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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12월 21일 강의 피16강 인간 노동(정의) vs 갈라서게 하는 생명(예수님의 노동)강의[피]

대구 12월 21일 강의 피16강 인간 노동(정의) vs 갈라서게 하는 생명(예수님의 노동)

이름 : 관리자(IP:124.59.85.59)

091221 피16강 정의(노동의 댓가)냐 vs 지시(간섭)냐

관리자(IP:220.♡.41.193)

10-01-07 08:17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1221피p070정의냐지시냐.hwp

관리자(IP:124.♡.86.6)

10-02-25 13:31

대구091221피p070정의냐지시냐

[09 대구강의 20] - [피 16] - 정의 구현인가? 지시 받기인가?

10,12,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의 노동 !!

오늘은 교재 7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사람이란 노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모든 공로와 영광을 더욱 더 자기에게로 모아들이는 경향을 지닌다. 자신이 행한 노동만큼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 가치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가스 배관을 타고 내려오면서 도적질을 하는 도둑이 제 딴에는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유다 나라를 삼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는 바벨론 군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 속에서 행군을 감행했을 것이다. 고생에 합당한 열매를 자기가 챙기고 싶어서 그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 보면 “노동은 고생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고생하는 것은 모두 노동인가?” 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고생을 하게 되면 그 고생에 합당한 열매를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 교제에도 예가 나오지만, 가스 배관의 타고 도둑질을 하는 도둑놈의 경우에도, 그 도둑은 중력을 무시하는 그런 중노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니 당연히 그 도둑도 거기에 합당한 자기 노동의 열매를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도 그런 고생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도둑놈은 뭐라고 생각하는고 하니, “나는 이런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러 이러한 열매를 얻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바로 ‘정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내 고생의 열매가 맺힐 때 - ‘정의롭다’ !!

언젠가 제가 ‘정의롭다’ 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싶은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고생을 한만큼 열매가 맺히게 될 때, 그때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도둑의 경우에 가스 배관을 타고 고생을 해서 자기에게 소득이 생긴다고 하면, 물론 빈집을 턴 경우겠지만 말이다. 그때 그 도둑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자기 나름대로는 그것을 두고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서 지금부터 심도 있게 강의를 한번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 것을 두고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해답부터 먼저 살펴보게 되면, 여기 이 교재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다른 노동이 나온다. 다른 노동의 질이 있었다. 예수님이 하시는 노동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

여기에 보면, “하나님에게는 다른 노동이 나온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가? 자기가 고생을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을 정의롭다고들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다른 노동을 말씀하시는데, 즉 하나님의 하시는 노동은 무엇인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노동은 열매로 이어지는데, 그것이 곧 생명을 주는 열매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 인간노동의 열매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위치와 생명의 위치에서 거꾸로 소급을 해보면, 이 인간노동의 열매는 자기를 죽게 하는 열매이고, 그러니 결국에 인간의 노동은 아무리 해봐야 자기를 죽게 만드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살려고 노동을 했는데, 그만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6장에서 !!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그때 인간들의 신체 에너지가 얼마나 소모가 되겠는가? 그렇게 예수님을 열심히 다녔는데, 그것도 역시 노동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노동에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만한 노동의 성과, 즉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즉 그렇게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다시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는 갈라섬의 계기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헤어지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왜 자기를 따라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는가? “그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 하면 생명의 열매를 얻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요 6: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노동을 !!

그러나 예수님의 노동은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누구와 관련이 있는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노동을 해서, 거기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당연히 인간이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꾸만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치는데, 심지어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겠다고 하는 것조차도 열매를 초래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열매와 예수님의 열매가 같으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고 하면, 즉 자기가 그러한 노동을 했다고 하면 당연히 그만한 열매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열매가 예수님의 열매와 같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이다.

◈ 노동에도 질이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계속해서 발로서 차시는데, 즉 우리 인간들이 열심히 전도를 했다고 해도 발로 차고, 기도를 했다고 해도 차고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데, 그야말로 정반대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가스배관을 타고 다니는 도둑놈도 뭐라고 하겠는가? “너희들이 열심히 교회에 다닐 때, 나는 가스배관을 타고서 남을 집을 털었는데, 그 차이점이 있는가? 전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도둑놈의 말이 맞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노동에도 질이 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70페이지에 나오는데, 즉 모든 노동에는 질이 있고, 그것이 각자 다 다르다는 말이다.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혹시 ‘레비나스’ 라는 양반을 아세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인간의 그런 노동과 열매가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지, 그것을 설명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유명한 유대교 철학자 ‘레비나스’ 라는 양반의 주장인데, 그것을 소개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무슨 주장을 했는고 하니까, “인간의 윤리인가? 아니면 인간의 지식인가?” 라는 것을 논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지식이라고 한다면 신은, 천국은, 그리고 교회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인데, 즉 그런 것은 다 지식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 ‘윤리’ 인가? ‘지식’ 인가?

그런데 레비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윤리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자기 몸을 가지고 남을 위해서 실제로 베푸는 것이 윤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반해서 지식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배우면 된다는 것이다. 그냥 배우면 말이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예배를 드리는데 앉아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기도는 오직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그러니 남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 그런 것은 이 지식에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오잉, 고른판 ??

다시 말해서, 왜 이런 지식에서 하나님의 윤리가 나올 수 없는고 하니까, 지식은 무엇으로 통하는고 하니, 그것을 ‘동일성’ 이라고 하는데, 어떤 동일성인고 하니,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지식은 누구 좋아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 좋아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서 자기를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지는데, 그러니 모든 자연의 변화를, 그것을 ‘고른판’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용어들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것들인데, 고른판이 무슨 뜻인가? 아주 판판하게 판을 고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울퉁불퉁한 자기 자아를 어떻게 바꾸는고 하니, 매끈하게 한다는 말이다. 아주 윤기가 나도록 반짝반짝하게 고르고 고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전부가 울퉁불퉁한 자아를, 즉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자아를 아주 깔끔하고 깨끗하게 균일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동일성’ 이라고 하고 말이다.

◈ 자기 동일성 !!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아, 모르겠다” 라고 하다가,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고 나니까, “아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렇게 되어가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에 자아는 기분이 좋은데, 왜냐하면 울퉁불퉁한 것들이 어떻게 되는가? 마치 유리알처럼 매끈하게 정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 ‘자기 동일성’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자기 동일성이 도대체 남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도를 닦는 것이 남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말인데, 자기가 성불하는 것이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성화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즉 자기가 도를 닦는 것이 어떻게 남에게 윤리가 되느냐는 것인데, 자기가 도를 닦는데 옆에 거지가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도를 닦는데 방해가 되니 쫓아낸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도를 닦는 것은 자기를 매끈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나’를 위한 타인 !!

그런데 왜 이렇게 지식이 발달하게 되는고 하니, 레비나스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서양의 역사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로부터 와서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타인이 있으면,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타인을 거쳐서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타인은, 즉 이 남은 누구를 위한 남인고 하니, 자기가 실컷 이용해서 빼먹을 것은 빼먹는 남이라는 것이다. 즉 “나를 위한 타인이다”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울퉁불퉁한 굴곡이 많은 인생을, 이미자의 노래에 ‘여자의 일생’ 이라는 슬픈 노래가 있는데,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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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일생 (이미자) -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 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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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매일같이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으로, 눈물로 지새우는 여자의 일생인데, 그것이 언제 고른판이 되겠느냐는 것인데, 물론 돈이 많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대번에 고른판이 되겠지만 말이다.

◈ 인간의 ‘의존성’ !!

그것을 두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즉 “나는 고생이 심하다. 그렇게 나는 고생이 심하니까, 매끈하게 고생이 없는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고 하니, 타인을 통해서 나에게로 오게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말하기를, 인간의 ‘의존성’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의존성이 되니,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과부가 된 여자는 참으로 힘드는데, 왜냐하면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기에 말이다. 그렇게 의지할 곳이 없으니, 의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고 하니, 교회로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로 가게 되면, 그곳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르신이 계시는데, 즉 신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와 성령을 의존해서 자기 자신을 편평하게 아주 만족스럽게 고르게 한다는 말이다. 즉 이렇게 타인의 자리에 하나님, 예수, 성령을 집어넣어 버리면, 그렇게 되면 누구의 위한 하나님이고, 누구를 위한 예수님이고, 누구를 위한 성령님이냐는 것이다.

◈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는 ‘지식인’ !!

그것은 바로 고생으로 점철된 여자의 일생을 전혀 고생이 없는 편평한 여자의 일생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울퉁불퉁하고 굴곡이 심한 자기의 인생을 매끈하게 정리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바로 ‘지식인’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자기에게 미쳐서 만족하고 있는데, 그런데 남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자기가 한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두 사람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 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서로가 결코 만만치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결국은 정치적인 타협점을 찾게 되는데, 그런데 이 정치적인 타협점은 무엇인고 하니, ‘미흡함’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미흡함이라는 것은, 앞에서는 항상 웃으면서 악수를 하지만 뒤쪽에서는 음흉한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은 내가 많이 양보를 하지만, 조금 있다가 한번 보자” 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차하면 가차없이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업일 수도 있고, 아무튼 음흉한 노림수라는 말이다. 즉 같은 교회에서 김 집사와 최 집사가 서로 만나서 “아이쿠 성도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형제 자매가 어떻고 하는데, 그런데 뒷구석에서는 음흉한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다.

◈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은?

그러니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윤리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2000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나, 또한 유대교의 수 천년의 역사가 모두 다 자기 동일성, 즉 굴곡이 많은 자기 인생을 편평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렇게 오로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전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이렇게 타인과 자기가 만날 때, 그것을 두고 레비나스는 무엇이라고 여겼는고 하니, 그것을 전쟁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반은 일차대전과 이차대전을 모두 다 거쳤던 사람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왜 그런 전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인간이란 것은 각자의 자기 동질성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전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그런데 여기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무엇을 하겠는가? 모든 백성들을 자기 마음에 맞도록, 자기 취향에 맞도록 동일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반발하는 민족이나 국가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침범을 해서 그들을 몽땅 다 자기가 원하는 자기 동일성으로, 그것을 ‘전체성’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구상한 전체성에 전부를 다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국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목사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교인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목사는 자기가 생각하는 동일성에다가 교인들을 마치 자기 부하처럼 다 집어넣어서 지배를 해버리는데, 그러니 그것이 무슨 윤리이고 또 섬김이냐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이웃사랑이고 말이다. 그러니 레비나스는 그런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자기 사랑을 위한 이웃사랑 !!

그러니 결국은 이웃사랑을 우회해서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 사랑’ 인데, 즉 자기 사랑을 위한 이웃사랑이라는 말이다. 자기 사랑을 위한 기도이고, 자기 사랑을 위한 전도이고, 자기 사랑을 위한 헌금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나 기독교이고, 또한 모든 종교단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물론 서양자체가 기독교 문화이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그런 것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 왜 지식이 아닌 윤리인가?

인간이 바로 이러할 찐데,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레비나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무슨 재주로 진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지식이 아닌 윤리라고, 그렇게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지금부터 바로 그 근거에 대해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다들 안다고 치고, 사실은 알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이니 말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에서 몇 가지 개념들을 빌려오는데, 그러면서도 하이데거를 반박하고 말이다. 프랑스어로 “il y a” 라고, 영어로는 “there is” 라고, 즉 “거기에 있다”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저에게 번역을 하라고 하면 “거기에 그냥 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 창세기 1장 2절 - 무질서 !!

창세기 1장 2절에 의하면,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어디서 하셨는가? 빛이 있기 이전에 말이다. 흑암과 혼돈에서 창조를 하셨는데, 그것을 두고 ‘무질서’ 라고 하는데, 즉 무질서에 말씀이 오게 되면 질서로 바뀐다는 것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렇다면 여기서 이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는 유대교 철학자이니 그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무질서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적인 방향과 하나님의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향은 무질서에는 질서로 바뀔 때 당연히 말씀으로 인해서 바뀐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말씀으로 인한 방향을 따르지 않고, 무질서에서 무질서끼리 뭔가 뭉치게 되는데, 그것을 바로 ‘자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질서끼리 뭉치게 되는 말이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거기에 있다” 라고 했을 때, 그냥 그렇게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존재가 아니라고 해서 ‘비존재’ 라고 하는데, 즉 그냥 그렇게 무질서한 상태로서 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말이다.

◈ 무질서는 나쁜 것이고, 질서는 좋은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거기에 있다” 라는 것이 ‘존재’ 라고 하는 굳히기에 들어가게 되면, 이 존재는 주변에 있는 무질서를 모두 끌어 모아서 하나로서 응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덩어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일단 덩어리가 되고 나면 어떻게 하는가?

이러한 무질서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나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데, 즉 “무질서는 나쁜 것이고, 질서는 좋은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흙이 되면 나쁜 것이고, 반대로 흙에서 사람이 되면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흙이면 흙답게 !!

그런데 그것이 과연 맞는 말인가? 하지만 레비나스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흙이면 그냥 흙으로 사는 것이 바로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정작 흙이면서 흙이 아닌 척하는 것 자체가 바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흙으로 돌아가고 있으면서도 “에헴!” 라고 하면서 입을 닦고는, 자기가 인간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남에게 인식을 시키는 것, 그것을 바로 ‘위선’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위선을 품고 사랑을 해댄다든지, 또한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인간이 만든 존재에서 하나님의 결속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은 반드시 무질서를 거쳐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인간은 반드시 무질서를 거쳐서 !!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여기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 라는 것이 없었던 시절로 해서 돌아가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질이 너무 급해서 이근호처럼 말이다(ㅋㅋ). 그냥 바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나’ 라는 인간에서 하나님 나라로 곧바로 말이다. 말씀에 의해서 무질서를 거쳐서 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무질서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 무질서를 나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즉 자기 해체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자기 해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기를 부인하라 ??

불교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즉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입으로 내뱉는데, 곧 그렇게 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즉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열 번을 한 사람하고, 백 번을 한 사람하고 누가 더 위대한 사람인가? 당연히 열 번을 한 사람보다도 백 번을 한 사람이 더 위해하다는 것이다. 회개를 해도 백 번을 한 사람이 더 위대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위대한 존재에게 부족하다는 것이 해당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백 번이나 회개한 인간을 또 다시 부족하다고 하게 하려고 하면,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회개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회개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러나 회개를 백 번이나 한 인간이 회개를 또 하려고 하면 엄청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사들을 보고 회개하라고 하면 정작 그들은 회개를 할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한번 써먹은 레파토리를 또 써먹고 또 써먹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부흥회를 할 때마가 수백 번씩의 회개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간들에게는 자기들이 일일이 만들어놓은 회개의 레파토리가 따로 다 있고 말이다.

◈ 신체의 특징은 ‘즐기기’ !!

계속해서 레비나스 이야기를 해보면, 이렇게 “거기에 있다” 라고 해서 존재가 될 때, 그런데 이러한 존재를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신체’ 라는 것이다. 지금 이것이 레비나스가 주장한 이야기인데, 마치 들뢰즈를 보는 듯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도 거의 동시대이고 말이다.

이런 인간의 신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욕구’가 있고 또 ‘욕망’이 있는데, 여기서 욕구라는 것은 바로 의식주, 즉 의복과 식품과 주택인데, 특별히 레비나스는 주택을 강조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인간의 신체가 있게 되면, 이런 신체의 특징이 바로 ‘enjoyment’ 라고, 즉 ‘향유’ 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즐기기’ 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와의 차이라는 것이다.

◈ 인간의 신체는, 그냥 솔직함이다 !!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그것을 ‘염려’와 ‘불안’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레비나스에 있어서 신체라는 것은 ‘즐기기’ 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렇게 ‘즐기기’ 라고 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는데, 즉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그냥 솔직함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복음(?)이냐는 말이다. 즉 “껍데기는 가라” 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한번 깨어놓고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왜 사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냥 내 신체가 즐기기를 원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정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체가 먼저 있고 난 다음에 비로소 ‘나’ 라는 것이 있기에 말이다. 레비나스가 분명히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 즉 인간의 신체가 먼저 있고, 그 신체를 보존하려고 하다가 보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신체를 자기가 소유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신체는 소유되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신체를 관리하다가보니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팔 다리가 있으면 그 옆에다가 추상적으로 ‘나’ 라는 것을 설정해서, 그렇게 해서 자기가 신체를 소유하는 식으로 해서 신체를 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신체는, 그냥 즐기는 것 !!

사실은 이런 태도는 솔직한 것이 아닌데, 만약에 ‘나’ 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면 “솔직해야 한다, 점잖아야 한다, 착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신체는 그것이 아니라, 이 신체는 점잖고 착한 것 등이 적용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고, 아까도 말했지만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그냥 거기에 그렇게 자기 신체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체는 거기에 그렇게 있으니, 이 신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즐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즐기는 것이 있어서는, 등산을 하면서 즐기던, 낚시를 하면서 즐기던, 그런 것조차도 필요가 없는데, 그냥 편하게 즐긴다는 것이다.

◈ 행복 - 편하면 최고 !!

지금까지 강의한 결론에 의하면, ‘나’ 라는 것이 있기 이전에 신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편하면 최고라는 것이다. 이렇게 편한 것을 두고 행복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그냥 편하면 최고인데, 그런데 그 기준은 각자의 신체가 다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편한지는 각자 본인의 신체가 발현하는데 따라서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률적으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데, 그런데 만약에 일률적으로 편한 것이 있다고 하면 어디에 빠지는고 하니, 그것이 아까 우리가 우려한 것인데, 그만 동일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어이, 니는 나처럼 해야 편하고 행복해. 그러니 나를 본받아!”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인데, 즉 “니는 니가 편한 것이 따로 있고, 나는 내가 편한 것이 따로 있다” 라는 것이다.

◈ 그냥 내버려둬 !!

그런데 그렇게 않고 그 사람의 행복을 따라가려고 하면, 그 사람이 모델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만 그 사람의 수작에 말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천 목사님에게 “천 목사님, 저처럼 해야 행복합니다” 라고 하면, 천 목사님은 자기 신체는 그만 포기하고 그 사람의 신체에 복속되고 예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그야말로 자기 이름 대로인데, “그냥 내버려둬!” 라는 것이다(ㅋㅋ). 그냥 각자의 신체대로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즉 그냥 솔직함이라는 말이다.

◈ 신체가, 자꾸만 누구를 흉내내려고 !!

여기서 레비나스는 라캉과는 그 의견이 다른데, 라캉의 경우에 인간의 신체가 즐긴다는 점은 같지만 말이다. 이렇게 인간의 신체를 주체인 ‘나’ 라는 것이 관리를 하다가보니까, 이 ‘나’ 라고 하는 신체가 어떻게 하면 즐겁게 되는지, 그것이 신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자꾸만 흉내를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저 사람처럼 되면 행복할까? 아니면 이명박처럼 대통령이 되면 행복할까? 아니면 내 자식이 김연아처럼 되면 행복할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꾸만 누구를 흉내를 내려고 설치기 때문에,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만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자꾸만 기웃거리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습니까? 행복합니까?” 라고 하면서 자꾸만 기웃거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것을 왜 묻는가? 그것이 나중에 나오는데, 즉 ‘대화’ 라고 말이다. 물론 이 대화는 레토릭과 다이아로그로 나누어지는데, 아무튼 그렇게 물어서 자기가 어느 누구에게 근접하게 되면 행복해질 수가 있는지, 그것을 찾아가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하게 되는지, 소위 기도를 좀 한다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 방법을 배우게 되고, 또한 전도를 잘하는 사람을 찾아서 전도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고 말이다. 목사를 찾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는지, 그런 방법을 배우고 말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잘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냥 무질서로 돌아가면 되는데 말이다.

처음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인간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누구의 소관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주시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노선을 인간들 자기 자신의 힘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 규칙과 규칙성 !!

제가 이번에 개혁신학학회에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그 논문의 마지막 각주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는고 하니까, “율법은 규칙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규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규칙성으로 본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율법은 원래 규칙인데, 우리 인간들을 그것을 규칙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율법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일단 자기가 행동을 해놓고는, 그 다음에 그것이 율법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대조하는 식이라는 말이다. 즉 일단 행동은 자기가 해놓고, 그것이 어디에 맞는지, 혹은 어디에 저촉이 되는지 말이다. 그렇게 자기 행동이 어디에 성취가 되는지, 혹은 위반이 되는지를 모든 성경구절을 다 동원해서 확인을 한다는 것이다. “아하, 내가 이것을 성취했구나, 이것을 위반했구나” 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규칙을 차후에 자기 규칙성에 맞도록 그렇게 조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 내가 어제는 이웃사랑을 다 하다니”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큰 마음을 먹고 어제 시간을 내어서 고아원에 가서는 쌀을 조금이나마 팔아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이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결국 무슨 짓인가? 율법은 분명히 주님의 소관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안에다가 자기 나름대로의 율법성을 따로 만들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겨난 못된 버릇인데, 즉 자기의 법을 나름대로 따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법에 대해서, 결국에는 거기에 맞추려고 동일성을 시도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자기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빌미로 해서 우리를 무질서로 밀어 넣는데, 즉 우리가 흙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그런 작전을 벌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말이다.

◈ 즐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곧 세상 !!

아무튼 레비나스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이렇게 즐기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보다 더 즐기기 위해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레비나스는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레비나스는 무엇을 예로 드는고 하니, 마치 어항에 있는 금붕어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듯이, 바로 이 물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 하이데거 - 세계 내의 존재 !!

이것을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 내의 존재’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나’ 라는 존재에 세계 안에 있을 때만 발견이 되는 것이지, 세계 밖에 나가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즉 “‘나’ 라는 것은 어떤 구조 안에서의 ‘나’이기 때문에, 그 구조를 치우게 되면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오니 자기가 성도인 줄을 아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과연 성도가 맞는지 안 맞는지, 거기에 대해서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오히려 믿음을 방해할 수가 있는데, 교회를 치우고 나더라도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런데 교회에 와야 자기가 성도라고 하는 것을 자꾸만 확인케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하이데거에 의하면 무엇인가?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세계 내의 존재’ 라는 것이다. 즉 ‘나’ 라고 하는 존재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다 그 모든 책임을 다 미룬다는 말이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다 말이다.

◈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 ??

옛말에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다” 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는데, 그렇게 우리 인간들은 모든 탓을 어디로 돌리는고 하니, 그것을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속이 되어있는 것에다 같이 묻혀서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삼성맨’ 이라고 하면 다 똑똑하고 착실한가? 그것이 아닌데, 그런데도 ‘삼성맨’ 이라고 하는 뺏지를 달고 있으면 일단 먹혀든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닌데, 연고대보다 떨어지는 과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서울대학교라는 뺏지를 달게 되면, 모두가 다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묻혀 들어간다는 말이다.

◈ 과연, 이 세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 세상 속에서 둘러싸여서, 그렇게 싸여진 것을 가지고서 자기의 질(質)을 결정지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 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렇게 우리 인들은 이 세상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곧 ‘요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 대한 요소에 둘러싸여서 신체는 자기 욕구를 달성하는데, 그렇게 해서 이 세상 속의 신체는 세상과 함께 즐긴다는 것이다. 물론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일단 이렇게 되면 아무런 문제점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즐기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결핍’, 즉 ‘모자람’이 발생하고 만다는 것이다.

◈ 라캉 - 타인으로 인한 결핍 !!

여기서 라캉의 의견과는 구별이 되는데, 라캉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 모자람이라는 것은 누구 때문에 생긴다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세계에 침범한 타인으로 인해서 그 모자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닌 타인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한 칸의 방에서 식구 3명이 오손도손 자미나게 살아갈 때는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옆집을 보니 달랑 두 식구만 사는데 그만 집이 백 평이나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안 보았으면 되는데, 그렇게 백 평 짜리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 순간 갑자기 자기 만족함이 깨어지고 그만 모자람으로 변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집사님이 오후예배시간에 나름대로 기도를 참 잘했는데, 그런데 기도를 더 잘하는 교인이 우리교회에 왔다고 하면, 그러면 그 집사님은 다음부터는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그 집사님을 보고 아무리 기도를 잘 한다고 칭찬을 해주어도, 그러나 본인이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그만 모자람을 느낀다는 말이다.

◈ 레비나스 - 타인이 아닌, 본인이 즐기는데도 모자람이 !!

그것이 바로 라캉의 의견인데,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것이 아니라 무엇인고 하니, 즉 타인이 와서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본인이 즐기는데도 이 세상은 넉넉하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들 욕망을 남이 와서 주는 욕구라고 하지만, 그러나 레비나스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 신체라고 하는 무질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즉 신체는 자기 세포를 보고서 “야, 똑바로 해!” 라고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가? 그것은 바로 이 세포는 이미 우리의 선악의 관계를 떠나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쌍꺼풀이 없는 사람이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쌍꺼풀이 생기는가? 전혀 그것이 아닌데, 또한 키가 작은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키가 커지는가? 역시 그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키가 클 이유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키가 커버리면 타인의 동질성에 말려든다는 것이다.

◈ 키 160에 몸무게 55면 OK !!

옛날에는 여자가 160이 되면 큰 키라고들 했는데, 충분히 모델도 되고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양에서 170이 되는 여자들이 인기를 끄니까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160은 아예 뽑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는 키 160에 몸무게 55면 모델이 되었는데, 즉 우리나라에서는 “아이쿠, 복스럽다. 참, 통통하네” 라고 하면서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170에 45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세상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마치 물고기가 물이 없이는 전혀 살아갈 수가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세상이 ‘나’의 멱살을 잡고 마구 뒤흔든다는 것이다. 못살게 말이다. 누구는 주식을 해도 일주일만에 500 만원이나 꼴고 말이다.

◈ 왜 세상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

그런데 그렇게 흔들어댈 때, 즉 “왜 이 세상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 라고 하는, 즉 “나의 동질성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라는 것에 있어서, 그것을 전부가 다 누구 탓으로 돌렸는가? 자기 탓이 아니라 남의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레비나스가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욕구 → 집 → 욕망 !!

그것이 바로 두 번째의 ‘주(住)’ 라는 것인데, 즉 의식주의 곧 ‘주택’ 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욕구에서 욕망으로 가는 그 중간에 보면 이렇게 주택, 즉 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이것을 ‘집’ 이라고 하지 않고 ‘가족 공동체’ 라고, 즉 ‘가족’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것을 가족이 아니라 집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거주할 집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전세든 월세든, 아니면 10평이든 100평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 집에서 누구를 맞이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 집 - 손님을 대접 !!

이런 이야기를 하니 성경의 어떤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가? 창세기 18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나오는데, 롯이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손님을 환대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유대교에서는 성경이 아니지만, 신약의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면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대접한 것이 되어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히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그러니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세상 내의 요소가 바로 ‘집’ 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이 집에서 어떻게 욕망으로 바뀌는고 하니, 흔히 욕망이라고 하면 나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레스나스에 있어서 욕망은 좋은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이 욕구는 우리가 보기에 나쁘다기보다는, 어쩔 수가 없다고 본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이 욕구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어쩔 수가 없는 것을 어떻게 하려고 덤벼드는 것이 수상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본인이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어쩔 수가 없는 것에다 손을 대겠다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 말고 다른 추상적인 ‘나’ 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나’가 누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고 하니, 즉 ‘나’가 그만 자기 신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에 의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나’ 라는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당연히 신체에서 나왔는데, 즉 신체가 있어야 ‘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나온 그 신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 그것은 도대체 누구 탓이냐는 것이다. 즉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라고 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누구 탓이냐는 말이다. 보통 “엄마가 키가 작아서 그렇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 욕망은, 타인을 영접하고 싶은 힘이다 !!

그래서 레비나스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는 이 ‘욕망’에 대해서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가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즉 “욕망은 타인을 영접하고 싶은 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남에게 다가가고 싶은 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말이다. 그 타인에는 3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이웃집, 즉 자기와 만나는 접촉자이고, 둘째는 어려운 이웃이고, 그리고 셋째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 욕망은 첫째에서 둘째로, 그리고 둘째에서 셋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첫째가 바로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고독하면 살지를 못하니 교회에 가서 친구든 누구든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많으면 교회가 저절로 부흥이 되는데, 정(情)이 생기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려운 이웃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아까 말한 바로 그 자기의 동질성에 방해가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친구로서 탈락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인데,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렇게 보지 않고, 인간에게는 자기를 떠나서 타인의 세계에 파고드는 욕망이 신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 지식이 아닌 윤리로 !!

그렇다고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실행할 수 없다고 착각을 했는데, 그런데 사실은 자기도 모르고 잊어버렸던, 즉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바로 그 신체가, 즉 우리 신체의 본성 중에서 남에게 다가가는 본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끄집어내어야, 그것이 바로 지식이 아니라 윤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윤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지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백 날 착한 일을 해도 그것을 어디로 가는가? 자기에게로 가서 자기만 더 부풀어진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잘남과 자기 우수함과 자기 성실함과 자기 착함 등등이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매끈하게 동질화를 시키는데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다.

◈ 신체에는 ‘타인의 종’이 되고 싶은 욕망이 !!

하지만 레비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주신 신체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고 하니까, 자기를 잊어버리고 타인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타인의 종’ 이라고 하는데, 즉 남의 노예라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타인의 종이 되고 싶은 욕망이 우리 신체 속에 자연적으로 발휘가 되고 있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렇게 잊어버렸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다시금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하고 있는데, 아까 가난한 이웃을 이야기했는데, 즉 성질이 더러운 이웃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웃이 말이다. 그렇게 자기에게 불리한 이웃이 있고, 또한 자기에게 유리한 이웃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리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점이 유리한가? 자기 신체가 편하고 여유 만만하게 즐기는데 필요한 에너지원, 즉 자기가 즐기는데 있어서 필요한 에너지원이 되고 재료가 될 수 있는 이웃을 유리한 이웃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부싸움의 경우에도, “너는 나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제발 양보를 좀 해다오” 라는 것인데, 즉 “니가 에너지원이 되어서 내가 편하게 결혼을 참 잘했다” 라고, 그렇게 자기에게 만족함을 줄 수 있도록 거꾸러지라는 말이다. 물론 서로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관리자(IP:124.♡.86.6)

10-02-25 13:32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동질성 때문에 고르고 골랐던 것인데, 즉 “나쁜 이웃은 저리가. 좋은 이웃만 와”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고 하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기 위주의 욕망만이 있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에게 다가가는 욕망도 역시나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법을 주셨다는 것인데, 물론 그는 유대교 신자이니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무엇에 신경을 쓰다가 그게 안 되었는고 하니, 자기를 위한 윤리, 즉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배만 채우려고 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자기만 편안히 하려고 하는 의식이 강하다가가 보니, 그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반으로 잘라서, 즉 말씀의 진의를 왜곡시켜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 저는 그런 것을 못합니다. 저에게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 차버렸는데, 그런데 그렇게 차버리게 되면 처음의 인간은 “거기에 있음” 이라고 하는, 그런 혼돈과 무질서에서 무엇이 와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명령이 올 때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그런 본래 노선에서 우리는 이미 이탈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헐벗은 이웃’을 !!

그렇다면 이렇게 이탈한 노선을 원상 회복을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제공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이웃이 오는데 그런데 어떤 이웃인고 하니,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용어에 따르면 ‘헐벗은 이웃’ 이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인데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미의 용어들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폭행을 당한 이웃, 또 매몰차게 거절을 당한 이웃 등등 말이다.

바로 그런 이웃을 누가 앞장을 세우는가? 하나님께서 앞장을 세워서 우리에게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이웃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그 이웃을 인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는고 하니, 바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 헐벗은 이웃의 얼굴을 보는 순간 !!

그러니 잘난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아가게 될 때는 어떠한가? 항상 그 목표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보다도 더욱 잘난 사람을 모델로 삼아서 자기가 나아가고자 했는데, 그런데 만약에 어느 날 이렇게 잘사는 부자동네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헐벗은 이웃이 왔을 때, 그래서 도움을 청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을 레비나스는 ‘얼굴’ 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 헐벗은 이웃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것이 누구의 얼굴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자기의 얼굴일 수 있다고 하는, 그렇게 자기 신체의 본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을, 그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보았는고 하니까, 자기가 엄청나게 힘을 내고 용을 써서, 즉 어떤 자기 고생의 성과인 것처럼 누렸던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와 같은 이웃을 그만 배척하고 되돌려보내는 원인 제공을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의 윤리인데, 그러니 천주교의 신부들이나 감리교 목사들이 그만 깜박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야, 최고다. 최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이제 기독교에서 다른 것을 더 할 필요가 없이 바로 이 레비나스의 윤리가 최고라고 했다는 것이다.

◈ 다시 그림으로(?) 정리하면 !!

이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신체가 있다고 하면, 그리고 자아가 또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지금 계속해서 반복을 하겠는데, 기억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 밖에는 세계가 있는데, 그래서 세계와 더불어서 교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와 교통을 하면서 자기에게 괜찮고 유리하다고 싶은 것을, 즉 자기를 편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을 다 끄집어내어서 어디에 집어넣는가? 신체와 자아가 있는 여기에다 모두 다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동일시’ 라고 하는데, 즉 전부를 다 괜찮은 타인이라고 동일시를 했다는 것이다.

◈ 내가 추방시킨 것이 ‘메시야 나라’ !!

우리는 이렇게 동일시를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동일시하는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을 모은 것들이 옳은 것만은 아닌데, 그리고 필요가 없는 것들은 바깥으로 그냥 쫓아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너거들은 나가서 죽어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기가 추방시킨 것들이 모인 동네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메시야의 나라’ 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다.

◈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말라 !!

그러니 자기가 보기 싫어서 추방시킨 모든 것들이 모인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인데, 그런데 거기서 뭐라고 하면서 오는고 하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레비나스가 이 이웃사랑보다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살인하지 마라” 라는 것인데, 바로 그 명령을 가지고 헐벗은 이웃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방문을 온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찾아오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살인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하, 살인을 하지 않으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혹은 “그래도 살인을 할까보다” 라고, 거기에 대해서 늘 묻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사실 먼저 묻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렇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너는 어디서 왔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 당신은 누구세요?

여기 신체와 자아에서 이렇게 동일성을 하다가 보니, 여기에 “there is” 라는 것이 있는데, 즉 그렇게 거기에 있는데, 그런데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하는 것은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가면서 계속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에게 오는 것을 낯선 이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자기가 예상하지도 못한, 즉 “너는 어느 세계에서 왔지?” 라고 하는, 혹은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 낯선 상대방이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명령을,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데,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동안 그 사람을 추방시킨 것이 결국 누구를 추방시킨 것이 되겠는가? 그 사람을 추방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는 명령, 즉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는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추방을 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아원을 방문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나는 내 이웃을 사랑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냐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거지라고 해도 자기 마음에 쏙 드는 거지를 골라서 도와준 것인데, 즉 자기의 잘남을 증명해줄 수 있는 거지를 말이다. 자기의 착함을 더 확인하고 부각시켜주는 말이다.

◈ 거지를 골라도, 자기 마음에 드는 거지를 !!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잘남과 착함을 소멸시키지 아니하고 누적될 수 있는 이웃만을 누가 고르는가? ‘내’가 고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기와 동일시가 되니 말이다. 즉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은 내가 일주일에 전에 이 만원을 빌려준 사람이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 동일성에 포함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헐벗고 구박받는 식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내 앞에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지 말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에 의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알 수 없는, 그래서 그는 여기서 ‘선택’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즉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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