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9. 11. 27) 1강
광주 강의(09. 11. 27)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11. 27) 1-1
오늘부터 에스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장 4절에 보면, 불이 번쩍번쩍 나오고, 사면을 비취는 바퀴가 달린 네 생물의 집합체가 나와요. 동서남북 사면으로 각기 다른 얼굴을 가졌는데, 10절에 보면 각 면에 네 형상이 나오는데, 앞은 사람 얼굴이고, 우편은 사자, 좌편은 소, 뒤편에는 독수리의 형상을 갖고 있는 희한한 괴물체.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괴물체지요.
사람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독수리도 아닌 이 천사의 집합체가 어떻게 에너지가 가동되어서 움직이는가? 16절을 보면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라고 되어 있어요.
바퀴가 있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용도가 되겠지요. 그러면 엔진은 에너지가 있어야 움직이는데, 에너지가 뭐냐 하면, 20절에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같이 움직인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에스겔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하면, 복음을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하나님하고 인간 그 사이에 약속과 말씀을 주고받으면서 둘 사이에 모든 것이 처리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천사라는 중간 일꾼이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진행시킨단 말이죠.
그러면 천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천사가 있으면 인간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저기 계시다.’ 라고 하는 그 하나님이 사실은 우상이 됩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저기 계신다.’ 라고 할 때 저기 계시는 하나님은 100% 거짓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에스겔처럼 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천사라는 것은 인간 동네에서 어떤 존재냐 하면 낯선 존재지요. 천사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다면, 그리고 그 천사가 우리 보기에 낯선 존재라면 결국 진짜 천국,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철저하게 낯선 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인간들이 말한 신은 뭔가? 자신들이 조작한 신이지요. 이것이 신학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신인데, 인간들이 신을 만들 때 그 재료를 어디에서 가져오는가? 인간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품성들 중에서 괜찮은 것, 보다 완벽을 기할 수 있는 그런 품성들을 모아서, 적어도 신이라면 우리보다는 뛰어난 고운 품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그에 합당한 신을 제조해 내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신의 품성이 뭐냐 하면, 진(眞) 선(善) 미(美)예요. 이 진선미를 가지고 천국을 생각한 사람이 바로 칸트입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천국은 인간이 유한한 반면에, 신은 인간의 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한으로까지 올라가요. 이런 식으로 신을 조작해 냈지요.
그렇다면 인간들이 어떻게 참된 신은 만들 수 있습니까? 인간들은 참된 신은 못 만들어요. 오늘 강의 주제가 이것입니다. 인간은 참된 신을 만들 수 없고, 만드는 것은 인간 자신을 닮은 엉터리 신일뿐입니다.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소년이 포도를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새들은 그것이 진짜 포도인줄 알고 달려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할 때 플라톤의 철학이 나오는데,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다 미흡하지만 완전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면에서 신의 속성이다. 천사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마음씨 착한 사람을 보면 ‘천사 같다.’라고 하잖아요.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남들보다는 완전(진선미)에 가까이 가있다는 뜻에서 천사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질 나쁜 사람에게는 ‘악마’라고 하지요. 그래서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에 ‘천사의 유혹’이 있어요. 이런 천사는 인간이 조작해낸 천사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들이 말하는 하나님이나 천사는 엉터리인가? 철학자들이 말하는 신은 유한한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인간보다 월등하고 무한한, 모든 면에서 뛰어난 분, 전능하신 분. 이것을 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상상의 소산일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은 갇혀있는 존재입니다. 갇혀있다는 말은 출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학문의 딜레마입니다. 출구가 없어요. 여기 만약에 어떤 쇠 파이프(관) 안에 사람이 갇혀있는데, 그 관의 두께가 62Km라면, 그 안에 갇힌 사람이 아무 도구도 없는데 그 관을 뚫고 나올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이게 바로 인간이에요.
이것을 사르트르는 ‘한계적 상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탈)출구가 없는 거예요. 출구가 없다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인데,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포자기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출구가 없다.’고 할 수 있어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에스겔을 공부하는데, 왜 에스겔을 하는가?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두어 두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갇힌 존재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출구가 없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목사, 장로, 집사의 문제가 뭐냐 하면 출구가 없어요. 신을 찾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신학을 공부하는데 아무리 해도 출구가 없으니까 결국은 자기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특징은 교회를 모독하지 못해요. 그러나 성도는 교회를 모독해요. 자기 교회를 모독할 수 없으면 그것은 교인, 지옥 가는 사람이고, 교회를 모독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성도에요.
사도신경을 보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여기 성도의 교통(교재)이 나옵니다. 그러면 교회가 우선입니까, 성도가 우선입니까? 성도. 사람됨이 우선이지요. 성경이 교회를 위해 있습니까, 사람을 위해 있습니까? 영적인 사람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대해서 설교하고, 교회를 어떻게 잘 해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인밖에 안 되고, 교인은 출구가 없어요.
그러나 성도는 이미 갇힌 곳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교인들이 주장하는 교회를 얼마든지 모독할 수가 있는 겁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그 몸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라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이지요.
제가 대전을 갔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장희열 성도님이 자기 딸한테 질문합니다. “성경을 여섯 자로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 세 자로 하면? 십자가. 한 자로 하면? 피.” 아이에게 이렇게 교육을 시켰답니다. 아이가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목사가 설교하면서 ‘교회를 잘 해보자, 교회를 어떻게 하자.’는 식으로 나온다는 자체는, ‘교회 손대지 마! 교회를 모독해서는 안 돼!’ 이런 투로 나오지요. 그런데 성경은 성도로 하여금 육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바꾸어서 출구가 없는데서 이미 빠져나오게 하는 그 묘수를 부리는 것이 영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불가능함을 이야기해야 돼요. 성경 펴서 설교하고 난 후 ‘여러분 이제 가능합니까?’ ‘아니요.’ ‘참 설교 잘 들었네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구나.’ 이렇게 나와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육에서 영으로 옮기는 작업을, 우리 인간을 계속 불가능성 속에 집어넣어서 ‘육에서 영이 되는 것이 너희들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적용시켜서 영이 되게 하셨다.’ 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걸 내세우는 것이 성경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 인간은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죄 아래 갇혀 있어요. 이것을 설명해야 돼요. 이것을 설명하고 에스겔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에스겔 말씀에서 신비로운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겨울 수련회에서 하려고 했는데 미리 좀 해야 되겠습니다.
죄에 갇혀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관 속에 갇혀있다면 뚫으면 되지요. 그리고 방에 갇혀 있다면 창문 깨고 나오면 되지요. 모든 갇혀 있음은 탈출이 가능하다는 것이 성립이 돼요. 그런데 죄에 갇혀 있다는 말은, 아무리 탈출하려고 해도 탈출할 수 없고, 탈출하려고 애쓰면 쓸수록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죄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탈출해야 되겠다는 자체가 바로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 죄 안 짓는 것은 탈출할 마음이 없어야 되지요. 그게 오늘날 현대인의 자포자기입니다. ‘교회 나가십니까?’ ‘안 갑니다.’ ‘왜요?’ ‘자포자기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안 믿습니다.’ ‘왜?’ ‘나를 내버려두세요. 자포자기입니다.’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이게 뭡니까? ‘될 대로 되라.’ 이게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자포자기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목적에 대한 비아냥거림. 목적성에 대한 비웃음. ‘목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인생이 뭐 별거야, 한방 브루스지.’ 왜 이런가 하면, 우리가 어차피 벗어날 구석이 없으니까. 이런 상태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쉬웠는데, 그러면 에스겔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천사를 개입시킵니다. 사면의 얼굴 모양이 다 다르지요. 전면은 사람, 우측은 사자, 좌측은 소, 뒤는 독수리. 이런 괴상망측한 괴물체가 하나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다가왔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 자체에 대한 모독이죠.
인간은 항상 신을 생각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진선미. 진은 진리, 선은 윤리고, 미는 아름다움이죠. 이것이 칸트의 세 가지 비판(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속에 다 들어 있어요. 내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알 수 있는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미는 숭고를 말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경외심. 우리가 소유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우리가 세 발짝 다가가면 네 발짝 물러나는 이것이 숭고에요.
칸트는 거룩과 숭고와 신의 세계를 이렇게 봤습니다. 인간이 접근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것이다. 너는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그 무엇. (이것을 라캉은 ‘실재계’ 라고 했고) 그것을 미(美)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누가 움직입니까? 인간이 움직이죠. 인간은 부단히 진선미를 향하여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이 움직임이 성경에서는 죄라고 한단 말이죠. 누가 움직여야 돼요? 아까 천사 봤지요. 바퀴가 있고,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데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에서 나오잖아요. 그러면 누가 움직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움직이는 거지요.
하나님이 움직인다는 말은 우리는 움직이지 말아야 돼요. 그런데 자꾸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죄가 된단 말입니다. 죄는 움직임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움직여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지나쳐 버립니다. 아이를 번잡한 백화점이나 시가지에서 잃어버렸을 때 마침 휴대폰이 있어서 연락이 됐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자고 하면 그곳에 서 있으면 되는데 움직입니다. ‘어느 쪽에서 올까? 아마 이쪽으로 올 거야.’ 예측하고 그쪽으로 조금 마중을 나가요.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찾아오는데, 오는 방향을 예측하고 움직이니까 못 만나는 거예요.
우리가 움직이면 안 돼요. 그 움직임을 행위, 또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움직이면 왜 안 되느냐 하면, 자시는 혼자 움직인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서 구조가 같이 움직여요.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맞는 구조를 새로 재조립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그런 말을 했지요. 인간의 자아는 층층이 되어 있다. 일곱 살 때, 아홉 살 때, 열 살 때, 이런 식으로 계속 층층이 있어요. 그래서 만약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열 살 때 세계로 돌아가기 때문에 열두 살, 열아홉 살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옛날 층으로 가는 거예요.
예를 들면, 법원 로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어, 너 영철이 아냐?’ ‘그래, 너는 동진이지?’ ‘그래.’ 서로 오랜만에 만나서 굉장히 반가웠어요. 그런데 그들의 만남은 한 사람은 판사가 되어 있고, 한 사람은 수갑을 찬 죄수의 신분인 거예요. 그런데 만나는 순간은 현재를 잠시 잊고 옛날 정다웠던 고교 시절로 돌아가서 그냥 반가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 층은 세월 따라, 상황 따라 늘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의 핵심입니다. 누가 움직이느냐 하면 천사가 움직여서 갖다 주는 거예요. 뷔페는 자기가 쟁반 들고 먹고 싶은 것을 가지다 먹지만 보통 음식점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종업원이 가져다주잖아요.
에스겔에서 천사가 바퀴가 달려 있고, 하나님의 신이 움직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에스겔 시대에 와서는, 이제는 성전에 대해서는 너희가 위탁, 관리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우상의 광장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약대로 성전이 있어야 복이 오니까, 성전과 장차 오실 메시아와 일치시켜야 되는데(그래야 구원이 되기에), 인간에게 성전을 맡겨놓으니까 바알 신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러니까 이제 누가 나서야 돼요? 하나님이 나서니까 자기 피조물 천사에게 바퀴를 달아서 소, 사자, 독수리, 사람이 해야 될 일을 한꺼번에 기능을 가지고 천사가 온 사방에 나서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너희들은 죄에 갇혀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에스겔 1장이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왜 바퀴가 있고, 왜 하나님의 신이 움직이는가 하면, 결국 성신과 인간의 움직임(행함)과 대비가 되는 거예요. 성신은 누구를 움직입니까? 천사를 보내서 인간과 대조를 시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의 삶은 두 가지가 있는데, 일단은 죄에 갇혀 있어야 됩니다. 성도가 만약 죄에 갇혀있지 않다면 성도가 설치잖아요. 이러면 안 되지요. 그래서 성도는 죄에 갇혀있는 것과 갇혀있으니까 자력으로 구원이 성립될 수 없지요. 아까 이것을 불가능성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성도는 매일 뭘 느낍니까? ‘나 같은 인간이 구원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것을 매일 느끼시면 OK가 됩니다.
대전에서 강의할 때 이런 말 했습니다. 죄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죄책감이 없어야 된다. 죄책감이 없어야 그것이 죄인입니다. 말장난 같지요? 사람이 생각하는 죄인은 죄책감이 넘쳐나는 죄인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죄책감은 해도 불가능하니까 이 불가능성 때문에 죄인 되면서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 왜냐하면 해도 안 되니까.
해도 안 되는 것 같으면 책임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런데 칸트는 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이란 반드시 ~해야 된다.’ 오 투(ought to)란 당위성을 말하는데, 필연성과 당위성은 차이가 나요. 당위성이라는 것은 ‘~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필연성이라는 것은 ‘그것 외에는 다른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둘 다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이 말은 맞아요. 그런데 저는 거기다 더 첨가할게요. 당위성을 하든지 필연성을 하든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나는 감을 먹어야 돼.’ 라고 할 때, 감을 먹잖아요. 이것은 당위성이죠. 그런데 떡과 초콜릿은 다 먹고 감만 남겨놓았을 때, 우리는 ‘나는 감을 먹어야지.’ 라고 하지 않고, ‘먹을 게 감밖에 없네.’라고 하지요. 이게 필연성입니다.
어쩔 수 없이 감을 먹어야 할 때 그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칸트는 그것을 죄가 아니라고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유한한 존재가 신을 향하여, 신을 닮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건 안에서 신을 닮아가려고 애쓰니까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보는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것 외에는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고는 ‘너는 죄 안에 갇혀있다.’고 박수를 쳐요.
‘갈라디아서 3장 22절 그 말이 봐라. 맞잖아?’ 어쩔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어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죄라고 하면 나머지 전부는 당연히 죄가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하시지요. 지금까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이제부터는 진짜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갇혀 있다는 말은,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쇠 파이프(관) 속에 인간이 갇혀 있다고 하면 손톱으로 뚫어서 이 관을 탈출할 수 없습니다. 남자나이 50쯤 되면 사는 것이 따분해서 별것 다 해 봅니다. 색소폰도 배워보고, 낚시에 취미를 붙여 봤다가, 등산 장비 갖춰서 등산도 해보고, 그러다가 심지어 성경공부를 해봐도 그 모든 것이 재미없어요.
이처럼 자기에게서 튀어나와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은 결국 갇혀있다는 뜻이고, 갇혀있다는 말은 ‘나보다 먼저 뭔가 거기 있네.’ 이게 중요합니다. 뭔가 있는데 아무리 헤딩해도 나는 그 뭔가에 의해서 ‘네 자리로 돌아가!’ 하고 밀침을 당해서 다시 되돌아오는 이런 숙명이 바로 인간이 죄 안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거기 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까 자포자기한 인간은 뭘 생각 안 해요? ‘뭔가 거기 있다.’를 생각 안합니다. 이것이 불신자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내가 오늘은 뭘 하며, 어떻게 움직일까?’ 이 자기 움직임의 정당성 “하나님, 오늘은 제가 남을 구제했습니다. 잘 했지요?” 라는 자기 움직임에 대한 정당성.
이럴 때 뭘 느끼지 못합니까? 거기 뭔가 있다는 것을 느끼질 못해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는 교인들에게 뭘 이야기해야 됩니까? 우리보다도 우리를 갇히게 만드는 ‘뭔가 거기 있음’의 내막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서 설교해 줘야 됩니다.
지난 번 칼 바르트 신학에 대해서 강의했는데, 참석 못하신 분들을 위해서 중요한 부분을 다시 말씀드리면, 칼 바르트는 인간이 신을 바라볼 때, 신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있다고 했지요. 신이 구체화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체화된 것이 언약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뭘 따라요? “나는 신을 믿는다. 좀 잘 믿어보자. 신 안에는 우리를 용서하는 예수님이 들어 있구나.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움직였지? 아, 언약대로 행하시는 구나. 그러면 나는 신을 믿고, 예수님 믿고, 예수님이 언약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나는 구원 받는다.” 라는 노선. 이 노선은 잘못된 노선입니다.
이게 모든 신학과 철학의 잘못된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생각 안 한 거예요? 나는 죄에 갇혀있다는 생각은 안하고, 뭔가 거기 있음을 생각 못하고, 내가 이야기하면 신에게 도달되는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이것을 알았어요.
방향이 언약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신의 입장에 서서 일하실 때는, 만약에 인간에서 출발해서 신이 되고, 신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죄인임이 안 드러나지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도 알고 언약을 아는데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게 뭐가 나빠요. 이게 무슨 죕니까?
그런데 진짜 살아계신 언약이 진짜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여기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고 했지요. 이 사건에 바로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라는 계시고, 또 하나는 성경책이라는 계시고, 또 하나는 이것이 선포될 때 계시가 되는데, 이 세 가지는 부닥칠 때 사건으로만 계시되기 때문에 만약에 예수님이 진짜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안 부닥치면 그 사람은 계시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자입니다. 계속 자기는 신을 믿고 예수를 믿고 언약을 믿다가 지옥 가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이냐? “하나님도 알고 예수도 알고 언약의 십자가도 아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이렇게 되어버리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정락원 목사님 글 봤지요? “목사한테 잘하면 10점. 십일조 하면 10점.” 그런 식으로 점수를 올려서 마치 내신 성적 유지하듯이 해요. 지금 교회가.
이것이 2000년 기독교 역사, 신학이 이런 점에서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또 물어요. “목사님, 지금 2009년인데 2015년에 새로운 신학이 나온다면 지금 목사님보다 더 뛰어난 신학이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이 사람은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무슨 노선을 유지하는 거예요? ‘인간에 의해서 점점 더 나은 신학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인데, 그래서 개혁주의는 이단입니다.
계속 이 노선을, 인간의 괜찮은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알아서 하나님 쪽에서 움직이지 우리가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안 움직입니까? 그건 아니죠. 우리는 계속해서 움직이죠.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구조와 새로운 세계관이 나오잖아요. 이것을 ‘알랑 바디우’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황이 주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상황의 구조가 주체를 만든다.’고 했어요. 무지하게 어려운 이야기지요? 이 말을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한다고 해서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고 상황의 구조가 나로 하여금 생각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로잡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구조에 사로잡혀 있는데, 내가 자꾸 생각하고, 내가 변명을 하게 되면 우리가 또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내니까 이게 나의 엉터리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 주체를 하나님의 구조가 ‘너는 죄야!’ 하고 때려 부술 때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능력이고 계시가 되는 겁니다.
이제 조금 감이 옵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에스겔에서 움직이는 바퀴 달린 천사를, 그것도 집합체로. 다시 설명하면 천사가 날개가 이렇게 있는데 앞에는 사람, 우측은 소, 좌측은 사자, 뒤에는 독수리 모양. 이 연합체로서 이것이 하늘의 보좌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이 에스겔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퀴 안에 또 바퀴가 있으니까 움직이는 것이죠. 무엇 때문에 움직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죠. 그러면 사람들의 움직임은 졸지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에 천사의 복합체는 뭘 대체하는 겁니까?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될 기능을 이 복합체가 대체하지요. 왜? 이스라엘은 죄인으로 저주를 받아야 하니까.
그러면 이 네 가지 기능이 천사가 한다는 말은 신약 시대에 보면 이 네 가지 기능을 누가 하신단 말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하시지요. 그러면 에스겔 1장의 내막은 이제 풀립니다.
에스겔 1장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죄 지은 이스라엘(검은 색으로 합니다)이 있고, 그 이스라엘이 만든 죄 많은 성전이 있는데, 여기에 구조가 ‘뭔가 거기 있음’을 아무것도 없었는데 에스겔 1장에서 나타나지요. 뭐가 나타납니까? 군대의 소리.
뭔가 없었는데 여기에 갑자기 윤곽이 잡히면서 형체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났고 무지개가 떴고 그 밑에 천사의 복합체가 나타났고 많은 물소리가 들리지요. 그러면 결국은 이 시커먼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없는 하나님의 구조가 뭐로 변형이 됩니까? 천사들의 천지로 변형이 되지요.
그렇다면 졸지에 이스라엘은 죄가 되고, 이쪽은 거룩이 됩니다. 이제 어느 쪽이 움직여요? 거룩 쪽이 움직여서 이스라엘이 미처 해내지 못한 성전의 완성을 이쪽에서 해 내잖아요. 그렇다면 이 천사들이 에스겔 당시의 상황의 구조를 만듭니다.
‘상황’과 ‘상황의 구조’가 어떻게 다릅니까? ‘상황’이라는 것은, 구조 없이 그냥 와버리면 단편적으로 모래알처럼 깨져서 “아, 이런 일이 있네. 어제는 또 다른 일이 있었는데” 이처럼 단편적으로 끊어져서 오지만, ‘상황의 구조’라는 것은 “아, 어제 일, 오늘 일 모든 것이 일관되게 어떤 맥락을 가지고 오는구나.” 이것이 상황의 구조입니다.
그냥 ‘상황’은 일시적으로 왔다가 가버리는 것이지만, ‘상황의 구조’로 오면 그 구조가 완성될 때까지 주의 움직임이 포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의 구조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이 네 가지 기능을 하실 천사자리에 누가 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천사의 기능으로 실체를 드러내지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온 세상천지는 예수님 세계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예수님 오기 전이니까 네 가지의 상을 가지고 있는 천사 복합체의 세상으로 에스겔이 돌변합니다. 그러면 제가 에스겔 1장에서 하고 싶은 말은 뭔가? 이렇게 된 이상은 우리는 ‘뭔가 있다.’는 것. 오늘날 우리가 구원 받는데 뭔가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움직일 때도 사실은 성도를 둘러 싼 상황의 구조가 움직이면 우리는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대전 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어요. 벌통이 있는데 그 통을 건드리면 뒤에 뭐가 따라오지요? 벌들이 따라오지요. 이게 구조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 하나만 잡으려고 하는데 뒤에 와락 따라오잖아요. 우리는 예수만 믿으려고 하는데 뒤에 성령의 은사가 와락 따라오지요.
나는 교회 와서 예수만 믿고 천당 가려고 했는데, 막상 예수 믿고 보니까 내가 희생해야 되고,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그런 은사가 줄줄이 따라올 때 그것은 상황이 아니고 상황의 구조에 해당됩니다. 이미 우리는 그 상황의 구조 안에 들어가 있고, 그 구조가 움직이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에 비행기를 탔다면, 비행기 안에서는 그냥 육지처럼 걸어 다니고 했는데 갑자기 어지럽고 멀미가 나요. 왜 그렇습니까?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니까(구조가 뚝 떨어지니까) 중력의 차이 때문에 멀미가 나지요. 그처럼 우리는 내 하는 일이 잘 안되고, 일이 꼬이면 그 잘못을 누구한테 책임 묻습니까? 내가 잘못했지요. 그러나 사실을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죄인은 죄책감을 갖지 마세요. 어떤 경우에도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인데 의인 되려면 죄책감을 가지세요. 그런데 의인 될 가능성이 없어요. 없는데 무슨 죄책감을 갖습니까? 뭘 해도 죄인인데. 그러면 멀미나고 일이 꼬이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고 지금 상황의 구조가 낯선 상황이 돌아가는데 그 상황에 같이 돌아가니까 어지러운 거예요.
좀 쉬었다 합시다.
(2009. 12. 3. 14:1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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