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장 1- 7절 제목 : 예수님의 출생
눅 2: 1- 7 (예수님의 출생)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59)
본문 : 누가복음 2장 1- 7절
제목 : 예수님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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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01-07 08:07
예수님의 출생
2009년 12월 2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1-7
(눅 2:1, 개정)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 2:2, 개정)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눅 2:3, 개정)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눅 2:4, 개정)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 2:5, 개정)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눅 2:6, 개정)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눅 2:7, 개정)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지난 시간에서는 성령의 약속에 의해서 세례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이 두 분 사이에는 어떤 노선을 형성됩니다. 이 새롭고 낯선 노선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두 개의 인간 노선이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기대를 거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육으로 태어나셨지만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인간들도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죽었다고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성경에 적혀 있더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뭘 주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이 영적 노선에 합류될 수 있습니다. 이 영적 노선의 출현으로 인하여 졸지에 아담의 노선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자들은 산 자가 아니라 실은 죽은 자들이라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 ‘산 자’는 오직 예수님의 노선에 해당되는 그들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인간의 육의 노선의 실정은 어떠합니까?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열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5:4-5에 보면,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일생은 이것으로 마감되지만 아담이 속해있는 아담 가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줄지어 후손계열이 이어집니다. 5:6-8에 보면,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인생이란 아무리 잘나도 결국 죽게 되어있습니다. 아담 족보의 생리가 그러합니다. 자신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실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밑에서 차고 올라오는 죽음의 힘을 감추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죽음에 굴복되는 것을 굴욕이라고 느끼고 자꾸만 허세만 부립니다. 천년, 만년 살 것같이 말입니다. 차라리 죽음에 굴복하세요. 굴욕적으로 사는 자가 도리어 당당하게 사는 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의 가문은 이 구조에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낳은 남자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족보를 갖지 않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 땅에서 출생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이 지상은 이제 아담의 족보만 독점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족보가 관여하고 개입하는 땅의 세계입니다.
히브리서 7:1-3에 보면 그 족보가 나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멜기세덱의 족보입니다. 지상의 족보는 육적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만 이 멜기세덱의 족보에 해당되는 자는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서 나타나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7장의 이 본문은, 세상 족보에 속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서 등장된 멜기세덱에 속한 인물과의 만남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두 사람은 평등하거나 대등한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낮이를 결정짓는 만남입니다. 즉 “누가 더 높으냐”를 분명히 나타내어야 할 만남입니다.
히브리서 7:4에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만남을 통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육의 인생을 전부 멜기세덱의 세계에 일임합니다. 노선 변경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옥으로 통하는 하행선의 인생을 살다가 천국으로 통하는 상행선을 탄 겁니다.
이들의 만남은 사적인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뒤따라 나오는 아브라함 족보에 속한 모든 이들은 이 하나님과의 맹세와의 만남의 저촉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맹세를 지상에 드러내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맹세, 즉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라면 축복받을 아브라함 족보에 해당되지 않는 자라는 것이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하늘의 정보란, 바로 ‘피 제사’입니다. 아브라함 족보에서 나온 레위지파는 온종일 이 ‘피 제사’ 업무에 매달려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말해서 ‘희생’입니다. 교회 내에서 ‘희생’하는 사람들은, 희생보다 즐기는 식으로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눌려서 “헉헉!”거리면서 죽을 지경입니다. 사람이란 외부 타인을 어떻게 보느냐 하며는, 자기 인생을 즐기는 에너지원으로 봅니다.
이 현상은 가족 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같은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사람은 매사를 자기 쪽으로 당깁니다. 하지만 멜기세덱의 노선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줍니다. 고린도전서 11:3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 노선을 따라 성령님이 오르락 내리락 하시는데, 그 밑바닥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습니다. 그 죽음의 힘이 용수철이 되어서 그 힘으로 성도를 천국까지 쏘아 올리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우리는 땅의 관점이나 나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됩니다. 어떤 중학교 어린 소녀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지 얼마 안 되어서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하면서 하는 말이 “엄마, 식당에 가니 전부 외국사람들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은 본인이 외국인인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구조에서 보는 관점이 깨어져야 하는 겁니다. 본인이 그 나라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요 객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신세입니다.
이제 성도는 멜기세덱의 노선에 속했기 때문에 ‘피 제사’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도의 남은 과제는, 어째서 하나님의 맹세가 제사라는 형식으로 출현되어야 하는 점입니다. 평생 온 몸으로 표현하고 구사해야 될 주제입니다. 복이란 가져야 될 내 몫의 무엇이 아니라 로마서 12:1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다 드리게 된 신분,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장차 천국과 지옥은 엄청난 각도로 벌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각도가 벌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지옥에 가지 않을 사람의 특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산 자가 되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01-07 08:08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7강-눅2장1-7(예수님의출생)-luk091220.hwp
우리교회
10-01-07 08:09
20091220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2:1-7/예수님의출생)
2009-12-22 14:12:12 녹취 : 오용익
20091220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2장 1-7절/예수님의 출생(이 근호목사)
(기도)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한 아이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 아이의 의미를 알고자 합니다. 그 아이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구원이 생기고 그 아이가 우리 안에 없을 때 우리는 구원이 없음을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확신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2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89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1-7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려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지금 우리가 누가복음을 계속 보고 있는데 지난주 본문에 세례요한이 태어납니다. 이번 본문은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노선을 형성 하지요. 어떤 노선, 기존의 노선이 아니고 이 땅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 그 노선, 그 연결고리, 만약에 그 연결고리에 우리가 가담하느냐,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느냐, 아니면 그 외곽에 그냥 방치되어 있느냐? 이것은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거지요?
송 대관이 부른 노래 중에 ‘차표 한 장’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그 가사에서 아주 심사숙고 합니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이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둘이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거기 보면 ‘예정’까지 나오는데 ‘예정된 시간대로’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정된’, 엄청나게 중요한 용어가 막 튀어나와요. ‘예정된 시간대로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지금 세례요한도 안 태어날 아기가 태어났어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예상 밖의 출생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예상 밖의 출생, 만약에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그 예상 밖의 출생의 연결고리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은 그 노선 외에는 탈락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다, 만약에 그걸로 하나님의 일이 마감된다면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 옛날 2천년 전에 예수라는 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음, 그렇구나.’ ‘그런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 ‘성경책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라.’ ‘그런데 어쩌라고?’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 상행선, 천국 가는 상행선 노선에 가담되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성령이 아니면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은 육에서 육으로만 대화되고 육에서 육으로만 화제 거리가 계속 되어져요. 여러분이 부부간에 24시간 이야기만 해보세요. ‘여보, 우리 복음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 ‘그래. 복음 너무 좋지?’
저는 이런 가정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않습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동질성’이라 하는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자기에게로 복귀, 회귀하게 되어 있어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식으로 전부 다 외부의 것을 활용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떤 것도 아무리 남의 이야기라도 나한테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나한테 곧장 돌아와요.
어떤 사람이라도 길을 가는 나그네라 할지라도 내게 이익이 된다 싶으면 항상 돌아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남이라는 것은 내 생활에 활력을 넣기 위한 에너지다.’라고 했어요. 여러분, 에너지 아시지요? 석탄, 석유, 풍력발전소, 에너지잖아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 가족을 위한 에너지고 같은 가족, 식구끼리 있다면 그것은 같은 식구라도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상대방이 존재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활력을 위한 나를 즐기기 위한 에너지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군중속의 고독이라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은 자기개별자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노선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뭐냐?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한 거예요.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육적인 것 외에는 안 나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고 윤리적으로 살아도 그것은 반드시 자기에게 어떤 육적인 보상이 있다면 착한 일을 하겠는데 만약에 보상이 없다면 미쳤다고 그 짓을 합니까? 교회에서 희생하는 사람이 죽을 지경이에요. 왜냐하면 희생위에서 자기 육을 즐기겠다는 교인들 때문에 진짜 희생하는 사람은 ‘헥! 헥!’ 헥헥거리면서 밑에 눌려서 삐걱거리면서…, 그러다가 나중에는 뛰쳐나갑니다.
‘나만 실컷 고생했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교회 집사, 장로, 권사 이렇게 뽑아놓은 것은 봉사라 하는데, 제가 서울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참아야하고 양보해야 되고, 한 가지는 잊어버렸습니다. ‘참아야 하느니라.’ ‘에이 씨!’ 이래 나오면 그것은 또 육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거예요. ‘봉사 했는데 왜 돌아오는 것은 없냐?’ 이래 되는 겁니다.
밑에서 우리가 하늘나라 올라가고자 할 때 자기 힘으로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교고 요새 말하는 기독교고 그런 거예요. 진짜 복음은 밑에 스프링이 있어서 탁 튕기면 로켓 같이 그냥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그 스프링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그 희생의 그 에너지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까지 쑥 가버리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반겼던 것은, 예수님을 보고 즐거워했던 것은, 예수님 보고 ‘나는 망해도 좋습니다. 예수님 만난 것을 최고의 영광인줄 압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육에서 난 자가 도저히 갈 수 없는 천국을, 당신을 발판으로 삼아 튕겨서 올라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노선입니다. 그게 노선이에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세례요한도 성령으로 태어났고 예수님도 성령으로 태어났고, 성령으로, 성령으로 태어난 노선끼리 이렇게 상대방을 보는 각도가 달라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당신의 희생덕분에 내가 횡재했습니다.’ 하는 그런 뜻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나의 희생덕분에 또 다른 사람들이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육에서 벗어난 영적 존재로서 영적노선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행선 너는 상행선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서로 헤어질 때 육의노선과 영의 노선이 둘로 갈라지면서 한쪽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남들이 자기희생을 알아줄까?’가 아니라 그 전에 나부터 ‘주님의 희생스프링 덕분에 내가 구원받았다.’ 하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 여자에서 남자로 남자에서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이 노선 말고는 다른 노선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노선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여자에서 남자로 남자에서 그리스도로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에게’라는 노선이 수립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 속에 죽 연결되어 있는 성령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겁니다.
전쟁영화에서 포로 잡힐 때 포로를 한명, 한명 따로 두는 것이 아니에요. 철사 줄로 꽁꽁 묶어 갈 때 앞 사람 뒷사람 전부 손목마다 연결해서 묶어서 개별적으로 행동 못하게 일률적인 노선을 만들어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가게 한다 이 말이지요. 성령에 묶인 사람, 성령에 손목 잡힌 사람,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네 손목을 묶는 철사 줄이 사실은 핏줄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희생이 없으면 쉽게 말해서 죄용서가 없으면 우리는 죄 없는 사람만 들어가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노선이 따로 주어졌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인간은 지금 살아도 소용없고 죽어도 소용없고 그냥 소용없는 죽은 인간이다, 그런 뜻입니다.
유일하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에 가는 노선이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졌다면 그 노선에 가담하지 못하고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살아도 그것은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이야기할 때 항상 주님의 희생을 테마로 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결코 상대방을 희생시켜서 자기가 즐기려는, 자기에너지를 보충하는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서 나오는데 마침 타이밍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서 이 본문이 등장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출생이 세례요한과 같은 노선이라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세례요한의 노선이 어떠했느냐 하면 지난시간에 한 설교를 다시 할 수는 없고요, 누가복음 1장에 보니까 ‘죄 사함을 주기 위해서 주의 길 앞에 앞장서서 선지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례요한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같은 노선에 있는 예수님도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면 사람들이 요청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의 칩, 하나님의 정보를 담고 이 땅에 태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탄생의 의미가 뭐냐?’ 라고 물었을 때는 예수님이 품고 있는 그 반도체 칩 같은 그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는 내용이 뭐냐, 그것만 파악하면 ‘아, 예수님은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다.’ 하는 것이 전부 다 정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뭐 때문에 태어났는가? 오늘 설교를 들으시고, 제가 나중에 중간시험마냥 시험 치지는 않겠습니다만 혹시 다른 사람이 묻거들랑,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이렇다.’고 답변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7장 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제가 노선, 상행선 하행선 하면서 송 대관의 노래 이야기를 했지만 방금 했던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이 영원히 계속되어서 끝이 없다.’는 이 노선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멜기세덱 노선, 멜기세덱반열이라는 거예요. 교회를 십년 다니고 이십년 다시고 삼십년 다녀도 멜기세덱이 누구 집 아저씨인지 모르는 사람들 많아요.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히브리서 5장에서도 ‘어떤 사람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냥 죽만 먹고 단단한 것을 못 먹는 사람이 있더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어디에 해당되는가? 멀건 죽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단단한 음식물에 해당되는 내용이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라 그 말입니다.
우리 권사님들 이빨 좋지요? 이제 죽 드시지 말고 단단한 음식 이거 깨부수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기 예수가 의미가 뭐냐? 아기 태어난 그 정보가 있는데 그 정보가 뭐냐? 그것은 멜기세덱이라는 그런 노선을 형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뭐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영원히 그냥 계신다.’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멜기세덱의 족보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그것을 설명하면서 필히 우리가 거쳐야 될 것이 뭐냐? 창세기 5장 3절에 나옵니다. 아담의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멜기세덱 말고 아담의 노선은 뭐냐 하면 ‘언제 때 아들 낳았고, 대를 봤고 그 다음에 팔백년을 지내면서 구백 삼십년 향수하고 죽었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아담의 일생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그 뒤에 6절에 보니까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저와 여러분을 다 집어넣어 보세요. 이 근호 목사는 1953년 6월 27일생이고, 제 생일 알아서 제 생일선물 할 것도 아니지만, 서른 살 때 자녀를 낳았으며 그 다음에 오십 칠세에 이혼했으며…,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만 중간에 어떤 시나리오가 있든지 간에 결국은 오십 팔세에 죽었더라, 안 그러면 12월 20일 오후 5시에 죽었더라, 한다든지 됩니다.
아담의 족보를 줄여보면 ‘그가 태어났다. 그리고 죽었다.’입니다. 태어났다, 죽었다 인데 그중에 하나 하나님께서 의미 주는 것은 자식을 낳았다는 겁니다. 태어났다, 자식 낳았다, 죽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또 살아났는데 그 자식도 자식 낳고 죽었다. 결국은 죽었다, 죽었다, 죽었더라의 연속이 창세기 5장에 미리 깔려 있습니다.
성경은 미리 인간의 육에서 육으로 가는 노선,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야만 하는 이 운명, 이걸 미리 깔아놔요. 그리고 그 노선이 하행선이라는 겁니다. 차 표 한 장 들고 부산 내려가는 거예요. 십자가 없으면 십자가라는 용수철이 없으면 천국에 못갑니다. 아담이 900년 이상 살면서 온갖 경험을 다 했을 거예요. 그 밑에 셋도 마찬가지고.
병장 출신인데 예비군 훈련받다가 조교하고 싸우고, 온갖 자질구레한 시시껄렁한…, 나이트클럽 가서 미팅하다가 결혼까지 했다든지 이런 것, 온갖 시시껄렁한, 한국 축구 대표팀이 16강 못 올라갔다고 술 먹고 그날 자고 왔다든지 하는 이런 아주 시시껄렁한, 그야 말로 태어났다, 죽었다, 그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은 뭐냐 하면, ‘죽었더라’를 더욱 더, 이걸 추동이라 하는데, 힘을 주는 것, ‘죽었더라’를 더욱 더 죽도록 만드는 그러한 계기들, 그러한 연출뿐이에요.
왜냐하면 육에서 난 노선은 육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람이 ‘내가 살아 있다.’하는 것이 왜 거짓말이냐 하면 실상은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감추고 하는 소리가 ‘나는 살아 있다.’에요. 나는 이래 살든 저래 살든 어떻게 살든 나는 결국은 죽는다.
죽음의 흔적, 죽음의 자리, 저는 죽음의 방석이라 하는데, 늘 죽을 수밖에 없는 짓들을 우리는 뿜어내면서, 솟구쳐 올리면서 웃어도 죽고 화내도 죽고 신난다고 죽고 낙담해서 죽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육에서 난 것은 결국 죽음의 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힘에 패배하면서 굴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합니다. 차라리 죽음의 힘에 굴복하세요. 죽음에 굴복하면 여러분이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죽음에 굴복한 자만이 진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서 굴복 당하세요. 굴복 당한 사람이 자유인이에요. 굴복 당한 사람이 자유인이고 굴복당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꾸 버티려고 하니까 공포가 더 엄습하는 거예요. 남한테 굴복 당할 사람 같으면 밤에 문 열어놓고 자도 괜찮아요. 요새는 추워서 문 닫고 자야겠지만. 여름철에는 또 모기가 들어오겠다. 사람들이 어디 가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은 그게 남한테 굴복당하기 싫어서 그래요. 남한테 지기 싫다는 말은 결국 무엇을 감추고 있느냐 하면 이미 자기는 죽음한테 패배당하고 있는데 왜 이 사실을 자꾸 감추면서 안 지려고 안 지려고 왜 그러냐 이 말이죠.
우리 노회 목사님들 보세요. 한 윤범 목사님 같은 경우는 교인수가 부인하고 어머니하고 애들뿐입니다. 그랬다고 복음을 버렸습니까? 복음을 포기했습니까? 목사가 교인 세 명이면 굴욕적입니다. 굴욕적인 것 맞습니다. 평생 동안 목회하면서 그동안 뭐했느냐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굴욕적이고 비참한 소리를 듣기 때문에 그래서 그분은 너무나 당당해요.
그렇다면 우리가 아기예수 태어난 그 정보, 하나님이 담아놓은 약속의 정보가 뭐냐? 히브리서 7장에 보니까 나중에 그 멜기세덱반열에 속한 사람이 당겨오는데 멜기세덱반열의 특징이 뭐냐 하니까 높다는 거예요. 어디보다 높으냐 하면 아담의 노선보다 높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이것은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과 아브라함의 만남의 이야기인데 한분은 제사장이고 아브라함은 그냥 선지자인데 둘이 만났을 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훨씬 높다는 거예요. 훨씬 높은 것을 아브라함이 알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나의 모든 것을 전부 당신에게 축복받는 용도로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축복이 되도록 쓰이기를 원합니다.’ 하는 뜻이에요.
너무 길었습니까?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십일조란 ‘내 것을 그냥 내 것으로 갖고 있으면 죽음이 그냥 나를 강탈하기 때문에 죽음이 강탈하기 보다는 차라리 영원한 생명이 이어지는 당신의 소유가 되겠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게 십일조에요. 그러니까 십일조라 하는 것이 더 쉽게 말해서 넥타이를 매는데 ‘나의 넥타이를 그분에게 꽉 장악을 당해서 질질질질 끌려가기를 원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당신이 나의 인생을 주도하기를 원합니다.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종속되기를 원합니다.’ 아주 굴욕적이죠. 이런 굴욕적인 면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거예요.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에서 어른행세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에서 잘난 체 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서 잘난 체 해도 안 알아주니까 교회 와서 잘난 체 해요.
그게 모여 모여서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전부 다 목사 설교가 뭐냐 하면 ‘여러분 기도하면 잘난 사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시면 남에게 기죽지 않습니다.’ 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면 된다.’ 하면 되지요. 죽지요. 이미 죽어가는 마당에 그냥 죽는 속도를 더 가속화시키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희생하는 사람은 헉헉거리고 있는데 그 위에서 자기는 즐기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를 생각할 때는 그냥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있어요. ‘나는 나다.’ 그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있어요. ‘나는 나를 즐길 줄 아는 나다.’ 그것이 반드시 뒤따라옵니다.
그래서 ‘나’라고 할 때에는 나를 즐기는 나 외에는 다른 나를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왜? ‘나니까!’ 그것으로 끝나버려요. 희생이라는 것을 아예 지우개로 지워버렸어요.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일임함으로 말미암아 이 육의 자리, 육의 자리를 떠나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신화나 전설과 이야기는 인간의 영웅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지만 성경의 아브라함이야기, 이삭이야기는 떠나는 이야기에요.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나그네요 객이요.’라고 해서 ‘마치 떠돌이처럼 이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가 저 본향에 간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믿음은 이 땅의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믿음은 야심이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노선을 발견하고 거기에 헌신하지요. 우리교회에 있다가 미국으로 유학 간 채윤이라는 어린 학생이 있는데 간지 몇 주 안 되었는데 그 학생이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던가,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엄마라 하면 ‘엄마, 엄마, 학교식당에 가니까 전부 다 외국사람 밖에 없더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한 말이 ‘네가 외국 사람이야. 네가!’ 왜 너 중심적으로 살아가느냐고 한 거지요. 신앙인이 이방인이라는 뜻은 뭔 뜻이냐? 이미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저쪽 노선, 멜기세덱 노선, 하늘의 높은 노선입장에서 볼 때에 ‘나는 이 땅에서 떠돌이며 나그네며 이방인이며 객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중심이 아니고 우리 예수님 중심으로 다시 생각하는 것, 그 노선이 바로 성령을 받은 자만 나올 수 있는 노선이라는 말이지요.
그 티켓이 상행선 티켓이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히브리서 6장에 보면 이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된 이유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맹세했다.’ 하는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했어요. 아브라함에게는 두 번씩이나 맹세를 줘서 절대로 축복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 맹세,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이죠.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맹세, 그 약속이 뭐냐? 그게 바로 피 제사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갑자기 화제가 ‘내가 어느 노선에 속하면 나는 죽어서도 천국 간다. 영원히 산다.’ 그런 주제, 그런 강조점으로 지금까지 설교를 해 왔다가 갑자기 주제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은 확실한데 어떤 힘 때문에 구원받느냐?’ 라는 문제로, 그 주제로 넘어가 줘야 돼요.
바로 그 피 제사, 그 피 제사의 정보가 멜기세덱의 노선에 있는 모든 사람 속에 예수님처럼 그 칩이 들어가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서 십일조를 통해서 모든 것을 헌신했는데 멜기세덱이 어떻게 육에 속한 사람을 천국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느냐의 그 정보는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들의 운명 속에, 그들의 기능 속에, 역할 속에 하늘의 약속이 기입이 되는 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 속에 레위지파가 나오는데 그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뭐냐? 하루 스물네 시간 신경 쓰는 것이 뭐냐? 우리 죄를 어떻게 씻는 식으로 용서가 되고 없어진다는 그런 기능에 종사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물을 바치는 피 제사였습니다. 자, 이런 점에서 볼 때 여러분, 교회 왜 옵니까? 교회에 뭘 들으러 왔습니까?
구원받는 노선, 하늘의 노선,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노선에 가담되기 위해서 또는 가담되어서 왔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혼을 해부해 보세요. 그 안에 피 제사가 들어 있는지. 기존교회에서 헌신예배 때 단골로 등장하는 성경 구절이 있어요. 청년회 헌신예배 때 단골로 등장하는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구절 오랜만에 들어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으면 우리가 이제 제물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공짜로 구원받았다.’
맞는 이야기에요. 맞습니다. 공짜로 구원받아서 우리의 노선은 이제 육의 노선이 아니고 영의 노선 맞는데요, 그렇게 때문에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예배의 정신, 예배의 칩이 포함되어서 우리 자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영적 산 제물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영웅이 되는 것과 완전히 노선이 다른 노선입니다.
여러분이 흔히 아는 이야기 해 볼게요. 이게 누가복음16장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결국은 갈라집니다. 그 갈라짐이 어느 정도로 접선이 불가능하냐 하면 천국 간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너는 거기서 건너오지 못하고 나는 거기로 건너가지 못한다.’ 할 정도로 틈이, 노선이 갈라져 있어요.
그 갈라짐이 죽어서 갈라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살아 있을 때 여러분의 자녀가 10살 때 여러분의 나이가 스무 살 때, 사십, 오십, 육십, 칠십, 팔십, 구십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각이 갈라져야 됩니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뭔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사업을 하고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팀장 되어서 직원들과 회식을 하든지 뭘 하든 간에 뭔가 그 갈라짐이 있어야 되고 그 갈라짐의 끝은 어디냐? 한쪽은 천국으로 한쪽은 지옥으로 이게 분명히 보여야 돼요. 그 갈라짐이 보여야 된다고요.
‘주여, 저는 어느 노선입니까? 제 노선은 어떤 정보를 담아야 됩니까?’ 그걸 알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돼요.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김 00 집사님이 강구에 아는 횟집이 있어서 학교친구니 뭐니 아는 사람을 다 소개해줬대요. 그랬더니 소개한 사람이 올 때에는 근사하게 차려내는 거예요. 그래서 ‘아하 이 횟집은 내가 소개한 사람에게도 동일한 대우를 해주겠구나.’ 하고 철석같이 믿고 ‘얘들아, 다른 집으로 가지마. 그 횟집 가서 내 이름만 대면 진짜 푸짐하고 본전 뽑고도 남는다.’라고 선전을 다 해줬어요.
나중에 보니 한 번 간 사람이 두 번 다시 가지를 않아요. 알고 보니 그 횟집 주인이 본인에게만 그렇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사기를 쳤어요. 이걸 가지고 도꾸이라고 해요. 오랜만에 듣지 않습니까? 도꾸이.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요? 도꾸이란 단골이라는 말입니다. 단골에게만 해주고 나머지에게는 전부 다 사기를 쳤습니다.
왜? 횟집이 성장하기 위해서, 횟집이 부흥하기 위해서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 횟집하나 잘되기 위해서. 결국은 그 횟집을 소개해 준 그 사람도 그 횟집 주인으로 봐서는 뭐냐? 자기 생활에 활력을 넣는 하나의 소비성 에너지에 불과한 거예요. 이용한 거예요. 친한 척 하면서 이용한 겁니다. 소위 ‘정(情)’이란 이름으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용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속으로 가슴을 쳤어요. 가슴은 지금 치지만 그때 속으로 쳤어요. 횟집도 이렇게 사기 치면 안 되는데 교회라는 것이 인간의 감정으로 정으로 사랑으로, 아니 교회를 어떻게…,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데! ‘네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지옥에 멸하는 자, 천국과 지옥이 관련된 곳이 교회인데, 그 교회가 만약에 사기를 쳐버리면 그러면 그 교회 가는 사람은 다 어디 간다는 말입니까? 다 지옥 간다는 말이에요.
교회 안다니는 사람 같으면 그래도 교회에 희망이 있지만 교회 다니면서 천국 간다고 착각을 하고 지옥가면 그것은 희망도 없습니다. 새로 해야 돼요. 모든 것을 새로 다 배워야 되고 새로 다 해야 돼요. 그런 사기술에, ‘당신 훌륭하게 됩니다. 뛰어난 영웅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큰 소리 칩니다. 당신은 남보다 더 뛰어난 사람 됩니다.’ 하는 그런 사기에 넘어가지 말고 정말 우리 속에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 있는지를.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산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들어 있어야 돼요. 희생한다고 알아달라고 하지 말고, 이 죽으심이 내가 희생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그 십자가 죽으심이 그것이 예수님의 노선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여자에게서 남자, 남자에게서 그리스도, 그리스도에서 하나님, 그걸 아래로 내리고 아래에서 다시 위로 끄집어 당길 때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남자 여자 노예 할 것 없이 제일 밑바닥에 십자가 죽으심을 깔아놓으시고 그 깔아 놓은 십자가가 우리의 죄가 없다는 것을 판정을 내림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자가 가야 되는 곳인 천국으로 끌려올라가는 식으로 성령께서 두레박같이 당겨 올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올라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세상과 즉각적인 노선 이탈이 일어납니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완전히 수직으로 올라가고 다른 쪽은 밑으로 꼴아 박는 거예요. 남을 이용해서 등쳐먹으려고 하지 말고. 세상이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합시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선이 다르니까, 육에서 난 육의 이야기니까. 하지만 우리는 영으로 나서 영으로 시작하고 영으로 끝날 사람이기 때문에,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기 때문에 노선의 각도가 벌어지고 더 벌어져야 돼요. 벌어지는 것을 아주 고맙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쫙쫙 벌어져야 돼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본인 안에 하나님의 맹세하신 축복의 맹세, 다시 말해서 피 제사, ‘네 죄는 제가 죽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야 내 노선에 붙어 있는 너희들도 세례요한 같은 사람들도 나로 인하여 산다. 이게 바로 참 인간이다.’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흙이요 흙을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환상 속에 달려 있어요. 죽어가면서 ‘산다, 산다,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이고 환상이고 착각이고 꿈이에요. ‘당신 밑바닥을 한 번 봐라. 당신의 뼈 속의 류머티스까지 생각을 해봐라. 혈압 오르는 것 생각해 봐라.’ 지금 젊어서 모르지요. 저도 아직 안되어서 모릅니다만 나이 칠십, 팔십 되면 온 몸이 내 말을 안 들어요. 그 전까지는 내 말을 좀 듣는 듯 했지만 몸과 마음의 괴리현상이 일어나요.
그러면 내 육체와 마음이 분리될 때 다시 한 번 물어보자는 말이지요. “내가 누구지? 아,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허황된 거구나. 내가 꿈속의 나구나.” 허황된 나, 조작된 나, 내가 지어낸 나, 죽어가면서도 죽는다는 것이 싫어서 ‘아직도 나는 살아 있어. 아직도 나는 살아 있어.’ 라고 살아 있음만 생각하는 그 허황된 나.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술집을 하든지 뭘 하든 그것은 자유인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그 희생덕분에 죽어야 될 내가 예수님 덕분에 살아 있다는, 예수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산 제물로서, 영적예배자로서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예수님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갈 수밖에 없는데, 죄 없는 자가 아니라 죄 있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 보내주셔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죄 씻음을 다 해결해주시고 그걸 깨닫게 하는 성령까지 주셔서 죄 없는 자들만 가는 천국에 가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러한 희생을 잊지 말고 그 희생이 우리 온몸을 휘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