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08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2-정초작업
20091208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2-정초작업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1208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2-정초작업
(강의:이근호 목사)
난해하게 하는 이유가 족장의 언약 가운데 국가 이스라엘이 들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32페이지 보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민족단위’라 합니다. 민족단위로 구성되는 하나님만의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질을 준 적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문제가 왜 예민하냐 하면, 지금 내가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찾아오면 사적인 문제, 좁은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모시게 되죠. ‘네가 아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 나이에?’ 항상 사적인 문제로 주어왔죠. 그런데 북한의 핵문제는 어떻게? 이런 건 안 묻지요.
사람들이 족장의 하나님의 의미를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개인적인 가정 문제, 가족문제와 결부시켜서 하나님을 봤단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범위가 한 두 평. 그런데 하나님의 범위는 무한대 아닙니까. 이 무한대가 좁은 데로 담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엄청난 양을 작은 그릇에 우리 같은 몸도 작지만 인식이 작은 곳에 다 담기는 것이 가능하냐? 그걸 따져보자는 거예요.
이런 생각은 일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잘 안하죠. 그냥 그런 걸로 넘어간다. 하나님께서 없는 데서 있게 했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지 과연 큰 것이 작은 것에 다 들어올 수 있겠느냐 하는 그 문제를 사실은 따져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야 말씀이 더 깊이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저 자기가 편한 것, 원하는 것 정답 얻기 위해서 질문하고 ‘알겠습니다’ 가고 이래선 안 된다.
과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하면서 아브라함 이름 자체가 이미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죠. 네 자손이 많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나오죠. 왜냐하면 부인도 자기도 나이 많기 때문에 많은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기존의 상식 수준에서는 안 되잖아요. 불가능이죠.
결국은 아까 그림처럼 이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 야곱을 이 개인을 애굽이라는 집단화 속에 집어넣어버려야 돼요.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과거사니까 지나간 일이니까 하나님이 새 일을 해볼까 하지 않고 자기가 언약을 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그대로 애굽이라는 집단 속에 집어넣고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런 일 있겠습니까?’라는 것을 여기서 뽑아내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국가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결국은 이스라엘 나라가, 구원이라는 것은 뭘 의식해야 하느냐 하면, 애굽을 항상 잊어버리면 안 돼요. 애굽을 잊어버리면 뭐가 성립 안 됩니까? 구출이라는 관계, 구원의 관계를 놓쳐버리잖아요. 제 말 뭔 뜻인지 아십니까? 교회 왔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옛날 예수 믿지 않았을 때를 그걸 오히려 더 심화한다고 할까요, 더 깊이 예수 믿지 않는 인간이 뭐냐를 예수 믿고 난 뒤에 하나의 숙제처럼 더욱더 심화해서 알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안다는 것은 천국만 아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더불어 지옥도 더불어 아는 거예요. 옛날에는 지옥에 있으면 지옥을 몰랐는데 천국을 알고부터 제대로 이제는 지옥을 알아서 ‘야, 세상에. 이런 지옥에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설교시간이나 말씀을 통해서 더욱더 확인하는 겁니다.
애굽을 앎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애굽을 잊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애굽을 잊지 않는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인간성을 그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속에도 분명히 포함돼있다고 보는 겁니다. 결국 애굽과 이스라엘이 합쳐서 언약이 되고, 이 언약 안에는 여전히 누가 살아있습니까? 여전히 아브라함이 살아있고, 이삭이 살아있고, 야곱이 살아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창조의 일이 이스라엘 속에 살아있는 거예요. 이러면 담겼지요.
아까 질문이 뭐였습니까? 작은 데 어떻게 큰 게 담기느냐고 질문했지요. 그런데 언약이 들어오면 작은 게 작은 게 아니고 점점 더 넓어지죠. 아브라함에서 애굽까지 넓어지죠. 범위가. 나중에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전 세계까지 다 넓어지죠. 그러니 이스라엘 폭은 점점 더 넓어지는 거예요. 역사에서 묵시까지. 온 우주까지 다 넓어지는 겁니다.
누가 넓힙니까? 언약의 하나님이 넓히죠. 여호와 하나님이 넓히죠. 그 넓어지는 것은 왜 그런가? 우리 주님의 엉덩이를 앉히기 위해서 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이 턱하니 자리 잡기 위한 새로운 우주건설을 위해서 아브라함이라는 작은 개인을 폭을 넓혀서 풍선에다 언약이라는 바람을 불어넣으면 풍선이 커지듯이 점점 더 바람을 넣어서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의 범위가 처음에는 아브라함에서, 나중에는 이스라엘 국가에서, 나중에는 시간과 공간이 어디까지 퍼집니까? 공간적으로는 그 당시에 바벨론까지 퍼지고, 시간적으로는 끝까지 마지막 세상 종말 때까지 범위가 넓혀지는 겁니다. 구약학자들은 이것도 모르고 언약은 그 당시에 주제에 불과하다고 그냥 작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범위를 넓혀놓으면 그다음에 이스라엘 속에 애굽이 다 들어있으니까 결국은 주님의 동행이 가능하죠. 지금 그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주님은 엉덩이가 큰데 이스라엘은 엉덩이 작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동행합니까? 그들의 작은 범위만큼만 주께서 짬짬이 언약을 줘서 준 언약 때문에 그들의 작은 범위가, 인식의 지평이 점점 더 넓어지는 쪽으로 주께서 풍선을 불어가면서 동행을 하시는 겁니다.
정리해봅시다. 동행이란 ‘범위 넓히기’ 이러면 되지요. 어디까지? 하나님이 계실만한 공간까지 넓히기. 처소 만들기까지 넓혀가는 겁니다. 요나 같은 경우에는 그것도 모르고 다시스로 도망가잖아요. 니느웨는 이스라엘 구역 밖이기 때문에 저주받고, 이스라엘은 복 받는다 했는데,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회개하면 용서하듯이 니느웨도 참회하고 회개하니까 용서가 되잖아요. ‘어찌 그런 일이 생깁니까?’ 결국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깸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깨진 이스라엘이 더 넓혀지는 계기로 사용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초반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지요. 마치 풀숲에 불이 퍼지는 것처럼 이게 튕겨나가면 튕겨나가는 대로 전부다 불이 붙어서 퍼지는 겁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을 것이고, 공간적으로 땅 끝까지 내 복음이 전파되리라. 오직 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그 내용은 주님께서 어디든지 주의 이름이 부르는 곳에 구원을 이룬다. 땅 끝에서부터 하늘로 휴거되어 올라간다. 땅 끝에 있는 자들도 공중에 끌려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바로 무엇과 결부되는가? 이제부터 족장 이전에 창조에 대해서 해봅시다. 어렵습니다. 어디냐 하면, 38페이지. 진짜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제가 설명을 이렇게 합시다. 질문을 하나 던질게요. 답변을 해보세요. 여호와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죠. 왜 오른손이에요? 왜 왼손은 안 되는데? 바둑 둘 때 왼손으로 두나 오른손을 사용하던 같은 두뇌에서 나오는 그 움직임으로 되는데 왜 하필 오른손이냐? 시편에 자주 나오죠. 오른손으로
그거는 질문을 하면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방금 이야기 것에 그대로 다 나와요. 오른손이라 하는 것은 범위가 좁은 경우에는 오른손이 되지만 범위에 넓은 경우엔 오른손에 계신 분이 되는 거예요. 계신 분을 괄호쳐봅시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분)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범위가 좁은 쪽에서는 앞에 괄호를 쳐버리면 계신 분이 없어져버리면 오른손이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하나님을 볼 때 아직까지 지평이 좁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신인동형설’이라 하는데, 모습을 이렇게 보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하는 거예요. 오른 편에 계신 메시아가 미리 앞당겨서 우릴 구원하는 겁니다.
왜 지금 제가 그 질문에 답변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 형상 문제에요. 하나님 형상 문제가 여기도 나와 있는데 하나님 형상에 대한 책을 바르트, 캘빈의 책을 봐도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 시간에 깔끔하게 끝내버립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이란 뜻이에요. ‘너, 하나님 아니야.’ 비슷하다는 말이 뭔 뜻이에요?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형상대로 후손을 낳지요. 그거는 뭡니까? 아담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아담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를 왜 만들어놨습니까?’라는 질문이 돼야 되죠. 하나님이 아닌데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는데, 우리가 이웃집 사람이 아니면 이웃집 사람하고 상관할 필요 없지요. 우리가 옆집이 아니면 옆집이 부부싸움해도 깊이 관여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근데 옆집에 불나면 도망가야 되죠. 그럼 관여가 되죠.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관여하게 돼있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하는 말씀에 우리는 순종해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것은, 개나 돼지한테는 책임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가담해야 되고, 동참해야 되고, 동행해야 되고, 동조해야 되고, 거기에 엎어져야 되고, 참여해야 되고. 마치 천사처럼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성경에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처럼’ 돼있는 게 있어요. 재미있죠. 하나님의 형상처럼 돼있는 게 천사입니다. 천사를 때로는 인간처럼, 때로는 하나님처럼. 인간처럼, 하나님처럼 될 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실수해서 천사는 하나님 형상처럼, 인간처럼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된 줄 알았어요. 그 자체가 잘못 된 거예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몰라서 그래요.
천사는 형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그 기능으로 따져요. 인간이 될 거냐, 하나님 모습 될 거냐, 독수리 될 거냐, 사자 될 거냐는 기능에 따라서 되는 겁니다. 천사가 개, 돼지와 다른 점은 하나님 일에 가담하고 있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천사와 달리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결국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됨,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그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인간이 되는 거예요. 아까 천사는 하나님의 하는 기능이라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장차 사람의 몸을 입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는 참여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스리고, 정복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그전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에 누가 순종해야 돼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우리 보고 이야기했지 형상이 없는 개, 돼지, 소, 사자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그걸 처음 아담, 처음 인간이라 해요. 처음 인간은 항상 마지막 인간의 표상이라.
그러면 지금까지 한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내용 어려워요. ‘유사성’이라 하는 것은 원본이 있다. 유사성은 사본이죠. 유사성과 유사성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까? 이 문제에요. 없어요. A라는 유사성과 B 유사성이 있다면 원본을 거쳐야 이쪽에 원본 유사성이 있죠. 유사성이란 말은 비슷하다는 말이니까. A라는 유사성이 원본과 비교해서 유사성이 있고, B라는 것도 원본하고 해야 있죠. 그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겠죠.
그런데 원본 떼버리고 유사성과 유사성이 있으면 유사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개별자가 되는 거예요. 같은 형제간에도 싸우잖아요. 왜 싸웁니까? 유사성이 없어요. 그런데 같은 형제간이라도 만약에 쌍둥이 동생이 학교 갔는데 맞는다면 같은 쌍둥이 형이 도와주죠. 그 유사성은 어디서 거쳐 온 유사성이 되는 거예요. 어디를 거쳤습니까? 쌍둥이니까 그때만 같은 부모죠. 이제 이해되십니까? 결국 뭐냐 하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든지, 형제 사랑이 반드시 그냥 되면 안 되고 뭘 거쳐야 됩니까? 우리는 한 부모 밑에 형제가 되는 조건 하에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이 말은 선악과는 인간의 유사성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되서는 안 돼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다 따먹게 되죠. 한 사람 아담이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전부다 다 따먹잖아요. 그 다음부터 아벨과 가인이 사이가 뭐가 돼요? 원수가 되죠.
결국은 선악과라는 유사성을 선악과라는 원본을 밑에 밑에서 유사성을 갖고 있으면 선악과는 원수를 만들지요. 그 원수가 이름도 재미있어요. 선, 악이니까 선과 악 사이에 원수인데 문제는 서로가 선이라. 이게 문제에요. 부자 청년이 ‘선한 선생이여.’ 주께서 뭐라 합니까? ‘선한 분은 하나님이지 내가 선하지 않다.’ 너희들의 유사성, 너의 선한 유사성으로 내 선한 유사성을 비교하면 거기서 어떤 진리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하고 비교하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와요. 그 하나님도 뭡니까? 만들어지니까. 그럼 누구하고? 진짜 하나님 형상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같은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선악과 따먹은 게 죄고, 따라서 우리는 날 때부터 모친의 부모로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교인들을 만남과 만남은 어떻게 됩니까? ‘나도 죄인이요 주님의 십자가 피가 아니면 구원받을 가능성 없습니다.’라는 입장에서 서로 대화하고 만나면 그게 이웃 사랑이 되죠. 형제우애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우리가 죄인이라는 의식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죄라는 의식이 없으면 선악적인 유사성을 찾아요. ‘나는 기도를 두 시간 했는데 저 사람은 30분하고 끝내네. 내가 또 선하다.’ 이게 선한 유사성을 끄집어내면, 저희 애비가 누굽니까? 마귀에요.
지금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 대목을 너무나 이걸 논리적으로 하면 어렵기 때문에 제가 결론부분에 쉽게, 쉽게 가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따지면 어렵기 때문에. 그걸 교재를 봅시다. 물론 교재는 그런 식으로 돼있진 않아요. 교재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교재 어렵기 때문에 다 설명 못하고 쉽게 예를 들어서 합니다. 침멀리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모든 창조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 하나님 형상을 목적으로 한다. 이 논리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요. 형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이 말은 모든 창조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없다? 없다. 형상과 연결되지 않은 것은 관계없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아담이 뭘 합니까?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죠. 아담이 이름을 지어줌으로 말미암아 이름 지어준 것부터 하나에 전부다 종속되고, 종속됐다는 말은 인간을 위하여 그들이 돼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침멀리가 뭘 거부하느냐 하면, 이게 어려워요. 무에서 창조를 거부합니다. 왜 무에서 창조를 거부하느냐 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의 신화들이 다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무에서 유의 창조를 주장해버리면 옆에 있는 이방민족과 같은 창조신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특이함, 변별성, 구별성이 안 나타나니까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목적을 갖고 있어야 되지, 어디서 만들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향하여, 위하여 만들어지냐고 해석을 해야 된다고 이야기해요. 그 논리가 깔려있어요. 이 책에 보면.
그 이야기 42페이지에 나옵니다. 작은 글씨로.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무에서의 창조를 주장할 수 없다. 이 사상은 제2 마카비서에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에서 유가 아니라면, 하나님 형상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에 사상을 거부하고 하나님 형상 쪽으로 몰아가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돼있어요.
43페이지 밑에 봅시다. 침멀리가 얼마나 어렵게 썼는가 보세요. “하나님이 인간 형상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려고 한 것은 인간이 ‘어디서’ 왔는가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이거 뭔 뜻이에요? 하나하나 이렇게 어려워서는 우리가 볼 마음이 안 들지요.
43페이지에 방금 이 구절이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시편 8편 6절에서의 핵심,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해서 인간을 어느 수준으로 높이느냐 하면, 창세기 1장부터 시편 8편에서 인간을 하나님 수준까지 높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시선을 하나님 수준까지 높여서 ‘이스라엘아. 네 주변에 포진돼있는 모든 이방민족과 모든 천지창조가 이스라엘 너희 때문에 있는 거니까 겁먹지 마라.’ 거기에 초점이 있는 거예요.
그걸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었음을 이야기해줘야 창세기의 하나님의 빠라라는 창조가 여전히 이스라엘 속에 현재 살아 활동하고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침멀리가 논리적으로 그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문제에, 이런 주장에 얼른 보기에 하자가 없어 보이지만 중요한 하자가 있어요. 디모데전서 6장 16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여기서 주님한데는 가까이 합니까? 가까이 못할 빛이죠.
하나님은 빛에 거하시죠. 이게 나중에 요한복음 할 때 이야기할 건데. 빛에 거하시고 인간은 여기 있고. 인간은 어디 거합니까? 빛에 가까이 못하지요. 그러면 빛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지요.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렇게 빛을 범위를 넓혀버렸는데 구약에서는 침멀리 이론에 의하면 우리를 어떻게 한다? 우리를 하나님 형상까지 높여버리죠.
모든 만물들이 인간 복종하는 것이 곧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으로 엎어지도록 굴복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이스라엘의 가치가 이방민족들에게 높여지고 이스라엘 속에도 자긍심이 생기고. ‘우리가 보통 민족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 창세기 2장에 보면, 안식일이 있죠. 안식일을 누가 지킵니까? 다른 이방민족은 안 지키죠. 이스라엘이 지키죠. 지킬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식일 지킬 때마다 우리는 창조 때와 멀리 떨어져있는 게 아니다. 시간적으로. 떨어지기는 뭘 떨어져요. 그 창조가, 창세기 1장이 지금 여기가 안식일 지킬 때마다 계속되는 거예요. 그 천지를 창조했던 창조의 능력이 지금 이스라엘에게 다가와지는데요. 안식을 지킬 때. 그런데 너희가 노동을 하면 되겠나, 안 되겠나? 이 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형상 수준으로 높였는데.
여기서 하나님 형상 의미가 뭐냐 하면, 하나님 가까이 있도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시편 8편 6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말은 거의 하나님 가까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가 신처럼 된다는 게 시편에 나오지요. 그걸 요한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인정했잖아요. 말씀 듣는 자가 신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구성원은 신들의 집합체다. ‘감히 만들어진 존재가 만들어낸 신에게 대들다니. 건방지게. 그러니까 너희들은 당해도 싸지.’라는 게 성립이 되죠. 아주 대단한 자긍심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형상으로 표현했다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그런지 봅시다. 사본이 원본에 가릴 때는 그냥 창조했다가 아니라 반드시 매개물, 매개개념이 있어야 돼요. 매개개념은 없는데서 있으려면 없는 쪽에선 뭔가 할 게 없죠. 그러면 있으려면 만들어진 쪽에서 있게 하기 위한 만드는 기계마저도 기계라 해도 되고, 만드는 뭔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냥 어떤 신화처럼 바구니에 뿅하고 나타났습니까? 뭔가 매개물이 있지요. 누굽니까? 마리아 아닙니까. 마리아 있음을 인정해서 마리아를 통해서 하던 마리아 안에서 하던 마리아가 있음이 예수님 있음의 매개물이 되죠. 그렇다면 천지창조의 매개물이 뭐냐 하는 거예요. 이것을 침멀리는 제대로 설명하기를 이게 바로 ‘말씀’이라 하고, 더 잘 설명하기를 ‘명령’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보니까 빛은 피조물이 되겠지요.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을 만들 때 앞에 있는 빛부터 해서 모든 공간이 하나님 형상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매개물들 먼저 만들어요. 인간의 허파 기능, 위 기능 이것이 어디에 필요합니까? 그냥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만 하면 안 먹고, 비타민도 안 먹고 가만있어도 삽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뭔가 허기지면 말씀도 못 먹고 하면 안 되잖아요. 뭔가 세포가 있으면 에너지가 들어가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일일, 이일, 삼일, 사일, 오일, 육일 모든 것은 전부다 하나님의 형상을 위한 매개물이 되겠지요. 인간이 태어나고 난 뒤에 보면, 씨앗 있는 것, 열매 먹어라. 모든 열매를 다 따먹어라.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아담이 아무것도 안 먹고 산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침멀리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는 명령을 하매 빛이 생겼고, 빛은 안에 명령이 들어있죠. 명령은 빛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하나님의 형상까지 계속 되니까 모든 짐승들은 하나님 형상되는 인간에게 순종하도록 그렇게 말씀으로 규정돼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침멀리의 생각이에요. 맞지요? 그러니까 짐승들이 아담한테 가서 이름 짓고 그 다음에 문화명령, 다스리고 정복하라. ‘다 꿇어!’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인간을 만들어낸 매개물, 빛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짐승이 들어있는 게 아니고 말씀이 들어있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신약적으로 말해서 진짜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말씀이 들어있죠. 말씀이 육신이 되니. 말씀이 육신이 안 되면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형상이 아니에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 만드는 작업의 매개물로 우리 인간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누굴 위해 있다 합니까? 자꾸 나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만히 성경 전체를 보니까 여자의 머리 위에 아담이 있고, 아담의 머리 위에 그리스도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을 위하여 줄줄이 서열이 매겨져 있다 이 말이에요.
여자는 여자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남자를 돕는 자로 있기 위해서, 창세기 2장에 나오지요. 그걸 우리가 알면서도 왜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지 못하느냐? 그러나 그거는 노선이 다른,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그리고 아까 유사성의 원본이, 우리의 원본이 주님이 돼야 되는데, 우리의 원본이 선악과 따먹었지요. 선악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비는 마귀가 돼버렸죠. 선악과 속에. 그래서 제가 어느 설교에선가 도덕이 바로 죄라고 그런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침멀리가 명령을 매개물로 봐서 한 건 잘했어요. 제가 보기에는 깊게 보지는 못했어요. 선악과까지는 연결시키지는 못했고요. 그게 바로 43페이지입니다. 그래서 44페이지 봅시다. 침멀리가 이것까지는 이야기해요. “피조물은 ‘그의 앞’에서 살도록 되어있는 창조주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적어보겠습니다.
피조물은 “그의 앞”에 의미 있죠. 이 사람은 따옴표를 쳐놨어요. 피조물 앞에 누가 항상 버티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 피조물을 만드신 그분이 항상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오죠. 그 피조물들이 뭘 사모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죠. 그리고 요한계시록이나 서신에 보면 우리가 그분이 올 때는 기다리고 그분이 나타나기를 항상 사모하라 했겠죠.
그러니까 성경은 아주 처음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타협하는 적이 없어요. 항상 정상적인 말씀을 주는데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채로 억지로 지키려 하니까 나중에 힘들어 못 지키겠다고 성경 버리고 도망가잖아요. 뭔가 노선이 잘못 되어서 그래요.
그리고 난 뒤에 하는 말이, “창조 작업이 끝날 때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럼 좋다, 나쁘다는 누가 판정합니까? 누가 좋은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좋은 거예요. 그 좋다의 마지막 열매가 안식일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방나라 사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살면서 안식일을 지킬 때마다 뭘 고백해야 됩니까? ‘좋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되죠.
우리가 예수 믿을 때마다 뭐해야 됩니까? ‘이 대로가 좋습니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게 안식에 참여된 사람의 고백이죠. 사도 바울 같으면 모든 것이 ‘아니요’가 아니고, 모든 것이 ‘예’가 되죠. 아니요는 전혀 없습니다. ‘좋습니다. 일 잘 돼갑니다. 멋집니다.’ 남들 보면 미쳤다고 해요.
지금 시간 다 됐지요. 오늘 내용 그 뒤에 잠언서 1장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뭐가 좋은지 우리가 원본이고 우리가 나밖에 모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만 돗대인 것처럼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런 환경 속에 살다보니 내가 아프면 다 나쁜 것이고 내가 죽으면 세상 저주받은 걸로 여겼던 이 잘못된 것 이제는 늘 주님 앞에 동행하면서 주님 앞에 선 채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1208b 부산강의.hwp (45.0K), Down: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