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
[녹취]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2010겨울수련회(요한복음) 8강
요한복음 20장 9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살아난 이 모든 힘, 이것이 ‘처소’인데 이 처소는 죽음 후 시간입니다. 죽음 후에 있는 이 시간. 이것이 20장이거든요. 현재 14장까지 했습니다. 14, 15, 16, 17, 18, 19장. 우리는 지금 성경을 가지고 14장에서 20장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20장에서 미리 본 죽음 후의 시간이 여기서 화산재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화산재 알지요? 기분 나쁜 검은 눈발 같은 것. 그런데 여기서는 기분 나쁜 눈발이 아니고 죽음 후 시간, 죽음 후 능력이기 때문에 여기서 무슨 능력이 오느냐 하면 죽음 후에 발생된 그 능력이기 때문에 이것은 부활의 능력이죠. 부활의 능력이 화산재처럼 우리에게 내려지고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 있다고 해 봅시다. 우리가 여기에서 예수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돌아서서 다시 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20장 이후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현재 우리에게 그런 부활의 능력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 말씀 들으면 상당히 불안해요.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떠난다.”고 하면, 사람들은 “안 돼 예 ~ (안 됩니다). 떠나시면 안 돼 예 ~” 예수님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시 올 게.”라고 하셔도 걱정하지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죽음 후의 능력,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이 소금 뿌리듯이 말씀 주실 때마다 계속 주시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15장 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이미 깨끗해졌다는 겁니다. 우리는 영문도 몰라요. 뭘 했는데 깨끗해져? 무슨 더러운 짓을 해도 깨끗해 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나중에 20장을 돌아서 보게 되면 그 말씀 위에 뭐가 있습니까? 부활의 능력이 우리 머리위에 있으니까, 부활의 능력의 혜택을 입으니까 그 말씀으로 우리는 이미 깨끗하여 진 거예요.
“깨끗해지세요. 더 깨끗하기 위해 힘쓰세요.” 이것이 아니고 “이미 깨끗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단언적이어서 우리가 잘 믿어지지 않아요. ‘주님께서 너무 심한 말씀 하신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뭘 믿어도 믿을 근거가 있어야 믿지 터무니없이 ‘깨끗하여졌느니라.’는 말씀을 들으니까 당황스럽기조차 한 거예요.
갑: “넌 뭐 했는데?”
을: “아무 한 것도 없는데”
갑: “그런데 왜 이런 엄청난 말씀을 주셨지?”
위를 보지 못해서 그래요. 나중에 부활하고 보면 이미 예수님이 14장, 15장 그 전 요한복음 1장부터 이미 부활의 능력이 우리 머리위에 내려지고 있는 겁니다. 이 전체를 이전 시간에 제가 ‘처소’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세계. 무덤에서 살아나신 그 능력으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후 부활의 능력과 관련되어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라고 묵시적으로(시간과 관계없이)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그냥 벌벌 떨기만 하지요. 우리는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잘 할게요.”하는데, 예수님은 “어허, 이미 깨끗해 졌다니까.” 이렇게 말씀하세요.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축하한다. 너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하니까, 학생은 이렇게 이해해요. 선생님이 열심히 공부하라고 꾸중하시는 것으로. 그래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제 열심히 공부할게요.” 이러는 거예요.
우리는 영문도 몰라요. 그 혜택을. 사실은 이 혜택은 우리와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거래에 의해서 이미 여기에 충족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잘, 잘못과 관계없이 우리는 두 분(예수님과 아버지)의 약속을 적용해야 될 빈칸입니다. 이 빈칸에 주님의 죽음 후의 능력이 눈처럼 소복이 싸여야 됩니다. 이 죽음 후의 능력에 근거해서 주신 말씀으로 “이미 너희가 깨끗해 졌느니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20장부터 먼저 제가 언급한 것은 지금부터 14장, 15장을 쭉 이야기하면, ‘목사님, 제가 이 말씀은 못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미리 말씀드린 겁니다. 우리의 행동에 근거해서 구원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먼저 반환점을 돌았어요. 먼저 반환점을 돌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성령 안에서, 처소 안에서 우리를 초청하면서 이 부활의 능력을 맛보라는 거지요.
네가 만든 작품은 아니지만, 내가 만든 작품이지만 이 부활의 능력을 맛보면서 나처럼 이렇게 반환점을 돌아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능력에 의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다 할지라도 베드로는 다시 용서받고, 나중에 21장에 가면 이 능력으로 베드로를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세 번이나 날 부인했지?”하니까, 베드로는 “잘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아직도 날 사랑하나?” 베드로는 “저는 말 못하겠습니다(말해봤자 못하는 것이니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너는 나를 배반할지라도 내가 준 사랑, 부활의 능력 때문에 너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길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부활의 능력 밑에 있는 이 모든 사람은 결국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이미 반환점을 돌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에 누가 이미 반환점을 돌아서 미리 지금 부활의 세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뒤따라오는 후배들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도 네 나이 때는 걱정 많이 했다. 그런데 와보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이미 다 되어 있더라.’ 이렇게 말하겠지요.
지금 옆 홀에서는 술 먹고, 악단의 연주에 맞춰 노래 부르고, 품바하고 난리를 치는데, 저들에게는 위에서 내려주는 것이 없어요. 누가 챙겨주는 분이 없어요. 믿을 구석이 없는 거예요. 믿을 것은 자기 주먹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발광을 하지요.
교회 교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안 믿고 교회 나오면 품바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냥 해보는 겁니다.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늘 초조하고 성경 볼 때마다 (이 말씀 내가 안 지키면 어떻게 되지?) 걱정을 해요. “이미 깨끗하여 졌느니라.”는 말씀은 안 믿어져요. 왜? 내가 더럽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을 수 없어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요한복음에서 이 반환점을 돌고 그 다음에 화산재처럼 우리 머리위에 눈 내리듯 하얗게 부활의 능력을 내려주면서, 부활이 있기 때문에 ‘내가 좀 세게 당기더라도 네가 좀 이해해라’는 말입니다. 14장부터 19장까지 세게 당깁니다. ‘빨리 죽자.’ 라는 식으로 강하게 당기는데,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걱정했겠습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여자가 임신하고 난 뒤에 걱정하지만 해산하고 난 후에는 아이를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지금 내가 먼저 반환점 돌았으니까 너희들은 나만 믿고 어떤 고통과 불안이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내 말 그대로 이뤄진 채로 너도 이 세계에 참여하니까 이 성경 말씀을 보고 기뻐하라.’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보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성령 안의 처소 아닙니까.
자, 이렇게 해놓고 이제 여러 가지 문제점을 풀어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수련회가 끝나도 이것 하나는 잊지 마세요. 이 그림이 햄버그 같은데, ‘이미 우리가 깨끗해 진 것’이 우리 능력 때문이 아니고 죽음 이후의 능력(부활의 능력)이 선물로 성도들에게 덮쳐오는 겁니다. 흰 눈이 하늘에서 내리듯 지금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제자들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죽음 후 시간에 가기 위해서 그들은 죽음의 길로 가야 돼요. 이것을 안타깝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14장 이후에 여러 말들이 있지만 한 마디로 해서 ‘너는 죽어도 괜찮아. 내가 죽음을 구경시켜 줄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 후 시간이 우리의 죽음 후 시간이 아니고, 우리의 죽음은 왔다가 그냥 사라져버리고 결정적인 시간에 죽음에 가면서 여기서 독수리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와서 우리를 낚아채면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서 우리 힘으로 들어간다면 이것은 낚아채지를 못하고 그냥 곤두박질 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로 가셨던 그 코스를 성령께서 그대로 마중을 나옵니다. 마중 나와서 당겨주는데 여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을 하는 것이 14장부터 19장까지 나오는데, 어떻게 낚아채는가? 그 아슬아슬한 장면이 있어요.
“야, 이제 죽었다. 끝장이네. 예수도 소용없구나.”라고 할 때, 딱 낚아채서 올라가는 그 아슬아슬한 장면을 여러분들이 구경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죽음이 부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인수인계가 일어나지요. 우리는 그냥 죽고, 우리의 죽음을 누가 받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받아서 그것이 부활로 이어질 때 우리는 죽음 후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할 때 도와주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바로 보혜사입니다. 자, 여기서 죽음 후 시간이 우리에게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직 안 죽었는데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간주하고 죽음 후에 적용되는 사태가 우리에게 미리 닥쳐오면 우리는 낚아챔을 당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직 안 죽었는데,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그 능력이 우리에게 낚아채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죽어도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새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 일을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근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나를 믿으라.” 쉬운 말로 ‘오빠 못 믿나?’ 그리고 “내가 다시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죽음 이후로 가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오신다는 말은 죽음 이후로 가시고 난 뒤에 얼마든지 죽음의 세계에 다시 오실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때는 죽음을 극복한 상태에서 오시기 때문에 이것이 부활의 효과지요. 부활의 효과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금도 엄연히 살아계신다는 거예요. 죽은 줄 알았던 그분이 살아계셔서 하시는 일이, 죽음 세계에서 자기 백성을 낚아채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내가 어떻게 믿어야 됩니까? 내가 어떻게 봉사해야 됩니까?’ 항상 우리의 관심사는 ‘내가 할 것’에 두는데, 실제로 우리가 구원 받는데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드나들면서 어떤 조치를 하셨는가? 그것이 우리 구원의 근거이지 내가 한 일을 근거로 삼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끝까지 하는 일은 뭐냐? ‘내가 알아서 다 해 줄게. 오빠 못 믿나?’ 이겁니다. 어떻게요? ‘내가 일단 너희들이 가야할 코스를 먼저 갈 게.’ 그러고 난 뒤에 다시 와서 ‘내가 간 코스 그대로를 너희들이 밟을 수 있도록 조치를 다 해 놓을 테니까 이 오빠만 믿어라!’ 이 말입니다.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걱정했지요.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시니까. 결국 있으나 없으나 주의 말씀을 믿어야 될 텐데 그들은 단지 예수님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안심했지만, 떠나시면 걱정하고 이렇게 되면 안 되지요.
하지만 제가 아까 그림 그린 것처럼 죽음 이후의 능력이 그들을 보살피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고아가 되어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는 뜻을 알 수 있는 거예요.
다시 그림을 그리면 14장부터 20장까지 제자들이 가는 길은 그야말로 믿을 것 아무것도 없는, 믿는 예수님마저 떠나고 진짜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고 믿을 것 없는, 그냥 전 속력으로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이러한 일을 경과해야 돼요. 한 마디로 고난이죠.
그래서 제가 14장부터 이것을 이야기하면 우리가 걱정 근심이 늘어납니다. 20장부터 먼저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길을 마련한 것은 이미 이것이 부활의 능력 아래서 진행되는 하나의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20장에 보면 열한 제자들이 방안에서 문 닫고 있는데 그곳에 예수님이 불쑥 들어오셨지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절).” 지금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미 들었어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자기 곁에 나타나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약 500명에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이 단순히 복 받으려고 기도하고, 자식 잘되게 기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봤다는 거예요. 누구를? 오빠를. 어떤 오빠? 죽은 오빠를. 그러니까 이것은 종교가 아니에요. 잘 하면 뭐가 되겠지 하는 요행도 아니고. 가능성도 아니고 개연성도 아닙니다. 이것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직접 보았어요. 즉 예수님을 안 본 자는 말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단순히 ‘이렇게 조작하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교회 부흥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작전을 꾸미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그런 것은 문젯거리가 안 됩니다. ‘주님, 언제 저희를 데려 갈 것입니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의 경우를 보면 기뻐하면서 죽어요. 저쪽 홀에서 지금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죽인다고 하면 다 도망갈 겁니다. 스데반은 그게 아니에요. 자기가 죽는 것이 좋고 감사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지, 이렇게 조작해 놓으면 사람들이 좋아해서 교회가 부흥되고 이런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14장에서 19장까지는 아직도 그런 단계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그냥 벌벌 떠는 단계. ‘우리를 버리면 우리는 어찌 살란 말입니까?’ 하고, 주님께서 ‘나를 믿으라.’고 해도 믿어지지도 않고 그런 거예요. 이런 그들을 왜 고아같이 내어버려 두느냐? 바로 이러한 코스를 통해야 그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유사 신앙, 가짜 종교, 행여나 주님을 믿으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라는 가능성으로 믿던 그런 모든 잡스러운 것들이 다 빠져나가야 해요.
다시 말해서 ‘절망’을 해야 돼요. 어두워! 그야말로 예수님 없이는 우리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돼요. ‘예수님 없으면 다른 것 하면 되지.’ 이것이 아니라 예수님 없으면 우리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그런 지경까지 몰아넣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부활의 혜택을 입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제 뜸을 그만 들이고 14장을 보겠습니다.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옛날 부교역자로 있을 때 많은 목사님들이 장례식에서 이 ‘처소’이야기하면서 맨션아파트 이야기하는 것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맨션아파트가 있어서 거기에 죽은 사람이 들어가서 산다는 겁니다. 예수 믿고 죽었으니까 맨션아파트 들어가 살게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이 왜 거짓말인가 하면, 이 아파트는 자격 없는 사람은 못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죽었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의 그 성격, 성질, 사고방식 그대로 들어갈 수 없는 나라예요.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목숨 바쳐도 못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이제 하나님의 약속 아니면 기댈 것이 없다고 하는 지경이 되어야 갈 수 있는 나라예요. 왜? 그 나라에서 데모하면 안 되니까. 하늘나라에서 ‘생존권을 보장하라!’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처소’가 마련되지만 이 처소는 예수님만 들어가시고 제자들은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마련해 놓고 그 다음에 제자들이 들어가는데, 제자들은 육(肉)인데, 이 육이 영(靈)의 사람으로 바뀌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이 ‘처소’입니다. 교회 다니다가 죽었다고 들어가는 맨션아파트가 처소 아닙니다.
그래서 처소(맨션아파트)를 이야기하려면 죽기 전에 물어봐야 돼요. “당신은 예수님만 사랑합니까?” 물어보면 “아니요.” 그러면 끝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처소가 죽음 후 세상이잖아요. 그러면 죽음 후 같으면 ‘나’라는 주체가 없지요.
죽음이란, 더 이상 내가 없다는 거예요. 죽음은 더 이상 삶이 없는 거예요. 죽어서 승부를 결정짓겠다든지 이런 말은 소용없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이제 네가 할 것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후는 누구한테 맡겨야 됩니까? 죽음 후는 예수님 소관입니다. 그 죽음 후의 세계가 성령을 통해 미리 우리에게 덮쳐오면 어떻게 되는가? ‘내 인생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 왜 그렇습니다. 나는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는 죽은 자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가 처소에 들어갈 자입니다.
성령은 죽음 후 세계에 우리를 넣어 주는데, 죽음 후의 세계에 합당한 사람만 넣어줍니다. 즉 어떤 사람이 들어가느냐 하면 이미 죽었다고 간주한 사람만 넣는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 공로입니까? 우리 공로가 아니에요. 죽은 사람은 자기 행위를 덧붙일 것이 없어요. 죽은 시체는 누가 관리하는가 하면 성령이 관리하시고, 예수님 소관이고 하나님 아버지 소관입니다. 죽음 후의 세계를 미리 앞당겨서 화산재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이 말입니다. 몇 초 동안? 약 2초. 혹은 3초. 어떤 사람은 열흘에 2초.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야 된다는 사실, 탕자처럼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눅15:19).” 이런 마음으로. ‘아버지 가락지는 다이아몬드로 해 주세요.’ 이런 탕자는 없습니다. 그냥 주시는 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뿐입니다. 이미 자신은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버지 처분에 맡길 때 그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15장을 봅시다.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리고 4절 ‘너희가 나에게 붙어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지로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열매는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붙어 있습니까? 원줄기가 예수님입니까, 우리입니까? 예수님이 원줄기고 우리는 곁가지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천국 갑니까? ‘내 원줄기가 저쪽(천국)에 있거든요.’ 그럼 당신은? ‘나는 원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지, 내 힘으로 못삽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분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일러주신 말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것입니다. 왜? 나는 이미 주님 안에서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장부터 20장까지는 제자들에게 죽으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죽어야 갈 수 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조건 하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죽을 수 있는 힘을 이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14장을 다시 봅시다.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이 말은 우리보고 골라잡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길 역할을 너희에게 행사하겠다.’는 말입니다. “진리요.” 진리의 역할을 너희에게 행사하겠다. “생명이니” 내가 생명인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을 너희 입에서 토하게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빌라도가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고 할 때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아무 말씀 안 하시지요. 진리가 무엇인지 물을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주님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주셔야 됩니다. 진리를 안다고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로 이끄는 것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철없는 빌립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14장 8절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꾸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오빠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오빠 있는 곳에 아버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자꾸 아버지를 보이면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아버지 나라에 못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공경하려면 예수님 말씀을 믿어야 공경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말씀은 뭡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내가 다시 올게.’ 이것입니다. 힘 빼고 죽은 자로 살면 ‘내가 너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단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처소가 마련되면 이 처소에서 성령이 와요. 성령이 와서 “저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절).”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오해해서 성령을 잘라서 나의 영으로 소유하는 버릇이 있어요. ‘김 집사 성령 받았단다. 나도 받아야지.’ 성령이 어디 수제비 반죽처럼 뗄 수 있는 것 인줄 알아요? 아닙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렇게 될 때 이게 성령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자들은 ‘보여주세요. 아버지 보여주면 우리가 판단해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못 본다. 그런 마음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에 내 말을 믿으라.’
‘그걸 믿기 위해서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성령을 보낼 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예수님이 직접 오나 성령님이 오나 차이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차라리 예수님이 직접 와서 옛날식으로 하는 것이 더 편해 보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와서 옛날식으로 하면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또다시 배반할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와서 뭘 해야 하는가 하면, 늘 알고 지내던 예수님의 세계를 우리가 함부로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16장 9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이 오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죄라는 개념, 심판의 개념, 그리고 의 개념 전부다 반대로 되어 있어서 우리는 주님 가신 그곳에 못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죄인이어서 우리 힘으로 주님 가신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지요.
20장을 봅시다. 제자들이 두려워서 집안에서 문 닫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뭘 보여주십니까? 20절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데, 즉 예수님이 죽었던 흔적이 보이지요. 그럴 때 도마가 하는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라고 했어요. 이 말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예수님 죽음 후 부활의 능력이 철없는 우리에게 유효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은 예수님 혼자 구원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을 살려내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확정짓고 말았어요. 예수의 죽었다가 부활한 그것이 예수님의 처소에 합류할 수 있는 유일한 표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아니고서야 이 십자가가 안 믿어지지요. 그러면 십자가가 믿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살았다고 우기지만 주님 보시기에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때마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사죄의 은혜를 계속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볼 때는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고, ‘율법 +은혜 위에 은혜’로 내세우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져도 관계없어요. ‘율법 +은혜 위에 은혜’의 혜택을 입는 사람은 구원 되고, 그렇지 못하고 ‘율법과 은혜가 나와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죽음 후의 능력에서 배제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이 ‘은혜 위에 은혜’의 혜택을 주기 위한 상대자를 찾아 나서고 있는데 그거 바로 너다.” 라고 지적하는 식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누구한테만 오는가 하면, 구원 받을 자에게만 오고 나머지는 성령이 안 옵니다. 왜? 성령은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지적한 사람에게만 성령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제 17장을 보겠습니다. 2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고, 그 뒤 9절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11절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 다음 15절에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원함이니이다.” 그리고 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이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빠 못 믿나?’ ‘믿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와야 가능한 것입니다.
앞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우리에게 찾아온 그 능력으로 이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이 16장, 17장, 18장의 모든 말씀이 다 믿어지는 거예요. 믿을 것 있고, 못 믿을 것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믿어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16장은 아예 죽을 것을 각오하라 하시는데, 2절에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죽일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너희를 나 있는 곳에 데려가겠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33절에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계속해서 하는 말이 ‘오빠 못 믿나?’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사람들은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옆에 같이 계시면 안 됩니까?’ 라고 하지요. 같이 붙어 있으면 그들이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것으로 착각하게 해요. 오빠가 떠나야 진짜 오빠를 믿는지 안 믿는지 구분될 것 아닙니까?
오빠 떠나니까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아무도 안 믿었지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니까 저들은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그제야 믿는 거예요. 그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보고 믿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하셨지요.
그들이 믿은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후 사건. 죽으신 그분이 지금 살아 계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되살아난 그분을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이 의미 있는 거예요. 보통 세상 사람들은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위하여 춤추고, 노래하고 난리를 치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증인되게 하는 이것은 천국 가도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되는 겁니다. 너희들이 성령을 받아서 그 일에 초빙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히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해서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을 위해서, 즉 모든 세계가 말씀의 세계라는 것을 알리고 증거하기 위해서 너희들에 증인으로 채택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히 조작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5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가치라는 것은 직업이나 성격 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했던 ‘율법 +은혜 위에 은혜’ 앞에서 그 인간의 진정한 가치(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됩니다. 이 기준을 너희들이 땅 끝까지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말씀을 사람들이 또 오해를 해서 ‘우리가 영생 얻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미 영생을 얻은 자로서 영생이 무엇인지 증거하는 역할을 너희들이 하게 된다.’ 그 이야기죠.
그러면 14장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처소’가 무엇인가 하면,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아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그래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고스톱이라도 치겠다는 겁니까, 왜 모였는데요? 안에 있다는 것은 바깥과 구별된다는 거예요. 제가 첫 시간 강의에서 했는데, 바깥은 무슨 세계입니까? 어두움의 세계였지요. 어둠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모여 공동체를 만들어도 다 어둠입니다. 어둠의 세계에서는 빛을 만들 수 없어요. 어두움끼리 모여 봤자 어두움이에요. 그래서 어둠의 세계에서는 희망이 없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모여도 어두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어둠 세계 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셨다가 나가심으로 말미암아 빛의 세계가 형성된 겁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이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되심과 자신들의 어두움을 증거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단 말이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고 할 때, 아버지와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이 바깥의 인간 세계가 알까요, 모를까요?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인간들은 아무리 같이 있어도 개별자들입니다. 부부가 같이 잠을 자도 각자 꿈은 다릅니다. 동상이몽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 됨이 안 되고 결국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가 신(神)이예요.
여기에서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를 먼저 봅시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계약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이뤘어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 안에 들어올 수 없지만) 아버지 세계 안에 예수님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못합니다. 이 안 되는 것을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세계가 나의 세계가 되도록 전부다 여기다 집어넣어서 예수님 나라에 하나 되게 하는 이 상태. 이 상태는 어둠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과 자기 백성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고 다시 성령이 오심.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즉 어떤 특정한 종교에서 주장하는 일부 교리, 즉 인간들이 지어낸 아이디어라고 하는데, 인간들이 지어내면 이것은 공동체가 되지요.
그래서 성경을 버린 사람들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만들지만 여기서는 각자 따로 놀아요. 아무리 교인이 5000명, 6000명이 모여도 한 명 뿐입니다. 왜?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내 안에 나밖에 없어요. 각자 하나님이 다 달라요. 교회에 5000명이 모였다면 하나님도 5000개입니다.
일본에는 신이 15만개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주장은 그것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로 모인 수만큼 각자 신이 따로 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어둠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 됨을 몰라요. 만약 하나 됨을 안다면 교회를 일부러 구성할 필요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 모여서 교회합시다.’ 교회 해서 뭐 할 건데요? 교회에 여러 사람이 모여도 자기뿐인데. 그러나 주님께서 만드시는 교회는 예수님 안에 내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들 교회 만들라고 도와주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것은 마귀들이 하는 짓이고, 하나님은 예수님 기도하신 대로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묶어주는 것이 바로 계약, 새 언약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 새 언약, 즉 십자가 죽으심의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우리에게 나눠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고’ 이렇게 하나 되기 위해서, 처소 되기 위해서 줄기차게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흩어져도 주 안에서 한 몸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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