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
[녹취]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
이름 : 최형중(IP:221.164.102.111)
2010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요한복음 7강 파일명: 수련회 100111g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기가 목숨을 버리는 것이 끝이 아니고 목숨을 버리고 목숨을 건지는 절차 가운데 구원될 수 없는 자기 양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다른 목자들은 양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은 다른 목자들은 목숨을 버리고,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재주가 없는 거예요. 그런 재주가.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부터 타고 났느냐? 목숨 버리고, 목숨 얻는 그런 재주를 예수님은 주특기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건 재주를 갖고 된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약속 속에, 네 목숨 버리라 내 건져줄게 라는, 아버지의 약속과의 관계 속에 목숨 버리고, 목숨 얻는 그게 들어 있는 거예요. 관계 속에.
그래서 저 사람들이 목자고, 저 삯군들이 나쁘고, 이리고 하는 그것은, 그 기준이 뭐냐하면 잘 들어야 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기준이 되어서 저쪽은 삯군목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하면 ‘우리 목사님은 삯군 아니에요. 너무 너무 교인들을 위해 희생합니다.’ 하거든요.
죽었다가 부활했습니까? 기준을, 기준을 자꾸 자기 입장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하면 좋은 목사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양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예수님 뿐이고, 진짜 양은 목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중요합니다. 좋은 교훈입니다.
진짜 양은 절대로 목사 말 듣지 않고 예수님 말을 들어요. 교인들이 목사 말을 들으면 이미 삯꾼에게 말려 든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이 목사를 믿으려고 달려들면 목사는 빨리 피해야 합니다. 싹 피해버리면 예수님에게 부딪히도록 해줘야해요. 그런데 요즘 목사는 뭔가 예수님에게 가는 인간까지 지가 나서 가지고 막으니까.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는 가운데 수단이 되어서, 병행되어서 양이 생겨납니다. 그래야 이 양은 오직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이 되요. 이미 양이 있는데 목자가 그 얼마를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건져내야 할 양과 목자 사이에는 우리 목자는 죽어야 된다는 코드가 딱 떨어 질 때 만 그런 양들이 심겨져 있는 겁니다.
왜 그런가하면 양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요청해야 하는가하면, 삯꾼 목자도 양에게 건적거려야 하고,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도 건적거려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양을 놓고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가 다 건드리도록 그런 위치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데려가게 되면 삯군 목자가 와서 자기 양이 없잖아요. 그러면 삯군 목자는 그냥 삯군이라는 정체를 못 들어내고 그냥 집에 가는 수가 있잖아요.
그러면 양이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없어요. 양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삯군은 삯군의 정체를 폭로하는 계기로써, 미기로써 양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실컷 당하고 그 다음에 선한 목자 와서 ‘아, 저 인간은 삯군이고 이쪽은 선한 목자’라는 것을 구분하는 가운데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차이를 양 자체가 알아야 되요. 그럴 때 양은 선한 목자의 코드, 그 구원의 정보가 여기에 듬뿍 담기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양이 있는데 양은 양끼리 몰라요.
양은 선한 목자가 데려갈 양인지 삯군 목자가 데려갈 양인지 몰라요. 양끼리 있어요. 김양, 최양, 박양... 있는데.
여기 분명 다 선한 목자의 양은 아니에요. 우리에 다른 양들이 있어요. 다른 양들이 있다는 것은 양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각자 맞는 속성이 있어요. ‘난 역시 삯군 목자가 마음에 들어’라고 이야기하는 양은 없습니다.
... 자기를 구원하는 양을 그것을 무슨 양이라고 합니까? 다 선한 목자죠. 어느 교회 가보세요. 우리 목사님 같은 분 없습니다. 다 그렇게 하죠. 그래서 어느 양이 ‘나는 고마워. 우리 목자는 삯군이라서 너무 고마워’하는 양은 없다니까요. 다들 삯군 목자들이 뭐로 위장합니까? 선한 목자로 다 위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뭐냐? 진짜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차이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이 어떻게 착하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 목숨을 받치면 그것이 선한 목자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진짜 양은 ‘나 같은 인간은 목숨을 받쳐야 구원돼’라고 인정하는 양만 선한 목자의 양이 되겠죠.
여기서 뽑아 낼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아는 양과 목자와 십자가와 무관한 양과 목자의 사이. 십자가를 모르는 목자와 양은 자기들끼리 아주 선한 목자입니다. 그런데 뭐가 빠졌어요. 목숨을 받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것이 빠져 있으면 자기가 아무리 선한 목자라고 이야기해도 그것은 삯군입니다.
왜 그럴까? 목숨을 받치고 죽고, 다시 찾는 계약은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와 계약 받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양을 취급 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 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하면, 요한복음 10:30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무슨 뜻일까요? 나 밖에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은 내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예요.
이 말은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아버지는 현재 나와 하나되어서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미 내 아버지로써 있다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이야기 하는 거죠.
27-28절에 봅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왜 그럴까요? 왜 이 양은 영생을 얻습니까? 양이 영생을 얻는 것은 목자 하기 나름입니다. 목자가 비록 죽어도 다시 아버지로부터 살림을 받는다면 그 목자와 함께 있는 양도 영원히 멸망받지 않는 겁니다. 목자 잘 만나야 됩니다. 목자 엉뚱한, 되살림 받지 못하는 목자를 만났다면 같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목자를 만나야 그 양도 그 쪽에 있어야 죽어도 같이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양은 안 죽는다는 말입니까? 이 양은 죽어도 산다는 말입니까? 죽어도 산다는 말이니까 죽으세요. 죽어도 사니까. 결국 목자 따라 간다는 말은 열두 제자도 목자 가는 길을 그냥 가야돼요. 십자가 지고 가야됩니다. 그래도 그들은 상관없어요. 목자가 든든하기 때문에 목자 가는 그 길이 영생의 길이기 때문에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결국 양들은 목자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거죠.
그런 소리를 하니까 돌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 11장을 봅시다. 11장에 대해서는 교재를 봅시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 16페이지에 ‘나사로는 죽을 병이 아니었다. 하지만 죽을 병이 아니기에 그 병으로 죽어야 했다.’ 죽을 병이 아니기에 그 병으로 죽어야 했다. 그 병으로 죽어도, 죽어야 죽을 병이 아닌 것을 안다 이 말입니다.
죽기 전에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은 건방진 말이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는 것은 죽어도 다시 살아 날 때 ‘아, 전에 그 병이 죽을 병이 아니고 죽어야 했던 병이구나’ 말이 이상하죠? ‘죽을 병이 아니고 한번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 날 병이었구나’를 안다 이 말입니다.
(교재)‘이것은 무엇을 죽음이냐를 놓고 예수님의 주변은 설전이 이어진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그런데 도마라는 제자는 말한다. 주님과 같이 죽자’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는 말을 도마는 예수님이 농담하는 줄 알았어요.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은 도마는 이렇게 알아 들은 겁니다. 나사로가 잠을 얼마나 깊이 잤는지 골아 떨어져서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도마는 우리도 잠을 자 보자는 식으로 ‘죽자’ 한 겁니다.
도마는 예수님과 더불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재미나는 모험을 즐기고 싶은 거예요. 도마는 예수님이 가볍게 죽음=잠자기로 처리한다고 해서 오해해서 가볍게 여긴 거예요. 예수님 농담하니까 자기도 농담한 거예요. 죽음이 잠자기를 마치 잠자기가 죽음인지 알았다 이거예요. 말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죽음이 잠자기, 그러니까 잠자기는 곧 죽음이다. 이게 다른데, 여기서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인간이 여기 있다면, 인간이 바라보는 예수님에 대한 해석은 오류가 생겨요. 예수님이 인간에게 말을 하면 인간은 그 말을 받아서 그 오류 된 해석을 가지고 주님께 되돌려 줍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말에 동의할 수가 없지요.
‘죽음은 잠자기이다’ 이 말은 맞지요. 하지만 인간이 잠자는 것이 곧 죽음은 아니에요. 이것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잠자기가 죽음이라면 얼마든지 우리는 잠을 자듯이 죽을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잠자기라는 것을 어느 층에서? 기적 층이 아니라 표적 층에서 예수님이 관여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이 관여가 되어야 죽음이 잠자기가 되는데, 도마는 아무런 관여도 없이 자기가 잠자는 것이 죽는 것인 줄 생각한 겁니다.
같이 다녀도 말이 안 통해요.
(교재16p.) “예수님 안에서 잠자기란 마치 예수님과 더불어 죽을 만큼이나 급진적인 일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잠 잔다는 말은 예수님이 안 깨워주면 그냥 골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깨워준다는 조건 하에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잠 자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그 분은 잠잡니다’라는 말은 ‘언젠가 주님께서 책임지고 깨워주십니다’는 말이에요.
그럴 경우에만 ‘저 분은 죽는 것이 아니고 잠 잡니다’라고 할 수 있다 말이지요. 그렇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누구를 증거한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통해 어떤 액션을 취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도마는 도통 그런 것을 모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우리도 잠자러 간다고요? 우리도 죽으러 가자, 애들아 우리도 죽으러 가자 이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도마의 이야기이고, 실제로, 예수님도 일을 이렇게 하시는게, 애들아 우리 죽은 나사로 무덤가에 가자, 바로 하면 될텐데. 꼭 어디를 들립니까? 마르다 마리아에게 들리죠. 두 자매가 난리 났어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 할까요. 그 동안 두 자매가 맛있는 것 다 줬어요. 잡채, 탕수육, 김밥, 만두, 손수 만든 만두, 김치 만두 온갖 다 해줬는데,
도마는 장난 삼아 죽었다 살았다 장난치고 있지만, 그 두 자매는 장난이 아닙니다. 완전히 이것은 현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대뜸하신 소리가 ‘너희 오빠는 산다’ 그렇게 하니까 마르다가 ‘얼씨구나 그런 이론은 많이 배웠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 오빠 살 것을 압니다’하면서 더욱 화를 냅니다.
‘잘 배웠습니다. 우리 주님께 신학교육 잘 받았습니다. 그걸 알았다고일부러 실험대상으로 우리 오빠를 죽입니까? 우리가 안다고? 에구 에구 에구 잘 났다! 예수님’ 이렇게 된 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마르다 마리아 거친 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섬기고, 잡채, 자장면 해 줄 때 결국은 그것은 뭔가 반대급부를 노렸다는 뜻이예요. 관심사가 내가 주님께 한 정성을 주께서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이것은 아까 요한복음 10장에서 양이 무슨 기준으로 나서야 한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기준을 봐야 될텐데, 만약에 이 양이 여전히 나에게 잘 해주면, 목사가 나에게 잘 해준다는 반대 급부를 생각하니까 이런 양은 선한 목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삯군 목자를 좋아하게 돼요. 삯군 목자가 노리는 것은, 법칙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은 사랑해주면 급뻑 넘어간다. 이 뿐이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교회 온 사람... 교인들이 오직 나만을 사랑할 때 목사가 이단이라도 괜찮아. 무조건 우리 집안 이쁘게 하면 이단 삼단도 용납할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당신의 모든 것을 허락하노라. 까짓것 나만 사랑한다면 100만원씩 월급 준다고 치고, 용서가 다 되는 거예요. 남의 교회 이야기인데.
사랑만 해 준다면, 사랑만 남겨놓고 떠난간 사람아. 사람은 사랑에 미쳐요. 무엇이 진리냐 관심이 없어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죠. 선교사가 선교지로 떠나는 이유는 기존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랑을 받지 못해서 화가 나서 간 거예요. 아프리카 가면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에 거기서 합창단 만들어서 우리 나라 와서 연주하고, 케냐 빈민국에 가서... 합창단 만들어서, ... 공연하고 비행기 태우고... 에구 에구 내가 그것을 보고, 선교라고?
삯군 목자를 양이 불러요. 왜? 삯군 목자든 어떤 목자든 내가 정하는데, 어떻게 정하냐면 나를 사랑해 주면 선한 목자고, 나를 미워하면 무조건 삯군 목자에요. 이게 교인들의 심보가 그래요. 목사가 목회하기가 아주 쉬워요. 무조건 사랑해주면 돼요. 무조건 사랑해 주면.
언제 이렇게 목사가 그 교인을 사랑하다가 언제 사랑이 끊어지냐 하면, 다른 괜찮은 양이 왔을 때 갑자기 관심사가 저쪽으로 돌린다 할 때에 이쪽 양이 화가 나는거에요. 왜 나만 사랑해 놓고 저쪽으로 가느냐 이리 되는거죠.
그래도 목사가 바쁘게 되죠. 보통 바쁜게 아니죠.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는 목자는 죽여 버려요. 말만 죽어도 사는게 아니라 실제로 죽었다가 사는 꼴을 보여줘요. 그래서 예수님이 울지요. 그리고 같이 가자. 그래서 일부러 마르다 마리아를 데리고 오빠에게 갑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비난을 하죠. 그 때 유대인들이 뭐라하냐면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현대 과학 물리학의 경우가 이래서 문제가 되는데, 썩었다. 세포가 썩었다. 썩었다고 본 것은 육을 뭐로 본거냐 하면, 이걸 고기로 본 겁니다. 고기를 냉장고에 오래 넣지 않으면 썩어 버리죠. 물리학, 의학에서 볼 때 인간의 육체는 고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정육점이 없어서 고기를 살리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고기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담는 그릇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이 고기기 때문에 남을 볼 때 고기로 보이겠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그릇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기 형상이죠. 책임지고 살립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죽은 고기도 사람이 되는 거예요. 흙에서 생령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안 찾지요. 돈이 안 되니까 찾지 않습니다. 돈이 되면 이것 연구한다고 바빠요. 돈 된다면. 죽은 썩은 고기를 사람 만들어낸다고 바쁘다니까.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하냐면 썩은 고기를 도려내고 기계로 대체하죠. 사이버인간.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로 조작되어 있는 사람, 보청기 달듯이, 이게 인간이라고, 이게 어떻게 하나님 형상입니까? 기계 형상이지. 이건 나비족이지. 아바타지, 인간이겠어요? 예수님께서 이미 육신으로, 인간의 몸으로 왔을 때 희망은 있습니다. 지금. 고기 같은 인간 속에 주님, 성령이 임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고기 같은 인간 속에 들어 왔을 때 이 육신은 말씀의 세계 속에,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할 가능성이 벌써 생긴 겁니다.
그 다음에 그 몫은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주님의 그 말씀이 우리 이름을 불러 줄 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누가 불러 줍니까? 예수님이 불러주죠. ‘빛이 있으라’ 명령을 누가 합니까? 주님은 명령하게 되면 자기 그 명령을 회수하기 때문에 그 명령에 도달되면 실패하고 오는 수는 없어요. 어떤 말씀이든 한번 내뱉은 말은 성취함이 없이 돌아오는 법이 없다 했잖아요. 성경에. 반드시 말씀에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져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빛이 있으라하면 빛이 있듯이. 나사로야 나오너라하면 지가 나오는 것이지. 좀 있다가요. 이런 것은 없어요. 고기기 때문에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죽은 인간을 늘 살려 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늘상 고기로 만들어 놓고 말씀을 줘서 말씀으로 우리르 살게 합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고기같은 우리를 매일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잠 잘 때에도.
이 말을 이렇게 하면 오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오늘 성경 2장 못 읽었는데, 오늘은 고깁니까?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공로가 늘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에 십자가의 공로로 해서 계속 사는 겁니다. 은혜 위에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사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만 은혜로 살게 하시고, 죽고 난 다음에는 예수 안에서 잠 자는 것으로 해서 은혜를 주시고.
그런데 불신자들은, 여기 품바(수련회 당시 옆 강의실에서는 품바예술협회 모임이 있었음) 이 사람들은, 여기 와서 담배 피는 사람들은, 지금 담배 피우는 이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요. 주님이 주시는 은혜인데, 저 눈밭에 눈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을 모르고, 저 햇빛과 단비 이 모든 것이 은혜로 주신 것을 모르고, 단지 품바 공연 제대로 못한다고 신에게 달려들고 하죠. 무슨 천국가서 각설이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어떤 교수는 말하기를 천국에 가면 할렐루야, 헨델의 메시야가 울려 퍼진다고 하는데, 나는 기가 차서, 아니 천국에는 작곡자가 없어가지고... 하늘 나라에는 이미 천사들이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같이 부를 뿐이에요. 우리 온 몸이, 이것을 리듬이라고 하는데,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춤을 추듯이 리듬을 타게 되면 그 자체가 찬송이 되는 겁니다. 천국 가서 우리 찬송가 252장 합시다.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자기 몸이 움직이는 것이 곧 찬송이고, 찬양이 됩니다. 왜? 전체가 영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11장에 나사로가 살고 난 다음에 그 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나사로가 실제로 살았다는 것이 국가적으로 큰 재앙이 닥친 겁니다. 나사로도 죽이려고 달려들었고, 그 다음에 참다 참다 못해서 노회가 열려서 한 사람을 죽여서 다른 사람을 살게 하자는 제사장 가야바의 의견이 있어서 예수님을 정말 참다 참다 이젠 죽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11장 50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일을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까? 가야바 제사장이 이야기했습니까? 가야바 제사장이 이야기했죠. 그런데 그 말씀이 예수님이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미리 당겨서 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어떤 차이가 납니까?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산다는 것은 가야바가 이야기하는 것은 육정 이스라엘을 말하지만 예수님이 이 말을 하실 때는 한 사람이 죽어서 예수님이 죽어서 예수님의 자녀가 산다는 식으로 말씀의 성취가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왜 꼭 죽어야 하는지 그 문제를 언급을 안 한 것 같은데, 그것은 율법이라는 기초 위에 은혜위에 은혜라고 하면 율법이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아까 말한 그런 소경이나 모든 것은 죄인이거든요.
죄인에게 있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게 되면 은혜위에 은혜가 되기 때문에 그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죄에서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율법을 주께서 이루어 내야 세상 죄 속에 있는 자기 백성이 살 수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아버지로부터 되돌림을 받는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새언약이라 하지 않고, 같은 말인데, 다른 말로 하면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새언약은 새계명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죠. 사랑. 사랑은 반드시 죽을 너희를, 내 사랑이 죽을 너희 죄보다 더 세다는 겁니다. 끝까지 너희를 사랑하겠다. 따라서 너희들이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비로소 너희들이 내 사람인 줄 알겠다, 이렇게 합니다. 새언약이 새계명이 된다는 것은 나중에 나오니까 그 때 보시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 12장 봅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가시면서.(웃는 이유: 품바협회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 늦게 시작해서 고맙네요.
여기 12장에 들어가면 가룟 유다 이야기가 나오죠. 가룟 유다 하는 이야기가 7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요. 어떤 여자가 향유를 부을 때 여자가 장사할 것을 예비하려고 부은 겁니까? 아니에요. 여자는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사랑에 붓받쳐서 그냥 받친건데 그것을 예수님이 어떻게 해석하는가하면 ‘그래, 그래 내 죽을 날을 예비하는구나’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모든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다음에 12장, 유명한 12장 24-25절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건 누구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적용시킵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이건 뭐냐 나는 내 생명을 미워하겠다, 잃어버리겠다. 잃어버릴 때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생명을 얻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현생명이 절단, 죽음이라는 것을 거치고 나야 현생명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거예요. 계곡, 죽음이라는 계곡이 있어야 하니까. 이런 계곡이 없으면 새생명으로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육신적인 것이 영의 몸으로 이렇게 탈바꿈 되려면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 죽음을 거쳐야 하느냐? 죽음을 거치면서 이 생명은 뭘 극복한 생명이 됩니까? 이제는 두 번 다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느니라. 이젠 두 번 다시 사망이 지배하지 못하는 생명이 되겠죠. 그러면 이 생명이 밀알이 되어서 퍼져버리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이 계곡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생명을 받았다면 ‘나 예수님께 생명을 받았다’고 믿지 마시고, ‘죽어도 살 수 있는 생명을 받았다’고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증거가 뭐냐? 나는 법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항상 성령이 오게 되면 반드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항상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죽어도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는 것이 항상 깔려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은 내가 아니고 바로 주님 덕분에 내 죄가 어린양으로써 살았다는 것이 이게 항상 돼야 해요.
그래서 영생, 진짜 생명 받은 사람은 내 생명이 아니고 주님의 생명, 죽었다가 넘어선 주님의 생명을 받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32-33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보이셨는가하면, 예수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떻게 죽었다가 어떻게 되살아나는가를 보이는거죠. 왜? 자기가 들려야 하니까, 들린다는 말은 이미 죽음의 모든 여건에서 벗어났다는 말 아닙니까.
내가 죽었다가 들리면 자기 백성들도, 자기 양들도 죽었다가 자기를 따라 같이 들릴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들릴 때,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은 되는데 들리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예수님이 알아서 스스로 일어납니까? 누구 몫이에요? 죽은 예수를 누가 살립니까? 아버지께서 살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