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12월 4일 출7장 피의 환경(양식)이 만들어 내는 피의 먹이가 된 피사람 vs 뱀후손(자아)
울산 12월 4일 출7장 피의 환경(양식)이 만들어 내는 피의 먹이가 된 피사람 vs 뱀후손(자아)
이름 : 관리자(IP:124.59.86.6)
091204 날 때부터 강퍅(교만)인간
_________vs 처음부터 긍휼(주체 빼앗긴)의 피인간
관리자(IP:124.♡.86.6)
09-12-0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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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41.193)
09-12-13 10:40
울산091204a출7장8절a
20091204a 울산강의-출애굽기 7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출애굽기 7장 8절부터 보면, 7장 9절에 등장인물이 나오죠. 바로 나오고, 모세, 아론 나오는데 모세와 아론은 같은 편이니까 바로와 모세 두 패로 나눠졌습니다.
구원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그냥 하나님이 지시하면 우리가 거기에 응답하면 구원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성경에서 구원은 여기에 패가 있어야 돼요. 무슨 패냐 하면, 출애굽 식으로 해보면 모세 패가 있어야 되고, 바로 패가 있어야 됩니다. 이게 기존의 모든 종교하고 차이가 나죠. 하나님께서 날 인정해라. 내가 존재한다. 존재하시니까 인정하나? 인정하고말고요. 구원되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문제 될 게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응답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 중간에 모세와 바로가 있다 이 말이죠. 흔히 기독교에서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이 있고, 우리 있는데 우리가 우리 힘으로 못 가니까 예수란 분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굉장히 쉽지요. 예수님을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여기도 문제 있어요.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들어갈 때 예수님이 우리를 받아줘서 들어가느냐,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우리가 들어가는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께 나가는데 우리가 나가느냐? 아니면 일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지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나가느냐? 두 가지 방식 중에 어느 것이 성경적이냐? 둘 중에 어느 쪽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내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청와대 경호단하고 만나야 되잖아요. 그럼 경호원 만나면 안에 있는 흉기라든지 신분증 맡겨놓고, 들어가 보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대통령 만나고 올게요. 일단은 우리의 권총이라든지 칼 같은 위험한 것은 맡겨놓고 신분증 달고 그 다음에 우리는 직접 대통령 만나면 되잖아요. 그렇게 들어가는 겁니까? 아니면 이분이 우리를 데리고 가야 대통령 만나는 겁니까? 어느 쪽이에요?
세례 줄 때 저는 이 점을 물어요. 본인이 예수를 믿어서 예수 믿었다는 도장 받아서 내가 들어가느냐? 아니면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는 제쳐두고 예수님이 우리 대신 들어가느냐 그 문제입니다. 어느 쪽에 믿음에 해당되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믿고 우리가 예수 믿었다는 걸 가지고 우리가 들어가 버리면 그 믿었다는 것도 우리의 행함에 해당되죠. 여러 가지 행한 것 중에서 예수 믿는 것도 행해서 그것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데려간다면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뭘 포기해야 됩니까? 나를 포기를 해야 되죠. 내 이름을 포기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정답을 내린다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서 죽은 자로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제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께 나간다. 이걸 저는 정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구약으로 가보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같이 나란히 가든지 하면 될 텐데 왜 우리의 모든 것을 죽이고 압수를 해야 되느냐? 모든 것을 다 빼앗고 우리의 가진 것을 다 하고 우리를 제쳐두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갈 수밖에 없느냐 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하고 노선이 달라요.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은, ‘하나님,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옵소서.’ 하는 엉뚱한 별자리를 하나님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여기부터 강의가 어려워집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으로써 하나님의 이름만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나타난 분이 바로 모세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시답지 않게 여기고 모세는 따로 하나님을 하고.
그런데 모세가 직접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생각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없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를 생각한다면 모세를 데리고 진짜 하나님을 A라 하고 가짜 하나님을 B라 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데리고 자꾸 A로 가지 않고 B 쪽으로 가자는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쪽으로.
여기서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께 나가자 한다면 마찬가지로 진짜 하나님하고 가짜 하나님, 우상의 하나님하고 있으면, 예수를 믿어서 A 하나님으로 가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어서 B 하나님으로 자꾸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걸 아시고 A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B 하나님 쪽으로 가는 인간을 항상 죽여 버려야 돼요. 이걸 죽여줘야, 이게 왜 죄라고 규정해줘야 ‘내가 전에 알던 하나님하고 예수님은 서로 맞지 않는 거구나.’ 하는 거예요. 그러면 모세 짝은 누가 하느냐? 이스라엘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대표자 되는 바로하고 짝이 되는 겁니다.
바로하고 이스라엘이 무관한 게 아니에요. 이걸 어려운 용어 쓰겠습니다. 같은 ‘내부 공간’을 형성한 겁니다. 내부 공간이란 용어 처음 나오죠. 이 단어가 제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용어에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주위에 있는 공간에 의해서 내가 만들어집니다.
이 말을 약간 보충을 한다면, 인간에 있는 모든 세포 내에 생체시계가 있는 그 생체시계는 바깥에 있는 시계들, 해와 달과 별이란 시계와 동조현상, 물리에서 동조현상이라는 게 있어요. 귀뚜라미가 한 마리가 있는데 귀뚜라미 많은 곳에 집어넣으면 귀뚜라미 우는 시기가 처음에는 틀리다가 나중에는 다 같아져요. 바이올린 두 대를 그냥 놔두면 처음에는 현이 안 맞다가 나중에 현이 다 맞게 돼있어요. 동조현상,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떤 여자들이 집단생활 하게 되면 생리주기까지 같아진다는 통계까지 나와 있어요.
동조현상이라는 것은 사람의 생물체는 어떤 환경에서 거기에 적응하도록 환경에 맞도록 하는데 이게 말이 어려워요. 환경에 적응하도록 한다는 말은 맞지만 그게 반만 맞아요.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을 동조해서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올렸지요. [성도의 매일생활] 거기에 상호의존적이라는 말 했지요. 주부는 자식 없이는 못 살고, 한의사는 환자 없이는 못 살고, 경찰관은 범법자 없이는 못 살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교회는 교인 없으면 못 살고. 모든 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애 먹이던 시어머니가 죽어 버리면 며느리가 가슴이 답답한 게. 그렇게 애를 먹여서 그때는 속이 다 시원하다 하지만 속이 시원한 게 아니에요. 왜 그렇습니까?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시기하는 그것이 그동안 자기가 몸에 익힌 새로운 환경이 되는 겁니다. 자식이 아프다든지, 남편이 아프면 아내가 왜 그리 힘든지 몰라요. 왜 그렇게 힘들까요? 단순히 입원했다, 아파서 죽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더불어 만든 환경 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남편이 있어야 건강해줘야, 애들이 건강해줘야 기존에 왔던 환경이 계속해서 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님들이 교회 잘 나오다가 훌쩍 이사한다든지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이사 가 보세요. 그 다음에 새로운 교인 나와도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아요. 구멍 난 것 같아요. 총알 맞은 것처럼 뻥 뚫렸어요. 왜냐하면 더불어 동조한 환경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거 적응하는데 시간 좀 거립니다.
그래서 내부 공간이라 하는 것은 비록 바로가 히브리인들 압박을 했지만 사람은 압박 받는 그것에 적응하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그래서 이걸 메조키스트, 얻어맞는데서 자학적인 어떤 쾌감 같은 거예요. 자기를 늘 때려주는데서 쾌감을 느꼈는데 만약에 때려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 즐거움이 상실되죠.
교회에 어떤 미운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애를 먹이다가 훌쩍 가버렸다. ‘저 인간, 귀신 뭐 하노. 안 잡아가고. 딴 교회 갔으면 좋겠다.’ 막상 떠나고 난 뒤에는 공격 대상이 없어요. 그 다음부터는 목사 설교할 게 없다고. 적이 떠나버렸으니까. 그 다음 어떻게 합니까?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돼요. 그 다음 차례. 당신 하나만 조질 거야. 그 사람 하나 또 조지고 그래요.
바로와 이스라엘은 내부 공간을 형성하기 때문에 사실은 같은 편입니다. 아무리 억눌림 받아 여호와께 호소했지만. 그 호소한 것은 A 하나님이 아니고, 한 맺힌 B 하나님인 겁니다. 그 점은 모세가 A라는 진짜 하나님께 부름 받기 전에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모세나 바로나 이스라엘이나 히브리인이나 전부다 같은 내부 공간을 형성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먼저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이 내부 공간에서부터 여기서 모세를 먼저 건져낸 겁니다.
건져내고 다시 내부 공간에 들어가는 목적이 뭐냐 하면, 바로와 더불어 형성된 내부 공간은 이제는 모세와 더불어 달리 하면, 진짜 참 하나님과 더불어 만드는 이스라엘이라는 내부 공간을 형성하란 말입니다. 거기서 나온 말이 나중에 나옵니다. ‘동행’이에요. 동행하니 누가 생각납니까? 최성수. 누가 나와 함께~
지난 수요일 설교처럼 동행을 하는데 발이 붕 떠버렸어요. 원래 애굽에서는 땅이 있는 내부 공간인데 이게 붕 뜨는 거예요. 붕 뜨니까 결국 열 재앙이라는 것은 앞으로 광야생활에서 두 발이 붕 뜨게 하기 위하여 그동안 있었던 내부 공간을 장식했던 땅에서의 분리를 위한 재앙이 열 재앙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씨로부터, 모든 혈육, 자식으로부터, 가문으로부터의 분리.
그래서 인간의 내부 공간이라는 것은 땅이 있어야 되고 땅에서 자식이 있어야 그 두 개를 흔히 하는 말로 ‘산다’ 또는 ‘살아있다’ 생존의 환경이에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내린 열 가지 재앙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야기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당시 열 가지 재앙을 내린 표적은 바로 애굽인들이 믿었던 열 가지 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신들에게 재앙을 내렸다고 돼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하나 더 나가야 됩니다. 그 신을 누가 만들었어요? 그 신을 누가 창안했습니까? 우상은 헛것이에요. 우상은 원래 없던 것이지요. 없는 신을 열 가지고, 스물 가지고, 백 가지고 일본 가면 십만 가지된다는데 그 신들은 누가 만들었어요? 바로 사람이 만들지요. 사람이 신을 왜 만듭니까? 무엇과 관련돼있어요? 이 내부 공간은 자기들의 생존의 공간이거든요. 생존하기 위해서는 신도 만들어야 돼요. 신도 여기 합세를 해야 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되지만 안 되는 것은 찜찜한 것, 불안한 것, 우리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 뭔가 힘이 필요한 것 그때는 뭔가 삼신 할매한테 빌든지, 종이를 태우든지 뭐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추상적인 대상을 향하여 전지전능한 신을 만드는데 그 신을 어디서 따오느냐 하면, 바로 내부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외부 공간에서 따오는 겁니다. 그 외부 공간을 대자연.
그러니까 애굽의 신의 열 가지고, 스무 가지고 모든 신은 외부 공간, 대자연의 운행과 관련된 또는 대자연의 어떤 주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신들. 바카스는 술의 신, 뮤즈라 하는 것은 음악의 신. 헬라에서 그렇게 하잖아요. 음악의 신이 실제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미술의 신은 없고 음악의 신은 있습니까? 음악을 누가 좋아해요? 인간들이 좋아하잖아요.
그 인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재능을 대자연과 연계시키기 위해서 별자리를 하나씩 두는 거예요.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도 있지만 이 별은 음악의 별, 이 별은 불의 별, 이 별은 무슨 별이 있단 말이죠. 배치를 하는 거예요. 이 우주공간에.
그러면 물어봅시다. 애굽인들이 보기에 내부 공간은 자기들의 땅이에요. 펄벅의 대지. 땅을 내려다보고 있고 주시하고 있는 외부 공간, 대자연, 이 대자연을 관리하는 신은 과연 누굽니까? 하는 문제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내부 공간을 장식하고 있는 그들이 말하는 신들의 고향, 다른 말로 하면 별들의 고향이죠. 별들의 고향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각 주특기대로 신들을 배치를 한 거예요.
이거는 메뚜기 신, 이거는 태양의 신, 이거는 병을 고치는 신유의 신, 오시리스 신들이 있어요. 하여튼 배치를 해놨는데 그 질서가 깨뜨린다는 말은 사람들이 사는 내부 공간, 바깥에 외부 공간이 있고, 외부 공간 바깥에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외부 공간, 내부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진짜 살아있는 신이 있음을 이걸 저는 숨어있는 하나님이라 합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은 내부 공간은 다른 말로 하면 삶의 터전, 삶의 환경이에요. 외부 공간은 여기 대자연. 그런데 바깥에 있는 것을 점선으로 나타냅니다. 왜? 이거는 그 당시 사람들은 없으니까. 신이 있더라도 항상 대자연의 별처럼 배치돼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외부에 있는 신들에 의해서 뭔가 흔들리고 다루고 깨어지게 되면 균열이 어디까지 깨지겠습니까? 대자연이 깨어지면 어디까지 파생되지요? 내부 공간의 위험이 되겠지요. 위기가 찾아오겠지요.
마지막 심판을 불로 심판하잖아요. 처음에 심판은 물로 심판하죠. 여호와께서 물로 할 때는 외부 공간에 있는 수증기가 내려와서 내부 공간, 짐승이고 땅에 있는 것들 전부다 몰살시켰잖아요.
그래서 외부 공간, 대자연 공간 바깥에 숨어있는 하나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 외부 공간에 유명한 레인보우, 무지개를 걸쳐 놨지요. 그런데 무지개가 신이 아니잖아요. 무지개를 설치한 외부에 어떤 분이 계시죠. 이 분의 모든 특징은 바로 물로써 내부 공간, 외부 공간 작살낸 물로써 심판한 그분이 바깥에 계신 분이에요. 그런데 이게 무지개로 돼있지요. 이 바깥에 계신 분이 인간이 볼 수 있는 외부 공간에 나타난 이걸 우리가 잘 아는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언약 이전에 뭐가 있었느냐? 약속이 있었죠. 창세기 3장 15절. 약속과 언약의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마치 무지개 같아요. 여러분, 빛이 분산 되면 색깔이 몇 가지 나오죠? 일곱 가지 나오죠. 약속이 분산되면 일곱 가지 언약이 나오는 거예요. 빨주노초파남보, 색깔이 나와요.
약속에 의하면 약속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데 천지창조는, 여기 인간이 들어있는데,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니라, 이게 개혁주의신학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인간을 위해서 대자연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제가 지금 말장난하고 있지요.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게 아니고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 못 하고 음성만 듣는 사람들은 똑같은 소리로 들리지만 앞에 있는 것은 무슨 색? 파란 색. 위에 있는 색은? 빨간 색. 왜 빨간 색이냐 하면, 이 인간은 마지막 아담이거든요.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인데, 개혁주의신학은 빨간 인간이 아니고 첫 번째, 파란색 인간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걸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니까 여기서 그들이 뭘 하느냐 하면, 바로 인간이 타락해서 죄 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구원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나오는 겁니다. 신학적으로 어렵죠. 이건 좀 어려워요. 논리가.
개혁주의신학의 치명적인 약점이 뭐냐 하면, 바로 인간 속에 인간이 있는 걸 몰라요.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개혁주의신학은 하나님 형상을 인간의 속성으로만 보는 거예요.
서경수 목사님 계시지만 서경수 목사님이 새순교회에 저하고 같이 있다고 서경수 목사님이 저의 속성입니까? 제 팔, 다리가 아니잖아요. 따로 있잖아요. 서경수 목사님이 예수님이라면 오히려 제가 예수님의 팔, 다리가 되면 영광스럽죠.
처음부터 약속은 이 파란 인간은 빨간 인간의 팔, 다리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모든 출발점이 교회 문 열고 들어올 때는 A 하나님이 아니고 B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B 하나님은 누굴 인정해야 돼요?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고 ‘나 존재하잖아요. 말하고 있잖아. 숨 쉬잖아. 내가 있는데 왜 자꾸 죽었다 하느냐? 살아있는데 펄펄 뛰는데, 침 튀기고 있는데 왜 자꾸 이걸 부정해. 이게 죽었어. 살아있는데.’ 침 뱉는다고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혁주의가 이단이 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개혁주의에서는 이것을 벗어나고자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말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죄인이고’라고 말해요. 하지만 인간이 죄인이란 말하고, 인간은 그대로 있는데 그 중에 속성 하나가 죄라는 속성이 들어있다고 돼버려요. 그건 또 아니에요. 모르면 그냥 넘어갑시다.
보통 복음 아는 사람은 하잖아요.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니까 ‘죄인 맞습니다.’ 이렇게 해버려요. ‘내가 죄인인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래 나와 버리는 거예요. 당신은 몽땅 죄인이라는 뜻인데, 그게 아니고 나라는 인간이 있고 나라는 인간이 병들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은 건전한데 그 나라는 건전한 인간이 병들었으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이 병을 고쳐서 초반에 있는 나, 괜찮은 나로 돼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내 것이고 자시고도 없이 우리는 그냥 출발부터가 몽땅 죄인이고 그 다음에 구원되고 안 되고는 누구 소관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 소관인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아요. 누구와 거래하느냐? 우리 속에 하나님 형상과 거래합니다. 약속이 하나님 형상과 거래하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된 언약도 하나님 형상하고 거래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하고 거래하잖아요. 제자들 다 떠나보내고 예수님 홀로 십자가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덜 이룬 겁니까, 다 이룬 겁니까? 다 이룬 거예요. 그게 연필의 심지, 연필에 나무만 있으면 안 돼요. 심지가 있어야 돼요. 나무 없어도 심지만 있으면 글씨 써집니다. 볼펜 껍데기 없어도 볼펜 심지만 있으면 써지잖아요.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형상이란 심지를 심어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심지 되시는 예수님과 관련돼있습니다.
물어봅시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하고 누구하고 싸웁니까? 여자의 후손과 싸우는 대상이 누구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는 게 누구죠? 여자와 뱀이 원수가 되죠. 그 다음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원수가 되죠. 그렇다면 뱀은 마귀인 줄 아는데 뱀의 후손은 어디 있지요?
이미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죄 안에 들어가 버리면 죄가 왕 노릇하잖아요. 죄가 왕 노릇해버리면 아담 뒤에는 전부다 죄가 왕 노릇하게 돼 있잖아요. 제 말이 아니고 로마서 5장에 나오잖아요. 아담이 죄 지으매 죄가 덮쳤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집에 홍수가 덮치면 그 집은 몽땅 홍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아담에게 죄가 덮치면 대대로 죄가 되잖아요.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은 어느 노선에서 벗어난 사람입니까? 바로 모든 아담의 자손이 전부다 죄가 왕 노릇해야 되는데 오직 이 내부 공간이 아니고 다른 내부 공간은 여자의 후손만이 아담이 있는 내부 공간에 해당 안 되는 유일한 분이 여자의 후손 되는 거예요.
이렇습니다. 원래 원수지간이라 하는 것은 사고가 달라요. 생각이 달라야 원수가 되거든요. 그런데 모든 아담이 다 죄를 지어버리면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의견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같을 수밖에 없지요. 원수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돈 떼어먹으면 원수지만 나중에 돈 갚아주면 친구 됩니다.
같은 죄 품성을 갖고 있고 같은 마귀의 품성이 있을 때는 원수가 안 돼요. 좋은 게 좋은 거고 다 친구가 되는 겁니다. 진짜 영원히 화합, 화목될 수 없는 원수가 되려면 구조가 세상 영역이 다른 영역에서 등장한 인물 같으면 이쪽 영역에 속한 사람 같으면 영원히 원수가 되죠. 그래서 너와 내가 원수가 되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려면 아담의 구조에 벗어나서 다른 구조에 의해서 이 땅에 피 묻은 빨간 사람이 등장해야 됩니다.
그럴 때 약속은 성취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중간에 있는 언약은 날아가 버리죠. 약속이 나왔으니까 언약은 다 날아가죠. 새 언약이 곧 약속이니까 다 날아가죠. 없어지고 약속에 의해서
그러면 모든 아담이 다 뱀의 후손 같으면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럼 천국에 예수님 달랑 혼자 가겠네요? 그러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주특기가 있어요. 자기 원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한 권한이 하나님의 약속 속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언제 그 약속했느냐 하면, 바로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택하기로 이미 속닥속닥 의결이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라는 의미는 뭐냐 하면, 결국 캘빈처럼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 나는 창세전에 구원’ 이런 의미가 아니고, 이 말은 주님이 아니고 우리의 단독적인 우리의 의견으로서는 구원될 수 있다, 없다? 절대로 우리의 구원의지로서 구원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이 비로소 ‘예수 안에서 선택됐습니다.’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죠. 예수님께서 건져줬기 때문에 구원받았지, 그것도 언제 말입니까? 십 년 전에? 아닙니다.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의결된 사람이기 때문에 아담의 몸에서 태어나고 새로운 피조물 된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이러한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 내부에는 새로운 내부 공간, 내부 환경이 드디어 장만해야 됩니다. 이 점이 중요하니 잘 들으셔야 됩니다. 내부 환경이 장만되려면 무엇과는 원수지간이 돼야 하느냐 하면, 옛날에 있는 애굽에 살 때 삶의 환경과는 완전히 격리돼야 되고 분리돼야 되고 상관없어야 되겠죠.
그러면 애굽 있을 때 삶의 환경이란 어떤 것인가? 그거야 우리가 잘 알지요. 왜? 우리는 매일같이 땅을 딛고 살고, 금 좀 팔았나? 언제 팔면 되나? 주식, 펀드는 무슨 펀드? 만날 생각하는 것이 땅에 있는 일과 지금 자본주의사회니까 옛날 농경시대 같으면 ‘여보게. 비가 언제쯤 와야 돼? 비 안 오면 망해.’ 저 뒤에 달력이 영남기계인데, 우리교회 달력이 가스배달 달력인데 보면 ‘이사 가는 날’ 있어요. 그걸 왜 봅니까? 그게 애굽 아닙니까.
그러한 인간으로서 땅에서 나오는 변화를 읽고 거기에 대해서 행운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과 격리된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이야기했지만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이것이 새로운 이스라엘 내부 환경을 점령해야 되겠죠.
그렇게 되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했지요. 이야기 안 했던가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내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동조라 했지요. 사람의 세포는 세포막이 있고, 세포막을 통해서 외부에 있는 모든 에너지, 안에 있는 생체리듬과 바깥에 있는 리듬이 동조를 해요. 달의 움직임과 우리 내부의 장기 움직임이 같이 간다 이 말입니다. 해의 움직임과 우리의 장기 같이 가요. 그래서 한의학이 발전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게 같이 움직여요. 이건 뭐냐 하면, 우리가 사실은 자연환경 속에 포함이 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름이 끼면 나이 많은 사람은 뭐라 합니까? ‘요새 어깨가 결리지?’ 이러잖아요.
그런데 환경이 대자연과 관련된 환경에서 말씀으로 산다 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장악하고 점령해야 되겠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새로운 양식이 들어와요.
요한복음 4장에서 제자들이 마을에 가서 빵을 사왔어요. 헐레벌떡 와서 양식 가져 왔습니다. 하니까 내 양식은 벌써 있는데. 양식이 어디 있습니까? 양식은 다른 게 아니고 내가 구원하려는 추수해야 될 내 백성, 내 양이 곧 나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양식이에요. 제가 글 썼지요. 십자가마을에 올려놨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식탁 위에 있는 양식이라고.
그렇다면 처음에 광야에서는 만나를 먹잖아요. 신약에 와서는 먹는 게 아니고 반대로 먹혀야 되죠. 우리가 양식을 먹는 게 아니고 우리가 양식으로 만들어져가는 겁니다. 그것도 맛있는 양식으로 맛있는 음식으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요. 이 과정조차 열 가지 재앙 속에 포함돼있다 이 말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시작하면 이런 이야기 층을 깔아놓는 거예요.
열 가지 재앙을 장차오실 신약의 예수님의 약속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카펫을 까는 것처럼 그 빨간 카펫이 구약의 출애굽기 7장에서 신약까지 깔리는 거예요. 그 카펫을 우리가 스타는 아니지만 카펫을 봤습니다. 뒤에 파진 드레스는 안 입었지만 하여튼 카펫을 밟는데 밟으면서 우리는 뭘 모르느냐 하면, 애굽의 내부 환경에 젖어서 기도하면 삽니까, 교회 나오면 복 받습니까? 만날 내가 원하는 양식을 내가 먹어서 살려고 하는데 이게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내가 양식을 먹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복 받아서 사는 게 아니고 복이 뭐냐 하면, 죽어도 살아있는 인간으로 양식을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만든다는 그런 생각으로 교체가 돼야 돼요. 이게 교체가 안 되면 우리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사는 게 초조해지고 조급해져요. 굉장히 불안해져요. 위태위태하고 조마조마하고 스트레스 받고 이래요. 복음이 주는 느긋함이 없어요.
그 느긋함의 에를 들면,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왔을 때 느긋했어요. 저 사람이 누구지? 자기면서도. 그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몰라도 되고 다만 주님의 광채, 묵시 세계 본다고 정신없어서 내가 거기에 올라갔는지 않았는지 그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얼마나 느긋합니까?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아니요’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예’가 되는데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모든 것이 약속 안에서 예가 되죠. 그게 느긋함이죠.
진리가 진리답게 되기 때문에 진리는 오류가 없어요. 오류 없는 진리기 때문에 오류 없는 게 덮쳐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오류 없는 인간이 되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하려고 하니까 뭘 해도 이건 오류가 되는 거예요. 오류가 자꾸 일어나니까 우리는 나중에 자포자기 되어서 스스로 신앙이고 뭐고 다 팽겨 쳐버리고 ‘난 모르겠다. 지옥 가든지 천국 가든지.’ 이런 식으로 다시 애굽 쪽으로 돌아가 버려요.
옛날에 있던 내부 환경을 조성하는 식으로 가버리면 교회 다니면서 끊어졌던 술 친구들, 교회 다니면서 끊어졌던 담배 친구들 다시 다 불러 모아야 됩니다. 왜? 그들이 있어야 자기 옛날 내부 환경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내부 환경에서 내부 환경의 끝은, 그러면 물어봅시다. 그림 그려봅시다. 피곤할 때는 그림 그리는 게 최고에요. 애굽의 내부 환경, 내부 공간이라는 말 이해하시겠죠. 우리의 삶의 터전, 우리 인간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 이것에서 이스라엘이 만들어낼 하나님이 만들어낼 내부 환경, 나중에 동행이란 말 했지요. 하나님이 동행하는 모세와 동행할 때 만날 이 지점이 무슨 지점이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뭐가 일어납니까? 죽음이죠. 이게 바로 열 가지 재앙 중에 제일 끄트머리 재앙이에요.
결국 일부터 아홉까지 재앙은 그 마지막 재앙, 애굽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면서 그것도 자식 중에서 맏이, 그것도 딸이 아니고 아들, 맏아들이 생존해야 자기 대를 잇거든요. 나는 죽어도 맏아들 살아있으면 맏아들 속에 우리는 영원히 살아있으니까. 그 맏아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축복한다는 증거입니다. 신의 증거가 맏아들 살아있는 거예요. 맏아들 죽어버리면 자기가 살아도 산 존재가 아니고 죽은 존재에요.
그 맏아들 살리기 위해서 일부터 아홉까지 대자연의 환경을 통해서 그저 살아보려고 이게 무슨 환경? 내부 환경, 애굽의 바로의 내부 환경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로한테 억압을 당해도 그래도 참고 견디는 것은 내 새끼 하나 밥 먹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키우면서 일부터 아홉까지 대자연의 신을 섬기면서 하다가 마지막에 열 번째 재앙, 그 애지중지하던 맏아들이 외부 환경 바깥에 있는 숨어있는 A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서 심판 받아 침을 당해서 죽어버리면 일부터 아홉까지 재앙, 모든 살고자 애쓰던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이 없지요.
인간의 내부 환경은 목적성을 갖고 있습니다. 목적이 뭐냐 하면, 나는 죽어도 내 자식 살아있으면 나는 사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고무풍선 같아요. 고무풍선을 묶어놨는데 이걸 풀면 공기가 어디로 튀어나옵니까? 휘익 공기가 튀어나오겠죠. 이 공기 튀어나오는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자식 키우면서 하는 모든 에너지가 오직 내 자식 잘 되기 위함이에요. 그것도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고 오직 내 아들, 맏아들 자식 잘 되기 위해서 모든 역량을 여기다 쏟아 부었는데 이 맏아들이 이 문턱에 하나님의 저주가 기다려서 이 맏아들을 죽여 버렸다는 말은 그 안에 있는 부모를 다 죽인 거예요.
만약에 아들이 죽음에서 통과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통과해서 산다면 그동안 맏아들을 키워왔던 모든 부모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열 번째 재앙은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중요한 진짜 풍선이라는 이스라엘의 내부 환경을 뭐로 장식할 것이냐를 결정할 열 번째 재앙이 되고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고무풍선 안에 뭐가 자리 잡겠습니까? 바로 유월절 사건이 되겠지요. 그래서 너희들은 매년 일월달마다 유월절을 되풀이하고 후손들에게 유월절에 참여시킬 때 이게 바로 언약이 되고, 언약 배후에는 약속이 있죠.
약속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은 숨어있으니까 여자의 후손되는 예수님과 뱀의 후손, 모든 인간들은 원수지간이 되는데 여자의 후손에서 나오는 약속에 의한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은 애굽과 원수가 되는 거죠. 그런데 현재 출애굽기 7장에서 모세하고 바로만 원수지 그 밑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원수입니까, 원수 아닙니까? 아무 감각 없어요.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하나님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 있는데 그 사이에는 예수님이 있고, 하나님과 히브리인들 사이에는 모세와 바로 있잖아요. 그럼 누가 원수 돼요? 바로와 히브리인들은 원수입니까, 원수 아닙니까? 원수가 아니에요. 그냥 ‘살려만 주이소’ 하는 식이지 원수가 아니라니까. 모세에게만 바로가 원수라니까요. 오늘날 예수님만이 여자의 후손이지 오늘날 교회 나오는 사람들 세상 되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은 언약과 복음과 약속을 전해서 ‘여러분, 이 세상 좋아하지 마세요. 세상과 우리는 원수입니다.’ 하면 교인들은 눈이 멀뚱해서 ‘원수라니요? 옆집 아줌마 얼마나 사람 좋다고요.’ 어제 제사지냈다고 제사떡 나눠줬는데 얼마나 맛있는 줄 몰라요. 그 사람하고 왜 원수가 됩니까? 그리고 만약에 원수가 돼버리면 못 살지요. 따로 나와서 박태선처럼 공동체운동을 하든지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옆동이 원수가 아니고 예수님이 원수가 아니고 누가 원수다? 바로 교회 잘 다니고 있다고 자처하는 목사인 내가 누구의 원수가 됩니까? 바로 예수님의 아픔도 모르고, 예수님의 심정도 모르고,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에 어떤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내 내부 환경, 내 삶의 환경 붙들다 보니까 세상이 너무 좋아. 세상 떠나기가 싫어. ‘하나님이여, 아이 키워놓고 떠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 자식이 예수님보다 더 좋아. 유월절도 통과할 줄도 모르면서.
좀 쉬었다 합시다.
관리자(IP:220.♡.41.193)
09-12-13 10:42
울산091204b출7장8절b
20091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7장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출애굽기 7장 9절에 나오는 지팡이 던져서 뱀 되고, 애굽의 술객들도 지팡이 던지니 뱀이 됐다는 이건 재앙이 해당되진 않습니다. 재앙에 해당되지 않음에도 왜 이런 이적, 기적을 베풀어야 되느냐?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의외로 기적이냐, 기적 아니냐 하는 것이 나타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사라지느냐 하는 사라짐에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가 던지매 뱀이 됐잖아요. 그런데 애굽의 요술가들도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됐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모세는 그 뱀을 잡으면 지팡이가 됐어요. 모세 쪽으로 왔는데 그쪽에 있는 뱀은 어디로 갔습니까? 사라져버렸죠. 어떻게 사라졌느냐 하면, 모세가 만든 뱀에 의해서 그 뱀이 삼킴을 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쪽이 가짜입니까? 어려운 질문을 했는데요.
지적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게 기적이 아니고 반드시 그 본질을 보여줄 때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 자체가 드러나는 것을 기적이라 하거든요. 그냥 신기한 것은 마술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은 뭐냐 하면, 뱀을 삼킬 때 이 뱀은 모세의 지팡이에서 나온 뱀이죠. 그런데 삼킴을 당한 뱀은 애굽에서 나온 뱀이죠. 그렇다면 애굽 사람들이 지팡이 가지고 뱀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 뱀은 삼킴을 통해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 거예요. 얻어맞기 위해서 태어난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할 때 이 본질을 보여주고 그리고 애굽의 술객들의 뱀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우리는 아무리 요술 피우고 뭘 피워도 결국은 여호와 앞에서 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졌잖아요. 우상은 헛것, 결국 우상의 마지막 자리를 없는 거예요. 뿅하고 없어져 버린. 이게 뱀뿐만 아니고 뱀에 속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리스도 몸에 삼킴을 당한 몸이 될 때는 하늘에 속한 몸이 되지만 그냥 주님 앞에 삼킴을 당하지 않는 몸이 되면 흙으로 살다가 저주받은 영원한 몸이 되죠.
‘당신의 끝은 어디요?’라고 물어보세요. 길가는 사람은 미쳤다 하지만. 혹시 아는 사람, 교회 다니거나 이런 사람 있거든, ‘당신의 끝은 어딥니까?’ 예를 들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주님 품이죠.’ ‘그럼 당신은 사라지겠네요. 당신의 주체는 자아는 그러면 사라지겠네요.’ 사라져야 되죠. 사실은. 사라지기 때문에 성도는 사나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는 말을 해야죠. 이미 삼킴을 당해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원수지간이면서도 그 원수의 존재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데 아주 적절하게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단들도 마찬가지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필요해서 다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면 나오죠. 예수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권세를 내게 주심은 하나님 백성, 하나님 아들한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세상 쥐고 있는 모든 권세를 나한테 일임했습니다. 이 말은 안 믿는 사람까지 바퀴벌레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도 오직 믿는 사람에게만 영생이 돌아가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그 영생을 저는 뭐라고 하느냐? 내부 환경, 내부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산다’에 의해서 전에 있던 애굽식으로 산다. 이쪽에 이스라엘 산다는 뭐로 산다고 했습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이 산다가 이쪽에서는 내가 산다가 되지만 여기에 산다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내부 환경, 내부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너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거룩한 백성. 나중에 언약이 나오면 내가 언약을 지키면 너는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그게 하나의 내부 공간이 되는 거예요.
이 내부 공간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애굽식을 교체가 돼야 돼요. 그 교체되는 과정 속에 하나가 지금 현재 앞으로 나올 열 가지 재앙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럼 열 가지 재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봅시다.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물이 하수니까 강물이 피로 변하고 이거는 사람들이 물마시기를 싫어하겠지요. 물이 없으면 전에 있던 애굽의 삶의 내부 공간에서는 못 사는 거예요.
모세가 이런 기적을 베풀었을 때 애굽 사람 싫어하는 건 물론이고 히브리인들도 같이 싫어했겠죠. 왜? 아직도 애굽식의 삶의 환경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예요. 이 싫어함은 나중에 광야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 없어서 원망, 그 다음에 먹을 게 없다고 원망. 그럴 때 하는 소리가 이구동성, 피켓 들고 시위했겠지요. ‘컴백 애굽,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교회 나와서 술 끊고, 담배 끊어놓고 나중에 교회 문제 있으면 막걸 리가 당긴다. 소주가 당긴다. 제가 글 올렸는데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거예요.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쌓아왔던 의와 거룩함이 상실하겠지요. 그 상실이 바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배우는 거예요. 뭔가 빠져나가는 것.
지금 애굽 사람만 애타는 게 아닙니다. 히브리인들도 애타는 거예요. ‘아이고, 안된다, 안 된다. 피 되면 안 되는데 못 사는데.’ 히브리인들도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나중에 네 가지 재앙이 지나고 뒤에 파리 재앙부터는 따로 구분되기 때문에 놀라지 않지만 그전까지는 깜짝깜짝 놀래요. 왜 네 번째 재앙까지 히브리인들도 놀라게 하고, 애굽도 놀라게 하고 전부다 가슴이 덜렁 내려앉죠. 왜냐하면 자기의 삶의 환경이 부셔지니까. 저게 있어야 산다는데 저것마저 하나님께서 외부 바깥의 숨어있는 신으로서 공격을 하니까 놀래죠.
그 놀란 것은 아무리 히브리인들도 모세와 바로 가운데 바로에 속했기 때문에. 바로가 강퍅해서 모세를 대적하는데 바로의 술객들이 모세와 유사한 기적들을 베풀었거든요. 마술을 해대니까 주님께서는 이 마술을 꺾음으로 말미암아 애굽 인간들의 한계를 들추어내고 그들이 ‘우리 힘으로 도저히 모세의 기적을 흉내 못 내겠다.’ 하고 포기할 때 너희들만큼은 특별한 내 백성인 것을 구분을 시켜주는 겁니다.
만약에 애굽의 술객들이 계속해서 모세의 흉내를 내게 되면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특별한 사명을 인정하겠습니까? 전에 내부 공간에 있던 우리 애굽의 술객들도 모세, 너 정도는 할 수 있다. 이거는 애굽 사람뿐만 아니고 누구도 이야기 안 하겠습니까? 구원돼야 될 새로운 내부 공간을 맞아야 될 하나님과 동행해야 될 하나님 백성들도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단 말이죠. ‘그까짓 일은 해내잖아요. 저 사람이. 그 전에 있던 애굽 술객들도 해내네. 모세, 너 뭔데. 지팡이가 뭐라고. 똑같이 해내는데. 여호와나, 기존 신이나 똑같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거다 말이죠.
그런 한계가 끊어질 때 그때부터 우리는 뭔가 애굽과는 결별해야 될 특별한 민족이구나. 그리고 우리는 바로와의 관계가 이제는 끊어질 때가 되었고, 우리는 사람들이 행하지 못하는 기적을 행하는 모세 편에 서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감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는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 재앙까지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진도 잘 나갑니다. 7장 22절.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함으로 바로의 마음이” 그 다음에 괄호 열고,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죠. ‘강퍅’의 의미가 뭐냐? 간단합니다. 사람의 교만인데, 성경에서 교만은 바로 예수님 말고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이걸 교만, 강퍅이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고 믿는 구석을 믿는 게 강퍅이라면 이 강퍅의 반대가 뭘까요? ①겸손, ②긍휼, 몇 번일까요? 정답은 긍휼이죠. 왜냐하면 아무도 겸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겸손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모든 사람을 강퍅케 하심은 뭐로만 구원하기 위해서? 긍휼이죠. 그럼 긍휼이라는 건 어디에 해당됩니까? 우리가 항상 강퍅하고 있는 진행 중. 항상 강퍅 중에 있을 때 거기에 뭐가 덮칩니까? ‘아이고, 불쌍한 것’ 하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현재 애굽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서 히브리인들이 안 받는 여섯 번째에서 열 번째 재앙은 결국 어떤 차원입니까? 그들이 마음이 변했습니까, 아니면 긍휼 싸움이에요? 긍휼, 불쌍히 봐주는 거예요. 그들이 기적 보고 인간 개과천선해서 ‘이제부터 여호와 믿습니다.’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그들은 심지어 열 가지 재앙 끝나고 홍해 갔을 때도 모세한테 대들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가 없어서 공동묘지 만들려고 이 광야 벌판에 몰살시키려고 데려왔는가? 봐라. 들리지 않는가? 저 애굽 군사가 따라오는 것을.’ 그때 모세가 ‘가만 있어봐라.’ 여기서 가만있어 봐라는 강퍅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강퍅이 뭐라 했습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데 가만있어버리면 강퍅할 근거조차 없는 거죠.
그래서 복음 전하는 목사 강의하게 되면 만날 교인들이 ‘그럼 우리 보고 가만있으란 말입니까?’ 하는데 가만 안 있으면 뭐라도 꼼지락 한다니까요. 그게 be동사+~ing, 현재진행형이에요. 우리는 예수 믿지요. 매일같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꼼지락거립니다. 아무리 예수 믿고 해도 꼼지락거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양식이 되는 것은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긍휼을 입혀줄 때
고구마튀김은 우리는 그냥 고구마고, 튀김 되려면 튀기는 것은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께서 튀겨줘야 고구마 맛있다 하지 않습니다. 튀김 잘 됐다 하죠. 튀김을 먹을 때 튀김을 먹지, 그 안에 오징어냐, 낙지가 들어갔던 튀김을 먹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고구마일 뿐이고 튀기는 것은 주께서 튀기십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도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뭐라 합니까? 마귀가 너를 갖고 논다. 네가 만약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튀겼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너를 위해서 튀겼기 때문에 네가 구원받지 그렇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가룟 유다하고 열한 제자 차이점이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쪽은 주님께서 끝까지 긍휼로 사랑했기 때문이고 한쪽은 사랑 안 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튀김요리가 되지 못했고 열한 제자는 튀겼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이게 바로 긍휼이란 말이죠.
이 긍휼을 설명하기 위해서 강퍅의 도를 끝까지 올려줘야 됩니다. 개그콘서트 혹시 보신 분 계십니까? 다 돈 번다고 바빠서. 거기 보면 [별 볼 일 없는 밤]이란 코너가 있거든요. 코미디언 변기수가 여기서 사연 읽을 때 자기가 볼륨을 올립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라는 볼륨을 주께서는 계속 올리는데 강퍅의 끝까지 올립니다. 언제 강퍅이 무너지느냐 하면, 자기 자식 죽을 때, 왕자가 죽을 때, 바로 왕국의 맏아들이 죽을 때 바로 자기의 죽음이거든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엔 이삭 죽음이 자기 죽음이고. 자기가 죽을 때 강퍅이 끊어져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강퍅이란 것은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교회 가서 목사 설교 은혜 받은 것, 집에 가서 아이 숙제 안 해보세요. 팹니다. 은혜 받은 것 소용없습니다. ‘내 자식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 찬송가 가사 바꿔야 돼요. 그게 뭐냐? 유혹에 굴복하는 거예요. 내 자식이 유혹이에요. 내가 믿을만한 모든 게 유혹이에요. 유혹이 바람피우는 게 유혹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믿는 것, 입술로는 예수 믿는데 실제로 내가 뭔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뭔가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는 것, 뭔가 내 인생이 이렇게 풀렸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게 있는 한 강퍅은 되게 돼있고 그게 내 목숨을 부지하는 내부 공간이 되는 거예요. 그 내부 공간 때문에 주께서 그 내부 공간을 예수님의 자기 피로 페인트칠을 해요. 이것도 죄기 때문에 내가 피를 흘렸다. 이것도 죄기 때문에 아예 고구마튀김을 해줄게. 자기 피로 튀김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열 재앙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반복됩니다. 그 재앙 하나하나가 여기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포기하면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또 믿을만한 징검다리를 찾아서 이동합니다. 이동하면 그걸 또 쳐버려요. 그럼 또 이동해요. 또 쳐버립니다.
이번에 책이 나올 건데 [욥 안에 그리스도] 그 표지에 있는 단어, 제가 고른 게 아닙니다. 출판사 사장이 골랐는데 얼마나 은혜가 되든지. 표지에 있는 글이. 기억은 안 나는데 글자가 작아서 잘 안 보이는데 자세히 보세요. 욥에서는 강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강퍅하고자 하는 것은 전부다 다 쳤으니까. 자식 다 죽었지요, 재산 날렸지요, 마누라 도망갔지요. 심지어 사탄이 말하기를 ‘그래도 자기 몸 건강하기 때문에 하나님 믿습니다.’ ‘그러면 좋다. 몸 건강한 것 쳐봐라.’ 그것까지 쳐버리잖아요. 하여튼 믿을 구석이 없어요.
사실은 이렇게 믿을 구석이 없는 식으로 욥만 구원되는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튜브, 그 관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린 통과하고 있어요. 욥이 갔던 그 터널을 같이 통과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몸이 건강하고 종기도 안 나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욥보다 복음을 더 알기 때문에 그래요. 욥은 우왕좌왕했잖아요. 우리는 뭘 알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은혜인 줄을 지금 내가 살아있는 모든 환경이 사실은 주께서 주신 남들 보기엔 애굽적인 삶의 환경이지만 우리 보기엔 하나님 주신 삶의 환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하나가 말씀이 주신 은혜, 다른 말로 하나하나가 말씀인 것입니다. 돈을 오만 원짜리 할 때 이게 말씀인 것입니다. 남들은 돈으로 보이지만 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생각이라도 그리 하세요.
방금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강의한 중에서 제일 어려운 말로 하겠습니다. 제일 어려운 말로 할 테니까 그냥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역사 안에서 묵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게 묵시의 특징입니다. 역사 안에서의 묵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안 믿는 사람들이 흔히 믿는 사람들이 기적이라 하잖아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뭔데? 그거 평상시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어? 없어.’
소경이 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묵시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한테는 예수님께서 해준 은혜로 나타나오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이 은혜로 보이고, 성령이 임하지 않은 육적인 사람은 아무리 예수 십자가에 죽어도 그거 정치범이야. 김동리나 이문열 그거는 정치범이에요. 사람의 아들, 정치범이고 그 피가 우리 죄를 씻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래서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뭘 봅니까? 역사를 찾아요. 십자가를 안 믿습니다. 어떻게 꼬셨더니만 교회 왔고, 어떻게 말 했더니만 십일조 내더라. 그런 눈에 보이는 역사를 그들은 하나님의 일로 정돈을 해요.
그래서 역사에선 뭐냐? 역사에는 순서가 있고 정열 돼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순서고 역사의 정열을 그 중심은 뭐냐? ‘나’ 중심이죠. 그런데 묵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묵시에서 보면 모든 일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모든 일이 현재 새순교회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새순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느 일도 성경에서 찾아보면 다 들어 있어요.
‘너희가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구나.’라는 말이 성경에 있다면 이걸 새순교회 교인들이 만약에 진짜 믿는 자라면-믿기를 원하지만-새순교회 딱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네. 하는데 옆에 이상한 교회에서 와서 새순교회 참석해서 내가 보니 서경수 목사님 말이네. 사람의 말이네. 이렇게 돼버려요. 아무리 설득을 하고 우기고 해도 보는 귀가 다르고 보는 눈이 다르면 이게 역사의 증거로만 수집되지 지금 주님께서 일으키신 묵시의 일로 안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강퍅이 돼요. 이것은 그 당시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내부 환경이 바꿔지기 위해서 광야라는 것이 있습니다. 광야는 수요 설교에서도 했지만 발이 붕 떴어요. 땅 없이도 산 희한한 민족이에요. 왜냐하면 만나가 어디서 내려오느냐 하면, 하늘에서 내려오거든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땅에서 만약에 만나를 했다면 경작을 사람이 해야 되죠. 만나는 사람이 경작했다는 흔적이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만나의 성분을 분석해서 지금도 만나가 나온다 하는데 죄송합니다. 만나는 이미 끊어졌어요. 두 번 다시 만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먹어야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는데
그 만나가 왔었지요. 요한복음 6장에서. 그 만나가 누굽니까? 내가 바로 하늘에서 온 떡이라. 내 떡을 먹는 자는 산다. 무슨 수로 삽니까? 예수님 잡아놓고 바비큐 해서 뜯어먹을까요? 안 그러면 예수님 창 찔러서 사슴 빨대 꽂듯이 피 받아먹으면 삽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여서 살려주는 사람만 산다는 뜻이에요.
만나의 뜻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예상하지 못한 그러니까 애굽의 삶의 환경에서는 외부적인 투입된 양식이잖아요. 그 양식이 사람을 살렸다는 말은, 사람이 양식을 먹는 게 아니요. 팔보채, 짜장면 이런 것 먹는 게 아니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 양식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새로 만들어야 돼요. 그럼 하늘의 양식 같으면 사람도 무슨 양식 되겠습니까? 하늘이 양식이 만들어내는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예요.
기존에 사람들은 교회 와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돈 주옵소서’ 하는데 돈은 받아봐야 자본주의 사람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의 양식을 주옵소서’ 하면 돈 줘요. 그 돈 하나하나가 뭐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죠. 아까 다 잊어버렸죠. 이해합니다. 피곤할 때 됐는데. 지금 여러 단어가 쏟아졌기 때문에 연결이 매치가 잘 안 되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바로는 애굽을 대표해서 별 볼 일 없는 밤에 올리고 있죠. 강퍅을 올리죠. 강퍅을 올리고 있으면 덩달아서 애굽이나 히브리인이다 다 올라가요. 다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겸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요구야 겸손이지만 겸손 안 되니까 긍휼을 주죠. 긍휼을 주면 만약에 지금 우리가 월급을 받는다. 월급 하나하나가 긍휼이죠. 긍휼을 다른 뜻으로 하면, 불쌍히 여겨서 주는 동냥이죠.
세웅이가 직장생활해서 이거는 내가 하는 일이지 주의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불쌍히 여긴 거예요. 우리는 다 불쌍히 여겨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환경이 긍휼하심이 임하죠. 그게 바로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같은 열차에 동승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제 제 아내가 부산서 일 보고 4시 10분 KTX 탔는데 텅텅 비었어요. 민간인은 자기 혼자밖에 없어요. 뭔데 넓은 객실이 자기 혼자 덜렁 타고 민간인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앞뒤에서 시커먼 머리띠 띤 사람하고 시커먼 복장해서 휴대폰 갖고 이렇게 하는데, 대구 동네에 왔는데 30센티 앞에 키 좀 작고 얼굴 피부 좋은 사람 있어요. 아는 사람이라 보니. 이명박이에요. 제 아내가 ‘안녕하십니까?’
동승이라는 것은 환경이 달라요. 나 때문에 환경이 다른 게 아니고 계속해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대속하시는 계속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동승하다 보니까 우리는 나중에 하늘 쳐다보고 ‘안녕하십니까?’ 그때는 창자국과 손자국을 볼 것이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눈과 얼굴을 맞댈 것이요.
그때는 안녕하시든지 인사는 마음대로 하시는데 지금 계속해서 우리는 같은 열차에 타면서 동승하면서 내부 환경, 우리는 자꾸 ‘KTX도 별 것 없네’ 하지만 그 모든 KTX를 누굴 위해서 만들어낸 대절한 겁니까?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서. 지금 이 세상은 누구의 권세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 주심을 위하여 자기 백성 태우기 위한 그런 장치로서 짜여져 있는 완벽하고 빈틈없는 그런 기차가 구원열차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탄 히브리인들은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고 말이 동승했지 자갈치 시장 어물전 냄새 다 피우고, 기장의 미역 냄새 다 있고, 울산의 공단에 있던 화학냄새 그대로 붙어 있고 담배 피워서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다 대통령한테 걸리고. ‘이리와. 긍휼히 여겨줄게.’ 이런 거예요. 너, 누구 믿나? 주님 믿습니다. 그래도 담배피우나? 미안합니다. 이 세월이 계속 가는 것입니다.
아무렇게 해도 시간은 열차는 달린다. 아무리 우리가 게으름피워도 열차는. 이게 바로 진리가 주는 느긋함, 그걸 존재의 가벼움이라 하죠. 그런데 열차 안 타고 자기 혼자 걸어가 버렸어요. 존재의 무거움. 그래서 글을 쓸 때 무거워워워워~ 했어요. 절망.
8장 봅시다. 그 다음에 개구리. 피, 개구리는 삶의 환경을 절단 내려는 재앙이 아니고 삶이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