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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12. 25) 1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09. 12. 25)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12. 25) 2-1

오늘 강의는 에스겔 2장 4절부터 하겠는데, 그 앞부분인 1장에 대해서 좀 더 언급하면, 1장의 내용은 신학자들이 거의 손을 못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장에 나오는 내용이 너무 허황되고 마치 일본 만화책에 나오는 기괴한 현상, 불이 붙은 마차 위에 어떤 노인이 타고 앉았는데 그분이 하나님이다.

불이 붙은 마차인데, 그 마차 바퀴가 사방으로 굴러가고 그 마차에 어떤 형상을 가진 분이 앉아 계시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지요.

에스겔이 왜 이런 계시를 받았느냐? 이것은 이렇습니다. 창세기가 있고 이스라엘 나라가 등장하고 이 나라에 다윗이 성전을 세웠는데 이 성전이 깨질 판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입니다. 보통 역사로 돌아가면 뒤로 돌아가죠. 에스겔에서 성전으로, 성전에서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에서 창세기로 돌아가는 법인데, 창세기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다면, 즉 에스겔 바로 위에 창세기가 있다면 이것은 뒤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기억형상 합금’에 대해서 들어보셨어요? 금속인데 본래의 형상을 기억하는 그런 금속. 여성들 브래지어를 만들 때 이것을 사용해서 만들면 가슴의 모양을 기억해서 브래지어가 그 모양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땅이 있는데 땅위에 사람이 살잖아요. 그런데 땅 자체가 휘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땅은 평평하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만약 땅이 휘어져서 덮친다면, 혹은 과거가 지금을 덮친다면 이것은 정말 기괴한 일이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잘해 봐라. 다시 한 번 기회 줄게.” 보통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은 없고 바로 창세기에 고자질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평평하던 땅이 휘어져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뭉개집니다.

아까 돼지고기를 쌈에 싸먹었잖아요. 배추에 쌈을 싸면 고기는 어디 있어요? 고기는 쌈 속에 들어가 있지요. 이래서 이것을 만약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 안에 들어있는 이스라엘도 같이 쓰레기통에 들어가지요. 그렇다면 인간들의 문명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죠. 문명이 하나의 돼지고기 삼겹살이라면 그 문명이라는 것이 기껏 땅이 안전하다는 조건 하에 문명을 세우는데, 땅이 만약 흔들리고 휘어진다면 그 안에 인간이 세운 문명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피]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1945년 8월 11일 히로시마의 어떤 학생이 숙제를 잘 해서 신나게 학교로 가고 있었다. 그 때가 오전 8시 10분쯤이었다. 그런데 몇 분 후에 원자폭탄이 터졌습니다. 그러면 그 학생이 숙제 잘 해서 오늘 선생님에게 칭찬 받겠다는 그런 기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용없지요. 그냥 원자 폭탄에 다 날아가 버리니까.

이 사적인 것, 어떤 소녀가 숙제를 잘해서 칭찬 들어야지. 할 때 소녀가 보는 지평은, 어제 선생님 말씀 듣고 숙제 잘 해서 칭찬 받는 내 모습. 이걸 예상하고, 이것이 미래지요. 현재는 여기고, 과거는 어제 숙제를 내 주신 선생님. 현 시점에서는 이것이 강조되겠지요? 딴 생각 안 하잖아요. 2012년에 지구가 어떻게 변하고 그런 생각 없단 말이지요. 오직 숙제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원자 폭탄이 터져서 이 소녀의 현재가 달아나니까 이것과 더불어 그가 기대했던 미래도 날아가고 그가 간직하고 있었던 과거도 다 날아가 버리죠. 제 말 맞지요? 실제로 원자 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이 소녀가 생각했던 것, ‘숙제 잘 해서 선생님께 칭찬 받아야지.’ 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내가 사는 이 땅(히로시마)은 내가 숙제 검사 받을 때까지는 단단하고 고정적이고 평평하다는 것을 따지지도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요. 그런데 그곳에 원자 폭탄이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은 오늘날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죽는다든지 이럴 경우에 죽은 사람은 그렇다 치고, 신랑 될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보낸 혼수는 어떻게 하고.

베드로후서(3:12)에 보면 땅이라는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했습니다. 마른 오징어를 불에 구우면 말려 올라가지요.

이스라엘은 이 땅을 책임지는 자들이에요. 이스라엘이 출현했다는 말은 현재 다른 나라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민족에게는 묻지도 않고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물어서 만약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땅 자체가 말려서 타버려요. 이게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 지금 있는 땅은 다 녹아지고 없어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중심이 되는 이유가 뭔가? 다른 민족에게는 땅이 멸망하지 않도록 책임을 맡긴 일이 없는데 왜 이스라엘에게는 ‘네가 잘 하면 땅이 유지되고, 네가 잘못하면 땅 자체가 녹아진다.’고 했는가? 정답은 이스라엘 안에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과 이스라엘이 어떠한 관계냐? 이런 예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회사에 회장 아들이 유학을 갔다 와서 기획실장에 임명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친구를 불러서 대리로 자기 회사에 (낙하산)취직을 시켜놓았습니다. 이 아들이 일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 회장인 아버지가 보고 있습니다. 이 아들이 장래 이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획실장 덕분에 취직을 한 이 대리는, 힘 있는 친구(기획실장) 이름 팔아서 회사에서 큰소리 치고, 술집에 가서 외상으로 술 마시고 행실이 엉망입니다. 그러면 그 대리의 행실에 대해서 회장님은 누구한테 따지겠습니까? 아들한테 따지겠지요? ‘네 친구 그놈 행실이 엉망인데, 네가 그 친구 어떤 사람인줄 알고 취직시켰나?’ 이렇게 되면 기획실장은 ‘내 친구가 그럴 줄 몰랐습니다.’ 하고 그 친구를 잘라버리지요.

주의 이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고, 예수님 친구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제대로 못했을 때 주의 이름에 합당하게 이것을 잘라버리고, 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전위로(앞장세워서) 이 땅을 책임지는 책임자로 삼습니다. 이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이름이 어디 있느냐? 주의 이름이 다윗 언약에 의하면 성전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망하면 뭐도 깨져야 됩니까? 성전도 같이 깨어져야 되지요. 그런데 주의 이름은 반드시 어디에만 계시느냐 하면 성전에만 계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는 하나님의 성전 이외에는 없어요. 하나님의 집에만 계십니다. 우리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서 자잖아요. 하나님의 집이 성전이에요. 성전을 만들어 놓았지만 이스라엘이 제대로 못해서 성전이 깨지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새로 만들어서 여기에 하나님이 계셔야 되는 겁니다.

에스겔 당시의 성전은 건축물(부동산)이에요.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사람으로 바뀌어요. 이렇게 바뀔 때, 바뀌는 중에 성전 될 인간을 ‘인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호칭했습니까? “에스겔아!” 이렇게 하지 않고 “인자야!” 라고 했어요. 참 이상하지요?

2장 1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고 했지요. 그리고 에스겔 말고 또 사람보고 인자라고 한 곳이 있습니다. 구약 선지서에서. 다니엘에서 그렇게 부릅니다. 다니엘에게 역시 “인자야!”라고 불러요.

그러면 ‘인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신약에 오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가르쳐 ‘인자’라고 하지요.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는 ‘인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 또는 ‘예수님’이라고 하지요. 또는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부르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인자’라는 호칭으로 왜 우리가 부르면 안 됩니까?

‘한나’(김을수 집사님 장녀)는 집에서도 ‘한나’고 남들도 ‘한나’라고 불러요.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자기 호칭과 사람들이 호칭하는 것이 이렇게 달라요. 이것을 따져본 적이 있습니까? 이상하다고. 예수님이 본인을 ‘인자’라고 한다면 우리도 같이 ‘인자님!’ 이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허용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자’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인자’에 합당한 일을 해야 될 분을 ‘인자’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인자’라고 부를 때는 사람은 장차 오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일을 앞당겨 하는 사람에게만 ‘인자’라는 말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붙일 수 없어요. 이것도 모르고 이문열 씨는 [사람의 아들(인자)]이란 제목의 소설을 내 놓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이 자신보고 "인자"라고 부르는 그 내막에 대해서 '인자'의 기능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그 호칭을 부르면서 예수님의 세계에 끼어드는 것을 예수님이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인자의 세계란 예수님 혼자만 가셔서 성취해야 될 세계입니다.

에스겔 1장 26-27절을 봅시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이게 뭐냐 하면, ‘불붙은 마차’ 이게 1장 13-18절에 나와요. 그런데 다니엘 7장 9절에 보면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그리고 13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 에스겔 1장 26절에 나오는 사람의 형상을 지닌 어떤 분이, 다니엘에 오면 그것이 점점 뚜렷하게 드러나요. 다니엘에서 ‘인자’가 누구지요? 다니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닮은 게 다니엘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이 누굴 닮았단 말입니까? 다니엘을 닮은 거예요.

닮기는 다니엘을 닮았는데 하는 일은 다니엘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일을 앞당겨서 하게 되고. 장차 오실 예수님은 인자인 다니엘을 닮았고. 왜? 다니엘도 인자요 장차 오실 예수님도 자기를 인자라고 하시니까. 그러면 다니엘과 예수님이 코가 닮았습니까, 눈이 닮았습니까?

다니엘은 그냥 ‘인자’가 아니고 ‘고난 받는 인자’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하면, 하늘에 계신 ‘주의 이름’이 아예 역사 속에 들어올 때는 전에는 성전을 통해서 들어 왔는데 지금은 ‘인자’라고 부른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오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길게 설명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될 때 우리 딸처럼 된다든지 우리 아들처럼 된다거나 이명박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정해놓은 분이 있어요. 정해놓은 사람처럼 되는데 그 사람을 정하기 전에 먼저 이름부터 정했어요. 그것이 바로 ‘인자’인데, ‘인자’라는 이름을 먼저 만들어놓고 ‘내가 너처럼 올게’ 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에스겔, 다니엘 시대에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과 다니엘이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습니까? 미움을 받았지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에스겔 2장 끝 혹은 3장에 나오는 거예요. “인자야 너는 받은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겔3:1).”

2장 4-5절에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6-7절에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인자’라는 에스겔 선지자와 그 백성들이 소통이 될까요, 안 될까요? 소통이 전혀 안 되지요. 그야말로 등 돌리고 미움 받겠지요? 미움 받는 그 기능에 장차 누가 담긴다? 예수님이 담겨요. 그렇게 되면 옛날 에스겔을 미워했던 그 세계는 아까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이 세상은 말려야 마땅하고, 다니엘을 미워했던 그 시대 사람처럼 이 시대도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말려야 됩니다.

땅이 말린다는 것은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다니엘 식으로 이야기하면 바다에 있는 짐승이 땅 위로 올라옵니다. 땅이 있고, 땅 주변에 바다가 있지요. 이 바닷물이 땅을 넘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이야기고, 그것이 예레미야에 나오고 시편에도 나오고 해요. 하나님께서 계약대로 해서 바다가 땅을 침범치 못하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 보면 이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와요. 바다의 짐승이 땅에 올라왔다는 것은 곧 땅이 바다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이 그동안 바다에서 힘깨나 썼던 놈인데, 이것이 땅위에 올라오면 땅은 이 짐승을 이길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이기죠. 왜냐하면 땅은 땅의 원리만 알고 있는데 그 원리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다른 짐승이 오면 땅은 대처 능력이 없기에 그냥 점령당합니다. 만약 땅에서는 활을 쏘고 있는데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총을 쏘면서 온다면 전쟁이 되겠습니까? 게임이 안 되지요.

이 짐승의 힘을 다니엘에서는 국가라는 이름의 주체. 주체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10시간 정도 강의해야 됩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주체에 대해서 설명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 ‘국가라는 이름의 주체’가 등장해요. 이 국가라는 이름은 국가 이전에 힘이 있어요. 힘이 한 곳에서 돌출하면 이게 주체입니다.

오래전에 이런 놀이가 있었어요. 네모난 판 안에 숫자가 기록된 작은 네모가 여러 개 있는데, 한 공간은 비워져 있어서 그 공간을 이용해서 숫자를 옮겨서 번호를 차례대로 맞추는 그런 놀이. 혹시 기억나십니까?

이 빈칸을 주체라고 합니다. 이것을 누가 이야기하는가 하면 데리다, 라캉, 들뢰즈, 지젝 등 현대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다 이야기해요. 라캉의 세미나에 보면 도둑맞은 편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빈칸입니다. 빈칸이 뭔가? 사람은 ‘나는 나다’ 하다가 어디에 힘이 있으면 그 힘이라는 빈칸에 내 주체를 이동시켜요. 그런데 다시 빈칸에 힘이 생기면 다시 그쪽으로 이동해요. 결국 사람은 힘을 쫓아가다가 평생을 다 보냅니다.

예를 들어서 노무현이 자살을 하면 뭐가 없어져요? ‘나는 노무현의 경호원이었다. 나는 노무현의 재정담당자였다. 나는 노무현과 친구였다.’ 그러다가 노무현의 빈칸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명박으로 바뀌면 노무현과의 관계에서 살던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어디에 가야되는가? 이명박을 나의 새로운 주체로 해서 이명박의 빈칸으로 이동을 해야 돼요.

요새 [롤로코스트]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이런 것이 나옵니다. 나이별로 좋아하는 이성이 나오는데, 남자들이 10대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해요. 그러나 여자들이 10대 때는 아이돌(idol - 우상으로 떠받들어지는 인기인)을 좋아해요. 20대에는 똑똑한 사람을 좋아해요. 30대가 되면 돈 많고 외모가 괜찮은 사람을 좋아해요. 40대가 되면 대머리라도 돈 많으면 좋아해요.

이처럼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그것이 내 모습이거든요. ‘나는 지금 뭘 원하고 있어? 뭘 즐기고 있고, 뭘 하고 싶지?’ 내가 원하는 것이 자기의 모습이에요. 이것을 ‘타인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남이 갖고 있는 욕망을 내가 그리워하는 것을 보니 내 현재 위치가 어디쯤 된다는 것을 타인을 통해서 감 잡는 거예요. 사람이 혼자 산에 있으면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내가 누구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잡고 한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만 있으면 언제든지 거기에 충성과 봉사를 할 용의가 되어있는 그런 주체란 말이지요.

이런 생각이 바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책략이란 말이지요. 오직 힘만 추구하는 거지요. 그래서 힘의 배치, 분배를 하다가 다시 이 힘이 다른 짐승으로 바뀌면 그 짐승에 의해서 힘의 재배치가 일어나지요. 그 때 재배치하는 것을 ‘법’이라고 하고, 그 법을 세우는 것을 ‘입법’이라고 합니다.

입법 기관이 뭡니까? ‘국회’지요. 법을 세우는 거예요. 이 법이란 것은 진리가 아니고 힘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힘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뭐가 진리가 됩니까? 돈이죠. 애들 교육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돈 벌수 있는 사람 만들기 위해서. 돈 못 버는 사람은 필요 없어요. 그래서 만약에 자녀가 예술을 한다든지 하면 부모가 극구 말리지요.

왜 그런가? 부모가 경험한 것이 있어요. 인간은 힘없으면 못 산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식에게 힘을 축적시켜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명문대학에 가도록 공부하라고 하고, 그런 친구들을 사귀라고 하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외모를 꾸미고 교양을 쌓고 ---

이것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1등이 좋아요. 1등이란 것은 최종 정점인데,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어떤 실체를 다 숭상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아무리 예수 믿고 교회 다녀도 그것은 다 껍데기고, 힘만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쪽으로 갑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돈]. 돈은 종교도 바꿉니다. 종교가 밥 먹여줍니까? 돈이 밥 먹여주지 복음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멸망시킬 때,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그냥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땅을 둘러쌌던 바다로 하여금 땅을 코팅시켜서 땅위에 바다의 힘이 덮이는데(노아언약 때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저주받아야 될 바다의 힘이 올라왔다는 말은, 이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뭐로 바뀌는가? 저주스러운 힘으로 뒤덮이는 겁니다. 광주에 눈 오듯이.

하얀 눈이 덮이듯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로 있던 땅을 저주의 힘으로 코팅시켜놓고, 케익은 카스테라 위에 생크림이 덮이지요. 크림처럼 덮어놓고 여기에 발자국을 내요. 이 발자국이 누구 발자국일까요? 인자의 발자국을 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 인자가 누구인가? 에스겔이죠.

힘만 쳐다보고 있는 인간에게 인자가 다녀간들 관심 있겠어요? 관심 없어요. ‘힘도 없는 것이 저리 가!’ 하겠지요. 이것을 신약에서는 ‘은닉된 메시야 상’이라고 합니다. 감춰진 메시아의 모습.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그분이 이런 길을 가는 것은 우리가 갈 수 없는 천국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어린양으로서 먼저 그 길을 닦아 놓을 줄 누가 알았습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목자가 도망친 양을 대신해서 죄를 해결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마치 엄마가 밥상을 다 차려놓으면 ‘애야, 밥 먹으러 오너라.’고 하지요. ‘애야, 내가 다 차려놓았어. 네가 천국 가는데 조금도 하자 없게 다 해놓았어. 그냥 와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뭘 보여줬습니까? 십자가 지실 때의 그 흔적,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줬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그런데 이 땅의 목사라는 자들은 종교의 힘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돈) 받는다. 천국 간다.’ 이런 소리로.

예수님께서 보시는 세상관과 인간들이 보는 세상관이 달라요. 제가 아까 히로시마의 소녀를 예로 들었는데, 그 소녀는 선생님이 숙제 내 준 것, 그리고 그 숙제를 잘 해가면 선생님께 칭찬 받을 것이라는 아주 좁은 영역에만 관심이 있지,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이 휘어져 올라오고 불에 탈 것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데,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유혹은 유혹이 아닙니다. 이게 사실은 기쁜 소속입니다. 우리가 돈을 이기고 힘을 이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성질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서, 아담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어서 이미 죄 속에 있기 때문에 돈, 힘, 명예, 위신, 권력 이런 것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유혹할 때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는 유혹은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유혹에 빠졌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빠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이기는 방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유혹에 빠지면 돼요. 유혹 앞에 “사단아 물러가라!” 고함 친다고 해서 물러갈 사단이 아닙니다.

유혹을 누가 허락했습니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허락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혹이 없으면 우리가 얼마나 잘 난 척을 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유혹을 통해서 우리가 죄를 짓고 추한 꼴이 되어봐야 우리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줄 알아요.

유혹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짐승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짐승의 하수인인 친구, 가족, 목사 이런 사람들로부터 유혹이 올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은근히 유혹을 반기는 그런 심성이 있어요. 이것을 철학자 라캉이 아주 예리하게 잘 이야기했어요. ‘우리 속에 있는 내 자아는 오늘도 창녀처럼 나의 욕망에 불을 지를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즐거움이다.’

이것을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합니다. 프랑스어지요. 영어로는 enjoyment. 향유. 즐기는 것. 인간 신체의 특징은 즐기는 것이 최고입니다. 묻거나 따지지 마세요. 무조건 즐기고 싶은 거예요. 왜 사는가? 즐기기 위해서. 즐기는 것이 뭔데? 몰라. 그냥 즐거우면 되는 거야.

그냥 즐기는 것이 우리 신체가 뿜어내는 욕망인데, 지금 현실은 돈을 벌어야 되는데 몸이 고달프고 하니까, 즉 즐기고 싶은데 원하는 만큼 못 즐기니까 그만큼 결핍이 생기겠죠? 이 결핍을 심정 고통이라고 합니다. 심정 고통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분괴와 분노로 이어져요. 이런 마음으로 사람들이 모인 곳을 두 자로 ‘교회’라고 합니다.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새벽마다 모여서 고함을 지르겠습니까? 만약 여러분 집에 누가 새벽마다 와서 문 두드리고 고함치고 하면 여러분은 화를 내겠습니까, 즐겁겠습니까? 신경질이 나서 문 열고 뜨거운 물을 확 퍼붓고 싶을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부르짖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합니까?

결국 원통해서 분을 터트린다는 것은, 내가 즐기고 싶은데 왜 못 즐기게 하나님이 방해를 놓는가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내부적으로 이 분노를 누르는데, 그것을 세 자로 말하면 ‘자기 의’가 되지요. 자기 분노를 계속 억제하면 풍선처럼 계속 부풀다가 결국은 뻥 터져요. 그 때는 그 파장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래서 평소에 품위 있고 경건하던 목사가 교인들과 싸우고 떠날 때는 퇴직금을 엄청나게 요구하지요. 교인들이 죽든 말든.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내가 남들이 원하는 것을 안 하는 대신 나는 의인이 되어 있었는데, 그 의가 보상이 없을 때는 결국은 보복, 복수로 나와요. 이 이야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인간은 간단합니다. 정리를 하자면, 인간은 내부에서 힘을 원하고, 그 힘으로 즐기고. 즉 ‘즐길 수 있는 힘만 얻으면 나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힘과 즐거움을 다 충족할 때 우리는 뉴질랜드, 호주, 미국으로 이민 가잖아요. 거기에는 돈도 있고 즐길 수도 있고.

애를 서울대학교 보내고 싶은데 실력이 안 되니까 조기유학 보내요. 왜? 그렇게 해서 서울대학교 못 가는 미흡함을 다른 것으로 보충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에스겔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는데, 결국 에스겔이 외쳐야 될 것은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이스라엘(성전이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을 버리셨는가?’ 하는 것이죠.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분리성 때문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거룩성입니다. 에스겔 전체가 뭘 이야기하는가? ‘나는 너희들을 다른 족속이라고 이야기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이방 민족들과 차이점이 없느냐?’ 이것 때문에 그들은 멸망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너희들이 다른 점이 없어?’ ‘예, 우리는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해 줄게.’

다른 민족과 똑같이 해 준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민족은 저주를 받는데, 제일 먼저 시범케이스로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는데, 이스라엘을 저주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다를 바 없는 인식으로 살아오고 있음을 이참에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데 이스라엘 자체가 다른 민족과 차이나는 면을 원치 않고 있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삶이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식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나라를 저주하는 식으로 먼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겁니다. 그 다음 차례는 누구다? 다른 민족들 저주 받을 차례다. 이것이 에스겔에서 쭉 나오지요.

10분 쉽시다.

(2010. 1. 5. 10: 4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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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