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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11. 27) 2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09. 11. 27)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11. 27) 1-2

에스겔 1장 26절에 보면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그러니까 이 사람, 소, 사자, 독수리 집결체가 어디에 지시를 받는가 하면, 보좌의 지시를 받는데, 보좌에 어떤 사람 같은 분이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대기 상태지요. 천사가 일을 하면 그 천사가 한 일을 마무리해야 될 분은 직접 사람이 오셔서 그 일을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한다는 것이 신의 속성입니까, 사람의 속성입니까?’ 사람의 속성입니다. 신은 부활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어느 차원까지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사람과 같이 되어버렸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을 가지고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해서 부활을 열매의 수준으로 집어넣습니다. 첫 번째 열매가 있다 그 다음 계속 그 열매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열매에 해당되는 사람은 신이 아니고 우리 성도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했다는 말은 사람으로 오시는데 어떤 사람이냐? 사람은 사람인데 하늘나라에 소속된 사람. 하늘나라에 속한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일은 사람, 소, 사자, 독수리 같은 기능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된다고 에스겔에 나와 있고, 그러면 그 일은 어떠한 힘으로 할 수 있느냐? 어떤 힘을 발휘하면서 바깥으로 그것을 드러내면서 일하시는가? 그것이 27절에 나옵니다.

27-28절에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이 지금 누구한테 일임되어서 이 땅에 내려옵니까? 사람 같은 형상을 가진 분에 의해서 그런 형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면서 어떤 일을 한다? 사람, 사자, 소, 독수리 같은 기능을 하시면서 장차 에스겔이 예언한 이 모든 것을 이 지상에 이루게 되면 이제는 복음도 드러나고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가 된다는 이야기를 먼저 배경에 까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이 전체를 두 자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이 바로 ‘구조’ 다섯 자로 이야기하면 ‘상황의 구조’입니다. 새로운 상황의 구조. “야, 어떤 상황이다.” 이것만 하면 안 돼요. “이 상황이 무슨 구조에 짜여서 우리에게 닥쳤느냐?” 그것은 에스겔 1장을 보라. 거기에 이미 구조는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풀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쇠, 불, 광채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거죠. 쇠, 불, 광채는 예수님께서 일 하실 때 또는 천사가 일할 때 바깥에서 느껴지는 것이 쇠 같고 불같으며 광채로 외부에 발산되는 것입니다.

‘파울 클레’라는 작가의 [신천사]라는 작품이 있어요. 그 사람이 그린 천사의 모습을 보게 되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파편이 되어 조각조각이 나고 천사는 앞을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옆에 달려서 사방을 다 보면서 천사처럼 서있는 그림이거든요.

쇠, 불이 하는 일이 뭐겠어요? 세상을 아예 전부다 이한 낫(예리한 낫)으로 쪼개는 것이지요. 이러한 기능이 바로 사람, 소, 사자, 독수리 같은 완벽성을 가지고 쪼개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주석가들은 사람, 소, 사자, 독수리를 어디다 적용시키는가 하면, 신약의 4복음서에 적용하는데 마태는 사람, 마가는 소, 누가는 사자, 요한은 독수리로 주장했어요. 그러면 이런 주장이 근거가 있는가? 없습니다.

이것이 사복음서와 관계가 없다면 무엇과 관계있는가? 이 에스겔과 예수님 사이의 중간 단계에 선지자 한 분이 등장합니다. 다니엘 선지자가 등장하는데 이 다니엘 선지자가 보여주는 계시에 보면, 아까 계시에 대해서 말씀 드렸는데 잊어버렸을까봐 다시 말씀드립니다. 계시라는 것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다가오지요. 그런데 이 계시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드러내는 그러한 사건으로 온다고 했지요.

우리의 죄가 뭡니까? 자기를 건전하게 봐서 건전한 인간이 신을 믿고 신의 계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건전하다고 여기는 이것을 죄라고 규정해서 그것을 지적하는 그런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사건의 특징이라고 했지요.

다니엘에 보면 이 계시 속에 뭐가 등장하는가 하면, 짐승이 등장해요. 이 짐승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세상을 무섭게 쪼개고, 부수고, 전쟁을 일으키고, 다 집어삼키는 그런 기능을 합니다. 결국은 사람, 소, 사자, 독수리 이런 짐승들이 다니엘서는 세상에 있는 소위 전쟁을 좋아하는 그러한 국가들로 봤는데 이것을 한꺼번에 보게 되면 이들의 기능은 떠받는, 공격 성향이 있어요.

그러니까 천사가 네 가지 면을 가지고 일하는데, 마치 날카롭게 돌아가는 전기톱처럼 돌아가면, 혹은 믹스기가 돌아가듯 돌아가는데 그 날이 한 개가 아니고 네 개의 날이 윙하고 돌아간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그 구조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은 파쇄가 돼요. 완전히 조각을 내서 아예 액체로 만들어 버리지요. 그런 파쇄의 기능을 천사가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도 역시 이 천사(혹은 짐승)와 같은 기능을 해야 되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부수는 그런 기능으로 대결해야 되는 거예요. 사실은 그 짐승이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이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숴버린다는 이것이 지금부터 제가 강의할 것은 두 가지로 강의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목사님 말대로 그러면 천사의 기능은 하나의 상황의 구조에 맞춰서 세상을 부수는 기능이라면 첫 번째, 그 당시(에스겔 때)에는 무엇을 부쉈고, 오늘날 이 시대에는 무엇을 부숩니까? 라는 이 두 가지의 내용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천사가 왔다고 할 때 흔히 생각하기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나 성냥팔이 소녀나 파트라슈(프란다스의 개)를 생각하는데, 천사라는 것이 그냥 ‘곱다, 아름답다, 선하다, 훌륭하다.’ 이런 개념이잖아요. 이것을 진짜 천사가 다 부숴버립니다.

천사는 ‘못댔다, 나쁘다, 독하다.’ 유격 조교처럼 유통성이 전혀 없고 시킨 대로만 하고, 그리고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그래서 천사와 성도가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보면 천사가 상당히 무뚝뚝해요. 천사가 소돔에 왔을 때 롯이 나그네인줄 알고 영접하려고 “종의 집으로 들어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라고 했을 때 천사는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게 경야하리라(창19:2).”

스가랴에 보면 천사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사방에 나가서 전 세계를 파괴하는데, 이것이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전 세계의 모든 것을 다 부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사를 잘못 이해하면 큰일 납니다. 만약 천사가 우리 집에 와서 TV를 부수려고 하는데, 내가 TV를 부둥켜안고 ‘천사님, 제발 이것만은 남겨두세요.’ 하다가는 우리 손목이 날아갑니다. 천사는 기계 같아요. 하나님이 시킨 대로해요. 그렇기 때문에 천사에게 사정할 필요 없어요.

출애굽 할 때의 유월절 날 천사가 와서 뭘 했습니까? 집집마다 찾아가서 장자를 다 죽이잖아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가 뭔 줄 아십니까? 여러분들 모독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십자가가 뭔 줄 알려면 자기 아들 죽으면 십자가를 압니다. 유월절의 기쁨이 뭐냐를 보면, 옆집에 공부 1등하는 칭찬 듣는 아이가 갑자기 밤에 자다가 죽었을 때, 공부도 못하고 말썽꾸러기인 우리 아이는 자기 방에서 잘 자고 있을 때 그것이 유월절의 기쁨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천사나 하나님은 어느 상황의 구조냐 하면, 죽음으로 둘러 싼 상황의 구조를 만들어 내죠. 그러면 네 가지 형상의 복합체 천사가 믹스기 돌리듯이 윙 돌리면 거기에서 죽음의 힘이 나오지요.

천사가 와서 바울에게 ‘로마로 가라.’ 이 말은 ‘로마에 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너는 죽더라도 로마에 가서 죽어라.’는 것입니다. 천사의 특징은 죽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죽음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그 죽음을 같이 받아들이면 우리는 예수님의 피 공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새록새록 다시 한 번 감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만약에 들어오셨다, 천사가 들어왔다 하면 그 가정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더욱더 감격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어떻게 해서? 나는 이미 죽은 자이구나를 깨닫게 합니다.

아까 공식이 뭡니까? 죄 있는 자는 죄책감을 갖지 말라. 이미 죽은 자에게는 마음대로 삽니다. 그런데 안 죽은 사람들은 억지로 살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돈 버는 것이 우선이지만, 이미 죽었던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이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왜? 이미 죽었으니까.

방금 제가 ‘이미 죽었으니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이미 살았으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는데, 어느 쪽이 더 은혜롭습니까? 이미 죽었기 때문에 건드려봐야 의미 없잖아요.

사람이 언제 자기가 살았다고 느끼는가 하면, 컴퓨터 게임할 때. “네가 날 무시해. 이게 날 이기려고 해?” 이건 살아 있는 거고, 진짜 죽은 사람은 “그래, 컴퓨터 고스톱 해서 네가 돈 다 따가라.” 이렇게 줘버리는 것. 인생이란 게임 자체가 허망한 것을 알고 거기에 대해서 별 의미를 두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아까 집사님과 함께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 사려고 가는데 못 찾아서 빠리바게뜨에 가서 케익 사자고 했거든요. 빠리바게뜨에서 케익 사는 것과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 사는 것이 천사 보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의미 없어요. 왜? 이미 죽었으니까.

이미 죽었다는 자체가 새로운 상황의 구조 안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1장의 천사 이야기는 결국 두 자로 하면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아!” ‘예’ “너 죽었다.” ‘우리 안 죽었는데요?’ “그렇다면 죽여줄게.” 이게 에스겔 전체 내용입니다.

자기가 살았다고 여겨 우리 힘으로 성전 지키고, 우리 힘으로 제사 드리며 선하게 살면 이스라엘은 이방에 잡히지 않고 잘 살수 있다는 것이 에스겔 당시 백성들의 생각이라면, 에스겔은 ‘잡혀가자. 고마워하면서. 성신이 성전에서 떠났어.’

성전이 깨졌으니까 그동안 성전을 유지했던 성신은 빠져나와야지요. 빠져나와서 바벨론에 포로 잡힌 그들과 동행함으로 건물 성전 시대가 끝나고 사람(하나님 백성)이 곧 성전이 되는 시대. 인격체가 성전이 되는 그런 시대가 에스겔에 나옵니다. ‘그 성전에 가있으면 내가 다윗을 보내서 너로 하여금 다시 이 모든 것을 회복하게 해줄게.’ 라는 것이 에스겔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점을 에스겔은 조금 아는데(사실은 에스겔 본인도 잘 몰라요) 백성들이 알 리가 있습니까. 여기서 인자되는 에스겔은 백성들한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점을 한번 봅시다.

3장 3절에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인자’라는 용어는 상황의 구조에서 죄인을 지칭할 때 ‘인자’라고 부릅니다. 상황의 구조에서, 하나님의 묵시적인 구조에서 이 지상에 있는 사람(죄인)을 볼 때 ‘인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인자로 올 때는 이미 그 안에 죄인들의 육신의 죄를 이미 가득 담고 있으면서 아버지의 계시대로, 아버지의 계시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져야 하는 그분이 누구다? ‘인자’가 되는 거예요.

아까 강의했는데, 누가 움직인다고 했어요? 에스겔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에스겔에게 찾아온 성신이 움직이니까 에스겔은 따라서 움직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이 모든 것이 성령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자, 그러면 성도가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성도의 육체는 무엇의 운반체입니까? 성령 운반체가 되는 거예요.

주일 아침 11시까지 성경책 들고 교회 가면서 ‘나는 신자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신이 되는 거지요.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성경은 뭘 모독합니까? 교회를 모독해요. 그러면 성경은 뭘 이야기합니까?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 육이 영으로 바뀐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10장 20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일이란 사람 자체를 교회 되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 오지마시고 본인이 교회 되면 돼요. 그리고 모이기에 힘쓰고.

성령을 운반하는 운반체를 만드는데 그것은 신약 시대고, 그 준비단계가 지금 우리가 하는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에서 어떻게 육적인 인간이 신약에서 영적인 인간, 어떻게 성령께서 성전이라는 건물에 계시다가 어떻게 사람 속으로 들어왔느냐? 이 문제를 에스겔에서 다루는 겁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아까 믹스기의 파쇄기능처럼 살아있다고 여기는 육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움직인다? 이렇게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수는 그 작업이 뭐냐? 움직임이 개시된 거죠.

대전 강의에서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애가 학교가야 되는데 몇 번을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팔을 잡고 침대에서 끌어내려야지요. 이것은 사랑의 구조 속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할 때 이것은 사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 취급하듯이 질질 끌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면 너는 내 자식 아니고 이미 죽은 자식이다.” 이런 식으로 잡아당길 때, 이것이 무슨 구조냐 하면, 이미 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노선에 포함시킨 거예요.

“아이고, 너 마음대로 해라. 자든지 말든지.” 이렇게 되면 뭡니까? 관계가 끊어진 거죠.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파쇄해서 가나안 땅에서 바벨론 땅으로 질질 끌고 간다는 자체가, 그리고 다시 그 땅에서 본토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는 이 노선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의 구조란 말이지요.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누구한테 불평합니까? 에스겔에게 불평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자는 졸지에 고난 받는 인자가 돼요. 그게 에스겔 3장에 나와요. 3절에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이것을 먹으면 ‘입에는 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속에 들어가면 쓰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나옵니다.

이것이 성도의 운명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성도 본인의 구원을 위해서 성도된 것이 아니고 에스겔 같은 인자가 되기 위해서 구원이 된 것처럼 비로소 성도가 하는 말은 자기 말이 아니고 자기 속에서 성령이 하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하는 말과 내 말의 차이점은 뭔가? 인자되신 예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성령이 하는 것이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은 내 말이고 이렇게 구분이 되지요. 성령이 말하는 것은 하루 중 1~2초 정도, 그리고 그 나머지 시간은 전부 내가 말하지요. 그래도 여전히 성도는 성도입니다. 그 짧은 1~2초라는 시간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앞에 우선되는 것이 있어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고 했는데, 그 앞에 뭐가 붙어요. ‘아버지의 뜻대로’지요. 결국 이 말은 우리를 사람취급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그릇, 쇼핑 백 취급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성령께서 어디에 담긴다는 말입니까? 내 욕구와 욕망과 충동에 따라 생리적으로 움직이는 그것을 쇼핑백으로 삼고 거기다가 성령의 뜻을 담아버리죠.

이렇게 되면 누가 죽을 지경입니까? 내가 죽을 지경입니다. 왜? 우리의 근성과 다르니까. 예수님의 근성이 우리 근성과 다르거든요. 우리는 보이는 것이 소망이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이 소망이고. 그래서 남들은 모르지만 이 쇼핑백 안에서(우리 내부에서) 항상 전쟁이 벌어져서 싸우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도 안 이뤄주십니까?” 하면, 하나님은 “너, 까불래?” 하면서 쥐어박아요. 다른 사람은 조용한데 자기는 매일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육과 영의 싸움이 계속 벌어지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얼마나 고맙습니까? 성령이 우리 마음대로 못하게 만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우리도 만만치 않지요. 고마운 줄 모르고 또 우리 육이 성령의 하는 일을 방해하지요. 이렇게 대들다가 또 얻어맞고. 이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이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이것은 우리한테 나올 수 없는 거예요. 사람의 모든 행동은 자기 유익을 먼저 챙기는데, 성도한테는 뭔가 (주먹이)날아와서 또 네 유익을 먼저 챙겼다고 얻어맞을 때, ‘주여 감사합니다.’ 하고는 3초 지나면 다시 반발이 나오고. 만날 이런 식입니다.

자, 인자 안에는 쇼핑백인데, 쇼핑백이 뭐다? 백성의 죄다. 인자 안에 뭐가 담깁니까? 두루마리, 말씀이 담깁니다. 말씀이 담긴 이것이 마태복음 10장 20절처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것을 먼저 앞당겨서 에스겔 시대에 보여준 거예요.

말씀은 아까 에스겔 1장에서 파쇄 기능이 있다고 했지요. 이미 하늘의 뜻 이게 들어오면, 말씀이 들어오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점잖다고 합시다. 점잖은 인간도 말씀이 들어오면 죄짓게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자는 말을 제가 하고 싶어요. 오딧세이 거기에 보면 사이렌이라는 아주 요상한 여자 요정이 나와요. 그건 뭐냐 하면, 사이렌은 강의 언덕에 배만 지나가면 희한한 노래를 불러서 그 선원들의 애간장을 다 녹여요. 그래서 “이 음악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소리이지?” 하고 따라 가다보면 암초에 걸려서 배가 파선되어 사람들은 다 죽고. 그러면 사이렌은 “호호호” 웃음소리를 내면서 사라져 버리지요.

그런데 그걸 통과해야 되는 거예요. 주인공이 이것을 어떻게 통과하는가 하면, 선원들의 두 손을 묶어 놓았어요.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렇게 해서 그 지역을 통과하는데 사이렌이 소리를 울리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들으니까 너무 좋아서 묶인 손을 풀어달라고 해요. 이것이 유혹이지요. 인간은 유혹을 이겨낼 때 비로소 승리한다는 영웅 신화입니다. 그 다음에는 초를 녹여서 선원들의 귀를 막아요. 아무 소리도 못 들도록.

그런데 진짜 유혹을 받으면 유혹을 이기고 싶은 것이 아니고 유혹에 젖어보고 싶은 게 인간의 타고난 생리입니다. 만약에 유혹에 안 젖으면 두고두고 후회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리 그 유혹이 떠나도 그 사람은 이미 그 때 그 시대의 유혹의 종이 되어서 다시 그 경험을 하고 싶은 거예요. 다른 아무 일이 되지를 않아요. 그게 오늘날 소비주의예요.

베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이 있다면 ‘나는 그딴 것, 몸에 해로운 것은 안 먹어.’ 하고 돌아섰어요. 가게를 30미터 벗어나고 50미터 벗어나서도 마음에서 싸움이 계속 일어나요. ‘나는 아이스크림 안 먹어. 안 먹을 거야.’ 그냥 잊어버리면 되는데 계속 ‘안 먹어. 안 먹어.’ 왜 계속 이야기합니까? 이게 먹고 싶다는 말입니다. 이미 유혹의 사이렌이 울렸어.

이런 유혹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힘이 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유혹거리를 만들어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이렌 소리를 늘 들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아무도 거기에서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불가능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예 죄인이에요. 오는 유혹 막지 말고, 가는 유혹 잡지 말자. 이 유혹을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율법을 가지고. 저질의 유혹은 저질스럽지만, 바리새인들이 당했던 유혹은 고상한 유혹인데 ‘네가 말씀을 지키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런 유혹에 다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압니까?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 간다.’

이런 유혹을 주시는 것은 어느 인간도 자력으로 유혹을 이겨서 천국 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으로 주시는 겁니다.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율법이 오게 되면, 점잖은 나도 갑자기 유혹에 환장하는 인간으로 바뀌어요. 그 유혹은 두 가지라고 했는데, 하나는 저질스런 유혹도 있지만 또 하나는 고상한 유혹인데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처럼 완벽한 신자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2).” 이런 유혹을 우리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속을 묶지 마세요. 묶으나 안 묶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냥 버려두시면 여러분 속에 성령이 오게 됩니다. 성령이 와서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너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파쇄하지요. 십자가 안에 믹스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루로 만들어요. 그래서 아예 내 것이 없도록 액체로 만들어버립니다.

나이가 들어서 중풍 걸리고 치매에 걸리면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는 내 몸이 귀찮아요. 내 신체(쓰레기) 누가 좀 빨리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해요. 젊은 때는 흰 머리카락 있다고 뽑지요. 나중에 많이 희어지면 그것을 따 뽑을 수도 없고 아예 목을 뽑아야 돼요. 이 지경이 되면 비로소 말씀이 실감 납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아, 나는 흙이구나.’ 흙이 하늘나라 형상인척 했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본인이 힘들었겠어요? 흙이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냥 부서지면 돼요. 그런데 인간의 생리적인 것은 세포가 활동하니까 움직이죠. 움직이면 자기 입맛에 맞는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그러다가 나이 들면 또 바뀌고 --

어쨌든 에스겔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유혹을 하나님 쪽에서 이미 우리에게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율법이죠. 유혹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혹자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사단으로 보지요. 그런데 사단의 본질은 뭡니까? 사단은 원래 천사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고 싶어요. 그런데 여기에 율법이 오게 되면, 다시 말해서 사단에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죄인이 되잖아요. 죄인 되니까 이 자체가, 아까 침대에 누워있는 농땡이 아들을 질질 끌어내는 하나님의 사랑의 노선이 개시가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겁니다. 왜? 나는 죄인임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사람의 행복은 뭐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것. 이 순간 이미 종결되었어요. 더 높은 차원의 수양은 없어요. ‘나는 죄인이잖아. 죄인이면서 죄인 아니 것처럼 위선 떨고. 내가 왜 이렇게 교만해!’ 이게 최고의 경지입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아는 것.

쓸데없이 죄책감을 갖고 하는데, 죄인이 죄책감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까? 지가 잘났으면 잘못을 행할 때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죄책감을 갖겠지만, 원래 죄인인데 뭘 죄책감을 가져요. 못난 놈이 자꾸 자기 못났다고 하면 잘난 척 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파쇄 시켜서 ‘너는 죄인이니까 네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상황의 구조가 움직여서 계속해서 구원이라는 구조 안에 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식으로 우리 인생을 몰고 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디서 뭘 하든지, 어떻게 살았던지 ‘나는 죄인 맞구나!’

그러면 현재 있는 모든 것은 뭐가 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은혜는 선물로 이어지고, 선물은 뭐든지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 안 듣는 큰 딸도 감사, 말 잘 듣는 둘째 딸도 감사입니다. 이름만 은혜로 부르지 말고 진짜 선물로 봐야 돼요.

신혼부부가 결혼하게 된 것도 감사. 혹자들은 이야기하지요. 2개월 살다가 헤어질 것이라고. 2개월 살다가 헤어져도 감사. 만약 도저히 살기 힘든데도 버틴다면, 갑자기 의인이 되지요. “봐라, 나는 2개월 넘게 버텼잖아!” 이러지 말고, 그냥 하루하루 감사하면 내일 염려는 내일 가서 하면 되고, 내일 되면 또 그날분의 선물이 와요.

모든 것이 감사가 될 때 마귀는 패배합니다. 아무리 쑤셔도 죄인이라고 하니까 건드릴 것이 없지요. 의인인 척해야 ‘착할 수 있어. 열심히 하면 될 수 있어. 기도해봐. 뭔가 될 거야.’ 이렇게 유혹을 할 수 있는데, ‘나는 죄인이야. 의인 될 수 없어!’ 이렇게 나오니까 유혹할 게 없어요.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해도 그 소리보다는 현재의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는데 소리 따라 끌려갈 이유가 없지요. ‘나는 참아야 한다. 유혹의 소리를 이겨야 한다.’ 이러면 유혹이 되는데.

이제 2장을 봅시다.

3절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여기에서 인자를 어디다 보냅니까? 패역한 백성에게 보내지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옵니까? 죄짓고 있으면서도 본인들이 죄인인줄 모르는 그런 패역한 자들에게 인자되시는 예수님을 보낸다는 말입니다.

4절 봅시다.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불가능성입니다. 화평교회 목사 누가 와도 화평교회 교인들은 얼굴이 뻔뻔하고 --. 마찬가지에요. 우리교회도 마찬가지고. 누가 와도 이것은 불가능성이에요. 안 돼요.

안 되는데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닙니다. 서로가 불가능성이에요. 그 불가능성 속에 있어야 “네가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네 속에 계시는 성령이다.” ‘지금도 불가능한 너희를 가능케 하시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인함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기 행함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 인자의 공로, 희생. 이것이 마지막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후의 선물로써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은 이미 구원 받은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렇게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말씀으로 만나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 병석에 누워서 이 모임에 참석하고 싶어도 참석하지 못한 집사님도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성령이 함께하셔서 어느 곳에 있든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12. 4. 17:1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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