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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묻고답하기예레미야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

이름 : 관리자(IP:124.59.86.6)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

야고보서의 자유의 율법과 12지파 이스라엘

(약 1:25, 개역)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2:12, 개역)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9강-렘11장14-17(기도안들어주시는하나님)-jer091202.hwp

어제 수요예배 설교 중에 광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광야의 의미는 살수 없는 땅이다. 그 살 수 없는 땅에 이스라엘을 집어 넣으신다.
또 그 속에서 도저히 살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율법까지 주어진다.

그리고 우상이라는 개념과 여호와의 차이성도 설명이 되었다.
결국 12지파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는 우상과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광야 속에서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신과 겨루어 싸워 이긴자들이다.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는 우상은 그 근원의 뿌리까지 밝혀지고 박살이 나도록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주체가 아니라 이스라엘 배후에 있는 여호와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본인들은 모른다.

그저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들의 근원인 땅에서 붕 떴을 뿐인 땅의 근원에서 짤렸을 뿐인데 말이다. 땅의 출저인 양식도 못 먹을 뿐인데 말이다. 오로지 하늘의 출저인 만나만을 광야에서 죽도록 먹도록 되어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자기를 위한 양식인줄 알고 꿀 같이 달았다. 그러나 인간 곧 이스라엘 조차에서 마저도 해석 될 수 없는 만나(이것이 무엇인가?)는 인간들의 본능인 그 적응성과 흡착성(흡수 빨아 들어서 모방창조성)에 도리어 거부감이 드는 양식이 된다. 육을 죽이는 양식이요 쓴나물이요 박한 음식이 된다. 자기를 위한 양식의 영역을 도리어 짤려야만 하는 양식을 말해주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곧 낮추심의 양식이다.

광야에서 주어지는 율법은 곧 낮추심(심판이다. 육을 죽이는 성령의 소욕이다.)

바로 자유케 하는 율법이란 낮추겠다는 취지이다. 지키라는 취지로 들리는 자들에게는 도리어 율법을 통해서 지킨 자아를 자랑하도록 입이 건지러워서 못 견디도록 했다. 말씀을 지키면 골치 아프다. 말씀 보다 말씀을 지킨 자신을 내세우도록 되어 있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을 앞장세우고 자신은 늘 뒤로 빠져 버리는 누락성을 성령의 인도로 보여주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성령의 소욕 보다 육의 소욕으로 말씀을 지킨 건전한 자신과 그런 자신에게서 도출된 건전한 신학을 앞장세우는 악마의 짖을 아주 당연한 듯이 주장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 정도로 육의 소욕을 드러낸다. 이것이 수요설교에서 우상이라고 표현 했다.

자기를 위한 예수, 자기 교회, 자기 가정, 자기 국가, 자기 사적인 영역을 위한 여호와는 우상이다.

그들은 분명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며 전통만을 이어온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우상화 한다.

여호와를 우상화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우상화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설명 불가 이다.

오직 그 상대적인 활동 곧 율법 외에 한 의가 개입할 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율법 외에 한 의가 무엇인가? 십자가의 피이다. 언약이다.

언약 만이 (십자가의 피 만이)
정통을 잇고 있다는 이스라엘 곧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스라엘에게 그 차이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감염 된 채로 말이다. 병든 자에게만이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인간의 믿음에서 출발은 우상의 여호와와 언약의 여호와의 구분을 알 길이 없다. 눈 뜬 장님이기 떄문이다.)

병든 놈에게 아무리 거룩한 율법을 때려 부어도 그 죄인에게는 오히려 건강한 척, 오히려 소경 아닌척만 하는 위선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릇 자체를 깨어버린다는 것이 자유케 함이다. 그릇을 유지하면서 아무리 부어본들 소용없다. 그것이 바로 처음자리 그 근원의 자리이다. 광야란 그 근원의 자리를 따져 묻는 것이다. 땅이 근원인지, 근원이 하늘인지?)

(요 9:24, 개역)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요 9:25, 개역)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 9:26, 개역)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요 9:27, 개역)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요 9:28, 개역)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요 9:29, 개역)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요 9:30, 개역)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요 9:31, 개역)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요 9:32, 개역)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 9:33, 개역)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 9:34,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 9:35, 개역)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 9:36,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개역)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바로 그런 육의 소욕에 자유케 하는 율법은 상대적인 대조성을 보여준다.

우상 숭배자 곧 육의 소욕의 대표자, 그것도 여호와 신앙의 전통을 잇는자인 유대인 바리새인과

방금 따끈 따끈한 막져낸 찐빵처럼 눈먼 자를 자유케 한 은혜의 해(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자에게 주어진), 구원의 날(새 해 처음 날)을 부어준 그 창조 앞에서

실로암 소경은 눈 뜨기 싫어도, 아니 날 때부터 소경이라서 눈 뜨는 방법도 눈 깜는 방법 조차도 모르고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날 때부터 소경인 자신을 눈 뜨게한 유일하게 우상 아닌 분을 (모두다 우상에게 빠져 있음을 앎 = 죄인 아닌 길만 찾아다니는 속물들이 된 거룩을 자기에게 억지로 옷 입히는 유대인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인 곧 우상숭배자들)

유일하게 실로암 소경만이 우상 아닌 분을 만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소경을 통해서 모든 인간을 소경 만들어 버리신다.

누가 봐도 가장 악한 자 곧 악마(귀신)가 씌여진 자를 통해서
도리어 전혀 귀신 씌인적 없는 자들을 악마 씌였다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밝혀 내신다.
곧 인자다. 인자는 반드시 이 세상으로부터 악마다 라는 소리는 듣는 분이다.
그리고 그 인자는 도리어 이 땅에 속한 자들이 도리어 악마임을 증거하신다.
살인해서 살인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살인자 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자유케 하는 율법증거이다.
산상수훈은 바로 이 땅이 악하다 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지키는 자들이 이 땅이 악하다 라고 증거하는 산상수훈을 지킴으로써 이 땅이 악하다는 증거를 희석시키고 방해하는 노릇을 하는 우상숭배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성화론자들의 트레이드 마크 산상수훈은 그래서 더더욱 자신들을 가리우는 가리개로 사용된다. 발가벗기는 자유케 하는 산상수훈을 도리어 더더욱 겹겹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은폐하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사 곧 말씀을 직접 다룬다고 하는 자들이 신명기 말씀의 큰 계명 곧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하는 성경말씀으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이 지킨 말씀의 영역을 내세울 때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악한 유대인을 곧 살인마임을 밝혀 내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장 악마처럼 여기는
교회(성전=자아) 건드리는 자(누구든지)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마귀 자식임을 밝혀내시는 비유를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다.
자유란 갇힘(포로됨, 억눌림, 눈먼 어두움, 사슬에 매임)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끊어짐도 보여주는 교체작업을 보여주어야 한다.
갇힌자가 보여줄수 없다.
갇힌자를 통해서 외부에서 작용된 운동력인 능력이다.

여기에 반드시 조작된 자유도 포함되어서 밝혀져야 한다.
자유인척, 소경 아닌척, 거룩한 척, 의인인척, 등등

그리고 자유란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악하다 라는 증거에 매진한다.

이것이 바로 인자다.
그리고 그 인자의 영을 받은 자는

인자의 USB처럼 12지파 이스라엘은 자유케 하는 복음으로 인해 이 땅을 가르는 여호와의 전쟁 곧 십자가의 전쟁에 중간에 낑긴 두 영의 세계를 밝혀내는 선지자의 영을 받아 그 창조(소멸)을 목격하는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새이스라엘은 전쟁의 주체자가 될 수 없다.
도리어 누가 전쟁의 주체자인가 라는 것을 외치는 증거인이다.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라는 말만 외칠 뿐이다.

[세상]이 뭔지? 그 근원과 출처를 알게됨을 당할 뿐이다.
[죄]가 뭔지? 그 근원과 출처를 알게됨을 당할 뿐이다. 실로암 소경 이야기를 보면 죄에 대해서 성경박사들이 죄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인자 앞에서는 도리어 자신 자체가 죄 덩어리임을 알지 못하는 이상 아무리 죄에 대한 신학연구가 산더미처럼 쌓여도 소용없는 것이다. 차라리 처음난자 실로암 소경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의 대답은 딱 하나다.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 난 모르나 나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인자다 라는 대답 뿐이다. 그 인자가 바로 세상을 악하다 라는 규정으로 다가오는 자유다.

자유란 인자 앞에서 모든 자유를 포기 당함이다. 심지어 예정 신학으로 구축한 자유의지 따위로 자유라고 빡빡 우기는 그 자유도 삭제 당하는 소멸이 바로 창조주의 자유다.

광야에서만 태어난 이스라엘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자유자에게서 태어난 자유자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우상에게서 그 차이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야고보서에서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은 바로 십자가이다.
광야에서만 태어난 구약 이스라엘이듯이,
십자가라는 도저히 구원 될 수 없는 버림
그 버림 속에서 태어난 자가 새 이스라엘이다.
12지파 새 이스라엘은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인 십자가 곧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그릇,
십자가를 담은 그릇으로써 철저하게 매인바 된다.

자유는커녕 눈꼽만치도 에누리 없는 얽매인바 된 자유가 박탈 당한 조롱거리요 미끼요 고래싸움에 등터져야할 새우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다.

두 세계의 근원과 출처를 원치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로잡힌바 되어 보여줄 수밖에 없는 구속 곧 자유를 보여주게 된다.

자신의 자유가 아닌 자유자인 인자를 보여주기 위해 철저하게 사적인 것을 종말을 맞이한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12지파 이스라엘인 종말의 집단무리이다.

이제 사적인 영역은 끝났습니다 라고 외치는 자들인 종말 무리이다.

묵시 무리이다.

그들의 출처는 선배인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이듯이(죽음의 땅)
이제 새이스라엘의 출처는 십자가 라는 저주 속에서 태어난 새피조물이다.(사망의 문)

야고보서 1장은 출처가 어디인가를 말해 준다. 광야라는 십자가(온전한 인내)임을 그 반대인 [시험=자기 챙기기]과의 차이나는 설명으로 보여준다.

2장은 처음자리, 첫사랑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해진 그 믿음이 바로 사랑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행해졌는가?

믿음의 개입이다. (마치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에서 죽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살리는 구원이 되는가? 이것은 믿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예를 들어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는 믿음, 기생 라합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말장난이 아닌 실상이다.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의 두 가지 예는

첫째로 육이라는 땅의 출처의 단절성이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다.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추구하는 자신이 단절 되어야 한다.
불가능 하다. 그래서 믿음이 외부에서 개입된다. 곧 미래에서 믿음 자체이신 예수님의 개입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 자신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완성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미래에서 소급된 예수님의 저주 받으심의 제물을 보게 되는 실상을 격게 된다.
제물 된 행함을 직접 보고 깜짝 놀라게 된 것이다. 제물 되신 행함이 개입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바로 이 미래에서 소급되는 믿음의 행함이라는 연결 고리를 보지 못하는 자는
아브라함 자체에서 또는 아브라함의 영역에서(하나님도 포함)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운운하게 되니, 자기자신에게도 적용하여서 자신의 영역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추구할려고 또 그렇게 사기치는 설교를 할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둘째로 육의 단절성으로 인한 영의 개입이다. 영이란 환경이 아니다.

주변의 환경을 끌어 모아서 재료로 삼아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만들어 낼수 없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땅에서는 도저히 그 근원을 밝혀낼수 없는 비밀이다.) 도리어 그런 재료들을(신앙이니 신학이니 성전이니) 악하고 불순한 재료임을 밝혀 당함을 당하는 사건이 십자가임을 그 십자가에 일체 양보 없음을 사도바울은 바로 로마서에서 나오는 행함과 믿음의 차이로 증거한다. 바울 자신이 그 악한 불순 재료를 사용해 왔음을 눈이 날라감으로써 비로소 보게 된다. 그랬을때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임을 알게 된다. 이사야 또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재료로 삼아서 주 앞에서 나아갔던 것이 도리어 똥덩어리를 거룩자 앞에서 거룩하다고 내놓은 그런 악한 짖을 한 망할자임을 보게 된 것이다. 차라리 실로암 소경처럼 또는 성전에 두 사람(바리새인,세리) 중에 세리처럼 죄를 더러운 죄를 들고와서 고쳐달라고 하는 것이(눅 18장) 솔직한 참이스라엘이다(처음자리 곧 고아 과부 나그네, 무능자). 다윗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깨끗한 짖은커녕 도리어 더러운 짖을 하게 되는 아무리 깨끗한 짖을 할려고 해도 여호와의 사랑 때문에 할 수가 없고 도리어 더러운 짖을 하게된 자신의 근원을 비로소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처음자리인 이스라엘의 자리에
누가 저런 더러운 실패자 망한자 저주받은자들의 숨겨진 보호자인가를 보여주는 뭔가를 어깨에 맨 USB이다.(휴대폰이나 MP3기 에 추가로 달아놓은 USB처럼)

기생라합 또한 똑같다. 육의 단절성 곧 국가집단의 단절성인 자기민족 자기국가 자기친족의 배신이요 배반이요 단절성이다.

그렇다고 자기 혼자 딸랑 자기 사적인 영역을 추구하는 국적포기가 아니라,
국적포기 보다 더 악하고 더러운 짖인 국가 자체를 팔아넘기고 민족 자체를 소멸케 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에게, 언약의 여호와 곧 믿음에게 접붙여버린다.

그 민족 그 국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행함이 있는 믿음에 의해서 고발당할 판국이다.
그 교회가 그 성전이 그 유대인이 참 이스라엘인지 가짜 이스라엘인지 접붙여 보면 안다.
도금인지 정금인지 긁어보면 알 듯이 사람을 깨뜨려보면 그 속에 약속이 담겨 있으면 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깨뜨려 보니 그 껍질 아브라함과 기생라합이 중요한게 아니라, 약속이 들어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 출처가 땅에서 양식을 공급받는자인지
하늘에서 양식을 공급받는자인지
그래서 광야로 출발하는 이스라엘인지 땅을 근원으로 출현 된자인지 아는 것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그 나사렛이라는 이미 땅에서 실패자로 정해진 곳에서 구원이 나는 것이 바로 광야성을 보여준다. 십자가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랑을 말해준다.

그 나사렛 출신이 인자로써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잉여의 기준이 된다.

복과 저주를 가르는 나누는 기준이 된다.
참이스라엘이란 복과 저주를 나누는 자가 된다.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복과 저주가 나누어지듯이

인자가 심판주로써 복과 저주가 나누어 진다.
그 인자의 활동은 지금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십자가의 의미가 활동하고 있다.

인자가 복과 저주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 위해서
복과 저주에 중간에 낑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 것이다.

가난한 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저주를 퍼붓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룟유다인 법의 저주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돌진하는 예수님

그 중간에 낑겨버린 향유를 깨뜨려 비싼 향유를 땅에 허비해 버리는 창녀

마치 지혜란 믿음이란 솔로몬의 법의 칼 앞에서
옳습니다. 마땅히 죽여야만 합니다 라는 법과
안됩니다.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하는 긍휼

이 둘 사이에 낑겨버린 이름도 없고 창녀의 자식이고 나사렛 출신이고 태어날때부터 저주받은 이 아이를 기준으로 해서 복과 저주가 나누어지는 창조가 벌어지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벌어지는 것이다. 출신성분도 절망이요 저주인데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그 버리심에 뛰어든다. 마치 다수가 옳다 라는 그 정치적인 분위기에 혼자 손가락질 받는 길로 욕먹을 짖만 골라서 하듯이 말이다. 바로 이런 이 두 양쪽 세계와 그 근원의 출처를 밝혀내는 것이다.

절망 죽음 질투 소멸 멸망 절망 저주 버림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보다 명료하고 확실한게 없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이다. 제대로 만났기에 확실하고 실상이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희망 생명 사랑 창조 부흥 소망 축복 선택

바로 이런 그리심산(축복산)에 올라간 자들 보다 더 모호하고 의문스럽고 미흡하기 짝이 없고 누가 과연 축복 받은자인가 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죽여 놓고 정작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아 놓은 살인자로 태어난 주제에 축복보다 구원 보다 선택 보다 모호한 것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자유가 개입하는 것이다. 율법 외에 한 의가 개입한다.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인 십자가의 저주가 개입하는 것이다. 그 저주 그 육의 연결고리 내가 대신 짊어지마 라는 행함이 덮쳐진다. 그 믿음의 운동력이 덮쳐진다.(참이스라엘이란 모호한 생명을 어깨에 매고 가르는 자들이 아니라, 실상인 죽음을 어깨에 매고 가르는 자들이다.)

결국 인간들의 가짜 믿음을 고정화 된 믿음을 (우상의 출처자리)
진짜 믿음은 악마 취급당하면서 온다는 것이다. (광야의 자리, 절망의 자리)

전혀 믿음 스럽지 않은 믿음이 두 사람의 믿음으로 증거된 예이다.
이런 믿음이라면 인간들은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일체 없다.
(이 두 사람의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를 흉내내고자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실행이 되어도 근처도 간자는 단 한명도 없다. 아예 실시 할려는 생각조차도 악마적임을 모른다.)

진짜 믿음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전혀 믿을 수 없는 짖만 골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USB로 삼은 믿음의 주체요 실상이다.

이 세상을 악하다 라고 규정하는 믿음이다.(기생라함처럼 전체 세상을, 모든 인간을, 전체 국가를, 전체 우상을 악하다 라고 외치는 것이다. 전체 교회를 말이다. 이 전체성 ...... )

그런 믿음은
세상도 긍정 못하고 이스라엘 본인들도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믿음이다.
(자기 자신 조차도 미워한다. 과거의 자아 현재의 자아 미래의 자아 곧 전체 자아를 전부 미워하는 믿음이 외부에서 개입 되었다.)

왜냐? 낮추기 때문이고 목을 부러뜨리기 때문이다.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도저히 그 앞에서 입을 열수 없는 잠잠함이다.

찍소리 못하는 쓰레기 취급 당하는 것이다. 왜? 거룩이 제대로 앞에 왔기에 내가 깨작 깨작 거룩을 조작하는 그런 짖 앞에서 진짜 거룩은 모두다 불태워버려도 남을 소멸하는 불을 만난 것이다.

도저히 낮아지지 않기에 대신 낮춰진 십자가의 죽음이다.
도저히 목이 곧아서 안 뿌라 지기에 대신 목을 부러뜨린 십자가의 꺽으심이다.

입을 열수가 없다. 그 죽음 앞에서

그런데 이제 그 죽음을 마음껏 떠들고 다닐수 있도록 십자가의 영을 허락 하셨다.
믿음이다. 인간의 믿음에서 도저히 나올수 없는 예수님의 믿음으로 주어진 성령의 선물이다.

매일 매일 뜯어보는 즐거움 뿐이다. 나도 삭제하고 너도 삭제하고 교회도 삭제하고 이스라엘도 삭제 당하는 즐거움 뿐이다.
지워 져도 지워져도 매일 매일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
매일 날마다 주안에서 죽고 매일 날마다 주안에서 다시 산다.

죽음의 문을 여는 자가 생명의 문을 여는 자이다.
악마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는 자는 메시야의 실체를 보여줄 수 없다.

우상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자는 참이스라엘이 아니다.
광야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자는 새이스라엘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하자를 지키는 자가 아닌 찬양자 그 자체로 태어난 이스라엘이다. 바로 야고보서 3장의 의미이다.

이미 찬양자로써 태어났기에 이미 승리했음을 미완료된 전쟁은 없음을 보여주는 전쟁이 바로 이스라엘만이 목격하는 전쟁이다. 야고보서 4장의 의미이다.

이 전쟁만이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의 전쟁이다. 야고보서 5장

죽음의 문을 활짝 여는 전쟁이다. 더 이상 무덤이 없는 전쟁이다.

자유케 하는 율법 곧 자유케 하는 거룩한 전쟁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갈라지는 실상이다.

이스라엘이 가는 곳 마다 소동이 벌어진다. 자유와 갇혔음이 드러난다.

자유자와 종이 드러난다.

정작 종은 자유자인척 노릇하고 있고,
자유자는 갇혀있는 모습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비록 죽은자 같으나 산자인 이 자유케 하는 율법은
십자가로써 그 내막이 실상으로 드러난다.

어두 컴컴한 안개로 가리워진 소경의 눈꺼플이
십자가의 사랑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소경이 눈 뜨게 되고 (사막에 샘이 솟고)
도리어 본다고 하는 자는 소경이 되는 희한한 일들이 벌어진다. (풍요의 땅이 황폐케 된다)
역전이다. 눈치 챌 수 있는 역전이면 역전이 아니다. 갚을 수 있는 은혜라면 은혜가 아니다. 보답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사랑이 아니다. 거래다.
무조건 대상의 자리에 놓일 뿐이다. 그래서 중깐에 낑긴 선지자 자리에 놓이게 될 뿐이다.
모든 자가 선지자 되게 해 달라는 모세의 기도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선지자는 결국 중간에 낑긴 자들이다.

바로 그 희한한 일의 출처가
광야에서 태어난 언약이 담겨진 그릇으로 인해 가시화 된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태어난 제대로 또렷하게 보여주는 자들이다.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없음]의 광야에서 출처가 된 자가 [있음]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음]의 땅에서 태어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모호한) 곧 성전 교회 우상화된 예수 우상화된 하나님 곧 우상을 주장하던 자가 [없음]의 세계를 드러낸다.

[땅에 있는 것을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없는 것은 없다. 다만 있는 것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라고 저들은 주장한다. 그렇기에 땅에 속한 자는 무슨 소리 인지 모른다. 십자가 조차도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개역)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개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개역)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개역)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3, 개역)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개역)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개역)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 가시화를 위해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중간에 낑긴 두 세계를 보여주는 그릇이 된 영광에 참예된 집단이다.

인자 되신 예수님은 자유는커녕 철저하게 버린바 된 종이 되셨다.

(빌 2:1, 개역)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 2:2, 개역)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 2:3, 개역)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4, 개역)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관리자(IP:124.♡.86.6)

09-12-03 14:25

기도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1장 14-17절)

2009/12/02 18:10 in 우리교회/수요설교

기도 안 들으시는 하나님

2009년 12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4-17

(렘 11:14, 개역)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렘 11:15, 개역)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렘 11:16, 개역)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렘 11:17, 개역)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기도 중지 명령이 선지자에게 떨어졌습니다. 기도를 중지하겠다는 것은 구출될 필요없는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기도는 구출과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로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구출된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관한 내용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겠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에게 구원의 인도함을 받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기도 중지 명령을 내리므로서, 즉 기도하지 않는 선지자로서 예레미야를 내세우므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왜 선지자가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기도가 중지되어야 될 이유는, 17절에 나옵니다. 바알 신에게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가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알종교를 섬기는 자들이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 민족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안다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도데체 무슨 연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대신하여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싶어했을까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바알 종교에 대해서 관심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들 자신들은 우상숭배자들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라고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잘 안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얼마든지 바알 종교로 넘어간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잘 섬기고 있다는 그 여호와 하나님은 실은 바알신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알신을 아는데 있어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부터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바알신을 언급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서 바알신에 대해서 알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바알신과 무관한 자라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알신부터 먼저 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게 되면 사람들은 걱정부터 먼저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해도 자신들이 바알신을 믿고 있음이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의 우상의 특징은 항상 ‘자기를 위하여 섬기는 신’이라는 겁니다. 명칭이 어떤 신이 되었든지 간에 사람이 자기 잘되라고 믿는 신은 모조리 다 우상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등장하게 한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여기 USB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쪽 컴퓨터에 들어있는 정도 내용을 다른 컴퓨터로 옮길 때 그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작은 부품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서 일단 광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광야란 말이 땅이지 실은 인간의 몸을 먹여살릴 만한 조건이 되지 못하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에 빠져나온 애굽이나 앞으로 이스라엘이 정착해야 될 가나안 지방에서 우상을 섬기는 동네였습니다. 특히 가나안 지역의 10족속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이미 땅에 정착한 민족입니다. 하지만 애굽에서 나와서 오도 갈데 없는 이스라엘은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황입니다.

두 발을 디딜 땅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먹여 살린 것은 땅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 하늘에게 떨어진 만나라는 기이한 양식이었습니다. 신명기 8:3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만나는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 내려온 언약의 떡이었습니다. 즉 바알을 비롯한 세상의 신들은 인간의 몸이 우선이요 그 몸을 입히고 먹이기 위해 대자연의 웅대함과 신비함을 향하여 부르짓는 신인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은, 하나님께서 실시하실 언약이 우선이었고 그 언약의 전달체, 혹은 운반자로서 늘 만들어져야 하는 ‘언약의 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죽음의 땅인 광야를 필히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죽음의 자리’에서 인간은 ‘자기를 위한 신을 찾는 그 죄’를 볼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6:9-10에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라는 겁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은 새언약의 전달체로서의 ‘새언약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은 그 몸이 만들어지는 세계관도 같이 붙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몸으로 오셨으면 그분에게는 묵시적 세계가 함께 있는 겁니다. 인간의 몸이 그 몸을 만들어낸 세계관을 말해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말해주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야채나 음식을 먹이신 것이 아니라 낯선 양식인 만나를 주시면서, 곧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몸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세상의 우상들은 땅의 순환성, 곧 ‘봄→여름→가을→겨울→봄’의 덕으로 자신의 불멸을 꿈꾸면 신을 향하여 복과 영원한 구원을 염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닮고 자연의 신비로움을 담은 눈에 보이는 신을 섬기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입니다.

신명기 6:5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란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만으로 관계가 성사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 사랑 관계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행음을 했다’고 했습니다.

간음이란 이미 사랑관계 성립되었을 때나 성립하는 내용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기 백성을 ‘행음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직 사랑으로 구원하심을 분명히 하신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자 자기 목숨 잃으면 아무 소용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9강-렘11장14-17(기도안들어주시는하나님)-jer091202.hwp

20091202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예례미야11:14-17(기도를 안들어주시는 하나님)

2009-12-03 12:44:54 이름 : 오용익

20091202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1장 14-17절/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
(이 근호목사)

(기도)

이 시간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20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다면 불안해하거나 초조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이 되고 불신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께서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도록 해 달라고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인간적인 안목으로 살다보니 우리 하나님 믿는 것도 인간적으로 인위적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믿어야 될 텐데 믿음보다 저희들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걱정하고 염려했습니다. 이제는 영적 세계 안에서 주님의 지시 받고 주님의 명령받고 주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염려 없이 초조감 없이 순종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예레미야 11장 14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69페이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예레미야 11:1-17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부하기를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기도중단을 지시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서 자기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출 된 적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기도, 메시아의 기도는 구출용입니다. 모세가 기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구원하지 않겠다. 내버린 자식으로 간주하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같은 교인들끼리 ‘집사님, 절 좀 위해서 기도해주세요.’라고 할 때 그 말을 우리는 이렇게 들어야 됩니다. ‘저를 구원해 주세요. 구원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교회 잘 안 나오는 사람에게 ‘제가 성도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라고 했는데 ‘기도하지 마세요.’라고 나온다면 ‘저는 구원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구원되는 것에 관심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은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느냐 하면,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기도를 통해서 저쪽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해 달라.’는 겁니다.

만약에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우리 자식들에게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뜻입니다. 왜 그런 식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렇게 기도하는 본인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는 것, 구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출 시켜 줄때만 구출된다는 것을 자기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그게 구원의 원칙이기 때문에 그 구원의 원칙이 동일하게 자식들에게도 또 아는 사람에게도 주께서 주시기를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주께서 뻔히 아시기 때문에, 평소에 예레미야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지시하느냐 하면, ‘예례미아야, 그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자, 이것을 통해서 예례미야는 하나님과 한 편이었고 그 전에 예례미야가 기도한 것은 응답이 될 수 있는 기도를 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해 봤자 응답이 되지도 않는 기도 같으면 주께서 ‘예례미아야, 네 기도는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다. 하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라.’ 이렇게 방치했을 것인데 ‘예례미아야, 기도하지 말라.’는 말은 그 전에 이미 효과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그런 입장, 자리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예례미야의 기도는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메시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는 기도와 같은 효력을 사전에 예수님 오기 전에 미리 보여주는 거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말라는 그 조건이 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겨났다는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짓을 했기에 선지자의 기도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중단해야 되는가? 그것이 오늘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한 거예요.

여기 ‘바알에게 분향했다.’ 바알에게 제사 드렸기 때문에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구약을 펼칠 때 ‘바알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 섬기라.’는 이야기를 교회들 마다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교회들마다 뭘 모르냐 하면 바알신이 어떤 신인가는 몰라요. 교인들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고 시어미도 모르고 목사도 모르고, 바알이라는 신이 무슨 신인지를 몰라요.

용어만 바알이면 다 바알 신 인줄로 알고들 있는데, 바알 신을 이야기 할 때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부터 출발해서 ‘여호와는 이런 분인데 바알신은 이렇다.’라고 여호와부터 출발해서 바알신과 비교하는 방법이 있는 반면에, 또 하나는 ‘바알신은 이런데 여호와신은 이렇다.’ 해서 바알 신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거기에 대해서 대비되는 입장에서 여호와에 대해서 이야기해줘서 바알도 알고 여호와도 같이 아는 그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호와로부터 출발해서 바알 신을 알아버리면 어떤 단점이 있느냐 하면, ‘여러분 여호와 믿지요?’ ‘예’ ‘예수 믿지요?’ ‘예’ ‘그러면 바알 신에 대해서 이제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해서 이미 자기 자신들을 여호와 잘 믿고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그걸 기정사실로 굳게 해 놓고, 그 다음에 바알 신을 이야기하면서 ‘바알신은 부처 믿는 사람이고 바알신은 조상제사 드리는 사람이고 이방인들이 믿는 신이고 ….’ 이렇게 되어 버려요.

왜 교인들이 바알 신에 대해서 모르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만 알았으면 되었지 우리가 남의 신까지 알 필요는 없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알신이 어쩌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바알 신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 버리게 되면 바알 신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면 오늘날 한국교회 이야기하는 것 하고 전부 다 똑같아요.

그리고 교회에서 하는 행세 말고 집에서 하는 행세가 바알 신을 믿는 사람들의 행세하고 똑같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이름만 예수 붙이고 여호와 붙이고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다 붙여서, ‘이 정도 하면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고 여호와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 신을 믿는 것을 보니까 세상에, 자기가 바알종교를 믿고 있는 거예요.

특히 성경에서 이방인들이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 유다사람이 바알 신을 섬긴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유다 이 사람들이 여호와에 대해서 이미 전통적으로 확고한 여호와를 믿는 민족이고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확실해져 있는 상태에서 도대체 그들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변질되었기에 바알 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달라지는가, 그 내막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아니하면 결국 한국교회는 바알 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 바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바알 신으로 기울어서 섬기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결론부터 이야기 할 게요, 그 이유가 바알 신부터 우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를 위하여, 내 주체를 위하여, 내 자아를 위하여 신을 믿고자 할 때, 그 관계는 여호와가 되든지 삼위일체가 되든지 예수가 되든지 그게 뭐가 되든지 다 바알신이 되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우상이라고 했을 때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과 대비가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있었던 거예요. 없는데서 새로 만들어 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이 탈출해야만 했던 그 애굽나라의 신과 그리고 이스라엘에 들어가야만 했던 땅의 열 족속의 신들은 전부 다 그 신들의 특징이 자기를 위하여 신을 모시고 섬기고 경배하고 분향하고 제사 드리고 예배하는 그런 신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신은 머무르는 신이 아니고 공중에 붕 뜬 신이 되어 버렸어요. 땅이 없으니까. 땅이 없어도 섬길 수 있는 신이 여호와 신입니다. 그런데 붕 떴는데 착지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바알 신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잉?

오늘날 이야기로 하면 욥처럼 재산 날아가고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종기로 뒤범벅이 되어서 도무지 이 땅에서 더 이상 아무 소망 없는, 완전히 절망적인데 그 때 비로소 섬기고 싶은 신, 섬겨야 될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나의 죽음의 자리에서만 만나는, 한쪽은 죽고 한쪽은 살고,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만나지지 않는, 바알 신을 섬기는 이 땅에서 죽음을 당했던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도 같이 이 땅에서 발 디딜 곳이 없는 절망, 어두움, 깜깜함 그 안에서만 만나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안, 예수 안’이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이트에 갔더니만 제목이 그래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얻은 예수님’이라는 사이트를 본 적이 있어요. 모든 것을 잃고 예수를 얻었으면, 자 문제 나갑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까, 모든 것을 얻었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모든 것을 얻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누가 봐도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어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죽은 자이기에 산자’라는 말을 하니까 어떤 사람의 글, 양무리인지 뭔지 하여튼, 거기서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어떻게 죽은 자가 산자냐 이 말이죠.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살았다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예수 믿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죽은 자기 때문에 산자가 된다.’는 말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나는 죽은 자나 산자다.’(고후 6:9) 이래 이야기합니다.

‘죽고 난 뒤에 살았는데 왜 자꾸 죽었다고 하느냐?’ 이래 막 공격을 해 대는 거예요. 완전히 불신앙이 들통 났어요. 그들이 얼마나 바알종교인지가 다 들춰진 거예요. 바알종교는 땅의 종교입니다. 땅의 종교에서 자기 몸도 땅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주변에 있는 땅에서 무엇을 제공하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땅을 떠날 수가 없어요. 자연과 하나가 되고 땅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고 사는 것은 땅에서 나오는 열매에서 나오는데 땅에서 나는 곡식과 열매는 시간적으로 순환구조를 가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다음에 뭐지요? 봄이잖아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다음에 또 뭡니까? 봄이지요.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되고 자식이 태어나고 죽으면 또 흙으로 되고 또 자식이 태어나고…, 마치 곡식이 흙에서 솟아 나와서 열매를 맺고 썩으면 다시 흙이 되고 다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바알종교의 특징이란 이 몸을 위하여 주변의 자연세계와 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이 몸을 위하여 예수가 계시고, 이 몸을 위하여 예수 믿어야 되고, 이 몸을 위하여 교회 와야 된다는 것, 그것 백 프로 바알종교입니다. 그걸 가지고 땅에 속한 몸, 땅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 종교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몸이 아니라 하늘의 언약이 담겨 있는, 언약의 말씀이 담겨 있는 언약의 몸으로 다시 만들어 가는 몸이 그 몸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은 땅에 속한 몸이 아니고 하늘의 언약으로 구성되어 가는 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 인자의 몸이 마치 묵시의 세계를 품고 있듯이.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그 몸을 있게 한 세계관이 붙어 있는 거예요. 몸이 가면 그 세계관이 같이 이동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몸으로 왔을 때는 하나님의 세계관이 같이 따라 온 거예요.

그걸 성령으로 만들었다 해요. 성령에 의해서 되지요. 제가 어려울 줄 알았어요.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뒤에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광야라는 것을 거치게 하는 거예요. 광야에서 양식이 뭐냐 하면 광야에서는 애굽에서 먹던 짬뽕, 자장면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먹던 음식은 일체 없고 뭘 먹느냐 하면 만나를 먹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양식은 이 몸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양식이 있어서 이 몸을 위해서 양식이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명기 8장에 보면 ‘네가 너희에게 만나를 주는 것은 너희를 낮추기 위함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밥 먹으면서 자기 몸을 낮춘다는…, 어떻게 배가 부른데 맘이 낮추어 집니까? 하나의 원칙적인 구조를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의 바알 종교는 내 몸이 먼저 있고 몸을 위하여 신이 존재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을 담는 그러한 기구, 용기, 그릇으로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을 담기 위해서 우리 몸이 있는 거예요. 여기 달린 이걸 뭐라고 합니까? USB지요. 이게 뭐냐 하면 컴퓨터 정보를 담아서 다른 컴퓨터에 집어넣으면 이쪽에 있던 그 정보내용이 저쪽 컴퓨터에 고스란히 옮겨가는 거예요. 이 USB가 바로 정보의 몸이라면 우리가 언약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는 USB에요. 우리가 USB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땅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이 필요한 거예요. 땅이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나를 살려주는 겁니다. 자장면이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십자가의 새 언약이 지금 죽어도 나를 살게 하는 거예요.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목사노릇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 최 일규 집사님이 그런 질문했지요. ‘장로가 뭡니까?’ 장로는 순교자에요. USB. 요한계시록의 24장로의 특징이 뭐냐? 순교자들입니다. 목 베인 영혼들이에요. ‘고참이 먼저 복음 위해서 죽어야죠.’ 그 말입니다. 그게 장로라는 거예요. ‘복음이 그리도 좋다면 먼저 죽으이소.’ 그게 장로에요. 그게 목사다 이 말이지요.

분명히 죽어 있는데 안에 있는 언약 때문에, USB, 안에 들어 있는 그 언약이라는 정보 때문에 산자가 되는 겁니다. 분명히 죄를 짓는데 안에 있는 USB, 언약 때문에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바알 종교는 신의 종류가 여러 가지에요. 어떤 지역에 갈 때마다 신의 종류, 하나님의 종류가 다르다는 말이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이 신 섬기는 게 그렇잖아요. 이사 가는 날 달력에 표시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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