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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c자유게시판[신학]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c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c

(강의:이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내려왔다. 이게 하늘 쪽이고, 이게 땅 쪽이죠. 그렇다면 여기 지금 칼 바르트가 이 자리에 앉아있다 하고 칼 바르트가 강의한다고 할 때 칼 바르트는 우리들에게 무척 답답해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게 뭐냐 하면, 이렇게 그냥 모든 것이 기존 있고 뚫고 내려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에 낮아지심으로 내려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뭉게구름처럼 다시 다 생겨나는 거예요.

생겨난 것은 여기 악마도 있고, 교회도 있고, 인간의 역사도 있고, 묵시도 있고, 성령도 있고, 계시도 있고, 성전 있다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과정 속에서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스도가 무엇이며, 역사가 무엇이며, 성도의 삶이 무엇이며, 소망이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이며, 겸손이 무엇이며, 그런 게 뭐냐 하는, 그런 것은 반드시 예수님이 내려왔다 올라가는 그것과 연관을 시켜서 해명이 돼야 되고, 연관을 시켜서 해석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칼 바르트가 이 자리에 있다면 우리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위에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이 과정은 생각 안 하고 교회가 무엇입니까, 역사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지옥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날 떼놓고 질문을 하니까 칼 바르트는 답답해서 올라갔다 내려가는 이것과 자꾸 연관을 시켜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늘나라 개념, 성전개념, 심지어 삼위일체 개념, 어떤 개념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상태에서 이것을 품고 올라가던 내려가던 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럴 때 칼 바르트신학을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그 절차에서 뭉게구름처럼 새롭게 가스가 나오듯이 뭔가 새로운 개념들이 언약개념 나오고 생성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자’ 이 말은 예수님이 벌인 모든 것도 그리스도 중심인 것을 믿고 감사하자 이 말입니다.

죄, 시간, 성령, 구원, 선택, 예정, 승리, 율법 모든 개념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사랑, 경배, 찬양, 교회, 천국, 언약, 삼위일체, 하나님, 칭의, 악마, 세상 모든 개념도 주 개념에서 나온다. 이 개념과 떨어져서 설명하면 안 되는 거죠. 인간이란 것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죠. 인간하면 그냥 인간이란 없고 인간은 신이 아니잖아요. 인간은 항상 기억력에 의해서 역사를 만들어내죠.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면서 예수님 나름대로 묵시적 안목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면, 인간은 수평적으로 인간 나름대로 역사를 만들어내요.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은 누구시며, 은혜가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이며, 죄가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인간 나름대로 자기중심인 거예요. 자기가 자기중심으로 계시가 무엇이며, 아까 첫째 시간에 단군설화 이야기했죠. 집단계시. 자기중심으로 이걸 또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내니까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어떤 싸움이냐 하면, 예수님은 묵시중심인데 인간은 역사중심이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에 대해서 한 마디로 말해서 철이 없죠. 철이 없어서 모든 것이 자기 역사중심으로 생각하니까 이걸 바꾸는 거예요.

묵시가 와서 역사 속에 사건을 일으키면 이 인간은 그 다음부터는 자기중심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묵시가 자기 안에 살아있는 예수님 중심의 인간으로 바뀔 때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 새로운 피조물이 어떻게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5번 봅시다. [계명과 성도의 삶]

방금 인간은 역사중심인 것을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자유다.” 참 이 말이 어려워요. 그런데 이 계명을 볼 때 인간은 누구 자유를 생각합니까? 자기 자유. 나는 저 계명을 지킬 수도 있고, 어길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는 의미로 그 계명을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의 역사 속에 집어넣어 버리는 겁니다. 집어넣는 것을 칼 바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 있는 율법을 뭐로 이동시키느냐? 다시 예수님의 품으로, 하나님의 자유로 이동시키면서 그 와중에서 인간은 인간의 자리가 죄의 자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덥석 물었는데 ‘법 지키라고? 지키지, 뭐. 저것 지키면 복 받는다고? 복 받지 뭐.’라고 덥석 말씀을 물었는데 물어놓고 보니까 그게 계명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이 우리가 몰랐던 내가 죄의 자리에서 타고난 태생,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유죠. 계명을 지키겠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유. 그것을 죄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

“자유는 명령법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관계 자체를 제시할 뿐이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명령이 아니고 오직 관계를 한다. 이 관계는 특정 공간에서 이해되는데 그 공간이라 하는 것은 수직적인 공간이 수평적으로 인식하는 역사 속에 수직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침범해서 사건화 시키면 여기서 하나님의 자유의 참여가 일어나죠.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듣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다.”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죠. 유대인들은 법을 볼 때 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로 해석했죠. 문자로 해석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가미되지만, 이걸 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가 가미되죠.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17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나오죠.

그러니까 모든 성경해석은 반드시 뭐로 귀결돼야 됩니까? 해석하면 성령이 주는 자유, 하나님의 자유가 나오는 식으로 해석을 해야 제대로 해석이 됐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걸 지키겠다고 나서면 이걸 지키겠다는 말은 나는 안 지킬 자유도 있을 것 아닙니까. 내가 지키겠다는 말은 내가 마음먹음에 따라서 안 지킬 수도 있다가 되죠. 그럼 그건 하나님의 자유가 아니고 내 선택권이고 내 권한이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바로 율법을 문자로 해석하는 게 된다 이 말이죠.

모든 성경해석은 그런 문자로 해석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주려고 생명주려고 이 말씀 주셨다는 하나님과 너 관계는 떨어진 관계가 아니고 사랑관계라는 하나님 관계를 알려주기 위한 말씀이었다. 그게 법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봅시다.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듣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다.” 생명의 영의 법이니까 성경의 어느 구절과 연관돼있습니까? 로마서 8장이죠. 잘 아시는. 너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기 때문에 종답게 사는 것은 법에 매이고, 아들답게 사는 것은 자유고. 그게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율법에 매인 자는 율법의 자녀가 따로 있고, 성령에 속한 사람은 자유자니, 그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지라. 갈라디아서 4장에 의하면 그게 두 언약 아닙니까.

그래서 칼 바르트는 그 언약이 과거에는 율법의 구약의 모든 해석을 다 해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문서설이라든지 비평가들한테는 기분 나쁘죠. 왜? 비평가를 하겠다고 문서설 가위로 쪼개고 풀로 붙이는 모든 작업이 결국 해답도 모르면서 해답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유에 불과한 거예요. 이미 해답이 언약인데, 언약으로 바라봐서 언약 나오면 되는데 그걸 모르고 이게 어느 문서에 갖다 붙이면 맞는가, 이건 저자가 누구냐? 백날 해석해봐야 그건 올바른 해석이 안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자유 영역이다.” 하나님의 자유 영역은 누가 만듭니까? 박태환이 헤엄칠 때 앞에 헤엄치면서 물결을 가르게 되면 순간적으로 빈 공간이 생기는데 그 공간은 수영장 직원이 삽으로 퍼서 하는 겁니까, 박태환이 손으로 팔로 벌려서 만든 거예요? 박태환이 만들잖아요. 자기 앞길을. 그 일을 누가 한단 말입니까? 박태환 같은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죄 많은 세상에 박태환처럼 헤엄쳐 와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일을 바로 예수님이 하신단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펄럭이는 모든 물결 하나하나가 결국 성경에 있는 문자, 말씀이다. 그래서 계시가 예수님이고, 계시가 말씀이고, 계시가 선포된 말씀이고. 어떤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그건 목사가 전한 것이 아니고 배후에 예수님께서 물결을 일으켜요. 그걸 사건이다. 계속해서 말씀 사건이 벌어지면서 우리는 나의 자유보다도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함을 얻는 겁니다.

근데 그 자유에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비하와 인간의 올리우심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박태환처럼 한바퀴 돌고 터치하고 또 본 자기 집으로 하늘나라로 되돌아가죠.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화해의 역사다.” 화해가 뭡니까? 서로 이제는 원수지간이 아닌 것, 너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

칼 바르트가 이 이야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는데, 기억이 안 나는데.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 인간은 알 수 없는 공포에 있어요. 요새 독일에서 암 다음으로 사망률이 높은 게 뭐냐?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이 왜 생기느냐 하면, 알 수 없는 공포에요. 현대인이. 어떤 경찰서장은 우울증으로 자살했어요. 서울의 어떤 경찰서장이. 경찰서장은 자살했는데 밑에 있는 하위직 경사, 경위는 신나게 보람 있게 살거든요. 57살 먹은 내년에 퇴직하는 경위님은 트로트 가수 되어서 노래 부르고 있다고. 음주운전 하지 말고~

보세요. 도대체 그 사람이 왜 자살합니까? 알 수 없는 공포에요.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고 버티지만 결국은 알 수 없는 공포가 있는 거예요. 그 알 수 없는 공포가 하나님과 내가 화해되었다는 사실을 안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가 주장하는 자기가 중심이 된 세상을 계속 고집하다보니까 내 바깥에서 이미 하나님이 예수님과 더불어서 화해했다는 것을 안 듣다보니까 계속 자기 공포에서 자살로 끝나는 겁니다.

이차대전 끝났는데 필리핀 동굴에서 아직도 안 나오고 있는 일본군 포로가 있어요. 미쳤어요. 이미 다 끝났는데 그냥 동굴에서 나오면 되는데, 행여 지금 나오면 잡히지 않을까, 나오면 사형당하지 않을까 혼자 공상하고 알 수 없는 공포에요. 바깥에 나오면 이미 화해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다 됐는데 그 화해의 자리에 참석 못하고 자기 자리에 있는 거예요.

자기 자리라는 것은 자신의 자유가 있다. 믿을까, 말까? 이건 무슨 자유입니까? 그건 자기 자유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사건이 터지지 않으니까 만날 내가 믿을까, 말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될까? 이것은 바로 아까 자기 수양이죠. 그러니까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런 어두움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박달나무, 밝음. 또 하나의 밝음의 세상이 있다고 하는 것이 단군의 신화, 무교신화에 또 거기 있다는. 그러니 이론상 받아놓으면 그것도 무당돼요.

그래서 인간이 노리는 것은 화해의 역사다. “인간들은 하나님 아래 있기를 원치 않았다. 즉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돼버리면 자신의 자유를 잃어버리죠. “그래서 인간들이 노리는 것은 교만의 칭의요, 태만한 성화요” 이 말 좋지요. 칭의인데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의로움. 태만한 성화요. 이건 뭐냐 하면, 예수님처럼 고생 안 해도 쉽게, 쉽게 지킬 수 있는 방법. 성경말씀을 나 편한대로 지키면서 거룩은 거룩대로 챙기는 데서 오는 거룩함.

‘목사님 이 정도하면 저도 거룩됐지요?’ 자기 편한대로 사는. ‘저는 소주 세 병에서 한 병 줄였으니까 엄청난 성화된 거죠.’ 이런 것. ‘난 유행가는 안 부르지만 재즈는 부르니까 그 정도는 괜찮겠지.’ 자기가 판단하는 거예요.

“기만과 위선 속에의 소명과 사명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우리를 대신하셨다.” 이 말이 어려워요. 이 말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렵다. 심판주로서 그 다음에 뭡니까?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우리를 대신했지요. 그러면 우리한테 심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판을 대신 받은 게 아니고 심판주가 우리를 대신했다니까. 그 차이점. 우리를 대신 심판 받은 게 아니고 심판해야 될 분이 심판을 받아버린 거예요. 그러면 심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판자체가 없지요. 심판을 안 하는 게 아니고 심판자체가 사라졌다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유였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였다. 그것에 우리가 참여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벌벌 떨지 말고 자기 세계에서 우울증 걸리지 말고 바깥으로 나오란 말이죠. 예수님 세계로 오면 이미 우리는 심판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그분의 책임 하에 두셨다. 그리하여 이제 그분은 짐 지고 비난당하고 유죄판결 받은 자로서 가짜로서가 아니라 진짜로 고통을 받으신 분이다.” 그분이 진짜로 고통 받았다는 말은 우리한테 고통이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우리한테는 고통이 없는 거죠. 그런데 왜 우리가 고통을 받습니까? 이거는 우리가 고통 하는 것은 누가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직도 옛날 습성이 남아서 자기가 기대한대로 안 되면 스스로 ‘고통 받아야 돼.’라고 자기가 자기한테 고통을 주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보는 겁니다. 상당히 심리적인 것이 있지요. 특히 개고기 못 먹는 사람들.

‘이것 먹으면 맛이 없는 거야’ 생각하니까 맛이 없는 거예요. 맛이 있다고 먹으면 맛있는데 이것 먹으면 맛이 없을 거라고 짐작하고 들어가니까 맛이 없는 거예요. 다섯 번이나 시도해도 맛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예 안 먹는 거예요.

이런 일이 있으면서 우리의 자리가 누구한테 빼앗겼습니까? 예수님한테 빼앗기고 교체 당했어요. 이미 우리는 고민하고 걱정해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이미 예수님 자리에 있어요. 그걸 사도 바울은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 아까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사.

그런데 캘빈은 자리를 이야기 안 하고 자리 말고 그 위에 있는 덩치, 몸체가 내가 믿음을 가져야 하늘의 온갖 보물을 받는다. 믿음을 활용 안 하면 카드 안 긁으면, 롯데카드 안 긁으면 복을 안 받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의 자리에서 뭐가 차 올라오는가를 생각 안 하고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썩히면 저주받고, 활용하면 복 받는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바로 ‘위선된 칭의요, 태만한 성화요.’ 쉽게 말해서 자기 편한대로 산다 이 말입니다.

그분이 취하신 그 죄가, 그분이 죄를 가져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서 뭐가 빠져나갔다는 것이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도둑놈이 우리 집에 들어왔는데 뭘 가지고 나온 거예요. ‘아저씨 뭐 갖고 나와요?’ ‘뭘 갖고 나갑니다.’ ‘아저씨 뭘 갖고 나가지?’ 아저씨가 만약에 티비를 갖고 나간다면, ‘아저씨 뭐 갖고 나가요?’ ‘티비입니다.’ 집에 가보니까 티비가 없어. ‘나한테 티비가 있었지.’라고 그때 생각한다 말이죠. 도둑놈이 와서 뭘 가져가야 비로소 우리 집에 전부터 뭐가 있었는가를 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가져가니까 그전부터 예수님이 가져간 ‘죄가 우리 곁에 있었었지’라는 것을 비로소 우리가 안다 이 말이죠. 그 아는 기간이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기간이라. 성경에서 저주를 이야기하고 성경에서 징벌을 이야기하고, 죄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주께서 가져가면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우리에게서 빼내가면서 그 이야기하니까 우리는 그전부터 이런 죄가 있었음을 가져감을 통해서 ‘이런 죄가 있었어’라고 비로소 깨닫는 기간이 우리의 살아가는 평생의 기간이 됩니다.

“우리에게 죄가 용서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용서의 인식이 우리에게 죄의 인식이 되고” 그러니까 칼 바르트는 용서 받았다는 걸 통해서 우리에게 비로소 이런 죄가 있었구나하는 죄 인식이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없는데서. 이제 물론 자기 인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식,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죄로부터 자유롭기에 ‘이제는 순종 안 합니다.’ 불순종이 있을 수가 없지요. 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때부터 순종하는데 무슨 순종하느냐 하면, 죄가 뭔지를 알아가는 순종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피할 이유가 없다니까. 왜냐? 이미 죄를 가져갔기 때문에 가져간 죄에 대해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그걸 싫어한다거나 마다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이미 가져갔으니까. 내 말 표현이 많이 모자라죠. 무슨 뜻인지 표현하고 싶은데.

이삿짐센터가 와서 이삿짐 물건을 다 가져간 이상은 옛날 이삿짐이 있었던 그 자리에 대해서 하나하나 헤아리는 순종을 우리가 불순종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전에는 이런 죄가 있었구나, 전에는 이런 죄가 있었구나.’ 그걸 하나하나 지적하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는 즐거움이죠.

성경 봅시다. 말로 하면 안 되고 성경 봐야 돼. 고린도후서 8장 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말이 재밌죠. 자원하는데 어떻게 한다고요? 힘에 지나도록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건 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철거대상이니까 화물차에 이삿짐센터에 놓여 있잖아요. 뒤에 나옵니다. 우리는 이삿짐센터에 놓여서 떠나는 과정이라고. 우리 몸 자체가. 떠나면서 자기가 떠나는 느낌, ‘화물차 속도가 시속 얼마에요?’ 이 속도감을 느끼는 순종을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시원하다 이 말입니다. ‘떠나버리소. 세상에서 떠나니 기분 좋습니다.’라는 순종을 왜 못하느냐 이 말입니다.

순종 못한다는 말은 안 떠나고 옛날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니까 이게 순종이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 주님이 운전사로 떠나잖아요. 그럼 트럭 뒷자리에 타고 있으면 바람에 날리잖아요. 그 시원함, 뭔가 내가 이 자리에서 떠나서 죄의 자리에서 떠나서 천국에 가고 있다는 이 시원함이 있으면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고 그 다음에 화물차 뒷자리에다 주께 맡기고 우리 몸을 먼저 주께 맡기고 주와 함께 떠나는 즐거움을 왜 우리가 만끽하지 못하느냐 이 말이에요. 만끽하면 되죠. 속도감 있으니까 시원하니까. ‘빠라바라빠라밤~’ 이것 왜 하는데요? 떠나는 기쁨 아닙니까. 이동하는 기쁨이잖아요. 즐겁잖아요.

자꾸 열아홉 살 때 어떻고, 자꾸 과거 이야기 하지 말자는 겁니다. 뒤에 나오는데 미리 볼까요. “그분과 함께 나도” 6페이지 끝에 보면 나와요. 7페이지에 보면, 과거는 끝장났다. “과거는 끝장났기 때문에 낯선 오늘이 들이닥치는데 그 속에서 성도는 미래를 보장받는다.” 이삿짐 뒷좌석에 탄 거예요. 이삿짐과 더불어서. “그리스도의 역사 속을 질주하는 것이다.” 이삿짐과 더불어서 화물차 뒤에 타면 내 곁에 있는 게 뭡니까? ‘죄’죠. 지금 주께서 죄를 갖고 가는데 죄 속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내가 앉아 있잖아요. 그러면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은 죄가 되잖아요.

재미있는 것은 그 죄와 더불어서 나도 몽땅 지금 여기서 철거당하고 있다는 그 머리카락 헤아리는 그 재미, 이걸 그리스도의 역사 속을 질주하는 것이다.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로 질주하는 것이요, 운동하는 것이고. 이걸 바르트는 ‘도중에 있는 자’ 이건 뭡니까? 떠나고 있고, 목적이 있는 자, 여행 중에 있는 자. 성경대로 하면 객이요, 나그네.

그리고 6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불가피하게 그분과 함께 나도 같이 간다. 6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신앙이란 이처럼 예수님에게서 생긴 것이다.” 이게 캘빈주의와 다르죠. 캘빈주의는 신앙의 주체가 본인인데 비해서 칼 바르트는 신앙의 주체가 예수님이죠. 왜? 우리는 나 중심의 역사고 주님은 주님 중심의 묵시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신앙과 만나서 충돌을 일으켰다.” 아까 제가 그림 그렸지요. 인간 그리고, 얼굴 그리고, 코 그리고 뭘 쳐다봅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야 하나님을 알 건데 언약중심이구나. 언약의 내용은 그리스도구나. 하고 우리는 이 노선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가슴에 부딪치니까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예수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보고 뭐라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사람 일을 생각하는구나.’

사람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 주시면 알 건데. 언약 있구나. 언약 믿어야지. 예수님 믿어야지. 베드로가 예수님 믿어야지 했지요. 그런데 그게 뭐가 돼요? 사람 일이에요. 진짜 하나님 일은 그런 베드로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떠나지 않아야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가면 천국에 못 갑니다. 사탄이 방해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뿐만 아니고 사탄까지 장악하기 때문에 베드로를 지옥에 넘어뜨리는 사탄의 역사까지 예수님이 기도하셔서 그걸 다 방해를 제거하시고 마귀 안에 있는 베드로까지 건져내시는 일까지 누구 몫이다, 누구 숙제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단 말이죠. 그런 것을 믿는 것, 그 예수님의 액션을 믿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에서 소망이 나오죠.

“부활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으심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들 없이는 계시자가 않게 되었다. 이는 곧 ‘예수께서 사신다’는 데는 불가피하게 ‘그분과 함께 나도’라는 것이 따라간다.” 그런데 여기서 칼 바르트는 그걸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만 성도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집, 주님의 집이 되기 때문에 자기 집을 찾아서 그리스도가 임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7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성도의 운명이 돌이킬 수가 없는 이유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엎어진 물이라서 다시 주어 담을 수가 없어요. 일어난 사건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성만찬을 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주께서 오실 때까지 되풀이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을 세상과 함께 정죄 받지 않게 한다. 지난주 낮 설교에 했죠.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올리우심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과 ‘장차’를 자신을 위해 활짝 열어놓으셨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예수님의 낮추심과 올리심을 사건화 시켜버린 것이 십자가고, 이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지금과 장차를 이제는 인간의 역사 속에 담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묵시로 만든 그 노선 속에다가 ‘이미와 아직’을 담아버렸다 이 말이죠.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의 판단이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라는 이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서 죽이고 살리고를 새삼스럽게 이게 어려운데, 누구를 구원하고, 구원 안 하고를 새삼스럽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잘 보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받고, 구원 안 받고는 구원받을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누가 결정한다?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해버렸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렸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캘빈신학, 개혁주의신학에서는 구원받고 안 받고는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자기가 예수 안 믿으면 구원 못 받게 돼요. 그러면 치매 걸린 사람들 어떻게 돼요? 소용없지요.

칼 바르트신학에서는 모든 구원의 사건은 우리 인간이 관여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일으킨 사건, 십자가 죽음에서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누구를 구원하고, 구원 안 하고 하는 문제는 이미 주님의 소관으로 넘어가 버렸고. 기존의 신학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안 받는 게 돼요. 그러니까 기존의 신학에서는 사건을 누가 일으켜야 됩니까? 자기가 사건을 일으켜야 구원받는데 자기가 만약에 치매 걸린다든지, 아프다든지 이럴 경우, 복음을 못 들을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사건을 일으킬 이유가 없잖아요.

제가 오늘 아침에 친구한테 전화해서 ‘내가 보내준 책 봤나?’ 하니까 ‘요새 바빠서 책도 못 봤어.’ [십자가를 아십니까] 책을 사서 보내줘도 회사 일이 바빠서 볼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 자유를 너무너무 많이 발휘해.

“산상수훈이 전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옛 피조물의 삶을 건전하게 또 가치 있게 지속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옛 피조물의 삶을 건전하게 바꾸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움직이는 삶이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그전까지 주체가 누굽니까? 나의 자리, 내가 주체가 되었던 것이 지금은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해야 그게 피조물이다.

그렇다면 뭘 알아야 돼요? 내가 주체가 된 삶은 종결돼야 되고 이미 끝나야 되는데 개혁주의에선 어떻게 합니까? 주체가 예수님 해놓고 주체는 실제로 누가 합니까? 내가 주체인 줄 알고 닦달내기는 우리 자신에게 자꾸 자기가 다짐을 하고 결심하고 자기가 자신을 격려해야 될 그런 한계점을 드러냅니다. 만일 자기 스스로 격려 못하면 ‘아이고, 힘 빠져서 이제 신앙생활 못 하겠다.’ 주저앉아요. 언제는 천당에 힘내서 갑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가지 자기가 힘내서 가는 게 아니거든요.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교회란 결코 그리스도인이 이루지 못한 것” 재미있는 이야기죠. 교회가 뭐냐? 그리스도인이 이뤄내지 못한 게 교회다. 그러니까 교회를 보고 우리가 이걸 이뤘다고 본다면 그건 엉뚱한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갓바위지. 교회가 아니고 종교단체죠, 친목단체고. 진짜 교회는 항상 교회를 보면서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 그것이 생각될 때 그것이 교회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해내지 못한 것.

그래서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이 교회가 존재합니까?’라고 사건을 물어야 되죠. 어떻게 성장합니까가 아니라 누가 이렇게 교회를 사건을 일으켜서 만들었습니까? 물을 문제다. 그래서 391페이지, 교재에, “교회 공동체 자신을 정당하고자 하면 교회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불법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자기가 있는 교회를 우리 교회는 괜찮고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면 가장 나쁜 방식으로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을 가지고 복음을 몰아낸다 이 말입니다. 칼 바르트가 392페이지에서. 교회법이란 율법을 가지고 뭘 몰아내요? 복음을 쫓아내요. 내 말 안 들으면 나가라. 목사들이라든지 장로들이 하는 일 아닙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바르트는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성도에게는 영원히 남아 있는 본래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신앙도 희망도 남는다. 그 까닭은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이 대목을 이렇게 풀이해요. 신앙도 희망도 영원하다. 왜? 사랑이 남기 때문에 소망도 남게 되고, 희망도 남게 된다고 보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마지막 구절 설명할 때.

그러면 남은 시간에 20분 동안, 칼 바르트의 문제점이 뭐냐? 1번은 생략합시다. 1번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2. 바르트는 피 중심이 아니다] 이 대목. 바르트는 피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존 중심의 언약을 펼치다보니까 실존 중심이니까.

창세기 9장 잠깐 볼까요. 제가 설명보다도. 창세기 9장 13절에 무지개가 뜨지요. 여러분 다 아시는 겁니다. 무지개가 뜰 때 하나님과 언약한다.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 무지개 볼 때마다 내 언약을 기억하라. 그런데 무지개 언약이 창세기 9장 6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지상에는 뭐가 있습니까? 지상에는 피가 있고, 하늘에 무지개가 떠있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할 때 그걸 포괄적으로 두루뭉술하게 하면 그 안에 이 내용이 포함이 됩니다만 좀더 깊숙이 들어가면 예수님의 기적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병 고침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뭐가 중심이었죠? 다 이루었다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피지요. 결국 이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마저 이 언약, 피 언약, 피와 관련된 무지개 용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의 성령에 응한 대로 성령의 언약대로 주께서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피 흘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칼 바르트는 예수님의 실존 중심으로 볼 것 같으면 예수님도 실존이고, 우리 인간도 실존이 되죠.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위해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함이 된다 말이죠. 칼 바르트의 주장은. 저의 주장은 예수님은 피를 흘려버리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흘리심이 나오는 그 의, 그 예수님의 속성을 위하여 우리가 여기 동원되었다는 칼 바르트의 주장이 좀더 분명해질 수 있다 이 말이에요. 그 내막을.

만약에 피 중심이 안 돼버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행동, 낮아진 행동을 우리 실존이 그대로 모방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처럼 낮아지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럼 뭐가 빠져버려요? 가장 중요한 핵심인 예수의 피가 빠져버려요. 예수 피가 빠져버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낮아져야 구원받게 돼요. 예수님처럼 겸손해야 구원받는 게 돼버려요.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끝까지 믿어야 구원받는 게 돼버립니다.

피가 주는 효력 자체, 그것은 하나님이 정했거든요. 하나님이 정하신 피로서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인간의 실존은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피로 말미암아 구원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죠. 피 흘린다는 지혜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깊은 것은 오직 성령에서만 나오는 지혜라 했습니다. 성령의 지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하여 우리를 구원한다는 게 아니라 피에 있어요.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거예요.

로마서 5장 봅시다. 로마서 5장 9절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분명히 피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피가 나오는 것을 바르트는 피라는 자리에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낮아지심, 예수님의 겸손 이걸 집어넣으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내 말은.

그러면 예수님의 실존과 우리 실존이 만나야 되잖아요. 저는 우린 만나지 말자는 거예요. 만나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우리가 예수님 만나서 어떻게 순종하겠습니다. 이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만나기 이전부터 피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한테 끌어당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을 깨닫게 해서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건져냄을 받았다는 것.

이렇게 돼버리면 신명기의 신접한 여인을 죽여라 할 때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지 우리가 무당 죽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성경의 모든 것을 우리가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항상 그 안에서 이런 행동을 실천에 옮겨도 구원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면 치매가 걸리든 살아가면서 뭘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 죽으심에서 나오는 그 피와 살, 피 흘리심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단지 만약에 예수님처럼 순종하라 한다면 그러면 아까처럼 순종 안 해도 구원받지요? 모든 게 예가 되니까 순종 안 할 랍니다. 자꾸 실존 가지고 나댈 수가 있거든요. 뭘 해도 죄인데 뭐 때문에 행동합니까? 뭘 해도 죄라면서요? 아무것도 안 할 랍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피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걸 순종할까, 말까도 아니고 그 이전 문제에요. 피를 알았으니까 순종해야지. 이것도 아니에요. 그냥 피로 구원받지 피를 알고 순종해서 구원받는 건 아니다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왜냐하면 신학을 하다보면 피 중심의 신학이 하나도 없어요. 바르트 이것도 보면 참 대단하고 진짜 똑똑하고. 그러면 우리도 바르트 같은 지식을 알면 구원받습니까? 그게 아니고 피로 구원받는다니까요. 우리가 바르트 공부해서 지식을 바르트처럼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지금도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걸 바르트는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대립자란 이야기가 나오는데 8페이지에 보면, 대립자 용어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바르트는 ‘대립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예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런 논리에서 필히 ‘말씀 사건의 우발성과 주체 정립의 연관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바르트가 그전까지 철학은 아직까지 주체철학이 발달이 안 됐기 때문에 그냥 대립자로 하면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우리 안에 계시 만드는 기계 있잖아요. 그것 좀 설명해볼까요. 우리가 주체 안에 있으면 주체 안에는 어떤 계시가 와도 나의 계시로 만드는 기계가 있다 했습니다. 그 기계가 이 주체가 타인의 주체, 타인의 욕망에 환상을 만들어내요. 마치 안 지켜도 지킨 것처럼 타인의 욕망을 내가 이미 가진 것처럼 착각을 하는 이런 기계장치가 라캉이란 사람이 설명했는데

인간은 자꾸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새로운 타인의 욕망이 오면 환상이 깨지고 또 새로운 환상으로 이끌어져요. 이끌어진다는 말은 이것 탔다가 다른 걸 탔다가. ‘드럼 치는 게 좋아’ 하고 드럼 치다가 기타 치는 걸 보고 ‘기타가 더 낫다’ 옮겨 타는 것, 이게 우리 평생 동안 이 짓하고 있다고. 특히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 리델보스할 때 리델보스 최고다. 바르트 왔따다. 부르너, 부르너 최고다. 실링하면 실링보다 더 뛰어난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만날 옮겨 타죠.

이게 바로 우리 주체가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옮겨 타는 그 점에서 인간의 실존 중심이 문제 있다는 걸 지적하는 거예요. 실존 중심으로 되면 안 되고, 누구 본받아선 안 되고 피로 구원받지 우리가 괜찮을 실존을 정립한다고 해서 그것이 괜찮은 실존으로 오래 가지 않는다 말입니다. 새로운 타인의 욕망을 만나면 그것도 분해될 건데 바르트는 그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이 책 88페이지에 보면, 사랑과 자유에 대해서 분석적으로 보는데 성경은 사랑과 자유가 아니에요. 공의와 사랑이에요. 이게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11장 22절.

그래서 바르트는 속성을 할 때 사랑과 자유라는 두 속성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지옥이라는 것, 지옥의 당위성을 자꾸 놓치고 있어요. 여기 중간에 보면, “바르트는 악마의 실제적인 위세 꺾임을 강조하고 無性 혹은 ‘불가능한 것의 실존가능성, 다만 비현실적인 것의 실존 가능성, 다만 무력한 것의 독자적인 힘’ 정도로 표현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실존 가치의 우월성과 최종 승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고 반드시 지옥이 있어줘야 천국이 있어요. 지옥과 천국은 같이 있어줘야 됩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한쪽, 일방적인 예수님의 승리로 끝내기 때문에 지옥을 마치 지옥이 있으면 주님이 승리 안 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보이고 있어요. 강한 지옥이 주님의 승리를 취소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지옥이 있는 것이 주님에게는 흠이 되는 것처럼 승리에 뭔가 오점이 있는 것처럼 돼버려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구원돼야 되는데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니까 마치 예수님께서 구원하려다, 구원하려다 하다가 구원 안 받으니까 내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나 마치 주님이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그건 오산이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반드시 지옥에 갈 사람들은 오히려 지옥 갈 사람이 천국 오는 것을 밀어내죠. 지옥 가줘. 적극적인 예수님의 언약적인 일들을 십자가 부활에서 그걸 찾아내지 못했어요. 칼 바르트가. 성경 전체에서 찾아내야 하는데 찾아내지 못한 겁니다.

이게 바르트의 약점이고 그 다음에 개혁주의들이 바르트를 비난하는 것은 약점은 아니고, 개혁주의자들이 바르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을 제가 쓴 거예요. 바르트를 마치 이단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뭐냐? “선다는 것은 ‘넘어진’ 후에나 비로소 시작한다.”(p138)는 바르트의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바르트는 말합니다. 사람이 구원받았다 하는 것은 처음부터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미 넘어졌다는 것을 계속 그 내용을 품고 있을 때나 선 자가 된다. ‘나는 구원받았어요’ 이 말은 다른 말로 이런 말을 해야 돼요.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입니다’를 계속 되풀이해야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걸 모르고 개혁주의자들은 바르트는 모든 것을 다 긍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 가능성도 배제하고 죄 지은 것도 지적 안 하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죄에 대해서 많이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는 말하기를 죄라는 것을 지적하고 나쁜 것을 지적해서 이것은 이미 넘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만 하는 이야기지 불신자한테는 이 말 해도 못 알아듣는다 이 말입니다. 성경은 신자에게만 알아듣도록 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오해는 개혁주의가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바르트는 죄도 지적 안 하고 긍정적인 것만 이야기하더라. 그렇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끝났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이 십자가의 지혜를 이렇게 허락하셨사오니 피 흘리기 위해서 고생하시고 죽었던 예수님의 은혜 줄 자에서 은혜 주심과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 주시는 그 과정을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구특강20091121c.hwp (57.0K), Down: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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