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1
[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1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4)
[09 대구특강] - 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 1
09,11,21 강의 이근호, 정리 한윤범
◈ 왜 '칼 바르트' 인가?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제가 부여받은 주제가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에 관한 것인데, 그런데 이 '칼 바르트' 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즉 '칼 바르트' 라는 사람을 우리가 왜 신경을 써야합니까?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칼 바르트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 '칼 바르트' 라는 분이 신학자인데, 제가 서평한 책은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이란 책인데, 우리나라에도 1983년도에 이미 번역이 되어서 나온 조금은 오래된 책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성경을 해석한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성경이 있는데, 이 성경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이렇게 본다, 나는 이렇게 본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칼 바르트란 사람이 성경을 해석한 것이, 다른 사람의 성경해석보다도 더 잘 체계 있게 정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너희들은 입 다물라. 적어도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보다도 더 뛰어나지 않거든 그분에게 기어서 배워라" 라는 겁니다.
◈ 칼빈은 아니지 ??
그렇다고 하면 이런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을 알려고 한다면, 칼 바르트 그전에 뛰어나게 성경을 해석했던 많은 신학자들이 있단 말이죠. 그 중에 한 사람 튀어나온 사람이 칼빈이라는 사람인데, 이 칼빈이라는 사람이 성경해석을 잘했다고 소문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500년 이후에는 칼 바르트가 나타남으로서 그만 다음과 같이 되고 말았는데, 즉 "칼빈의 성경해석에 문제가 있다. 나처럼 성경해석을 해야지 칼빈처럼 해석하게 되면, 그런 성경해석에는 성경전체를 담을 수 없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음과 같이, 즉 "칼 바르트의 해석학을 알 필요가 있을까? 그분은 남의 동네 아저씨인데, 그런 아저씨의 이야기를 우리가 왜 들어야 돼?" 라고, 즉 "지금 성경공부를 하기도 바쁜데, 왜 칼 바르트까지 해야 되지?" 라고 제쳐 놔버리면, 그렇게 되면 그만 다음과 같은 경우가 발생하고 만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래, 이 정도라면 되었어" 라고, 자기는 성경을 나름대로 정리를 잘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을 알아?" 라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을 모르고, 또한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겨" 라고 했다는 겁니다.
◈ 칼 바르트, 그는 성경해석을 어떻게 했기에 !!
그러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칼 바르트에 의하면, 당신의 성경해석은 성경의 이런 대목하고 모순이 되고, 또한 이런 대목은 담아내질 못했는데, 그러니 이런 것을 누락시키고 빠뜨리니 그야말로 당신은 일방적으로 당신의 성경해석을 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지" 라고 했을 때, 그러면 과연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칼 바르트의 책에 보면 그런 내용들이 다 나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과 같이, 즉 "칼 바르트는 내가 빠뜨린 것까지 포함해서 성경해석을 일괄적으로 했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 상대방은 "물론 그렇지"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칼 바르트는 성경해석을 어떻게 했기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것까지도 다 포용이 되었을까?" 라고 해야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 우리는 칼 바르트를 이용할 뿐 !!
그렇게 될 때, 이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은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에게 추종을 하라든지, 그 사람한테 복종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를 참고함으로서, 즉 칼 바르트가 성경해석을 한 것을 분석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의 성경해석에 대해서 모자라는 것, 그렇게 모자라기 때문에 곡해할 수 있는 것, 즉 그런 성경 중요한 대목을 빼놓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본다" 라고, 그렇게 일방적인 주장을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칼 바르트의 생각을 다 알지 못하고, "나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니까 이런 계시 받았다" 라고 했다가, 그런데 칼 바르트에 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즉 "그 계시는 성경의 다른 계시에 의해서 충돌이 일어나며, 그래서 엉터리로 드러났다" 라고 칼 바르트가 이야기해버리면, "아하, 내가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은 것도 엉터리일 수 있구나" 라고, 그렇게 새삼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이 '칼 바르트' 라고 하는 신학자, 그 이름에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이 절대로 아니라, 오히려 "그 양반은 그저 하나의 종이고 머슴이다" 라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이용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 물론 각각의 취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서, 노래를 하다가 보면 팝송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또한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은 자기 취향인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성경해석이 하나의, 즉 "그것은 칼 바르트 취미이고, 나는 내 식으로 성경을 보겠다" 라고, 그렇게 취향으로 정리를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나중에 결론 부분에 가서는 제가 거기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겠지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칼 바르트를 공부하면서, 즉 "성경을 칼 바르트처럼 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견해가 될 수가 있고, 또한 내가 지금까지 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견해일 수 있다" 라고, 그렇게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 하지만 '차이'가 생기면, 계속해서 불확실성으로 !!
그것을 '차이' 라고 하는데, 즉 이 사람이 보는 것과 저 사람이 보는 것이 서로 차이가 되려면, 이러한 두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공통점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즉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한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내가 동의하지 못한다" 라고 했을 때, 그 나머지 부분의 차이가 계속해서 차이로 남아버리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것은 그만 '불확실성'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확실성을 없애려면 그 차이를 좁히든지 없애든지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렇게 삐쳐서 나온 것의 처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칼 바르트니 일단 'K' 라고 합시다. 그러니 이러한 부분을, 즉 "칼 바르트는 이러한 점이 잘못됐어" 라고, 그를 공격해줘야, 칼 바르트의 미진한 부분은 칼 바르트가 실력이 모자라서 부족한 것으로 여겨서, 그것을 없앨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차이로, 즉 "너는 너의 취향으로, 나는 내 취향으로" 라고, 그렇게 남아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계속해서 불확실성이 남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 사람의 견해는 이럴 수도 있는데,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도바울은 전혀 그런 적이 없단 말입니다.
◈ 못 먹어도 고 !!
다시 말해서, "못 먹어도 고" 라는 말대로, 그냥 그대로 "바로 이겁니다" 라고 해야지, "이것은 다른 사람의 견해로서, 그럴 수도 있고, 또 누구의 견해는 이럴 수도 있고, 그러니 나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예 입을 다물어야 되는 겁니다. 거기서 한 자락 끼어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칼 바르트는, 즉 이 'K'가 지금까지 있던 모든 것을 다 공격해서 칼 바르트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칼 바르트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 전체가 성경의 생각과 일치되는가?" 라고 하는 것을 탐색해 보는 겁니다. 그렇게 탐색해서 미진한 게 있으면 보충하면 되고, 또한 칼 바르트가 뭐가 잘못된 게 있으면, 그건 잘못됐다고 파악하면 되고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 우리가 복음 전할 때, 그런 점을 유념해서 전하면 된다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칼 바르트란 사람이 절에 있는 중도 아니고 또한 일반인도 아니고, 아무튼 우리가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고 바라보고 있는, 그런 권위를 갖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 해석을 내놨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공부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저는 그렇게 본다는 겁니다.
◈ 먼저,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의 관계를 !!
제일 먼저 칼 바르트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항상 그렇지만 교재가 이만큼 있는데, 이것을 읽기만 해도 3시간이 넘어가요. 일단 교재는 여러분이 읽었다 치고 중요한 것만 해드리겠습니다. 부제가 뭐냐 하면, "칼 바르트의 신학과 그 내부적 모순" 이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했는고 하니, 칼 바르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계시와 말씀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점에 대해서 제가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K' 란 사람, 즉 칼 바르트인데, 그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징기스칸도 인간이고, 아브라함도 인간이고, 에스겔도 인간이고, 플라톤도 인간이고, 그렇게 모두가 같은 여러 가지 인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이 아니고, 나머지는 죄인이고" 라고,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모두가 다 같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 그런데, 칼 바르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
아무튼 칼 바르트가 여기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라고 계시론은 제시했을 때, 다른 인간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칼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라고, 또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라고, 즉 "사람은 하나님을 그냥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야 알 수 있습니다" 라고, 그런 말을 칼 바르트만 했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도 했겠습니까?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주장을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줄 때, 그 인간은 응답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그것을 유독 칼 바르트만 주장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즉 그것을 우리가 모르는 척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칼 바르트가, 즉 'K' 라고 합시다. 이 'K'가 계시를 개인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옛날부터 하나님의 계시는 개인적이 아니고 집단적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굳이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모든 민족이 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 단군신화에 있어서 집단계시는?
B.C. 2333년경에 고조선이 단군이란 사람을 통해서 생겼는데, 제가 집단적인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서 옛날 단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어요. 이 단군이라는 것은 하늘의 신, 즉 환인이 있고, 그 환인의 아들이 있는데, 이 사람의 이름이 환웅입니다. 이 사람은 역시 신인데, 그런데 환웅이 아들이 됨으로 말미암아서 신이 사람으로 변해서 이 땅에 오는 겁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1장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환웅이란 사람이 아버지(환인) 신의 뜻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즉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뤄지기 위해서 환웅이란 아들을 보낼 때, 이 환웅이 뜻을 어떤 식으로 펼칠까 할 때, 여기 곰하고 호랑이한테 쑥 한 다발하고 마늘 21개인가를 주어서 백일 동안을 견디라고 하는 겁니다.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견디면 사람의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호랑이는 탈락하고 곰은 버텨서 웅녀가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 웅녀하고 환웅하고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이 단군이란 사람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군신화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전에 이미 중국에도 신화가 있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집단계시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즉 어떤 씨족사회나 부족사회에 있어서, 신석기 시대 이후에 비로소 국가가 부족국가가 되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국가가 없었는데, 신석기를 벗어나서 청동기에 들어가면서 있는데 말입니다.
그 시대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신께서 인정하는, 즉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우리나라가 앞으로 무궁무진하고 오래간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 어느 민족이라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여기서는 제가 단군신화만을 소개했지만, 그것은 모든 민족이 다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거기에 반드시 신의 계시가 필요하고, 이 신의 계시는 집단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수용이 될 때, 특정한 인간에게 신의 계시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런 특정한 인간, 즉 단군에게 신의 계시가 올지라도 단군의 후손들이 집단을 이루면서, 그렇게 해서 단군이 받은 신의 계시에 종속된 채로 나라가 이뤄지게 되는 겁니다.
◈ 성문화(成文化)가 되어야 비로소 '법' !!
제가 지금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반드시 집단계시에서는 그것이 '법'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법이 된다는 것은 문자화되는 것인데, 즉 문자로 적어놔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권력층에 의해서 이 법은 시행토록 되어있는데, 즉 다음과 같다는 겁이다.
* A : 법이 뭡니까?
* B : 법은 이거야.
* A : 그러면 조상들은 어떻게 했어요?
* B : 그때는 이런 뜻이었어.
* A :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은 어떻습니까?
* B : 바로 이거야.
그런데 뭔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려면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확정된 게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문화(成文化), 즉 문자화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문자화가 되지 않으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다시 단군신화로 돌아와서 !!
다시 단군신화로 돌아와서, 이렇게 환웅에서 아들이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될 때, 여기에 신과 인간, 그러니까 환인과 환웅 사이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지만, 그것이 구체화 될 때는 인간으로 구체화되는데, 그 인간은 바로 어두운 동굴에서, 즉 외로움과 어두움 속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간이 되고자 하는 그 능력을 키울 때, 그때야 비로소 환웅과 결혼해서 단군이 된다는 겁니다.
◈ 그러면 '웅녀'의 의미는?
그럼 이 '웅녀'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결국은 인간내부에 신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하늘의 신이 내려오는 초월적인 계시도 있지만, 인간 자체가 곧 신이 되는 겁니다. 즉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집단' 이라는 것은 그만 신들의 집단이 되는데, 그러니 이 신들의 집단이 각각 가지고 있는 내 안에 있는 신성을 규합시키면, 그것이 곧 질서를 위한 법이 되고, 그것이 바로 신의 계시와 일치가 된다는 겁니다.
◈ 야, 나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이 "야, 나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라고 하면서 산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내려오면, 다른 사람들은 "신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던가?"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신께서 이러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 라고 하는데, 그것을 들어보고는 "우리는 동의한다" 라고, 그렇게 그 사람의 말에 동의를 하면 그것이 계시가 되는 겁니다. 물론 동의를 안 하면 그 사람은 구리를 친 나쁜 놈이 되고 말입니다.
구약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신접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는데, 그들을 왜 죽여야 합니까? 단군도 무당이고, 이쪽도 무당이고, 그러니 그것이 모두가 다 계시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계시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종교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인간 내부의 수양인데 말입니다.
(레 20:27, 개역)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렇게 자기 내부를 수양한다고 하니까 얼른 떠오르는 것이 '새생명 운동' 인데, 그들이 맨 날 하는 짓이 그것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종교는 자기 자신을 내부적으로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이렇게 동굴에다가 넣어서 비워놓고는, 그 안에 하나님 뜻으로 채워서는, 그렇게 해서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곧 자기한테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초월적인 것이 초월적으로 그냥 하늘에 남아 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하는데, 그 초월적인 것이 마치 여자가 임신을 하듯이, 그렇게 자기 안에 가득히 담겨야만 비로소 사람은 흐뭇해한다는 겁니다. 즉 "내 안에 계시가 많다. 그러니 너거들이 날 건드리면 죽는다. 알았지? 왜냐하면, 나는 계시를 받았거든"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종교는 곧 자기 수양 !!
이것은 칼 바르트가 언급을 하기 이전에 모든 민족과 종교에 일반화되어있고 보편화가 되어있는데, 즉 자기 수양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잠재되어있는 신을 깨워서 자기가 신성을 발휘하는 것, 그게 곧 종교라는 겁니다. 그것이 신앙이란 이름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계시라는 이름으로 되는데, 그것을 구체화시키면 곧 말씀이 되고 말입니다.
흔히들 단군이 우리나라의 선조라고 하는데, 그리고 '웅녀' 라는 이 사람도 불가능이 자기 내부 속에 신성을 깨우니까 인간이 된다는 것인데, 즉 불가능하지만 용을 쓰고 애를 쓰면, 즉 쑥과 마늘을 먹는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분별심인데,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끊는다는 겁니다. 동굴이라 하는 것은 어두움과 외로움이고 말입니다.
바로 그런 어두움과 외로움 속에서, 거기서 잠자는 게 아니고 깨어있음인데, 이것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이죠? 즉 스스로 깨어있는 겁니다. 그렇게 깨어있을 때 인간은 신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데, 즉 불가능이 가능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자기 경험이 신의 계시에 합류가 된다는 겁니다.
◈ 과연 어떤 사람이 거듭난 사람인가?
우리가 칼 바르트의 계시론을 주목하면서, 칼 바르트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다음에 뭘 주목하느냐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성도라는 인간내부에 담기는지, 그 경로를 주목해보자는 겁니다. 즉 그러한 절차를 주목해보자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뭔가가 내려왔는데, 그렇게 줄줄이 타고 내려와서 결국 이렇게 뭔가가 남아있을 때, 우리는 묻는 겁니다. "칼 바르트 아저씨, 진짜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이 뭡니까?"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신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다같이 인정하니, 즉 계시는 위에서 내려온 걸로 다 인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의 문제가 뭐냐 하면, 그러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사는 것이 거듭난 사람이며, 그리고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또한 어떤 식으로 살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인지, 바로 그 기준을 제시하라는 겁니다.
◈ 인간은 자기 욕망과 맞지 않으면?
그런데 그렇게 기준을 제시하라고 질문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기준을 따르고자 함이 아니라, 그 기준이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즉 자기 속에 있는 잠재되어있는, 즉 "내가 신이 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되는가?" 라는 것과 견주어서, 만약에 삐거덕하고 안 맞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신의 계시가 아니야. 칼 바르트 씨는 저리 가세요. 난 칼빈을 믿겠어"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외부가 칼 바르트가 있던 칼빈이 있던 관계가 없는데, 그런 것을 하나의 계기로 해서 자기 안에 뭐가 있는가를 점검해보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은 계시라 하는 것은, "여기서 여기까지는 신의 계시야" 라고 하면서 다듬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서 이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가?" 라고 하는, 바로 여기에 지금 열중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말입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아무리 신의 계시라고 할지라도 우리 인간 내부에 오게 되면 이 계시는 인간 내부의 나의 검열을 받아야 되고, 그렇게 점검해서 자기에게 맞는 그것만이 자기의 계시인데, 이것을 줄이면 '내 계시' 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하나님 계시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 계시'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누구의 검열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검열을 거치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나의 해석과 이해와 나의 점검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계시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 그런데, '내 안'에 들어오면 '내 계시'로 !!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기 위해서는 칼 바르트에 갈 것이 아니고 신의 계시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 바로 그 과정에 대해서 분석하면 그것이 곧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깥에는 그것이 성경이 되던, 불경이 되던 관계가 없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어떤 계시가 되었던 간에, 즉 "신의 계시가 왔던 나에게 왔을 때 내가 어떻게 그것을 조립하고 재구성해서 나만의 독특한 개성 있는 계시로 드러내는가?" 라고, 그렇게 계시를 만드는 절차를 분석해보면, 그게 바로 계시가 내 안에 장착되는 하나의 모습이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의 계시가 이렇다고 정립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 성경이라는 바깥의 계시도 소용이 없어지는 겁니다.
◈ 내 속에서 '계시 만들기' 라는 기계가 !!
이 부분을 다시 설명을 해보자면, 우리 인간 안에 이렇게 '계시 만들기' 라는 기계가 있는 이상 우리 인간이 성경의 그 어떤 말씀이든지 간에, 즉 눈을 감고서 아무런 말씀이라도, 그것이 설령 오바댜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이 계시를 만드는 기계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즉 신의 계시가 들어가서 그만 나의 계시로 상품화가 되어서 바깥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의 계시가 없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 주체가 전혀 정립이 되지 않는데, 즉 '나' 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이 '나' 라고 하는 나의 것이지 남의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바깥에서 예수님이 문을 열라고 해도,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처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라고 하는데, 그렇게 문을 두드려서 일단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 그러면 내가 빼먹을 것은 빼먹고 예수님을 밀어내어 버리는데, 그리고 난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계시가 그만 자기만의 계시로 정착이 되는 겁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계시론도 인간에게 그만 삼킴을 !!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계시를 만드는 기계가, 혹은 그런 장치가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과연 '칼 바르트' 라는 신학자가 그 당시 철학으로 그것을 제대로 분석해낼 수가 있었느냐는 겁니다. 인간 속에서 계시를 만드는 기계를 말입니다.
이렇게 칼 바르트는 칼빈의 계시론을 치고, 루터의 계시론을 치고, 그리고 바깥에서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주장하는 반박하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신이 아니고 인간이다" 라고 하는 그들의 실증적이고 역사론적 계시론을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빠서(?) 정작 본인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신의 계시가 어떻게 내 안에서 변동을 일으키는가?" 라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만 소홀하게 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만 그의 계시론도 인간의 주체론, 즉 인간의 자아론에 그만 삼킴을 당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 문제는 '인식론' 인데 !!
그렇다면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이야기가, 그 이전에 있던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칼빈이나 루터나, 이런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안 했는가 하면, 그들도 분명히 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가지고 '인식론' 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한다고 할 때,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 '세례요한이 선지자이다' 라고 하면 !!
우리가 인식론을 이야기하면 그 앞에 누가 있는데, 인식론 앞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은 남의 인생은 소용이 없고, 누가 들어갑니까? 반드시 '나' 라는 것이 반드시 들어간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면, 아무 곳을 봐도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만약 "세례요한은 선지자이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누가복음 7장에 있는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만약에 제가 "세례요한이 선지자라는 말이 최 집사님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면, 최 집사님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하면, "아, 최 집사님 틀렸어요"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김 집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 목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칼 바르트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성경에 누가복음 7장에서 세례요한이 선지자라는 그 의미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다를 때 "그것이 왜 다른가?" 라는 겁니다. 즉 사람마다 왜 달라지느냐는 말입니다.
◈ 단군신화 - 우리는 하나 !!
방금 제가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여기에 대해서 인식론적 답변을 해봅시다. 그것을 단군신화에서는 이렇게 보는데, 즉 "인간은 차이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개체의 차이' 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A' 라는 사람이 있고, 'B' 라는 사람, 'C' 라는 사람, 그리고 'D' 라는 사람이 있으면, 각각이 다 차이가 있는데, 그런데 그러한 차이가 있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그 안에 신성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아까 말한 환웅이나, 환인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인간에게 신성이 들어있으면, 여기서 조명을 쏘아서 비록 그 차이가 무지개 색깔처럼 난다고 하더라도 햇빛은 같은 하나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단군' 이라고 할 때 그 '단'이 박달나무 '檀' 이라는 겁니다. 즉 '밝다' 라는 것인데, 즉 빛이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홍익인간, 즉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단군신화의 기본적인 바탕은 무엇인고 하니까, 빛이 우리 인간 내부에 내재되어있는데, 바로 그 빛이 이 차이를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그것이 곧 '대동(大同)' 이라는 겁니다. 즉 '대동단결' 이라는 말입니다.
주로 노동운동을 할 때 쓰는 말인데, 즉 모든 차이 속에서 하나로 만드는 빛이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빛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그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즉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우리는 하나의 형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우리나라 단군신화의 인식론이라는 겁니다.
◈ '다름'조차도 '하나'로 !!
그러니까 방금 제가 지금까지 한 것은 칼 바르트가 다르고, 또 칼빈도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한 '다름', 즉 그렇게 다른 것조차도 하나로 엮어내고 만들어낼 수가 있는 그 깊이 있는 빛을, 혹은 그런 신성을 믿는 것이 진정한 일자(一者)이고, 즉 하나, 하늘, 하나님, 환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나라가 한국이 아니고 '환국' 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환국' 이란 뜻은 '하나' 라는 뜻에서의 '크다' 라는 의미와 "하나가 되었다" 라는 것을 합쳐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를 모르는 대한민국도, 그리고 이방의 다른 민족도 그 뜻은 무엇이냐 하면, '크다' 혹은, '하나다' 라고 하는, 즉 '대동단결' 이라고 하는데, 즉 장애자나 멀쩡한 사람이든 전혀 관계없이 모두 우리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정신 위에 기독교가 들어오던, 불교가 들어오던, 유교가 들어오던 간에 대한민국은, 아니 환국은 그것을 '무교(巫敎)' 라고 하는, 즉 무당으로 엮어내었다는 겁니다. 즉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무당이라는 말입니다.
◈ 무당 - 빙의와 탈혼 !!
이 무당과 계시가 연관이 있어서 이야기하는데, 무당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빙의(憑依)'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는 엑스타시, 즉 '탈혼(脫魂)' 이라는 겁니다. 먼저 이 '빙의' 라고 하는 것은 신이 나에게로 들어 붙은 것이고, 그리고 그와 반대로 이 탈혼은 말 그대로 신을 만나서 그만 혼이 나가버린다는 겁니다.
이렇게 혼이 나가는 것은 북아프리카나 남아시아 계통이고, 우리나라와 같이 북아시아 계통은 빙의, 즉 뭔가 신병(神病)이 와서 결합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결합이 될 때 착한 신은 조상신이 있고, 또한 나쁜 신들은 '원귀' 라고 해서, 즉 원한이 있는 귀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당은 무당 안에 결국 신이 함께 있는 것인데, 그런데 무당이라 것이 바로 단군이고, 단군이 임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신과 인간이 함께 있는 임금을 섬기면서, 동시에 본인들이 무당 속에 있어서 하나의 무당처럼 되는 겁니다.
◈ 그 어떤 종교가 오더라도 '하나'로 수용이 !!
그러니 이들의 목적은 무엇인고 하니, 서로 차이가 나더라도, 즉 인생에 어떤 차이가 나고 영적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그것이 곧 자기 내부 수양인데, 이런 생각이 결국에는 그 어떤 종교가 오더라도 수용이 되는, 그렇게 하나의 계시 안에다 전부를 다 담아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방종교에 있어서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 라고 할 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 어떤 종교, 즉 어떤 차이가 오더라도 그 모든 것을 전부다 하나로 용해해버리고 녹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식론이라 하는 것도 하나만 믿으면 인식론 논쟁을 할 이유가 없는데, 그 어떤 둘, 셋, 넷이 되더라도, 그것이 하나 속에 전부를 다 집어넣으면 되니까 말입니다.
◈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
이렇게 되면 인간이 수양할 목적이 생겼는데 그게 뭡니까? 모든 변화도 하나로 녹아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동학교에선 '하늘님' 인데, 그래서 동학교에서는 자식이 부모한테 절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부모가 자식에게 절하고, 또한 남편이 여자한테 절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하늘님이니까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하늘님을 믿어라" 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하늘님이 들어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린아이가 곧 신이 되는 겁니다. 즉 만나는 사람마다 이웃으로 보지 말고,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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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느님이며 만물이 모두 하느님이라고 보는 천도교(天道敎) 중심교리. 그러나 인내천 사상이 사람 이외에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성령(聖靈)과 지기(至氣)를 주체로 하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을 내세워 경천(敬天)·경인(敬人)·경지(敬地)를 주장함으로써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일체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이 교리는 인간을 누구나 평등하게 보고, 근본적으로 귀천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사람마다 '한울님(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 여기기를 한울님과 같이 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 천도교의 행동실천 요강(要綱)이다. 자신의 한울님을 모신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한울님의 심기(心氣)를 바르게 기름으로써 한때 잃어버렸던 한울님을 되찾아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양천주(養天主)'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한울님을 기르는 방법은 서양의 종교가 하느님께 예배하면서 참회하고 속죄하는 의타적(依他的)인 방법인 데 반하여 자신의 심기를 수련하는 의자적(依自的)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특징이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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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E ARE THE WORLD ??
그게 잘 안 되니까 동학당에 와서 수양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것보다도 더 뛰어난 새생명 운동은 없다는 겁니다. 최고가 아닙니까? 계속해서 교회에 와서 수양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다. 변화 때문에 좌절하지 말자. 내가 돈 없다고 가난하다고 출세 못한다고 그런 것 때문에 기죽지 말자. 결국 가난해도 모두는 하나다. 전부다 불쌍히 여겨라. 긍휼히 여겨라" 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유교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녹취자 - 공자도 무당이라는 말이 있던데요?)
그런데 그런 수양이 잘 되지 않을 때는 동굴 속에 가야 되는데, 즉 어둠 속에 금식을 하는데, 마늘과 쑥과 같이 쓴 것을 먹으면서, 자기를 절제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분별심, 혹은 경계심이라고 하는데, 즉 세상의 차이를 말합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좌절하고 화나고 신경질이 나는 것, 그것을 자기 혼자 스스로가, 자기에게 참선해나감으로서 모든 경계나 분별심에서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그래 하나야. 인간은 모두 하나일 뿐이야" 라고 자기 수양은, 이것은 종교를 떠나서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나올 수 있는 계시라는 겁니다.
◈ 무한을 향하여, 신을 향하여 !!
이것을 설명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동안 걸렸는데, 물론 절차는 위에서부터 오는데,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인간의 유한성, 즉 인간은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어느 민족이든 인간은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부족하니까 무한을 향하여, 즉 신을 향하여 빌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백 날을 빌어도, 신이 인간에게 계시를 주었다는 게 중요하지 않고, "신이 진짜 내 안에 온다면 나는 어떤 인간으로 달라져 있을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걸 누가 확인하고 싶은고 하니, 그것을 내가 확인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렇게 해서 과연 구원을 받을까?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영원히 신과 합일될까?" 라고, 그렇게 궁금한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궁금해한다는 겁니다. 옆에 있는 남이 궁금한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미리 알았으면 욕심도 줄이고, 마음도 절제해서, 즉 온유와 절제와 양선으로 해서 자기 안에 모든 변화를 녹여버리는, 그렇게 하나 됨을 안에 간직하고 있으면 그때는 기독교가 오든, 불교가 오든, 여호와 증인이 오든, 안식교가 오든, 그리고 통일교가 오든 간에, "나는 그런 것을 다 초월했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새생명 운동'도 이런 목표점을 가지고 있고 말입니다.
◈ 그런데 놀랍게도 칼 바르트는?
그런데 놀랍게도 칼 바르트가 이러한 점을 알고 제대로 지적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올라오는 계시, 무당들을 죽여 버리라고 했을까요?" 라고 하는데, 바로 거기에서부터 계시가 시작되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계시라고 하지 않고 '언약' 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준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결단코 모든 인간에게서의 보편성과 일반적으로 들어있는 개념인, 즉 "인간은 신이다" 라는 개념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 여호와 하나님 -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
그러면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는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신이라고? 신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귀도 수두룩해. 하지만 내가 구원할 자는 내가 알아서, 즉 내가 은혜를 줄 자만 뽑혀서 선택을 받고 간택이 되어서, 택함을 받아서 구원되는데, 즉 내가 긍휼을 주는 자에게만 구원되는 거야" 라고, 그렇게 주장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신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 이라는 겁니다.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지우자, 지우자, 지우자 ??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40분 동안 강의한 이 모든 것은 전부다 어떻게 해야합니까? 지워버리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지우지를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남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받는 것을 원하고, 또한 우리 앞에 예수가, 여호와가, 십자가 어떻고, 그렇게 백 날을 이야기해도 우리 안에 뭐가 장치가 되어있다고 했습니까?
그것을 나의 계시로 전환하기 위해서 나의 인식론, 이러한 나의 인식론을 뭐라 했지요? 즉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버리는 장치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일방적으로 자기가 구원되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 그러니 주님께서는 저주와 정죄를 해야만 !!
그러므로 우리는 전혀 불가능한데, 이 모든 것을 다 잊고 부정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셔서 어떻게 하십니까? 방금 강의한 이러한 모든 인간론에 위주의 하나가 되려는 계시론을 주님께서는 저주하고, 그것을 정죄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정죄하는데 있어서, 그 이름이 아까 이야기한 언약을 통해서, 즉 하나님의 언약인데, 그것을 신약에서는 새 언약이라고 하고, 구약에서는 그냥 언약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즉 신약에서 봤을 때는 옛날 언약이고, 구약에선 그냥 언약이고, 그것이 신약에서 새 언약이라는 겁니다.
◈ 아하, 구원 불가능성 !!
바로 그 언약을 통해서, 내가 갖고 있는, 즉 내 안에 숨어있는 계시를 만드는 장치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든지 해서, 그것을 마구 박살을 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위주의 '계시 만들기' 라는 기계가 완전히 고장이 나버리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때 비로소 '구원 불가능성'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내가 사색하고, 도를 닦고, 동굴 속에 들어가고 금식해서,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는 전혀 못 들어가는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가 되어서 하늘님이 되는 그런 천국은 천국이 아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환국이 어디까지나 천국이니까 말입니다. 사실 그런 천국은 전혀 천국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매일같이 무엇을 생각합니까? 언제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즉 천국을 염두에 두고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답게 되려고 자기 수양을 한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말입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 계시를 만들어서, 그 계시에 따라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그 누구도 모르는데, 물론 며느리도 모르고 말입니다(ㅋㅋ).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이 천국을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줄 때만, 그때만 비로소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 에수님 -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
신약에서는 방금 제가 40분 동안 이야기한 전체를 '육' 이라고 하는데, 이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내부 수양에 세계 최고 레벨에 있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성경 비평학자 - 이 양반아, 왜 하필이면 '언약' 인가?
그러니 칼 바르트의 계시론에 들어가면, 방금 이야기한 이 계시를 주장하면서 그 다음에 칼 바르트는 여기서 언약을 뽑아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시에서 언약을 뽑아낼 때 누가 반대를 하겠습니까? 소위 고등비평, 즉 성경 비평학자들이 반대합니다. 왜 반대하느냐 하면, 만약 계시에서 언약을 끄집어내게 되면, 이 언약은 비평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의 여러 주제 가운데 극히 일부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칼 바르트, 당신은 우를 범하고 있다. 왜 그런고 하니? 언약이란 주제가 구약 중에 하나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당신은 마치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로서 뽑아내고 있는데,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뽑아냈는가?" 라고 묻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무리 봐도 언약이라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하늘, 땅, 율법, 인간 등등, 그러한 여러 가지 주제 중에서 하나가 언약인데, 그런데 당신은 무슨 통뼈로, 무슨 초월적인 권위를 가지고 성경은 언약에서 나와야 된다고 불쑥 주장하는데, 그렇게 성경에서 언약을 주장하는 근거를 대보세요" 라고 나올 때, 여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뭐라고 답변합니까?
◈ 칼 바르트 -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언약으로 봤기 때문에 !!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는 겁니다. 즉 계시에서 언약을 꺼낼 때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분을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인간을 제쳐두고 따로 한 분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게 누구인고 하면,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로 본 겁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언약으로 봤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그전에 어떤 학자도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점이 참으로 이상한데, 방금 제가 이러한 말을 하면, 요즘 다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주장을 하는데 말입니다. 칼빈도 루터도 이런 주장을 노골적으로 한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 기존 신학은, 언제나 성부 하나님 중심 !!
왜 그런고 하면, 그 이유를 설명해드릴게요. 그 이전에도, 물론 지금도 그렇고 말입니다. 개혁주의가 그렇게 주장하는데, 사실 기독교 신학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가 중심 인물이냐 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이었고, 나중에 신학이 발달해서 삼위일체가 되면 그것이 삼위일체로 바뀌고 말입니다. 바로 그 삼위일체의 대표자가 누구인고 하니까, 성자 예수님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성부 하나님이기 중심이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성부 하나님 관점에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성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독특한 분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 속의 한 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다 아버지가 다 하고 말입니다.
◈ 그래서, 인간과 성부 사이에서 예수님의 역할 쪽으로 !!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역할에 들어갑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그렇게 삼위일체 대표자가 성부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성부하고, 그 다음에 성부가 인간을 만들지요. 그러니 인간과 성부 사이에서 예수님은 어떤 필요한 분인지, 그들은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 말을 들으면 그것도 맞다고 여기지 싶은데, 아닌가요? 그런데 방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라 하니까 그것도 맞다고 하고 말입니다. 방금 이 이야기하니까 이것도 맞다고 하고, 또한 저것을 이야기하니 저것도 맞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라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성경이 들어갔기 때문에,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을 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중심인물은 예수님이라고, 성경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칼 바르트 이전의 모든 신학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 칼 바르트 계시론의 취지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목사님, 그 말이 맞네요"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방금 제가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단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칼 바르트가 계시론을 이야기할 때, 이제 칼 바르트 계시론의 취지가 나타나는데, 그가 계시론를 이야기할 때, 여기 인간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내려주시면, 그렇게 계시를 내려준 안에서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그런데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이 틀렸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이 왜 틀렸느냐 하면, 동그라미를 이렇게 그리면 맞는 것 같지요. 그런데 여기에다 동그라미를 몇 개를 더 그려서 이렇게 사람을 한번 그려보세요.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안다는 것을 누가 생각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상상하니까, 결국 계시가 우선이 아니고, 이러한 계시를 창안하고 상상하는 인간이 우선되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에는 이런 계시론도 역시 인간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 예수님 중심의 계시론은, 기존 계시론은 공격하면서 !!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 중심의 계시론으로 바꾸려고 하면, 그것이 그냥 바꿔지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인간들이 어떤 계시론을 갖고 있는지, 그것을 치면서 바꿔져야 된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이고, 그것이 곧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그 다음에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겨서 구원하신다는 것, 그것이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여러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겠습니다" 라고 하면, "저요, 저요" 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제가 은혜를 받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전부가 다 저의 말을 오해했다는 겁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
그러니 칼 바르트는 여기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준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보고 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만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즉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말 들은 것은, 그것은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곡해와 오해의 산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런 것은 듣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또한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 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칼빈부터 해서 모든 신학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상대하고, 그리고 인간을 상대해서,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은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면,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적절한 계시를 주었는데 그것을 몰랐고, 그리고 계시를 주었어도 그 계시의 내용을 몰라서 또한 문제였다는 겁니다.
◈ 기존 신학은 인간구원에 집중을 하니 !!
그런데 나중에 그 계시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니, 그것이 곧 예수님 중심이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중심으로 살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라는 주장을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칼 바르트가 나타나기 이전의 무려 1900년 동안의 기독교 신학의 오류였다는 겁니다. 즉 그러한 생각자체가 바로 오류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도 괜찮고, 우리도 괜찮은데,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계시가 궁금했는데,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계시를 주었기 때문에 그 계시를 받으면 되는데, 그래서 받고 보니 그 계시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 있었구나. 그러니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전혀 하나님 뜻하고는 상관없는, 그야말로 자기의 일방적인, 자기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을 주장한 것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왜 무당을 죽이라고 했는가?
물론 그 당시에 칼 바르트는 단군신화를 모르고, 그는 기존의 인류문화에 대해서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서도 똑같은 이와 같은 계시가 있다는 걸 몰랐는데, 다만 상식선에서 알았지 말입니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그런 것은 몰랐어도 짐작은 했는데, "왜 성경에서 이방종교의 무당을 죽이라고 했는가?" 라는 부분에서 말입니다.
그 무당이 뭡니까? 무당은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서 자기 수양, 즉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로서, 즉 자기의 내부를 늘 비우고 그 내부를 신의 계시로 채우는 것인데, 바로 이런 인간의 모든 그것을 최고로 구현한 사람이 무당인데, 곧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또한 임금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무당을 구약에서 죽이라고 한다는 것은,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할 수가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죽이는 것이고, 그렇게 죽이고 나서 남는 것은 불가능인데, 그런데 지금 이렇게 1900년 동안의 기존 신학의 주장처럼 되면 그것은 불가능이 아니고 가능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면, 인간이 아무리 해도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한 영역을 따로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영역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부터 출발한 계시론이 될 때, 그 불가능은 계속해서 인간이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가능성과 그렇게 따로 차별이 나는, 매우 독특한 자리가 마련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10분을 쉽시다.
2009, 12, 23 새벽 4시에 마침.
어휴, 밤을 그만 꼴깍 !!
구득영(IP:203.♡.97.154)
09-12-28 23:13
한 목사님이 수고해서 녹취한 것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