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성우교회 오전 설교 녹취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성우교회 오전 설교 녹취해 보았습니다.
이름 : 성재필(IP:211.109.131.33)
김달원님 목사 지난주일 오전 설교 녹취입니다.
엡4장1절~6절
실제적인 바울의 권면들은 애초에 에베소교인들에게 하고싶었던 말. 실제적인 권면을 하려고 이글을 시작했다. 성령의 하나된것을 지키라. 새사람을 입으라. 이런 실제적인권면에 앞서서 왜 우리는 그래야하는가라는 이유를 1-3장까지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놓고 실제적인 권면을 하고있는거다. 훌륭한교사들은 늘 어떤 권면을 할 때 곧바로 그 권면을 들이대지않는다. 무엇보다 그 권면의 이유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다음에 자기가 하고싶은 권면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성령의 인도아래서 누구보다 뛰어난 교삽니다. 사도바울이 이사람들의 문제를 보고 실제적인 권면을 하고싶은데 곧바로 당신들의 문제는 이렇다라고들어간게아니고 상세히 앞서설명하고 4장부터 그러므로 이렇게 해라...힘써지키기위해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하고.....서로 용납하라이런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바울은 논문을 쓰는게 아니라. 고린도 에베소등등 하나됨을 모르는 교인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목회자입니다. 실제로 도움을 줄려고 바로들어가면 설득력이 없다.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사람들이 그 순종에 힘이 없다. 매를 맞아도 이유를 알고 맞아야지..아니면 혼란스러워한다. 이거 율법아니야?.. 처음에 들을때는 은혜롭다. 그다음에는 하나님나라의 실제가 뭐야? 지식안에서 감사하고 찬양하는것은 좋은데 그다음은 어쩌란 말이냐 답이 안나와요. 중간중간에 설득을 해가면서 힘잇는 순종을 이끌어냅니다. 신약특히 바울의 편지는 굉장히 논리적. 앞뒤의 상관관계가 굉장히 분명하게 짜여져있다. 엡 은 전체가 하나로 한문장처럼 꽉 짜여져있다. 바울의 설명을 따라가는 수고와 힘을 써야한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성경을 대할 때 조심스럽고 용의주도하게 안하고 수고안하고 읽습니다. 대충읽습니다. 취사선택해서 읽습니다. 왜그러냐? 귀찮지요. 사실은 .. 왜 귀찮지요? 어렵습니다. 왜 귀찮고 어렵나?물론 실제로 어려운부분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실제로 우리의 지성을 최대한사용해야하는 어려운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다 핑계고.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에 관심이 없어서 어렵고 귀찮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잇는 분야는 아무리 어려워도 파고들어갑니다. 예를들면 어떤사람이 재테크 부동산에 관심있다. 그러면 아무리 귀찮더라도 스스로 공부를 하고 파고듭니다. 불신자도 마찬가지고 놀라운 것은 참 많이 안다. 어떻게 이 많은 것을 다 알까? 성경만큼은 어렵다는 핑계로 수고를 안합니다.. 어려운게 아니고 사실은 성경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이게 바로 우리들의 영적인 수준이고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하나님나라에 그만큼 관심이 없다는 거에요. 귀찮거나 어려운게 아니고 우리의 관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니 교회의 위대성 새 삶. 새 소망 영적인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귀찮고 지겹습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뜬구름잡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런데...이만큼이라도 교회에 나와서 이만큼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제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라도 대단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성경읽는것이. 내가 왜? 견딜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억지로라도 듣는다. 이것은 큰 은혜이고 거듭남. 새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이만킄이라도 하나님말씀에 관심가질수가 없다. 이만큼이라도 안됩니다. 새사람이 아니고는 .그러니까 4절부터이야기가 뭐냐? 우리가 이미 한몸.한성령으로 부름받았고 한소망안에서 살고있다는 거에요. 교회가이미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병든교회든. 졸든. 오늘교회가야겠다는 관심자체가 굉장한 거에요. 이만큼이라도 관심을 갖는것은 한 주님. 한 성령님에 이끌려서되었다는 거에요.이만큼이나마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이만큼이나마 성경을 읽어나가고 있는것은 라오디게아교회라도 이렇게된것은 한몸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속에는 지금 이순간만큼은 에베소서를 이해할려는데서 하나가되어있다는거죠. 강하든 안강하든. 한성령이 아니면 이렇게 안됩니다. 한몸이 되었다는 겁니다. 살아났다는 거에요. 그나마 이게어딥니까? 대단한겁니다. 기적없이는 안될일. 죄와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기에 가능한일. 신의 성품에 참예했기에. 하나님의 씨가 우리속에 있기에.. 기적이에요. 그러나. 교회가 뭐 한몸입니까? 너무 엉망이지 않나요? 이렇게 묻고있는데 확실한 증거가뭐냐하면 말씀을 위해서 실제로 지금 한자리에 모여있다는 겁니다. 왜나왔습니까? 어쨌든 하나님말씀을 듣기위해서 모였잖아요. 우리가 하나라는 증거입니다. 하나이니까 모였잖아요. 물론 우리가 살아가다가 등산갈수도있고 교인들끼리 싸울수도 있어요. 결국은 우리가 하나로 모입니다. 골프치고 학원도가지만. 그것은 하나일수밖에없다. 아 다음에는 교회에 가야지..대박. 성령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골프치면서도 에베소서에 무슨말씀이 잇을까 마음이 갑니다. .추상적인 한몸이 아니고 구체적인 한몸입니다. 이 자리에 왜 왔습니가? 최소한 말씀을 중심으로 모였다면 그리스도의 피로말미암은 한 몸이에요. 우리가 어쨌든간에 한몸이라는것은 명백하고. 그 증거도 명백합니다. 이 자리에서 같은 말씀을 듣고 있다는 자체가 한 몸이에요.싸우더라도 같은관심이잖아요. 사도바울은 한몸이 아니기때문이아니라. 한몸인데. 우리가 약하다는거에요.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거에요. 말슴이 귀찮을뿐이에요. 이 말씀이 주식이라면. 학원에 아이들 모으는 비결이다. 취업비결이라면 다 볼겁니다.성경을 주의깊게 읽지를 않습니다.심지어 기도하면서 읽으면 쉽다. 이말이 읽는수고를안하려는 핑계입니다. 말씀듣는.읽는수고하기싫으니까 성령으로 저절로 되겠지라고 합니다.. 감정과 지성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에요.
목사님들 설교하면 각자 다르게 이야기하니까. 예배당건축. 철학. 율법. .강조하는게 다 다르다. 에이 어렵다. 성령께서 인도하시겠지... 주도면밀하게 성경에접근하시기바랍니다.성경을 보시고 아하 이것이 하나님나라구나. 스스로 판단하세요. 제결론을 그냥 따라오지마시고 성경을 스스로 읽고 수고하세요. 자기가 할수잇는만큼접근하시고 스스로 결론내리고 목사님과 일대일로 대화가되어야합니다. 우리는 누가뭐래도 한몸이고 하나에요. 우리는 분리될수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엡4장이 무슨말이냐? 성부 성자 성령이 분리되지 않는이상 우리도 분리안된다. 하나에서 나왔다. 한몸이에요. 하나됨의 나타남이 저절로안되니까. 힘써 지켜야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일단 힘써 모이는것부터 해야합니다. 모이지 않는데서 무슨 하나가있느냐? 지금 이 모임이 가장 먼저해야될일. 모이기를 힘써라는 말도 있어요.보기싫은사람에게 먼저다가가서인사하는것이 겸손입니다. 오래참고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해야합니다. 너무 큰 것을 이야기하면서 사소한것을 무시하는경향이 있다. 한 성령안에서 부름받고 한 소망가운데서 살고있다. 이거는 굉장한겁니다. 다시 태어난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한몸으로 되었다는 겁니다. 부름심에 합당한 새삶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재필(IP:118.♡.159.178)
09-12-28 20:40
설교 평 부탁합니다.
강구만(IP:118.♡.241.252)
09-12-28 21:15
복음이 이 땅의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케 해주는 설교 입니다. 집사님도 떠나온 세상에 미련 갖지 마시고 십자가 복음의 깊이에 푹 잠기는 새해 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관리자(IP:124.♡.84.47)
09-12-28 22:47
거룩 곧 성전(몸) 자체에서 생명수가 나오지 않기에, 거룩성(모양만) 그럴듯 하게 실로암 못에서 물을 퍼와서 인위적으로 물을 퍼부어서 생명수가 흐르는 흉내를 내는 모습은 얼마나 어색한지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차라리 진짜 몸(생명수가 자체적으로 흘러 흘러 넘치는)을 만났다면 교회는 그저 상한심령으로 가짜 몸임을 고백으로 차이성을 증거해야 할 터인데(성전에 두 사람 중 세리)
도리어 온갖 거룩성을 갖추고 지키고 한 몸 되자 라는 동질성을 추구하니
기여이 교회를 사적인 조직으로 삼켜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군요.
(하나님의 거룩과 동질성을 갖춘 십의일조를 하고 일주일에 금식을 두번하고, 저런 더러운 거룩성을 조금도 갖출 능력이 없는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라는 성전에서의 바리새인의 기도 - 눅 18장 )
뺨 때려도 잘 도 대주는 잘도 용납해 주는 저런 아량 넓은 마음이야 말로
생명이 끊어진 자체적인 선한 이미지를 관리하는 광명한 천사이겠지요.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면서 경건의 모양만 갖추자는 저런 소리를 허용하는 저의가 무엇일까요?
(딤후 3:1, 개역)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개역)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개역)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 3:4, 개역)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5, 개역)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점은
삯꾼은 기여이 사람의 손을 성전에 댈려고 하는 겁니다. (경건운동, 근육운동, 새생명삶운동, 성화운동, 하나님나라 운동, 묵시운동, 무슨 무슨 운동, 손 대고 싶어서 환장해 있습니다.)
반대로 선한 목자를 기여이 손댈려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목숨을 버리시는 참성전의 생수를 자신의 몸에서 생명수가 끊어지지 않도록 내어주심 입니다.
저런 [인간이 손 댄 성전] 과 대조된 차이나는 참성전을 외치다가 성전 건드린다는 이유로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게 되는 것이죠.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근호(IP:117.♡.136.28)
09-12-29 15:18
누구의 신앙 고백을 평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한 그 저까지의 선입견을 접고 그 글이나 설교에 나타난 문장 그대로를 그 사람의 진실된 고백이라고 간주하고 평해야 합니다.
즉 어떤 ‘목사’가 ‘목사의 자격’으로 설교했다고 여기지 말고 그냥 길거리에 우연히 만난 어떤 평범한 교인이 쏟아내는 담화라고 여기고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불순한 감정이 실릴 수가 있습니다.
설교를 평할 때는, 논리적인 고리 연결에서 흠을 찾아내려고 설치지 말고 담박 이 사람이 진정 무엇을 외치고 싶은가 하는 윤곽부터 잡아서 그 범위에서 될 수 있는대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김달원 목사님의 본 설교가 말하고 싶은 바는, 이것입니다.
“진정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모이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 안에서 성도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임’을 교회 자주 모이는 것으로 보여주세요. 싸우더라도 제발 교회 와서 싸우시기 바랍니다.”입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담박 외치고 싶은 바가 이것이냐 하는 겁니다.
즉 사도 바울은, 과연 “일단 여러분들은 성도 맞지요? 그렇다면 이제 성도됨을 대해서는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의심하거나 닦달내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성도답게 처신해야 하는 것을 일러주테니 잘 듣고 제 권면대로 하시면 여러분들은 아름다운 교회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라는 취지가 과연 에베소서 4장 본문이 의도하는 바인가 하는 점입니다.
길에 우연히 마주친 어떤 평교인이 에베소서 4장을 가지고 그런 주장을 했을 때, 과연 “옳습니다! 성경 제대로 보시네요”라고 동의할 수 있습니까?
과연 ‘교회가 예수님의 한 몸’이라는 증거가 교인들이 예배처소에 자주 얼굴 내미는 것으로 증명이 가능한가 하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교회에 등록 교인이 100명인데 어느 날 예배시간에 그 중에 10명만 참석했을 때, 그 열명만으로는 도저히 온전한 예수님의 한 몸됨을 증거하지 못하고 나머지 90명마저 참석해야 예수님의 한 몸됨을 증명하는데 성공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한 몸됨이란 각자의 몸들을 연결시키고 결집 시키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약에 100명 등록 교인중에서 100명 전원 다 참여했어도 각자의 몸들의 생각하고 노리는 바가 제각각이라면 결코 한 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한 몸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단결력으로 성사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서 뭔가 공통적인 요소가 여럿 사람들에게 공의 흘러들어간 그 상황 때문에 성사됩니다. 그것이 바로 ‘한(1) 성령을 마셨다’는데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1-13)
그렇다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성령을 참으로 받았는지 아니면 ‘받아 본 적도 없이 받은 척’을 하고 있는지의 판가름은, 성령이 나오신 출처를 지향하고 바라보고 있느냐 여부로 판가름됩니다.
즉 “우리 모두는 예배처소도 없이 지금 이 시간부로 온 세계로 각각 흩어져 결코 서로가 만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디 있든지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만 사모합니다”고 고백한다면 누가 뭐래도 같은 성령을 같이 받은 한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제부터 우리 교회가 깨어져 박살나서 뿔뿔히 헤어져 두 번 다시 모일 일이 없더라도 성령받은 사람은 오로지 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듯이 같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한 몸입니다”고 설교자가 설교를 했을 때, 교인들은 그 설교를 듣고 “아멘” 할 경우에만 그 교회는 주님의 한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등록 교인들이 대충 비율로 따져서 많이 소집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한 몸이 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살해했던 유대인들도 이런 발상으로 눈에 보이는 신앙공동체가 견지하면서 집단으로 예수님을 모해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의도는, ‘결집력에 의해서 유사 신의 집단을 조성하려는 인간의 지울 수 없는 근성’을 염두에 두고, 진정한 그리스도 몸의 차이성을 에베소서 4장을 말하기 위해, 그냥 “신체들을 끌고 와서 특정 공간에 모이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하나됨”(엡 4:3)의 의미를 예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설명하는 겁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선물을 주셨다”(엡 4:8)
사람은 약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신의 기적이라고 간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제안했던 악마의 두 번째, 유혹입니다. “당신이 진정 목자라면 기적을 보이면 사람들은 그 기적으로 인하여 너를 추종할 것이다”는 유혹 말입니다.
오늘날 누구도 그런 유혹을 진리로 알고 그 종교성을 가지고 자기 가게를 꾸려나가서 고객의 호주머리를 노립니다. 단 성령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