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3"11-16 (예수로 난 믿음)
Re..행 3:11-16 (예수로 난 믿음)
이름 : 이근호(IP:)
예수로 난 믿음
2003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3:11-16
3: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성경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주변으로 인간의 죄가 둘러쳐져 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십자가의 의의는 더욱 부각이 됩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보통 십자가 이야기라면 인생을 살면서 힘겹고, 처절하게 실패하고 망가진 사례를 긁어모아야 이야기가 되는 줄로 여깁니다. 흔히 '자기가 지고 간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어느 누구 할 것없이 서럽고 고생스럽던 경우들을 예를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대해서 거론하는 분위기가 세상적으로 봤을 때 비극의 현장이 아니라 도리어 축제의 현장 속에서 끄집어냅니다. 지금까지 앉은뱅이로서 구걸하는 어떤 사나이가 이 두 사도를 만나고 난 직후, 더 이상 앉은뱅이가 아니라 정상인으로 돌변했습니다.
이 놀라운 즐거운 일을 보고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수많은 사람들이 두 사도에게 축하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든 그런 상황입니다. 정말 흥겹고 신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했는지 아니면 다른 의도에서인지 갑자가 십자가 이야기를 불쑥 내던집니다.
즉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건만 사람들이 너무나도 무지해서 그분을 못알아 봤다는 겁니다. 도리어 이방인 총독이 그분을 살려주려 했건만 이 백성들은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여, 살인자보다도 못한 가치를 부여한채 그 분을 처참하게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왜 사도는 이 즐거운 마당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죄가 즐거운 마당에서도 여지없이 도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주변의 죄가 있기에 발생된 사건입니다. 따라서 앉은뱅이가 나았다고 흥겨워하는 그 분위기 속에서는 인간들의 근본적 죄성이 그대로 충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죄란, 죄인이 안죽고 계속 살려고 하는 의지,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자기 딴에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고 말들합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란 반드시 주변에 죄가 있어 그 죄로 인해 발생된 사건인 것을 잊고 있습니다.
정말 그 사람들이 십자가를 제대로 보고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죄성도 더불어 아는 그런 고리를 형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는 모르는채 자꾸만 십자가를 거론하고 십자가를 들먹이는 것은 마치 십자가를 부적이나 주술용으로 사용하겠다는 의도밖에 안됩니다.
십자가란, 인간이란 그 누구나 더 이상 살 권리가 전혀 없음을 확실히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와 함께 자기 사람을 함께 죽여 버리시는 겁니다. 죄인이기에 당연히 죽어야 하는 겁니다.
민수기에 보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길을 행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원망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원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면, "이렇게 입맛없이 사는 것이 결코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민수기 11:4-6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당연히 살아야 하는데 이왕 사는 것 재미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무슨 조치라도 내려야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 입장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죄인인 자신들을 멋지게 살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불길을 내려서 그들은 태워 죽였습니다.
흔히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상이란, 그저 자신의 존재를 정당시하는데서 출발한 환상과 상상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자기 자신이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여기고 출발하는 하나님 생각은 모두 인간들이 제멋대로 창작해낸 허구적 신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런 죄를 지적하기 위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죄는 악마가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써먹는 수법인데,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는 예수님에게는 이런 수법으로 유혹했습니다. 이왕 메시야 노릇할 것이면 대중들의 인기를 순식간에 확 모으는 방식으로 사용하라는 겁니다.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림에도 불구하고 발끝 하나 안 다치면 사람들이 얼마나 감탄하겠나라는 제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메시야 상은 이런 악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부터 되레 죽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렇게해서 무엇이 죄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자신이 어떻게든 꼭 살아남아야 한다는 오기와 다짐을 지니고 있는 이상, 전도를 하고 설교를 하고 심지어 귀신을 쫓아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입니다. 악마의 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란 '단절'을 의미하게 때문이죠. 모든 것의 단절입니다. "내가 살아남아야 되"에서부터 영속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사고방식으로부터 단절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보기에 앉은뱅이가 나은 것에 대해 축하하려 모인 이들은, 바로 이러한 영속성적 사고방식을 지니고 온 사람입니다.
12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들 축하객들 눈에는 두 사도가 자신들의 이상형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조금전까지 걷지도 못한 자가 그세 벌떡 일어나 걸아다니니 그들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사도의 능력, 이외에 그 어떤 원인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사도와 그 앉은뱅이 사이의 그 어떤 단절이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의도적으로 여기서 '십자가' 이야기를 거론하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사도방식으로 인해 예수님이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사도는 그저 증인일 따름이다는 겁니다. 사도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앉은뱅이 걷게 하지 않았다면, 그 앉은뱅이와 연관된 분은 과연 누구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은 주시다"라는 주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란 그냥 하늘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이 역사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쉴새없이 활동을 전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비록 일반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주님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구원한 자에게는 반드시 믿음을 주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앉은뱅이의 개인적인 신념이나 의지력이나 결심으로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믿음이 그 앉은뱅이에게 도달되었습니다. 그 믿음을 따라서 그 믿음을 주신분의 능력이 현실화되는 그 앉은뱅이는 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도가 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증인' 노릇입니다. 곁에서 목격자 노릇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알고 말하라고 한다고 그동안 주워들어 온갖 신학적 내용들은 나열하기 십상입니다.
그런 모습에 대해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각자 리어카를 하나씩 끌고 다니는데 그 리어카 안에서 그동안 교회에서나 나름대로 공부했던 신학과 성경 지식들이 하득 실려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지식이 행여 흘려내릴까봐 주의하면서 조심스럽게 그 무거운 리어카를 낑낑거리며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신앙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리어카 안에 담긴 성경 내용과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진짜 믿음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필요치 않게 합니다. 자신과는 단절된 상태이기 때문이죠.
지금도 늘 주님께서 쉬지 않고 활동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자신은 그 주님의 활동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가능성'과의 단절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인간이 현재 존재하고 있고, 또 그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치 않고 항상 우연적으로 발생될 뿐입니다.
만약 자신의 가능성을 주님께서 활용했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의 개인적은 권능과 능력의 효과이며 이는 더 이상 예수님의 증인의 모습이 아니라 사도 자신이 모습이요, 더 나아가서 사도는 오래 오래 살아남아야 될 정당성이 발생해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는 진정,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진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저 주님의 증인으로 머물려고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신앙이라고 우기고 간직하려 했던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착각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