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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녹취]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자유게시판요한복음

[녹취]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a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뜻에 의해서 이렇게 여러 각처에서 사시던 우리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요한복음에 관해서 더 깊숙한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같이 모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쓰셨기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오니 이 시간 우리에게 문자로 보지 말게 하여주시고 성령께서 어떤 의도 요한복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가게 하셨는지 그 내력을 저희들이 소상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안 오신 분이 있어서 시작하기 좀 껄끄러운데 그냥 합시다. 요한복음을 볼 때 요한복음으로 목회를 성공하겠다든지 요한복음 가지고 우리 가정 문제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오네.

요한복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림살이가 나아지겠다든지 요한복음 가지고 목회 성공하겠다든지 이런 의도, 사적인 어떤 문제가 있는데 이 요한복음의 어떤 구절을 통해서 따로 은혜를 받겠다든지 그러한 식으로 하게 되면 요한복음 자체가 이야기하는 것하고 그걸 우리가 이용하겠다는 것 하고 요한복음이 그걸 거부합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그걸 차버려요.

대충 괜찮은 구절 몇 개 뽑겠다는 식으로 요한복음을 다루시면 그것은 요한복음을 모독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 다 치우고 요한복음 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하는가? 그것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과 무엇과 대비를 봐야 하느냐 하면, 그전에 창세기가 있어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거기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만들 때 뭔가 창세기에 오면 개입되는 게 있어요? 그게 뭔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해서 인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볼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 중요하느냐, 인간이 중요하느냐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죠.

‘너, 인간아. 네가 중요할까, 하나님 형상이 중요할까?’ 이렇게 묻는 겁니다. 하나님 형상 때문에 너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너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동원 되었을까 묻는 겁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은 뭐가 동원됐는지 신경 쓸 것 없이 하여튼 나는 나에게 내가 중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든지 간에 현재가 내가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예를 들어서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요리할 때 집에 가서 귀한 요리 먹을 때 귀찮은 게 있어요. 그 주방장이 자기 주방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 되는데 ‘우리 식당은 보통 식당 아닙니다. 우리 식당은 특별 버섯을 가미했고, 소스는 프랑스제 뭘 사용했고.’ 이렇게 설명을 해준다고. 그러면 미식가 같으면 거기에 관심이 있겠지만 보통 손님 같으면 밥 먹을 때 그냥 가주세요.

돈 내고 음식 먹는데 여기에 초점이 있지, 이 음식이 왜 맛있어야 돼야 하는 것은 그건 주방장, 당신 관심사지, 이건 우리들 관심이 아닙니다. 지금 선보는 자리기 때문에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앞에 여자 꼬셔야 되니까 급선무지, 음식 자체는 안 중요합니다. 그냥 가주세요. 그러면 주방장 시큰둥해서 주방에 들어가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셔놓고 뒤따라 와서 모세를 통해서, 창세기를 통해서 말씀을 줍니다. 인간아.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었고. 우리는 귀에 잘 안 들어옵니다. 지금 사는 게 힘들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수월하게 살게 해달라는 그뿐이지 뭐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고, 너는 형상을 본받으라. 이것은 주방에서 노시고 우리는 우리 다급한 것, 살기 힘든 것,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 그저 우리들의 관심사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형상대로 살라는 그런 요구조건이 위에서 내려오겠지요. 만들어진 인간은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건 잊어버리고 인간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요구사항이 있어요. ‘하나님. 우리들이 하나님께 요구할 사항이 있습니다.’ 요구사항을 다른 말로 이걸 질문이라고 해요. 더 쉬운 말로 여러분 잘 아시는 기도에요.

질문을 우리가 만들 테니까 다만 이 질문에 합당한 답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 달라. 다른 말로 하면 기도는 우리가 할 테니까 하나님은 뭐만 하면 된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면 된다는 거예요. 중간에 뭐가 빠졌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올 때는 무엇을 경과해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경과해서 이걸 거쳐서 왔는데 우리 쪽에서 하나님 나아갈 때는 갑자기 뭐가 없어졌어요? 하나님 형상이 없어져버린 거예요.

주방장이 요리를 만들 때는 수입산 고급 버섯에 의미를 두고 만들었는데 우리는 그 음식 안에 있는 버섯보다 상치, 시금치. ‘이것 하나 있으면 더 주세요.’ 제가 요리사라도 ‘메인요리 맛있습니다. 이것 하나 더 줄 수 없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제가 요리사라도 기분 좋을 텐데 꼭 요리의 진수를 모르는 인간들이 ‘다꾸앙 하나 더 주세요.’라든지 다른 곁들이 반찬 있잖아요. 이것 맛있는데 더 달라. 그런 것은 시중에서 사오고 만드는 게 아니라는 소리를 대전강의에선가 들었어요. 그건 중요한 것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올 때는 반드시 거쳐서 온 경과된 형상인데,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어려운 말이에요. copy. 하나님의 복사에요. 복사는 여기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동질성. 복사를 했다는 말은 원본하고 복사물하고 유사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사성, 비슷한 게 없으면 복사가 잘못 됐기 때문에 찢어버리죠.

그래서 내가 준 흔적, 내가 준 유사성을 갖고 있느냐를 유심히 보는데 만약에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마귀가 좋아하는 짓을 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유사성을 없애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흙으로 바꿔버려요. 없었던 걸로. ‘우리 이야기 없는 걸로 하자.’ 없는 걸로 돌리는 거예요.

어렵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이 만약에 하나님 형상을 상실하면, 그러니까 복사, 카피가 되지 않으면 인간을 바로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흙으로 보냅니다. 흙으로 보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죽인다 이 말이죠. 보내는 것도 하나님과 하나님 형상 사이의 언약 의해서 계약에 의해서 만약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 형상을 닮지 아니하면 흙으로 보낸다는 것이 그 계약내용에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도 들었던 이야기인데 맞는지 모르겠어요. 타이거 우즈가 자기 부인하고 결혼하면서 네가 십 년 동안 살아주는 조건 하에 위자료를 주겠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십 년 동안은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위자료 없는 거예요. 부인은 죽으나 사나 십 년 살아야 돼요. 십 년 안 된 것 같은데 지금 위자료는 안 푼도 없는 게 돼요. 결혼할 때 계약에 십 년 동안 살아주는 조건 하에 위자료 주게 돼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사람은 하나님 형상에 대한 내막을 몰라요. 그냥 내가 여기 있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여기 있네. 내가’ 이런 식으로 살거든요. 내가 여기 있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누가 나를 여기 있게 했다는 ‘누가’를 도입시켜야 돼요. ‘여기 있네. 내가’ 하면 내가 여기 있음만 관심 있는 거예요. 모르면 그냥 넘어가요. 이런 게 있어요.

그래서 ‘여기 있네. 내가’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뭘 생략하느냐 하면 잘 보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여기 있네. 내가’에서 내가를 지워버려요. 남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있다, 내가 배고프다, 내가 하고 싶다, 내가 웃고 싶다, 내가 즐기고 싶다. 즐기고 싶다 내가, 나는 티비보고 싶다 내가, ‘내가’를 생략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때문에 내가 있는 게 돼요.

너는 왜 사느냐? 내가 살고 싶으니까 사는 거예요. 여기 위쪽에 보면, 내가 여기 있으면 누가 있게 했느냐? 이렇게 되면 질문이 ‘누구야. 나를 이런 식으로 살게 해.’라고 묻는 대상이 있다고. 부처든 누구든 모르겠어요. 하여튼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누구야? 따지고 싶어 빨리 나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이렇게 바르게 사는데 누가 힘들게 해? 누구야. 빨리 나와. 질문을 누가 만든다고요? 질문을 우리가 만들죠. 질문을 언제 만들죠? 살기 어려울 때, 힘들 때, 뭔 일이 꼬일 때, 몸 아플 때, 개척교회 안 될 때, 이럴 때 질문을 내가 만들어요.

그런데 창세기부터 우리가 문제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은 질문을 만들 자격이 못 됩니다. 그 답이라는 것도 그 답을 얻으면 안 되고, 현재 우리가 움직이는 자체가 답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질문을 모르고 우리가 그냥 사니까 내 자체가 답인 줄 몰라요. 내가 만든 질문에 답이 따로 있는 줄 알고 있단 말이죠.

오늘 오후에 그런 설교했는데 복을 달라 할 때는 사람들은 복을 재산인 줄 알고 있습니다. 복을 받아서 내 재산으로 만들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 복이 뭐냐 하면, 복이 오게 되면 현재 있는 것이 ‘복이야’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복이 오게 돼있어요. 복이 와서 복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이 자체가 복이었구나를 깨닫는 것이 복이 되는 거예요.

진도 너무 빨리 갔다. 천천히 나가야 되겠는데.

성도는 내가 있는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압니다. 그런데 지옥 갈 사람들은 이것이 은혜라고 은혜란 항목을 만들어서 질문을 만들어서 ‘하나님, 이런 은혜를 주실 때만 나는 은혜라고 간주하겠습니다.’라고 따로 그걸 고집해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지금 심장 뛰게 해주시죠. 부모 있죠. 햇빛 있죠. 비 내리죠. 폭설 내리죠. 이 모든 존재 자체가 은혜의 바탕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우리가 핑계치 못한다는 사실을 그걸 자꾸 놓쳐버리고 잊어버려요. 성도도 마찬가지죠. 성도도 만날 놓쳐 버리죠. 그냥 주신 은혜를.

사람들은 받은 은혜를 은혜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한테 아쉬운 것 있잖아요. 집에 가서 그걸 연구해요. ‘내일 새벽기도 때 어떤 것을 구할까?’ 연구를 해요. 그 필요한 빠진 항목, 가게 할 때 구색을 맞춰야 되는데 ‘소주 한 병 주소?’ 하면 참 이슬 내주면, ‘그것 말고 딴 소주?’ 딴 소주 뭐가 있지? 구색이 안 맞으면 손님이 떠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살펴서 모든 구색을 맞춰야 되듯이 기도하기 전에 먼저 문제를 자기가 만들어요. 이것대로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이 하나님의 의견과 하나님의 자기 뜻이 홀라당 날아가 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 이유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밝혀지죠.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런데 인간은 여기 있다는 것, 이건 동사죠. 뭐뭐를 하고 싶다. 묻고 싶다, 그림 그리고 싶다, 축구하고 싶다. 이것을 뭐라 하느냐? 이걸 명사라 해요. 동사를 명사로 만들 때 이게 덩어리. 덩어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주체라 합니다. 이게 나에요. 나 덩어리. 안 깨져요. 아주 단단해요. 암석 같아. 오천 원짜리 사파이어 같아. 얼마나 단단한지.

그래서 이것은 꼬챙이로 쑤셔줘야 깨지지, 히브리서 4장에 있는 말씀으로 말씀이 와서 쪼개줘야 돼요. 여러분, 사람은 가라 한다고 교회 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으라고 해서 예수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자를 수 있는 것도 말씀으로만 단층 촬영하듯이 쪼개지는 거예요. 정육점의 톱날처럼 잘라지는 거예요.

말씀 아니면 잘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약에 말씀이 아니고 그냥 말, 명령이 와버리면 사람은 그걸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명령 준 사람을 모독하게 만들어요. 어려운 것 나온다. 말씀대로 지켜줌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잔소리하고 명령한 사람의 안면을 완전히 박살나게 만들어요. 경상도 말로 케라, 다 지킬 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순종을 요구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수작을 부린다고, 인간들이. 못 됐지요. 굉장히 못 됐어요. 교회가 그걸 또 이용하고.

하늘의 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복종 안 함으로써 법을 지키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소리냐. 하늘의 법이 우리를 죄인 되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불순종함으로써 현재 법을 지키는 현장을 생산해내는 겁니다. 이런 좋은 소리를 날이면 날마다 오는 소리가 아니에요.

법에 복종 안 함으로 말미암아 법이 법다운 것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는 하나의 용기, 도구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법을 지키지 말까요?’ 하는데 법을 지켜도 지킨 것이 되고, 법을 안 지켜도 지킨 것이 되니까 여러분, 니 마음대로 하세요. 이러나저러나 법은 끄떡없으니까.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라는 작품에 보면, 카프카는 그 내용을 쓰면서 법의 내용을 몰라요. 징벌이 주어졌는데 바늘로 그 사람의 죄에 대해서 그냥 죄가 아니고 바늘로 찌르면서 그 사람의 죄가 그 사람의 육체에 내용이 박히게 돼있습니다. 먹물로 해서 바늘이 자기의 육체 글씨를 남기기 전까지는 본인도 무슨 죄를 졌는지 몰라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판 위에다 바늘로 찍잖아요. 정보를 입력하잖아요. 반도체에 내용이 입력되듯이 우리가 바로 반도체 칩이에요. 뭔가 와서 부딪쳐서 징벌을 내려보면 ‘아, 이런 죄를 짓고 있구나’를 그제야 비로소 아는 겁니다. 우리는 법의 밥입니다. 법이 지나가는 그런 바탕이에요.

법을 지키는 것도 누가 지킵니까? 법을 만드신 분이 법을 지키지 법을 만들지 못한 사람은 법을 지킬 수 있는 힘도 권한 같은 것도 없어요. 그냥 법을 만드신 분에게 당함으로써 법의 지킴에 동참하게 됩니다.

다시 봅시다. 누가 나에게 ‘내가 여기 있다.’라는 이 동사가 주체가 되죠. 다시 봅시다. 동사 다음에 명사가 되고, 명사가 주체가 되는데 만약에 이 주체가 문제가 생겼다. 살기 힘들다. 그러면 명사를 통해서 누구야, 날 힘들게 하면서 여기서 동사를 찾죠. 새로운 힘을 찾아서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그래서 또 다시 가게 되면 하나님이 은혜를 줬다고 생각하면 그 은혜가 다시 굳어져서 나의 주체의 하나의 요소로써 딱딱하게 들어오겠죠.

딱딱하게 들어오면 뭔가 주체가 문제가 있어서 기계가 안 돌아가면 흐물해지면 딱딱한 주체가 동사로 변하죠. 동사로 변하면 또 여기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다시 딱딱한 주체로 바뀌고. 이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어요. 보통 문제가 아니죠. 그러니까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형상, 어쩌고저쩌고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으라’ 할 때 신약성경에서 에베소서에 나오죠. 빛의 자녀들아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으라. 어둠에 속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할 때 하나님 형상을 본 받으려면 이 인간의 자리를 떠나야 되죠. 인간의 자리를 떠나서 이쪽 하나님의 형상 자리에 포섭이 돼야 됩니다. 여기에 함몰돼야 돼요. 정복당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형상 자리에서 올라갈 때 그때야 보이는 하나님은 바로 저 밑에서 형상 밑에서 불평불만으로 외치던 하나님하고 이쪽 위에서 보는 하나님하고 달라요. 여기는 감사밖에 없어. 감사와 찬양이 나오죠. 하나님 형상대로 했던 여러 가지 피조물 중에서 대표적으로 천사가 있어요. 천사는 육체는 없는데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 형상대로 여러 가지 형상이 있습니다.

천사가 하는 일이 뭡니까? 이사야 6장에서 날개 여섯 개 가지고 뭘 합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러죠. 완전히 하나님이 주신 동사밖에 없어요. 자기 주체되는 명사는 거기 없습니다. ‘뭘 할까요’ 이것뿐이에요. 동사에요. ‘주여, 뭘 할까요’ 이것뿐이지 ‘뭘 가질 수 있습니까, 뭐가 내 것입니까, 어디서 어디까지 내 것이고 어디까지 저 사람 것입니까?’라는 그런 구분이 없어요.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뭘 할까요. 그걸 디모데전서에 보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라 돼있죠. 이사야 보고 복음을 전하라. 제가 갈게요. 그럴 때 이사야 본인의 뜻은 완전히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네가 가봤자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그 할당 업무는 이사야 자기가 지어낸 거예요? 아니에요. 이사야는 ‘제가 할게요’라고 했을 때 자기가 해야 될 업무에 대해선 지침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님 형상 되시는 예수님 사이에 결정된 겁니다.

다만 이사야는 장차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이사야가 맡아하면 되는데 그게 뭐냐?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일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똑같이 벌어질 일을 이사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그런 역할을 하죠. 동사에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가끔 명사 쪽으로 오다가 호되게 질책 받죠. ‘주님 나 못하겠습니다.’ 더러워서 못해요. 바른 소리하는데 욕한다고 하지 않나. 우리 노회 목사님 가운데서 그런 사람 많을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다가 뒤에 단서가 붙어요. ‘더러워서 못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싶지만은 성령이 임하니까 어쩔 수 없이 ‘제가 하겠나이다’ 이렇게 나와요. 혼자 삐졌다가 혼자 깨졌다가 난리를 쳐요. 누가 옆에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혼자 회개했다 이래요.

바로 이 인간 층에서 위층, 형상 층으로 올라가는 이것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주제가 바로 이적 층에서 표적 층으로 옮겨가요. 이적 층이라 하는 것은 대전강의에서 제가 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어떤 소문이 돌았느냐 하면, 사도에게 가면 교회에 가면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도 고치고, 귀신이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사도가 있는 데로 몰려왔어요.

이런 현상은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 전하실 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모조리 전부다 몰려와서 혜택 입겠다고 했는데, 그 혜택이라는 것은 본인이 원했던 본인이 아쉬워했던 것을 그들은 찾고자 했죠.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 하고 아랫배가 배불렀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따라왔을 때 예수님께서 휙 돌아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죠. ‘왜? 왜? 왜 왔는데?’ 할 말이 없지요. ‘떡을 먹고 배불렀구나.’ ‘맞습니다.’ ‘기껏 찾는 것이 썩어질 것 원하는구나.’ ‘맞습니다. 썩어진 거라도 주시면 고맙습니다. 귤이라도 하나 주시면 고맙습니다.’

내가 주는 이적이 아니고 내가 주는 것은 표적이다. 아래층, 인간 층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서있는 분, 예수님이죠. 이 표적 층에 들어오게 되면 놀랍게도 이적 층과 표적 층은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가 되지만 인간들에서는 이게 반대가 돼요.

‘기적을 보여줘.’ 이건 기적 층이죠. 표적은 뭡니까?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내가 죽어서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이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이다. 그들은 표적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아래층에서 당신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니까 우리 인간들끼리 소통하는 것. 소통이라는 주제가 들어가는데, 서로 소통하자. 소통하는 걸 달라. 우리가 아쉬운 걸 달라. 이것 주면 믿겠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베풀어버리면 그들은 표적 층을 경과하지 아니하고 바로 하나님 층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 하나님은 계시지도 않은 있지도 않은 그런 하나님이 돼버려요. 기적 받고 지옥 가고. 꼴 좋~습니다. 희한하게 돼있어요.

문둥이 열 명 가운데서 아홉 명은 어떻게 됐습니까? 눈 뜨고 지옥 하고. 눈 감긴 채 지옥 가나 눈 뜨고 지옥 가나 지옥 가보면 동쪽 문으로 들어오나 서쪽 문으로 들어오나 별 차이 없습니다. 들어오면 전부다 사우나에요. 뜨끈뜨끈해요. 여기 완전히 205호 같아. 뜨끈뜨끈해.

이것이 바로 창세기를 진짜 수천 번 읽어도 보는 관점이 ‘여기 있다 나’ 또는 더 나가서 ‘내가 여기 있는데 왜 힘든가? 누구야.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게 책임져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었잖아. 이쪽이 뭐라고 합니까? ‘왜 심어놨어?’ 교회 처음 온 사람들 만날 묻는 게 그거잖아요.

선악과라는 위험한 요소를 제거해줘야 그게 사랑의 하나님 아니냔 말이죠. 세상에 지뢰 묻어놓고 지뢰 밟았다고 우리 책임이고. 국가에서 연금도 안 주고. 지뢰를 빼줘야지. 세상에 애들 노는데 뜨거운 물 놓고 애 다쳤다고 애들 책임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나오죠. 말이 안 되죠. 하나님은, 네가 말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묻는 놈을 위하여 지옥을 만들어 놨다. 칼 바르트 그런 이야기했죠. 칼 바르트가 선악과 모르기 때문에 핑계 삼아 이야기한 거예요. 선악과 왜 심어놨느냐고 따지는 사람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어 놨다고 하는데 본인은 지옥을 잘 안 믿는 것 같아.

이적 층에서 표적 층을 경과해서 하나님 쪽으로 경과된다는 것이 요한복음 전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는 표적이 일곱 개인가, 여덟 개인가 그건 세는 사람 마음대로니까 중요한 건 아니니까 하여튼 표적과 표적의 연결고리로써 복음을 설명하고 있어요.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표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내가 여기 있다’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문제를 끄집어내도 답을 끄집어내도 문제가 문제 같지 않고 답도 답이 아니란 말이죠. 진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창조의 원리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문제를 기도를 해놓고 응답도 자기 마음대로 응답이라고 규정지은 그런 응답도 아닌 걸 응답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실컷 응답하고 문둥이 아홉 명 지옥 가고 한 명만 돌아왔죠. ‘주여, 죄인입니다.’ 하고 돌아온 거예요. 눈 떴으면 ‘잘 나았군요.’ 이렇게 와야 될 건데 베드로가 눈 뜨고 난 뒤에 ‘죄인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마치 베드로처럼 고기 잡아주니까 ‘주여,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하는 것처럼.

‘내가 아래층에서만 내가 하나님 이용해서 아쉬운 것만 챙기려는 이적 층에만 머물러있던 나밖에 모르는 딱딱한 주체에 이것이 나였습니다. 이것이 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라고 고백한 거예요. 그러나 그 고백했다고 표적 층으로 올라가는 건 아닙니다. 그것 했다고 구원해주는 건 아니에요. 그거는 일의 개시죠. 일이 슬슬 개시되는 거예요. 드디어 조짐이 왔구나 되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가 겪어야 될 그 죄라는 것은 아직도 멀었어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법이 되기 때문에 그 법과 접촉하는 순간순간 베드로의 육신에서는 무엇이 죄인가가 바늘로 새겨져야 돼요. 그래서 나중에 끝에 보면 베드로 전체가 죄 덩어리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배신은 다 하고,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는 다 지었습니다. 마치 다윗 같아.

여기 그림 그리시는 화가 분이 계시지만 야외 나가서 캔버스를 걸어놓고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데, 화선지나 도화지가 바람에 자꾸 펄럭펄럭 거리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그러면 묶어놓고 그림을 그려야 되겠지요. 그러면 하얀 도화지가 나중에 시커멓게 되겠지요. 도화지는 자기가 하얗다는 걸 고집을 해요. 나는 하얗다, 나는 착하다, 나는 깨끗하다, 나는 죄 지은 적 없다, 나는 성령 받아서 새사람 되었다. 만날 자기가 하얀 걸 주장하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표적 층으로 데려갈 때는 전체를 시커멓게 만들어서 데려가는 겁니다. 왜? 여기서 무엇이 기다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죠. 시커멓게 돼야 예수님의 준비된 복음이 가치를 발휘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래층에선 뭘 노리느냐 하면, 내가 십자가 믿어줄 테니까 내 원하는 걸 내놓을 거야, 안 내놓을 거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적어 놓으세요. 중요하니까. ‘내가 (뭐뭐) 해줄 테니 내가 원하는 것 그 무엇을 주시렵니까?’ 이렇게 되더란 말이죠. 그럼 이 괄호에다 어떤 걸 집어넣어요? 내가 십자가를 믿어줄 테니, 내가 회개해줄 테니, 내가 교회 가줄 테니, 내가 반성해 줄 테니, 내가 성령을 받아줄 테니, 정작 내가 원하는 것, 천국 보내주렵니까, 내가 복 붙게 해주시렵니까, 교회 안 다니는 부모 교회 나오게 해주시렵니까? 이런 게 붙는 거예요. 이건 흥정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사람하고 흥정합니까?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렇게 흥정할 것 같으면 아예 사람 만들지도 않았어요.

경찰서에서 범죄자가 죄 지어놓고 형사하고 흥정합니다. 풀어주면 마약 두목 알려줄 테니까 감량해주시고 풀어주렵니까? 그런데 이미 두목은 잡혔는데, 두목이 어디 있는지 아는데 흥정할 필요가 없지요. 죄 하나 더 추가요 하고 꿀밤만 하나 더 맞는다고. 옛날 영화에 보니까 기록에다 뭐 쓰는 게 있어요. 성질 급한 취조원이 이것으로 머리를 치는데 요샌 컴퓨터로 치기 때문에 자판으로 박는지 컴퓨터로 때릴 순 없고.

내가 뭐뭐 해줄 테니까 정작 내가 원하는 것 해주시렵니까? 인간들이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세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선악구조에서 했기 때문에 선악구조에 있는 인간을 생명구조로 빼내기 위해서 주께서 오셨기 때문에 선악적으로 더 선했느냐, 더 악했느냐 그것은 주님한테 아무 문제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행위에서 대해서 자기 행세에 대해서 신경 쓰는 건 자기밖에 없어요. 아, 이것 기쁜 소식인데~

평생토록 교회에 속아 넘어가서 이런 짓 하니까 저주 받지요, 이런 짓 하니까 벌 받지요, 이런 짓 하니까 자녀가 대학에 또 떨어졌지요, 이런 짓 하니까 몸이 아프죠. 만날 교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자기 한 행세에 대해서 바짝 신경 쓰도록 그렇게 세뇌 받았어요. 정작 주님은 관심도 없는데. 목사들이 관심 있죠. 압력을 가해야 돈이 나오죠. 눌려야 지갑이 열려요. 지갑과 누르는 것은 비례해요. 바짝 눌러서 압력을 가해야 지갑이 열린다고.

그래서 우리교회는 누르는 게 없으니까 지갑이 안 열려. 배짱이라. 전부다. 벌써 오년 째 열한 시 반에 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도 점점 늦어지고 있어요. 열한 시 반에 왔다, 열한 시 사십오 분에 오는 사람 있어요. 그럼 나는 비례해서 설교 늘려버립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설교 더 하겠습니다.

여기 성재필, 처음에 올 때 다른 교회처럼 열 시 반에 오는 줄 알고, 점점 가만 보니까 분위기 파악이 되서 열 시 반에 오는 건 자기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열 한 시 돼야 와요. 슬슬 익숙해져요. 아예 몸에다 바늘로 벌써 찍혔어.

여기 이적 층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사는 게 힘들어요. 이미 주님의 저주받은 상황 속에 저주받은 몸이기 때문에 이적 층의 관심사는 내 몸 편한 게 관심이에요.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나 편하게 해주면 그게 구세주야. 부처고 뭐 공자고 따지고 묻지도 않고 하여튼 내 원하는 대로 해주고, 내 몸만 편하게 해주고, 내 소원대로 이루어주고, 비전과 내 꿈만 이뤄주면 무조건 좋은 하나님이에요.

여기서 응답받는데 항상 거래, 흥정이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행함이죠. 내가 뭐뭐를 해줄 테니까 그 반대급부로 내가 원하는 걸 내놔라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요구를 할 때 인간들이 요구하는 게 있어요. 여기서 선악논리가 개입됩니다. 이건 뭘 요구하느냐 하면, 내가 악에서부터 점차 멀어지고 선한 쪽으로 갈 테니까 그 반대급부로 나에게 선한 자에게 주는 축복을 나에게 보상해달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술을 끊는다든지 담배 끊고, 예배시간에 일찍 오고, 십일조도 제법하고 이렇게 해줄 테니까 그 대신 내가 원하는 걸 달라는 거죠.

여기가 내가 뭔가 해줄 테니까 이거는 하나의 인간의 본성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여기에 내가 원하는 것 이건 자기 나라죠, 무슨 천국입니까? 무슨 주의 나라에요, 지상의 나라지. 내가 원하는 게 왜 있어야 됩니까? 그거는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게 내가 원하는 것. 더 나아가서 내 가족이 원하는 것, 내 자식이 원하는 것, 내 남편이 원하는 것 자꾸 ‘내가’를 집어넣어요.

제가 오후 마치고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설교 마치고 그걸 요약해서 A4 두 장으로 집에 가서 대충 정리를 해요. 보통 목사님들은 다 해놓고 설교하잖아요. 저는 설교 다 해놓고 녹취해요. 설교문 작성부터 먼저 하는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토요일 설교문 작성하면 토요일 은혜 받은 것이지 주일날 은혜 받은 게 아니잖아요. 자기는 은혜 못 받고 다른 사람 은혜 받으면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요한복음을 같이 봐야 되니까 토요일 건 잊어야 돼요. 하고 난 뒤에 그걸 작성을 하는데 그때 설교 안 한 내용이 들어가요. 그래서 여러분 그것도 보셔야 돼요.

오늘 오후에 복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복을 같이 받으면 복이 안 된다 했어요. 인간의 심리가. ‘복 주옵소서’ 해서 복을 줘버리면 사람들은 복 받은 걸 생각 안 하고 대번에 나만 받았는가 봐요. 남하고 같이 받으면 복 안 받은 거예요. 신경질 나는 거예요. 특별나게 받아야지.

여러분들이 만약에 변호사 일 년에 이십육만 명 뽑는다면 그게 고시겠습니까? 원서내면 다 합격인데 그게 고시겠습니까? 누구네 가문 삼대독자 고시됐다. 붙이겠습니까? 원서내면 다 되는데. 아니잖아요. 꼭 남이 안 가졌는데 나만 가질 때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 의미가 보편화에 함몰되지 않고 돌출되게 돼있어요. 그 돌출을 철학자들을 이 사회에서 말하는 주체라 해요. 나만의 세계, 나만 돌출 될 때.

이번에 계장 열 명 가운데 과장 진급 열 명 다. 이러면 축하할 일이 없습니다. 이번에 계장 열 명 가운데 과장된 사람 단 한 사람. 이러면 다른 쪽에서 ‘과장님. 입에 잘 안 붙는다.’ ‘아이고. 과장님 축하합니다.’ 뭔 뜻이에요?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됐는데. 이런 뜻이거든요. 시기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이 주체라 하는 것은 같이 있을 때는 주체가 아니고 돌고래처럼 톡 튀어나와야 돼요.

참 사람들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상한 버릇이 있어요. 올해 같이 취업에 힘든 해가 없었다. 하거든요. 그것 내년 되면 후배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그래도 형님 때가 제일 한창이었습니다. 우리에 비하면 훨씬 수월했습니다.’ 하여튼 자기 때가 제일 힘들고, 자기 때가 제일 살기 어려웠었고 이래요. 그냥 같이 묻혀가기 싫다는 거예요. 튀고 싶다는 거예요. 축복이란 뭐냐? 튀는 거예요.

사람이 노름하는 이유가 튀려고 노름해요. 그걸 존재의 의미라고 합니다. 뭔가 튀려고. 처음에는 돈 보고 도박하다가 나중엔 자기가 다 쓸었다는 것에, 상대방을 꺾고 내가 거기에 돌출했다는 그 쾌감에 도박에 빠져요. 그런데 아직도 술 먹는 이유에 대해선 모르겠어요. 왜 술은 혼자 먹어선 안 되는지. 왜 다같이 먹는지. 아마 다같이 망할 때 자기 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같이 섞이려고 하는 모양이야. 그냥 없는 걸로 여기는 거 보니.

내가 줄 테니 정작 원하는 나를 뭐로 바꾸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줄 테니 정작 내가 원하는 이 해답,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시는데 이게 뭐냐?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내 모든 걸 드릴 테니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하옵소서. 이 정답 외에 하나님은 성경에서 준 적이 없습니다.

그거는 어디 가야 되느냐 하면, 형상은 그냥 받아버리면 또 내가 형상을 가진 게 되기 때문에 이건 이적 층에서 주지 않고 표적 층에서 제공해요. 표적 층에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가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앞에 등장하는데 이 분은 우리의 의를 위해서 피 흘리신 분이고, 우리는 시커먼 죄인으로 서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자체가 형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형상을 형상답기 위해서는 그 분 앞에 우리는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이 하나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영원한 계약, 언약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만약에 우리가 지키면 어떤 논리에 빠지느냐 하면, 하나님 내가 언약을 지켜줄 테니까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걸 달라고 돼버리면 이것은 앞에 언약을 지킨다는 그 언약은 착각한 언약, 잘못된 언약이에요.

내가 십자가 믿어줄 테니까 이것 달라는 이 십자가는 엉터리 십자가에요. 십자가 믿어줄 테니까 구원해 달라. 이거는 구원이 아니에요. 십 원도 아니고 팔 원도 아니고. 회개해줄 테니까 달라? 이건 회개도 아닙니다. ‘내가 뭘 할 테니’ 자체도 없애주세요. ‘내가 뭘 드릴 테니’ 이걸 없애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께서 아예 삼켜버리소서. 중얼거리고 나불거리는 나 전체가 아예 주님의 소유가 되게 하옵소서.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나 살고, 나 죽는데 있어서 내가 관여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건 주님의 소관이지 제 소관 아닙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그 형상을 입은 존재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창세기 1장에서 주께서 원하시는 바에요. 이거는 죄 지을 때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죄 짓기 전부터 주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하는 그런 명령부터 시작해서 이미 그것이 확립이 돼있었어요. 그 구조가.

그걸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더 복잡하게 됐지요. 일이. 더 꼬이게 됐지요. 그걸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배후에 있던 악마까지, 뱀까지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 작업에 드디어 참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악마의 종이 되어서 이제는 악마와 같이 한 패가 되어서 하나님 형상되는 예수님에게 대드는 그런 적의, 하나님의 원수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주께서 화목제물로 피를 흘리셨으니. 그 피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도 뭐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된다 했거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어떻기에 주께서 피를 흘려야 됐는가를 늘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알려면 딴 데 서면 안 돼요. 예배당 앞에 서면 찬송 부르면 안 되고, 뭐 앞에 서야 됩니까? 피 앞에. 그것도 그 피도 예수님이 흘리신 피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이 거기에 등장하는 거예요.

만날 상상한 하나님 상상해서 눈 덮인 곳 사진 찍어서 예수님 앞에 서 봐야 그거는 백설공주 계모가 만날 거울보고 하는 소리,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예쁘냐?’ 아예 문제를 지가 만들어. 거울이 할 말이 없게 만들어요. 예쁘다. 누가 더 예쁘냐? 내가 예쁘다고 똑같은 소리거든요. 그래서 거울도 자기 깨질까봐 겁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성에서는 제일 예쁩니다.’ 나중에 참다못해서 ‘이 성에서는 왕비님이 예쁘지만 이 성밖에는 모르겠는데요.’ 장담 못하겠는데요. 그래서 말 지혜롭게 해서 거울 안 깨졌어요.

그래서 왕비의 그런 질문 자체가, 다시 합시다. 인간은 질문은 통해서 뭐가 확인된다? 자기 주체가 된다. 그러면 질문을 받을 사람이 있어야 되죠. 질문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웃 또는 타인 또는 가족이라 합니다. 이것도 아닌 사람은 강아지. 집에 강아지 키우는 사람 있지요. 물어야 돼요. ‘강아지야. 이 집에서 누가 제일 너를 예뻐하지?’ 왈왈. 옳지.

이렇게 사람이 늙어서 제일 괴로운 것은 질문할 사람이 없다는 고독이 제일 힘들어요. 여기 한 나이 하시는 장로님 계시죠. 고독이 괴롭지 않습니까? 배우자가 죽는데 자기가 힘든 이유는 이렇게 잔소리할 대상이 없다는 거죠. 물어서 다시 돌아와야 주체가 성립되는데 물을 수 없으니까 아무에나 묻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음녀라는 게 바로 그거에요. 음녀라는 것이 정해놓은 남자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이 놈 집적, 저 놈 집적. 뭘 가지고? 힘 가지고. 이것이 이 세상의 현상을 보여줄 때 현상은 이 세상은 내가 누군 줄 모르고 흘러 유동하는 흘러 다니는 주체자들의 집합인데 그것이 짐승의 힘에 의해서 부유하는 떠다니는 그런 주체의 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원수가 되는 이 세상의 짐승의 세계라는 거예요.

종잡을 수 없어요. 그냥 동사만 있어요. 내가 누군지 동사. 동사는 있지만 동사에서 명사로 나가는 주체라 하지만 이거는 한시적이고 일시적이에요. 다시 완전히 성질 돌아버리면 대번에 질문 대상을 바꿔치기해요. 자기 질문대상을 바꿔치기 하면 주체 본인도 바뀌어요.

그래서 목사가 어느 교회에서 교인들 표정을 살피고 설교하다가 또 다른 교회 가면 여기서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 복음만 전하다가 복음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 아닌 걸 전해버려요. 목사가 왜 그러냐 하면, 타인들 통해서 밥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 왜 그러느냐?’ 하면 몰라. 주체가 흐리멍덩해요. ‘당신 왜 변했어?’ 하면 ‘인간은 원래 변하는 것 아니에요?’ 복음은 변하지 말아야지. 결국 그 사람은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니고 ‘나는 복음을 전할 테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목사로서 노후대책 되게 하옵소서.’ 결국 하나님 상대로 흥정을 하다가 흥정이 잘 안 먹히니까, ‘내 식대로 그냥 먹고 살자.’ 이래 되는 겁니다.

이걸로 첫째 시간 마치자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a.hwp (59.0K), Down: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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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