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08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2-정초작업
20091208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2-정초작업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1208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2-정초작업
(강의:이근호 목사)
25페이지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 제목이 있는데, 여기 보면 상당히 여러분들이 이상히 생각하는데 [계시로서의 신명]이라 해놓고 그 다음에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이 나온다 이 말이죠. 왜 갑자기 붕 뛰느냐? 뒤에 보면 [족장의 하나님 야훼] 거꾸로 가고 있고, 그 뒤에 보면 4절에 보면, [창조주와 왕이신 야웨] 이렇게 돼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택]이라 돼있어요.
왜 이렇게 했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남은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안 나타났기 때문에 그 전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과 실체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본 겁니다. 미완료적인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완료적인 시점은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만들어졌을 때 여호와라고 분명히 드러났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이스라엘 이전에 모세가 이미 개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출애굽기 6장에 보면, 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이제는 여호와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거는 개인적이고 여기 침멀리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개인을 통해서는 본질이 드러나지 않고 개인이 집단이 돼야 돼요. 물론 이스라엘이죠.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은 이 집단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렇게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이 책 읽어보면 왜 이렇게 글을 썼는지 성경대로 쉽게 하면 되는데 어렵게 글을 썼는지 어떤 때는 의아할 때가 있을 겁니다. 왜 이렇게 구약을 어렵게 썼는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나 혹은 집단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인 내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우상들이 그렇게 나타나죠. 우상의 하나님은 나는 이렇고, 이렇고, 내 아버지는 이렇고, 내 아들은 이렇고, 내 딸은 이렇고, 이렇게 해서 나라를 만들었다. 그걸 신화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신화가 인간이 만들어낸 거지만. 하여튼 후대 사람들은 전설과 신화를 만들어내잖아요.
예를 들면 단군신화를 만들어낸 사람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단군신화 만들어낸 사람은 잘라버리고 뭐만 기억합니까? 단군신화가 마치 역사인 것처럼, 사실인 것처럼 그것만 받아들이잖아요. 홍길동을 쓴 사람은 생각 안 나고 홍길동이란 가상인물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나중에 사람들이 기존의 가나안 땅에서 우상에 물들어놓으면 사람들은 뭘 이용하려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집단 이스라엘 속에서 어떻게 자기의 본질을 드러냈는가는 생각 안 하고, 집단의 역사 속에 동행하시면서 나타난 하나님은 생각 안 하고 그냥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다만 그것만 내용만 갖고 자기한테 바로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게 바로 우상화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면, ‘믿으면 구원받으면 됐죠.’ 예수님이 무슨 일 하셨는데? ‘그거는 모르겠고 하여튼 난 듣기만 합니다.’ 이거는 바로 나무아미타불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무아미타불 몇 번 외우느냐에 따라서 극락 가느냐와 똑같은 겁니다. 불교에서. 원효대사가 그 짓을 했거든요. 딴 거 신경 쓰지 말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것만 하라 말이죠. 이것이 대순진리회도 마찬가지고 주문 같은 게 있어요.
왜 사람들이 주문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라 주문이 편리하잖아요. 사람이 시장에서 채소장사하기 바쁜데 언데 교회 가서 성경공부 합니까? 그러니 골치 아픈 것 하지 말고 딱딱 집어서 이것 하시면 천국 갑니다. 이것 하시면 복 받습니다. 주문식으로 상품화시켜서 이야기해주면 그것 받고 감사헌금 하든지 안 그러면 돈 내고 받든지 그렇게 하겠다는 거지요. 우상화의 심보가 있지요.
그래서 침멀리는 그걸 극구 반대하면서 하나님이란 본질은 어떤 우상처럼 내용을 가지고 외우라든지 그걸 알면 된다는 말이 아니고, 아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역사적인 현장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안다는 겁니다. 그게 아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교인들이 교회 올 때 이게 오늘날 교회에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이죠. 사람들이 교회 올 때 처음엔 안 그런데 몇 개월 지나면 사람 만나러 와요. 그래서 목사들은 ‘말씀이 중요합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사람들은 말씀 전하는 사람 만나러 와요. 절대로 말씀세계 속에 안 들어가려고 합니다.
‘부산 모임 몇 명 모이노?’ 이렇게 되죠. 사람 만나는 거예요. 그들이 모여서 무엇에 관심을 갖고,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에 신경 쓰느냐가 아니라 누가 가르치는데 누가 모이는데? 사람에 관심이 있어요. 성화론자들이 진리나 복음 관심 없어요. 오늘 몇 명 나오느냐가 그게 더 중요한 거예요.
침멀리가 글을 어렵게 쓴 이유가 지금 이걸 설득시키고, 기존의 모든 사고방식을 다 해체시키고, 이것이 옳다고 강조하고 논리를 어렵게 끌고 가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는 이스라엘 속에 있고 이스라엘 밖에는 여호와가 없는 거예요. 그것도 모세에게 여호와로 알려준 것으로는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보통 갓난아기 이름 지을 때 엄마가 의논하고 짓습니까? ‘갓난아기 울지 말고 내 말 들어봐라. 네 이름 뭐로 짓노?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이야기하라니까. 나중에 커서 촌스럽다 하지 말고.’ 이렇게 해서 이름 지었습니까?
사람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잖아요. 김 아무개 씨, 이 아무개 씨 부를 때 한단 말이죠. 그러나 엄마가 아기 이름 지을 때는 아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요. 아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엄마, 아빠가 일방적으로 지어주잖아요.
그러면 여호와 이름은 여호와가 부릅니까, 누가 불러야 돼요? 하나님이 그전에 이름 없어서 답답한 일 있었습니까? 여호와 이름은 자기 백성만 불러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 백성이 부르려면 여호와 이름의 내용에 합당한 백성이 누가 만들어야 돼요? 이스라엘 자기들이 만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서 그 만드는 과정 속에서 이러이러해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는 그 절차 전체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이 되고 내용이 된다 이 말입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말씀에 관심 두고 복음에 관심 두세요.’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성인으로 간주해요. 마치 인간 대 인간의 만남처럼. ‘이야기해보세요. 믿어줄게.’ 이래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뜻이 아닌데. 우리 하나님 이야기 해보세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압니다. 받아들일게요.’ 이게 아니란 말이죠.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지식으로 성경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제 누굴 만든다? 방금 교회 온 그 사람 속에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힘으로써 집어넣으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그 사람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고 나중에 그 성도 안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증거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말씀세계에요. 말씀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삼킴을 당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사로잡힌 자죠.
십자가마을에 모임이 있다면, 요한복음 하면 요한복음의 내용이 뭐냐? 거기에 관심이 아니고 누가 오는데, 누가 가지? 이게 자신을 성인으로 대우해달라는 거예요. 성인으로 대우하지요. 자신을 목사로 대우해달라. 목사로 대우하지요. 그런데 그 사람을 목사로 대우하느냐 그거는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고, 다같이 말씀에 의해서 요한복음이란 말씀내용이 오늘날 우리를 어떻게 요한복음으로 되게 하는지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자 이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15절 봅시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용이 젊은 여자가 시집 안 가고 과부로 돌아다니고 일만 만드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간단한 문장인데 상당히 중요한 문장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가 있다’ 할 때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할 때 이미 세상이 두 개의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의 여지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쪽의 복음의 세계 아니면 사단의 세계죠.
이러한 구분은 누가 내립니까? 어느 쪽에서 내린 거예요? 이렇게 세상이 둘밖에 없다는 그 결정과 판단은 누가 내린 거예요? 이미 복음을 아는 쪽에서 내린 결정 아닙니까.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만 사단에게 돌아갔다는 의미가 성립되는 겁니다. 여기 사단의 세계든 이것도 모르고 제 삼자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리고 사단에게 돌아간 사람한테는 의미 없다니까요.
그렇다면 젊은 여자가 교회 나오다가 바람나서 세상 쾌락에 빠져서 교회도 안 다니고 남자하고 노는데 빠졌다면 그걸 사단에 돌아간 예라면, 그 여자에게 사단에게 돌아간다고 하면 그 여자가 인정하겠습니까? 인정 안 하죠.
결국 우리는 사단의 세계가 뭔 세계인가를 우리가 판정을 내릴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계에 잠식을 당한 증거가 어떤 사람보고 저 사람은 사단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우리의 판단과 지성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고. 그거는 자기한테 들보 있으면서 남의 티끌 시비하는 것밖에 안 되니까. 그게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는 세계가 흘러넘쳐서 저쪽에 가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자신부터 ‘저 사람은 사단에게 돌아갔구나.’라는 것이 ‘나는 멋있는데 저 사람은 이제 버려났다.’ 이것 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체도 계속해서 사단의 세계와 빛의 세계, 복음의 세계를 구분한 하나님에 의해서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여기에 폭설로 덮여버리는 중에 있지요.
그러니까 제 하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사단에게 속했다고 남 욕하라고 예수 믿지 말고, 지금 사단에 속했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나온 거고,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구나.’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자 이 말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현재 이스라엘과 여호와, 여호와와 이스라엘 관계를 지금 이렇게 설명 될 수밖에 없어요. 침멀리 이론에 의하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국가 이스라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감춰진 존재요 우리가 알 수 없다. 이유가 뭐냐? 갓난아이가 이름 짓는데 엄마하고 상대가 안 되듯이. ‘엄마, 엄마. 내 이름 김국진으로 지어주세요. 박지성으로 지어주세요.’ 이렇게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 만들어주세요.’라든지 ‘하나님 이름을 여호와로 해달라.’고 요청할 입장이 못 된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나왔다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 운명과 팔자가 이스라엘 본인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고 남은 자답게 함으로써 여호와의 본질이 드러나는 겁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 인생을 박살내던 그건 주님의 소관이지 우리가 관여할 입장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지.
그래서 침멀리는 그런 입장에서 구약을 보란 말이에요. 상당히 믿음 좋지요. 과연 믿음이 좋은지 두고 봐야 알겠지만. 그래서 글이 어려운 거예요. 만약에 출애굽도 하나고 그 다음에 창세기부터 나오면 사람들은 뭐냐 하면, 팔짱 끼면서 ‘역사공부 해볼까. 그것 이해된다.’ 이해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이스라엘 맞소?’ 아니면 뭐도 거짓이다? 당신이 창세기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의 지식일 뿐이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기초로 해서 진도 나가봅시다. 침멀리에 의하면 이스라엘이란 국가 속에 그 다음에 족장들의 하나님이 나오죠. 그 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 그러니까 이건 시간의 흐름과 반대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창조주를 먼저 아는 게 아니고, ‘당신 이스라엘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족장들의 하나님을 알아야 창조주 하나님을 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그 뒤에 보면 나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족장들의 하나님을 알 때 여기서 현재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한 족장들의 언약을 아는데, 그 언약을 침멀리는 땅으로 봤어요. 인격이 아니고 땅. 왜 이 땅이 하나님이 준 땅이라는 걸 먼저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주변에 이 땅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방인들이 있지요. 이방민족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럴 때 이스라엘 정체성이 이스라엘 거주하는 일이 뭘 확대해야 되느냐 하면, 이 땅은 결코 저 이방인들의 땅이 아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이 땅은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땅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이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날아온 돌이 박힌 돌 빼서 집어던져놓고 우리가 원래 주인이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인간성 속에 두 가지로 돼있어요. 칸트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성으로 인간을 알게 돼있어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그걸 어려운 말로 ‘비가역적’이라 하는데, ‘가역’이란 말은 미래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걸 가역이라 하고, ‘비가역’이라 하는 것은 한 번 과거를 지나갔으면 두 번 다시 과거는 재현할 수 없는 걸 비가역이라 하고.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지나간 것은 추억으로 남고 기억으로 남을 뿐이지 그걸 재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만남과 언어 속에, 대화 속에 시간과 공간성을 이미 기존에 일치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대화가 되거든요. 그런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대화가 안 되는 이유가, 팔레스타인은 가역을 이야기해요. 처음부터 우리가 살았다는 거고, 이스라엘은 비가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유럽에 살던 전쟁 때문에 흩어졌다 온 사람들이에요. 그러면서도 내 땅이라 하니까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습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할 때 바로 비가역이었다고. 원래 우리 땅이었다. 그러다가 쫓겨나버렸죠. 전 세계 유엔국가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침공이다. 만약에 우리가 금강산을 친다면 다른 나라가 가만있질 않아요. 돌려줘라. 왜냐하면 만약에 그것이 전철이 돼버리면 중국이 베트남 치고, 태국이 라오스 치고, 전 세계가 개판 돼버립니다.
그래서 이 책 내용에 이스라엘은 천지를 창조한 이것이 답답한 게 아니에요. 우선 답답한 게 뭐냐 하면, 이 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특히 아브라함에게 사대 만에 온다는 약속했던 그 땅이니까 원주민이라 할지라도 이 땅을 차지할 권리는 없고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원주민이 처음부터 이 땅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신화라고 해요. 단군신화. 어떤 역사든 처음부터 이 땅의 주인은 우리다.
그래서 책들을 보게 되면 항상 어느 문제에 가게 되느냐 하면, 대지-땅 문제에 가게 돼있어요. 모든 문학의 책이 마지막에는 땅입니다. 사람은 땅을 차지해야 살 수가 있거든요. 땅이 없어 붕 떠버리면 이건 어떤 학문자체가 용납이 안 돼요. 그런데 들뢰즈는 용납이 안 되는 철학을 니체 철학에 따라서 유목주의라 해서 노마니즘, 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보지요. 그래서 기존에 정주주의에 대한 유목주의의 대비가 포스트구조주의의 구체화된 특징이 되는 겁니다.
교회 문제요? 교회 회의하는 것, 제직회, 당회 전부다 땅 문제에요. 땅이 없이는 못 살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뭘 경험했느냐 하면, 땅 없이 사는 것을 경험한 유일한 민족입니다. 어디서? 광야에서. 광야에서 땅 없이 살면서 하나님께서 알려준 것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이야기하면서 만나를 줬잖아요.
만나가 무엇이냐 하면, 영어로 'what'이에요.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what와 같은 언어가 사람이에요. 여기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은 누굴 질문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질문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평생 살면서 ‘하나님이여, 내가 앞으로 다음에 뭘 해야 됩니까?’ 물어야 될 입장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 예비한 답이고, 내가 왜 답인지를 그 다음에 질문을 알아가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답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질문을 살아가면서 ‘어떤 질문 때문에 내가 답입니까? 어떤 질문 때문에 구원받아야 됩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는 것이 답이라고 보잖아요. 그러면 주님의 구원이 아니고 내 구원이 된다고. 그런데 ‘주님께서 뭐 때문에 저를 천국에 들여보냅니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교회 문을 열고 예배 참석해야 돼요. 왜 저를 교회 보내십니까? 왜 이 말씀을 꼭 알아야 됩니까?
이것은 자기한테 주는 화살을 나로 하여금 있게 하신 다른 분을 향하여 겨냥하게 돼있어요. 지난 월요일에 강의했는데 봅시다. 에베소서 3장 봅시다. 3장 3절에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이렇게 돼있지요. 맞지요. 그렇다면 계시가 없으면 비밀이 없지요. 비밀이 9절에 보니까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그러면 제가 지난 언제 설교했는가? 우리 자신이 컴퓨터에 정보를 입력하는 usb처럼 하나의 우리는 창세전에 예정된 비밀을 이동시키는 그런 존재밖에 안 되죠.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에 떠돌아다닌다면 우리 안에 누가 그런단 말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주님의 영, 다른 말로 귀신이죠. 죽은 귀신, 죽은 귀신이 부활하고. 예수님의 죽은 귀신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는 내 마음대로 못 해.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갔던 그것을 되풀이해야 돼요. 카피를 해야 되고, 반복을 해야 될 입장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어설픈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답인 줄 알면서도 창세전에 어느 계시에 합당한 답이 되는지 그 질문을 모르지요. 그런데 가끔 그 질문과 답변을 알면 우린 은혜 받았다 하지요. ‘아, 말씀이 맞구나.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사는구나.’ 가끔은 아는데 그게 몇 초 가질 않아요. 그 다음에 우린 옛 성질이 있어서 또 내게 합당한 답을 또 달라고 해요. 내 자체가 답인데. 우리는 계시 없는 성령 없이도 알 수 있는 걸 또 달라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만나. 그게 what. 사람이 뭐냐? 사람 자체가, 사람이 무엇이냐고 묻는 게 아니에요. ‘사람=what’이 되죠. 사람이 무엇이고, 사람이 만나고, 만나가 사람이고, 만나가 주님이고. 그렇게 돼요. 말씀이 사람이고, 사람이 말씀이 된 거예요. 여기처럼 그리고 빠지면 안 되지만.
땅의 문제입니다. 좀 더 이야기해봅시다. 이 땅은 우리 땅이라 할 때 원주민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소리는 우리도 할 수 있겠다.’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땅이 우리 땅이니까 우리 힘으로 들어가겠다고 해서 우리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족장에게 주신 언약대로 우리가 여기 밀려왔다는 거예요.
우리가 가나안 땅 차지할지 안 할지 그것도 절대로 우리 이스라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밀어붙이니까 이 땅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 ‘나 천국 갑니다.’ 하는 게 아니고 ‘천국으로 들어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집어넣어버리면 자기는 수동적이죠. 일방적으로 피동적으로 밀어 넣음을 당하는 고백이 그게 성도가 교회에서 내뱉을 찬양이고 감사인 겁니다.
지난 오전 설교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찬양과 감사는 내가 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걸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왜냐하면 소유할 게 없어요. 그런 고백을 하는 자체를 기대하면서 주께서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내고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 창조는 왜 뒤에 오느냐? 바로 원주민들이 언약을 주장할 때 그들은 신화를 주장해요. 신화가 뭐냐 하면, 천지창조에 관한 겁니다. 어떤 이방인이든지 창조신화가 없는 데가 없어요. 그럴 때 언약 뒤에 언약보다 이 전에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또 끄집어 갖고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천지창조를 만드신 본래 계획에 의해서 언약이 주어졌고 그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져야 했고 그래서 이 가나안 땅은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절차상 맞다는 겁니다.
그런데 침멀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결국 여호와라 하는 것은 우리가 창조를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하나님으로 오셔서 그 집단 속에 우리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집단 밖에서 우리가 창조를 아는 것은 이방인이 하는 짓이고, 이스라엘 내부에서 창조를 앎으로 말미암아 창조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왜 우리가 하늘의 거룩한 백성이어야 하는 그 당위성, 그걸 보여주기 위한 창조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창조는 창조과학회나 과학자들이 다루는 6일 창조와 달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진화론이 어떠니, 처음에 빅뱅이 어떠니 그런 식으로 창세기를 보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처음에 사탄이 있었고, 흑암이 사탄이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바깥쪽에서 하는 짓이에요. 처음에 선과 악이 싸워서 어떻게 창조했다든지, 혼돈이 있었고 하는 것 있잖아요. 바깥쪽 신화들, 바벨론 신화들. 그런 것은 이 땅을 차지할 권한도 없는 인간들이 땅을 넘보면서 하는 신화고,
진짜 신화는 문자를 풀이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됨을 증명하기 위한 창조이야기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창조이야기에서 뭘 끄집어내요? 언약을 끄집어내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왜 이스라엘로 자리 잡아야 되는가 하는 그 당위성,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창조신화가 돼야 된다. 그래서 순서를 이렇게 한 겁니다.
가인은 누구하고 결혼했습니까? 아담 이전에 사람들 없었습니까? 이런 질문들. 그러면 네안데르탈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그건 뭡니까? 하는 질문들. 그것은 기본적으로 네가 그렇게 질문할 수 있는 잽이 못 된다는 거예요. ‘선악과 안 따먹으면 범죄가 없을 건데.’라는 질문은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란 말이에요. 그건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길 때 하는 거예요.
다시 할게요. 우상을 섬길 때는 어떤 게 우상이냐 하면, 우상이라고 해서 우상 섬기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자기 나름대로 신이지요. 동등 돼요. 둘 다 성인이에요. 성인이기 때문에 ‘신이시여, 내가 가진 것, 귤 드릴 테니까 복 주옵소서.’ 이거는 하나의 부모와 갓난아이 관계가 아닙니다. 둘 다 성인이에요.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이여 왜 제 운명,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제 이름을 왜 이렇게 지어놨습니까?’ 이렇게 따지는 입장에서 우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한테 따질 때 나름대로 자기 포부,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따지려고 우상 섬기잖아요. 옛날 조상들이 교회 안 믿고 할 때 다 따지잖아요. 삼신할매한테 따진다니까. 이렇게 바쳤는데 왜 복 안 줍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창조 때 말씀으로 창조한 그 능력으로 이스라엘 창조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자기 이름 짓는 것 따질 수 없듯이 이거는 내가 따질 입장이고 내 자체가 여호와 이름 자체다. 우리 이스라엘 자체가. 여호와 이름은 허연 수염해서 도포입고 나타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동행 자체가 여호와의 이름의 본질이다 이 말입니다. 정말 어려워요.
그런데 어제 선덕여왕 보면 의미 있는 말 나왔어요. ‘덕만이는 이름이 있다. 하지만 왕은 이름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왕의 이름이 없다는 말은 비 실제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철학에서. 왕은 어디 가운데 있습니까? 신국, 신라 전체 민중들 속에 있지요. 믿습니다. 우리는 신라에 왕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관념이라 하는데, 추상적인 개념에 아무리 왕의 자리는 사람은 바뀌더라도 왕의 자리는 있다. 그것이 얼마나 허구적이라는 걸 설명하는 것이 이번에 나오는 [욥 속에 그리스도]란 책입니다.
모든 인간의 우상과 신은 강강수월래 안에 허구를 공백으로 만들어놓고 그 공백 자체를 있음으로 볼 때 거기서 공터에 온갖 신화를 다 집어넣죠. 그런데 물론 이스라엘도 그런 틀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오류가 뭐냐 하면, 그런 빈터를 우리가 둘러싸서-문화인류학에 보면 나와요. 구조주의 보면 나오는데-보호하게 되면 우리의 신이 되죠. 우리 종족의 신이 되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렇게 둘러싼 테두리를 누가 깬다? 안에 계신 분이 언약적으로 안 맞는다고 다 깨는 것은 다른 민족에선 있을 수 없지요. 왜냐하면 신은 우리를 위한 신이 돼야, 우상이란 뜻이 뭡니까? 나를 위한 신 아닙니까. 우리를 위한 신이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위험하다 싶으면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꾸면 되잖아요.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뭡니까? 이스라엘은 있어야 되고 여호와가 마음에 안 드니까 여호와 자리에다 바알을 집어넣어버렸잖아요. 그게 벌써 이방화된 증거죠.
그래서 목사님들이 복음으로 목회 안 되니까 딴 거 집어넣자. 십자가로 목회 안 되니까. 십자가 말고 딴 거 집어넣자. 그게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멸망한 이유가 되었고, 거기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이 선지자죠. 선지자들이 자꾸 옛날 언약을 되풀이하죠.
언약이라 하는 것은 너희들이 수용하고 수용 말고 할 그런 입장에 있지 않는다. 너희들이 진정 여호와라면,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에서 ‘스스로 이룬 자’로 바뀌죠.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서 스스로 이루어나가시면서 마지막에 스스로 계신 자 돼버려요.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속에 밀려온 이스라엘이 진빵이라면 앙꼬가 뭡니까? 창조의 모든 이야기가 앙꼬가 되고, 언약이 앙꼬가 되고, 약속이 앙꼬가 되서 들어와서 이 앙꼬가 나중에 구현돼버리면 진짜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참 선지자들이 언약을 늘 되풀이하고, 되풀이하고 하죠.
서론격으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다음에 내용에 들어가 봅시다. 새로운 번역엔 30페이지고, 옛날 책엔 25페이지로 돼있죠. 27페이지 봅시다. 아주 작은 글씨로 돼있는 대목이 있어요. 26페이지 밑에서 한 15번 째 줄에 “에스겔 16장에는 완전히 다른 예루살렘의 기원역사가 기아(잃어버린 아이)의 주제로서 등장한다.” 거기서 등장한 게 뭐냐 하면, 27페이지 넘어가면, “하여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란 이름이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더 먼저 있었다.”라고 돼있어요.
전에 이름이 뭐냐? 출애굽 이후의 야웨인데 여호와 하나님이 뭐냐를 추적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란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침멀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미 족장 때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나와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이스라엘 하나님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7페이지 중간에 보면 아주 어려운 말을 했어요. “우리는 야웨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 사실을 구약 어디에서도 찾아보지 못한다.”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이방인들이 말하는 우상과의 차이점이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너는 나한테 물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너한테 계속해서 질문이 되고 답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동행이라고 하죠. 이게 28페이지 나옵니다. 28페이지 중간에 보면, 애굽에서 하나님 여호와로 나오는데 하나님은 행진 가운데 동행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다른 민족에서는, 다른 우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이 점을 깊이 생각해봅시다. 동행한다는 것을 동행한 사람이 상식적으로 알까요, 모를까요?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께서 함께 한다는 것이 눈에 보입니까? 눈에 보이려고 한다면 강심령집회가 되겠죠. 사바사바, 분신사바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묵시사건은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묵시적 안목으로 보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심지어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져도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십자가 예수님 죽어도 아무 사건 일어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거는 하나의 우연한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침멀리는 거기까지 안 보고 있지만 같은 취지로 이야기하죠.
동행한다는 것을 옆에, 누가복음 마지막에 있죠. 분명히 어떤 아저씨가 따라붙었는데 만약에 그 두 제자가 눈이 안 떼인 채로 헤어졌다 합시다. 그러면 나중에 한 십년 뒤에 어이, 내가 너와 동행했잖아. 언제요? 그때? 그때 언제 말입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게 마태복음 25장에도 나와 있어요. 제가 언제 주님한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먹을 것을 주었으며 옷을 입혔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 뭘 하느냐 하면, 어렵게 합시다.
이 동행을 역사적 안목으로써 뭘 뚫어내겠다? 역사적 안목으로 묵시를 포착해내겠다는 시도를 인간은 역사에서 돌출시키면서 하게 돼있어요. 이게 이번에 내가 수정한 [다니엘 70이레] 논문에 주가 나와 있어요. 캘빈이라든지 헹스텐베르크라든지 모든 사람들은 70이레를 뭐로 보느냐 하면, 역사적 점찍기라 하죠. 점을 찍어서 490년 그걸 증명하려 하는 거예요. 간하배부터 해서 모든 학자들이 점을 찍어서 하는 거예요. 창조과학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얼마 전에 [과학에 나타난 하나님]이란 책을 냈어요. 과학에 무슨. 과학은 신이 있지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죠. 신은 과학 아니라도 굴러가는 낙엽에도 신이 있죠.
역사적 안목에서 묵시를 포착할 수 있느냐? 그 사람들은 포착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저는 안 된다고 본 겁니다. 왜냐하면 묵시라 하는 것은 역사를 공격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떻게 공격하느냐? 역사를 할 때는 반드시 인간은 시간적인 자기 존재를 자기 주체를 역사적 존재로 포함을 시켜놓고 있어요. 자기 주체가 역사적이기 때문에 내가 이걸 역사적이라고 경험으로 뭘 포착이 되면 묵시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역사에 궤도 속에 환원이 됩니다. 다시 돌아오게 돼있어요.
‘지난번에 그 사건’ 하고 역사의 서랍에도 역사적 사건이라고 넣고 그 사건들을 연결시켜서 추상적인 역사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노선이 하나 생겨나겠죠. 이런 점이 있다면 점을 이어버리면 이게 하나의 선이 되고 이걸 역사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다른 노선이 있다면 같은 사건인데 A, B, C인데 A, D, F란 지점이 있다면 A에서 D, F로 간다면 A, B, C에 있는 사람은 A, C, D를 알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주의 역사라 합니다. 주의 역사는 주님께서 역사 속에 밟았던 그 역사만 역사로 인정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성지 순례해야 됩니까? 주님께서는 사건을 일으키면서 사건이 연결되면 역사가 되는데 주님 사건이 역사가 되잖아요. 그 사건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되풀이해버리면 우리는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좁은 길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뭘 발견하느냐 하면, 이 사건도 주께서 일으켰네. 이 사건도 주께서 일으켰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게 되죠. 오늘도 이런 사건을 만나게 해주시네. 그게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죠. 주님이 일으킨 사건인 동시에 주님께서 경험했던 사건, 주님께서 가신 길이죠.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주님께서는 모든 환란을 다 겪었기 때문에 환란 받을 자기 백성을 능히 도울 수 있다. 우리가 당했던 모든 길은 이미 주께서 다 거쳐 가셨던 길이에요.
주님께서 왜 거기서 기도의 응답을 내릴 수 있느냐 하면, 주께서 일으키신 사건 안에 우리가 놓여있기 때문에 그 사건의 마지막 종결점도 해답을 주께서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사건은 나의 사건이라 하면 주님께서 일으킬 수 없죠. 나의 사건이라면 주님께서 해답이 없습니다. 왜? 내 사건이라 우기기 때문에. 내 사건에서 벗어나야 어떤 해답이 나오는데 이거는 내 사건인데 해결해 달라 해버리면 자기 역사 속에 있으면 건방지게 주님을 자기 역사 속에 초대를 해요. 말도 안 되지. 주님의 역사는 따로 있는데 그걸 묵시라 합니다.
그래서 개정된 제 논문의 주에 보면 주님의 몸은 묵시적 신체라 했습니다. 그래서 언약이 다뤄진다. 몸이 움직이면 그 안에 묵시도 따라서 같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한 사건 속에 한 사건만 있는 게 아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모든 사건이 주께서 일으키는 이 한 사건 속에 다 들어있죠.
그래서 십자가 강도가 그날 믿더라도 어디 갑니까? 그날 밤에 낙원갈 수 있는 것이 한 사건에 동참 돼버리면 그 사건 안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믿고 죽으면 낙원에 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화라는 게 성립이 안 되죠.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아요. 긴 시간이 있어서 인간 더 되서 가는 그게 아니라 모든 우리의 주체가 모든 인간의 나 됨이 주님께 달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증거로써 주께서 일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신약 때 이야기죠. 햄버거 고기 두 개 들어가는 것 얼마죠? 햄버거 빵 덮여있고 채소 삐져나오고 고기 하나 있고 더블버거 여기 또 하나 채소 하나 있고 케첩 있고 고기 있고 밑에 빵 있잖아요. 결국 위에서 보면 동그랗지만 밑에서 보면 하나의 층이죠. 구약이나 신약이나 층이 나눠져 있어요.
옆에서 보면 같은 구약에 언약이 오면서 언약 안에 뭘 품고 있느냐 하면, 죄와 그 다음에 은혜가 있죠. 이게 언약궤니까. 옆에 붙어있는 게 죄가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있어야 되죠. 율법을 은총, 어린양의 피로써 언약이 완성 되거든요. 이것이 쭉 가게 되면 밑에 것도 확산되고 위에 것도 확산되는 거예요. 사실은 위에 것이 확산 되면서 위에 것은 상처를 많이 받지만. 이 층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안에서 죄가 확산 돼야 되고 그 죄의 확산 따라서 그 용서의 방식도 점점 더 아주 난폭해지고 살벌해지죠.
좋게 이야기해서 용서가 안 돼요. 삼손이 구원할 때 힘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자기를 죽여야 구원 되잖아요. 이러한 살벌한 것이 요한계시록에 가면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살벌하기 짝이 없죠. 세상도 막 가자는 이야기고 주님도 막 가자는 이야기에요. 그러한 스피드가 줄지 않고 계속 가버리면 한쪽은 뜨거운 지옥불이고 여기는 상대적으로 시원한 천국이 되고. 가속도가 붙어 막 달리는 겁니다. 이걸 층으로 나눈 거예요.
이 두 가지의 층을 그때마다 성도의 몸으로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발산되겠습니까? 언약의 층이 두 가지 다 발산되겠지요. 이래서 내가 죄구나. 이렇게 하려면 여기서, 지금 동행 이야기하는데,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있는 마지막에 있는 아주 파괴적이고 진지하고 살벌한 예수님의 운명이 미리 그들과 함께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알고 있는 언약의 층을 자기 백성들에게 이것을 사건화 시켜서 품어버린 거예요. 이걸 합류해서 세례라 하죠. 홍해 건너올 때.
사실은 홍해 건너올 때 백성들은 안 건너고 예수님 혼자 건너와도 왜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홍해 혼자 건너와도 돼요. 모세도 오지 마. 지팡이만 알아서 건너오면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동행해야 되기 때문에, 그 말 있잖아요. 동물의 세계에서 사자 앞에 얍삽한 여우, 절하니까 자기 보고 절하는 줄 아는 것처럼. 동행이란 말은 자연히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누구 보고 하는 겁니까? 장차 우리 주님 보고 갈라지는 건데 백성들은 그걸 자기들 보고 갈라지는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걸 믿었잖아요. 분명히 그들은 장대 같고 힘센 것 맞는데 그들이 힘세고 강하면 무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더 신바람 황수관이지. 더 신났잖아요. 뭔가 오히려 안 되는 것을 찾자. 그래서 천국은 우리가 힘으로 절대로 못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 신남,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천국은 우리가 어떻게 못 들어간다고 우리끼리 싱글벙글 이야기하는 여유로움, 느긋함. 이게 복음의 느긋함 아닙니까. 우리가 동물의 왕국의 여우 노릇하자 이 말입니다. 뒤에 사자가 가는데.
세례 요한이 자기는 쇠해야 된다는 말을 기분 좋게 이야기했죠. 자기는 물렀거라 하면 되니까 얼마나 신바람 납니까. 그런데 평소에 애굽에서 생활했던 그 사람들이 이 동행의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홍해가 있으니까 뒤에 누가 따라옵니까? 백제군의 계백 장군이 귀신 출몰하듯이 해서 15분 만에 70킬로 쳐들어오니까 도저히 우리가 신출귀몰한 군대를 어떻게 이기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모세한테 대들잖아요. 그런데 모세가 뭐라 합니까? 가만있어봐라. 가만있는 느긋함.
개척교회 하는 목사가 교인 뚝뚝 떨어질 때 주님한테 얼마나 따집니까? 주께서 가만있어봐라. 구원되고 안 되고는 처음부터 너하고 의논한 적이 없다. 너는 갓난아이인데 누구 구원시키고, 누구 구원 안 시키고 내가 언제 너하고 의논한 적이 있느냐? 네 자체가 구원될 자로 내가 만들어냈는데. 그저 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발산되면 그만이듯이 그런 것 가지고 느긋함이 없이 초조함과 조급함으로 하면 말썽이 나요. 우리가 복음의 훼방꾼이 돼요.
정신 봐라.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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