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6:16-23 (미갈의 오해)
삼하 6:16-23 (미갈의 오해)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59)
본문 : 사무엘하 6장 16-23절
제목 : 미갈의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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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9-12-20 18:25
미갈의 오해
2009년 12월 20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6:16-23
(삼하 6:16, 개역)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삼하 6:17,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삼하 6:18, 개역)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삼하 6:19, 개역)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6:20, 개역)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1, 개역)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6:22, 개역)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삼하 6:23, 개역)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사람 앞에서 행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이 어떻게 다른 걸까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그 행하심이 이미 확정지어져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출애굽기 33:19-20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이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아무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계심을 하나님의 얼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라라는 겁니다. 이로서 진짜 하나님 믿는 자와 믿는 척하고 있는 사람이 구별됩니다.
사람의 죄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얼굴이 돌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긍휼을 무가치한 것으로 차버리는 식이 됩니다. 긍휼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긍휼 밖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오늘 본문은 말해줍니다.
긍휼을 원하는 사람은 일찍 감치 자기 가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마 5:7)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본 것과 미갈이 본 것이 상호 달랐습니다. 똑같은 사건의 현장에 같이 있었다고 해도 뽑아내는 현실성은 사뭇 다릅니다. 미갈은 자기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반면에 다윗은 자기로부터 벗어나 긍휼 안에 있습니다.
미갈은 다윗과 함께 옷 벗어 춤출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법궤가 그렇게 귀하게 여겨지지를 않습니다. 법궤는 그저 상자로만 여깁니다. 마태복음 11:17에 보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미갈은 현재 자기 위치보다 더 귀한 곳으로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소중한 자기를 대외적으로 지키기 위해 체통을 유지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미갈은 왕후로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다윗이라는 남편의 왕다움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미갈과 엮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의 다윗됨은 아내 미갈이 아니라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미갈의 눈에는 다윗만 살아있다고 보이지만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이 엄연한 왕으로 살아계십니다. 모든 지시와 명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에게 오게 됩니다. 지금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바로 법궤의 운반입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미갈의 태도가 이상스럽고, 불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다윗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심의 특이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게 되면 그 현장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으로 나뉘어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은 실존 인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신앙인의 눈에는 다윗이 지금 정치적인 쇼를 벌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긴다고 여기고 있는 그 마음을 이용해서 국정을 원활하게 이끌기 위해 왕이 백성들의 마음에 충족됨을 종교 행사를 통해서 과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미갈의 눈에 남편 다윗의 태도는 너무 이상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 중에 자기와 같은 비신앙이 많이 있을 것인데 다윗의 태도는 마치 전혀 왕다운 위신 있는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마치 주위에 사람이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만 계시고 그 앞에 선 한 명의 신자로서만 행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은 지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주변의 호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잊었습니다. 자신을 잊는 순간, 타인들도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하나님의 존재성 때문에 자신의 존재성이 생각나지 않는 식으로 이 세상에서 그 실제성을 드러냅니다.
미갈의 눈에는 한 남자가 분별없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춤추게 함으로서 현재, 여기에 하나님이 와 계심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16에 보면,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존재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존재만 봐야합니다. 요한복음 13:20에 보아도 같은 취지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에게는 성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같은 인간이면서도 복음의 영광에 도취되어서 자신의 존재까지 망각하면서 오로지 복음만 증거하므로서 예수님께서 말씀 가운데 현존하는 방식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달라진 사람을 이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바로 이곳에 계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달라진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실제로 예수님이 나타나도 예수님을 못 알아볼 사람입니다. 이 예수님에 의해서 달라짐은 기존의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다윗이 법궤의 존재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떡과 건포도를 나누어주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있음에 대해 찬양하고 있는데 비해 미갈은 다윗의 행동을 업신여겼습니다.
이 업신여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내부에서는 이 세상의 업신여김을 능가하는 속성이 작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충격입니다. 즉 인간의 그 어떤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저지할 수 없음에서 오는 충격입니다.
다윗은 그 충격을 춤으로 표현했습니다. 춤은 그 사람과 분리되지를 않습니다. 춤추는 자는 춤추는 것을 관람하는 자가 아니요 분석하는 자도 아닙니다. 그냥 온 몸으로 발산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충격에서 오는 발산은 지존 세상에서 흉내 낼 수도 없고 예상한 것도 아니기에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오심은 그 어느 순간이나 어느 곳에서든지 모멸함과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갈에게 저주를 내려서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무시하면 그 사람도 인자의 날에 무시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존중할 때, 상대적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무시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이 중요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체면을 유지하는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인해 뭉개지고 박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10강-삼하6장16-23(미갈의오해)-2sa091220.hwp
이근호
10-12-31 17:48
010강-삼하6장16-23(미갈의오해)-2sa0912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6장 16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72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6:16-23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오늘 본문에 두 가지 견해가 충돌됩니다. 다윗이 춤을 췄습니다. 그 다윗의 부인되는 미갈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왜 체통과 체면도 뭉개버리고 나보다 더 천한 계집종 앞에서 그 귀한 내(미갈의 남편 되는 당신이) 남편이, 당신의 체통과 내 체통이 연결 돼 있고 당신 자존심과 내 자존심이 연결 돼 있는데, 이렇게 계집종 앞에서 춤을 췄느냐,’이것이 미갈의 주장인 반면에, 다윗은 말하기를 ‘ 나는 여호와 앞에서 췄다’는 겁니다. 집안에 불란이 일어났어요.
나는 여호와 앞에서 춤을 췄다. 똑같은 현장을 봤습니다. 똑같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갈의 눈에는 여호와가 보이지 않아요. 오늘날 우리 같습니다. 우리하고 똑같아요. 여호와 보이지 않고, 여호와가 안 보이니까 여호와 앞에서 춤 출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미갈은 뭐냐, 여호와가 안 보이니까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보이니까 지금 자기 남편이 정치적인 쇼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백성들이 여호와라는 종교를 믿으니까 그들을 정치적으로 국정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요구하는 여호와에 대해서 왕이 그 종교 행사를 주관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로 하여금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 자기 정권이 오래 지탱된다는 것, 정치적인 책략으로 미갈은 보이죠. 미갈은 미실이나 똑같으니까..ㅎ 그저 자기 남편 잘 되는 거 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여기서 왜 다윗이 춤을 추게 되었느냐는 겁니다. 찜질방 말고 불가마 들어오는데 있죠? 여러분! 불가마 들어오면 춤춥니까? 불가마가 들어오면, 저는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 보면, 불가마 들어오면 사람들이 우우 와서 똑같은 유니폼 입고 불을 쬐고 땀을 쫙 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불가마 들어오는 것이 사람들한테 뜨겁게 느껴지죠? 마찬가지로 다윗의 마음속에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을 다윗의 마음은 가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뜨겁게 느껴져요. 그래서 춤을 춘 거예요. 미갈의 눈에는 법궤가 하나의 나무상자로 본 겁니다. 아무 의미 없이 본 겁니다. 미갈에게 있어서 의미라는 것은, 내 남편이 체통을 지켜줘서 더불어 왕비인 나의 체통도 백성들 앞에 높아지는 것, 그걸 원했던 거예요. 계속해서 높은 사람 되는 걸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계속 높은 사람을 견제하기 위해서 왕비는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남편은 한 순간에 높은 사람처럼 행세해야 될 걸 가지고 천하디 천한 사람으로 행세를 해 버린 겁니다.
그럴 때 자기가 낮다고 생각한 계집종이 자기 남편 되는 다윗을 얼마나 하찮게 우습게보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왕비로서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누구 편을 들어야 되는지 여러분 마음대로 하세요. 미갈의 편에 들으시렵니까? 손을 들어 거수하시기 바랍니다.ㅎ이렇게 말할 수 없지만.. 미갈 편을 들것이냐, 아니면 다윗 편에 들 것이냐, 이 본문을 우리에게 어느 편에 속하느냐를 아주 노골적으로 시험을 치르는 본문입니다. 미갈이 하는 태도가 당신 보기에 옳은지, 아니면 법궤 들어왔다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다윗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지금 하나님께서 묻고 있는 거예요.
다윗이 춤을 출 때는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다윗은 법궤에 대해서 은혜를 받았으면, 세상에 눈앞에 사람이 안 보일까요? 내가 왕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법궤가 좋아서 춤을 춘 거예요. 춤을 추는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춤을 출 때 무대 위에서 진짜 춤의 고수 같으면, 무대 위에서 처음에는 관중들을 의식하고 춤을 춥니다. 내가 지금 손 끝 놀림이 여러분들에게 아름다움을 제공하고 있는지에 대한 교류가 일어나는데, 한참 춤을 춰서 깊은 몰입 상태에 빠져 버리면, 음악과 내가 하나가 돼 가지고 리듬이 자기 몸을 휘감는 거예요. 가만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덩실거려서, 사람들이 술 한 잔 먹으면 묻지 마 관광할 때 어떻게 합니까?ㅎ 갑자기 나와서 마이크 잡고, 요사시한 조명 켜놓고 춤추다가 영천고개에서..노인네 18명 죽었잖아요.
춤이라는 것은 어떻게 스스로 저지 할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이해할 때, 기본 키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딱 열면 열리는 키가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 33장 19~20절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 여호와는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또 20절에 “내 얼굴을 볼 자가 없다”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긍휼은 사람을 두 패로 나누는 기능을 한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은혜 받고 모든 사람이 긍휼을 입혀주는 것이 아니고, 은혜 받을 자가 독특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어 내는데 여호와께서 관여하신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관여하시면 본인이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은혜에 휘말려서 춤이라고 추고 싶게 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뒤 말씀, ‘나를 볼 자가 없다. 나의 얼굴을 볼 자 없다.’이래 돼 있거든요. 그러면 다윗의 위상, 위치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은혜와 긍휼을 주시는데, 정작 사람들 눈에는 현장에 여호와가 안 보이는 거예요. 여호와 보이면 죽습니다. 여호와는 안 보이는데, 여호와한테 미친놈은 보이고, 여호와께 은혜 받은 사람만 보이고, 여호와께 긍휼 입은 사람만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은혜와 긍휼을 입어 버리면,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 은혜가 없는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는 행동과 태도와 고백을 쏟아내고 있죠.
제가 찬양 발표가 있는 곳에 가 보게 되면, 그 찬양 발표회하고 가끔 영화에 나오는 미국의 남 침례교회서 하는 흑인들의 찬양하고 봐요. 한국의 찬양 발표회는 딱 서서 합니다. 절제 돼 있는 행동이죠. 아름다운 소리 내는데 집중을 합니다. 화음을 내는데 집중하죠. 그런데 미국의(미국은 안 가봤습니다만 가려다가 신종 플루 때문에..ㅎ) 남 침례교회 찬양은 흑인들이 원색 성가 복이 찢어지라는 듯이 흔들어 대면서 춤을 추면서 코라스, 마치 흥을 돋우면 앉아 있는 흑인들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주체를 못해요. 같이 흔들고 싶어서.
어느 것이 좋은 찬양이냐? 그것은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슨 마음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밖에 나오는 것 보고 좋은 찬양이라 할 수 없고, 그 찬양하는 사람들이 ‘ 이제는 사람이 안 보인다. 나는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여호와 은혜로 만족하겠다.’그런 태도로 하면, 그것이 할머니가 하는 찬양이든, 전문가가 하는 찬양이든, 그건 하나님께서 받습니다. 연세 많은 할머니 권사님들이 찬양하면, 가락도 안 맞고, 박자도 안 맞고, 이게 옛날 판소리인지, 노들강변인지 분간이 안 돼요.ㅎ
그런데 미갈은 거기 은혜에 참여하질 못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께서 구분할 때, 은혜 받은 자와 은혜 받지 못하는 자의 그 결과가 복잡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오고 찬양을 하는데, 그 찬양의 주동 인물이 누구냐 하면, 미리암이라는 모세의 누나가 소고 치며 춤추면서 미리암이 화답하면서 찬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미리암이라는 사람 참 믿음 좋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민수기 12장 1절에 보면, 모세가 이디오피아 흑인 여자를 취해서 아내로 삼았더니, 미리암이 족보도 없고 근본도 없는 여자 취했다고 미리암이 그 여자를 구박을 했어요. 그래서 ‘모세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질 낮은 여자하고 혼인을 할 수 있느냐? 니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니다. 니 자리는 지도자의 최고 자린데, 어떻게 흑인 여자하고 근본도 없는 여자하고 그러면 되겠느냐, 우리 민족의 참한 색시도 많은데...,“ 이렇게 미리암이 자기 동생을 나무라면서 질책을 했어요.
이것은 우리 집안 위주로 하나님 위주가 아니고, 우리 집안이 잘 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누구나 이런 미리암의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동조를 합니다. 동의를 할 거예요. 오늘날 우리 입장이라면 구스 여자 불러서 커피숍에 앉아서 봉투 내주면서 ‘얼마면 되겠느냐, 이거 받고 떨어져라.’그러면 구스여자가 봉투를 들여다보고 ‘좀 더 달라.’이렇게 하든지...ㅎ 그런데 진짜 막장 드라마는 우리 보기에 상식적으로 행동했던 미리암을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려서, 여자는 얼굴이 간판 아닙니까? 몸은 망가져도 얼굴은 항상 분장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온 몸에 문둥병이 걸려서 사람들하고 격리조치 당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 여자가 어디서 감히?’모세와 함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그것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걸 평가 하느냐 말이죠. 모세가 얼마나 마음을 낮췄으면 그 흑인 여자하고 결혼을 했겠는가. 그 마음 낮춤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긍휼(불쌍히 여김)과 그 은혜를 진짜로 입은 사람은 마음이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고, 오늘 본문에 다윗이 하는 말이, ‘나는 그보다 더 낮아져도 된다.’ 했어요.
우리 구원 받은 거 맞습니까? 이거는 미리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격리조치 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더 무서운 이야기 나옵니다. 아주 무시무시한 이야기 해 드릴 테니까, 임산부나 심장 약한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ㅎ 뭐라고 하느냐 하면, 33절에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저는 무서워서 소름이 돋아요. 이 말씀이 무서워서. 가만히 있어보자. 아무도 떠는 사람이 없는데.
시집 간 여자들은 그 다음부터 남편에게 푹 빠져가지고, 결혼 하기 전에는 주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하다가, 이제는 기쁨의 대상이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남편을 어떻게 기쁘게 할꼬,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시집간 여자가 좋지 못한 점은, 틀려 먹은 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긍휼과 용서를 어느 레벨로 같이 취급을 하느냐 하면, 결혼한 남편의 고 애틋한 애정, 사랑, 스킨 쉽, 고정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다 후다닥 다 버리고 남편에게 푹 빠져 삽니다. 아마 눈치 보니 빠져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ㅎ
그래서 똑똑치 않은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지가 장가를 안 가봐서 그렇다는 거예요.ㅎ 그러면 우리는 성경 2가 나와야 돼요. 장가 간 사람의 고린도전서가 또 튀어 나와야 돼요. 사도바울이 장가를 안 가서 그래서 시집간 여자는 남편을 기쁘게 하고 주님을 버리지만, 시집 안 간 여자는 오로지 주께만 기쁘게 한다는 이 말씀,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결혼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결혼 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결혼 안 하는 게 훨씬 낫다. 지금 애들이 없어가지고 50년 뒤에는 한국 인구가 줄어서 사라질 판이고, 어떤 구에는 애 낳으면 200만원 준다는데, 이래 되면 나라꼴이 되겠습니까?
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했느냐 하면, 그 이유가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한다.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긍휼만 있으면, 그동안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긍휼에 비하면, 하나님의 자비에 비하면,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때가 올 것이라는 겁니다. 그때를 미리 마음 준비 하라는 겁니다. 아내고 돈이고 자슥(자식)이고,ㅎ 그리고 좋다고 웃는 것, 슬프다고 우는 것, 가슴을 치고 낙담하고 우는 것, 우리는 그걸 위로부터 하려고 하잖아요. 사도바울은 위로부터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울 일인가? 오히려 책망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푼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선에서 마지막 최후의 순간에 입각해서 볼 때에 우는 것도 웃는 것도 가진 것도 가난한 것도 부한 것도 아내 있는 것도, 그것은 다 시시껄렁한 일이라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거기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자비에 휩싸여서 자기를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법궤를 통해서 불가마 법궤가 들어올 때에 다윗은 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계시는 은혜가 온 백성으로 같이 자기 춤추는 느낌을 같이 나눠주고 싶어서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그냥 자기만 춤만 추는 것이 아니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를 모든 남녀 구별 없이 모두에게 나눠 줍니다. 이 은혜 받은 것에 같이 참여하라고, ‘이 떡과 건포도와 고기 한 점은 내가 주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계속 은혜를 주시는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의 조각인줄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미갈의 모습은 어떤지 이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7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한다” 왕비인 미갈은 죽어도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의 높은 왕비 자리를 조금도 이탈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와도 그 자리를 고수하려 해요.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하고 똑같아요. ‘내가 이 자리를 어떻게 해서 얻은 자린데, 감히 어디 계집종이 이 자리를 넘봐? 이 자리는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영원한 나의 체면과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자리이다.
그러니까 그 자리가 우상화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이 오시더라도 곁눈질로 보지도 않고, 그 자리가 유지 될 거냐 말거냐 그것만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후닥닥 자기 자리를, 하나님이 계신 자리로 속히 이동합니다. 내 자리는 왕의 자리가 아니고, 내 자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나의 자리다. 그게 은혜가 있고 긍휼이 있는 거예요.
이와 같은 다윗의 모습은 누가복음 10장 16절에 나오는 그 말씀과 합치 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은혜 입은 자, 성령 받은 자를 보내줬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어, 내 자리에 도움 안 되는 인간이네.’하고 배척했습니다.
그 다음에 성령 받은 다윗 같은 오늘날 성도들을 보내주니까, 사람들은 ‘어, 그거는 니 생각이고 내 생각은 내 위신과 내 체면을 유지하는 게 내 생각이다.’이렇게 차 버립니다. 우리가 그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부터 먼저 예수님에게서 오는 긍휼과 자비를 우리부터 아주 천시하고 우리부터 시답지 않은 귀찮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차버리지 않았는지, 정말 주님의 말씀 들으면 감격이 치밀어 오르면서 나 같은 죄인도 구원했다는 그런 희열과 춤추고 싶은 충동 감! 그런 것이 우리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특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돼야 되요. 사람이 보이게 되면, ‘저 사람이 이쁘나 내가 이쁘나, 저 사람이 높나, 내가 높나. 저 사람이 잘 사나, 내가 잘 사나. 맨 날 이런 것만 생각하거든요. ’저 교회가 부흥되나. 우리교회가 부흥되나.‘ 이것만 생각하는데, 일절 사람이 안 보이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마지막 심판의 순간에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강도처럼 은혜만 있으면 됐지, 그거 뭐 ’내 친구 몇 명인데요. 나는 어느 교회 출신인데요. 나는 어느 학원 나왔는데요.‘ 그런 것은 그때가 되면, 아무 소용없는 쓰레기 같은 겁니다. 자칫 오해하면 아내가 쓰레기라고 생각할 텐데...ㅎ 서로서로 그런 마음으로 마음을 낮추고 낮추시면 그 가정이 곧 주님의 법궤가 임재 하는 그런 가정이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정말 관심사가 다르니까 대화가 소통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현장에 똑같은 인생을 살고 똑같은 세상의 변화를 읽어가며 살아가지만, 자기 체면과 자존심에 갇혀 있는 사람의 눈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공개돼 있고 모든 것이 개방돼 있는 사람들의 차이가 이처럼 차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피리 볼 때에 춤 출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