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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1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7장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091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7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1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7장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출애굽기 7장 9절에 나오는 지팡이 던져서 뱀 되고, 애굽의 술객들도 지팡이 던지니 뱀이 됐다는 이건 재앙이 해당되진 않습니다. 재앙에 해당되지 않음에도 왜 이런 이적, 기적을 베풀어야 되느냐?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의외로 기적이냐, 기적 아니냐 하는 것이 나타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사라지느냐 하는 사라짐에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가 던지매 뱀이 됐잖아요. 그런데 애굽의 요술가들도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됐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모세는 그 뱀을 잡으면 지팡이가 됐어요. 모세 쪽으로 왔는데 그쪽에 있는 뱀은 어디로 갔습니까? 사라져버렸죠. 어떻게 사라졌느냐 하면, 모세가 만든 뱀에 의해서 그 뱀이 삼킴을 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쪽이 가짜입니까? 어려운 질문을 했는데요.

지적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게 기적이 아니고 반드시 그 본질을 보여줄 때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 자체가 드러나는 것을 기적이라 하거든요. 그냥 신기한 것은 마술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은 뭐냐 하면, 뱀을 삼킬 때 이 뱀은 모세의 지팡이에서 나온 뱀이죠. 그런데 삼킴을 당한 뱀은 애굽에서 나온 뱀이죠. 그렇다면 애굽 사람들이 지팡이 가지고 뱀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 뱀은 삼킴을 통해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 거예요. 얻어맞기 위해서 태어난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할 때 이 본질을 보여주고 그리고 애굽의 술객들의 뱀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우리는 아무리 요술 피우고 뭘 피워도 결국은 여호와 앞에서 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졌잖아요. 우상은 헛것, 결국 우상의 마지막 자리를 없는 거예요. 뿅하고 없어져 버린. 이게 뱀뿐만 아니고 뱀에 속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리스도 몸에 삼킴을 당한 몸이 될 때는 하늘에 속한 몸이 되지만 그냥 주님 앞에 삼킴을 당하지 않는 몸이 되면 흙으로 살다가 저주받은 영원한 몸이 되죠.

‘당신의 끝은 어디요?’라고 물어보세요. 길가는 사람은 미쳤다 하지만. 혹시 아는 사람, 교회 다니거나 이런 사람 있거든, ‘당신의 끝은 어딥니까?’ 예를 들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주님 품이죠.’ ‘그럼 당신은 사라지겠네요. 당신의 주체는 자아는 그러면 사라지겠네요.’ 사라져야 되죠. 사실은. 사라지기 때문에 성도는 사나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는 말을 해야죠. 이미 삼킴을 당해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원수지간이면서도 그 원수의 존재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데 아주 적절하게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단들도 마찬가지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필요해서 다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면 나오죠. 예수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권세를 내게 주심은 하나님 백성, 하나님 아들한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세상 쥐고 있는 모든 권세를 나한테 일임했습니다. 이 말은 안 믿는 사람까지 바퀴벌레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도 오직 믿는 사람에게만 영생이 돌아가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그 영생을 저는 뭐라고 하느냐? 내부 환경, 내부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산다’에 의해서 전에 있던 애굽식으로 산다. 이쪽에 이스라엘 산다는 뭐로 산다고 했습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이 산다가 이쪽에서는 내가 산다가 되지만 여기에 산다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내부 환경, 내부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너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거룩한 백성. 나중에 언약이 나오면 내가 언약을 지키면 너는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그게 하나의 내부 공간이 되는 거예요.

이 내부 공간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애굽식을 교체가 돼야 돼요. 그 교체되는 과정 속에 하나가 지금 현재 앞으로 나올 열 가지 재앙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럼 열 가지 재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봅시다.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물이 하수니까 강물이 피로 변하고 이거는 사람들이 물마시기를 싫어하겠지요. 물이 없으면 전에 있던 애굽의 삶의 내부 공간에서는 못 사는 거예요.

모세가 이런 기적을 베풀었을 때 애굽 사람 싫어하는 건 물론이고 히브리인들도 같이 싫어했겠죠. 왜? 아직도 애굽식의 삶의 환경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예요. 이 싫어함은 나중에 광야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 없어서 원망, 그 다음에 먹을 게 없다고 원망. 그럴 때 하는 소리가 이구동성, 피켓 들고 시위했겠지요. ‘컴백 애굽,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교회 나와서 술 끊고, 담배 끊어놓고 나중에 교회 문제 있으면 막걸 리가 당긴다. 소주가 당긴다. 제가 글 올렸는데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거예요.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쌓아왔던 의와 거룩함이 상실하겠지요. 그 상실이 바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배우는 거예요. 뭔가 빠져나가는 것.

지금 애굽 사람만 애타는 게 아닙니다. 히브리인들도 애타는 거예요. ‘아이고, 안된다, 안 된다. 피 되면 안 되는데 못 사는데.’ 히브리인들도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나중에 네 가지 재앙이 지나고 뒤에 파리 재앙부터는 따로 구분되기 때문에 놀라지 않지만 그전까지는 깜짝깜짝 놀래요. 왜 네 번째 재앙까지 히브리인들도 놀라게 하고, 애굽도 놀라게 하고 전부다 가슴이 덜렁 내려앉죠. 왜냐하면 자기의 삶의 환경이 부셔지니까. 저게 있어야 산다는데 저것마저 하나님께서 외부 바깥의 숨어있는 신으로서 공격을 하니까 놀래죠.

그 놀란 것은 아무리 히브리인들도 모세와 바로 가운데 바로에 속했기 때문에. 바로가 강퍅해서 모세를 대적하는데 바로의 술객들이 모세와 유사한 기적들을 베풀었거든요. 마술을 해대니까 주님께서는 이 마술을 꺾음으로 말미암아 애굽 인간들의 한계를 들추어내고 그들이 ‘우리 힘으로 도저히 모세의 기적을 흉내 못 내겠다.’ 하고 포기할 때 너희들만큼은 특별한 내 백성인 것을 구분을 시켜주는 겁니다.

만약에 애굽의 술객들이 계속해서 모세의 흉내를 내게 되면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특별한 사명을 인정하겠습니까? 전에 내부 공간에 있던 우리 애굽의 술객들도 모세, 너 정도는 할 수 있다. 이거는 애굽 사람뿐만 아니고 누구도 이야기 안 하겠습니까? 구원돼야 될 새로운 내부 공간을 맞아야 될 하나님과 동행해야 될 하나님 백성들도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단 말이죠. ‘그까짓 일은 해내잖아요. 저 사람이. 그 전에 있던 애굽 술객들도 해내네. 모세, 너 뭔데. 지팡이가 뭐라고. 똑같이 해내는데. 여호와나, 기존 신이나 똑같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거다 말이죠.

그런 한계가 끊어질 때 그때부터 우리는 뭔가 애굽과는 결별해야 될 특별한 민족이구나. 그리고 우리는 바로와의 관계가 이제는 끊어질 때가 되었고, 우리는 사람들이 행하지 못하는 기적을 행하는 모세 편에 서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감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는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 재앙까지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진도 잘 나갑니다. 7장 22절.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함으로 바로의 마음이” 그 다음에 괄호 열고,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죠. ‘강퍅’의 의미가 뭐냐? 간단합니다. 사람의 교만인데, 성경에서 교만은 바로 예수님 말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이걸 교만, 강퍅이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고 믿는 구석을 믿는 게 강퍅이라면 이 강퍅의 반대가 뭘까요? ①겸손, ②긍휼, 몇 번일까요? 정답은 긍휼이죠. 왜냐하면 아무도 겸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겸손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모든 사람을 강퍅케 하심은 뭐로만 구원하기 위해서? 긍휼이죠. 그럼 긍휼이라는 건 어디에 해당됩니까? 우리가 항상 강퍅하고 있는 진행 중. 항상 강퍅 중에 있을 때 거기에 뭐가 덮칩니까? ‘아이고, 불쌍한 것’ 하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현재 애굽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서 히브리인들이 안 받는 여섯 번째에서 열 번째 재앙은 결국 어떤 차원입니까? 그들이 마음이 변했습니까, 아니면 긍휼 싸움이에요? 긍휼, 불쌍히 봐주는 거예요. 그들이 기적 보고 인간 개과천선해서 ‘이제부터 여호와 믿습니다.’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그들은 심지어 열 가지 재앙 끝나고 홍해 갔을 때도 모세한테 대들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가 없어서 공동묘지 만들려고 이 광야 벌판에 몰살시키려고 데려왔는가? 봐라. 들리지 않는가? 저 애굽 군사가 따라오는 것을.’ 그때 모세가 ‘가만 있어봐라.’ 여기서 가만있어 봐라는 강퍅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강퍅이 뭐라 했습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데 가만있어버리면 강퍅할 근거조차 없는 거죠.

그래서 복음 전하는 목사 강의하게 되면 만날 교인들이 ‘그럼 우리 보고 가만있으란 말입니까?’ 하는데 가만 안 있으면 뭐라도 꼼지락 한다니까요. 그게 be동사+~ing, 현재진행형이에요. 우리는 예수 믿지요. 매일같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꼼지락거립니다. 아무리 예수 믿고 해도 꼼지락거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양식이 되는 것은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긍휼을 입혀줄 때

고구마튀김은 우리는 그냥 고구마고, 튀김 되려면 튀기는 것은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께서 튀겨줘야 고구마 맛있다 하지 않습니다. 튀김 잘 됐다 하죠. 튀김을 먹을 때 튀김을 먹지, 그 안에 오징어냐, 낙지가 들어갔던 튀김을 먹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고구마일 뿐이고 튀기는 것은 주께서 튀기십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도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뭐라 합니까? 마귀가 너를 갖고 논다. 네가 만약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튀겼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너를 위해서 튀겼기 때문에 네가 구원받지 그렇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가룟 유다하고 열한 제자 차이점이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쪽은 주님께서 끝까지 긍휼로 사랑했기 때문이고 한쪽은 사랑 안 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튀김요리가 되지 못했고 열한 제자는 튀겼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이게 바로 긍휼이란 말이죠.

이 긍휼을 설명하기 위해서 강퍅의 도를 끝까지 올려줘야 됩니다. 개그콘서트 혹시 보신 분 계십니까? 다 돈 번다고 바빠서. 거기 보면 [별 볼 일 없는 밤]이란 코너가 있거든요. 코미디언 변기수가 여기서 사연 읽을 때 자기가 볼륨을 올립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라는 볼륨을 주께서는 계속 올리는데 강퍅의 끝까지 올립니다. 언제 강퍅이 무너지느냐 하면, 자기 자식 죽을 때, 왕자가 죽을 때, 바로 왕국의 맏아들이 죽을 때 바로 자기의 죽음이거든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엔 이삭 죽음이 자기 죽음이고. 자기가 죽을 때 강퍅이 끊어져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강퍅이란 것은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교회 가서 목사 설교 은혜 받은 것, 집에 가서 아이 숙제 안 해보세요. 팹니다. 은혜 받은 것 소용없습니다. ‘내 자식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 찬송가 가사 바꿔야 돼요. 그게 뭐냐? 유혹에 굴복하는 거예요. 내 자식이 유혹이에요. 내가 믿을만한 모든 게 유혹이에요. 유혹이 바람피우는 게 유혹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믿는 것, 입술로는 예수 믿는데 실제로 내가 뭔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뭔가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는 것, 뭔가 내 인생이 이렇게 풀렸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게 있는 한 강퍅은 되게 돼있고 그게 내 목숨을 부지하는 내부 공간이 되는 거예요. 그 내부 공간 때문에 주께서 그 내부 공간을 예수님의 자기 피로 페인트칠을 해요. 이것도 죄기 때문에 내가 피를 흘렸다. 이것도 죄기 때문에 아예 고구마튀김을 해줄게. 자기 피로 튀김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열 재앙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반복됩니다. 그 재앙 하나하나가 여기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포기하면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또 믿을만한 징검다리를 찾아서 이동합니다. 이동하면 그걸 또 쳐버려요. 그럼 또 이동해요. 또 쳐버립니다.

이번에 책이 나올 건데 [욥 안에 그리스도] 그 표지에 있는 단어, 제가 고른 게 아닙니다. 출판사 사장이 골랐는데 얼마나 은혜가 되든지. 표지에 있는 글이. 기억은 안 나는데 글자가 작아서 잘 안 보이는데 자세히 보세요. 욥에서는 강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강퍅하고자 하는 것은 전부다 다 쳤으니까. 자식 다 죽었지요, 재산 날렸지요, 마누라 도망갔지요. 심지어 사탄이 말하기를 ‘그래도 자기 몸 건강하기 때문에 하나님 믿습니다.’ ‘그러면 좋다. 몸 건강한 것 쳐봐라.’ 그것까지 쳐버리잖아요. 하여튼 믿을 구석이 없어요.

사실은 이렇게 믿을 구석이 없는 식으로 욥만 구원되는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튜브, 그 관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린 통과하고 있어요. 욥이 갔던 그 터널을 같이 통과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몸이 건강하고 종기도 안 나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욥보다 복음을 더 알기 때문에 그래요. 욥은 우왕좌왕했잖아요. 우리는 뭘 알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은혜인 줄을 지금 내가 살아있는 모든 환경이 사실은 주께서 주신 남들 보기엔 애굽적인 삶의 환경이지만 우리 보기엔 하나님 주신 삶의 환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하나가 말씀이 주신 은혜, 다른 말로 하나하나가 말씀인 것입니다. 돈을 오만 원짜리 할 때 이게 말씀인 것입니다. 남들은 돈으로 보이지만 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생각이라도 그리 하세요.

방금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강의한 중에서 제일 어려운 말로 하겠습니다. 제일 어려운 말로 할 테니까 그냥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역사 안에서 묵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게 묵시의 특징입니다. 역사 안에서의 묵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안 믿는 사람들이 흔히 믿는 사람들이 기적이라 하잖아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뭔데? 그거 평상시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어? 없어.’

소경이 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묵시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한테는 예수님께서 해준 은혜로 나타나오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이 은혜로 보이고, 성령이 임하지 않은 육적인 사람은 아무리 예수 십자가에 죽어도 그거 정치범이야. 김동리나 이문열 그거는 정치범이에요. 사람의 아들, 정치범이고 그 피가 우리 죄를 씻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래서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뭘 봅니까? 역사를 찾아요. 십자가를 안 믿습니다. 어떻게 꼬셨더니만 교회 왔고, 어떻게 말 했더니만 십일조 내더라. 그런 눈에 보이는 역사를 그들은 하나님의 일로 정돈을 해요.

그래서 역사에선 뭐냐? 역사에는 순서가 있고 정열 돼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순서고 역사의 정열을 그 중심은 뭐냐? ‘나’ 중심이죠. 그런데 묵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묵시에서 보면 모든 일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모든 일이 현재 새순교회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새순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느 일도 성경에서 찾아보면 다 들어 있어요.

‘너희가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구나.’라는 말이 성경에 있다면 이걸 새순교회 교인들이 만약에 진짜 믿는 자라면-믿기를 원하지만-새순교회 딱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네. 하는데 옆에 이상한 교회에서 와서 새순교회 참석해서 내가 보니 서경수 목사님 말이네. 사람의 말이네. 이렇게 돼버려요. 아무리 설득을 하고 우기고 해도 보는 귀가 다르고 보는 눈이 다르면 이게 역사의 증거로만 수집되지 지금 주님께서 일으키신 묵시의 일로 안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강퍅이 돼요. 이것은 그 당시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내부 환경이 바꿔지기 위해서 광야라는 것이 있습니다. 광야는 수요 설교에서도 했지만 발이 붕 떴어요. 땅 없이도 산 희한한 민족이에요. 왜냐하면 만나가 어디서 내려오느냐 하면, 하늘에서 내려오거든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땅에서 만약에 만나를 했다면 경작을 사람이 해야 되죠. 만나는 사람이 경작했다는 흔적이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만나의 성분을 분석해서 지금도 만나가 나온다 하는데 죄송합니다. 만나는 이미 끊어졌어요. 두 번 다시 만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먹어야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는데

그 만나가 왔었지요. 요한복음 6장에서. 그 만나가 누굽니까? 내가 바로 하늘에서 온 떡이라. 내 떡을 먹는 자는 산다. 무슨 수로 삽니까? 예수님 잡아놓고 바비큐 해서 뜯어먹을까요? 안 그러면 예수님 창 찔러서 사슴 빨대 꽂듯이 피 받아먹으면 삽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여서 살려주는 사람만 산다는 뜻이에요.

만나의 뜻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예상하지 못한 그러니까 애굽의 삶의 환경에서는 외부적인 투입된 양식이잖아요. 그 양식이 사람을 살렸다는 말은, 사람이 양식을 먹는 게 아니요. 팔보채, 짜장면 이런 것 먹는 게 아니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 양식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새로 만들어야 돼요. 그럼 하늘의 양식 같으면 사람도 무슨 양식 되겠습니까? 하늘이 양식이 만들어내는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예요.

기존에 사람들은 교회 와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돈 주옵소서’ 하는데 돈은 받아봐야 자본주의 사람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의 양식을 주옵소서’ 하면 돈 줘요. 그 돈 하나하나가 뭐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죠. 아까 다 잊어버렸죠. 이해합니다. 피곤할 때 됐는데. 지금 여러 단어가 쏟아졌기 때문에 연결이 매치가 잘 안 되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바로는 애굽을 대표해서 별 볼 일 없는 밤에 올리고 있죠. 강퍅을 올리죠. 강퍅을 올리고 있으면 덩달아서 애굽이나 히브리인이다 다 올라가요. 다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겸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요구야 겸손이지만 겸손 안 되니까 긍휼을 주죠. 긍휼을 주면 만약에 지금 우리가 월급을 받는다. 월급 하나하나가 긍휼이죠. 긍휼을 다른 뜻으로 하면, 불쌍히 여겨서 주는 동냥이죠.

세웅이가 직장생활해서 이거는 내가 하는 일이지 주의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불쌍히 여긴 거예요. 우리는 다 불쌍히 여겨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환경이 긍휼하심이 임하죠. 그게 바로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같은 열차에 동승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제 제 아내가 부산서 일 보고 4시 10분 KTX 탔는데 텅텅 비었어요. 민간인은 자기 혼자밖에 없어요. 뭔데 넓은 객실이 자기 혼자 덜렁 타고 민간인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앞뒤에서 시커먼 머리띠 띤 사람하고 시커먼 복장해서 휴대폰 갖고 이렇게 하는데, 대구 동네에 왔는데 30센티 앞에 키 좀 작고 얼굴 피부 좋은 사람 있어요. 아는 사람이라 보니. 이명박이에요. 제 아내가 ‘안녕하십니까?’

동승이라는 것은 환경이 달라요. 나 때문에 환경이 다른 게 아니고 계속해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대속하시는 계속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동승하다 보니까 우리는 나중에 하늘 쳐다보고 ‘안녕하십니까?’ 그때는 창자국과 손자국을 볼 것이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눈과 얼굴을 맞댈 것이요.

그때는 안녕하시든지 인사는 마음대로 하시는데 지금 계속해서 우리는 같은 열차에 타면서 동승하면서 내부 환경, 우리는 자꾸 ‘KTX도 별 것 없네’ 하지만 그 모든 KTX를 누굴 위해서 만들어낸 대절한 겁니까?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서. 지금 이 세상은 누구의 권세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 주심을 위하여 자기 백성 태우기 위한 그런 장치로서 짜여져 있는 완벽하고 빈틈없는 그런 기차가 구원열차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탄 히브리인들은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고 말이 동승했지 자갈치 시장 어물전 냄새 다 피우고, 기장의 미역 냄새 다 있고, 울산의 공단에 있던 화학냄새 그대로 붙어 있고 담배 피워서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다 대통령한테 걸리고. ‘이리와. 긍휼히 여겨줄게.’ 이런 거예요. 너, 누구 믿나? 주님 믿습니다. 그래도 담배피우나? 미안합니다. 이 세월이 계속 가는 것입니다.

아무렇게 해도 시간은 열차는 달린다. 아무리 우리가 게으름피워도 열차는. 이게 바로 진리가 주는 느긋함, 그걸 존재의 가벼움이라 하죠. 그런데 열차 안 타고 자기 혼자 걸어가 버렸어요. 존재의 무거움. 그래서 글을 쓸 때 무거워워워워~ 했어요. 절망.

8장 봅시다. 그 다음에 개구리. 피, 개구리는 삶의 환경을 절단 내려는 재앙이 아니고 삶이 약간 불편한, 생활하는데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재앙들을 주시겠죠. 주니까 히브리인이나 애굽인이나 다 귀찮아하는 거예요. 지팡이를 드니까 개구리가 계속 올라오죠.

8절에 목적이 뭡니까? 다같이 읽어봅시다. 8장 8절.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런데 본 백성들이 안 가려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지금 실무자까지 의논하는데, 지금 FTA입니까? 한국 대표팀하고 미국 대표팀하고 자동차, 관세 전부다 이야기 됐는데 농민들이 시위하는데. 어민들이 시위하는데. 아직 사고가 안 맞아. 밑에 백성들이 떠날 생각을 안 해요.

이게 바로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너희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예수의 마음 안 품습니다. 예수의 마음 품어버리면 떠나면 좋아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떠나기 싫어. 왜? 자식이 있기 때문에. 자식 공부, 결혼 시키고 보내야지. 자식이 있는 것도 긍휼을 입어서 있는 거니까 자식을 하나하나 행동을 보면서 바로 나도 똑같은 인간인데 저런 긍휼을 입었구나, 용서를 받았구나하는 것을 서로 보면서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럴 때 자식이 있는 것도 다 뜻이 있어요. 다 의미가 있다고.

정물화에 있는 꽃병 하나, 탁자 하나, 꽃 하나, 사과 몇 개도 그것 빼버리면 정물화가 안 되듯이 우리 집에 이런 자식이 있고, 이런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어떤 때 이혼하고 하여튼 여러 가지 일이 있더라도 그게 하나의 주님 주신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 주는 장치입니다.

욥에게 자식 날아가도 자기 몸이 아픈 것도 하나의 하나님이 함께 있는 동승한 ( ) 솔로몬은 돈이 많아서 어떻게 처치를 못했고, 그 앞에 예레미야 나오고, 그 다음에 에스겔 나오고 쭉 나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느긋함이 없어요. 하지만 신약 시대에 우리들은 예수님의 피로써 같이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느긋하죠.

여기 보면 떡반죽에 올라옵니다. 보내리라. 13절에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에서, 마당에서, 밭에서 나와서 죽은지라” 그러니까 15절에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이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그러니까 이미 내부 공간은 바깥에 있는 외부 공간마저 이미 모세가 침투했다는 말은 숨어있는 A 하나님, 진짜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조정 받고 있는 그런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히브리인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모르지요.

16절에 보면,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지팡이 이야기를 다시 한번 봅시다. 지팡이가 뭐냐? 문제 나갑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습니까? 지팡이한테 모세가 붙어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모세가 지팡이를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지팡이가 모세를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지팡이가 모세를 마음대로 하죠.

이 지팡이와 모세 관계는 상당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 내가 하나님 일을 한다 할 때 하나님이 일을 시키는 겁니까, 지가 하나님 일을 흔들어대는 겁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일을 시켜야죠. 그러면 우리가 지팡이를 쥐고 있으면 안 돼요. 만약에 우리 손에 지팡이 쥐고 있으면 우리는 던져서 엉뚱한 것 나옵니다. 주여, 그저 예쁜 여자 둘만. 지팡이를 던져서 여자가 되어 봐라.

마귀가 예수님 보고 저 돌이 뭐가 되게 하라? 떡이 되게 하라. 자꾸 마귀는 애굽의 내부 환경, 애굽의 삶의 환경을 그대로 고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너, 떡 없이는 못 살잖아. 이게 사는 거야. 인간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거야. 인간이 산다는 게 그거야.’ 자꾸 기존의 환경을 유지하죠. 주님의 지팡이는 떡 만드는데 쓰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축사하실 때 떡을 뗄 때 그 인간들에 내부 환경을 줬을 때 사람들은 그 내부 환경이 좋아서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애굽으로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너희들이 날 쫓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해서 그걸 역사세계를 거부하고 묵시세계를 드러내죠.

그러니까 여기서 지팡이라 하는 것은, 지팡이를 그려봅시다. 지팡이 끝은 어디에 연결돼있습니까? 묵시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 바깥에 묵시와 연결된 여기서 지시가 내려오죠. 모세는 지시된 대로 입을 벌려서 이야기할 뿐이에요. 그러면 지팡이를 던진다는 말은, ‘이건 내 쪽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나도 거기에 종속돼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팡이로 실수한 적이 딱 한번 있습니다. 반석을 가리키라 했는데 반석을 쳤습니다. 아마 지팡이 끝이 뾰족했던 모양이라. 치면 더 잘 파일 것 같은 모양이죠. 그 순간은 뭡니까? 자기가 지팡이를 가지고 논 거예요. 자기가 지팡이를 지시한 거예요. 그래서 모세는 약속의 땅 구경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했어요. 결국 모세조차도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예수님의 긍휼이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존재였단 말이죠.

17절에 보니까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르니” 올랐을 때 18절에 보면,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하였으나 못하였고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 있은지라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드디어 여기서부터 네 번째 재앙 파리부터 해서 이제는 21절에 보면,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그때부터 파리라는 것이 누구 말을 듣습니까? 사람 말 듣진 않지요. ‘파리야 제발 가줘.’라고 빈다고 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할 것 같으면 에프킬라 필요 있습니까? 기도하면 되죠. 근데 그 당시의 파리는 바로 자연세계, 외부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머물러야 될 것과 머무르지 않을 것이 있지요.

그러면 결국 대자연은 무슨 용도로 존재하는 겁니까? 성도와 비성도를 구분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아직도 지금 버티고 있고 유지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10분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대자연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성도와 성도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를 건널 때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 풍랑이 누구 말 들었습니까? 예수님의 말 들었지요. ‘잠잠하라’ 하니까 잠잠했잖아요. 왜 풍랑이 그래야 됩니까? 예수님 패와 예수님 없는 쪽을 구분하기 위해서 풍랑이 일었지요. 너희는 이제부터 나를 믿는 자가 되라고 하잖아요.

이걸 가지고, ‘목사님 대자연은 지금도 일합니까?’ 일하지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니까. 그런데 그걸 대자연으로 일한다 하면 안 되고, 신약이니까 대자연을 움직이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야 돼요.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됩니다. 이 말 어렵지요. 말씀대로 되어서 성도와 비성도를 나눈다는 말과 대자연을 가지고 나눈다 하면, 만약에 대자연이란 말을 거기다 집어넣으면 사람들이 그 다음부터 말씀을 안 보고 무엇으로 확인하느냐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기적이 일어나나 그것 확인해서 자기가 신자 맞나, 안 맞나 확인하려 해요.

그거는 구약 때도 안 통하는 겁니다. 그거는 유대인들이 할례 행했다고 자기 나라 안 망한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아요. 할례를 행했는데 왜 망하지? 골리앗 시대에 이상한 게 뭐였습니까? 할례 받지 않은 골리앗이 할례 받은 이스라엘 사울 군대를 압박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다윗이 뭐라 했습니까? ‘어떻게 할례 받지 못한 인간이 할례 받은 인간을 해하냐?’ 하고 물리쳤잖아요. 사람들이 다윗, 네가 했다. 하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내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꾸 성경 말씀은 생각 안 하고 자기 눈으로 기적으로 더듬어서 확인하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가 커진다든지 교인수가 많아지면 축복이고, 교인수가 적어지고 자꾸 나가면 저주고. 자꾸 말씀은 안 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한다 말이죠. 그게 바로 내부 환경이 아직도 안 바뀌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광야에서 분명히 물이 없고 떡이 없더라도 하나님 백성이 함께 있으면 옛날 열 가지 재앙도 침범하지 못한 그 백성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광야에서 죽이겠습니까? 안 죽이죠. 그런 믿음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시험을 해서 그들을 몽땅 다 죽이잖아요.

그 다음에 25절 봅시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왜 애굽 땅에서 희생을 드리면 안 되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 여호와 섬기면 되는데 왜 안 되느냐 하면, 모세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서 내려온 원칙이 뭐냐? 약속이고 약속의 일곱 가지 색깔이 언약이죠. 아브라함 언약 중에 네가 반드시 사 대만에 사람들 키워서 나라 만들어서 빠져나와서 그 다음에 열 족속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리라 약속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지점에서 찬양해야 돼요. 이것 중요하다.

하나님의 찬양과 감사는 감사 찬양하면 점차점차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 찬양과 감사는 하나의 오기가 되어서 하면 안 돼요. 찬양과 감사는 언제냐? 이미 다 이루었음, 복음이 주는 느긋함, 앞으로 어떤 사태가 있더라도 이 완료가 미완료 되는 법은 없음 거기에서 오는 느긋함이 찬양이 되는 겁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미 구원받았군요. 나는 오류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오류 없이 구원했군요. 이 느긋함. 그럴 때 찬양하지 말래도 찬양이 나오고 감사하지 말래도 감사가 온 아우라, 후광처럼 감사가 온 몸에 차고 넘칩니다.

‘아빠, 수학 못했어.’ ‘괜찮아, 괜찮아.’ 아우라가 넘쳐. ‘여보, 나 사표 냈어요.’ ‘괜찮다고.’ 아우라가 넘쳐, 후광이 넘쳐요. 그 느긋함에서 바로 진정한 제사가 되죠. 그게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가서 주의 이름으로 제사를 드릴 때 그 약속의 땅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땅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 성전을 세우고 그 성전은 나중에 하늘나라로 올라가죠. 묵시세계니까.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다음에 8장 31절.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서 몰수히 떠나게 하시니라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9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러분 공부했는지 물어봅시다. 이렇게 파리가 왔고, 독종이 있었고, 생축에 이들이 있었고, 개구리가 올라왔고, 하수가 피가 됐는데 여기에 대해서 애굽 사람들은 뭐라고 비평합니까? 거기서 뭐라고 평가합니까? 이런 사건에 대해서. 두 자로? 그냥 우연이죠. 세상은 전부다 우연이니까. 해프닝하는 뜻이 우연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그들이 똑같은 일을 당해서 그걸 묵시로 보지 않고, ‘그런 일은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 십자가 죽으심을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그 피가 어떻게 용서해? 사람 십자가에 죽은 게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 없다]는 책에 보면 예수님 이전에 십자가 달린 일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전에 있던 디오니소스 축제에 대한 카피라고 보는 겁니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 보면 나와요. 어떤 남자가 십자가 달린 년도로 봐서 그 전이기 때문에 예수 십자가는 옛날에 있던 폼이다. 이래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분명히 했어요. 이것 하고 진짜 마치겠습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하늘의 예정된 비밀을 몰라요. 그러니까 비밀을 안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이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할 수 있도록 너희들이 날 위해서 기도해 달라. 그리스도의 비밀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usb에요. 컴퓨터 정보 옮기는 조그만 부품, 우리는 예수님의 비밀 덩어리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내부 공간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십자가 있는 내부 공간. 우리는 이런 긍휼을 입어서 하나님 먹는 양식으로써 지금 우리는 분리된 채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음달에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열 가지 재앙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들은 우연이라 보고 남들은 그저 그런 일로 보지만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인 것을 저희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날마다 용서해주시는 이 은혜를 십자가를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날마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1204b 울산강의.hwp (55.0K), Down: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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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