데 그 빛을 깨닫게 함이라. 그 전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4).’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고 하시는데, 우리는 이 말씀에 관심 없고, 빛이라는 것은 몽땅 다 나에게로 가져와요. 그래서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전부 다 여섯째 날에 만든 나 좋으라고 끌어당기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6일째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빛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는 빛이라.’고 합니다.
빛은 첫째 날에 생겼는데, 이 때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날 것은 만들어졌습니까? 아니죠. 흑암 속에서 빛을 만들어서 이 전체 어두움을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빛에서 생명이 나옴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어서 빛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 보면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그 뜻이 이 뜻입니다.
요한1서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라고 했는데, 그 뜻이 뭐냐 하면 ‘너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을 이렇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을 맞닿게 해놓고 보니까 이게 한 원리에서 만나는 겁니다. 처음과 나중이 만나게 되면 처음의 원리를 하나님은 끝까지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의 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나무가 있지요. 선악과와 생명나무인데 이 나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선악과는 죽음을 의미하고 생명나무는 생명을 의미하지요. 죽음과 생명이 있는데, 결국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음이고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생명이며 무엇이 죽음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죽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살리기 위해서 죽으러 가신 거예요. 이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는 살려고 발버둥 치다 죽잖아요. 우리의 지층이 있는데, 우리는 태어나서 살려고 하다가 떨어지잖아요. 떨어지는 이 대목에서 밑에 있는 아래 지층을 들고 이렇게 와버리면 우리는 죽으러 가는데 이 방향은 사는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단, 조건이 있어요. ‘너는 나중에 죽지 말고 지금 벌써 어둠이요 지금 벌써 죽었다고 여기면 산다.’는 것입니다.
‘네가 살았다고 하면 죽었고, 죽었다고 하면 산 것이고, 본다고 하면 소경이고, 소경이라고 하면 눈 뜬 사람이다.’ 이렇게 됩니다. 요한복음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다 이래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답답하지요. 말이 안 통하니까. 전부 반대로 이야기하시니까.
그 반대로 뭐냐 하면, 우리는 하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땅에 대해서만 알고 있단 말이지요. 땅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 땅은, 땅에서 말하는 하늘은 그냥 땅 위에 있는 하늘이에요. 그런데 이 하늘 말고 땅 위에 있는 하늘마저 간섭하는 그런 하늘, 이것을 삼층천이라고 하지요. 이 삼층천에서 관여할 때 땅도 하늘도 다 묵사발 나는 거예요.
그러면 진작 묵사발 내지 왜 지금 와서 멸망이니, 심판이니, 하늘 축이 무너지고 이런 소리를 하는가? 그 때는 땅에 누가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멸망했지요. 니느웨가 죄 지을 때 멸망하는데 회개하니까 멸망 안 됐어요.
결국 땅에서 의인이라는 것은 착한 사람이 아니고, 내가 더럽다는 것을 아는 회개하는 사람이죠. 니느웨 성이 회개할 때 주께서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커피를 식전에 마십니까, 식후에 마십니까? 식후에 마시지요. 커피를 마신다는 말은 식사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우리 힘으로 천국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나 죄인 맞습니다. 우리 대신 오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신 일 저는 그것만 의지합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긍휼이 오는 거예요. 밥을 먹고 난 뒤에 커피가 오는 것처럼, 커피가 하나님 은혜라면, 밥 먹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면, 죄를 알 때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용서하는 법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기회도 잘 없어요. 저의 어떤 글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가 겸손하면 그것은 다 위선이다.’ 라고 했습니다. 겸손하면 위선인데, 그러면 뭐가 위선이 아닌가? 겸손함을 당하면 위선이 아니에요. 엄마가 나를 때린다. 애들은 반발하지요. 그런데 엄마가 때리는 대신 엄마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간다. 그러면 딸이 뭐라고 합니까? “엄마,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하지요. 이것은 겸손함을 당하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회초리 들고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앞에서 십자가 피를 흘리며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회개를 유도하잖아요. 탕자가 재산 가지고 집을 나가서 기생과 놀아나다가 탕진하고 빌어먹을 때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 1) 아버지가 몽둥이를 준비했다. 2) 호적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웠다. 3) 반가워서 잔치를 열었다. 몇 번입니까? 3번이잖아요. 사람들이 이 말을 이해 못해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회사에 경리를 맡은 사람이 회사 돈 횡령하고 사표를 섰다. 그 사람이 착하냐, 안 착하냐? 또 묻는 겁니다. 사람들은 ‘나쁜 놈입니다.’ 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그래, 나쁜 놈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지옥 가고, 그 나쁜 놈은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구원 받는 자에 대해서 이미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는 우리 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그런 조건을 그 후에는 우리에게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누구까지입니까? ‘이것 지키면 복 받고, 십일조 하면 복 받고’ 이것 누구까지 준 거예요. 이것은 우리 시대가 아니고 지나간 시대에요. 지금은 그 율법 책을 다 찢어버렸다고 했어요. 찢을 때에 뭘 찢었습니까? 십자가로 이걸 찢어버렸어요. 지금 우리가 성경을 찢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기 때문에 못 찢습니다.
남자들이 꿈속에서 제일 헉헉 거리면서 기겁을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군에서 제대했는데 또 군에 갈 때. 이것은 식은땀이 흐릅니다. 이미 율법에 대해서 우리는 제대를 했는데 아직도 습관이 남아있어서 환상인지 꿈인지 교회 가면 또 목사가 율법을 들이대고 있어요. ‘이렇게 하다가는 저주 받습니다. 상급 없습니다.’ 이러고 있어요.
지금 이 시대가 무슨 시대냐?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은 시대에요. 그러면 다 해 주신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나는 해도 소용없구나.’를 깨닫는 순간. ‘나는 안 해도 된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얍삽한 것이고, 도대체 내가 뭘 따로 하나님께 드릴 것도 없고, 나를 천국으로 끌어올릴 만한 위력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 같이 달린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낯짝도 참 두껍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했어요.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왜 강도가 낙원에 갑니까?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역할을 하시기 위해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건축물 성전이 아니고 인자 같은 분으로 오셔서, 에스겔이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인자 같은 분이 오셔서 하나님이 하실 모든 일을 대신 이루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면 성전의 의미는 뭐냐? 성전의 의미는 거룩인데 거룩은 분리라고 했지요. 그럼 무엇과 무엇의 분리입니까? 어디에서 분리입니까? 모든 인간 세계는 각자 자기의 이름이 있어요. 그래서 누가 ‘이근호’라고 부르면 제가 돌아보지 다른 사람이 돌아보지는 않습니다. ‘이근호 나쁜 놈.’ 하면, 다른 사람은 기분 나쁘지 않은데 내가 기분 나빠요.
그런데 가만히 따져 보세요. ‘이근호 나쁜 놈.’이라는 소리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그냥 바깥으로 퍼지는 것뿐인데 그게 왜 기분 나쁩니까? 망치로 나를 때린 것도 아니고 욕을 했을 뿐인데 그게 왜 화가 나느냔 말이지요. 그냥 공중에 퍼지는 하나의 소리인데.
노래를 들으면 좋아하다가 욕하면 싫어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같은 음파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같은 인간의 소리에 불과한데 왜 음악은 즐겁고 욕은 불쾌하냔 말이죠. 그것은 본인이 자기 이름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자기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이름인데, 성도는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사람의 명예나 위신, 자존심은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자기 이름과 관련되어 있죠. ‘가문의 영광’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과 관련된 사람은 예수님의 값없이 주는 공로를 누군가가 안 믿고 짓밟을 때 가슴 아프고, 분통이 터지고 괴로워해요.
‘이게 죽으려고 환장을 했다. 네가 아무리 훌륭한 의사 찾아가 봐라. 네 영혼의 병이 낫는지. 예수를 믿어야 천국 가.’ 말로 안 해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주를 욕하는 소리에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주님의 아픔에 동참한 자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대로 그는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교회에 재산 다 바치고 굶어죽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고, 나는 그냥 예수 믿는데 다른 사람이 안 믿을 때, 화가 나고 가슴 아프고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게 분리고 또 거룩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주의 이름이지만 에스겔은 무슨 이름입니까? 에스겔은 자기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인자라고 부르지요. 인자라고 부른 것은 결국은 에스겔보고 부른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을 부르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부르는 거예요.
몇 주 전에 제가 이런 설교 했어요.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면, 그 다음 여자가 되고 안 되고는 누구에게 달렸습니까? 여자가 낳아야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을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이 여자의 후손을 낳은 여자로, 차후로 그 사람이 여자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야, 너 딸기 먹어.’ 라고 했다면, 우리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은혜를 알라고 먹으라고 한 거예요. 다섯 개를 먹었는데 ‘이제 그만 먹어라.’고 하십니다. 왜요? 우리가 과식하면 안 되기 때문인데, 우리는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께서 관리를 하시는 거예요. 책임지고 합력하여 선을 이뤄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숙제를 다 하는 것이 됩니다.
제가 어제 심방을 했습니다. 나이 35세 된 여자인데 몸무게가 30Kg, 눈만 동그랗게 남았어요. 한창 건강하게 활동할 나이에 병이 들어 뼈만 남았습니다. 그분께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자매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지요?” “예” “미안하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존심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했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줄 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여전히 자기중심의 생각인데 그것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버리는가? “예수님은 33세를 사셨는데 당신은 35살이니까 2년이나 더 살았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 뜻대로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담는 그릇인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담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하고 돌아왔어요.
에스겔에 있어서 인자라는 것이 고생스러워요. 하지만 ‘아이고 에스겔은 운도 없이 고생만 하네.’ 이러면 안 돼요. 에스겔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우리가 고생 더 많이 했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고생 더 많이 해요. 오늘날 성도가 더 고생해요. 왜 그러냐 하면, 에스겔이 고생하는 것은 아직도 ‘메시아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본인이 다 몰라서 뭐가 튀어나오는가 하면, ‘주님 나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에스겔 2장 6절 보세요.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이 말을 왜 했습니까? ‘이런 말 하면 저 사람이 날 죽일 거야. 난 무서워.’ 이런 뜻이란 말이지요.
이때는 아직 예수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계시가 얇아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는 복음 전하면서 두려운 것은 별로 없어요. 내가 예수 믿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잖아요.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안 그래요. 그 당시는 율법 시대이기 때문에 뭘 해야 되고, 지켜야 되고, 에스겔의 경우에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시킨 대로 안 하면 ‘그들의 죄를 네게 묻겠다.’ 이렇게 나오니까 모든 게 두렵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가볍습니다. ‘나는 죄인인데 뭐. 창기도 구원 받는데 뭐.’ 이렇게 편하게 받아들이면 돼요. 그게 바로 ‘천국에서의 어린아이가 구약에 있는 도사들 보다 더 도사다.’ 이 말입니다.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는 말이 그 뜻이에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우리에게 완제품으로 주셨고, 그들은 아직 완제품이 아니고 모형은 준 거예요.
그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했습니까? 빨리 완제품 달라고. 중국집에 가서 그냥 자리에 앉아있으면 되는데 급해서 주방장 찾아가서 ‘짜장면 다 되갑니까?’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 때 주님은 ‘조금만 더 기다려. 내가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십자가에 죽으면 끝나.’ 이러시는 거예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아브라함이 ‘짜장면 다 됐네. 기분 좋다.’ 이런 식입니다. 구약에는 인간에게 약간의 책임을 묻고 따지는 것이 있지만 신약에는 아무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냥 믿기만 하라는 겁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롬4:5-6)”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 시대의 특징입니다. 제가 이런 말 하면 “아이고 나는 에스겔보다 낫구나.” 라고 하실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에스겔의 인자 됨은 그 속에 말씀이 들어가지요.
에스겔 2장 9-10절을 봅시다.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리고 3장 1절에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에스겔은 에스겔이고 그 기능이 어떤 기능입니까? 장차 오실 메시아, 인자 기능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의 인자 기능에서 중간에 들어가는 것이 뭐죠? ‘말씀을 먹으라.’고 하지요. 말씀을 먹게 되면 에스겔 +말씀이 그 시대의 인자가 되지요. 그 당시 구원할 수 있는 계시의 매개체, 그 당시의 메시아가 되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모세 시대로 말하면, 모세 +율법이 되면 그 시대의 인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에스겔이 나보다 못하다고 무시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모든 고난을 예수님 혼자 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호빵을 쪼개면 그 안에 뭐가 있어요? 팥이 들었지요. 예수님이 호빵이라면 그 안에 에스겔도 들어 있고, 모세도 엘리야도 들어 있고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고난 받았다고 하지 말고, 예수님과 더불어 구약에 있는 성도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 주기 위해서, 복음 전하려고 미리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모세의 경우는 바로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했다는 것을 알면 오늘날 우리가 편하게 그냥 ‘나는 예수 믿고 천당 가니까 기분 좋다.’ 이러지 말고, 우리도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면 예수님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이전 고생했던 사람들이 다 들어오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욥처럼 되고, 아까 35세 여자 심방 간 얘기 했지요.
욥은 얼마나 괴로웠던지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욥3:11)”라고 했어요. 사람이 고통이 오면 분노가 일어나요. 욥이 마음껏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사모님 경우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말 안 듣고 속을 섞인다면 ‘하나님 왜 이렇게 힘듭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은 ‘네가 욥이다.’ 욥의 고난이 학생들 애먹여서 교사(구자근 사모)인 내가 힘든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만.
어떤 경우는 복음을 전했는데 욕을 한다. 그러면 ‘하나님 복음 전했는데 욕을 합니다.’ ‘네가 스데반이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구조적이라고 하는데, 성경 창세기부터 나오는 모든 성도가 서로 엮여있어요. 마치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가 대무나 살 하나 빼면 다 터지잖아요. 여자들 스타킹에 올이 끊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스타킹 망가지죠. 이처럼 다 구조적으로 엮어져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12장 14절에 보면 ‘형제가 아프면 같이 아파하고 형제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라.’고 해요. 또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때가 되면 거두리라.”고 했어요.
지금 여러분의 형편을 살펴보세요. 여러분들이 욥입니까, 모세입니까? 제가 맞춰볼까요? 여러분은 솔로몬입니다. 길 집사님도 전에 솔로몬처럼 사셨지요? 부자 되면 전부 내가 잘해서 된 줄 알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먹으니까 어떻게 됐어요.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8).” 이 말씀을 저는 오늘 강의의 결론으로 삼겠습니다.
에스겔이 막상 말씀을 먹으면 괴롭고 아프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말씀을 집어넣으면 ‘아픈 것도 헛되고, 안 아픈 것도 헛되다.’ 그러면 왜 헛된데 나는 아픈가? 그것은 헛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그 순간만큼은 마지막 때의 솔로몬처럼 그 순간을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약 먹고 나아요. 그러면 다윗처럼 됩니다. 다윗이 되어 골리앗 친다고 돌아다니고. 이러다가 아프면 다시 헛되다고 하고.
이 모든 것이 엮어져 있어서 아브라함이 남이 아니고 한 식구입니다. 놀이기구를 타보면 45도 각도로 내려갔다고 올라갔다가 하는데 A커플, B커플, C커플 전부 남입니다. 다른 커플이 어디에 사는지도 몰라요. 모르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 됩니까? 밑바닥이 흔들리니까 운명을 같이하잖아요. 이게 바로 성도의 모임, 교회입니다.
복음 때문에 울고, 세상을 보면서 복음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사람은 각각 달라도 마음은 다 하나에요. ‘저 사람이 예수 믿다가 낙심했구나.’ 가슴이 아파요. 교회는 하나입니다. 전부 다 같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C석에 누가 탓다? 우리가 공부하는 에스겔이 탔는데 에스겔이 뭘 먹었다? 말씀을 먹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번 주일 뭘 먹는다? 이 말씀을 먹으면 우리는 그 순간 에스겔, 인자가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으니까 다른 안 믿는 사람에게 ‘야, 너도 성경 말씀 들어 봐. 참 좋아.’ 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인자의 기능을 그 순간 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스겔이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고생했습니까? 첫째는 예수님 좋으라고 고생했고, 둘째는 알지 못하는 저희들 구원하려고 예수님과 더불어 고생한줄 압니다. 이제는 저희들이 후손들, 가족들, 또 복음을 모르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주께서 인자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될 줄 믿고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1. 21. 04:1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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