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2
[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2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4)
[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2
09,11,21 강의 이근호, 정리 한윤범
◈ 하나님의 계시는 언약으로 축약이 !!
이제 시작합시다.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으로 축소가 되는고 하면, 여기서 이 축소는 축약, 혹은 함축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즉 하나님의 계시는 언약으로 축약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으로 축약이 되는 이유는, 그 언약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정도가 아니고, 언약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이 방향으로 거꾸로 해서 언약도 만들어내고, 또한 계시도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쳐다본다고 하면, 사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신의 계시인데, 여기 계시 앞에다 무엇을 하나 넣으면, 그냥 계시라고 하면 조금은 섭섭하니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에서 신의 계시,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아니까, 그 계시가 어떻게 미끄러져 가는가를 한번 살펴보자는 겁니다.
◈ 야, 언약이다. 고 !! 그런데?
그렇게 쳐다보니까 어떻습니까? 그 계시가 언약적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눈총을 바로 그 언약에다 고정을 시켜서 "이제 언약이다. 고고!" 라고 하는데, 그리고 언약 속에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출발이다. 가자!" 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예수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는 이 언약하고, 그리고 계시로서 우리에게 온 것과는 방향이 서로 맞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신의 계시는 언약이구나. 야, 참으로 쉽다. 그리고 이 언약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으니, 그러니 그 예수를 믿으면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와서는 "너 어디 아프냐? 한 대 맞을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그런 생각이 잘못이라고 치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 예수 그리스도, 말씀, 선포 !!
바로 그렇게 치고 들어와서 우리의 가슴에다 3가지 종류의 계시가 성립이 되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는 계시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고, 또 하나는 '말씀' 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는 그 '말씀의 선포' 인데, 쉽게 말해서 '설교' 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3가지가 우리 가슴에 와서 닿게 되는데, 그러니 이렇게 기존의 우리가 추종하는 노선과 예수님께서 내세우는 노선과 서로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 판에 도달하는 3가지의 계시 유형으로서, 그렇게 계시가 우리에게 와서 충돌하고 공격하는 식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계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 말씀의 권위로 공격할 수 있어야 !!
그렇다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고 하면, "니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부정을 하는가? 웃기지 마라. 감히 성경말씀에 대해서 소위 자유 비평가들이 마구 파헤치는데, J문서, P문서, 그렇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럴 자격이 없어. 그러니 감히 복음적인 설교에 대해서 비판하지마" 라고, 그렇게 절대적 권위로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3가지에 대해서 반발이 나오기 때문에, 즉 "예수? 그분은 우리가 알아서 믿으면 되는데" 라고 하는 반발이, 그리고 "성경말씀? 그것은 옛날 과거에 편집되고 다시 조립한 것인데" 라는 반발이, 그리고 "설교? 그것은 개나 소나 누구든지 다하는 것인데" 라고 하는 반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칼 바르트의 경우에는, 바로 이러한 식의 반발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위로서 충돌을 일으킬 때, 여기에서 비로소 구원에 합당한 회개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회개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도 나오고, 소망도, 사랑도 나온다는 겁니다.
◈ 칼빈과 칼 바르트 !!
그렇다면 그 이전의 칼빈은 뭐라고 했느냐? 칼빈신학은 이러한 충돌과 마찰로 인해서 회개와,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칭의나 영화로움 등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그 선물로 믿음을 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내부에서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또한 사랑이 생겨서, 그렇게 해서 갖고 있는 믿음으로 "자, 이제 성경을 한번 볼까나?" 라고, 그렇게 믿음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괜찮은 해석이 되고, 또한 그런 소망과 사랑으로 사도바울의 권면을 행동으로 옮기 되면, 그것이 뭐가 되겠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성화론이 된다는 겁니다. .
하지만 칼 바르트는 그것이 아니라, 이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나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가 부딪치는 그 틈새에서 사건으로 발생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서 기존 칼빈신학은 성령이 선물로 주었기 때문에 자기 믿음은 자기가 늘 갖고 있다는 겁니다.
◈ '예수님' 인가? '나' 인가?
그렇게 되니, 칼빈에 의하면 한번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해서 믿음, 소망, 사랑이 늘 갖고 있어서, 그래서 그 가진 믿음을 가지고서, 즉 "믿음을 잘 활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것은 누구의 결정이라는 겁니까? 예수님의 결정이 아니라, 그것은 '나'의 결정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서 한번 믿어보자" 하면 믿게 되고, 또한 "세상에 나가서 돈을 좀 벌까? 믿음생활을 5년만 좀 미루겠습니다. 돈을 벌어서 교회에 나오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여유도 인간에게는 있다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렇게 주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칼빈신학에 의하면 여러분의 믿음을 썩히지 마시고 활용하시면,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보너스를 받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늘의 모든 축복을 믿음을 활용하면 주시고, 만약에 믿음을 나태하게 방치하면 그런 보너스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심을 내서 주를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 결국에는, '여러분, 나를 본 받으세요' !!
그렇다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것이 뭐겠어요? 교인들이 "그렇다면 목사님, 열심을 내어서 주를 섬기는 모델이 되는 분을 제시해주면 우리가 따라서 하겠는데, 과연 누가 믿음대로 사는 모델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교회에서 누구를 제시하겠습니까? 역시 목사 본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나오는데, "여러분, 나를 본 받으세요. 나처럼 하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든지, 그런데 그것이 너무 경솔하다든지 혹은 너무나 속이 보인다 싶으면, 그 교회에서 돈 많은 사람이나, 기도를 많이 하는 권사나, 예언이나 투시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동원해서, 다음과 같이 하는 겁니다.
즉 "저분이 능력이 있는 것은 이번에 기도원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40일 금식해서 얻은 능력인데, 그러니 여러분도 다 때려치우고, 이번에 집단적으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서 은혜를 받아 회개해서, 우리도 성경에서 약속한 하늘의 복을 듬뿍 받아서, 세상적 복과 하늘의 복을 다 누립시다" 라고 나오는 것이 바로 칼빈신학이었단 말입니다. 바로 그 기존신학에 대해서 칼 바르트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바로 비언약적인 이방종교라고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 말씀사건의 대상이 곧 '실존' !!
그렇다고 하면 칼 바르트에 있어서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문자로서 성경을 해독하거나 풀이할 문제가 아니고, 사건화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신학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겁니다. (녹취자 - 목사님, 과연 칼 바르트가 하이데거 철학을 신학화시켰다고 평가를 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그 사건의 대상이 있는데, 사건을 칼 바르트는 '말씀 사건' 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이러한 말씀 사건이 터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건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을 바로 '실존'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칼 바르트 뿐만이 아니고 불트만도 역시 그렇게 주장했는데,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화가 되어서 그 대상을 공격하게 되면, 여기서 그 대상인 실존은 그만 깨어지고 새로운 실존이 나오는데,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칼빈신학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뭡니까?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런데 칼빈신학에서 하나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그걸 공유적 속성이라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뭔가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겁니다.
◈ 아니, 측은지심이 공유적 속성 ??
그렇게 남아있는 것이 뭡니까? 선이 좋은 줄 알고, 거룩이 좋은 줄 알고, 양심대로 사는 것, 그리고 남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과 같은 것인데, 바로 그런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 즉 비록 죽어있지만 말씀이 와서 치게 되면 다시금 되살아날 수 있는 그 어떤 잠재적인 여지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즉 성경말씀을 보고 성경공부를 하면 죽었던 형상이 되살아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칼빈신학에서는 에베소서 5장 1절의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라는 하는데, 그런 말씀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일단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용서를 받아서, 그 다음에는 성령을 받아서 신의 형상을 본받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에까지 자라난다고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공유적 속성이라는 것인데, 즉 같은 속성을 개발해보자는 겁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수양, 즉 잠재가 되어있는 신성을 개발해서, "아니, 내가 이렇게 착할 수가 있어?" 라고, 그렇게 자기 감탄에 빠지는 것, 그것이 자기 수양이라는 겁니다. 그런 자기 수양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성령께서 선물로 준 믿음, 소망, 사랑을 활용한다는 겁니다.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게 되면, 즉 그렇게 활용을 하게 되면 신의 형상을 더욱 더 본받을 수가 있다고 본다는 말입니다.
◈ 말씀사건, 언약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
하지만 반면에 칼 바르트는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사건이 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기에서 교체작업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교체작업을 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 속에 숨어있던 죄가 하나 둘, 그렇게 발각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작업까지도 포함을 시켜서, 그것을 '언약사건' 이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말씀사건' 이고,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말씀사건인 동시에 언약사건, 그러니 결국에는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건이 말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칼' 성을 가졌는데, 그렇게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의 사건이 된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파헤칠 것은 뭡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냐?" 라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것이 칼 바르트에서 제일로 어려운 대목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예수님의 사건이 터지게 될 때,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터지고, 그 다음의 사건이 언약사건이 되고, 그 언약사건이 와야 말씀의 사건화가 되어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있으니까 말입니다.
◈ 성부 하나님 앞에서 성자는 어떤 분인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라는 이 문제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어떻게 이것을 전개하느냐 하면, 예수님마저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있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의 사건화가 됨으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의 사건이 모델이 되어서 앞으로 구원을 받아야될 모든 피조물에게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같이 병행해서, 그렇게 예수님의 주도 아래 일어나는 일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야기가 하는 초점이 갑자기 어디로 모아졌지요? 이제는 모든 곁가지들은 모두가 다 떨어져나가고, 오로지 남는 것은 "성부 하나님 앞에서 성자는 어떤 분인가?" 라는, 거기에만 초점이 맞추어지고 모인다는 말입니다.
◈ 칼 바르트씨, 그러면 인간은 어디로?
바로 이런 칼 바르트의 예수님에 대한 관점 때문에,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칼 바르트를 반대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 앞과 예수님 앞에서 사건을 일으키면 방금 제가 뭐가 떨어져나간다고 했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떨어져나가고 만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떨어져나간 인간들 속에 바로 신학자 본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내 자식과 내 아내가, 또한 누가 뭐라고 해도 구원을 받아야 될 우리 아버지와 우리 엄마가, 이렇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떨어져나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에 가서 아무리 기도해도, 즉 "내 아들을 구원해주세요, 내 아버지를, 내 엄마를 구원해주세요" 라는 기도가 소용이 있습니까? 모두가 다 떨어져나가야 되니,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떨쳐내는 신학이라고 하면, 그런 칼 바르트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교회라고 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오겠습니까? 아무리 오고 싶어도 오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도저히 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 우리교회 - 여기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
저기 팔공산에 1년에 250만 명이 온다는 갓바위에, "여기는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떤 효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고 간판을 내걸어버리면 누가 오겠어요? 당연히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 우리교회에다가 "여기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라고, 그런 간판을 걸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칼 바르트가 이렇게 그야말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일변도로 나가니까, 여기에 대한 반발이 그야말로 엄청난 겁니다. 칼 바르트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맞고 안 맞고, 또한 논리가 맞고 안 맞고 하는 것을 떠나서, 그런 것은 목회에 전혀 쓸모가 없는 신학이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 인기가 없는 복음도 과연 복음인가?
목회가 뭡니까?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에서 사람을 끌어 모아서, 그게 돈이 되고 목사 노후대책이 되어야만 되는데, 그런데 사람을 끌어당기는 유인책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말로 해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상품화되지 않는, 즉 시장에 내놔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상품은 아무리 노동시간을 집어넣어도 팔리지 않는 상품의 경우에, 그 상품의 모든 가치는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고 말입니다.
이렇게 팔리지 않는 상품은 상품이 아닌데, 그러니 지금과 같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복음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인기를 끊어놓고 우리 시작하자" 라고 칼 바르트가 이야기했을 때, 그렇게 사람들을 끊어놓자는 그것 때문에 칼 바르트를 싫어하는 겁니다. 즉 칼 바르트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교회에서 장사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 칼 바르트도 민중의 한의 풀어주어야 ??
그러니 지금도 칼 바르트 신학을 거론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칼 바르트의 중심적인 정신, 즉 그의 사상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칼 바르트의 유명세를, 즉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만 칼 바르트가 상품화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대단한 신학적 권위를 편집하고 왜곡시켜서 뭔가 민중의 아픔과 같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칼 바르트를, 대중의 한 맺힌 걸 풀어주는 칼 바르트로, 그런 쪽으로 변개를 시킨다는 겁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그의 신학과는 정반대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언급했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 맺힌 사람들에게 상품으로서 과시가 되니 말입니다.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우리나라 민중의 밑바탕에 뭐가 있다고요? 그것이 '무교(巫敎)' 라는 겁니다. 무교란 뜻이 뭡니까? "우리가 잘 살든 못 살든 간에, 전부 하나가 되자. 우리는 모두가 하나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보고 말입니다. 하지만 일단 하나가 되게 만들기만 하면 그건 교회장사가 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봅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 칼 바르트가 내세우는 성경구절을 들어보면 마태복음 3장 17절인데, 즉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는 겁니다.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아들개념은 택함의 개념 !!
칼 바르트는 해석을 할 때 언약으로 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칼 바르트 개념이 등장하는데, 즉 아들 개념은 '택함의 개념' 이란 겁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택하지 않으면 아들이 될 수 없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바로 이런 것이 칼 바르트 신학에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대목인데 말입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할 테니 잘 한번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할 때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우리가 보통 택한다고 하면 여러 명이 있는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고 여기는데, 즉 "너가 아니고, 니 말이야" 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이 사건화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만 택했다" 라고 했을 때, 이렇게 예수님에게 속해있는 사람, 즉 아담인데(?), 이 아담이 속한 모든 것이 함께 선택이란 이름으로 아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선택을 해서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선택 !!
그렇다면 여기에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는데, 즉 모든 인간을 대표한 분 앞에서의 아들이, 즉 택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선택은 예수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포함된 모든 자에게 전부다 같이 쏟아지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면, 처음의 그 전제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들을 다 제쳐놔 버린다는 겁니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하고 아들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창세 이전에는 말입니다. 그러니 창조를 하더라도 하나님과 아들의 의논에 따라서 창조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조는 뒷전이고, 즉 창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부터 정립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과 아들 관계부터 먼저 정립이 되어야만, 그러한 관계를 증거하고 증명하는 것에 한해서 창조라고 하는 이 대자연이 뒤 배경으로서, 그렇게 그 다음에 만들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 창조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어야 !!
그렇다면 이 세상, 즉 자연세계라고 하는 것은, 그냥 자연세계가 아니고 누구를 증거하는 자연세계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흔히 우리가 알기에는 예수님이라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자연이 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칼 바르트 본인이 헷갈려서 그런지, 아니면 뭔가가 좀 모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튼 무엇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고 피조물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도 있고, 또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다는 대목도 모두 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을 여지를 만들어놓았다는 말입니다.
◈ 오잉, 만인 구원설 !!
어떤 비판의 여지가 생기느냐 하면, 만약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다고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아서 선택된 자로서 버림을 받고, 또한 선택된 자로서 버림받은 데서 다시 구원이 되어버리면, 그러면 누구도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모든 피조세계, 즉 자연세계도 구원을 받은 것이 되어서, 즉 모든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만인 구원설'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에 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대표한 사람이 버림을 받았다가 다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인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계가 있다고 하면, 하나님과 아들 관계에서는 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관계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주변에는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버려야 될 사람이 있고, 또한 버림을 받은 데서 탕자처럼 되찾음 받는 사람 따로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옥에 갈 사람도 있고, 또한 천국에 갈 사람도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점을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데, 즉 "이 세상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사이의 속성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곧 공의의 속성과 사랑의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라는 말씀은 그 전제로 뭘 하는고 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무서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 난 뒤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 천국과 지옥이 있는 이유는?
그러니 지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천국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 즉 지옥은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즉 천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싫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살기 좋은 곳이 아니고, "그야말로 죄로 말미암아서 죽은 인간들, 너거들은 내 사랑이 아니면 지옥에 갔어야 돼" 라는 것을 마음껏 보여주는 장소, 그것이 곧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그런데 칼 바르트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마도 자기 논리상 편리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세계가 있다는 쪽으로 비중을 두고 그만 논리를 전개해버렸다는 겁니다.
◈ 교수님은 만인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십니까?
그것이 존 갓세이가 편집한 '칼 바르트와의 대화' 라는 책에도 보면 나오는데, 일종의 녹취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떤 대학원생이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는데, 즉 "교수님은 만인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이렇게 답변하는 겁니다.
"제가 당신에게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어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가를 보여줍니다. 즉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 구원이 되고 안 되고는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이 '교회 교의학' 라는 책에도 일부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것은 대학원생의 질문에 해답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문제를 회피하는 식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칼 바르트의 '선택'이 나오는데, 교재가 있으니까 봅시다. 교재 5페이지 한번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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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선택 - 하나님의 선택에는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신비와 하나님의 의(義)가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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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 - 하나님의 의(義)는 성도의 결단력 ??
여기에 보면 이미 이렇게 의(義)가 명시되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칼빈신학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의 결단력에 있지요. 즉 내가 믿으면, 물론 행함이 아니고 말입니다. 내가 믿으면 나는 뭐가 된다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칼빈신학에서 의는 누구의 손에 달렸습니까? 자기가 믿으면 의가 되고, 또한 안 믿으면 의가 없는데, 그래서 그 의를 놓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칼빈신학에서 늘 믿음을 유지하지 해야만 의인이 되기 때문에, 계속 믿음을 유지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칼빈신학에서처럼 그렇게 믿음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 믿음은 과연 누구의 손에?
그렇다고 하면 과연 어떤 식으로 그 믿음을 유지를 해야만 될지, 혹시 여러분은 해결책을 알고 있습니까? 결국은 칼빈신학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믿고자 하는 본인을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즉 본인의 결심과 각오를 믿어야 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고자 애쓰고 있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 기대를 하자는 말입니다. 즉 "나는 하면 돼. 나는 할 수 있어" 라는, 그것을 믿으란 말입니다. "여러분, 용기를 가지세요.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그걸 계속해서 목사가 이야기해야 된다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는 거야" 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뭡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최면이라는 겁니다. "문제없어, 문제없어,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단 말이야" 라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인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요? 그것이 문제인데, 치매에 걸리면 70년, 80년 믿은 것이 어떻게 됩니까? 말짱 도루묵이 되는데, 그만 다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 칼 바르트 - 언약사건이 주어지는 것을 믿는다 !!
그래서 칼 바르트는 언약의 일관성을 주장하는데, 아까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의 일관성리고 했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나요? 예수 그리스도, 즉 언약의 일관성인데 뭘 믿는고 하니, 우리는 흔히 "언약을 믿는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칼 바르트는 "언약사건이 주어지는 것을 믿는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건으로 주어지는 것을 믿는다" 라는 것이고, 그것을 또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가졌던 그 관계, 즉 예수님이 받았던 모든 것이 사건화가 되어서, 예수님이 자기 일을 계속해서 벌이고 있음을 우리가 믿나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믿음은 나의 결심이 아니고, 그렇게 "내 믿나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표면효과, 즉 결과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믿나이다" 한 것은, 사실은 내가 믿는 게 아니고 누가 믿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믿습니다" 라고 하는 그 믿음이 그대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사건화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 칼 바르트 - 말씀이 계시로서 우리에게 사건화가 되어서 다가올 때만 !!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포함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 포함이 되면서, 예수님과 아버지에 있던 사건은 역사로서, 즉 창조 이전에 있는 것인데, 이러한 창조이전의 사건을 묵시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바로 그 묵시사건 안에 역사적인 존재인 우리가 가담이 되는 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역사가 있고, 따로 묵시세계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모든 성경해석은 무엇인고 하니까, 언약이 묵시적인 사건화가 되어서, 즉 새로운 양식의 말씀이 계시로서 우리에게 사건화가 되어서 다가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해석할 때는 역사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묵시로 해석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교재 3번에 나오는데, 일단 4번을 하고 난 뒤에 3번 잠깐 다시 보겠습니다.
◈ 역사는, 인간 기억의 사슬고리 !!
아무튼 묵시라고 했을 때 역사는 다른 것인데, 역사는 인간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들 중에서 기억할 만한 것만 기억하는데, 그래서 '역사' 라고 하는 것은 두 글자로 다른 말로 '기억'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미아 씨, 혹시나 어릴 때가 기억납니까? 기억이 안 나는 것은 미아 씨의 역사 속에 포함이 될까요? 안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기억이 안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고르고 골라서 사슬처럼 이어놓은 것, 그것이 곧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역사 속에는 반드시 인간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묵시 안에 뭐가 있겠어요? 역사가 인간의 자유라고 하면, 묵시는 누구의 자유입니까? 여기 5페이지에 하나님의 자유가 나오는데, 즉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 자유를 하나로 다 해결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사실은 인간의 자유보다도 하나님의 자유 편에 서서 하지만 말입니다.
그 다음에 교재 5페이지 '하나님의 선택'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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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선택받는 인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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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주(主)가 되셔서 !!
이렇게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니까, 여기에서는 뭐가 작용합니까? 하나님의 자유를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 라는 것은 누구의 마음대로 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마음대로 인데, 그런데 바로 그것이 예수님 중심이 되니까, 하나님 마음대로가 아니고 예수님 마음대로 라는 겁니다. (??)
그러니까 묵시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주가 되겠지만, 역사 속에서는 누가 주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왔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는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그래서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가 묵시적인 사건이 되고, 그것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해석을 해야 되는데, 그러면 성경의 어떤 해석도 그 배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가 있으니까, 즉 성경의 어느 구절을 해석해도 반드시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라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지게 되고, 그것이 제대로 된 설교인데, 그것을 칼 바르트는 '복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즉 칼 바르트가 자꾸만 우려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했다" 라는 것은 강조점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리 칼 바르트을 말을 들어도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에 관심이 가는 겁니다. 그러면 칼 바르트의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이 구원하셨다 !! 내가 구원을 받았다 ??
다시 말해서, "아하, 예수님이 구원하셨다" 라는 것을 믿어야 될 텐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하셔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에 자꾸 관심이 가있고, 거기에 온통 마음이 가있으니, 칼 바르트는 이러한 것을 깨부수기 위해서 무척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구원을 하셨다고 강조점을 두는 것이나, 또한 예수님이 구원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나, 서로가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칼 바르트는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면, 그것이 나중에 나오는데, 즉 예수님이 구원했다고 하면 마음이 낮아지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하셔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버리면,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에 낮아지는 마음이 아니고, 우쭐대는 마음, 쫄랑대는 마음, 거만한 마음이 그만 생겨버리니까, 이것은 그리스도가 원하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뒤에 나오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하셨다" 라는 말이나, "예수님이 구원해서 내가 구원받았다" 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하겠지만, 그러나 나중에 성도의 삶과 생활에 그것을 연관시켜버리면, 그것은 절대로 같은 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는 그것까지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칼빈신학에 있어서 성도의 삶은 그야말로 완전히 다 깨져버리는데, 즉 예수님을 믿는 것도 내가 믿었고, 그 다음부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도 내가 사니까, 그것이 얼마나 내가 잘난 존재이냐고, 바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칼 바르트의 주장과는 완전히 딴판이라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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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예수님에 의하여, 그리고 말미암아 수행된 선택이며, 이 선택이 곧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선택이기도 하다. 그런데 칼빈의 오류는 예수님을 지나쳐서 하나님 선택과 곧 바로 인간 선택을 연결했기 때문에, 즉 선택론에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리시켜 버린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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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칼 바르트는 뭘 강조하느냐 하면, 이것은 바로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즉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나오는데,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 뭘 빠뜨리느냐 하면,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것을 빼먹진 않았지만, 그러나 실상은 빼먹는 식으로 그만 해석을 해버렸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그냥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택해서 구원하셨다" 라는 겁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하나님이 인간을 창세 전에 택했다 ??
이것이 과연 맞습니까? 칼 바르트는 그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칼빈의 경우에는, 하나님 있고 인간 있는데, 즉 하나님도 괜찮은 하나님이고 인간도 괜찮은 인간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어떻게 구원되는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 행함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사 구원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관심사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괜찮은 나를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구원했느냐 하면, 창세 전부터 선택해서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예수 안에서' 라는 것이 그만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칼빈의 신학을 하는 사람, 즉 개혁주의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그것을 집어넣고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대충하고 넘어가자는 말입니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그냥 넘어가 버리면 예수님이 우리는 선택했다는 것을 빼먹는 식이 되어버리니 말입니다. 그러면 개혁주의나 칼빈신학 쪽에 있는 사람들은 화를 벌컥 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지, 언제 예수님이 우릴 선택했는가? 그런 성경구절이 있으면 대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그러면 여기서 그 구절을 한번 대보겠는데, 요한복음 5장 21절입니다. 즉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아들이 뭡니까? 이 아들에게 독자적인 선택권이 있나요? 없나요? 분명히 있는데, 즉 아버지께서 원하는 자가 아니라 아들 자신이 원하는 자를 살린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칼빈신학 쪽에서는,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선택권을 따로 주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왜 폭포가 두 번 떨어지는가?
그것을 해명하지 못하면 제가 오늘 강의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한 게 뭡니까? 어떤 신학을 할 때에 성경의 중요한 대목이 그만 누락되고 빠져버린 채로, 그냥 대충해서 정답이라 하게 되면 칼 바르트에 반드시 당하게 되어있다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왜 선택권을 주느냐에 대해서 칼빈과 루터와 개혁주의신학은 뭔가 답변을 내어놓아야 된다는 겁니다. 즉 왜 폭포가 두 번 떨어지느냐는 말입니다. 말을 하고 보니까 참 멋있는(?) 표현인데, 즉 "하나님이 선택하면 되지, 왜 또 예수님의 선택이 주어지는가?" 라는 겁니다.
◈ 하나님의 언약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칼 바르트는 그 이유가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을 언약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에, 그래서 예수님하고만 의논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있습니까? 인간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의논한 것을 뒤받쳐주기 위해서, 즉 그것이 과연 사실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한 놈, 두 놈, 그렇게 이 세상에서 벌레처럼, 구더기처럼 태어나게 해서, 그렇게 해서 오직 예수님에게만 선택권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새로운 피조물들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만들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칼 바르트를 비판하는데, 칼 바르트는 예수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일변도라고 공격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과연 내가 주장하는 예수님 중심이 비성경적인가?" 라고 반문한다는 겁니다.
◈ 성경이 삼위일체 중심 ??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대답합니까? "물론 성경에서 예수 중심이라고 해도 맞지만,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삼위일체 중심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뭐라고 합니까? "과연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던가?" 라고 묻는다는 겁니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과연 삼위일체 중심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이라고 하던가?" 라고, 그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는 겁니다. 삼위일체란 신학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구원 위주라는 겁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가 '자연신학' 이란 책에서 '부르너' 라는 신학자와 논쟁할 때 뭐라고 하는고 하니, "칼빈주의자들이 사람들을 구원해내려고 환장을 하는구나" 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려고 환장을 해서 자꾸만 사람들에게 접촉점을 제시하고, 그렇게 애를 쓰는 태도를 두고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이단이야" 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걸 못 미더워하니까 자꾸만 접촉점을 만들어서 "납득이 되면 믿을게요"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신학자들이 거기에 호응을 하고, 왜 교회가 호응을 해주느냐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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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선택으로 인해 악과 악마는 그냥 극복되어버린 힘일 뿐이고 결코 하나님께 대항해서 장난치는 최후의, 실재적 대항자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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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곧 하나님의 뜻 !!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라고 한다면 인간도 별 볼일이 없지만, 사실은 인간뿐만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악마, 마귀, 사탄도 별 볼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탄은 누구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피조물로 태어나야 합니까?
칼 바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밑에 눌린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천사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장에 나오죠. 천사들도 예수님을 받들어 모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천사들도 예수님을 받들어 모시면서 도리어 예수님이 그 천사보다도 더 못한 신분으로 떨어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것을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즉 천사에게 봉사를 받아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천사보다도 더 못하고 내려온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란 겁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도 궁금해하는 하나님 뜻이라는 말입니다.
(히 2: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히 2: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그러니까 하나님 뜻은 무엇이냐 하면, 왜 오디오에서 음성을 높일 때 조정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올리고 내리고 하면서 볼륨을 조절하는 것이 있잖아요. 이와 같이 이 세상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께서 낮추시고, 또한 다시 볼륨을 당겨서 높이시고, 그렇게 그 노선에 모든 피조물은 다 걸쳐 있고 연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 이 세상은, 예수님의 공로를 보여주기 위해서 !!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낮아졌고 어떻게 높아졌고, 그리고 우리의 구원도 역시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높낮이에 따라서 되는데, 물론 우리 인간들은 버림을 받아서 마땅한데 누구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즉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의 나라에, 즉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과정으로서 이 세상이 돌고 돌아가고 있는데, 물레방아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이 왜 끼어 들고, 왜 천사가 왜 끼어 드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개뿔도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칼 바르트 신학은 아주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칼 바르트는 이러한 선택으로 교회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은 이 세상에서 구약을 통해서 어떤 효과를 줍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지금 칼 바르트에 있어서 이 주장이 중요한데, 이것은 그가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다고 비판을 받는 부분이니 말입니다.
◈ 사적인 화목인가? 집단적 화목인가?
칼 바르트가 지옥이 없다는 식으로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축복이고, 개 같은 이방인은 저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방인들이 저주를 받고,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는, 그런 담이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그 가로막힌 담이 허물어졌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사이의 담이 무너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곧 무서운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담도 허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담이 허물어진 것은, 그것이 단지 이방인과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있던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무너진 그것을 두고서 '화목제물'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기존의 칼빈신학에 있어서 화목제물은 뭡니까?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아니고 사적인 것, 즉 "내가 주님 앞에 죄 지었는데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아, 십자가로 받네요. 감사합니다" 라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야말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화목인데, 그런데 칼 바르트는 집단적인 화목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 집단도 더 넓어져서, 아예 인간이란 모든 집단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담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소통이 되고 원활하게 되어서, 그렇게 모든 자들에게 평화가 주어지는데, 바로 그런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되었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가 바로 이러한 것을 믿으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을 이야기하다가, 졸지에 단군신화로 ??
그렇다면 우리가 이 칼 바르트의 주장처럼 그렇게 믿어버리면 우리는 뭘 믿는 것이 됩니까?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아니요' 라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예' 라는 것이 됨을 믿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탄도 지옥도 없고, 불신자도 없는데, 그렇게 불신자가 없으면 신자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단지 구원을 받은 인간들만 있지,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신자가 없다는 말은, 믿을 필요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믿을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믿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것은 처음에 이야기한 단군의 신화와 똑같은데, 즉 홍익인간이라는 겁니다. 모든 차등은 다 없어지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가 계시를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나가다가, 그런데 그 내용을 가만히 보니까 그만 단군신화가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 에크하르트 - 이 세상이 곧 신 !!
인도의 신은 브라만인데, 이 '브라만' 이라는 창조신이 '아트만' 이라는 개체, 또는 개별자, 또는 자아 속에 브라만이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래서 인도에서의 신은, 인간 속에 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13, 14세기에 살았던 독일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의 이론인데, 즉 신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신이 신을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세상은 곧 신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 전체가 신이라는 말입니다.
◈ 잠시, 철학공부를 !!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처음에 플라톤 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의 물질은 영원하고, 물론 하늘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인 신의 형상도 영원한데 말입니다. 여기에서 영적인 신의 형상이 물질과 결합을 하는데, 그러니 물질은 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질료, 즉 재료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코끼리, 코스모스 등이 생기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창조의 신, 즉 '데미우르고스' 라는 신이 이데아를 가지고 물질을 만들어버리면 그러한 것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물질은 원래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시대에 와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플라톤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물질이라는 것은 신이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보는데,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하고 충돌이 되는 겁니다. 즉 "현재에 있는 물질이 없는데서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원래 있었는데 다만 기존의 있는 재료를 가지고 다듬어서 현재에 물질이 생겼는가?" 라고 하는, 바로 그 문제라는 겁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없는데서 만들었다" 라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 과연 없는데서 어떻게 만들었는가? 그것을 한번 설명해보세요" 라고 하니,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답변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타협책을 제시하게 되는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하지 말고, 그렇게 없는데서 만들었다는 것도 맞고, 또한 그 다음에 있는데서 만들었다고 해도 맞다고, 그렇게 두 가지가 모두 다 맞다고 하려면, 없는 것을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 말고 그것을 '카오스', 즉 혼돈으로 해서, 그것을 집어넣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 있는 말씀인데, 즉 먼저 혼돈이 있었고 그 혼돈에서 여호와께서 작용해서, 바로 그 혼돈에서 만들어내자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흙이 있었고, 그 다음 흙에서 주물락 주물락 해서 사람을 만들고,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타협책을 제시했다는 말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오잉, 유출설 ??
그런데 그만 타협책에서 더 나가버렸는데, 즉 에크하르트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으니까, 결국 세상 속에는 하나님이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주장을 두고서 '창조설' 이라고 하지 않고 '유출설'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유출설은 하나님의 심성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있다는 이론인데, 마치 성령의 은사론 같은데 말입니다. 참으로 복잡하지요?
◈ 나는 하기 싫어요 !!
그런데 칼 바르트의 신학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다 긍정적이고. 즉 모든 것이 '예'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무엇 무엇을 하라" 라고 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무엇을 하라" 라고 한다면, 만약에 "나는 하기 싫어요. 안 해도 되는데, 왜 내가 해야 됩니까?" 라고 나온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그놈이 참으로 착하지" 라는 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가 "야, 숙제를 해라" 라고 하면, "싫어요. 숙제를 안 해도 엄마가 다 해주는 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니가 엄마를 믿는구나. 너의 믿음이 나에게는 영광이다. 아이쿠, 착한 이놈아!" 라고, 그렇게 되는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맞습니까?
그것은 10분을 쉬고 합시다.
2009,12,15 오후 11시 10분에 마침.
나는 일하기 싫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