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11(2) 서울강의 녹취 : 빌립보서 제9강
20091211(2) 서울강의 녹취 : 빌립보서 제9강
이름 : 김창길(IP:222.112.87.237)
빌립보서 제9강 (이근호 목사 2009년 12월 11일 [2]) 서울의존교회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천국에서는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아니 가고 천국에서는 모두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해와 같이 빛나리라 이 모든 것이 천사와 같다 해와 같이 빛난다. 천국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게 다 어디서 나왔냐하면 이게 우리 몸이 아니고 우리 안에 주님의 요소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몸이 주님의 것으로 노골적으로 변화 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우리의 품성 우리의 마음가짐부터 우리의 속에 역사부터 교체작업이 시작되는 겁니다. 제가 첫째시간 마지막에 뭐라했냐하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라고 했습니까? 내 몸은 예수님 것이에요. 그런데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우리는 살아도 주의 것이요, 죽어도 주의 것이다. 사나 죽의나 누구 것이다? 주의 것인데 걱정을 왜 내가 합니까? 죽는 것을 내가 왜 걱정해요. 내가 쓸데없이 나의 어설픈 과거, 감추고 싶은 과거, 왜 자기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합니까? 우리가 죄를 져도 보통 죄 짓는 게 아녜요. 염려하는 것조차도 죄가 되는 겁니다. 착각하고 있어요.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사서 고생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얼마나 감수성이 심했는지 귤을 보고서도 “불쌍한 귤, 너의 피부는 갈기갈기 찢어졌구나, 이 나쁜 인간들 누가 널 찢었어,” 만약에 제가 귤보고 이렇게 얘기하면 귤이 뭐라 하겠습니까? “놀고 있네…….네 걱정이나 하세요, 남의 걱정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우리 인생을 걱정을 하면 주님께서 뭐라하냐하면 “놀고 있네. 니걱정이나 하세요. 남의 걱정 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우리 인생을 걱정하면 주님께서 뭐라하냐하면 “놀고 있네. 니몸은 없어. 없는 몸을 붙들고 지금 귀신 붙들고 얘기 하나? 니몸은 내가 알아서 관리하는데 니가 왜 주제넘게 걱정하는냐," 우리가 미래에 가서 어떻게 될지는 우리 속에 말씀이 들어오면 성경말씀대로 우리는 어디 가냐 하면 생명수 물가에서 자유형? 배형? 접형? 완전히 박태환처럼 박태환이 예수 믿는지 모르겠지만 생명수 강가에서 헤엄치고 있어요. 거기에 아마 사마리아 여인 만 날거예요. 물동이 벗은 사마리아 여인도 만날거고 거기에 같은 주님의 것들을 만날꺼예요. 베드로라는 주님의 것, 엘리야라는 주님의 것, 모세라는 주님의 것, 사도바울이라는 주님의 것, 그런 사람들을 다 만날꺼예요. 그런 사람들이 한결같이 무엇을 보느냐 하면 예수님의 창 자국, 못 자국을 보면서 거기서 나온 피와 물과 살이 우리를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것으로 다시 제조 했다는 사실을, 천사처럼 만들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내 것을 내 것이라 하는 자가 일체 없을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면 바로 초대교회가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다고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잠시 잠깐이지만 무슨 맛을 보냐하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짧은 순간이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아, 내 몸이 주님의 것이지"라는 스쳐지나가는 듯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야 내가 걱정할 필요 없어 짧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경험하게 되요. 체험하게 돼요. 그걸 가지고 어려운 용어로 "파토스 [pathos]" 무슨 뜻이냐 하면 수동적 희열을 말해요. 쉽게 말해서 "어쩔 수 없다" 내 몸이 주님의 몸이라고 알게 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되는 게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게 느껴져요. 이게 수동적인, 능동적인 감동이 아니고 내가 손뼉 쳐서 은혜 받는 게 아니고 내가 가만히 있는데, 설거지 하다가도 밀려와요. "설거지 하는 춘자야!" "예" "네 몸은 니몸이 아니고 내 몸이다." "아멘, 할렐루야" 설거지하면서 너무 좋아서 그릇이 깨져도, 접시가 깨져도 “춘자야, 접시 니꺼 아니지?" "아멘" "치워라 빨리 다친다, 네 새끼 학교에서 올 시간 됐다. 빨리 치워라 다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 있어서 귀신이 있어서 시키는 대로 움직여요.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목적이 있어요.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기에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을 성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복음이라 해요. 복음을 위하여 네 몸을 굴려라. 복음을 위하여 굴려라 했지만 사실 아까 그림, 우리 몸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우리 몸에 무슨 길이 나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길이 어디에 카피가 되어 있다? 카피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우리 몸에 그게 그대로 재현되지요. 되풀이되지요. 되풀이되면 고등어처럼 되풀이 되면 이거 하나 하나에 깔린 아스팔트가 뭐라 했습니다. 뭐하고 같다? "말씀"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되니까 사람의 육은 풀과 같이 다 쇠하여 지지만 무엇은 영원하다? 말씀은 영원하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으로 산다? 말씀으로 산다. 우리가 살고 싶다고 사는 게 아녜요. 살려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 복음을 위해서 살라고 하면 더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 아버님도 복음을 위해서 살라면 더 살아야 돼요. 죽고 싶다고 해도 못 죽어요. 또 복음을 위해서 순교하라면 순교해야 되고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웃을 때도 있고, 복음을 위해서 울 때도 있는 거예요. 김성환 목사님은 복음 외치다가 교회에서 얼마 전에 쫓겨났어요. 십자가 마을에다 피 이야기 하고 그러니까 쫓겨났어요. 여러분들 안 쫓겨났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그것도 복음을 위하여 그럴 때 베드로전서 보면 "네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얼씨구나 좋아해라, 왜?, 성령이 너희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무슨 말이야 하면 "이제 알았느냐? 네 몸이 니꺼 아닌걸.. 이제 알았어. 니몸은 이미 복음을 위하여 쓰인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느뇨?" 이 말입니다. 그거 한 5초갑니다. 그거 5초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여 제가 복음만 전했는데, 왜 쫓아냅니까? 가족들 길바닥에 나 앉았는데, 저 어떻게 삽니까? 아, 그 때 좀 참을 껄 복음이야기 하지 말걸, 그 때 눈치 봐 가며 살걸……." 그렇게 되지요. 마치 뭔가 실수한 것처럼 복음 전파한 것이 실수한 것처럼, 해선 안 될 것을 한 것처럼 그런 자책감도 들고 "이 바보 등신이야 복음이 밥 먹어 주나, 복음이 밥먹여 주지 않는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나. 내가 왜 바보지, 바보지……." 이런 생각이 마구 들지요.
이제 그것을 설명차례가 왔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대로 하니까 탄탄대로 알려 드렸지만 이게 탄탄대로가 아니고 다시 보겠습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요 어떻게 내려오냐하면 2층은 무슨나라? 하늘나라, 아랫층은 무슨나라? 십자가니까 십자가는 저주받는 거예요. 십자가는 저주받은 거라는 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저주받아 죽으십니다. 실패죠,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하나님이시면서도 아무도 가지 않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복종하십니다. 이 코스를 그대로 우리에게 집어넣어 주면 우리는 실패하는 인생에서 뭐로 올라가느냐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유명세를 띄우고 싶어요.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예수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주님은 찬양을 부릅니다.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우리는 "저높은 곳을 향하여~" 주께서는 "눈깔아"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가치를 쓰레기가 아닌 쪽으로 천사처럼 여기려고 합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은 목사님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쓰레기라 생각합니다." "목사님 그 말에 책임지십니까? 성경에 나옵니까?" "나옵니다." "목사가 쓰레기란 말이 어디 나옵니까?" 고린도전서 4장에 나와요. 사도바울이 우리가 만물에 쓰레기같이 되었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시찰할 때 이 설교를 했어요. 밉상 받지요. 결국은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냐 "목사님, 목사님 우리들끼리만 이야기 하고 평신도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마세요. 목사들끼리만 있을 때 이것을 이야기하고 평신도들에게 이야기하면 무시해서 목사권위가 팍 떨어지니까 이야기 하지 마세요." 아직도 자기관리해요.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해서 관리된 인간을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해요. 그러면 뭐가 계시냐 하면 진짜 말씀이 계시가 아니고 자기가 과거에 했던 것 중에서 괜찮은 것, 앞으로 할 것 중에서 괜찮은 계획, 그런 것을 모아 모아서 현재의 자아를 이루는 자신의 계시를 신의 계시로 간주해 버립니다.
고등학생들이 일본 귀신을 보고 싶다고 볼펜 두 자루 들고 책상에 앉아서 분신사바사바 하죠. 왜 그렇게 하냐면 귀신이 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오늘날 그거나 오늘날 교인들이 박수치고 떠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성령이 보고 싶어서 환장한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에게 얘기합니다. "귀신보고 싶냐?" "보고 싶습니다. 저 뒤에 계신 분은 우리의 귀신이 아닙니다. 진짜 귀신이 보고 싶습니다." "네가 귀신이야, 네가 귀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이게 귀신 이예요. 이게 마귀의 실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쉽게 얘기해서 이런 경우, 수학여행가서 선생님이 방을 배치해 주는데 애들이 욕심이 많아가지고 아주 좋은 쾌적하고 아주 좋은 방이 하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애들이 그 방을 차지하려고 막 들어가요. 그러면 선생님께서 "얘야 그 방 들어가지 말고 이리와 너는 이방에 들어가" 하고 집어 넣어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그 출발점을 어디로 잡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지상에 있는 우리와 접촉한 지점으로 봐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께서 영과 육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십자가 죽으심,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뺑뺑이 도시다가 어디로 가셨습니까? 결국은 어디로 사라져 하늘나라에 갔습니까? 그 사라진 구멍이 뭡니까? 십자가지요. 그 십자가가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유일한 튜브가 됩니다. 튜브[tube]=관, 유일한 파이프가 뭐냐 하면 십자가예요. 십자가 통과하면 구원이요, 십자가 통과하지 못하면 저주스런 육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점을 알려주고 안 알려 주고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한 사람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이 된 진리인줄 아는 사람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에 피하지 않고 엉뚱한데 분신사바사바 이거, 은혜 받는 기도원에 기도하고 박수치고 있는 거, 이것은 십자가 없는 곳에서……. 그럼 목사님 십자가 통과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통과를 못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캡슐, 또는 버블(비눗방울) 같아서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들어가 있어서 십자가가 뜨면 같이 떠서 곱게 천국 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는 대목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나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죽은자요 세상은 십자가 밖에서 죽은자라 하는 거죠. 세상은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 안에 사는 우리가 죽은자요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보니 세상이 죽은자요. 십자가라는 보호막이 우리를 천국으로 무사히 데려갑니다. 왜? 밖은 무슨 세계냐 하면 밖은 율법의 세계에요 율법의 세계이기 때문에 율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기서 심판이 있죠. 법대로 해서 성경말씀 지켜서 이거 했냐 말이야? 자꾸 따지게 되고 잔소리 하고 율법대로 안하면 저주를 받아요. 그럼 율법대로 지키면 될 것 아닙니까? 율법대로 지킬 위인이 이 세상에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 율법을 지킬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을 준 이유가 뭐냐 하면 원래 너 못 지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로마서 3장 4절에 나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어요.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 딴에는 착하다고 자기 딴에는 깨끗하다고 여겼는데 막상 율법이 와서 보니까 율법이 들어오니까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으르렁 거리던 멧돼지나 사자나 호랑이 같은 이 더러운 뱀, 일곱 마리 뱀, 이게 율법이 들어오니까 갑자기 이 뱀이 발작을 하면서 율법 때문에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죄성 더욱더 노골화되고 구체화 되는 겁니다. 하지말라하면 더하고 싶은 거예요. "귤 껍질 만지지 마라" 이러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애들한테 공부하지 말라고 해야 돼요. 제발 좀 공부하지 마라. 공부 하면 막 패야되요. 내가 공부하지 말라 했지? 그럼 애가 뭐라 합니까? 공부할래, 공부할래, 그럼 공부해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안에 율법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요소가 안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법이 안 들어오면 천하에 착한 사람 되지만 막상 하나님의 법을 들이대면 사람은 화를 왈칵 드러냅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노숙자한테 "힘들지요?" "힘들어요." "입는 걸로 족한 줄 아시요" 라고 하면 그 노숙자는 죽일라고 달려 들 겁니다. 사업 부도난 사람에게 "사장님 부도났습니까?" "예" "먹는 걸로 족한 줄 아세요. 디모데전서 이야기입니다."하면 성경책 불태우려고 할 겁니다.
성경이 없는 사람은 다 훌륭한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성경이 있는 그 순간부터 바로 예수라도 죽일 사람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그게 우리 모습 이예요. 이런 모습을 이런 율법의 저주를 우린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버블버블 십자가란 비눗방울로 해 버리니까 모든 저주가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녹아져 내려 버리죠. 오는 저주, 오는 화살, 어떤 저주가 오더라도 어린양의 피를 보고 저주가 다 되돌아 가버려요. 율법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율법이 막 쏘아 데는 겁니다. 백제군이 왔을 때 김유신 군대가 활을 막 쏩니다. 백제군의 계백장군은 놀라 돌아가 버리고 덕만이는 여왕이 되가지고 .. 비담이는 좋아서 옆에 있고...
예수님이 왕이시니까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이런관계가 예수님 공로인데 예수님 공로란 말은 그 안에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식을 버린 그 댓가 로 우리에게 이런 혜택이 주어진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고등어같은 이 사이에 말씀이 들어가면 십자가 길, 여기서 우리는 무슨 경험을 해야 되느냐하면 우리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는 경험을 말씀이 덮치면서 그때 순간 순간 느껴야 됩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직도 살려 주십니까? 고맙습니다. 죽어 마땅한데 왠 귤이십니까? 한개 더 먹고 죽겠습니다. 이런거예요. 모든지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한데 이렇게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복음이 나에게 덮쳤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또 우리에게 귤 주시고, 또 하루를 살게 해 주시고... 이렇게 살아 가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 영 도움이 안될꺼예요. 왜 도움이 안되냐면 목사님이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 하셔도 저는 태생이 이기주의입니다. 전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 이야기 해 봐야 그냥 발길로 차 버립니다. 이렇게 나올꺼예요. 그래도 과연 구원됩니까? 네, 구원 됩니다. 발길로 차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차기 때문이예요. 오늘 참 희한하게 책임 못질 이야기가 막 나오고 있죠... 여기 보세요. 십자가=비누방울(바블), 또는 풍선이 있는데, 밖에 예수님 십자가 있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렸다(잃어버렸다)가 주어집니다. 막상 우리는 우리의 습관은 뭐냐하면 나의 확장입니다. 내가 나를 계속해서 잃지 않고 키워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고 나는 잃어버린다의 정 반대로 나를 계속해서 키워 내는 거예요. 키워내면 나만 출세하고 나만 성공하기위해서 계속 나가게 되면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나때문에 피해자들, 내 성공을 위해서 억울하게 눈물 흘려야 하고 나때문에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등장하게 되면 이사람들은 어느 노선이냐 하면 자기 아들을 버렸다는 이 노선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기주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뭐만 자꾸 생산하느냐 하면 나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만 나한테서 계속해서 늘어나는거예요. 그 억울한 사람들이 거기 모이게 되면 그게 뭐냐면 나는 십자가안에 둘러쌓인 샘이 되는 거예요. 아 십자가 안에 둘려 쌓였구나 제가 이런얘기 왜 하냐하면 저는 오늘 목사님 말씀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을 가겠습니다.하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이예요.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착해지면 안돼요. 내가 이기주의를 유지해야돼요. 오늘 책임지지 못할 말들이 계속 나오고 이쓴데...
여러분 내가 착해져 버리면 나때문에 피해볼 사람이 없잖아요.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게 되면 종이떨어진 것을 줍는데 왕복 5키로 되는데... 재미난 사실은 제가 줍고 있으면 앞에서 버리고 있어요. 아주 재밌다. 참 재밌다. 제가 그걸 보면서 뭘 느끼느냐하면 한번 따라해 보세요. "짝" 세트, 작을 이루는 겁니다. 한쪽은 줍고 한쪽은 버린다. 버리는 사람이 있기때문에 줍는 사람이 착한 짓이 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착한짓을 한 것을 위해서 우리는 나쁜짓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십자가 이야기 하니까 유대인들이 뭐라하냐면 "그렇다면 하나님을 더욱더 영광돌리고 은혜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더 죄를 지어야 되겠네..." 라고 이야기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런얘기를 못들으면 복음을 잘못 전하는 거예요. 바로 육에 속한 사람은 기준이 뭡니까? 기준이 자기 행위에 대한 기준이기 때문에 제가 이대목 어렵다 했지요. 몰라도 아는척하세요. 사람이 자기 행위하는 것을 정당화 하기 때문에 "내가 나쁜짓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높아 지니까 앞으로 내가 나쁜짓 할꺼야" 라는 놈은 지옥가고,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내가 나쁜짓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천국가는 거예요. 이말이 어렵습니까? 안 어렵습니까? 그 차이점? 모르겠지요? 다시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 하기 때문에 "나는 잘못이 없다. 왜? 나는 예수님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나는 나쁜짓만 골라 할꺼야, 나쁜짓만 골라하는 나는 예수님의 공로를 높이기때문에 나는 정당하다"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공로때문에 나는 나쁜짓을 할 수 밖에 없어"하고 두 말의 문장의 차이점이 뭐냐하면 한쪽은 계속해서 자기 정당성을 고집하고 있고 진짜 성도는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리 착한일을 해도 주님의 십자가를 더 높이기 위한 나쁜짓에 해당된다고 보는거예요. 내가 남을 위해서 신장을 떼어주고 내가 헌혈을 하고 내가 길에 나가 전도를 한다 할지라도 이것 마져도 예수님의 공로만 선하다는 것을 끌어내기 위한 내가 죄짓는 일을 주께서 시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똑같은 방금한 이야기를 불신자가 보고 하는 말이 "야, 그거 멋지다, 사도바울이 정말 그말 했지?" "했다" "그러면 내가 반박할께 잘 들어봐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계속해서 우리가 나쁜 짓을 해야 되겠네" 라고 로마서 3장 7절에서 했어요. 한번 봅시다. 7절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은혜가 넘치는 곳에 죄가 넘친다고 하니까 "야 그거 참 멋진 말이다. 듣던 중 기쁜 소리다, 나 믿을게" 이런 식으로 하면서 자기의 행동하는 것을 자기 정당화 하는 그런 사람이 있더란 말이죠. 그건 정당화 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이미 성도는 죄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뭐만 나온다? 죄가 나오죠. 달리 말하면 죄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성도는 계속해서 죽어야 될 이유만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결국은 성도는 죽잖아요. 성도는 죽어가면서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계속 보여주면서 죽어가고 있고 불신자는 죽어가면서도 곧잘 자기 잘났다고 하면서 죽어가고 있고……. 그런데 둘 다 그 몸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는 진노의 그릇, 하나는 사랑의 그릇을 보여주기 위해서 둘 다 그렇게 만들어낸거예요. 그걸 세트 그것을 뭐라 했습니까? "짝" 다시 산책길 얘기하면 나는 귤껍데기를 줍고 있는데, 그 사람은 버리고 있어요. 그러면 저는 뒤에서 다시 그것을 줍고, 또 버리고 있다고요. 버리고 있고 줍고 있든 간에 다만 제가 느낀 것은 그렇게 해서 5km를 갔다 오니까 내가 운동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뱃살이 들어갔어요. 이렇게 길에 휴지를 주으면 어떤 사람은 이래요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줍기는 싫고 버리지도 않겠다는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제가 "지금 운동하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운동을 시키냐면 우리로 하여금 나를 잃어버리면,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죗값을, 죄는 그 사람이 짓고 피해는 우리가 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감사히 기꺼이 수용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죄짓고 내가 만약에 죄지은 것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내가 화를 낸다면 나는 죄에 죽은 자가 아니고 마치 내가 엄연히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사람이 되잖아요. 오늘 참 어렵다, 너무 어려워요,
정리합시다. 하나님께 고함친다고 될 문제가 아녜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은 남이 죄를 지었는데 우리가 피해를 보므로 말미암아 내가 바로 예수님 앞에서 이처럼 죄 지어서 예수님을 아프게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런 죄악된 세상에 그대로 집어넣는 일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이미 죄에 죽은 자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억울합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 정당성 때문에 구원 받은사람인줄 여기는 사람밖에 아니거든요. 자기 정당성이 있으면 누가 모독 받습니까? 나를 죄인이라고 간주하고 대신 피흘리신 그분의 희생이 모독 받잖아요. 그분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요. 주님은 근호야, 나 니때문에 죽는다 했는데, 주님 저 잘났는데요. 이렇게 하면 주님의 피가 어떻게 돼요? "공연히 흘렸어, 억울해 공연히 흘렸어……." 그렇게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집어넣은 것은 우리보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십자가는 누가 졌다? 예수님이 졌는데 문제는 이세상의 환경이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을 우리 가당치 않은 이 몸 가지고 체험해 보라 이말 이예요. 그 체험하면 앞에서는 휴지 버리고 나는 뒤에서는 줍고 하면 그 순간 주울 때마다 나는 무엇을 느낍니까? 내 정당성을 잃어버려야겠죠. "나는 무슨 죄를 이런 짓을 하니?"라고 우긴다면 자기 아집, 자기 정당화를 하는 거잖아요. 주님이시여 보시옵소서. 지금 복 받을 짓을 하고 있잖아요. 이런 것이 되잖아요. 이런 것, 자기 자랑도 잊어버려야 한다니까요. 그 잃어버림이 뭐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그 착하신 그 의인이신 자기 아들을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 거예요. 이게 복음, 기독교입니다. 인간을 배제해요. 인간을 배제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버려주심으로 그분 때문에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분이 오면 우리는 가만있지 못하죠. 그분의 자아 잃어버린 자존심 잃어버림 하늘나라 영광 잃어버림 모든 그런 경험을 우리가 이 땅에서 실제로 체험케하는 겁니다.
가까운 교회에서요, 목사님들 계시지만, 목회한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목사님의 말을 들어먹지를 못해요. 목사님이 무슨말을 하면 못 알아들어요. 목사님이 설교해서 딱 던지는 말이 뭐냐 하면 뒤에 뭐가 붙어있어요. "제발 희생해 주시고, 제발 양보해 주시고, 제발 참으세요."란 말이 모든 목사님 설교에 다 붙어 있어요. 그런데 교인들은 제발 희생해 주시고, 양보해 주시고, 참으세요. 이것을 떼어 버리고 나는 이만큼 기도했다, 이만큼 안다, 이만큼 헌금했다. 뒤에 그것을 빼 버려요. "이만큼 헌금하셨습니까?" "예" 그러면 "제발 참아주세요" "안 알아줘도, 봉사 많이 했습니까?" "예" "그럼 제발 계속 희생해 주세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것을 떼어 버리면 "목사님 이 교회에서 헌금 제일 많이하고 봉사 제일 많이 하는데 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봅니까?" "나는 다른 교회 가렵니다." 그러면 뒤에 희생과 양보와 참으란 말은 결국은 그 사람은 내가 돈 냈다 이거예요. 복음을 아는 목사님은 헌금하면서 십자가를 한번 보세요. 헌금하는 당신의 희생이 센지, 그것 때문에 구원받았는지, 아니면 지금 당신이 헌금하게 하신 십자가에 지신, 피 흘리신 예수님께서 당신보고 예수님의 십자가 알라고 헌금을 했는지 그것을 예수님과 한번 연관을 시켜보세요.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봉사 많이 하고 희생 많이 하는 사람 상당히 위험해요. 얼마 전에 우리교회 교인들도 우르르 나간 것도 희생하고 봉사하다가 다 나갔어요. 그럼 그 다음 차례는 누가 나가냐 하면 그 다음에 봉사하고 희생한 사람들이 또 나갈꺼예요. 헌금 좀 하는 사람 또 나오고……. 이상해 아주 이상해 교회라는 것이 아주 이상해요. 주님이 계신 곳이 아니고 사람들끼리만 모였어요. 괜찮은 사람들만 다 모였어요. 한번 맞아야돼요. 십자가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뭐냐 하면 돈 낸 사람, 감사헌금 내면 그것 불러서 보란 듯이 돈좀 내라는 듯이 "오늘 김 아무개 장로님 감사헌금 2천만원 냈습니다. 2천만원 냈습니다. 우리 김 집사님 이사했다고 20만원 냈습니다. 20만원, 최집사님 아들 고대 들어갔다고 50만원 냈는데 서울대 들어간 사람 뭐하고 있습니까?" 이게 무슨 교회이고 십자가 입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한 가지 우리교회 특징은 돈 있을 때는 다른 교회에 헌금 내면서 표 다 내다가 사업망해서 다 털어먹고 우리교회 와가지고 헌금 안 해도 된다하니까 우리교회 다 와요. 그런데 그분이 다시 사업 성공하면 다른 교회 또 갈꺼예요. 표내야죠 자기 잘난거…….그래서 나온 게 헌금해도 뭐다? 죄인인 것을 드러내 기위해서 왜? 우린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란 것을 끌어내기 위해서 주께서 헌금 시키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는 아예 없어요. 아예 없고, 이 신체 자체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신체입니다.
제가 식당에 들어갔는데 식당 주인이 뭐라고 써놨냐면 "신발 바꿔까지 마세요. CCTV 촬영" 이렇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말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의 신발은 십자가에만 맞도록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 맞으면 그 신발이 우리를 버블버블 해서 구원받는데, 우린 십자가에다 신발 끼우는 것이 아니고 좋은 신발에다가 끼어 넣어 가지고 그것이 내 존재의 기반이 되어서 나를 천국 보내려고 기도 하고 있습니다. 왜 신발을 십자가에서 바꾸려고 하는가? 괜찮은 신발이 나를 더 괜찮게 만들어 버리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란 말이 이 십자가 속에 있을 때만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 맞구나. 왜? 우리 죄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십자가에서 육인 내가 영과 유일하게 만나는 지점이 십자가입니다. 그 곳에서 나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같이 죽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부활되는 거예요. 우리가 부활하고 싶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 분이 부활되니까 우리가 따라서 신발자체(십자가)가 내 신발이 아니라 예수님 신발이예요. 예수님 신발에 신으니까 우리가 예수님 신발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신발을 원하는 게 아니고 내 신발을 원해요. 사람들은 내 신발을 원해요. 이렇게 합시다. 현재 우리가 이빨이 빠졌습니까? 눈이 침침합니까? 어쨌던간에 이 전체를 예수님의 신발로 간주합시다. 이 몸 전체를 그러면 이 몸 전체는 뭐냐?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여기에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 몸 가지고 뭘 느끼느냐하면 내가 이렇게 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왜 죄가 되느냐? 그것을 이제 살아가면서 파악하는 거죠. 그러면 목사님 너무 피해 망상적이고 염세주의고 허무주의가 안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실 분이 계시는데,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 하면 존재가 가벼울 때 제일 행복해요. 사람이 다이어트 하는 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70kg, 80kg나가다가 저울이 잘못되어 50kg 나와 보세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50이래 50, 나 그 목욕탕 또 가야지. 다른 목욕탕 가니까 70인데 그 목욕탕 50이래……." 기분 좋잖아요. 자기 존재에 모든 무게가 줄어들면 아예 처음부터 십자가 신발 신고 다니면 나는 원래 죄인이야 나는 원래 죄인이거든 이 한마디가 우리를 한 없이 가볍게 합니다. 우리 인생을 가볍게 만듭니다. 아내가 말하기를 "여보, 좀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오란 말이야", 그런데 열심히 잔업하다 들어왔는데 잔소리하니까 "나는 잔업 냈어!" 이렇게 하지 말고 "그래, 나 같은 죄인에게 이렇게 잔소리하는 아내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나" 이것도 바로 자기가 죄인일 때 그것도 감사가 되죠. 모든지 감사가 돼요. 그러면 가정이 행복 할 수밖에 없죠. 싸움이 될 수가 없어요. 그것도 모르고 만날 어디 명짧고 돈 많은 과부 없나 하고 찾아요. 팔자 고칠 생각만 하고, 돈 많고 명이 짧은지 명이 긴지를 어떻게 알아요. 그건 요양병원 가봐야 알아요. 그것도 계획적으로 요양병원 가서 "할머니, 어디가 편찮으신지요?" "세상에 이런 젊으니 처음 봤어. 내 유산 있는데 당신에게 유산을 맡기네." 그러면 그 상황부터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빨리 죽기를 바래요. 사람이 나는 죄 없다, 죄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유산을 남긴다고 해보세요. 그 다음부터 여러분들은 그 사람이 빨리 죽기를 기다리는 그런 죄가 발생됩니다. 모든 인간이 아이큐 50이상은 다 그래요. 50이하는 그게 안 되지만 마라톤 했던 기봉이 빼놓고 다 그래요. 그 이상은 다 상속한다면 상속할 때부터 죽어라, 죽어라, 진짜 안 죽으면 목이라도 졸를참이예요. 이것이 인간의 자기도 모르는 인간의 마음이 그래요. 마음이 그런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런 소리 안합니다. 젊은이여, 인생을 살아봐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오직 주님께서 건전지 회수하듯이 자기 몸을 회수 하고 있다고요. 전도서에 마지막 때에 심판받기 전에 젊은 사람들이여,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네 몸은 하나에 심판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이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복음이 뭘 하면 성격이 뭐냐 하면 목사님 말씀만하시면 "제가 믿겠나이다. 십자가 믿을 게요."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사람이 이중인격자 지식으로 많은 상식으로 "예수님 제자는?" "12명", 상식이 풍부하지만, "성경 끝은?" "요한계시록", 그런 것 아는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뭐냐 하면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되 내가 사는 게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 오늘도 하루 살았다. 그렇게 사세요. 오늘 갈비탕 드셨습니까? 잘 드셨습니다. 고추가루쳤습니까? 그 고춧가루도 주님이 주신 고춧가루입니다. 갈비탕 먹었는데 갈비탕이 내려가는 내 위도 내 위가 아니고 내일아침 일어나면 소식올꺼예요. 꾸룩꾸룩 설사 나고, 그 똥도 내 것 아니고 주님의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70살고 80 살아도 내 몸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주님의 흙이 부서지는 거고 내 안에 그렇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기때문에 이것은 "믿고싶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믿어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이게 믿어지게 되면 이 몸은 이미 살아있어도 천국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히 걱정했습니다. 우리가 괜히 두려워했습니다. 괜히 시험 들었습니다. 내 몸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남의 몸을 가지고 멋있게 해 보려고 쓸데없는 시도를 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아는 그런 평안한 마음을 주시고 우리의 정신적인 무기를 다 뺏어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날개 달린 듯이 편하게 가볍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빌9(20091211-2).hwp (24.5K), Down: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