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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녹취] 2010 십자가마을 동계수련회 10강자유게시판요한복음

[녹취] 2010 십자가마을 동계수련회 10강

이름 : 이장우(IP:220.84.179.101)

2010 십자가마을 동계수련회 제 10강

요한복음 마지막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을 다 본 마지막 느낌이 이러합니다. 초반에는 대단하게 떠들썩하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요한복음 21장을 보고나면 이게 뭐야! 이게 뭐지! 무언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무언가 세상에 반란이라도 일어나고 뒤집어지는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데,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는 이런 요란스러운 일로 시작이 되었으면 마지막도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든지, 제자들이 하늘로 올라가든지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 하는데 마지막에 고기 잡으러 갔는데 주님 나타났다. 그리고 어이! 수고해라 하면서 이벤트도 없이 그것으로 쓸쓸하게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복음을 보고 난 뒤 이것이 뭐지! 그러니 가만히 한번 따지고 보면, 인간적으로 따지고 보면 요한복음 전체가 제자들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증명한다고 아주 번잡스럽게 요한복음 전체를 다 보낸 것입니다. 요한복은 전체가 나 하나님이거든 이 말씀하시고 이것 들어내시면서 너희는 죽으면 못 살지 나는 죽어도 살거든 이것 실컷 드러내시고 간다고 하면서 그냥 올라가버렸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주님께 이용만 당한 것입니다. 자기들에게도 예수님 같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주시든지, 예수님만 폼 내시지 말고 자기들도 폼 나게 오병이어를 행하든지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요한복음은 솔직히 말해서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마지막은 미약하리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교회가 부흥되리라는 것도 목회 성공하리라는 이런 것도 없습니다. 수고해라! 응! 오빠 믿지! 하고서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 요한복음이 교회에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끝 장면이 쓸쓸하고 무언가 씁쓸한 느낌이 들면서, 주님은 좋겠다! 혼자 좋은데서 가시 사니 남은 제자들은 고아처럼 말씀하시더니 진짜 고아처럼 취급하여 방치하듯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끝장면도 사도요한이 어떻게 되었다든지 나중에 베드로가 총회장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도 없고 뿔뿔이 각자 헤어졌습니다. 처음에 고기 잡는 사람 불러다가 자기 제자 만들어놓고 나중에 오너는 하늘로 가버리고 제자들은 너는 나를 모른다면서 실컷 데리고 잔소리 하다가 자기만 훌쩍 떠나버리고 옆의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이 쓸쓸하게 내 팽개쳐 지듯이 하면서 요한복음 끝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요한복음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제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공포입니다. 여러분 공포영화 또는 괴기영화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무언가 움직이는데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숨지 말고 정체를 드러내라고 해도 투명인간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주님이시여! 숨지 말고 빨리 나오세요! 주님 숨어계셔도 주님 계시는 것 내가 아니까 무언가 지시할 것 있으면 직접 얼굴을 맞대어 지시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보내어 하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마시고 전에처럼 디베랴 바닷가를 거니시듯이 직접 나타나셔서 명려하실 것 명령하시고 지시하실 것 지시하시고 기적 베풀 것 기적 베푸시고 도와주실 것 노골적으로 도와주시고 우리 잘해 봅시다. 빨리 나오세요! 이래도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들에게 함께 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왜? 나는 부활체이고 너희들은 그냥 육적이기에 너희들이 나중에 죽어서 나에게 올 수는 있지만 지금 내가 이런 모습으로는 너희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시간에 21장 1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여기서 세 번째라고 하는 것은 달랑 세 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매일아침마다 와 가지고 힘내라 힘 내 오늘 왔다. 출근 도장 찍듯이 매일 나타나셔서 너희들이 수고가 많다. 목회하는데 애로사항이 없나? 뭐 도와줄 것이 없나? 뭐 교인이 안 모인다고? 내가 죽 훑어줄게! 뭐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달랑 세 번 나타나고 그 다음에 영원히 안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이렇습니다. 우리 곁에 계시면 자주자주 보이시든지, 안 나타나시려면 아예 사라지시든지, 그러니 자주 나타나주시면 교인들에게 여러분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안 믿지요? 안 믿지요? 그러면 여기 놀라운 일을 소개하겠습니다. 자 여기 지금 동남아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 살아계십니다. 자 등장하세요! 조명시설! 조명 좋고!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수백 명이 모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은 예수가 살아났습니다. 자 예수님! 하는데 안 나타나시면 뒤에서 웅성 웅성거립니다. 사기다 돈 내어놓아라! 난리가 납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잖아요! 지금 내 얼굴이 뜨겁습니다. 지금 난처합니다. 지금 삯군 목자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뭐합니까? 내 자존심 좀 세워주세요! 이렇게 동업이 안 되어서 장사 못합니다. 예수님 무엇 하십니까? 그런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말입니까? 우리 목회자들은! 예수님은 부활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면 한번 나타나게 해 보라! 자 눈감고 하나 둘 셋 하면 나타나게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 무엇 하십니까? 그러면 저쪽에서 당신 진짜 예수님의 종 맞아? 아이고 자기 집안끼리도 안 통하는데 무얼 우리보고 예수 믿으라고 그래! 이렇게 나오면 우리 입장만 난처해지는 것입니다. 굉장히 난처해집니다.

왜 요한복음 21장을 이렇게 제자들에게 난처하게 만들고 오늘날 우리까지 이렇게 난처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제 그림을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이 참 중요한데요! 여기 14장 15장 16장 쭉 나가면서 예수님은 반환점을 돌아버렸습니다. 20장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은 죽으러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다. 오늘날 목회자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을 때 목회 잘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현재 입장에서 죽어서 나 구원받는다. 이것은 별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살아 있을 때 목회 한 2만 명 목회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한 95% 다급한 문제이고 죽어서 천당 간다는 것은 그것은 늙어서 한 5%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내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가 요한복음을 공부하든 마태와 마가복음을 공부하든 성경전체를 달달 외워서 해박하게 알고 신학박사가 되어도 지금 너의 꿍꿍이속에는 주님 덕분에 2만 명 목회하겠다는 이 생각 자체가 반환점을 돌았던 예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생각이 95%인데 너희들이 지금 살아서 목회를 성공하겠다고 하는 것은 5%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5%라고 하는 것은 제가 임의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것입니다. 그냥 알기 쉽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걱정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시면 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반환점을 돌아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그것은 지금 머리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주님 가시면 우리끼리 어떻게 합니까? 라고 자기가 지금 죽어가면서도 지금 눈에 보이는 여기에 99.9%관심이 있어요. 진짜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내가 베드로 수제자인데 자존심을 세워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 주님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여러분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못 보셨지요? 자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30분만 시간 주세요! 예수님이 대전이나 부산에서도 이벤트를 하셔야 하니 바쁘시지요! 그러니 여기에 30분만 할애해 주시고 그 다음에 매니저 차타고 서울 강남의 나이트클럽에 한 두곡 부르고 그렇게 바쁘게 뛰어야지요! 그럴 때 우리는 얼마나 목사로서 위상이 얼마나 정립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99.99%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삯군목자입니다. 이런 삯군 목자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그래서 오해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제자라면 스승은 이 땅에서 죽음 후, 부활 후, 제가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죽은 후의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납니까? 죽음 후의 세상!

롤러코스트를 탈 때에 공포를 느끼지요! 그런데 죽음 후의 세상을 99.99%생각하고 롤러코스트 재미를 0.001%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롤러코스터 타면서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다. 왜? 죽음 후에 생각이 있으니 이곳에서 떨어져 죽어도 자기는 99.99%가 죽음 후에 신나는 생각이기에 이 롤러코스터 타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바로 누구의 마음가짐입니까? 요한복음 처음부터 시작한 예수님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선택받은 인간들이 여전히 죽음 후가 아니고, 그것은 가 봐야 아는 것이고 자기가 살아있을 동안에 삐까삐까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누리면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 덕분에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그 마음속에 가득하게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죽 거쳐서 반환점을 돌고 죽음 후에 능력으로 이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 아직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다시 그려봅시다. 이렇게 그려보면 여기에 햄버거처럼 층이 생깁니다. 이렇게 층이 생기는 이 위쪽을 처소라고 하고 또는 성령 안이라고 합니다. 밑에 있는 이곳을 역사 층이라고 합니다. 요 사이의 경계선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지금 요한복음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우리가 대충 설렁설렁 넘어갔습니다만 결론은 얻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 경계면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그게 중요하지요! 요 경계면의 현상이 나타나는 그 사람은 지금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고 만약에 요 경계면의 현상이 안 나타나면 애초부터 이 처소에서부터 혜택을 안 입고 사는 그냥 자기 기분에 사는 것으로 요렇게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이것을 죽음에 대한 아주 침울한 표현을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10년 만에 아침에 눈 오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눈길을 걸어가는데 김재성집사님 사진 찍어주는데 날 잡아봐라 하면서 사진 찍고 웃으라고 해서 웨딩 촬영하듯이 아주 어색한 웃음을 뛰면서 한번 해 보았습니다.

눈이 오는데 죽어도 괜찮은 죽어도 상관없는 그 죽음 후의 혜택이 눈이 폭설이 눈발처럼 날리면서 성도위에 날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위에 날리고 사도요한의 머리위에 날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꾸만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내가 보혜사를 보내겠으니 그가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 99.9%가 아니 거의 100%가 주님은 이쪽의 처소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그러면 주님이 함께 있으면 내가 목회할 때에 내가 부를 때마다 주님께서 수시로 나타나 주셔서 목회 성공하게 해 주시겠느냐는 이런 관심사가 100% 죽고 난 뒤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존재가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사고방식이 주님의 생각과 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고 나서 이게 뭐냐! 예수님 혼자 신났네! 혼자 신났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가지고 내가 죽고 난 뒤에 살아난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용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없네!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요한복음이 정리가 안 된다. 예수님은 자기 자랑만 잔뜩 늘어놓고 우리에게 도움 되는 것은 없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궁금한 것이 이 하나님의 처소와 죽음 후의 세상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그 혜택을 입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 경계선에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요 경계선이 있어야 이 사람은 죽어도 정말 사는 사람이라는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바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것 기억하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사랑의 무엇이냐?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합니다. 항상 어떤 논리나 철학이나 학교에서 수능을 보면서 시험을 치를 때 정말 네가 이 개념을 아느냐고 할 때에는 그 개념의 반대와의 차이가 무엇이냐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몰트만을 알아! 나는 칼빈도 알고 루터도 알아! 할 때에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실례지만 칼빈 신학과 루터신학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러면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루터 신학은 이것이고 칼빈 신학은 이것인데 루터신학과 칼빈 신학의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이야기 해 주어야 다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논리에 있어서 어떤 것을 정립할 때에는, 전에도 이런 것을 한 적이 있는데 경주에 가면 유명한 황룡사 절이 있지요! 황룡사 절을 상징화 시킬 수 있는 탑이 있지요! 그 탑이 음각이 아니고 양각으로 되어 있어요! 양각 음각 여러분이 아시지요! 여기에 원 재료가 있으면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조금씩 깎아 나가면 사람의 형태가 나오지요! 이것을 양각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점점 실체가 드러나도록 좁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이를 좁혀가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무엇이냐고 하면 사랑의 반대말을 다 거론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요, 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보고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나는 아니오,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무언가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의 특징은 이러합니다. 당신 목회 왜 하는데? 내 영광을 위함이 아니요! 아니 그렇게 말하지 말고 당신 목회 왜 하는데? 내 자존심을 위함이 아니요! 아니 그런 말 말고 당신 목회를 왜 하는데? 나는 나와 함께 계신 분을 위하여 할입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이익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아니요! 자꾸만 무언가 함께 계신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는 자꾸 비켜나는 모션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에는 나는 무엇 무엇이라고 자기주장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는 죽음을 사랑한다고 이런 표현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100% 거짓말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나는 내가 미울 정도로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접근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미워하려면 무엇을 미워해야 합니까? 어제 하였지요! 사람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법’입니다. 법은 무조건 죄를 양산합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법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게 우리 조상 아담이 독약을 먹고 죄를 먹은 후유증입니다. 이 후유증이 무엇이냐 하면 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법을 들이대면 반드시 자기 행위가 나오기에 여기서 자기 사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꽃꽂이를 하였으면 그 다음 주에 거의 출석이 됩니다. 그 꽃꽂이가 시들었는지 아닌지 보기 위하여 옵니다. 사람이 자기행위를 하게 되면, 평소에 십일조를 안 하다가 십일조를 하게 되면 그 다음 주일날 꼭 주보에 헌금통계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여하게 되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법의 주체가 자기이기에 반드시 자기행위를 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법이 나오게 되면 사랑이 미워집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죽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 생명을 얻고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처소와 이 경계선에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또 모든 신학자들이 요 사랑을 받아서 괜찮은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면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정말 그 사람이 처소를 생각한다면 주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사랑의 공동체를 사랑하지 맙시다. 미워합시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에 관심사는 0.001%만 가고 나머지는 바로 이곳 처소에 99.99%가 가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랑의 공동체가 주님에 의하여 생긴다 할지라도 그런 공동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미움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언가 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밉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바로 예수님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외에는 다 미워지는 것입니다. 이 안에 미운 자기 자신이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주님의 죽음 이후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사람에게 무엇이 죄가 됩니까? 결국은 사는 게 죄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재미있고 신나고 행복합니다. 사는 게 죄라는 것이 행복합니다. 왜? 어떤 기대를 안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미래에 월등한 성공을 하겠다는 그런 기대를 안 하니 존재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참 사는 게 쉽습니다.

그런데 어제 제가 이 구조를 생각하면서, 이 옆의 품바 협회에서는 이 처소의 경계면에 무엇이 들어가는 것입니까? 술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무엇을 사랑하는가하면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무엇을 먹을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술을 신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관심사가 99.9%가 술에 가 있기에 그 힘든 품바 일을 열심히 해 나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 떠나라 열심히 일한자여! 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목적이 일하고 나서 양양이나 속초나 제주도로 훌쩍 떠나자는 그 유토피아만 생각하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99.9%가 제주도 여행하는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게 요한복음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그 구조 그 세계가 그리워서 지금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런 고생은 0.1%밖에 안 되고 99.9%의 마음은 다 여기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합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이나 사도요한의 골로새서나 전부다 네 마음이 예수님이 가 계신 그곳에 따라 가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오해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해야 참된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란 사랑의 공동체를 미워해야 그것이 참된 교회입니다. 그리고 자꾸 떠나려고 합니다. 떠나요~ 둘이서~ 자꾸 떠나려고 해요 저 위로! 일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 말고 예수님만 생각하는 그 세계가 자꾸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 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오늘 마지막 장에서 나옵니다. 베드로야 너 날 사랑하나? 묻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의 취지를 압니다. 그래서 사랑을 놓고 누구와 누구를 비교해서 놓고 말하는가 하면 나와 예수님을 비교해서 나는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안 믿지요! 왜냐하면 주님이 끝까지 사랑해 주어야 베드로가 구원을 받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가 이 경계선에서 이런 표징이 나타난다는 것이지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는다는 그런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죽음 이후의 능력, 부활의 능력이 죽어가는 우리의 죽음을 능가할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 혼자 신났고, 예수님 혼자 말씀이 육신이 되고, 혼자 영웅 다 되고, 드라마의 주인공이 다 되고, 조연인 제자들은 욕이나 얻어먹고 그 중에 하나는 마귀입니다. 이렇게 나올 때에 아!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주님과 경쟁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사랑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힘을 들인다고 해도 내 힘으로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 후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 정리 해봅시다. 베드로처럼 이렇게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스스로 한번 답변을 해 보세요! 부활소식을 접했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막장드라마에서 남편이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멀리 떠났습니다.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이 걸리고 못된 여자 만나서 멀리 갔습니다. 그런데 전처가 남편이 어디에선가 살아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만났습니까? 만나지는 못하였지요! 만나려고 애를 씁니다. 구원 못 받습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주님께서 임하시는 것은 부활 하셨다는 문제이지 부활하셨다는 그 소식을 들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만날 수 있는 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계속 같이 내가 살아있는 그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꿈이 아니라 너무나 진짜인 것처럼, 주님의 가슴팍을 퉁퉁 치면 나에게도 퉁퉁 거리고 나의 가슴을 퉁퉁 치면 주님께도 같이 소리가 날 정도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이야기 하였지만 사도바울이 양보 못하는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또 오백여 제자들이 예수님을 직접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이 죽었다고 이야기해도 사도들은 사도들에게는 예수님이 죽었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한 때 살아있었던 이순신 장군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엄연히 살아있는 분을 살아있다고 이야기 할 뿐입니다.

이런 주님과 영원히 살날을 기다리는데 여기에 무슨 이 땅의 부귀영화가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신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분이 살아계신다는 것이 안 믿어진다면 이렇게 나옵니다. 죽으면 만나겠지! 그러니 주님은 이제 바이 바이 하고 이제 슬슬 내 일이나 해볼까! 하면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에서 핍박과 압박이 들어오면 다 넘어갑니다. 너 그렇게 열심히 해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너 그렇게 해도 소용없어! 이렇게 나오면 나도 그런 것 같아! 그러면 예수 포기해! 그래 포기 하겠어! 단번에 고개 푹 숙이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으려고 애는 썼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믿기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어냐 하면 처소가 내려오지 않아서 즉 사랑이 내려오지 않아서 여전히 자기 사랑에 눌러앉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밖에 없고 위에서 주신 경계선의 사랑이 안 나타나서 그런 것입니다.

좀 더 진도 나가봅시다. 다시 묻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마지막에서 사랑이 무엇이냐고 하는데 요한1서3:23-24절입니다. 제가 전에 어디라고 말은 안 하겠지만 합동 측 동대구 노회에서 재판하면서 묻습니다. 당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믿습니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란 과거에 있었던 사람들의 주장이기에 하나의 참고사항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제가 거기서 사도행전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물을 때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할 텐데 그들에게는 웨스트민스터라는 법적인 조치를 가지고 밥 먹고 사는 사람이기에 그것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그 법의 위세에 눌려서 거기에 깨갱하고 꼬리 내리며 굴복합니다. 다시 쉽게 말해서 목사가 목사를 재판하면서 너나 나나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러면 너나 나나 이 바닥에서 밥 먹고 살려면 말 잘 들어야지! 알겠습니다. 깨갱!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고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기뻐한다면 다시 말해서 무얼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99.9% 주님 만나는데 관심이 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삯군 마귀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하수가 어쭙잖게 나오느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이 하수가 아니라 상수라면 여러분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 요한일서 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어렵습니다.

빛 가운데 사귀라고 합니다. 상징적인 용어가 막 나옵니다. 제가 전에 안산 강의에서 했는데 빛이라는 것은 상징입니다. 나 너 할 때 이것은 구체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로 어려운가 하면 상징과 인물이 서로 사귀라는 것입니다. 너 이명박을 사귀라 이것은 어렵지만 행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서 누구와 점심을 같이 먹으라. 이것은 되는데 너 서울에 가서 빛과 사귀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온사인 앞에 가서 섭니까? 가로등 앞에 가서 섭니까? 무엇입니까? 이것이 요한일서입니다.

성경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야말로 요한처럼 고수들의 책입니다. 그리고 네가 사랑을 알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라!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 이것 하기 힘든데요? 그러면 너는 사랑을 몰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른다는 그런 질책을 받기 위해서라고 사랑 있는 척을 해야 하는데 막상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하니 환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형제에게 목숨을 바치면 나에게 돌아오는 내 목숨은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왜 삽니까? 그런데 빛과 사귀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빛만 있으면 되지 네가 왜 있어야 하는데? 아 이거 수상하다. 처음부터 예수님! 예수님! 할 때에 예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하여 더욱더 자기 것을 확보하려는 꼼수를 썼구나 하는 것이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까지 계산을 해 보면 형제를 위하여 사랑하는 척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거워! 요한일서가 무겁습니다. 그러니 아예 요한일서를 안 보려고 합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빛과 사귀라고 합니다. 이미아씨가 결혼하지 전에 요즘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 누구입니까? 빛! 그러니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송재원씨 말고 누구와 사귑니까? 빛! 요즈음 빛과 사귑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시 말해서 주님 앞에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오늘 미아씨 부담된다. 그동안 척 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하려니 힘들구나!

요한일서 3:23-24를 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교회의 부흥이 될 것이며, 이것이 죽음으로 가는 이땅에서 버티고자 하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을 한 마디로 하면 포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면 네가 주의 성령에 의하여 살려짐을 그때서야 비로소 온몸으로 전율하듯이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네가 스스로 살려고 하니 너를 지금 사랑하고 있는 분이 자꾸만 너의 노동에 의하여 가려지고 주님의 사랑이 시큰둥하고 온종일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왜 하나님은 안 도와주십니까?

내가 목회 잘하면, 자 교인여러분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드릴까요? 자! 예수님 30분만 나와 주세요! 품바 공연한 번 하고 가시고 이렇게 함으로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을 해야 하는데, 주님은 세 번만 나타나고 너 나를 사랑하지! 그 말씀만 하고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마지막이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요란하게 시작하였다가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은 미약하리라. 요한복음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무언가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사랑하면 위에서 죽음이후의 부활의 능력이 너를 지배하기에 네가 너를 포기하여도 그것은 너에게 전혀 손해될 것이 없다. 이미 너는 얻을 것 다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놓치는 것이 있는데 베드로가 이런 말씀을 듣고서 그러면 요한은요?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사도요한이 살아있든지 죽었든지 여전히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것 맞지요? 이런 뜻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이 말은 베드로 네가 어떻게 미래에 살 고 죽을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이 있지만 그러나 너에게 이렇게 예언하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네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살아있는 것이고, 더 살아있다는 말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더 살아있는 쪽에서 우리의 삶을 얻어야 됩니다. 나보다 더 살아있는 분에게서, 오래 산다는 말이 아니고, 더 확실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보장된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믿으면 영생을 못 얻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왜? 요한복음 전체를 보니 내가 살아있는 것은 불길한 삶입니다. 아슬아슬한 삶이고 보장받지 못할 생명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가 이 쓰레기 같은 우리가 사도를 통하여 얻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들이 어떤 삶을 산다고 해도 더 삶다운 더 확실하게 ‘살아있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의 삶뿐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분의 삶은 자기만 아니라 죽은 남도 살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처소입니다. 어느 정도의 삶이냐? 너희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느냐?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곁에 있으면 오래 살겠지? 오래 살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안에 너희가 있게 하리라! 하나님 안에 있으면 좋겠다! 부럽냐? 부럽습니다. 그 부러운 것을 내가 이루어내겠다. 아버지와 내가 있는 그곳에 내가 너희를 끼워 넣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삶은 끝이 있고 나중에 저주가 있는 삶이지만 그 삶을 없애버리고 진짜 영생, 아버지의 영생 아들의 영생에다가 너희들을 끼워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졸음과 싸우고 사투를 벌이고 계시는데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을 이야기 해 버리면 영생을 내가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위하여 나를 포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영생은 자기를 살리지 않는 것이 영생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영생이 있기 때문에 영생 되지도 못할 나를 왜 자꾸 미련을 갖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자살을 할까요? 사이비처럼 집단 자살을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 몸이 주님을 따르도록 하는 코스가 있습니다.

뷔페에 코스가 있지요! 처음에 쟁반을 든다. 숟가락 놓는다. 우선 현미밥부터 조금 뜨고 김밥 통과할 사람 통과하면서 잡채 반드시 필수 소시지 두 개 하는 코스가 있지요! 영생이 바로 올라가면 좋겠는데 코스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14, 15, 16, 17, 18, 19장 이렇게 나가는 것은 주님께서 이 코스를 다 지나고 반환점을 돌아서 아버지와 합류하였기에 우리도 좋든 싫든 그 코스를 밟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비켜 가려고 하는데 감사하게도 주님의 사랑이 99.9% 하늘로 향한 그 사랑이 자신도 모르게 우리를 점점 더 주님 가신 그 길로 밟아가게 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미움을 받았던 그 혜택을 행운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로또만 행운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주님이 가신 그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행운입니다. 그러면 성령과 함께 계신 주님께서 지금 네가 가는 그 길이 주님이 인도하여 가는 길이라고 알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99.99% 이 땅에서 내가 성공했다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을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떨쳐버리고 거지 나사로처럼 자기를 비운데서 오는 행복감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코스에서 예수님을 누가 팔아먹었습니까? 가룟 유다 사단이 팔아먹었지요! 그 경험도 그 짜릿한 경험도 하도록 롤러코스트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고맙게도 우리 주님께서 이단들과 사단들을 우리 주변에 배치를 하여 우리로 하여금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도 안 먹어주고 바른 소리를 하여도 듣지를 않고 예수님께서 그 코스를 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그 코스를 가야하는 것입니다. 대구에서 대전으로 오면 긴 터널에 네 개나 연달아 죽 있습니다. 터널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터널에 들어가면 휴대폰도 안 터지고 해서 빨리 통과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터널에서 불나면 사고 나니까! 불안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때로는 이렇게도 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복음을 아십니까? 목사님 참 훌륭하십니다. 이런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무엇이냐 하면 목사님이 복음 전하여 우리교회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헌금 더 많아졌습니까? 있는 교인도 나가는 것 책임지세요! 실적이 있어야지! 실적이! 이런 마귀들이 복음을 인하여 고난 받는 행운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복음 알아서 목회 성공하겠다는 야심이 가득한 우리가 그 순간 절망 워워 어두워! 참 죽고 싶다고 할 때에 그 비우는 모습이 바로 아까 말한 처소의 경계선에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이제 네가 너를 미워하고 나만 사랑하는구나!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몇 초요? 2초.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1초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교회 어떤 사람은 두 달 만에 1초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산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아야 구원받는 것은 알아가지고, 우리 교회가 학원입니다. 학원이니 설교한번 듣고 나면 대충 구원받는 방법을 알잖아요! 그것 기억하는데 두 달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 듣고 두 달 뒤에 보충수업 하듯이 다시 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유소에서 기름 넣듯이 두 달 만에 한 번씩 상기하면서 아! 그때 그 복음 십자가 은혜 받았다고 하고 또 두 달 뒤에 또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90%는 너무 심했고 85%는 여전히 이 땅에서 성공하겠다는 것이고 15%는 하늘나라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이 코스를 아주 술 취한 듯이 비틀거리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한테 걸려서 돈 다 빼앗깁니다. 여기서 마귀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목사를 말합니다. 목사한테 걸려서 헌금 다 빼앗기고 건축헌금 선교헌금 다 빼앗기고 장로회에서도 쫓겨나서 그제야 옵니다. 그렇게 와도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게 와 가지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빈손 들고 옵니다! 그렇게 와 가지고는 빈손 들기는커녕 그곳에서 다시 힘을 모읍니다. 빈손 들고 와서 복음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또 힘이 되구나 싶어서 다시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냐 하면 성경말씀은 융통성이 없습니다. 너의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왜? 네가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반환점 도신 분이 그 빛이 너를 구원하기 때문에 너 자신에게 미련을 떨쳐버리며 그동안 너 자신을 살리려고 염려하고 불안해했던 것들도 같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로켓 발사하면 밑에 있던 발사체가 떨어져 나가듯이 이 세상에 있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바라기는 그것이 한 1초 되었다면 수련회 끝나고 한 2초로 늘어졌으면 합니다. 그런 생각이 하루에 한 2초 정도로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너무 심한 요구를 하였습니까? 그러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우리는 농담인줄 알았습니다.

무엇이 다 이루었는지 우리는 시큰둥합니다.

여전히 우리형편은 나아짐이 없고

여전히 우리교인은 부흥이 되지 않고

우리의 살림살이 수입도 적고

무엇이 다 이루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주님 가신, 반환점 돌아서 가신

그 영생이 있는 곳에 우리를 초대 했사오니

무엇이 문제이며 무엇을 떨쳐버려야 할지를

앞으로 살아가면서 툴툴 털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세상에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는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는 주의 종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송영옥(IP:116.♡.212.206)

10-01-18 17:33

목사님들 녹취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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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