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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0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 요한복음 - 어디서 왔느냐? (요 19:9)강의요한복음

2010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 요한복음 - 어디서 왔느냐? (요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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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겨울 수련회 : 요한복음 (어디서 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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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5.♡.2.41)

10-01-17 20:04

수련회(2010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강의 파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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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5.♡.2.41)

10-01-17 20:04

어디서 왔느냐? (요 19:9)

2010년 겨울 수련회 요한복음 강의안

Ⅰ 서 론

예수님의 죽음 직전 최후로 만난 인물은 빌라도이다.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예수님은 대답해주지를 않으셨다.(19:9)

요한복음의 내용은,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는 이해가 될 수 없게 한 내용이다. 오직 예수님의 아버지에게 속해 있는 자들에게만 이해가 될 수 있는 내용이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14:22)

예수님은 세상과 ‘우리’에 해당되는 자들 사이에 분리를 도모하신다. 요한복음은 이 분리를 위한 복음서이다. 이 분리의 기준과 근거는 어디서 도출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 안에서는 찾지 않으셨다. 세상 사람들끼리 모아놓으시고 서로의 얼굴들을 마주보게 하시면서 “알아서들 분리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분리의 기준은 하나님에 의해서 위에서부터 보내주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8:23)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라는 대목에서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위에서 났다’고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땅에서 알던 기준을 동원해서 “나는 하늘에 속한 쪽으로 분리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 분리 기준마저 역시 ‘위로부터’ 뭔가 주어져야만 가능하다. “하늘에서 주신 바 되지 아니하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3:27)

곧 이 말씀은, 사람에게는 하늘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위로부터 주실 때, 곧 위에서 나신 분에 의해서 뭔가 제공받을 때만 그 사람에게는 하늘의 것이 생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또한 성도는 무엇을 받았기에 비로소 참으로 ‘하늘에 속한 자’라고 규정받게 되는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표적들은 (흔히 말하는 기적이 아니라 특정 인물의 본질과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기적) ‘때’라고 하는 시간적 간격성을 뜻하는 표현을 품고 있다. 즉 ‘아직 그 때는 아니다’는 식으로 지정된 때와 관련된 표시로서의 기적이다. 2장에서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표적도 그러하고 6장에서 떡과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는 표적도 그러하고,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나흘만이 되살려내시는 표적도 그러하다.

온전하게 예수님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 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죽지아니하면 전혀 나올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제공되어지기를 바라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3-58)

여기서 땅과 하늘 사이를 구분하고 또한 이 세상에서 ‘세상에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의 구분’도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 이외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7-18)

이 대목에서 ‘계명’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는 성도가 예수님과 하나님과 하나 되었을 때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계명이 이미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장만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에서 성립되는 그 계명을 그대로 자기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만 ‘하나됨’이 성사되는 것이다. 이 계명이 없이는 성도와 성도 사이와 성도들과 예수님 관계가 수립되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0-12)

이 계명의 특징은 ‘기쁨’이다. ‘기쁨이 충만해지는 계명’이라는 것이다. 계명을 행해야지만 보상으로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그 계명이 실시되어진다는 말이다. 이 계명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에서 절정이다.(15:13) 그렇다면 예수님의 계명은 새삼 예수님의 친구가 누구였는지를 드러내는 계명이며, 그 결과로 인해 친구를 만들어내신 예수님이나 친구나 모두가 기쁨이 충만한 지경에 놓이게 된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15:15)

결국 친구의 존재로 인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의가 피어나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속한 자들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17:15)

왜 예수님은 ‘어디서 왔느냐’를 묻는 빌라도의 답변에 대답하시지 않았을까? 그것은 자신의 친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순순히 빌라도 앞에 끌려나와 죽음을 자처하셔야 했는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죽음 안에서의 교제가 아니면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생명이란 ‘안 죽고 길게 끄는 목숨’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발생된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됨’의 능력이다.(17:3,21-22-23) 따라서 인간이 독자적으로 소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이 영생에 맞추어서 달라지게 된다. 어떤 모습으로?

Ⅱ. 본 론

1. 새로움, 곧 빛의 출현

빛보다 어두움이 우선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 및 만물의 존재가 원초적 어두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창 1:2) 이 어두움에 기초한 존재가 다른 창조 기초를 가질 때가 오는데 하나님의 대본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시작이 된다. 그 전까지의 인간은 그냥 주체 없는 존재가 되면 무의미한 불면에 상태에 빠져 있다.

새로운 빛은 이미 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마치 거울로만 만들어진 방 안에서 있는 인간은 거울에서 쏘아대는 빛을 피할 수 없어 자신의 전 모습으로 그 거울면에 전부 노출되어야 한다. 이처럼 빛과 생명이란 사람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다. 하지만 그 거울은 접근하지 못한다.(딤전 6:16)

그 새로움이 타인의 위치에서 등장하므로서 기존에 있었던 모든 것은 졸지에 ‘옛 것’으로 취급받는다. ‘옛 것’은 이제 ‘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타인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옛 것으로 규정받는데 이로서 옛 것은 ‘의식’을 갖게 된다. 즉 ‘홀로 서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동사에서 명사에로의 전환이다. 주체는 스스로를 확립한다. 이제는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확보하며 주체를 섬기는 자아로 변해져 있다. 주체라는 자리를 잡은 것은, 의식의 출발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주체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공격한다. 맹목적이고 본성적이다. 이로서 이 새로운 빛에 의하여 옛 것의 성질과 속성이 드러난다. 새로움이 빛이라면 기존의 것은 자동적으로 ‘어두움’으로 생산된다. 사단의 세계의 존재는 이미 새로움을 맛본 자들에게는 해당될 사항이다.(딤전 5:15) 새로움이 생명이라면 옛 것은 자동적으로 ‘죽음’으로 발산되어 지상에 일어서야 한다. 죽음의 죽순들이 돋아나서 지상을 뒤덮어야 한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옛 것으로의 생산물’이 된다는 것은 하늘에 대해서 대치물로서 움직이게 된다는 말이다. 하늘의 땅을 자극했다. 하늘에 대해서 적대관계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하늘은 땅에 대해서 시비 걸고, 땅은 거기에 맞대응하여 하늘에 대해 시비 건다. 이것은 하늘이 질문하고 땅이 대답하는 관계다. 덩달아 땅이 하늘에 대해서 묻고 하늘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한다.

새로움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고요했다. 정상인 것처럼 보였다. 세례요한이 먼저 정막을 깨는 소리를 질러대었다. “광야에서 주께서 오신다.”(1:23) 이로서 그 소리를 소리되게 하기 위해 세상은 졸지에 광야로 돌변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따라 소리가 지목하는 분에 주목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더 구체적으로 주의 업무를 알려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여기서 ‘하는 일’이 그 인물 됨됨이나 외형보다 우선한다. 그 분이 어떤 분이냐가 먼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담겨 있는 지정된 업무를 통해서 그 분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세례 요한은 인물로서 예수님을 판단하지 않는다. “나도 그 분을 모른다”(1:31,33) 알지 못하는 자를 세상에 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시키시는 업무가 그분이 누구신가를 말해줄 것이다.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서 세례 요한은 비로소 어떤 한 분으로 범위를 좁힌다.(1:33) 알지 못하는 분,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이 표적이 된다.

이 표적으로 인하여 기존 세상의 가치관은 묵살되면서 표적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가담하게 된다. 예수님의 임무 수행의 와중에서 호출되어지는 것이다. 호출 당하게 되면 그 악마성을 감춘 허물은 제거된다. 세상은 예수님의 행적에 의해서 홈이 파리고 긁히는 것이다. 껍질은 벗겨져나가고 자칭 정돈된 신앙심에서는 뱀의 독기가 뿜어져 나온다. 새로움이 주는 효과다. 이 효과는 즉시로 파급된다. 세상은 가만히 당하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한 마음으로 단결하는데 이로서 옛 것들은 결집은 성사되었다. 이 옛 것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른다.(1:5) 빛의 등장으로 인하여 어두움도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빛과 어두움의 만남이 표적을 이룬다.

2. 표적들과 그 의미

(1)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표적(2:1-11)

표적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기적을 행하신 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을 표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표적은 기존의 질서를 깨어버린다. 그래서 어두움으로 인하여 ‘해석불능조치’에 빠트린다. 분명 뭔가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는 일어났는데 그 이유와 원인과 목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게 된다. 따라서 이 ‘모른다’로 인하여 이 세상은 정죄당하고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평가받는다. 반면에 ‘앎’은 영생이 주어졌기에 생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란다. 이 포도주에 대해서 두 종류의 안목이 나온다. 하나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의 안목으로서, 포도주란 ‘잔치 손님을 즐겁게 할 음식거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안목의 포도주라면 예수님 하고는 상관없다. 또 다른 포도주의 존재의의는 ‘모자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함’에 있다. ‘적은 포도주→많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포도주’이다.

이 포도주는 사람이 소비할 음식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자신이 행하실 일의 성취를 겨냥하고 지향하는 포도주다. 아직 완성의 때가 되기 전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포도주다. 따라서 이 포도주는 일단 사람들의 몸의 욕구와 관련 있다. 마시고 싶은 욕구에 부응하며 소비된다. 하지만 그 인간의 몸의 욕구를 채워지는 포도주 대신 예수님 몸, 자체를 원할 날이 올 것이다.

(2) 표적의 의미에 관한 해설 : 성전을 사흘 만에 짓는다는 예언(2:13-25)

예수님의 몸과 인간의 몸이 대비가 된다. 인간들은 46년 째 성전을 짓는 중이다. 하지만 지으면 지어나갈수록 헐릴 날이 가까이 온다. 왜냐하면 성전은 둘(2)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표적의 의미는 인간의 몸이 헐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몸을 해체시키시는 몸으로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몸이 세워진다. 두 개의 몸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하나는 죽어야 될 몸이요 다른 몸은, 그 죽음 안에서 죽음을 지시하셨던 몸이다.

(3) 왕의 신하의 아들을 낫게 하신 표적(4:46-54)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게 표적을 기대했다. 과연 아들을 낫게 해 주실 분이냐는 것이다. 이 와중에서 그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시점을 얻고 온다. 하는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기 요청을 받아들여 “네 아들이 나았다”고 말씀하신 그 시점과 다른 하나는 아들이 실제로 나은 시점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과 아들이 누워있는 그 공간 사이를 경과한다. 두 개의 때를 염두에 두면서. 그러나 막상 집에 도착해보니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는 시점이 곧 아들이 병 나은 시점과 일치했다. 왕의 신하는 처음에 ‘아들의 병 나음’을 표적으로 삼았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는 인간적인 시간관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적으로 얻게 된다. 즉 인간의 시간관과 공간관은 곧 어두움임을 드러낸다.

(4) 베데스다 못 가에서 일어난 표적(5;1-9)

보여준다는 것이 도리어 더욱 못 믿게 하시는 표적이다. 개인에게 적용되는 표적에서 벗어나 주변으로 확산되는 표적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병과 자신의 비거룩성(죄성)을 결부시킨다. 천사를 통해 전달되는 신의 은총에 기대를 걸고 사람들은 베데스다 못의 물결이 흔들리기를 기다린다. 병 나음은 곧 죄용서와 통한다. 이러한 병 나음은 율법(안식일) 준수와는 다른, 특별 배려조치로 은총의 혜택을 입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은총을 받는 것이 율법 준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서 은혜를 입어도 율법은 율법대로 여전히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 주변의 사상이다.

이런 판국에 예수님은 무슨 표적으로 어두움에 접근해 가시는가? 일단 38년 된 병자가 은혜 받은 자로서 무시무시한 안식일법으로 지어진 어두운 세계 속으로 진입한다. 의도적이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지시만 예수님이 내리셨다. 그런데 인간을 감시하여 율법 완수에 하지가 없게끔 감시하는 감시카메라에 이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 속에 통과하고 있다. 실은 그 움직임은 베데스다 호수의 움직임처럼 자비가 왕림했다는 신호다. 그런데 그 자비가 (율)법에 체포되었다. 죄인취급 받았다. 심문 당한다. “왜 율법을 어기느냐?”는 것이다. 즉 “왜 말씀을 어기느냐?”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각자 마음속에 들어있는 자기 법의식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은 단지 자신의 법의식을 옹호하기 위한 핑계다. 인간의 법의식은 하늘이 주신 자유가 아니라 ‘자기 고유의 자유’다. 그들은 ‘법으로부터 자유’를 모른다. 단지 ‘법 안에서의 자유’만 안다. 이렇게 되면 ‘자기만의 자유’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란 뜯어보면 온갖 주워 모은 법으로만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의 절대성을 사수하기 위한 법이다.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심판은 내가 한다.”(5:22)

(5) 5000명을 먹이신 떡 표적(6:1-15)

사람들이 자신의 주된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배불리 제공했을 때, 그들은 알게 된다. 곧 ‘사는 것=관심사’였다. 이렇게 되니 곧 ‘떡 주는 이=메시아’이다. 떡을 매개로 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 메시아인지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쫓아다닌다. 즉 자기 몸을 자기 식대로 살리기 위해 떡 주는 메시아가 필요했던 것이다. 계속 떡을 공급받기 위해 메시아와 흥정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평소에 메시아 만나면 하고 싶었던 1 순위 질문이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였다. 예수님께서 떡을 주신 것은 ‘인간들은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즉 “영생을 위한 양식”이 없음을 밝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 인간은 죽어 마땅한가? 바로 살 수 없는 떡에 여전히 매달려서 산다는 그 자체가 표적 내용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 내용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표적은 “나의 죽음을 생명의 떡으로 여겨서 같이 죽는 자만이 산다”입니다.(6:51-55)

(6) 소경이 눈을 뜨는 표적(9:1-7)

인간은 눈이 어두워서 밤, 낮을 구분 못한다.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마치 밤에 다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소경과 다를 바 없다.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소경을 불러다가, 왜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만 ‘낮’이 되고 예수님이 없는 형편은 밤이 되는지를 알려주신다.

소경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밤의 세계로 이동한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다(=실로암). 이 소경을 마중하는 것은 안식일이라는 법구조의 세계다(9:16) 그런데 법 세계에 의하면, 소경이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신의 부정적 기능을 보여주는 표적이 된다. 그 저주가 풀렸으니 바리새인들은 그 경로가 궁금하다. 어떻게 율법 준수 없이 용서받을 수 있는지가 그들에게는 상상이 안 간다.

소경 되었던 자가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그분이 보이는데 당신네들은 그분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소경에게 대꾸한다. “우리들은 예수가 죄인인 줄 안다.(9:24) 그런데 그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모른다.(9:29)” 밤은 낮을 모르고 계속 밤이다. 밤이 낮으로 변하는 곳은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셔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주변은 갈수록 밤은 짙어지고 소경들이 집결한다. 낮을 거부하여 계속 밤으로 남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제 ‘밤=죄’로 보신다. 즉 “본다고 하니 죄가 그냥 있구나”(9:41)

(7)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11:1-4)

나사로는 죽을병이 아니었다.(11:4) 하지만 ‘죽을병이 아니기에’ 그 병으로 죽어야 했다. 여기서 무엇이 죽음이냐를 놓고 예수님의 주변은 설전이 이어진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사로를 깨우러가자”(11:11) 그런데 도마라는 제자는 말한다. “주님과 같이 죽자”(11;16) 도마는 예수님과 더불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가 다시 사는 재미나는 모험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볍게 ‘죽음=잠자기’로 처리한다고 오해해서 가볍게 받아 넘긴다. 곧 ‘죽음⇒잠자기’를 마치 ‘잠자기⇒죽음’이 되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잠자기란 마치 예수님과 더불어 죽을 만큼이나 급진적인 일이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에 의해서 병에서 살아나지 못하고 잠잔 것(=죽은 것)이다. (11:4)

이 잠을 깨우는데 있어 방해요소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눈물을 흘러야 될 만큼(11:35) 예수님의 눈물은 단절을 뜻한다. 불신에서 오는 단절이다. 불신자들을 위하여 다시 표적을 보여주어야 될 아픔이다. 표적으로 인하여 도로 예수님께서 불신의 세력에 의해 제거된다.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곤히 잠자지만 예수님은 그 잠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친히 고난 받아야 했다. 이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곧 이 저주의 세계 안에서 천국이라는 잠자리를 장만하기 위한 고난이다. 나사로는 이 고난에 동참해야 했고 마르다, 마리아와 및 제자들은 관람자들이었다. 협조자들이 아니다 는 말이다. 마르다의 신학적인 부활관이나(11:24), 제자들의 자발적인 숭고한 동행 의사(11:16)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믿음 세계에 시험거리나 될 뿐이다. 단지 예수님에 의해서 죽어줘야 했던 나사로만큼은 예수님을 나타내는데 있어 쓰임을 받는다.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12;10)

(8) 부활 이후의 표적들(20:30): 부활과 닫힌 방에 들어오신 표적(20:19)과 고기 잡아주시는 표적(21:1-6)

부활된 예수님의 몸과 부활되지 못한 제자들의 몸과의 차이는 아버지와 하나 됨 여부에 달렸다. 누구라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면 부활이 된다. “나를 만나지 말라”(20:17)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 됨 같이 제자들도 하나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그 다음 남은 절차에 들어가셔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나 됨 같이 제자들을 하나로 모으시는 일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전에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는 제자들이 마치 양들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인간들 끼리 그냥 버려두면 이런 결과가 초래한다. 베드로는 배신까지 하게 된다. 따라서 제자들을 돌보아서 하나 되게 함을 달성해야 한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그냥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14;18) 그래서 장차 오실 성령께서 하실 일을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신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다. 즉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어 있음을 확인케 하는 일의 되풀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7:11)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표적은 이 하나 됨을 사랑으로 묶어놓기 위함이다.

부활 후 첫 번째 표적은, 부활되신 예수님, 그 자체였다. 예수님에게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직접 만난 것은 예수님이시지 부활 소식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표적은 제자들을 한데 모으시기 위해 닫힌 방에 들어오신 일이다. 그들을 한데 묶는 표적은 바로 예수님의 몸에 있는 십자가 죽으심의 흔적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0,25,27)

이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유는 부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만개하기 위해서다. 곧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 사랑 속으로 제자들도 합류되어야 한다. 그것도 넘치는 기쁨으로서!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예수님께서 찾아온 이유다.(21:14) 153마리라는 예외 상의 많은 수의 고기가 잡히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 사랑이 제자들이 예상 한 외에 크다는 것을 나타내어주기 위한 표적이었다.

예전처럼 인간들의 사랑에 예수님은 기대를 걸지 않으신다. 베드로는 세 번씩에서 예수님을 배신하는 발언을 했다. 닭 울음이 그 표적이다. 그 표적의 연결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에 대해서 물으시므로서 긍정적인 돌보아주심의 표적 속으로 베드로를 끌어들이신다. 베드로는 말씀 성취의 일관성에 대한 믿음으로 화답한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십니다.”(21:17)

사랑과 ‘모든 것을 아십니다’의 만남이 성사되면서 자기 사람의 대한 사랑이 변함없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제자들을 불신적 성향은 여전하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21:21) 베드로는 요한을 지목해서 그의 장래와 자기 장래를 비교하는데 있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한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믿음과 사랑을 경유하지 않은 채 요한을 경유해서 자기 존재를 정립하려고 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사랑과 믿음이란 인간 써먹을 수 있는 소유된 사랑이나 믿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도저히 더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이 만드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불현듯 그 속에서 등장하는 식으로 작용한다. 마치 부활과 같다. 결코 인간들이 예상 못했던 상황에서 예수님의 부활로 분위기 반전이 일어나는 것처럼, 제자들과 더불어 부활의 현실성은 끝까지 간다. 과연 세상 끝날 까지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다.(마 28: 20)

3.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자리

예수님은 어두운 이 지상에서도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17:24) 이것은 곧 하나님을 사람들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육신의 자리다. 육신은 악마가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드신 것이다.(1:10) 곧 예수님은 자신이 만드신 피조적인 육신에다 자신의 자리를 펴시는 것이다. 그런데 육신은 그분을 못 알아본다. 육신이 육이 되어버린 것이다.

육으로 사는 인간들이 다른 천국을 가고자 한다. 어두움의 권세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로서 예수님은 인간의 의도를 계속 거부해야만 하셨다. 이것은 곧 인간과 엮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회원모집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버지가 예수님께로 몰아주신 그 자들을 회수하려 오신 것뿐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7:9)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65)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이로서 천국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방적 작업이다. 제자들은(인간들은) 그저 참여할 따름이다. “내가 너희로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4:38)

그만큼 인간들이 생각해둔 천국 개념은 예수님께서 벌리시는 일방적 천국 작업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묵살된다. 왜 그럴까?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밝혀진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란 인간들이 염두에 둔 하나님 세계를 비켜갈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세계를 죄악된 발상이라고 지적하시면서 성취하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5-8)

따라서 인간이 기대하는 천국은 애당초 천국이 아니다. 아무도 자력으로 육에서 영으로 변해서 천국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 구성을 위해 하나님도 인간들이 아쉬워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구원해서 충당시켜야 했다 는 발언도 인간의 입에서는 내놓은 처지가 못 된다. 그런 발상조차 ‘육’이다. 거짓 천국만 유포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짓 발상만 남발하는 그 육신에 자리에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를 펴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인간 가운데 계신 것이다.(1:14) 독생자 되시는 분이시다. 그 자리에서 영광이 나오는데 그 영광은 은혜 위에 은혜로서 형성된 영광이다. 율법이 제공될 때의 영광을 능가한다. 이 영광은 율법 준수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영광이다. 은혜로 주시는 진리로 인한 영광이다. 진리로 인한 영광 속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을 통해 아버지도 보게 된다.(1:15-18/17:24-26)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은 없다.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온 자라야 아버지를 본다. 어떻게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는가? 예수님은 사람들의 소유가 될 수 없다. 도리어 자기 사람을 먼저 알아보신다. 쭉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1:47-48)

이미 아는 예수님과 자기 백성이 무엇을 매개로 하여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뱀처럼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3:14) 들리지 아니하면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이끌 수 없다.(12:32) ‘들린다는 말’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께서 배척받아 쫓겨나는 식의 죽음으로 죽어야 함을 뜻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히 하고 귀가 닫히게 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절차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12:37-40)

그러면서도 외치신다. “나를 믿으라. 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나를 보라 나를 보는 자는 나 보내신 자를 보는 것이다”(12:44-45) 왜 외치실까? 바로 이 외침의 말씀이 인간을 심판하는 기준과 능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너희들을 못 믿게 한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해서, “너희들의 불신으로 내가 죽게 된 것을 너희들을 믿게 하기 위한 조치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결국 육에서 영으로 자기 백성을 옮겨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심 자체가 높이 들려서 ‘나는 죽었노라’를 믿을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이 필수 코스라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12:24-25)

이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의 운명이고 자기 백성들이 믿어야 될 내용이다. 육의 본질을 극도로 드러낸 결과가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며 ‘인간들의 불신이 독생자를 희생물로 해서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자신이 곧 육이며 자기로 인하여 독생자께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모습인데 이런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죽으심으로서 참된 목자로서 차별화를 드러내신다. (10:15- 18) 양은 목자의 이 음성을 이해하고 순종한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너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10:26 -29)

이는 곧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의를 살리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께서 속한(8:47)양들에게만 이 내막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주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Ⅲ. 결 론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 예수님께서 물었지만 예수님께서 입을 다무셨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버지께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기에(14: 26) 아버지께서 택해놓으신 양이 누군지를 분간해서 그들에게만 임하여 거듭나게 하신다. 바로 이런 조치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14:13) 다른 식의 영광은 없다.(17;1)

예수님은 홀로 계신 것이 아니다.(16:32)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다. (10:30) 예수님 안에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10:38) 이것은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계획과 뜻이 예수님에게만 독점되어 있고 일임되어 있는 것으로 주장되기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10:31,39) 결국 이 이유로 인해 예수님은 죽게 되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신다. “다 이루었다”(19:30)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 양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다 이루신 것이다. 이 사랑으로 인해 은혜 위에 은혜를 발생되어서 성도를 하나님과 예수님과 자신이 하나 되게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

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곧 같이 죽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나와 같이 죽자” 외의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이 죽음 안에 들어가서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다음의 말씀도 이해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관리자(IP:125.♡.2.41)

10-01-17 20:05

1강

cross100110a

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a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뜻에 의해서 이렇게 여러 각처에서 사시던 우리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요한복음에 관해서 더 깊숙한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같이 모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쓰셨기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오니 이 시간 우리에게 문자로 보지 말게 하여주시고 성령께서 어떤 의도 요한복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가게 하셨는지 그 내력을 저희들이 소상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안 오신 분이 있어서 시작하기 좀 껄끄러운데 그냥 합시다. 요한복음을 볼 때 요한복음으로 목회를 성공하겠다든지 요한복음 가지고 우리 가정 문제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오네.

요한복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림살이가 나아지겠다든지 요한복음 가지고 목회 성공하겠다든지 이런 의도, 사적인 어떤 문제가 있는데 이 요한복음의 어떤 구절을 통해서 따로 은혜를 받겠다든지 그러한 식으로 하게 되면 요한복음 자체가 이야기하는 것하고 그걸 우리가 이용하겠다는 것 하고 요한복음이 그걸 거부합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그걸 차버려요.

대충 괜찮은 구절 몇 개 뽑겠다는 식으로 요한복음을 다루시면 그것은 요한복음을 모독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 다 치우고 요한복음 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하는가? 그것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과 무엇과 대비를 봐야 하느냐 하면, 그전에 창세기가 있어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거기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만들 때 뭔가 창세기에 오면 개입되는 게 있어요? 그게 뭔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해서 인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볼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 중요하느냐, 인간이 중요하느냐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죠.

‘너, 인간아. 네가 중요할까, 하나님 형상이 중요할까?’ 이렇게 묻는 겁니다. 하나님 형상 때문에 너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너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동원 되었을까 묻는 겁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은 뭐가 동원됐는지 신경 쓸 것 없이 하여튼 나는 나에게 내가 중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든지 간에 현재가 내가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예를 들어서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요리할 때 집에 가서 귀한 요리 먹을 때 귀찮은 게 있어요. 그 주방장이 자기 주방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 되는데 ‘우리 식당은 보통 식당 아닙니다. 우리 식당은 특별 버섯을 가미했고, 소스는 프랑스제 뭘 사용했고.’ 이렇게 설명을 해준다고. 그러면 미식가 같으면 거기에 관심이 있겠지만 보통 손님 같으면 밥 먹을 때 그냥 가주세요.

돈 내고 음식 먹는데 여기에 초점이 있지, 이 음식이 왜 맛있어야 돼야 하는 것은 그건 주방장, 당신 관심사지, 이건 우리들 관심이 아닙니다. 지금 선보는 자리기 때문에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앞에 여자 꼬셔야 되니까 급선무지, 음식 자체는 안 중요합니다. 그냥 가주세요. 그러면 주방장 시큰둥해서 주방에 들어가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셔놓고 뒤따라 와서 모세를 통해서, 창세기를 통해서 말씀을 줍니다. 인간아.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었고. 우리는 귀에 잘 안 들어옵니다. 지금 사는 게 힘들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수월하게 살게 해달라는 그뿐이지 뭐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고, 너는 형상을 본받으라. 이것은 주방에서 노시고 우리는 우리 다급한 것, 살기 힘든 것,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 그저 우리들의 관심사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형상대로 살라는 그런 요구조건이 위에서 내려오겠지요. 만들어진 인간은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건 잊어버리고 인간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요구사항이 있어요. ‘하나님. 우리들이 하나님께 요구할 사항이 있습니다.’ 요구사항을 다른 말로 이걸 질문이라고 해요. 더 쉬운 말로 여러분 잘 아시는 기도에요.

질문을 우리가 만들 테니까 다만 이 질문에 합당한 답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 달라. 다른 말로 하면 기도는 우리가 할 테니까 하나님은 뭐만 하면 된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면 된다는 거예요. 중간에 뭐가 빠졌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올 때는 무엇을 경과해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경과해서 이걸 거쳐서 왔는데 우리 쪽에서 하나님 나아갈 때는 갑자기 뭐가 없어졌어요? 하나님 형상이 없어져버린 거예요.

주방장이 요리를 만들 때는 수입산 고급 버섯에 의미를 두고 만들었는데 우리는 그 음식 안에 있는 버섯보다 상치, 시금치. ‘이것 하나 있으면 더 주세요.’ 제가 요리사라도 ‘메인요리 맛있습니다. 이것 하나 더 줄 수 없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제가 요리사라도 기분 좋을 텐데 꼭 요리의 진수를 모르는 인간들이 ‘다꾸앙 하나 더 주세요.’라든지 다른 곁들이 반찬 있잖아요. 이것 맛있는데 더 달라. 그런 것은 시중에서 사오고 만드는 게 아니라는 소리를 대전강의에선가 들었어요. 그건 중요한 것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올 때는 반드시 거쳐서 온 경과된 형상인데,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어려운 말이에요. copy. 하나님의 복사에요. 복사는 여기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동질성. 복사를 했다는 말은 원본하고 복사물하고 유사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사성, 비슷한 게 없으면 복사가 잘못 됐기 때문에 찢어버리죠.

그래서 내가 준 흔적, 내가 준 유사성을 갖고 있느냐를 유심히 보는데 만약에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마귀가 좋아하는 짓을 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유사성을 없애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흙으로 바꿔버려요. 없었던 걸로. ‘우리 이야기 없는 걸로 하자.’ 없는 걸로 돌리는 거예요.

어렵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이 만약에 하나님 형상을 상실하면, 그러니까 복사, 카피가 되지 않으면 인간을 바로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흙으로 보냅니다. 흙으로 보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죽인다 이 말이죠. 보내는 것도 하나님과 하나님 형상 사이의 언약 의해서 계약에 의해서 만약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 형상을 닮지 아니하면 흙으로 보낸다는 것이 그 계약내용에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도 들었던 이야기인데 맞는지 모르겠어요. 타이거 우즈가 자기 부인하고 결혼하면서 네가 십 년 동안 살아주는 조건 하에 위자료를 주겠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십 년 동안은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위자료 없는 거예요. 부인은 죽으나 사나 십 년 살아야 돼요. 십 년 안 된 것 같은데 지금 위자료는 안 푼도 없는 게 돼요. 결혼할 때 계약에 십 년 동안 살아주는 조건 하에 위자료 주게 돼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사람은 하나님 형상에 대한 내막을 몰라요. 그냥 내가 여기 있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여기 있네. 내가’ 이런 식으로 살거든요. 내가 여기 있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누가 나를 여기 있게 했다는 ‘누가’를 도입시켜야 돼요. ‘여기 있네. 내가’ 하면 내가 여기 있음만 관심 있는 거예요. 모르면 그냥 넘어가요. 이런 게 있어요.

그래서 ‘여기 있네. 내가’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뭘 생략하느냐 하면 잘 보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여기 있네. 내가’에서 내가를 지워버려요. 남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있다, 내가 배고프다, 내가 하고 싶다, 내가 웃고 싶다, 내가 즐기고 싶다. 즐기고 싶다 내가, 나는 티비보고 싶다 내가, ‘내가’를 생략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때문에 내가 있는 게 돼요.

너는 왜 사느냐? 내가 살고 싶으니까 사는 거예요. 여기 위쪽에 보면, 내가 여기 있으면 누가 있게 했느냐? 이렇게 되면 질문이 ‘누구야. 나를 이런 식으로 살게 해.’라고 묻는 대상이 있다고. 부처든 누구든 모르겠어요. 하여튼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누구야? 따지고 싶어 빨리 나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이렇게 바르게 사는데 누가 힘들게 해? 누구야. 빨리 나와. 질문을 누가 만든다고요? 질문을 우리가 만들죠. 질문을 언제 만들죠? 살기 어려울 때, 힘들 때, 뭔 일이 꼬일 때, 몸 아플 때, 개척교회 안 될 때, 이럴 때 질문을 내가 만들어요.

그런데 창세기부터 우리가 문제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은 질문을 만들 자격이 못 됩니다. 그 답이라는 것도 그 답을 얻으면 안 되고, 현재 우리가 움직이는 자체가 답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질문을 모르고 우리가 그냥 사니까 내 자체가 답인 줄 몰라요. 내가 만든 질문에 답이 따로 있는 줄 알고 있단 말이죠.

오늘 오후에 그런 설교했는데 복을 달라 할 때는 사람들은 복을 재산인 줄 알고 있습니다. 복을 받아서 내 재산으로 만들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 복이 뭐냐 하면, 복이 오게 되면 현재 있는 것이 ‘복이야’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복이 오게 돼있어요. 복이 와서 복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이 자체가 복이었구나를 깨닫는 것이 복이 되는 거예요.

진도 너무 빨리 갔다. 천천히 나가야 되겠는데.

성도는 내가 있는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압니다. 그런데 지옥 갈 사람들은 이것이 은혜라고 은혜란 항목을 만들어서 질문을 만들어서 ‘하나님, 이런 은혜를 주실 때만 나는 은혜라고 간주하겠습니다.’라고 따로 그걸 고집해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지금 심장 뛰게 해주시죠. 부모 있죠. 햇빛 있죠. 비 내리죠. 폭설 내리죠. 이 모든 존재 자체가 은혜의 바탕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우리가 핑계치 못한다는 사실을 그걸 자꾸 놓쳐버리고 잊어버려요. 성도도 마찬가지죠. 성도도 만날 놓쳐 버리죠. 그냥 주신 은혜를.

사람들은 받은 은혜를 은혜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한테 아쉬운 것 있잖아요. 집에 가서 그걸 연구해요. ‘내일 새벽기도 때 어떤 것을 구할까?’ 연구를 해요. 그 필요한 빠진 항목, 가게 할 때 구색을 맞춰야 되는데 ‘소주 한 병 주소?’ 하면 참 이슬 내주면, ‘그것 말고 딴 소주?’ 딴 소주 뭐가 있지? 구색이 안 맞으면 손님이 떠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살펴서 모든 구색을 맞춰야 되듯이 기도하기 전에 먼저 문제를 자기가 만들어요. 이것대로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이 하나님의 의견과 하나님의 자기 뜻이 홀라당 날아가 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 이유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밝혀지죠.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런데 인간은 여기 있다는 것, 이건 동사죠. 뭐뭐를 하고 싶다. 묻고 싶다, 그림 그리고 싶다, 축구하고 싶다. 이것을 뭐라 하느냐? 이걸 명사라 해요. 동사를 명사로 만들 때 이게 덩어리. 덩어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주체라 합니다. 이게 나에요. 나 덩어리. 안 깨져요. 아주 단단해요. 암석 같아. 오천 원짜리 사파이어 같아. 얼마나 단단한지.

그래서 이것은 꼬챙이로 쑤셔줘야 깨지지, 히브리서 4장에 있는 말씀으로 말씀이 와서 쪼개줘야 돼요. 여러분, 사람은 가라 한다고 교회 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으라고 해서 예수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자를 수 있는 것도 말씀으로만 단층 촬영하듯이 쪼개지는 거예요. 정육점의 톱날처럼 잘라지는 거예요.

말씀 아니면 잘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약에 말씀이 아니고 그냥 말, 명령이 와버리면 사람은 그걸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명령 준 사람을 모독하게 만들어요. 어려운 것 나온다. 말씀대로 지켜줌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잔소리하고 명령한 사람의 안면을 완전히 박살나게 만들어요. 경상도 말로 케라, 다 지킬 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순종을 요구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수작을 부린다고, 인간들이. 못 됐지요. 굉장히 못 됐어요. 교회가 그걸 또 이용하고.

하늘의 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복종 안 함으로써 법을 지키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소리냐. 하늘의 법이 우리를 죄인 되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불순종함으로써 현재 법을 지키는 현장을 생산해내는 겁니다. 이런 좋은 소리를 날이면 날마다 오는 소리가 아니에요.

법에 복종 안 함으로 말미암아 법이 법다운 것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는 하나의 용기, 도구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법을 지키지 말까요?’ 하는데 법을 지켜도 지킨 것이 되고, 법을 안 지켜도 지킨 것이 되니까 여러분, 니 마음대로 하세요. 이러나저러나 법은 끄떡없으니까.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라는 작품에 보면, 카프카는 그 내용을 쓰면서 법의 내용을 몰라요. 징벌이 주어졌는데 바늘로 그 사람의 죄에 대해서 그냥 죄가 아니고 바늘로 찌르면서 그 사람의 죄가 그 사람의 육체에 내용이 박히게 돼있습니다. 먹물로 해서 바늘이 자기의 육체 글씨를 남기기 전까지는 본인도 무슨 죄를 졌는지 몰라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판 위에다 바늘로 찍잖아요. 정보를 입력하잖아요. 반도체에 내용이 입력되듯이 우리가 바로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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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0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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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