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3
[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3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4)
[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3
09,11,21 강의 이근호, 정리 한윤범
◈ 칼 바르트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높으신 예수님께서 내려왔다고 하면, 여기 위가 하늘이고, 여기 밑이 땅이라는 겁니다. 지금 칼 바르트가 이 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는 우리들에게 무척이나 답답해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게 무엇인고 하면, 이렇게 기존의 모든 것이 있는데서 뚫고 내려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그렇게 낮아지심의 모습으로 내려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이러한 모든 것이 뭉게구름처럼 다시 피어나고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여기에 악마도 있고, 교회도 있고, 역사도 있고, 묵시도 있고, 성령도 있고, 계시도 있고, 그리고 성전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과정 가운데서, 그 과정 속에서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이며, 역사가 무엇이며, 성도의 삶이 무엇이며, 소망이 무엇이며,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그러한 것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모든 것은 반드시 예수님이 내려왔다 올라가는 그것과 연관을 시켜서 해명되어야만 되고,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칼 바르트가 이 자리에 있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제가 장담을 하건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위에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이러한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교회가 무엇입니까? 역사가 무엇입니까?" 라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지옥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만날 따로 떼어놓고 질문을 하고 또 하니까, 칼 바르트는 그게 답답해서 이렇게 예수님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과 자꾸만 관련을 시켜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 모든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렇게 지옥, 천국, 하늘나라, 성전, 심지어 삼위일체 개념도, 그 어떤 개념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상태에서, 이것을 품고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칼 바르트의 신학을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예수 그리스도의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 마치 뭉게구름처럼 새롭게 가스가 나오듯이 뭔가 새로운 개념들이 생성되고 있구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거기서 언약개념도 나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자" 라고 하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벌리신 모든 것이 그리스도 중심인 것을 믿고 감사하자" 라는 말이라는 겁니다. 즉 죄, 시간, 성령, 구원, 선택, 예정, 승리, 율법 등등의 모든 개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 경배, 찬양, 교회, 천국, 언약, 삼위일체, 하나님, 칭의, 악마, 세상 등등, 그런 모든 개념들이 다 주(主) 개념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념들을 따로 떼어내어서 설명하면 안 되는데,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
그렇다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냥 인간이 아니고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을 두고서 그냥 인간이고 하면 안 되는데, 그 어디에도 그러한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니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기억력에 의해서 자기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시면서, 예수님 나름대로 묵시적 안목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하는 반면에, 하지만 우리 인간은 수평적으로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누구이며, 은혜가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이며, 죄가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그 모든 것을 인간 나름대로 자기 중심으로 계시가 무엇이지를 뽑아낸다는 말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단군설화를 이야기했는데, 거기서 집단계시를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이러한 것을 뽑아내는데, 그렇게 뽑아내니까 서로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떤 싸움이냐 하면, 예수님은 묵시중심인데 인간은 역사중심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건이(?) 없다고, 즉 철이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철딱서니가 없어서 모든 것을 자기의 역사중심으로 생각하니, 예수님은 그것을 바꾸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묵시가 와서 역사 속에 사건을 일으키면, 인간은 그 다음부터는 자기 중심인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그렇게 예수님의 묵시가 자기 안에 살아있는, 그런 예수님 중심의 인간으로 바뀔 때, 그것을 두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피조물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교재 5번 '계명과 성도의 삶'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일단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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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계명과 성도의 삶 - 계명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이 자유는 명령법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관계 자체를 제시할 뿐이다. 그런데 그 관계란 바로 '특정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 수직적 사건으로 이해되는 공간인데 이 공간 안에서 수직적인 것이 수평적인 것을 절단할 때만 그것 자체가 수직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 까닭은 모두 어떤 특정한 연관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유일한 성격이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자유에의 참여이다(p221).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듣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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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
제가 방금 이야기한, "우리 인간은 역사중심이다" 라는 것을 고려하고 이 부분을 보면 이해가 되는데, 여기에서 "계명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라고 하는데, 참으로 이 말이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명을 볼 때 인간은 누구의 자유를 생각합니까? 물론 자기 자유인데, 즉 "나는 저 계명을 지킬 수도 있고, 어길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 라고 하는 의미로서, 그렇게 그 계명을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 자유, 즉 자기 역사 속에다 그만 집어넣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집어넣는 것을 두고서 칼 바르트는 어떻게 했는고 하니,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 있는 율법을 무엇으로 이동시키느냐 하면, 다시 예수님의 법으로, 즉 하나님의 자유로 이동시키는데, 바로 그러한 와중에서 인간은 인간의 자리가 죄의 자리였음을 드러내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 법을 덥석 물었는데, 즉 "아니, 법을 지키라고? 지키지 뭐. 저것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지켜서 복을 받지 뭐" 라고, 그렇게 해서 덥석 말씀을 물었는데, 그런데 물어놓고 보니까, 즉 그렇게 계명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가 전혀 몰랐던 죄의 자리, 즉 그러한 죄의 자리가 바로 자기의 타고난 태생임을, 즉 자기가 바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유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반해서 계명을 지키겠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유인데, 물론 그것을 죄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이고 말입니다.
◈ 명령이 아니고 오직 '관계' !!
여기 교재에 보면 "자유는 명령법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관계 자체를 제시할 뿐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명령이 아니고 오직 관계를 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관계는 특정한 공간에서 이해가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특정한 공간' 이라고 하는 것은, 수직적인 공간을 수평적으로 인식하는 역사 속에서, 그런 역사 속에서 수직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평적인 역사 속에 침범해서 그만 박히게 되면, 즉 사건화를 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유에의 참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자유에의 참여가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듣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이것이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데, 즉 유대인들은 법을 볼 때 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로 해석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문자로 해석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가미되지만, 하지만 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가 가미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자유가 나와야 !!
그러니까 모든 성경해석은 반드시 무엇으로 귀결이 되어야 합니까? 성령이 주시는 자유, 즉 하나님의 자유가 나오는 식으로 해석을 해야만 제대로 해석이 되었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을 지키겠다고 나서면, 즉 이것을 지키겠다는 말은 "나는 안 지킬 자유도 있다" 라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지키겠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합니까?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법을 안 지킬 수도 있다" 라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의 자기 선택권이고 자기 권한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석하는 게 바로 율법을 문자로 해석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 법 - 사랑의 관계 !!
그러니 모든 성경해석은 그렇게 문자로 해석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고, 즉 생명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주셨다" 라고, 즉 "하나님과 너의 관계는 떨어진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이다" 라는, 바로 그 관계를 알려주기 위한 말씀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법' 이라는 겁니다.
방금 한 것을 다시 한번 해봅시다.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듣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다" 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생명의 영의 법이니까 성경의 어느 구절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8장 2절의 말씀인데, 우리가 잘 아는 말입니다. 즉 "너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기 때문에, 종답게 사는 것은 법에 매인 것이고, 아들답게 사는 것은 자유이다" 라는 겁니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율법에 매인 율법의 자녀가 따로 있고, 또한 성령에 속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러한 자가 바로 자유자인데, 그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두 언약이고 말입니다. 참 어려운 내용이지만 말입니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래서 칼 바르트는 바로 이 '언약' 이라는 것이 과거에는 율법의 구약의 모든 해석을 다 해내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서설이라든지 비평가들에게는 상당히 기분이 나쁜데, 왜 그런가요? 비평가를 한번 해보겠다고 하면서, 즉 문서설이라고 해서, 가위를 가지고 성경을 쪼개고 풀로 붙이는 모든 작업들이 결국에는 해답도 모르면서 해답을 찾으려는, 그런 인간의 자유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 이미 '언약' 이라는 해답이 !!
왜냐하면, 이미 해답이 언약인데, 그러니 언약으로 바라봐서 그 언약이 나오면 되는데, 그런데 그걸 모르고 "이것을 어느 문서에 갖다 붙이면 맞는가? 이건 저자가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백 날을 해석해봐야, 거기에서는 전혀 올바른 해석이 안 나온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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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듣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다. 곧 하나님이 자유 영역이다(p223).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비하와 인간의 올리우심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화해의 역사(役事)'이다(p286). 인간들은 하나님 아래에 있기를 원치 않았다. 즉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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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환과 예수님 ??
그러면 여기서 함께 하시는, 즉 "하나님의 자유 영역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자유 영역은 누가 만듭니까? 예를 들어서, 박태환이 헤엄칠 때, 그렇게 헤엄치면서 물결을 가르게 되면 그 앞에는 순간적으로 빈 공간이 생기는데, 그 공간을 수영장 직원이 삽으로 퍼서 만든 겁니까? 그것이 아니라 박태환이 직접 손으로 팔로 벌려서 만든 겁니다. 그렇게 박태환이 만드는데, 자기 앞길을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그 일을 누가 한다는 말입니까? 즉 박태환과 같은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마치 박태환처럼, 그렇게 헤엄쳐 와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일을 한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 계시가 곧 예수님이고, 말씀이고, 선포된 말씀 !!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그래서 출렁이고 펄럭이는 그 모든 물결 하나하나가 다 결국에는 성경에 있는 문자, 즉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계시가 곧 예수님이고, 계시가 곧 말씀이고, 계시가 곧 선포된 말씀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목사가 전한 것이 아니고 배후에서 예수님이 물결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두 글자로 '사건'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말씀 사건이 벌어지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보다도,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여기 교재에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비하와 인간의 올리우심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하는데, 즉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박태환처럼 갔다가는 터치하고 도는데, 즉 본래의 자기 집인 하늘나라로 되돌아간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가 그렇게 주장했다는 말입니다.
◈ 화해의 역사(役事) !!
그리고 여기 교재에 보면,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화해의 역사(役事)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이 '화해' 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서로 이제는 더 이상 원수지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너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칼 바르트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를 않는데, 잘 쉬고 계시는 분을 다시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 우리 인간은 알 수 없는 공포에 쌓여있다는 겁니다. 알 수 없는 공포 가운데 말입니다.
요즘 독일에서 암 다음으로 사망률이 높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우울증' 이라고 하는데(갑자기 웬 독일? ㅋㅋ), 그렇다면 이 우울증이 왜 생깁니까? 그것은 바로 알 수 없는 공포로 인해서 생긴다는 겁니다. 요즘 현대인에게 말입니다.
◈ 경찰서장의 알 수 없는 공포 !!
이번에 어떤 서울의 경찰서장이 우울증으로 그만 자살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경찰서장은 자살했지만, 그 밑에 있는 하위직 경사나 경위는 신나고 보람이 있게 잘 살고 있다는 겁니다. 57살을 먹은 내년에 퇴직하는 경위님은 트로트 가수가 되어서 노래를 부르는데, "음주운전을 하지 말고 ♬"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그 경찰서장이 왜 자살을 합니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데 말입니다. 알 수 없는 공포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오고 버티고 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알 수 없는 공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알 수 없는 공포가 왜 생깁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내가 화해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주장하는, 즉 내가 중심이 된 세상을 계속 고집하다보니, 그래서 내 바깥에서 이미 하나님이 예수님과 더불어서 화해했다는 것을 안 듣다보니, 그래서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에는 그만 자살로 끝난다는 겁니다.
◈ 여기는 아직도 전쟁 중 ??
이미 반세기 이전에 2차대전이 끝났는데도, 그런데 아직도 필리핀 동굴에서 아직도 안 나오고 있는 일본군 군인이 있다면, 그야말로 미쳤다는 겁니다. 전쟁은 이미 다 끝났는데, 그래서 그냥 동굴에서 나오면 되는데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행여 지금 나오면 잡히지나 않을까? 사형을 당하지 않을까?" 라고 혼자 공상을 해서 그러한데, 그것이 바로 알 수 없는 공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즉 바깥에 나오면 이미 화해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다 됐는데, 그런데 그 화해의 자리에 참석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마치 그 일본군 군인처럼 말입니다.
◈ 자기 자리, 자기 자유 ??
이 '자기 자리' 라는 것은 아까 뭐라고 했지요? 자기 자유가 있다고, 즉 "이것을 내가 믿을까? 말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자유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유'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터지지 않으니, 그래서 매일같이 "내가 믿을까? 말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될까? 안 될까?" 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아까 말한 자기 수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러한 어두움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박달나무, 즉 밝음인데, 그런 또 하나의 밝음의 세상이 있다고 하는 것이 단군신화인데, 즉 무교신화에 또 그런 것이 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론상 받아놓으면 받아놓은 그것도 무당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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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화해의 역사(役事)'이다(p286). 인간들은 하나님 아래 있기를 원치 않았다. 즉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노리는 것은 교만의 칭의요, 태만한 성화요, 기만과 위선 속에의 소명과 사명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우리를 대신하셨다(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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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의 칭의, 태만한 성화 !!
여기 교재를 보면 "인간이 노리는 것은 화해의 역사다. 인간들은 하나님 아래 있기를 원치 않았다. 즉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되어버리면 그만 자신의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여기에 "그래서 인간들이 노리는 것은 교만의 칭의요, 태만한 성화요" 라고 하는데, 이 말이 참으로 좋지요? 즉 칭의인데,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의로움이라는 겁니다. 즉 태만한 성화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처럼 고생을 안 해도 쉽게 쉽게 지킬 수 있는 방법, 즉 성경말씀을 자기 편안한 대로 지키면서 거룩은 거룩대로 챙기는 데서 오는 거룩함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님, 이 정도로 하면 저도 거룩이 되었지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편한 대로 살아가는 모습인데, 즉 "저는 주량을 하루에 소주 세 병에서 한 병으로 줄였으니까 엄청나게 성화가 된 것이지요?" 라는, 또한 "저는 유행가는 안 부르고 재즈를 부르니까, 그 정도는 괜찮겠지요?"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판단을 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우리를 '대신했다' !!
그리고 여기 교재에 "기만과 위선 속에의 소명과 사명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우리를 대신하셨다" 라고 하는데,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하나님은, 예수님이라고 해도 되는데, 즉 예수님은 심판주로서 그 다음에 뭡니까? 심판주로서 우리를 '대신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심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이 심판을 대신 받은 것이 아니고, 심판주로서 우리를 대신했다는 말입니다.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하는데, 즉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 받은 게 아니고, 심판해야 될 분이 그만 심판을 받아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심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판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심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아예 심판자체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유였고, 곧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에 우리가 참여해야 된다는 겁니다. 벌벌 떨지 말고, 자기 세계에서 우울증 걸리지 말고, 그냥 바깥으로 나오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 세계로 오면, 이미 우리는 심판이 없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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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그분의 책임 하에 두셨다. 그리하여 이제 그분은 짐 지고 비난당하고 유죄판결 받은 자로서 가짜로가 아니라 진짜로 고통을 받으신 분이다. 이런 일이 일어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죄가 인식된다. 즉 그분이 우리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무엇이 우리의 자리인지 결정된 것이다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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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은 누가 받았는가?
이렇게 그분이 진짜로 고통을 받았다는 말은, 그러면 우리한테 고통이 있단 말입니까? 아니면 없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우리한테는 고통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바로 그렇게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은, 누가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직도 옛날 습성이 남아서, 그래서 자기가 기대한대로 안 되면 우리 스스로, "나는 고통을 받아야 돼" 라고, 그렇게 자기가 자기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상당히 심리적인 것인데, 특히 개고기를 못 먹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즉 "이것을 먹으면 맛이 없는 거야" 라고 생각하니까 맛이 없는 겁니다. 맛이 있다고 여기고서 먹으면 맛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먹으면 맛이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들어가니까 맛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려 5번이나 시도해도 맛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아예 안 먹는다는 겁니다. (누가 그런가요? ㅋㅋ)
◈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사 !!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의 자리를 누구한테 빼앗겼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자기를 빼앗기고 교체를 당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민을 하고 걱정을 해도, 하지만 우리가 서있는 자리는 이미 예수님 자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 이라고, 즉 아까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런 자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 자리는 말고 그 위에 있는 덩치, 즉 몸체를 이야기하는데, 즉 "내가 믿음을 가져야 하늘의 온갖 보물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을 활용하지 않으면, 즉 롯데카드를(?) 안 긁으면 복을 못 받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바로, 우리의 자리에서 무엇이 차 올라오는가를 생각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것을 썩히면 저주받고, 활용하면 복을 받는다" 라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위선된 칭의요, 태만한 성화요" 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편안한 대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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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이 우리에게 취하신 바로 그 죄가 우리 자신의 죄로 보여질 수가 있다. 우리에게 죄가 용서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용서의 인식이 우리에게 죄의 인식이 되고, 이제는 물론 자기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및 그리스도의 인식이 된다(p297). 죄로부터 자유롭기에 순종이 가능한 것이다(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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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이 죄를 가져감으로 말미암아 !!
그분이 취하신 그 죄가, 즉 그분이 죄를 가져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서 뭔가가 빠져나갔다는 것이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도둑놈이 우리 집에 들어왔는데 뭘 가지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아저씨, 뭘 가지고 나와요?" 라고 하는데, 그런데 만약에 아저씨가 TV를 가지고 나간다면, "아저씨 뭘 가지고 나가요?" 라고 하면, "TV를 가지고 나갑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집에 가보니까 그만 TV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하, 나에게는 전에 TV가 있었지" 라고, 그렇게 그때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즉 도둑놈이 와서 무엇인가를 가져가야만, 비로소 자기 집에 이전부터 뭐가 있었는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죄를 가져가니까, 우리는 그 이전부터 예수님이 가져간 죄가 우리 곁에 있었었다는 것을 비로소 우리가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는 기간이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기간이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저주를 이야기하고, 성경에서 징벌을 이야기하고, 죄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주께서 가져가면서 그런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 성도는 평생을, '아하, 이런 죄가 있었어' !!
그렇게 이미 우리에게서 빼내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는 그전부터 자기에게 그러한 죄가 있었음을 그런 주님의 가져감을 통해서, "아하, 이런 죄가 있었어" 라고 비로소 깨닫는 기간이 바로 우리의 살아가는 평생의 기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교재에서는 "우리에게 죄가 용서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용서의 인식이 우리에게 죄의 인식이 되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칼 바르트가 주장하는 것이 뭡니까?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로소 그런 죄가 있었다고 하는 죄 인식이 새롭게 발생된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 인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식, 즉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서 죄로부터 자유롭기에 "이제는 순종을 안 합니다" 라고 하는 불순종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때부터 순종을 하는데 그것이 무슨 순종인고 하면, 죄가 뭔지를 알아 가는 순종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피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미 죄를 가져갔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게 가져간 죄에 대해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그것을 싫어한다거나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져갔으니 말입니다. 지금 저의 표현이 많이 모자라는데, 무슨 뜻인지 표현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 죄를 일일이 지적을 당하는 즐거움을 !!
예를 들어서, 이삿짐센터에서 와서 이삿짐 물건을 모두 다 가져간 이상에는 옛날 이삿짐이 있었던 그 자리에 대해서 하나하나 헤아리는 순종을 마다할 이유가, 즉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불순종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이런 죄가 있었구나, 전에는 이런 죄가 있었구나" 라고, 그것을 하나하나 지적을 당하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순종하는 즐거움 말입니다.
이것을 말로 하면 안 되고 성경을 봐야 되는데, 고린도후서 8장을 보겠습니다.
(고후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 8: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
여기 3절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라고 하는데, 표현이 참 재미있다는 겁니다. 자원을 하는데 어떻게 자원을 한다는 겁니까? 힘에 지나도록 자발적으로 자원을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4절과 5절에 보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를 들어서, 이미 우리가 철거대상이니 우리는 이미 이삿짐센터의 이삿짐 차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뒤에 나오는데, 우리는 이삿짐센터의 차에 놓여서 떠나는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몸 자체가 말입니다. 그렇게 떠나면서 자기가 떠나는 느낌, 즉 "화물차 속도가 시속 얼마예요?" 라고, 그렇게 그 속도감을 느끼는 순종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즉 "아하, 시원하다. 어서 떠나버리소" 라고, 즉 "이 세상에서 떠나니 기분이 좋습니다" 라는 순종을 왜 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 빠라바라빠라밤 ??
그렇게 순종을 못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떠나지 않고 옛날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니까, 그게 순종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주님이 운전기사로 해서 떠나는데, 그러면 트럭 뒷자리에 타고 있으면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린다는 겁니다. 바로 그 시원함, 즉 뭔가 자기가 이 자리에서 떠나서, 즉 죄의 자리에서 떠나서 천국에 가고 있다는 그 시원함이 있으면, 힘에 지나도록 자원을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화물차 뒷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기고, 그렇게 우리 몸을 먼저 주께 맡기고 주와 함께 떠나는 즐거움을 왜 우리가 만끽하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만끽하면 되는데, 속도감 있고 시원하니까 말입니다. "빠라바라빠라밤~" 라고, 그것을 왜 하는가요? 그것은 바로 떠나는 기쁨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이동하는 기쁨이 있는데, 물론 즐겁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꾸만 "내가 19살 때에 어떻고 저떻고" 라고, 자꾸만 과거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겁니다. 뒤에 나오는데 미리 보면 교재 6페이지에 "그분과 함께 나도" 라고 하는데, 그리고 7페이지에 보면, "과거는 끝장났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교재의 그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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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히 신앙은 겸손이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선택한 겸손은 아니다. 옛 교만을 다시 작동 못한다(p325). 그것은 과거가 끝장났기 때문이다. 낯선 오늘이 들이닥치는데 그 속에서 성도는 미래를 보장받는다. 그리스도의 역사 속을 질주하는 것이요 운동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르트는 '도중에 있는 자' 라고 표현한다(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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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중에 있는 자 !!
여기에 살펴보면 "과거는 끝장났기 때문에 낯선 오늘이 들이닥치는데, 그 속에서 성도는 미래를 보장받는다" 라고 하는데, 즉 우리는 이미 이삿짐 뒷좌석에 탔다는 겁니다. 이삿짐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역사 속을 질주하는 것이요, 운동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이삿짐과 더불어서 화물차의 뒤칸에 타고 있으면, 그런데 우리 곁에 있는 것은 과연 뭡니까? 그것이 바로 '죄' 라는 겁니다. 즉 지금 주께서 죄를 가지고 가시는데, 그런데 바로 그 죄 속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앉아 있으니, 그러면 우리 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 죄와 더불어서 나도 몽땅 지금 여기서 철거당하고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바로 그렇게 머리카락을 헤아리는 재미, 그것을 두고서 "그리스도의 역사 속을 질주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로 질주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운동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서 칼 바르트는 '도중에 있는 자' 라고 하는데, 그러므로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떠나고 있는, 또한 목적이 있는 자, 즉 여행 중에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성경말씀대로 표현을 하면 "너희는 객이요, 나그네이다" 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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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이란 이처럼 예수님에게서 생긴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신앙과 만나서 충돌을 일으켰다. 오로지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으로 신앙이 발생된 것이다. 부활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으심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들이 없이는 계시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곧 "예수께서 사신다" 라는 데는 불가피하게 "그분과 함께 나도" 라는 것이 따라간다(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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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중심의 역사와 주님 중심의 묵시 !!
여기에 보면 "불가피하게 그분과 함께 나도 같이 간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신앙이란 이처럼 예수님에게서 생긴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칼빈주의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칼빈주의는 신앙의 주체가 본인인데 비해서, 칼 바르트는 신앙의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는 자기 중심의 역사이고, 주님은 주님 중심의 묵시이니 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신앙과 만나서 충돌을 일으켰다" 라고 하는데, 아까 제가 그림을 그렸는데, 인간의 얼굴을 말입니다. 이렇게 코가 있고 귀가 있고 눈이 있는데, 이 인간이 뭘 쳐다봅니까? "야,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야 하나님을 알텐데. 아하, 언약중심이구나. 언약의 내용은 그리스도구나" 라고 하면서, 우리는 이 노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베드로의 가슴에 부딪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 사람의 일과 주님의 일 !!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면 알 건데. 야, 언약이 있구나. 그러니 언약을 믿어야지. 예수님 믿어야지" 라는 것인데,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어야지"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뭐가 됩니까? 그것이 곧 사람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 하나님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서 떠나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면, 그러면 베드로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방해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 믿음 - 예수님의 액션을 믿는 것 !!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뿐만 아니고 사탄까지 장악하기 때문에, 베드로를 지옥에 넘어뜨리는 사탄의 역사까지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셔서, 그러한 모든 방해를 제거하시고, 마귀 안에 있는 베드로까지 건져내시는 일까지도 누구의 몫, 즉 누구의 숙제라는 말입니까? 그것을 예수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로 그것을 믿는 것, 그러한 예수님의 액션을 믿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에서 소망이 나오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교재에 보면 "부활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으심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들 없이는 계시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곧 '예수께서 사신다'는 데는 불가피하게 "그분과 함께 나도"라는 것이 따라간다.” 그런데 여기서 칼 바르트는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만, 이것을 좀더 이야기하면, 성도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집, 즉 주님의 집이 되기 때문에, 자기 집을 찾아서 그리스도께서 임하신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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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의 운명이 돌이킬 수가 없는 이유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올리우심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과 '장차'를 자신을 위해 활짝 열어놓으셨다(p352).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의 판단이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라는 이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서 신앙은 이 약속에 대한 그냥 대답일 뿐이지 결코 자기 자신을 칭의의 수단으로 제공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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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사건은 이미 엎어진 물 !!
여기에 보면 "성도의 운명이 돌이킬 수가 없는 이유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엎어진 물이기 때문에 전혀 다시 주어서 담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이미 일어난 사건을 취소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는데,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성만찬을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주께서 오실 때까지 되풀이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을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한다" 라고 말입니다. 지난주 주일오전에 설교를 했는데 말입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묵시노선에 '이미'와 '아직'을 !!
그리고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올리우심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과 '장차'를 자신을 위해 활짝 열어놓으셨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예수님의 낮추심과 올리심에 대해서 사건화를 시켜버린 것이 곧 십자가고, 바로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지금'과 '장차'를 이제는 인간 역사 속에 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묵시로 만든 그 노선 속에다가 '이미'와 '아직'을 담아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교재에 보면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의 판단이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라는 이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죽이고 살리는' 라고 하는데, 이것이 새삼스럽게 이게 어렵다는 겁니다. 이것이 왜 어려운가요?
누구를 구원하고, 구원하지 않는 것은 새삼스럽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잘 보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구원문제는 구원받을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결정한다는 겁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는 자를 내가 살렸다" 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그러면 구원은 누가 결정을?
그런데 칼빈신학, 즉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구원을 받는 문제는 누가 결정을 한다고 합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또한 자기가 예수님을 안 믿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하지만 칼 바르트 신학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의 사건은 우리 인간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일으킨 사건, 즉 십자가의 죽음에서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누구를 구원하고 구원하지 않는 구원의 문제는 이미 주님의 소관으로 넘어가 버렸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아닌 예수님의 소관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신학은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안 받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신학에서는 사건을 누가 일으켜야 됩니까? 자기가 사건을 일으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만약에 치매에 걸린다든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아프다든지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만약에 복음을 못 들을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전혀 사건을 일으킬 이유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친구한테 전화해서 "야, 내가 보내준 책을 봤나?" 라고 하니까, "요새 바빠서 책도 못 봤어" 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명저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책을 사서 보내줘도,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볼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렇게 아직도 자기 자유를 너무너무 많이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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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상수훈이 전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옛 피조물의 삶을 건전하게 또 가치 있게 지속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운동이 그 피조물에 안에 살아있기에 나타나는 삶이다(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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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란?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무엇인고 하니, 옛 피조물의 삶을 건전하게 바꾸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움직이는 삶이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까지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의 자리, 즉 내가 주체가 되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주체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뭘 알아야 되는 겁니까? 내가 주체가 된 삶은 종결돼야 되고, 그것은 이미 끝나야 되는데, 그런데 개혁주의에선 어떻게 합니까? 말은 주체가 예수님이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실제로는 주체는 누가 합니까? 자기가 주체인 줄로 알고 닦달을 내기는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자꾸만 자기가 다짐을 하고 결심하고 자기가 자신을 격려해야 되는, 그런 한계점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 스스로를 격려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힘 빠져서 이제는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 라고 하면서 주저앉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언제 예수님이 천당에 힘내서 가라고 하신 적이 있나요?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가는 것이지 말입니다. 결코 우리 인간들이 힘을 내고 내서 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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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란 결코 그리스도인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경이 이루어놓은 것을 말한다(p392). 교회는 성장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장하고 있는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바를 물어야 한다(p390). 교회 공동체 자신을 정당하다고 하면 교회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불법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p391). 이렇게 되면 율법을 가지고 복음을 몰아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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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 - 교회란 결코 그리스도인이 이루지 못한 것 !!
그래서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여기 교재에 있듯이, "교회란 결코 그리스도인이 이루지 못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인데,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이뤄내지 못한 것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를 보고서 우리가 이뤘다고 한다면, 그건 성경과는 다른 전혀 엉뚱한 교회를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갓바위 교회를 말입니다. 그런 것은 교회가 아니고 종교단체이고 친목단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 교회는 무엇입니까? 항상 교회를 보면서 "아하,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이로구나" 라고, 그러한 생각이 들 때, 그것이 바로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전혀 우리들의 힘으로 해내지 못한 것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 누가 교회를 사건을 일으켜서 만들었는가?
그러니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떻게 이 교회가 존재합니까?" 라고, 사건을 물어야 되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어떻게 성장합니까?" 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렇게 교회를 사건을 일으켜서 만들었습니까?" 라고 물을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자신을 정당하다고 하면, 교회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불법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있는 교회를 우리 교회는 괜찮고 정당하다고 주장을 한다고 하면, 가장 나쁜 방식으로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을 가지고 복음을 몰아낸다는 겁니다. 즉 교회법이 어떻게 한다고요? 율법을 가지고 뭘 몰아낸다는 겁니까? 복음을 쫓아낸다는 말입니다. 즉 "내 말을 안 들으려면 나가"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목사들이나 장로들이 하는 짓이 아닙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요?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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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트는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성도에게는 영원히 남아 있는 본래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신앙도 희망도 남는다. 그 까닭은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고전 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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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는 대목을 그렇게 풀이를 한다는 겁니다. 신앙도 희망도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사랑이 남기 때문에, 소망도 남게 되고, 희망도 남게 된다고 본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마지막 구절을 설명할 때 말입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칼 바르트의 문제점에 대해서 !!
그러면 이제 남은 시간 20분 동안에 칼 바르트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는데, 여기 "(1) 바르트의 신학에서의 취약점은?" 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곧 바로 "(2) 바르트는 피 중심이 아니다" 라는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칼 바르트에 대해서 왜 이런 비판을 할 수 있는고 하니까, 칼 바르트는 예수님의 피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존 중심의 언약을 펼치다보니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9장을 잠깐 보면, 13절에 보면 무지개가 뜬다는 겁니다. 무지개가 말입니다.
(창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인데, 즉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지개가 뜨는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무지개 언약을 두고서 창세기 9장 6절에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지상에는 뭐가 있습니까? 지상에는 피가 있고, 하늘에 무지개가 떠있다는 말입니다.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 예수님은 언약대로 반드시 피를 흘려야만 !!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할 때, 그것을 포괄적으로 두루뭉실하게 표현하면, 물론 그 안에 이러한 내용이 다 포함됩니다만, 그러나 좀더 깊숙이 들어가서, 이것이 예수님의 기적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병 고침입니까?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서 뭐가 중심이었습니까?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라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에는 이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마저도 이 언약에, 즉 피 언약에, 즉 피와 관련된 무지개의 용서인데, 그러니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의 성령에 응한 대로, 즉 성경에 기록된 언약대로, 즉 주께서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그렇게 반드시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칼 바르트처럼 예수님의 실존 중심으로 볼 것 같으면, 예수님도 실존이고, 또한 우리 인간도 역시 실존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의 논리대로 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저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피를 흘려버리면, 그것은 전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흘리심에서 나오는 그 의(義), 즉 예수님의 그러한 속성을 위하여 우리가 여기 동원이 되었다고 하는 칼 바르트의 주장이 좀 더 분명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내막이 말입니다.
◈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을 모방할 수 있는가?
그런데 만약에 피 중심이 안 되어버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행동, 즉 낮아지신 행동을 우리 실존이 그대로 모방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낮아지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럼 뭐가 빠지는고 하니, 가장 중요한 핵심인 예수님의 피가 그만 빠져버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가 빠져버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낮아져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겸손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처럼 그렇게 아버지를 끝까지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 '피'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 !!
그러므로 피가 주는 효력 자체,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데, 즉 하나님이 정하신 피로서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인간의 실존은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피로 말미암아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라는 겁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데, 즉 예수님이 피를 흘린다고 하는 지혜는,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그 깊은 것은 오직 성령에서만 나오는 지혜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성령의 지혜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대신해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피에 있다는 말입니다. 즉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는 겁니다.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여기서 로마서 5장 9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예수님의 '순종'이 아닌, '피' !!
여기에 분명히 피가 나오는데, 그런데 피가 나오는 것을 칼 바르트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 '피' 라는 자리에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낮아지심, 예수님의 겸손을 집어넣는데, 그런데 그것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실존과 우리 실존이 만나야 되는데, 하지만 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즉 서로 실존과 실존이 만나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 만나서 어떻게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피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로 끌어당겨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깨닫도록 해서, 바로 그런 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건져냄을 받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신명기에서 "신접한 여인을 죽여라" 라고 했을 때,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당을 죽인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즉 성경의 모든 것을 우리가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고 해서,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바지에 똥을 싸더라도 '피'만 있으면 !!
그러니 항상 그 안에서, 그런 행동을 실천에 옮겨도 구원이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면, 치매가 걸리든 바지에 똥을 싸던 살아가면서 뭘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 즉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그 피와 살, 바로 그 피 흘리심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생각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예수님처럼 순종하라고 한다면,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순종을 안 해도 구원을 받지요? 모든 것이 '예'가 되니까, 저는 순종을 하지 않으렵니다" 라고, 자꾸만 실존을 가지고 나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무엇을 해도 죄인데 무엇 때문에 행동합니까? 무엇을 하더라도 죄라면서요?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렵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걸 순종할까? 말까?" 라는 것도 아니고, 그 이전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를 알았으니까 순종해야지" 라는 것도 이것도 아니고, 그냥 피로 구원받는 것이지, 피를 알고 순종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 '피' 중심의 신학이 전무하기에 !!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피 중심의 신학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도 보면 참으로 대단하고 진짜 똑똑한데, 그러면 우리도 그가 가지고 있는 같은 지식을 알고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칼 바르트를 공부해서, 즉 그와 똑같은 지식을 가지고 생각을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즉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바르트는 놓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교재 8페이지에 '대립자'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단 교재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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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바르트는 '대립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예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러한 논리에서 필히 '말씀 사건의 우발성과 주체 정립의 연관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사건의 우발성'이라면 주체는 일시적 주체로 머물고, 이 주체관에 준해서 수립한 ---------------------------------
◈ 오잉, 웬 '대립자' ??
이 '대립자' 라는 용어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지금 교재에 있는 이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까, 칼 바르트 그 이전까지 철학은 아직까지 주체철학이 발달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냥 '대립자'로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 계시를 만드는 기계 때문에 !!
아까 첫 시간에 이야기하기를, 우리 안에는 계시를 만드는 기계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 좀 설명해보겠는데, 즉 우리가 주체 안에 있으면, 주체 안에는 어떤 계시가 와도 나의 계시로 만드는 기계가 있다 는 말입니다. 그 기계가, 이 주체가 타인의 주체, 즉 타인의 욕망에 환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마치 안 지켜도 지킨 것처럼, 그렇게 타인의 욕망을 내가 이미 가진 것처럼 착각을 하게 하는, 그러한 기계장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라캉' 이란 사람이 설명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꾸만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새로운 타인의 욕망이 오면 환상이 깨지고, 또 새로운 환상으로 이끌어져간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끌어진다' 라는 말은, 이것 탔다가 다른 걸 탔다가 하는 겁니다. 즉 "드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